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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되고도 잊혀진 복음의 핵심: 평화와 화해



(이글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세 대형교회들이 시청광장을 빌려 대중평화기도회를 개최하면서 간증자로 조지 부시 전미국대통령을 내세운 것에 대한 대안적 성찰을 위한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주최측은 조지 부시가 술과 담배를 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렬한 증거자임을 그 이유로 간증자의 자격이 있음을 내세우고 있고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요지의 간증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만이 모이는 대중집회를 통해 성금을 모아 북한을 돕겠다는 목적이 이 집회의 정당성을 입증한다고 주최측은 믿고 있다.

보수성향의 대표적인 교회들과 대표적인 교계지도자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대형집회가 언론을 통해 다른 일반 기독교인들과 세계 기독교에 미칠 영향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기에 전쟁과 폭력에 대한 복음적 관점이 과연 진실로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련의 글들을 내놓음을 통해 보수주의가 의미하는 복음의 이해에 따른 진정한 신앙관과 태도를 갖고자 함에 있다. 필자의 글들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제목하에 의해 각기 따로 전개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더 절대적 위치에 있다; 2)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평화; 3)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제자직의 이해; 4) 가장 오래되고도 잊혀진 복음의 핵심: 평화와 화해; 5) 기도와 복음적 삶의 실천)


그리스도를 영으로 만나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투쟁은 인간 내면의 영혼의 문제에 있는 것이거나 적이라 지칭되는 어느 특정 인간이나 그룹과의 싸움도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라고 지칭되는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권세와 그 세계관이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엡6:12)

구체적인 대상으로서 혈과 육의 인간이 아닌 권세, 세력의 악신, 암흑세계의 지배자들, 하늘의 악령들에 대한 초점은 더욱 철저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지향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은 그런 점에서 명확히 저 세상의 문제가 아닌 이 지상에서의 샬롬의 통치에 대한 방향정위를 갖고 있다. 삶을 제한하고 분열시키고, 파괴하며 소외시키며 분쟁을 일으키는 힘들에 대항하여 생명의 창조자에 대한 경배는 필연적으로 파멸과 죽음의 모든 세력에 맞서는 싸움이라는 영적 투쟁을 동반한다.

이것은 바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당시 유대교라는 거룩의 울타리를 한 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게 치는 유일신교 사상의 그 제의적 철저성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여 분리되어 나오는 실마리가 된다. 거룩의 개념을 제의적 관점이 아니라 평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지배통치의 가장 악명높은 십자가형틀을 신앙의 상징으로 그리고 개선문에서 승리의 소식을 전한 '유앙겔리온(복음)'을 평화의 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로 바꾼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초대 교회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깊이 숙고함으로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초대교회에 있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해는 평화와 관련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는 부활의 현상 즉 '어떻게' 에 대한 아무런 묘사가 없다. 단지 엠마오의 두 제자의 경우처럼 뭔가를 확연히 볼 수 있게 해 준 놀라움의 경험으로 묘사한다. 부활은 새로운 시대(eon)의 시작을 나타내며, 예수가 예표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이 영원한 효력이 있음을 확증해주는 최종적 궁극성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부활에 참여함으로서 제자들은 참된 평화로서 화해에 이르는 삶을 사는 과정을 밟게 된다. 부활은 이렇게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넘어 그 제자들에게 새로운 시작의 경험과 샬롬의 통치에 따른 삶의 양식의 효력의 궁극성에 대한 확신에 따라 이에 헌신하는 방향전환과 그 평화 능력의 부여받음인 것이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20:19-23)

-성서의 증언에서 보듯이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평화의 선물과 평화에 대한 그들의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경험하였다. 문을 잠그고 있는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이 바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란 말씀이었다. 이 평화의 말씀은 단순히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는 말씀이 아니라 산상수훈과 식탁교제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일련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샬롬통치의 극명한 표현이자, 궁극적인 예수의 목회의 요체이다. 그 평화를 선물로 받고 이제 평화의 선교를 제자들에게 또한 위탁한다. 이는 다시 평화를 기원하며 그 평화를 세계와 나누도록 평화의 선교로 부르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평화를 선물로 받고 이를 다시 세상에 부여하기 위한 책임감이 제자들에게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을 이리떼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폭력적인 세상에서 이를 그들이 단순히 예수에 대한 기억과 삶의 모방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결정적인 능력의 부여가 일어난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개인의 능력의 한계와 사회의 악마적 구조로 인한 고난과 억압의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생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어 성취하게 하시는 창조적인 평화능력으로서 성령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제는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부여받음으로 인한 자유 행위가 된다.

조력자이자 중재자로서 성령이 주시는 평화의 은사를 통해 제자들은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적극적인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것이 바로 화해의 사명을 띤 세상으로의 파견이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생명을 약화시키고, 분열시키고 파괴시켰던 죄가 용서되면서 그 죄가 역사속에 만든 악마적인 구조도 해체되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이요 은사이다.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제자들과 그 초대 신앙공동체에 일어난 진정한 실존적인 부활절 사건이 된다. 평화와 화해의 영이 죄의 용서와 악마적인 구조를 해체하는 데 있어 은사를 부여하고 조력자가 된다. 그 성령이 조력자로서 주는 것이 바로 평화 능력임은 그의 고별인사에서 잘 나타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요14:27)

부활사건으로서 평화능력의 회복은 후기바울사도의 신앙공동체의 증언과도 맥을 같이 한다.

다음 성서의 증언을 유념해 보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여기서 명확히 보듯이 십자가의 길은 바로 화평케 하는 것이요 그 목적은 땅과 하늘의 것들이 그와 더불어 화목케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평화와 화목이며 이는 주가 "우리의 평화"(엡2:14)라는 신앙고백과 오차없는 일관성을 보여주는 특성이기도 하다. 성령에 의한 평화능력의 회복은 이제 새로운 시작과 자발적인 헌신 그리고 고난을 극복하는 자기 초월성을 부여받으면서 미래를 향한 개방성을 보여주게 된다.

부활에서 나타난 이러한 평화능력의 회복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 수행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은 단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한 전통적인 신학의 본체론적 해석방법과 달리 초대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샬롬 통치와 관련된 평화와 화해의 궁극 승리의 증거로 보게 된다. 그러한 궁극수행은 이를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 수행을 통해 곧 혈과 육이 아닌 폭력의 구조와 체제를 상징하는 허공의 권세와 세력들의 무장해제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과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골 2: 15)

여기서 십자가는 제국종교로서 기독교 신학이 지닌 속죄론적 해석방법론이 아닌 악마화하는 폭력의 권세들에 대한 해체로서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 곧 비폭력 수행을 통한 악마적 구조의 무장해제의 비폭력적인 무기가 된다. 십자가의 권능은 이렇게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지배체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이 폭력성에 근거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과 더불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되자, 기독교의 성공과 목표는 제국의 성공과 제국의 목표와 직결되었고, 제국을 보호, 유지하는 것이 신앙의 결정적 판단의 기준이 되었었다. 국가종교로 변질한 기독교 교회는 제국 그 자체 안에 도사린 악마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오히려 제국의 원수들 속에 악마가 있다고 보면서 십자가를 무기로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전쟁을 일으키는 구실을 삼게 되었다. 또한 속죄와 구원은 믿는 자와 하나님 사이에 처리되는 개인적인 화해와 영혼내부의 일로 전락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이 세상/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이란 원래 초기 제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에베소 6:12절과 골로새2:14절이 증언하듯이 초대교회의 명확한 관점은 그리스도가 정복한 것은 바로 권세들 자체라고 말한다. 골로새서 2장 13-14절에 따르면 용서는 우리들 자신의 억압과 다른 사람들의 억압에 우리가 공범자였던 것을 용서함이다. 우리가 소외되었던 것은 단지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의 헛된 철학의 속임수와 세속의 원리라는 사회적 규정과 요구들에 따른 사회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폭력을 진리로 가장한 허공의 권세와 헛된 철학의 속임수 그리고 세속의 원리에 대해 십자가와 부활은 그것들을 무력화하는 권능을 지닌다.

지금까지 주류 기독교는 대체로 세상의 권력이 지닌 폭력의 가면을 벗겨버리는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때로는 기독교가 정당한 전쟁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정치권력에 개입하였고, 피의 속죄론을 가지고 속죄의 사회적 이론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내면화하였으며 하나님 나라를 사후세계나 먼 미래에 투사하였다. 그래서 복음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상실하였다. 따라서 복음이 지닌 원래의 일반 세인들이 생각지도 못한 혁명적인 요소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지금의 기득권측의 보수기독교는 아예 복음속에 있는 이 혁명적인 요소들을 빼버린 이른 바 '나비는 날아간 빈고치'만을 지키며 숭배하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하면 두려워하며 그 목소리를 내는 자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한다. 마치 예수당시 산헤들린의 대제사장이 예수를 고발하면서 '국가나 전체 백성보다 한 개인이 희생하는 것이 더 났다'는 인식속에서 안정을 해치는 평화주장자들의 목소리를 못들은체 하거나 아예 입을 못 열게 '좌익'으로 몰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초대 교회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천사의 소식을 통해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평화의 사역은 시작하였음을 증언하였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후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는 평화이자 화해임을 사도바울을 통해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엡2:14-16)

초대교회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바로 여기서 밝혀진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는 평화이시고 화해케 하시는 분이시다는 고백이다. 그분의 능력은 화해의 능력 곧 원수된 담을 헐어버리고, 분리된 자를 한 몸으로 만드셔서 원수된 요소를 도말해 버리는 분이며 이것이 그들이 이해한 거룩함의 새로운 이해였다. 이런 증언을 오늘날 다시 되살려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이제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원수들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진정한 말씀이라고 믿는다면-신앙이 좋다고 스스로 자평하는 보수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놀랍게도 믿지 않는다- 원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20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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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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