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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nie Lou Hamer: 불에 의한 세례 Baptism by Fire"  Susan Kling


그때가 1962년 여름이었다. 마술적 언어 “자유!”가 남부 전역을 들바람처럼 불어쳤다. 8월 말,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SCLC)의 제임스 베벌(James Bevel)이 미시시피주, 룰레빌(Ruleville)에 내려왔고,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the 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의 제임스 포만(James Forman)과 뜨거워지는 시민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흑인, 백인 활동가들과 함께 거기의 한 교회에서 대중집회를 소집하였다.

파니 루(Fannie Lou)는 이 집회에 참여하였고 그녀의 삶은 갑자기 변화되었다. “나는 결코 전에 자유의 노래들을 불러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놀라면서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경청하였다: “그들은 진정으로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그들은 흑인들이 투표에 등록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흑인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떤 작은 말을 할 수 있기를 원했다.

파니 루는 그녀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 이것이 아마도 한평생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던 기회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와 교회의 다른 17명이 투표에 등록하기 위해 다음 금요일 선플라워 카운티 법원에 가는 데 서명하였다. 어떤 투표나 특별한 준비계획도 없이 그녀는 그 그룹의 인도자가 되었다. 다음 금요일 8월 31일 그녀와 다른 17명의 흑인들은 두려워했지만 확고한 마음으로 우정어린 한 흑인이 소유한 버스에 올라타고 인디아놀라의 법원으로 차를 몰았다.

경찰과 다른 백인들이 버스가 섰을 때 버스주위로 모여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명은 파니 루가 선두에 서고 용감하게 법원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들은 즉각 밖으로 나가서 한 번에 두 명씩 들어오라는 말을 들었다.

파니 루는 스물하나의 질문들을 받았다. 그 중에는 그녀로 하여금 미시시피 헌법의 한 부분을 베껴서 해석하라는 요청이 포함되었다. “나는 그것을 복사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해석할 수는 없었습니다 - 왜냐하면 그때까지 나는 미시시피가 헌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까요.” 그녀는 등록시험에 실패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몇 번이 되든 그녀가 통과할 때까지 되돌아오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늦은 오후에 그녀와 함께 다른 모든 이들이 같은 절망적이고 위협적인 날을 겪고 라이플총을 소지한 백인들이 법원안과 밖에서 그들을 지나서 걸어 다니는 것을 경험한 후, 그들은 버스에 올라타서 집으로 출발했다. 그들이 오직 몇 마일 갔을 때 한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고 인디아놀라로 되돌아갈 것을 명령받았다. 거기서 운전사는 “잘못된 색깔”의 버스를 몰았다는 것으로 $100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파니 루에 대한 심각한 반격이 투표에 등록하고자하는 그 첫 시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날이 또한 그녀의 나머지 생애동안 지속한,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의 새로운 수준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그녀가 등록하려고 노력할 때 무엇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는 1964년 6월 8일 월요일에 워싱톤DC의 국립극장에서 열린 미시시피와 시민권에 대한 배심원들 앞에 열린 청문회에서 알려진 것으로 1964년 6월 16일 국회기록에 기록되어있다:

“... 나는 1962년 8월 31일 첫 시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1등 시민이 되기 위한 등록을 시도하기 위해 카운티 법원에로 26마일을 여행하였다. 1962년 8월 31일에 내가 18년간 시간기록원과 소작인으로 일하던 대농장으로부터 실직하였다. 내 남편은 거기서 30년을 일했다.

내가 법원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애들과 남편조카가 말하기를 남편을 고용한 자가 크게 소란을 부렸다고 하였다. 내가 집으로 들어가자 얼마 있지 않아 남편이 들어와서 이 대농장 주인이 남편으로 하여금 내려가서 철회하지 않으면 농장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 대농장주인은) 말하기를 “파니 루, 당신은 법원에 가서 등록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미시시피에서 이를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하였다. 나는 말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등록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등록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미시시피에서 이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철회해야 한다. 나는 당신의 대답이 예인지 아닌지를 기다리고 있다.”

“난 단지 지켜볼 것이다.  내일 아침까지 기간을 주겠다.” 그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단지 같은 밤을 보랬다.” 그녀는 배심원에게 그녀의 남편이 수확기 이후까지는 그 대농장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룰레빌의 친구 집으로 그녀를 보냈다. 그녀는 또한 대농장 주인이 그녀의 남편 팝(Pap)에게 만일 그가 파니 루와 함께 가기로 결정한다면 그들의 가구는 몰수되고 팝은 일자리를 잃게 될 것임을 경고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가족에게 집과 남편이 생계를 벌 몇 수단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파니 루는 남편과 강제로 떨어져 있어야만 하였다.

배심원에 대한 그녀의 보고는 지속되었다, “9월 10일에 그들은 로버트 쿠커(Robert Cuker) 부부의 집안으로 나를 향해 16번의 총질을 하였다. 같은 날밤 두 소녀가 헤르만 시썰(Herman Sissel) 씨의 집에서 총에 맞았다. 또한 그들은 조 마글론(Joe Maglon)씨 집으로 총을 쏘았다. 나는 그날 실직 당했고 그이래 직업을 얻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은 어쨌든 실직 당했고 가구는 대농장 소유주에 의해 몰수당했는데, 그는 그들의 자동차 역시 $300의 빚이 있다고 하면서 차압하였다.

파니 루는 사실상 탈주자가 되었고 이곳저곳에서 친구들이나 먼 친척집에 머물렀다. 마침내 가족은 그들이 옮겨갈 형편없는 집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심지어 여기서도 그들은 평화롭게 남아있지 못했다. 라이플로 무장한 백인들이 가득 탄 차가 집 앞에서 이리저리로 달리며 욕지기를 내뱉고 총질의 위협을 가했다.

만일 가족의 어느 누구가 집을 떠났다면 어떤 이유든 차들이 따랐고, 백인들이 창문에 기웃거리며 욕하고 저주하며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복들, 그녀가 받은 욕하는 편지들 또한 오직 그녀를 단호하게 만들고 더욱 그녀가 발걸음을 내딛는 길로 향하도록 더욱 확고하게 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 그들의 지속적인 신뢰를 그녀에게 보내며 견고히 그녀와 함께 서게 되었다.

마침내 그녀에게 일어난 것에 대한 말들이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미시시피 풀뿌리 시민권운동의 지도자인 로버트 모세가 룰러빌에 와서 파니 루를 초대하여 1962년 가을에 테네시주 나쉬빌의 피스크(Fisk)대학에서 열린 학생비폭력조종위원회회의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그 회의는 그녀에게는 더욱 전적인 헌신을 주입시켰고 그래서 그녀는 이 위원회를 위해 일하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이 아무런 돈이 없었을 때에.” 이 일이 그녀에게 일종의 안전을 제공하였다. 왜냐하면 그 후 그녀는 그녀가 스스로 지키고자 한 이상에 있어서 혼자가 결코 아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장간사(a Field Secretary)로서 SNCC를 위해 일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활동에도 정력적이었다. 그녀는 궁핍한 가정들을 위해 정부로부터 양식과 옷을 얻기 위해 청원서를 돌렸다. 복지 프로그램이 시작하도록 도왔고 사람들로부터 옷을 걷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며 계속해서 돕고자 오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이 모든 일에 추가하여, 그녀는 룰러빌 목화제조일에 한동안 고용되었는데 이는 흑인들을 투표에 등록하도록 시도한 일로 실직되었다. 다시 그녀는 자신의 집을 떠나야만 했다.

그녀가 두 번째로 등록시험을 보로 12월 4일에 선플라워 카운티 법원에 되돌아 왔을 때 나중에 그녀가 설명했던 것처럼, “그들은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나를 실직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직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집밖으로 내몰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더 이상 나로부터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나를 심지어 30일간 내가 통과될 때까지 볼 것이다.” 그리고 1963년 1월 10일 그녀는 통과되고 투표등록을 할 선플라워 카운티의 30,000 흑인들의 첫 번째중 한명이 되었다.

그러나 1963년 1월 3일, 그녀는 그 권리를 위해 그리고 흑인들이 등록하도록 하는 일을 위해 무거운 보상을 해야 했다. “나는 남부 캐롤리나, 찰레스톤에 있는 투표교육워크숍에 갔었다” 그녀가 의회배심원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1963년 6월 3일 미시시피를 떠났다. 6월 8일에 그 워크숍을 마쳤고 8일에 대륙횡단버스로 떠나서 미시시피로 되돌아갔다.”

“우리는 6월 9일 오전 10시 30분에서 11시사이에 미시시피주, 위노나에 도착했지요. 우리 그룹의 4명이 버스 터미널에서 음식을 얻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둘은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내렸구요. 나는 여전히 버스에 있었지요. 나는 6명이 달려나오는 것을 보았고 무엇이 일어나게 되는 지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안 폰더양이 경찰간부와 주 고속도로 순찰관이 그들로 하여금 나가도록 명령했다고 나에게 말했지요. 나는 말했지요. ‘이보세요, 이곳은 당신들을 위한 미시시피입니다.’ 나는 갔다가 버스에 되돌아왔습니다. 내가 차창밖을 보니 그들은 흑인들을 차에 태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폰더양의 다리미를 붙잡았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지요. 내 친구들이 소리쳤습니다. ‘버스로 돌아가요!’” “백인관리가 내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체포한다. 차에 타시오.’ 내가 차에 타자 그는 나를 발길질했습니다. 차에서 그들은 나를 심문했지요. 내가 대답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저주하고 입막음을 하고 공포스런 이름으로 날 불렀습니다.”

“그들이 나를 몽고메리 카운티 감옥으로 끌고 갔지요. 후에 나는 폰더양의 목소리와 발길질 소리들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두렵게 울부짖었지요.”
“그때 세명의 백인이 내 방으로 왔습니다. 주고속도로 순찰경찰(어깨에 표지를 달고 있었지요)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지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룰레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조사해 보겠다.’ 그들은 떠났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말했지요. ‘네 말이 제기랄 맞구나!”
“그들은 내가 죽은 것으로 없애버릴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들이 내 머리를 숙이게 하고 두 흑인 간수들로 하여금 곤봉으로 때리도록 명령했지요. 그것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가죽으로 되어 뭔가가 들어있었지요.”

“첫번째 간수는 그가 지치도록 나를 때렸지요. 그리고 두 번째 흑인이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발을 절었지요. 6살쯤 소아마비를 앓았지요. 나는 내손을 뒤로 해서 내약한 발을 보호했습니다. 나는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주 고속도로 경찰이 다른 흑인더러 내 발을 앉히도록 명령했습니다.”
“내 옷이 올라가서 나는 그것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한 경찰이 다가와서 내 옷을 높이 치들었지요. 그들은 내 몸이 굳어질 때까지 때렸습니다, ‘손가락을 굽히거나 말을 들었어도 내가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이것이 내 왼쪽 눈에 이 붉은 흉터를 가진 이유입니다. -이제 시력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 등을 때려서 내 신장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녀는 피를 흘리고 난폭하게 구타당하고 독방을 나갔다. 옆방에서 구타당하고 있는 안 폰더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백인들이 “우리를 죽여서 시체를 아무도 찾지 못하는 빅 블랙 강에로 던져버리자는 음모를 꾸미는” 대화를 들었다.

마침내 구타와 위노나에 억류되어 있다는 소리가 마틴루터 킹의 귀에 전달되었다. 그는 몇 명의 직원들을 감옥에 보내어 파니 루와 다른 사람들이 즉시 석방되도록 요구하였다. 앤드류 영과 제임스 베벌이 감옥에 가서 반쯤 의식불명에 있는 그녀가 나오도록 돕고 그녀를 미시시피주 그린우드에 있는 의사에게 보내져 거기서 피를 닦고 상처가 바늘로 꿰메지고 붕대를 감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녀를 아틀란타로 데리고 가서 시민권운동의 몇몇 친구들에게 보내졌다. 거기서 한 달을 머무르며 건강을 회복하였다. 이 한 달 동안 그녀는 남편이 와서 얼마나 끔찍하게 보이는 지를 보기 위해 오는 것을 거부하였고 어느 정도 상처들이 덜 검푸르게 되고 붓기가 가라앉게 되었다. 그녀가 위노나 감옥에 있는 동안 친구들에게 말했다, “메저 에버스가 살해당했다. 그들은 어느 날 밤 우리를 나가도록 하였지만, 나는 그것이 그들이 우릴 죽일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임을 알아서 말했다. 우리는 도망가려 할 것이라고. 나는 그들에게 내 독방에서 나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구타의 결과들이 파니 루에게 나머지 일생을 괴롭혀서 때때로 그녀는 신랄하게 말하곤 한다, “나는 병들어 있고 병든 것에 지쳐있다, 지쳐있다구.”

이렇게 끔찍한 경험은 오직 그녀를 더욱 흑인들이 등록하도록 확고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움직일 수 있자마자, 비록 발을 절고 고통으로 메스꺼울지라도, 그녀는 목화들에 나가서 장래의 투표자들을 정렬시켜서 그들에게 투표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지를 말했다. 밤마다 그녀는 시골의 수많은 작은 교회를 돌면서 투표등록에 대해 말했고 그녀가 배운 자유 노래를 그녀가 부른 것을 들은 모든 이들을 감동시키는 강력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근거지는 항상 거기서 태어나서 양육된 룰러빌이었다.

구타도 끊임없는 증오의 편지도 그리고 폭언의 전화도 그녀의 일을 막을 수 없었고 멀리 떠나는 것을 거부하였다. “나는 어떤 장소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주장했다. “나는 여기에 머물 권리가 잇다. 내 부모와 조부모가 미시시피에 보낸 그 모든 것으로 인해 나는 여기에서 머물러 그들이 갖지 못한 것을 위해 싸울 권리가 있다.” 그리고 위노나 감옥에서의 그녀의 경험이후 덧붙였다, “나는 더 많은 동등한 권리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구타한 사람들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권리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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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박사 | ecopeac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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