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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이 전하는 부활의 의미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5:9-

 

사물의 본성에 대한 현대물리학의 이론이 고전물리학의 세계로부터 이미 1세기 전에 시작되어 파동, 주파수, 그리고 에너지 등으로 실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져왔지만 여전히 고전물리학의 인식인 질량과 운동에 대한 인식이 일상에 지배하고 있다. 양자의식과 일상의식은 그만큼 서로 다른 리얼리티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를테면, 객관성을 다루는 물리학에서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참여하고 공간에 있어서 비국소성과 얽힘을 말하며, 의학에서 플라시보 효과처럼 마음이 질병에 연결되며, 인식과 경험이 뉴론세포와 신경망과 상호 영향을 미치는 이해(신경조건화와 신경가소성)를 통해 우리는 공통적으로 실재에 대해 의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물리학, 의학, 뇌과학 등에서 새롭게 암시하는 바를 따라가 보면 물리와 심리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없이 펼쳐지는 그 무언가에 대한 인식의 확장이 일어난다. 이성으로 명료하지는 않아도 실재(리얼리티)와 의식 간에 사이(betweeness)경험', 곧 인식 사건이 사물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다. 이러한 메타포를 우리가 부활 이슈에 적용한다면 무엇이 드러나는 것일까?

 

부활을 이해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세 가지 프레임이다. 그리고 이것은 양자(양자는 물체가 아니다)이해로 인한 스마트화된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고전물리학의 지배처럼 우리의 삶의 경험에 아직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는 바로 한국 기독교가 고집하고 있는 예수의 몸의 부활에 대한 고집스러운 교리적인 신화의 경직성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십자가와 부활의 대조와 상호연계를 통해 희생에 대한 숭고한 의미부여와 이를 통한 죽음에 대한 승리로서 부활 강조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두 프레임은 서로 맞물려서 세 번째로 예수의 신성과 신앙의 대상적 존재로서 앙망하기에 대한 신앙적 복종이라는 존재론적 근거를 마련한다.

 

그러한 신화론적인 혹은 고전물리학적인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그 무엇을 탈취시켜 박제화된 신앙을 가르친다. 이는 인간 에고에 대한 초월적 상상력을 축소시켜 세속주의를 역설적으로 강화시킨다. 희생을 통한 죽음에로의 승리는 오히려 대다수 심신이 강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두려움을 강화하여 권력과 지배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게 만들며, 거꾸로 소수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전투처럼 비이성적이고 무모한 전투적인 순교에 정열을 쏟게 만든다. 죽음에 대한 승리는 마녀사냥, 아오슈비츠, 암투병, 재난의 희생, 트라우마 등의 지금 마주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에 대해 침묵하고 다른 차원의 공간에 대한 로맨스적인 비현실의 도피를 가져온다. 신앙의 대상화로서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는 부활이라면 예수의 신성화가 강할수록 이를 믿는 신앙인의 교조화도 강해지면서 보이지 않은 더 큰 실재에 대한 민감성과 상상력을 축소시킨다.

 

요한 기자와 그의 신앙공동체는 부활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인가? 예수의 부활이 갈릴리 예수의 몸의 소생과 관련된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난 그 어떤 객관적 사실(fact)를 말하고자 했던 것인가? 아니면 더 심오한 그 무엇에 대한 진실을 나타내고자 함이었는가? 그의 공동체가 증거하는 것은 소생과 부활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과 어떤 진실에 대한 애벌레 경험에서 나비경험으로의 도약을 말하고자 함이었는가? 희생을 통한 궁극적인 승리, 십자가가 전제된 부활의 순차적인 연계성에 대해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어떤 신비로운 진실이 남아있는 것일까? 권력이 암묵적으로 신성의 옷으로 가장하여 대리의 그리스도로서 위력을 여전히 행사할 때 두려움 없이 어떻게 이에 대해 마주하고 말을 걸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매일같이 위협적으로 만나는 죽음에로의 위협을 낭만적인 무시나 그 실재에 대한 소박한 대응이 아니라 치열하게 마주하면서 희생에 대한 마조히즘적인 태도 없이 나와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희생에, 그리고 의미 없는 죽음에 대해 미화하지 않고 경이로운 존중과 치열한 민감성으로 다가갈 수 있는가? 지난 1년 동안 평화서클교회에서 꼬박 주일에 요한복음을 계속 교우들과 묵상과 사색을 하면서 내가 얻은 개인적인 통찰은 전통적으로 이해한 부활과 다른 새로운 눈뜸에 대한 것이었다.

 

요한복음은 13장까지 기적징표에 대한 스토리와 그 이후 21장 끝장까지 고별담화로 구성되어 있다. 기적징표는 세상에 보이는 로고스(신적생명)의 펼쳐짐에 대한 이해이고 고별담화는 선택된 제자들에 대한 마음에 새김이라는 내적 비밀의 전수와 세상을 극복하는 훈련에 대한 것이다.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존재론적인 창조에 대한 것이었다면 요한복음 1장부터 드러내는 천지의 새로운 창조에 대한 것은 실존적인 창조에 대한 것이다. 둘 다 흑암과 운행하는 영에 대한 증언은 같다. , 1:1-2의 하느님이 천지를 지어냈고, 땅이 아직 모양 없이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고 어둠이 깊은 물위를 뒤엎어 있음에도 그 위로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요한복음은 생과 실존으로 응답을 한다.

 

흑암과 무(nothingness)의 비극적 실존은 여러 형태로 우리를 덮친다. 기적징표에서 나오는 실존적 고뇌는 다음과 같다. 기쁨의 단절(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의 떨어짐), 삶의 성소의 상실과 세속화(성전안 장사꾼의 상을 뒤덮음), 정신적이고 영적인 어둠과 공허함(니고데모와의 예수의 대화), 목마름과 지침(시카르 동네 우물에서 사마리아여인의 만남), 생의 좌절과 드러누움(38년간 누워 있는 병자), 결핍의 문제(오병이어), 존엄에 대한 상처로서의 수치심과 ()법의 경직성(간음한 여인), 무자각과 배제됨(나면서 소경된 이), 죽음의 힘(라자로의 죽음), 박해와 배반(유대지도자와 가롯유다) 등이 그것이다. 어둠과 무 그리고 죽음의 세력에 있어서 로고스의 지혜와 힘은 그러한 실존적 궁지에 대응하여 일관된 창조작업을 행한다.

 

요한기자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로고스의 창조작업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사람들의 빛이 되며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1:5)에 대한 일관된 진술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현실에서 흑암과 무가 아닌 은총과 진리의 충만이라는 신의 영광을 보고, 경험하고, 이것이 내 안에 그리고 내 삶에 살아있음에 대한 것이었다. 기적징표로 보여준 수많은 스토리들을 토대로 최후만찬에서 시작되는 고별담화로부터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고통체(suffering body,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남’[1:13])가 아니라 다른 몸으로 전이(transition)될 수 있는 커리큘럼을 설정한다.

 

그것은 이미 예수가 자신에 대한 증명에서 누누이 들었듯이 하느님에게서 난 자’(1:13), 곧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가며, 그 중간의 삶에서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 되는 삶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주를 사랑하는 제자들은 새 계명을 받는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13:34)는 것이었고, 그것을 에고(세상으로부터 난 것)로 인해 무력감을 갖기 때문에, 사랑의 능력이 가능하기 위해 다른 협조자인 진리의 영(14:16)이 보내져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14:20) 한다. 그러한 협조자 성령의 가르침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이제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신의 평화를 받는다(14:27) 신의 평화는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않게 한다. 고통체(suffering body)의 핵심인 이 불안과 두려움은 이제 서로 사랑, 보혜사의 위로, 평화에 의해 그 힘을 잃게 된다.

 

고통체의 실존을 없애기 위한 서로 사랑, 성령의 안내, 신적 평화의 새로운 실존이 가능하게 하는 그 핵심은 바로 참 포도나무와 농부이신 아버지의 담화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15:9)에 있다. 머물러 있음이란 헬라어 메노(meno; menein)’는 가지와 포도나무 사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메노는 거함(abiding), 지속함(continuing), 남아있음(remaining)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다.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음은 벗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침(15:13)과 종이 아닌 벗됨, 세상의 증오를 이겨냄의 비결이고, 예수의 부재시 성령께서 하는 일이다. 아버지께서 이제는 (예수의 현존 없이도) 친히 너희를 사랑하시는 것’(16:27)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만 있는 독특한 예수의 기도인 17장의 끝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26)로 사랑 안에 머무름의 중요성을 강화한다. 이것이 제자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요한기자가 전한 예수의 처형과 죽음으로 인한 그의 부재 곧 아버지께로 돌아감을 통해 나타난 부활의 경험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부활직전의 성토요일에 일어난 일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죽음(성금요일)이후 성토요일에 일어난 사건은 다음과 같다. 어둔 새벽과 무덤의 마주함이라는 실존적 심연의 경험으로써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의 경험, 그리고 저녁에 무서워 문을 모두 닫은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죽음에 대한 깊은 상흔에 대한 기억과 무력감이라는 토마의 경험, 또 하나는 바로 호숫가에서 밤새동안 허탕친 그물질에 대한 7제자들의 경험이 그것이다.

 

예수의 처형과 죽음이후의 성금요일과 성토요일은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흑암과 무의 심연의 경험 속을 통과하는 시기였다. 인생의 최종적인 도착지가 결국은 무덤이라는 죽음의 최종성, 어둠과 사방이 꽉 막힌 장벽처럼 탈출구 없음, 그리고 추억으로 변질된 그리스도 사건 후의 일상에로의 복귀라는 무력감은 이 흑암과 무의 심연의 깊이(the deep)’를 말해준다. 이 흑암과 무라는 심연에로의 삼키움은 몇몇의 제자들에게는 새로운 각성의 심연경험을 가져왔다. 그것은 마치 애벌레가 고치 속에 들어가 번데기가 되는 무력감의 침묵시기였지만 뜻밖에도 새로운 각성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가 본 수의와 수건 옆에서 본 두 천사의 현존과 무덤안에서 등뒤에서 들려온 부르는 신비의 소리로 인해 증언자의 위치로 바뀌고, 제자들과 토마가 무서워 문을 닫아 걸은 벽을 뚫고 한 가운데서 울려 퍼진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20:19)의 경험이다. 그리고 허탕친 그물질에서 동이 틀 때 들려온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21:5)와 베드로에게 대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7)의 신비스러운 목소리에 대한 내적 경험이 그것이다. 요한기자는 예수의 처형과 십자가에 대한 희생의 강조는 여기서 없다. 오히려 이제 다이루었다’(19:30)의 신비로운 자기 명명을 우리는 듣는다. 그리고 부활 스토리는 오히려 예수 자신보다는 제자들의 목격과 증언으로 옮아간다. 그들은 상심하고 불안해하고 무력하며 공포에 떨면서 불안두려움이라는 고통체가 경험하는 최저의 심연을 맛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그 무한한 심연에서 심연의 경계선을 뚫고 들어온, 즉 무덤의 벽과 사방을 닫은 벽, 또한 일상성이라는 벽을 뚫고 들어온 신비한 음성과 현존을 보게 된다. 죽음에서 다정한 자기 이름에 대한 부름이 있고, 심연의 한가운데에서 평화선포, 성령의 증여, 죄의 용서가 일어나며, 일상성에서 다시 그 어떤 소명이 확인된다.

 

이렇게 우리의 실재를 구성하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전이(transition)와 내적 경험에서의 변형(transformation)은 양자도약 곧 에너지의 전환처럼 그 어떤 진실에 대한 자각이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계속 반복적으로 들려졌지만 이제 마음에 새기게 된’(“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 사건이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고통체에서 사랑체(the body of love)로의 변형인 것이다. 바로 요한기자가 1장에서 말한 혈육·육정·욕망으로 난 것인 고통체가 기적징표로부터 눈이 희미하게 떠지고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눈뜸이 가장 어려운 치유였다- 이제 다시 흑암과 무의 심연을 통과해서 마음이 열리어 마음에 새겨지는자각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사랑체, 곧 고별담화에서 말한 사랑의 계명의 새김에 대한 것이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과 그 사랑으로 남아있음 그리고 그 사랑을 증언하는 살아남기라는 증언자로의 초대로서의 삶의 갱신이 바로 부활의 경험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한 새로운 의식, 새로운 실재, 새로운 생명에 대한 것이다. 메노 곧 사랑안에 머물기(abiding)’라는 새로운 의식, 사랑으로서의 새로운 실재의 지속(continuing), 사랑의 실존으로 살아 남기(remaining)로서 새로운 생명에 대한 양자도약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자각에로의 도약이 바로 요한기자가 말한 부활의 의미이다.

 

따라서 부활은 예수의 몸의 소생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에 속한, 세상으로부터 난 고통체라는 몸이 아니라 사랑체라는 새로운 생명의 몸과 실존의 소생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이 아닌 궁극실재이자 참사랑인 하느님께로의 돌아감에 대한 부활이다.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 전염된 제자들에게서 사랑체(the body of love)’라는 몸의 부활, 곧 깨어나는 영혼들이 바로 부활이다. 사랑이신 실재에로 일어서는 영혼들의 무리들로 전이되고 변혁된 사건에 대한 지칭인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의 영광이라는 대조 속에서, 희생과 고통의 문을 통과하여 결국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찬란하게 이룬 어두움없는 빛의 정복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실존에 계속적으로 들이치는 흑암과 무의 심연의 경험들 속에서, , 우리가 직면하는 아오슈비츠, 죽음에 삼키우는 치료할 수 없는 질병, 재난, 4.3을 포함한 잔인한 빨갱이 소거, 4.16 세월호 참사 등의 어둠의 심연속에서 마치 이런 심연들이 없어진 승리의 찬가에 대한 부활이 아니다. 오히려 흑암위에 운행하는 영에 대한 진술처럼 이 실존적 심연 속에서 이것을 끝까지 부둥켜안고, 죽음의 위협의 심각함과 위협에 대한 치열한 대면과 때때로 이에 의한 삼키움 속에서도 진실과 사랑 안에 머무르는그래서 남아있는자로서의 실존과 그 증언의 삶이 바로 부활이다.

 

예수의 신성과 신앙의 대상으로서 앙망함이 아니라 그의 부재 속에 진리의 영에 따라 평화와 죄의 자각과 이에 대한 용서에 대한 사명으로 충전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의식의 소생에 대한 것이 부활이다(20:19-23). 여기서 용서는 타자의 잘못에 대한 값싼 관대함이 아니다. 용서는 고통체가 지닌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결핍으로부터의 충동에 대해 나는..이다(I-AM)’의 사랑체의 회복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신적 실재의 참본성으로서 사랑체는 오병이어의 사건처럼 결핍의 현실에서 삶의 축복, 기쁨, 풍성함을 가져오고, 사로잡아 죽이려고 온 무장 병사들에게 내가 그로다(I-AM)”이라고 말함으로써 죽임의 현실앞에서 그 병사들을 뒷걸음치게 하여 넘어지게 한 생명력이 된다((18:6).

 

잔인한 죽임과 비참한 현실이라는 불안과 두려움의 심연속에서, 그리고 그 비참함의 심연을 통과하여 우리는 새로운 의식의 각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에게 일어난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사건과 그를 따르는 제자 간에 일어난 사이(betweenness) 경험이다. 잔인한 죽임과 비참한 현실,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으로 사로잡힘의 상황속에서 신적실재-나의 사이경험을 말하는 증언자가 된다. 목도한 것에 대해 첫째는 그분의 사랑과 평화안에 머무르기(abiding)'를 마음에 품고 이를 새긴다. 그리고 둘째는 심연을 체험한 증언자로 진실과 사랑을 위해 이 세상에 머물면서(remaining) 살아남는다. 그리고 셋째는 그러한 희생자인 내 양들을 돌보면서 증언자들의 커뮤니티를 지속시키며(continuing) 확장해 나간다.

 

이것이 요한기자와 그의 신앙공동체가 박해와 두려움 속에서 새롭지만 거의 2천년 동안 주류 기독교에서 잊혀져온 부활의 의미이다. 부활은 결국 자각하는 의식, 곧 일어서는 작은 영혼들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냥불이라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 다른 작은 혼들로 옮아 번지는 불기운에로의 초대인 셈이다. 그를 기억하고 따르는 이들에게 일어난 '메노(meno; abiding) 사건이 부활의 핵심(matrix)인 것이다.

 

2019.4.21.부활주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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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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