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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의 탄생 The Birth of Sanctuary    Christian Smith
                                    (퀘이커의 평화실천 경험)

                            
짐 코버트는 1981년 5월 5일 아침에 일어나서  체포된 자동차편승여행자 hitchhiker에 대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러나 그가 하려고 하는 것이 한 사회운동을 출발시키는 것이란 사실은 알지 못했다.

코버트는 46세로서 아내 팻과 함께 애리조나 주 턱슨 교외농장에서 염소들을 치고 있는 반불구의 퀘이커였다. 전날 밤, 동료 퀘이커 친구인 짐 두룰리는   한 엘살바도르 자동차편승여행자를 태운 즉시 멕시코로 가는 길에서 미국 국경 경찰에 의해 정지를 당했다. 두룰리는 그가 빌린 밴을 돌려주고 한 멕시코 마을의 교회에 대한 계획된 건축을 토의하기 위해 코버트 집에로 오는 길이었다. 그 편승여행자는 체포되었고 두룰리는 반시간동안 심문을 받았으며 방면되기 앞서서 불법적인 외국인을 잠입시켰다는 고소를 당하게 되었다.  

두룰리가 마침내 코버트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눈에 띄게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 두려움에 떨던 편승여행자는, 그가 짐과 팻에게 말하기를, 체포되기 직전에 두룰리에게 그의 엘살바도르 국적에 대해 거짓말을 하도록 간청했다고 하였다. “그들에게 내가 당신을 위해 일하고 우리는 함께 여행을 가고 있다고 말해 주세요.” 그는 애원했다. 두룰리는 지금 그가 진실을 말한 것이 잘못이었는지 크게 당황해했다. 그는 어쨌든 국경경찰에게 속임수를 쓰거나 교묘히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짐과 팻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당신이 정지당했으며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지요.”

그러나 그들이 그 사건을 토론하면서 체포된 편승여행자에 대한 관심은 커져갔다. 그들은  엘 살바도르 시민 전쟁과 엘 살바도르 대 주교 오스카 로메로와 4명의 북아메리카 교회여성의 암살을 보도하는 뉴스 이야기를 기억했다.  그들은 10달 전에 27명의 중류 계급의 살바도르인들이 턱슨 서부 폭염의 사막 70마일을 건너다 발견되었던 것을 회상했다. 살바도르인들이 지불한 밀입국 도우미들 -“코요테”-는 길을 잃어서 그들을 버렸고, 그들은 국경경찰이 그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오줌과 화장수를 먹어야만 했다. 27명중 절반은 갈등과 땡볕으로 죽었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여러 턱슨 교회에 분산되었다. 프랭크 셔츠 역시 그날 밤 코버트를 방문하여 그가 그 나라를 도망치려고 생각할 지 모르는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로 사살분대 death squads에 의해 산 살바도르 공항에서 이송되던 한 비행기탑재 수량의 살바도르인들 모두가 사살되었다는 루머를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을 위해 개입할 어떤 방법이 있어야 하겠어” 코버트는 말했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방법을 알지 못했다. 무력하게 그들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날 밤은 이 늦어서 두룰리는 알버커크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고, 프랭크 셔츠는 그를 역까지 차로 바래다 주었다. 그리고 코버트는 침대로 갔다. 그러나 짐 코버트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두룰리의 체포된 편승여행자가 집으로 되돌려져서 사살분대의 암살을 당하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침에 코버트는 그 일에 대한 후속조처를 하기로 결단했다. 그는 미국 이민국 사무소(INS)와 국경경찰에게 전화를 했지만 국경경찰은 억류된 자들에 대한 정보를 밝힐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코버트는 그러고 나서 그의 이름이 유명한 전직 턱슨 시장의 이름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는 다시 국경경찰에 전화를 걸어서 명령하는 어투로 “나는 턱슨의 짐 코버트입니다. 나는 당신이 어젯밤 펙 카욘 도로구역에서 붙잡은 살바도르인의 이름이 필요합니다. 그의 이름과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 순경은 찾아보더니 그에게 정보를 알려 주었다.

몇 번 더 전화를 지역의 이민권리단체, the Manzo Area Council에 한 후에야, 코버트는 법적위원회를 지칭하는 이민국 G-28 서식에 서명되어 보고되면 그 체포된 여행자가 청문회 없이는 이송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코버트는 노갈레스 산타 크루즈 감옥에 차를 몰고 갔다. 편승 여행자, 넬슨은 거기에 구금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코버트는 넬슨을 만나 G-28에 서명을 하게 하였다. 코버트는 또한 두 명의 다른 체포된 피난민을 만났는데 그들은 엘 살바도르에서의 유괴와 고문에 대한 으스스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에게 해 주었다. 그는 그들의 생명이 만일 이송되지 않으면 위험할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그들에 대해서도 G-28 서류 수속을 하기를 결정했다. 간수는 그가 더 이상 G-28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에 코버트는 근처 국경경찰소로 차를 몰아서 갔다. 거기서 경찰은 그에게 G-28들을 내어주기 전에 반시간 그를 지체시켰다.

감옥으로 되돌아 온 코버트는 두 다른 간수들을 다시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30분이 지났다. 코버트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5시까지 턱슨 이민국에 있는 G-28들을 얻기 위해 노갈레스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다시 살바도르인들을 보자고 청했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간수가 대답했다 “오, 이들 둘을 보기를 원합니까? 국경경찰이 그들을 20-30분전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코버트는 아찔한 느낌이었다 - 그는 자신의 정부의 정부직원들에 의해 속았던 것이다. 그는 성이나서 씩씩거렸다, 이것은 관료정치의 혼란이 아니라 도피자들의 법적권리를 박탈하고 그가 생각하기에 거의 죽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재빨리 이송하기 위한 고의적인 노력이었다. 짐 코버트는 국경경찰에게는 국경을 넘어선 잘못된 인간으로 판명이 된 것이다...

코버트는 그가 소유한 트레일러를 담보로 4,500불을 빌려서 4명의 살바도르 여인과 한 어린이를 감옥에서 보석으로 석방시켰다. 코버트의 소유지인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이들 난민들은 짐과 팻에게 엘 살바도르의 폭력과 피난민 생활에서의 테러들에 대해 전해 주었다. 그들을 통해 ‘피난민 문제’와 중앙 아메리카에서 미국 지원의 전쟁간의 연결이 점차적으로 명백해졌다. 짐 코버트는 살바도르 피난민들이 이송되지 않도록 좀더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이민국과 국경경찰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고 더욱 절망해야 했다.

5월 30일에 코버트와 한 동료는 로스 앤젤레스로 차를 몰고 가서 엘 센트로에 있는 한 주요 이민국 억류센터에서 그가 기다리는 동안 산타 크루즈 감옥에서 25일전 급하게 이송된     피난민을 찾았다. 피난민권리를 위한 한 변호사 보조원이 G-28 서류를 진행시키기 위해 엘 센트로에로 최근에 여행할 때 한 이민국 관리가 G-28을 그녀의 손으로부터 낚아채서 그것들을 찢고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코버트는 이번에는 그가 찾던 피난민들, 특히 두룰리의 체포된 편승여행자 넬슨을 찾겠노라고 굳은 마음을 먹었다.

그 대신에 그가 찾은 것은 - 방에서 넬슨을 알고 있던 한 간수가 코발트가 감옥감독관과 하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 넬슨은 이미 엘 살바도르로 이송되었다는 것이다. 코버트는 그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코버트가 5월 5일에 그의 G-28을 수속했기 때문에, 넬슨의 이송은 불법이었다! 그 감독관 아구레씨 Mr. Aguirre 는 도착때 그는 넬슨에 대한 아무런 기록을 갖지 않았다고 코버트에게 말했다. 그러나 정직한 한 간수가 다르게 주장하자, 아구레는 급히 모든 간수들로 하여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코버트는 즉시 떠날 것을 명하였다. 코버트는 이제 화가나서 거부하였다. 그러자 아구레는 코버트의 친구가 테이프 레코더로 전체 대화를 녹음한 것을 알아차렸다. 아구레는 그것을 넘기도록 요구하였다. 코버트는 강제로 빼앗으라고 응답하였고 그들은 지금 떠나길 원한다고 하였다. 아구레는 방문을 잠그고 그 기록기를 요구하였다. 코버트는 피난민의 권리에 대해 아구레에게 강의를 하였다. 아구레는 격노하여 그 방으로부터 사납게 나갔다. 몇 분후 그는 되돌아와 그들을 방면하였다.

그 경험은 분격시켰다. 미국 정부는 자신의 법을 어기고 수천 명의 중앙아메리카 피난민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음을 코버트는 알게 되었다. 이는 싸워야만 했다. 코버트는  피난민들의 어려운 입장을 설명하면서 500 퀘이커 모임들 그리고 나라 전체의 퀘이커 개인들에게 “Dear Friend"라는 시리즈 편지들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 편지에서 그는 이민국 정책을 비판하고 보호시설 요청서가 검토받는 동안 감옥의 살바도르 피난민들을 자유롭게 할 보증금을 내도록 돕는 기부를 요청하였다. 이것은 불법적인 외국인들을 돕는 데 효과있는 유일한 합법적인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코버트는 이민국 법을 어길 필료의 가능성을 암시하였다. 그는 썼다, “나는 정치적 피난소에 대한 중앙아메리카 피난민들의 권리가 결정적으로 미국 정부에 의해 거부되거나 혹은 미국 법률제도가 우리의 지불 능력을 초과하는 몸값을 요구한다면, 능동적 비폭력은 피난민들이 그들의 운명에로 버려지는 데 대한 유일한 대안이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에 퀘이커들은 남북전쟁직전의 남부를 노예들이 도망치도록 돕기 위해 지하 철도를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코버트는 지금 중앙 아메리카 피난민들을 지원할 비슷한 현대판 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멕시코에서 능동적으로 관심있고, 상호 지원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 창조는 [불의한 이민국 정책]에 대한 적절한 응답에 대한 최상의 준비일 것이다...”라고 코버트는 썼다.

6월까지 코버트와 마노지역위원회 Mano Area Council는 피난민들을 감옥에서 나오는 보증금을 위해 150,000불을 모금했다. 코버트 부부는 자기 소유지에서 20명의 살바도르인들을 살게 하고  여러 턱슨 교회들의 가정들에 많은 피난민들이 살았다. 그러나 그들이 돈을 더 모을수록 이민국도 중앙 아메리카인들을 위한 보석금을 올렸다 -비록 멕시코인들을 위해서는 안 올렸지만. 보석금은 개인당 250불에서 1000불로 그리고 3000불로 뛰었다. 그것은 지는 게임이었다.

다른 문제는 정치적 보호소에 신청하는 중앙아메리카인들은 조직적으로 이민국에 의해 차별을 받는 것이었다. 보호소를 인정한다는 것은 함축적으로 미국에 의해 지원받는 정권과 세력들에 의한 인권과 정치권에 대한 거대한 폭력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레이건 행정부를 부끄럽게 했기에 중앙아메리카인들에 대한 정치적 보호소는 거의 항상 부정되었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예를 들어오직 살바도르인 2.6%와 0.9%의 구아테말라인들이 보호소 신청에 승인되었다. 이는 이란인 60.4%와 루마니안인 51%,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인 37.7%의 승인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므로 중앙아메리카인들을 감옥으로부터 보석으로 꺼낸다는 것은 실제로 오직 그들의 이송을 연기하는 것일 뿐이다. 코버트는 보석금 보증 정책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을 감옥에서 과대한 돈으로 빼내기 보다는 피난민들을 안전하게 잠입시켜서 그들을 우선적으로 감옥으로부터 떨어지게 하지 않는가를 생각하였다. 여전히 당분간 그는 보석금을 모으는 것에 지속하였다.

6월 26일은 전환점이었다. 그날에 코버트는 정치 보호소에 신청하기 위해 턱슨 이민국에로 죽음의 위협하에 엘살바도르를 탈출한 세 명의 살바도르인을 만났다. 그는 그들의 신청이 결과적으로 거부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이민국은 항상 지역 목회자들의 감독하에서는 보호소 신청자가 자유롭도록 하였다. 반면 그들의 신청은 상고중이었다 -매우 긴 시간을 끌며. 코버트는 살바도르 시민전쟁이 끝날 것에 대해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 날에 그러나 턱슨 이민국 국장인 윌리암 존슨은 세명의 신청자를 체포하도록 명령했고 각각에게 3,000달러 보석금을 정했다. 코버트는 필사적으로 시위했다. 이는 체제 안에서 그가 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이민국이 보호소 신청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한다면 교회들은 다른 선책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들은 그들의 피난민들을 지하에 취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을 것이다. 코버트에 따라서 존슨은 국무성으로부터의 명령에 따라 살바도르인들에게 피난소를 주는 것은 미국 행정부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신청자들은 체포되어 엘 센트로로 보내져야 한다고 코버트에게 대답하였다. 코버트와 존슨은 한 시간 동안 논쟁을 하였다.
5시에 코버트는 떠날 것을 요청받았다. “우리는 이들 백성들이 그들의 운명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코버트는 경고하였다.

그후 즉시, 코버트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막의 지식을 통해 피난민들을 스스로 안내해서 이민국 도로구역을 우회하여 턱슨의 친구들과 친척들에게 그들을 호송하였다. 그런 행동이 법에 저촉된다는 것은 그때까지 코버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이 위험에 빠진 외국인을 보호하는 것이 그에게는 도덕적 의무였다. 뉴렘버그 부족들이 - 코버트의 변호사 아버지 짐이 불러서 가족의 저녁 식사에서 토론하였다- 그것을 증명하였다. 코버트는 그 다음에 동정적인 학생들, 주부들, 교수들 그리고 은퇴자들을 “턱슨 피난민 지원 그룹”으로 조직하였고, 이 그룹이 비밀잠입 활동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탈출 봉사“에 의해 지원받은 피난민 숫자는 은밀히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8월 중순까지 코버트 자신은 하루에 한 두 번 여행을 해서 그의 픽업트럭으로 서류되어있지 않은 외국인들을 수송하였다.

Manzo 지역 위원회 회원들과 새롭게 형성된 중앙아메리카 턱슨 에큐메니칼 위원회 실무진(TEC) - 여기에 코버트가 소속하였다 -는 그러나 법을 깨뜨리는 것에 좀 더 신중하였다. 그들은 코버트의 일을 이해하고 지원했지만 살바도르인을 엘 센트로로부터 보석금으로 빼내는 일에 지속하기로 선택하였다. 7월 중순까지 그들은 합동으로 175,000불을 모아서 115명의 피난민을 석방시켰다-억류센터에 있는 모든 살바도르인들을.

여름말까지 코버트는 피난민을 떠나도록 하기 위한 장소들이 동이 나기 시작했다. 그의 집은 살바도르인들로 넘쳐흘렀고, 그들의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감정적이고 알코올 문제를 지녔으며 그의 아내 팻도 진퇴유곡에 빠졌다. 코버트는 불법적인 외국인들에게 방을 제공하기 위해 수많은 지역 교회들을 접촉하였지만 각각은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가을 초에 TEC 모임 후 코버트는 TEC 모임을 주선하고 있으면서 턱슨 남부 장로교회의 41살 된 목사인 존 파이프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는 말했다, “존, 우리는 사람들을 은닉할 장소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피난민들이 당신의 교회에서 머물게 하는 것이 어떤가요?” 파이프는 이미 수 주 동안 불법자들을 은닉해 주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저울질 해 왔음이 밝혀졌다. 그는 그것이 하기에 옳은 일임을 원칙적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했는데 만일 그가 체포된다면 그의 가족의 복지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코버트에게 그가 교회의 다음 장로 회의에서 그 생각을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남부장로교회의 다음 장로 모임까지 그러나 파이프는 결심을 하였다. 그의 신앙과 윤리가 피난민을 받아들이는 데 다른 선택을 할 수 없게 하였다.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은 그가 판단하건대 비도덕적인 것이 된다. 그는 이것을 모이에서 장로들에게 설명하고 5시간의 토론후에 그들은 동의하였다. 7대 0의 투표와 2명의 불참으로 장로들은 그들의 교회건물에 불법의 외국인들을 은닉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다음 일요일에 파이프는 전 교회에 그 결정을 공표하였다. 몇 주내에 파이프와 TEC의 다른 사람들이 서류 없는 피난민들을 수송하는 데 코버트와 합류하였다. 비록 남부교회의 회원들이 가능한 한 신중하게 행동하였지만 도시 목회자들이 공개적으로 이민법을 어긴다는 루머를 턱슨 이민국이 듣는 데는 오직 한 달이 걸렸다. 감사절 직전에 한 이민국 법률가가 도시 법정에서 TEC 활동가인 마르고 코완에게 다가와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는 파이프와 코버트가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멈추지 않으면 우린 그들 고집쟁이들을 잡게 될 것이다.”

코완과 파이프는 파이프의 거실에서 긴급 TEC 모임을 열었다. “우리는 두가지를 할 수 있다.” 파이프는 추측했다. “우리가 계속 일해서 그들이 우리를 고소하기를 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간단한 토론 후에, 모든 이들은 법적 절차가 심하게 잘못되었고 그들은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에 동의를 하였다. 파이프는 그러고 나서 불가피한 체포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에 대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대중에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펀치를 날리자” 파이프는 말했다. 그 방법으로 그들은 높은 도덕적 근거를 주장할 수 있고 이민국이 다른 많은 “코요테”들을 낙인을 찍어 그들을 멀리 데리고 가기 전에 공개적으로 스스로 언론과 교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다.

공개 선언의 날은 3월 24일로 잡혔다 - 대주교 로메로의 암살의 2주년 기념일이었다. TEC의 팀 논은... 그 큰 이벤트의 날에 앞서서 수 주 동안 메디아의 관심과 교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풀타임으로 일했다. 

3월 24일 아침에 파이프와 다른 이들은 교회계단에 테이블을 설치하고 두 개의 플랭카드를 달고 거기에 스페인어로 “이곳은 중앙아메리카의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성소이다” 그리고 “이민국은 하나님의 성소를 세속화시키지 말라”였다. 오전 10시에 40개 뉴스 기자들과 TV 기자들은 여러 유럽 기자들과 캐나다 방송국 하나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성소로 알려진 운동에 대한 남부교회의 공개적 선언을 다루기 위해 도착하였다. 교회가 공개적으로 연방법을 어기는 것은 큰 뉴스였다.

코버트는 수개월동안 국경을 넘어 피난민들을 밀입국시켰다는 것을 기자들에게 말하면서 뉴스 컨퍼런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Manzo 지역 위원회 변호사들은 이민국법의 불의를 설명하였다. 그다음 파이프는 그가 전날 대법원장 윌리암 프렌취 스미스와 다른 주 그리고 이민국 관리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는 교회가 법을 어기고 성소를 선언한다는 선언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현재의 정책과 중앙 아메리카 피난민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실천이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임을 믿습니다.” 편지는 계속 읽혀졌다. “우리는 교회의 성소를 중앙 아메리카로부터 온 서류 없는 이들에게 확대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마침내 한 살바도르인, 알프레도가 그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마스크 하고서 미국에서 정치 보호소를 찾도록 하게 한 엘 살바도르에서의 폭력에 대해 말했다...

이민국은 곧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사그라질 작은 진기한 사건으로 성소를 공개적으로 다루도록 결정했다. 어떤 체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후에 나타난 사실은 이민국은 깊이 성소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고 돈 주고 산 내부 고발자에 의해 그 운동에 대한 비밀 조사를 시작했던 것이 밝혀졌다.

성소로서 첫 해에, 남부 장로교인들은 1600명의 살바도르인들을 주 전역의 좀 더 항구적인 집에 안착시켰다. 그리고 전국적이며 종교적인 언론이 그 운동에 첫 페이지 커버 뉴스를 제공하여 성소에 대한 말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점차적으로 주 전역에 흩어진 교회들이 공개적인 성소를 선언하였다... 1983년 초기까지 45개 이상의 교회와 회당이 공개적인 성소를 선언하고 600여개의 “2차 성소 그룹들”이  동의서를 제공하고 지원을 하였다. 그 운동은 뉴잉글랜드로부터 남부 캘리포니아까지 번지게 되었다......

1983년에는 다른 교회들과 회당들이 공개적인 성소 선언을 하였다. 그때까지 종교적 그룹들은 한 주 두어 개의 비율로 성소에 대한 선언을 하였다. 1984년 처음 6개월에는 총 성소 수자가 150으로 두 배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18개 전국 교파들과 위원회에서는 공개적으로 성소를 승인하였다. 명확하게도 성소 운동은 이민국이 희망하듯이 사소한 것으로 사라지게 되지 않았다. 성소의 중요성을 공개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민국은 좀더 공격적인 전략으로 바꾸었다. 1984년 2월에 텍사스 성소 활동가 스테이시 린 메크트와 다니엔 무렌캄프 수녀가 서류 없는 피난민을 우송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1985년 1월에 사법부는 16명의 아리조나 성소 활동가의 기소를 공포하였다. 여기에는 코버트와 파이프, 세명의 수녀, 두 명의 신부, 한 간호사, 한 주부 그리고 한 대학원생을 포함한다. 오랫동안 기다린 직접적인 정부와의 대결이 다가왔다.

그러나 체포는 오직 운동의 가시성을 증대시켰고 나라 전역에서 지원의 쏟아짐을 불러일으켰다.... 아리조나 기소후 일주일 동안, TEC가 조직한 성소에 대한 전국 심포지엄에 대한 등록은 300명으로부터 1500 참여자로 뛰었다. 로스 앤젤러스 도시와 뉴 멕시코 정부는 스스로를 성소로 선언하였다. 1985년 중엽까지 성소의 선언 숫자는 250으로 올라갔다. 2년이후, 그 숫자는 400명으로 성장하였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소 운동은 외국인을 보호하고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정책에 시위하기 위해 기꺼이 연방법을 어기려는 사람들의 숫자의 증가를 지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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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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