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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극상황에 대응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태도

 

 

우리는 일상에 있어서 수많은 예측할 수 없거나 다루기 힘든 상황들을 직면한다. 삶에서 발생하는 어떻게 할지 모르는 모호함, 끊임없는 위기와 문제상황, 유한성에 대한 위협과 힘듬은 단순히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안전에 대한 근본적인 터전의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정체성, 삶의 궁극적인 의미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삶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자극상황들은 그 자체를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문제의 핵심은 이것을 어떻게 맞이하고 응답하는가에 따라 그 자극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삶의 결과도 달라진다. 현대 물리학이 실재에 대한 본성을 입자와 파동의 동시성 그리고 관찰자가 관찰대상과 분리될 수 없고 인식하는 것이 인식대상의 본성에 영향을 준다는 중요한 통찰은 결국 자극 상황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식한다는 행위 그 자체의 중요성이 실재의 본성에 영향을 준다는 통찰을 가져다준다.

 

사실 우리의 삶에서는 배움이라는 것이 과정보다는 내용에, 자기 인식보다는 인식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온 까닭에 우리는 인식한다는 것 혹은 의식한다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대게 간과한다. 실재가 어떠하든지 -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인식 대상이 물질, 사건, 관계, 상황 그 무엇이든 간에 - 그 실재를 맞이하는 나의 인식 혹은 의식의 작동이 어떠한가에 대해, 혹은 주목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그 실재의 본성과 결과를 자기충족의 예언의 법칙처럼 작동시킨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다.

 

그러나 실재 -의식에 포착되어 생생하게 주목을 받는 관심어린 그 무엇-가 전적으로 날것 그 자체의 것으로 내 의식에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프레임 속에서 이미 선택되어지고 해석되어지며 보는 것의 본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자극상황- 문제상황 혹은 갈등상황 -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인 인식논리가 우리 삶에 깊게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는 이를 생존/비난논리와 연결/수용논리라고 부르고자 한다.

 

 

1. 위험앞에서 생존논리 vs 연결논리

 

인간이 자연의 위험 앞에 수만 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위험에 대처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이른바 뱀의 대응논리라고 부르는 그야말로 이른바 생존논리에 근거한 본능적인 자기보호의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다. 이는 자신의 주변에 다가오는 사물이나 동물이 위험한 대상인지 아니면 먹잇감인지에 따라 공격하기(Fight), 피해서 사라지기(Flight) 혹은 가만히 숨죽여 있기(Frozen)의 세 F의 대응논리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자기보존의 논리라 부를 수 있다. 이건 우리의 대응방식에 매우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대응방식이다. 문제는 이 대응방식이 생존의 촉수를 발휘하여 타자를 오직 위협이나 먹이의 두 관점에서 실재를 보게 만들고 이것이 우리 문화에는 옳고 그름 혹은 좋고 싫음이라는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면서 우리의 관계의 문제를 다루는 시야에 까지 영향을 미쳐 왔다는 점이다. 여기에 전쟁의 타당성에 대한 성향과 태도를 키우게 된다.

 

두 번째는 자신의 연약성을 돌보고 위험에 대한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일치와 관계를 중요시하는 공감능력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공동체 속에서 확보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보존의 논리를 넘어서 연결의 논리에 의해 관계맺음을 통해 힘과 지혜를 얻고 공동체를 통해 안전을 확보해 나가는 셈이다. 생존논리가 주변환경에 대한 물리적, 신체적 차원에서의 반응에 기초한다면 연결논리는 관계로 표현되는 심리적, 사상적, 영적인 차원에서 주된 역할을 한다. 일치와 공감, 상호 의존과 공동의 문제해결, 협력과 능력부여 등이 사회적 진화와 복지를 향한 주된 에너지가 되어왔던 것이다.

 

문제는 홍수, 가뭄, 산불, 혹은 맹수 등에 직면해서 생을 영위하기 위해 작동하는 생존논리가 우리의 관계문제와 정서적 실재에 적용되면서 발생한다. 연결논리가 잊혀지고 생존논리가 우선적으로 작동되면서 지배체제 형성, 강제로서의 힘의 타당성, 질서와 안전을 위한 국가폭력의 당위성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한걸음 나아가 길들여지지 않는 타자는 먹이감이나 위협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고 쳐 없애는 데 아무런 윤리적 숙고를 요청하지 않는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통제의 요구와 그 효율성에 대한 아무런 의심없는 수용이다.

 

그러나 실제로 위험과 위기에 직면했을 때 생존논리보다 연결논리가 더 지성적이고- 상황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또한 더 효율적이기도 하다- 필요에 따른 적절한 조처가 있다는 점에서. 위기, 모호하고 복잡한 문제,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위협에 대해 그 어느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보존의 논리보다는 환경과 상황 그리고 전체 구성원의 노력과 지혜를 고려하는 연결논리는 보다 더 해결의 가능성을 높인다. 연결을 통해 상호작용하는 과정속에서 집단지성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삶의 어쩔 수 없는 실패와 유한성 앞에서 자신의 상실감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삶의 활력을 찾아내는 것은 바로 생존논리가 아닌 연결논리이다. 죽음에 직면함에 있어서 자식의 성장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 공공선을 위한 사회변화에 대한 투신 등을 통해 삶의 의미와 활력을 얻는 것이 연결논리의 작동에서 기인한다. 자신을 넘어 생태적 타자, 사회적 타자에 연결되고, 궁극적 실재-, , , 일자-에 연결됨을 추구하면서 죽음을 초월하는 의미를 확인한다.

 

 

2. 고통앞에서 비난 논리 vs 수용 논리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서도 이를 직면하는 두 가지의 태도가 존재한다. 하나는 비난의 논리이다. 이는 단순한 공식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나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이걸 누구 탓으로 돌리면 될까? 그래 다 네 탓이야. 네가 나뻐. 이건 네 잘못이야!”

 

어쩌면 너무나 단순해서 유치할 정도로 여겨지는 이 내면적 태도는 그러나 실상 애들의 것이 아닌 성인 대부분이 쉽게 그리고 깊이 뿌리박혀 있는 논리이자, 대중적으로 보편화된 고통에 대한 선이해(先理解)이다.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워=네 잘못이라는 비난논리는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는 아무런 의심없이 통용되는 일상경험이다.

 

내가 기분이 나쁘고 짜증이 나. 왜냐하면 네가 지각했잤아. 네가 나뻐.”

내가 분통이 터지네. 왜냐하면 네가 해야만 하는 00을 안했잖아. 네 잘못으로 내 기분이 엉망이잖아.”

 

이 비난논리는 도덕적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 때 쉽사리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속죄양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통해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 고대종교에서 신의 진노를 달래기 위한 살아있는 동물이나 사람을 바치는 번제나 죄를 써서 붙여 속죄양을 사막이나 황야에로 내쫓는 의식에서부터 천안함이나 세월호 침몰에서 보는 북한의 소행이나 악한 선장과 승무원에 이르기까지 비난의 대상은 언제나 찾아지고 이를 통해 분노의 화살받이를 만들어 위로와 안정을 찾게 한다. 우리는 이런 방식을 통해 내 자신이 고통을 받아 문제가 된 나 자신이 이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고 상대가 문제라고 투사함으로써 내 자신이 괜찮아지고 내 주목을 상대로 바꿀 수 있고, 보이지 않는 나의 불편한 영역에서 보이는 상대로 바뀌면서 사는 이유와 열정을 얻게 된다. 이젠 날 괴롭히지 않고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괴로움을 보지 않고 대용품으로- 반대급부로 상대를 괴롭히면 되는 것이다. 내 고통이 수용되고 상대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고통을 부과, 투사, 전가함으로써 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하나는 수용의 논리이다. 이를 단순한 공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1) 고통을 느낀다

2) 고통을 받아들인다

3) 고통에 자비롭게 응답한다

4) 고통에 적절한 행동으로 돌본다.

 

이른바 불교의 4성제인 고집멸도의 수행방식에 의거한 알아차림과 자비롭기의 변형된 실천 혹은 기독교의 진실(‘사건의 본성과 진실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관찰하기’)과 은총(‘사랑으로 연결되기’)의 성육화라는 수행방식과 유사하다. 받아들임의 논리는 판단, 저항, 배제, 영향주기, 책임전가를 선택하지 않고, 부드럽게 환대하며 사랑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삶이 펼쳐져 나간다.

 

고통에 저항하지 않고 고통에 증인이 되는 방식으로 고통의 한올한올을 다 느끼며, 이를 예민하게 주목하면서 연결되어 있을 때 자유와 운명이 서로 조유하면서 뭔가 오래되었지만 또한 새로운, 그러면서도 새롭고 선한 그 무엇이 솟아 나오게 된다. 그 고통이 실상은 통찰, 영감 혹은 계시의 장(field)으로 변모한다. 새로운 각성의 변화가 생긴다.

 

수용의 논리가 비폭력 의사소통이나 조정중재 영역에 적용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변형을 가질 수 있다.

 

1) 고통으로부터 오는 자각을 알아차린다.

2) 고통으로부터 일어나는 생각의 판단쇼를 허락하며 주목한다.

3) 고통이나 자극상황에 대해 일어나는 나의 감정을 음미하며 확인한다.

4). 그 각 감정들 뒤에 있는 삶의 시원적 에너지(보통 욕구, 가치)에 접촉한다.

5) 그 시원적 에너지가 스스로 표출하는 선택을 허락한다.


여기서는 수용의 논리가 자극에 대한 인식의 처음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면탐구의 실마리로 연결하여 현상의 깊이에로 들어가, 시원적 에너지에 접촉함으로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을 맡기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억지로의 의지가 발동하지 않으며, 자발성에 기초한 에너지의 출현에 자신을 조율하면서 생명의 부름을 따라 인도하지(leading) 않고 따라가는(following) 방식에 의해 고통과 자극상황을 변혁의 기회로 전환시킨다.

 

 

3. 두 대응방식에서 교훈

 

언뜻 보기엔 내가 힘들고 괴로운 것에 있어서 그 이유는 네가 잘못해서 내가 이런 것이야라는 비난논리는 이유가 의심 없이 그럴듯하게 보인다. 사실 상대방이 지각해서 내 기분이 영 엉망인 것은 사실인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청소를 안 해서, 자식이 숙제를 안 해서 내가 기분이 나쁜 것도 사실인 듯 보여진다.

 

그러나 여기에는 실재의 작동방식에 대한 몇 가지 이해가 빠져있다.


첫째는 인과관계로서 내 감정적 상태의 결과가 상대의 행위의 원인에 의해 발생된다는 것은 이른바 로젠버그가 주장한 감정적 노예상태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면 내가 선택할 바가 없게 되고 이는 결국 상대를 바꾸기 위해 비난, 강제, 무력 등을 통해 상대를 바꾸거나 교정시키려는 공격의 동기를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이는 결국 의도와는 달리 상대방의 움츠려듬, 반박, 공격을 초래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으로 인해 나도 고통을 서로 전가하고 더욱 크게 하는 방식으로 응답하면서 원래의 자극상황은 더 큰 분리, 고통, 손상, 파괴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둘째는 자유, 변화, 성장에 대한 공간의 여지가 없게 된다. 생존과 비난의 논리는 결국 신체적 위험에서는 작동되지만 심리적 실재와 공동체내에서의 관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동된다. 분리로 이어지는 이런 논리는 삶의 실재에 대한 통찰과 이해가 아닌 두려움과 수치심의 감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비난은 결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변화는 이해를 통해 오고 자유는 자신이 수용하는 만큼 그 경계의 폭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생태적으로 모든 변화와 성장은 관계와 수용의 상호작용과 상호연결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생존과 비난의 생활방식은 그 개인, 공동체 및 국가에게 마음고생과 비효용성의 딱딱하게 굳어진 권위 시스템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락시킨다. 여기에는 활력과 창조성을 얻기 힘들게 되고 결국은 죽음에로 지향이 있게 된다

  

셋째는 우주적이고 존재론적인 생명의 자기 진화와 그 초월적 지혜의 작동에 거슬려 그 힘을 타지 못한다. 간디의 진실의 힘의 작동은 과학이자 섭리이며 마틴 루터 킹이 말한 우주의 힘은 정의로 구부러져 있다는 통찰에서 오는 영혼의 힘을 작동시킬 수가 없다. 영혼의 힘은 자신이 무언가를 행한다는 감각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우주적 자기 전개의 힘 혹은 초월적인 사랑의 힘에 자신이 통로가 되는자각을 통해 일어난다. 이 자각속에서 통렬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마음이 부서져 무력하기 보다는 마음이 열려 심금이 울리면서, 그 열린 마음을 통해 폭력과 갈등의 거대함이 주는 엔트로피의 법칙의 작동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너지의 기운과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고 참여하는 열정을 부여받는다.

 

연결과 수용은 우주의 작동원리이다. 실재하는 모든 생명은 자신을 개방하여 다른 실재들로부터의 연결을 통해 그 힘과 지혜를 이를 통해 얻는다. 따라서 실재가 펼쳐지고 생명을 얻는 자연스러운 방식에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은 포기나 희생이 아니라 개별 생명이 온 생명에, 마치 물방울이 강이나 바다에 통전되면서 얻는 더큰 에너지의 흐름속에 있듯이, 이런 수용과 연결을 통해 일어나는 갱생과 변혁으로 인해 새로운 정체성, 열정, 소명으로 이어지면서 자유와 운명이 통합되는 경지에로 들어간다. 이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반응이 아닌 매우 능동적 현존의 자세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를 받아들임속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돌파’-능동성의 현현-으로 진술한다.

 

단순히 자극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이 아니라 위협과 고통에 대한 주목하기와 전적인 환대를 통해 그 하나하나의 고통의 무게를 경험함으로서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한다. 이것은 마치 나오미 시합 나이의 시 <친절>이 주는 교훈에 일맥상통한다.

 

...........

마음속 가장 심오한 것이 친절임을 알기 전에,

또 다른 가장 심오한 것이 슬픔임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아침이면 슬픔과 더불어 깨어나야만 한다.

우리는 슬픔에 말을 걸어야만 한다. 우리 목소리가

한 올 한 올 모든 슬픔의 가닥을 담아낼 때까지

그리고 슬픔이라는 천의 크기를 다 헤아릴 때까지.

 

그러고 나면 이제 마땅한 건 친절뿐이니,

오직 친절만이 우리의 신발 끈을 묶어주고

편지를 부치고 빵을 사며 하루를 보내게 하고,

오직 친절만이 세상의 온갖 것들로부터

머리를 들어 말한다.

그대가 찾고 있던 것이 바로 나라고

그러니 내가 그대와 함께 어디나 가리라고

그림자나 친구처럼.

 

우리는 이 슬픔의 천의 크기를 다 헤아릴 때 그것이 또 다른 숭고한 새로운 길인 친절로 연결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다시금 신발 끈을 묶고 일어서서 머리를 들어 바라보고 어디나 갈 수 있다.

 

다가오는 사물이 그 무엇이든 - 위기, 도전, 문제상황 - 연결과 수용으로 환대함으로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잊거나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시합이 말하듯이 그대와 함께 어디나 가리라라고/ 그림자나 친구처럼,’ 그렇게 함께 있되 이제는 그림자이든 친구이든 어디나 갈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운 변형인 것이다. 그렇게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인해 그리고 이제는 주저앉지 않고 일어서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고통과 슬픔은 무거운 바위가 아니라 이제 그림자이든 친구로든 동행자로서의 순례의 선물이 된다.


4. 사회적 정의를 위한 연결과 수용의 논리의 말 걸기

 

연결과 수용의 논리가 적용되는 것의 일차적인 영역은 자기 내면과 일대 일의 관계에서라는 마이크로 영역(micro-levle)에서이다. 이는 비폭력 실천가인 본인이 내적 고통과 관계의 갈등상황에서 견디어 왔고 극복하게 된 경험을 통해 그 작동의 효과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특히 강제라는 힘의 논리가 작동되는 지역 사회와 국가 영역에 적용될 때, 그것은 무력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비폭력과 평화에 관한 워크숍을 하면서 한 가지 사례가 떠오른다. 참여자들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보여지는 폭력의 현상들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일으키는 감정과 태도가 무엇이며, 그 뿌리, 곧 그런 폭력의 현상들을 지탱하게 하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원인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하면서 관찰한 경험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수많은 사회적 폭력, 이를테면 차별, 전쟁, 언론통제, 성폭력, 학교폭력, 구타, 로드킬... 등등 그리고 이에 대한 감정으로서 미움, 자절, 무능력감, 분노, 무거움... 그리고 그 원인으로서 힘의 숭배, 돈의 우선성, 효율성, 편견, 무지..등등을 성찰하였다. 당연히 참가자들에게는 그 상호연결성과 복잡함, 규모에 대한 깊은 충격들과 답답함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이런 폭력들을 방지하는 대안으로 무엇이 가능한가, 이런 폭력의 현상과 그 뿌리의 연관성을 잘라 낼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겠는가에 대한 통찰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술술 나오는 것이 공감, 이해, 수용, 지지, 평화, 격려, 연결, 사랑, 진실, 의미, 미소, 자각, 생명에로의 존중...등의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쉽게 나왔고 이제 해결의 아이디어라고 하는 이런 것들이 실제로 앞서 탐구한 폭력의 현상들, 느낌, 그리고 뿌리들에 가까이 갖다 대고 이것이 정말 효험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갑자기 침묵을 하게 되었다.

 

진행자로서 나의 관찰은 결국 폭력의 복잡함과 그 규모에 대해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너무 약하고 부드러워서그 효과가 의심된다는 것이고 실제로 폭력의 현상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는 본인들이 싫어하는 강요, 분노, 폭력적 힘의 사용, 비난, 단절, 등돌림...등의 수단을 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스스로가 탐구한 폭력의 현상을 강화하는 악순환의 반응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면서 폭력에 사회화와 내면화된 자신에 대한 아픔이 일어났다. 결국 우리는 이 연결과 수용, 이해와 공감 등의 약하고 부드러운힘의 효용성에 대해 깊은 불신을 갖고 있는 셈이었고, 실제로 그것의 적용을 통한 효과를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의 가능성에 대해 무지하거나 외면해 온 셈인 것이다.

 

본인은 최소한 비폭력 실천의 영역에서 슬로건인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수단과 목적의 일치)에 대해 우리가 단순히 논리에서만 아니라 실제 실천에서도 그렇다고 인정을 한다면 결국은 영혼의 내면적 진실의 힘이 우러나오는 방식에 의거해서 우리 사회의 참혹한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전술적인 비폭력(strategic nonviolence) 실천가보다는 원칙있는 비폭력(principled nonviolence) 실천가의 입장에 있다.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에 의거해서 그 원칙이 실천에 적용되는 방식으로 삶을 살며, 공공영역에 말을 거는 방식으로 비폭력 실천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의 내면의 진실을 확인하고 이를 말하며, 내가 동의하든 안하든 간에 상대의 마음이 지닌 진실을 경청하며, 나와 상대의 진실을 듣고 수용하여 그 펼쳐진 진실의 총합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공동지성이 작동되는 데 우리자신을 허락하고 그 공동지성에 의해 통치를 받는 방식으로 삶을 꾸려감으로 삶의 진실들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진실들을 연결하고 수용하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점차 개인, 관계, 공동체 그리고 사회의 다양한 진실과 지혜에 연결과 수용을 통해 시스템과 구조적으로 공공선을 확장하는 감각을 익히게 된다. 단순히 분리와 저항으로는 그런 내면의 진실과 공공선에로의 참여를 위한 통찰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연결과 수용의 논리는 진리에 대한 통찰과 공공선을 위한 에너지만이 아니라 실제 상호작용하는 시스템 구축에 있어서 핵심이 된다. 협력적인 문제해결의 토대가 되고 대화에로의 의지를 작동시키며, 적이 아닌 의견이 다른 상대가 자신의 선함과 다른 재능과 관점을 기여하는 방식에로 초대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와 정치영역에서 너무나 많이 자기 생존과 비난의 논리에 의해 상대를 쳐서 무찌르거나 배제하는 방식에 의해 수많은 시간과 인력의 낭비, 전임 대통령의 국가 프로젝트의 전복과 새로운 시도의 반복과 천문학적인 예산의 손실, 흑백과 좌우논리에 의한 사회분열의 만성화로 사회적 생명으로서 국민이 상처와 분노를 갖고 있다.

 

생존과 비난의 논리의 다른 표현인 흑백과 좌우논리는 결국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지구화되는 질병, 기후악화, 가난, 생태적 위험, 국경을 넘어서는 동북아의 공동안보의 위협에 대해 무력해진다. 오직 선전을 통한 눈속임을 통해-선전과 달리 안전에 대한 총체적 부실에 대한 세월호의 교훈처럼- 실제 대응능력과 복원능력을 상실하면서 더 큰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을 가져오게 된다.

 

연결과 수용의 논리는 약함의 논리가 아니다. 이것은 오직 영혼 내부의 논리만이 아니다. 그것은 약함(weakness)이 아닌 취약성(vulnerability)에 대한 예민한 민감성을 제공함으로써 시스템과 구조 속에서 안전과 질서를 강하게 유지시켜준다. 그것은 영혼을 넘어 사회적 시스템의 경직성을 해소하는 인간적인 얼굴을 지닌 시스템과 제도에 영혼을 불어넣는방식으로 작동하게 한다. 법의 고수와 이탈에 대한 처단과 처벌이라는 두려움에 기초한 사회 질서 대신에 돌봄과 상호 배려를 통한 피와 살이 있는 사회적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스스로 고통어린 부분들을 자율적으로 대응하는 삶의 방식이 확산될 수 있다.

 

결국은 모든 시스템과 구조는 인간이 하는 것이고 그 인간이 어떤 논리로 삶의 실재를 바라보고 있는가가 어떤 행동과 구조를 초래하는 가로 이어진다. 사회적 상상력의 결과로서 제도, 구조 및 시스템은 인간 의식의 결과인 것이다. 사회적 실재로서 제도와 구조는 연결과 수용의 논리를 지닌 인간들의 핵심역량이 형성될 때 갑작스럽게 변화는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조셉 자보르스키의 <리더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마지막에서 인용한 눈송이의 무게라는 비유가 훌륭히 설명하고 있다.

 

눈송이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박새가 들비둘기에게 물었다.

눈송이에 무게 따위는 없어.” 비둘기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가 너한테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해줘야겠군.”박새가 말했다.

 

그때 나는 전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었어. 나무의 몸통 가까운 곳에. 그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 펑펑 내리는 것도 아니었고 성난 눈보라도 아니었어. 꿈속에서처럼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는 그런 눈이었지. 하나도 아프지 않고, 격렬하지도 않은 그런 눈이었어. 그때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잔가지와 내가 앉은 가지의 침엽수 위에 샇이는 눈송이들을 셌어. 정확히 3,741,952까지 셌지. 그리고 3,741,953번째 눈송이가 가지 위에 떨어졌을 때, 네가 무게 따위는 없다고 말한 눈송이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졌어.”

 

그렇게 말하고 박새는 날아갔다.

 

비둘기는 노아 시대부터 그런 일에 대해서는 정통했기에 그 이야기를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 중얼거렸다. “어쩌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부족한 것인지도 몰라.”

 

결국은 연결과 수용의 논리가 사회의 공공영역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그 논리의 부족이 아니라 그 논리를 지닌 핵심역량 3,741,953번째 눈송이까지의 실천가의 존재가 필요할 뿐이다. 의식이 실재를 창조한다. 연결과 수용의 논리로 모인 핵심역량은 그 사회를 변혁시킨다. 우리의 진정한 힘은 이 연결과 수용에 대한 철저한 비전과 그 비전을 실천하는 역량들의 확대와 결집이다. 그럴 때 어느 순간 사회는 아무것도 아닌 눈송이의 무게(연결과 수용)으로 여겨지는 것에 의해 바뀌어진다.


 

(2014.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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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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