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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더 절대적 위치에 있다

한국전쟁60주념기념 대형교회들의 조지부시 초청

대중기도회에 대한 대안적 성찰(1)

박성용 목사/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이글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세 대형교회들이 시청광장을 빌려 대중평화기도회를 개최하면서 간증자로 조지 부시 전미국대통령을 내세운 것에 대한 대안적 성찰을 위한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주최측은 조지 부시가 술과 담배를 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렬한 증거자임을 그 이유로 간증자의 자격이 있음을 내세우고 있고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요지의 간증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만이 모이는 대중집회를 통해 성금을 모아 북한을 돕겠다는 목적이 이 집회의 정당성을 입증한다고 주최측은 믿고 있다.

보수성향의 대표적인 교회들과 대표적인 교계지도자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대형집회가 언론을 통해 다른 일반 기독교인들과 세계 기독교에 미칠 영향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기에 전쟁과 폭력에 대한 복음적 관점이 과연 진실로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련의 글들을 내놓음을 통해 보수주의가 의미하는 복음의 이해에 따른 진정한 신앙관과 태도를 갖고자 함에 있다. 필자의 글들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제목하에 의해 각기 따로 전개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더 절대적 위치에 있다; 2)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 3)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제자직의 이해; 4) 복음의 근본 토대로서 평화; 5) 기도와 복음적 삶의 실천)


전쟁은 우리의 의식과 삶에서 아직도 진행중이다

한국전쟁 60주년의 과거에 대한 성찰과 최근의 천안함 침몰의 사태을 회고할 때 우리는 똑같은 일련의 패턴에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범인이 누구인가'와 '어떻게 적에 대해 응징/보복해야 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서적과 천안함 침몰에 대한 보고와 언론의 주요 흐름은 누가 가해자인지, 어떻게 공격받았는지 그리고 그 대책으로서 적에 대한 강력한 대응은 무엇인지가 주로 논의되어진다. 여기서 생산되는 담론은 '적'의 사악함에 대한 심도깊은 확인 그리고 힘의 논리에 따른 강력한 응징의 방법(그 댓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차지하고)과 증오를 증폭시키기이다. 희생자는 국가에 의해 영웅이 되고 두려움을 통한 안보논리가 강화된다.

평화학의 관점에서 보면 무력분쟁과 갈등은 단순히 사건에 관여한 당사자 개인이나 집단의 확인만이 아니라 그 분쟁/갈등의 구조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그 사건을 보는 데 포괄적이고 제대로 보는 시야를 제공한다. 개인과 집단이 분쟁과 갈등에 관여하는 것은 그 개인과 집단이 본성적으로 악해서이기 전에 구조적으로 이미 그 개인과 그 집단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하는 시스템적인 역학작용이 그 개인과 그 집단을 그렇게 하도록 만들게 된다. 예를 들면 금강산 피격사건이후의 악화일로의 남북대치와 대결상황, 남북간 협의없는 NLL의 상시적인 갈등상황, 키리조브작전에 연이은 독수리연합침공작전을 통한 한미연합대잠수함작전에 의한 위험성의 구조적 증가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폭력의 문화가 그런 폭력적 대응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의심스런 자를 적으로 만들기, 힘에 의한 맞대응의 논리, 이념적/신념적 타자에 대한 제거, 방어를 위한 무기의 정당화, 위협을 통한 상대의 힘을 꺽어놓기에 대한 타당성, 최강의 무기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선입관, 당한 것에 대한 증오와 보복은 정당하다는 논리 등등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지닌 폭력과 전쟁의 문화가 여기에 개입한다. 문제는 누가 가해자이든 상관없이 이러한 폭력의 구조와 문화가 작동되어 있을 때는 언제나 또 다른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지만, 세인들은 이런 작동 시스템에 대한 구조와 문화에 대한 인식은 없이 누가 가해자이고 어떤 응징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로 눈길이 가있다는 현실이다.

상대방이 가해자로서 적으로 보이고 이에 대한 증오와 응징의 감정이 고조될 때 위에 말한 구조와 문화의 근본 원인은 간과되고 이 갈등을 힘으로 제어하기 위한 시도가 그 결과의 역효과에 대한 고찰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 적이라 판단된 상대를 응징하기 위한 강력한 맞대응으로서 조지부시의 초청은 이러한 심리적 결과에 따른 것이다. 평화를 위한 기도회라는 이름하에 유엔과 국제사회가 정당하다고 보지 않은 이라크전쟁의 전범자인 조지부시는 '적에 대한 강력한 응징'으로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자유의 투사로 비쳐진다. 적에 대한 강력한 대응의 심리적 발로로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대 팔레스타인 정책에서 그가 무슨 불의한 행동을 하였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고, 적인 상대방을 강하게 공격하고 '악의 축'으로 선포한 조지 부시는 심리적 보상과 따라야 할 모델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하기를 원하는 문제는 상대방이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의심스러운 상대가 어떻게 '적'이란 이미지로 강력하게 바뀌는 지 그리고 그렇게 적으로 확인되었을 때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도 신앙의 여부와 상관없이 결과로 오는 더 큰 희생에 대해 신중한 고려없이 강력한 응징에 찬동한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복음을 그대로 준수하고 지키는 소위 '보수'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더욱 증오와 적 섬멸하기에 앞장선다는 증상이다. 한국전쟁이래의 정치적 상황과 천안함 사태에 있어서 한국보수교회들은 이승만 정권시절이후 하나같이 보복과 처벌을 통한 체제수호라는 국가이데올로기의 신봉자였으며, 전쟁과 군사행동, 무기생산과 판매, 군인의 월남과 이라크 파병, 중앙정보부의 용공조작사건들에 대해 하나같이 침묵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집단시위를 표출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성찰과 복음에 따른 세상인들과의 구별된 차이없이 전쟁이전에 마음속에 이미 전쟁논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정복과 증오가 아니라 화해와 사랑이다

미국은 원래 종교와 정치를 엄격히 분리한 나라이다. 그런데 조지 부시는 백악관에서 조찬기도회를 도입하여 보수 기독교계의 호의를 이끌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국의 이익을 침범하고 위협을 주는 자들에 대해 '테러와의 전쟁' '악의 축'이란 선언을 함으로써 상대에 대한 힘에 의한 응보와 결투의 논리를 정치외교영역에 적용하였다. 남미에 있는 미국의 다국적 농장과 산업의 국가이익 보호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원유에 대한 기득권의 보호를 위해 민간정부를 전복시키는 구테타(예, 과테말라)와 독재국가에 대한 지원의 수많은 과거사에 대한 눈멀음은 차지하고,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악의 축의 선포를 통해 자신들의 깨끗함과 상대의 부정함에 대한 이미지 조작을 통해 상대에 대한 군사적 폭력을 정당화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국가이데올로기화이다.

조지 부시가 실행하는 세계재패의 미국의 힘을 지지하는 데 국가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 신앙이 나타난 것은 바로 콘스탄티누스황제가 AD 4세기초 정치적 적을 무찌르는 데 십자가를 내세워 전투에 나가 이김으로써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만들어 자신의 통치에 사용하는 데서부터 연유되어진다. 그때이전까지만 해도 '평화의 주'를 위해 무기나 군대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박해받는 기독교는 이제 십자가가 상대를 정복하는 무기로 바뀌게 되고 로마제국을 강화하는 지배와 정복의 국가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일이 발생하며 결국 십자군 전쟁이라는 초대 기독교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십자가를 무기로 성지탈환이라는 명목하에 정복전쟁을 하는 선례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기독교가 국가종교 혹은 제국종교로 바뀌면서 기독교가 로마를 개종시킨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이용하여 국가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기독교를 개종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원래 예수님과 그의 초대 교회에 있어서는 복음은 명확히 국가이데올로기와는 적대적 관계였다. 그 한 사례가 '여우같은 헤로데'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 나타난 사랑, 정의, 평화의 가치를 통해 보복이 아닌 대안을 제시한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마5:45) 하나님의 이 무제약적 사랑은 인종, 계급,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초월하는 사랑인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이다. 힘의 논리보다 적과 죄인을 이웃으로 삼는 게 십자가이고 나를 따라 오려면 그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신앙공동체는 적을 무기로 대항하는 과격한 민족주의 집단인 젤롯당(혹은 '단도'라는 의미의 시카리옷파라고도 함)이나 로마의 국가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혼합한 사두개파(산헤드린으로 대표)와는 구별된 사랑에 의한 변화를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단순한 신조나 선언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였다. '선인이나 악인에게도 골고루 비와 해를 주시는'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사랑은 장벽과 경계선을 무너뜨리신다. 사람이 긋는 모든 경계선, 세계평화를 역행시키는 모든 국가이데올로기와 힘의 숭배는 우상이다. 분열이 아닌 일치이되 일치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과 대화로 사는 삶이 유대인들보다 더 '완전하게' 사는 비결이었다.

십자가는 이미 이세상에서 비판적 존재로 살기를 요청한다. 이 세상적 가치가 아닌 자비로운 하나님의 은총의 통치라는 주권아래에 사는 삶을 의미한다. 이 십자가는 죄의식, 위협, 공포, 폭력과는 전연 상관없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라는 분과 관련하여 가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경험함으로 시작된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노니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것과 다르다고 하신 예수님을 통해 '평화의 주'이신 그분에 대한 전적인 복종과 .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심"(고후 5:18-19)에 대한 온전한 승인을 통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그 어떤 위협에서도 무기를 들거나 적을 죽이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흐름이 강력하고도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십자가는 보복과 증오가 아닌 건설과 대안의 방식을 제안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웃의 정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 25-30)처럼 내가 친밀한 사람이 아니라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도움을 주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속에서 이웃의 개념을 원수에로까지 넓히고 있다. 적과 동지의 전쟁논리와 적은 응징되어야 할 범죄자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는 예수의 원수사랑에 대한 대한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예수님의 다음의 말을 음미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너희는 들었다.                         일반의 사회적 가르침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공격은 더 강한 반격을 필요로 한다.

                                       폭력 대응이 정당화된다

                                       폭력 투입/폭력의 누진적 확산

그러나 나는 말한다                     예수의 새로운 사랑의 윤리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목표를 바꾸라.

왼뺨마저 돌려대어라                    죽음대신 대안과 개선수단을 확산시켜라

                                       대안투입/폭력의 변혁, 악을 선으로 이기기

조지 부시가 1주일 후에 선포할 간증인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그 논지에 혹시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과 희생의 필요 그리고 공산주의의 잔인성이 논의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분명하게 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고 공산주의가 잔인한 것이 아니라 전쟁은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사람을 잔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베트남전쟁과 이라크 전쟁 등에 의해 적만이 아니라 아군도 전쟁자체가 군인 모두를 잔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가 신앙에 앞서는 것에 대해 특히 저주와 보복이 사랑과 화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우선되는 것에 대해 '우상'임을 선포해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신앙을 대신하는 것은 그 어떤 상황도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교회에서의 삶과 세상의 삶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님이시기도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기의 숭배, 힘의 숭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비폭력적인 순교자가 되기를 제자들에게 요청한다. 공격성과 증오를 극복하는 평화운동, 상호간의 자멸적 파괴를 극복하는 평화운동은 하나님의 아버지됨과 모두의 형제자매됨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우리가 6.25와 천안함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유념하고 회개해야 할 내용은 가해자에 대한 증거찾기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깊은 자각과 통회함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 역사는 사람들이-사랑의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증오하고 전쟁터에서 시체가 되기 위해 살았을 뿐이다라는 깊은 참회가 이번 한국전쟁 60주념에서 특히 시청광장에서의 대중평화기도회에서 일어나야 한다. 보수는 국가이데올로기에 대한 보수(보호하고 지킴)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보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 어떤 군사적 폭력에도 -그것이 무기가 아니라 확성기나 전광판 혹은 풍선에 의한 전단이든 간에- 대항하는 '시민불복종'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이름으로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무력을 사용하는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에서 해방된 사람들로서 기독교인의 본질을 자각하고 더욱 더 진실과 정의와 사랑의 힘을 신뢰하고, 폭력보다 이것들이 더 현실적이고 힘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몸으로 생활로 진지하게 사는 것이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무력에 의한 힘의 숭배와 적에 대한 응보를 요청한다. 그것의 근본 가치는 '이에는 이에로'라는 보상의 원리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사랑과 화해의 십자가의 원리를 따른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 5:43-45)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어렵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더 극단적인 요청을 우리에게 한다. 원수를 위해,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를 하라.' 이것이 바로 당시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가르는 표징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까지 하는 이 적극적인 실천의 말씀은 이제 한국교회가 새롭게 회개하고 실천해야 할 예수님의 요구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전쟁 60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이산가족이 일천만이 되는 이 비극적인 상황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그동안 적에 대한 증오와 적의 변화는 기도해왔지만 서로 죽이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고, 고향에 두고 떠나온 것으로 인한 수많은 이들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어느 교회든 나서서 해 본적이 없다. 분쟁과 갈등에 대해 보복와 증오가 아니라 비폭력적으로 공동의 선을 도출해 내는 갈등해결과 화해사역의 프로그램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는 교단이나 개 교회도 찾아 볼 수가 없는 불모의 무력한 교회로 우리는 지나왔다.

이제는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단순히 개인의 내면의 영혼속에 일어나는 행동이 아니라 치유와 갈등해결 등의 화해사역이라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사랑'의 실천이 참회의 구체적인 행동 프로그램으로서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기독교 교육도 사랑과 화해의 지속적인 훈련과정이 있어야 기도회의 결실이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열매를 통해 그 존재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단순한 일회성의 과시형 대중기도회가 아니라 그 진심이 결과를 맺는 데 대형교회들이 이제는 앞장서는 모범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10.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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