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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과 독서 자료:

                   예수의 비폭력에 대한 신실성
                                                                                    -  Nancy Schreck -
 



사람들로부터 비전을 없애는 사회는 그 끝이 확실한 사회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우리 교회 우리 세계에서 오늘날 위기는 우리 정신을 열고... 우리 가슴을 열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새로운 에너지를 담으려는... 꿈꾸는 자들이 없는 결과이다.  Leonard Boff



폭력에 대한 예수의 저항은 성서의 맨 첫 페이지에서 시작되고 끝에까지 지속된다. 그것은 만지고, 말하고, 치유하고 그리고 먹는 일상 활동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예수의 하나님 통치/지배에 대한 비전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예수의 비폭력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종종 대결과 폭력의 상황들에 대한 예수의 응답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이 에세이에서 우리는 그런 상황들을 탐구할 것이지만 그것들이 출발점은 아니라고 나는 제안한다. 예수의 이 태도는 그러한 대결적인 상황이 일어나기 오래전에 형성된 것이다. 사실상, 그런 상황들은 종종 삶에 대한 그의 비폭력적인 비전과 접근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출발점은 모두를 한 테이블에로 환영하고, 폭력의 한 형태로서 어떤 종류의 배제에도 비판하는 세계관을 창조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 inclusive love of God 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이에 대한 헌신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철저한 비폭력의 행동들 중의 하나는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그 당시 사회가 배제한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공동의 식탁을 나눈다는 것은 가름의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이다. 예수의 비전에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모두를 포괄하시는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한 몸의 모든 지체들이다. 이러한 포괄은 서로를 형제자매로 만들고 따라서 비폭력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비폭력은 공동체에서 유일하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공동체는 다른 사람을 타자로, 즉 돌봄의 써클밖에 있는 타자로 정의하는 폭력의 뿌리에 대한 반감을 창조한다. 참된 공동체는 그렇게 많은 폭력 뒤에 있는 동기, 즉 타자는 가치 없다는 동기를 해체시킴에 의해서 폭력을 뿌리 뽑는다. 이것이 Helen Prejean 수녀가 그녀의 책 Dead Man Walking에서 입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범죄를 저지를 자와 그 범죄의 희생자 모두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에 의해 감싸진 한 몸의 멤버들이다. 이런 종류의 사랑은 적을 폭력과 증오로부터 구하고 치유한다. 가장 기본적이고 문자적인 방법으로 그것은 우리가 그로부터 폭력을 경험하는 이를 공동체의 멤버로 편입시킨다.


예수의 비폭력을 탐구하는 출발지점이 하나님의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사랑에 대한 예수의 비전에 있다면 우리의 성찰은 보편적 치유에 대한 그의 비전에 의해 심화된다. 생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타자의 기본적인 복지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다. 이것이 예수가 만난 각각의 사람들을 위한 예수의 가장 깊은 소원이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치유와 복지는 어떤 몇몇 사람에게 속해있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제도적 폭력에 의한 복지의 써클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로 그가 다니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예수는 항상 돌봄의 써클 바깥으로 내던진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치유의 문을 통하여 공동체 속으로 되돌아오도록 초대하신다. 그는 공동체의 복지란 각 멤버의 복지에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예수는 또한 병은 개인적 죄의 잘못이나 그 결과가 아님을 가르쳤다. 오히려 초점은 치유란 몇몇에게 유효하지 다른 사람들은 - 이들 다른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과 한 테이블에서 배제된 이들- 아니라는 죄 많은 단언에 있었다. 예수는 치유, 거룩한 힘을 세상의 거부 받고 접촉할 수 없는 이들에게 확대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누구든 복지의 서클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예수의 생에 있어서 몸의 치유는 다른 종류의 치유에 대한 사회적 은유로서 기능한다.

예수의 비폭력의 세 번째 근거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예배에 대한 그의 접근에 있다. 예수가 하나님 안에서 본 철저한 사랑의 종류는 인간의 삶이 보복하시는 하나님에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창조한다. 이것이 그 근본 뿌리에 있어서 폭력을 정화시키는 영성이다.  예수와 기독자의 길을 따르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형태의 죽음에 대항하여 확고하고도 논쟁적이며 생명이 충만한 것을 위하신다. 헤롯당원들과 파리새이파들과 같이 예수의 적들은 누군가가 고통 받고 죽는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학에 어떤 여지가 남아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은 아니다. 그다음으로 예배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또한 폭력을 정화시킨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배의 날, 안식일은 인간 공동체를 섬기는 데 있어야 하며 사랑의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를 반영해야 한다. 치유가 필요한 자가 있을 때 치유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문제를 제기 한다: 그러한 특권적인 날, 성소와 같은 헌신하는 장소에서 어떤 종류의 활동이 하나님은 일어나기를 바라실까? 사실상 어떤 종류의 활동이 가장 우리가 예배하는 그 하나님을 특징지울 것인가? 예수는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한 예배의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그는 또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이들의 공동체 삶의 질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진실로 한 테이블을 공유하며 모든 이의 복지를 추구하는가?  예수에게는 사람들이 예배를 적절하게 볼 수 있기 전에 공동체내에서의 화해에 대한 긴급성의 느낌이 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선물을 제단에 가져가 거기서 누군가가 당신에 대항하는 것을 기억한다면...”(마 5,23-24)

그러므로 우리가 특정한 상황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응답을 탐구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의 삶이 한 식탁에 모두를 포함하는 것, 모두의 복지, 그리고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헌신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자비, 겸손, 비-보복, 용서, 진실추구, 화해 그리고 자신의 적을 포함하여 타자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기부, 금식, 기도, 신뢰,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하나님의 지배에 두는 것으로부터 성장한다.      


삶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예수에 대한 적들의 인상적인 배열을 축적시킨다. 그가 만난 폭력은 그가 사물이 정렬된 방식에 대해 그가 제기한 위협 때문에 개인적으로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 위협이란 어떤 것인가?  종교계와 정치권에 있는 당국자들은 예수가 가르치고 살았던 것을 사람들이 충분히 믿는다면 자신들의 권력을 상실하게 됨을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저항이 커지게 되었다. 그의 삶을 통해 예수는 사람들이 그를 해치고자 계획을 세우고(막3,6),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이 그를 죽일 방도를(막 11,18) 찾았으며 헤롯 또한 그를 죽이려 함(눅 13,31)을 그는 알았다. 그는 다른 적들도 알았다: 유다, 빌라도 그리고 그를 조롱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려 하는 전문적인 사형자들.


이것은 또한 종종 예수의 비폭력 방식을 탐구하기 시작하는 장소이지만 그것은 훨씬 이전의 장소에서 탄생되었다. 비폭력은 깊이 포괄적인 공동체(inclusive community)에 헌신하는 이를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응답이다. 공동체는 목표이고 비폭력은 그러한 목표의 표현이자 수단이다. 마음에서 포괄적인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헌신은 전 인격에서 비폭력을 창조하기 위해 일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폭력에 대한 동기를 제거한다. 왜냐하면 공동체가 더 위대한 평형장치(equalizer)이기 때문이다.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불평등한 권력이라는 폭력과 능력이나 지위에 기초한  가치는 기독교 관점에서 그 위치를 갖지 못한다.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항상 이런 실재를 창조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타자를 위한 예수의 승리는 적대적이고 극도로 폭력적인 세상의 한가운데서 얻어진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유토피아 사회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꿈을 꾸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한 가운데에서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도록 초대한다. 이러한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중요 요소는 물리적인 폭력, 법적 소송 그리고 강요된 징집(마 5:39-42)을 대면함에 있어서 보복적인 활동을 종식하는 것이다.  예수는  공동체에 대해 파괴적인 자기-이익의 그러한  침해에 능동적인 비폭력을 강요한다. 이런 종류의 응답이 폭력적인 행동과 역반응의 순환을 종식시키는 데 긍정적인 공헌이 된다. 철저한 부름은 개인으로 하여금 누가 관계를 깨뜨리는 데 책임이 있든 지간에 화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비폭력적인 반면에 그는 동시에 확고하게 대결적이었고 그의 대결적인 행위는  그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몇몇 사람들이 그를 묘사하듯이 그의 단순한 선행이 악마적인 사람들의 악행들로부터 반대를 일으키게 된 타협적인 희생자는 결코 아니었다. 복음은 예수의 선하심이 결코 수동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어떤 실천에 대항하는 도전을 개시하도록 하는 그런 선함인 것이다. 그는 선동하고 불안하게 하였다. 그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담히 공적 장소에서 선포하였다.


예수의 선제권에 대한 예가 도움을 준다. 성전에서 예수가 돈 교환 장사치들을 물리치는 것을 보자. 지금은 이것이 예수가 성정에 들어오셔서 거기서 일어난 행동에 의해 놀라며 예배장소를 청소해야 하는 갑작스런 열정의 분출로 응답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고파는’ 행위는 예수에게 잘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가 선제권을 취하여 실행한 것은 주의 깊게 고려된 방해 행위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자비와 분노가 꼭 상호간에 배타적일 필요가 없음을 가르쳤다.


적들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용기와 신중함이 혼합된 것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그가 위험을 무릅씀(눅 4,30; 요 7,1)을 본다. 그러나 위험을 맞이할 때 그는 겁을 내지 않고 자신의 존엄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원칙을 방어하며, 결코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며 높은 도덕적 근거에서 걷는다.

 

몇 가지 점에서 예수는 그의 절대적인 비폭력과 그가 살고 있던 죄 된 세상의 잔혹한 폭력 간에 다가오는 충돌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는 막 지속시킨 고난의 훈련에 대해 말하였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결정은 비폭력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의 반대자가 그를 거기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공개적으로 그들이 그의 삶을 위협하고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용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행위였다.


예수의 생의 여정은 예루살렘에서 끝나게 되고, 여기서 질문이 일어난다: 만일 예수가 그에 대한 폭력의 증가를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그는 그곳으로 갔는가? 그것은 죽음의 어떤 명령을 충족시키고자 함이 아니라 그의 온 생을 통해 성취하고자 싸운 신의 명령에 대해 신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죽음을 촉진시키고 죽음의 구조를 배양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될 때 기꺼이 죽이려고 함으로 보여진 죽음에 대한 그들의 동맹을 극복하는 신의 명령에 대한 신실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에 대해 기억할 중요한 것은 그가 그의 상대자들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이다. 예수가 기원하는 시편의 탄식시의 전통처럼, 그는 어떻게 악의 실재를 인정하고, 그것에 저항하며 그리고 마지막 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알았다. 죽음에 대한 비폭력적인 수용에서 예수는 치유하고 해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정확하게는 그가 경험한 증오와 폭력의 살인적인 지배/통치를 역전시켰다. 예수는 저주받고, 주먹으로 맞고, 말다툼하고 얼굴을 맞았고, 인상적인 되받아침 없이 조롱받았다. 심지어 고뇌가운데서도 그는 그에 대해 사용된 똑같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배신당하고, 친구에 의해 거부당했으며, 징벌 받았고, 옷을 벗기웠으며, 벌거숭이로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는 순수한 비폭력으로 응대하였다.


Gene Sharp가 『비폭력 행동의 정치』에서 썼듯이, “역사를 통하여 다양한 정치 제도들하에서 세상의 모든 지역의 사람들은 갈등을 조성해 왔고 매우 다른 투쟁의 기술 - 죽이거나 파괴하지 않는 기술 - 을 사용하여 부정할 수 없는 힘을 행사해왔다. 그 기술이란 비폭력 행동이다. 이는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 기본은 항상 똑같았다: 힘의 사용은 지배받는 자들의 동의에 의존하며 그 동의를 철회함으로 그들의 상대자(opponent)의 힘을 통제할 수가 있고 심지어 파괴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의 경험에서 행하신 것이다. 그는 폭력적인 장치들을 지닌 사회로부터 그의 동의를 철회하였다.


이 폭력과 불의에 대한 신적인 응답은 - 구체적으로는 예수의 시련과 십자가 처형에서 경험된 - 부활이다. 예수 안에서 방출된 불의한 폭력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결코 성냄이나 보복이 아니라 폭력과 불의의 제한된 사법판결을 선고하는 새로운 삶이다. 그리고서 그리스도의 영은 제자들에게 옮겨져서 그들은 이 화해와 평화 만들기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었다. 폭력에 대한 신적인 반응은 오래 참음의 인내와 사랑의 영이라는 선물이자 평화를 만드는 인간 공동체에로의 부름이다.


예수가 무덤에서 마리아에게 나타났을 때 그녀에 대한 그의 말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폭력이 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더 큰 평화를 만드는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폭력 저항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두려움을 버리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다. 왜냐하면 폭력은 자신의 의지를 오직 폭력의 동반자인 죽음이 두려울 정도까지만 부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그의 십자가처형의 경험에서 가르친 것은 비폭력에 대한 열쇠는 두려움 없는 사랑에 의해 죽음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 없는 사랑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 즉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용납된 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데 헌신하는 것에 근거한다. 


Pinchas Lapide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랍비이야기를 꺼냈다. “누가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자입니까?” 랍비가 대답했다. “자신의 적의 사랑을 얻은 자이다.” 이러한 강력한 사랑에 합류하도록 구세주에 의해 초대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명예이자 도전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폭력만큼이나 비겁함을 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철저한 사랑에 헌신하고, 포괄적인 공동체와 각자의 복지를 확보하기 위한 용기를 지니고 행동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부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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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부유한 자인가?  - 예수의 복과 지배사회의 태도


누가 세상에서 부유한 자인가?  누가 진실로 축복받았는가? 무엇이 “선한 삶”을 구성하는가? 일반인들에게 8복음이라고 알려진 예수의 말씀은 그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의 지배적인 가정과는 날카로운 긴장을 가진 몇 가지 견해들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무엇이 안녕/복지 그리고 축복받음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가정의 요약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 방식에 지속적으로 도전한다.



        지배사회의 태도                                  예수가 말한 복(마 5: 1-16)


1. 모든 대답을 가진 자들은 복되도다.            자신의 영적 욕구를 아는 이들은 복되도다.  

2. 스스로를 어떤 고난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자신과 세상에서 상처를 느끼는 자들은 복되다

  자는 복되도다.

3. 타인에 대한 통제와 지배의 힘을 지닌        진리와 자비를 힘으로 보는 비폭력적인 사람은

   자는 복되도다.                                          복되도다.

4. 소유의 축적을 위해 굶주리고 갈증을          정의에 굶주리고 갈증나는 이들은 복되다.

   있는 자는 복되다.   

5. 공격자를 거칠게 대하는 자는 복되다.         모든 이에게 자비를 확대하는 자는 복되다.

6. 모든 이를 기쁘게 하려는 자는 복되다.        정직하게 말하고 사는 자들은 복되다

7. 전쟁에서 이기는 자는 복되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되다

8. 안락하게 살고 모든 논쟁을 피하는 자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박해방하는

   는 복되도다.                                              자들은 복되다.


예수의 복을 듣고 이를 사는 이들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    Peter Ed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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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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