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en text 성서의 녹색화 묵상 -출애굽 3장 떨기나무로부터 신의 응성을 듣다 :: 2008/03/20 08:52
떨기나무로부터 신의 음성을 듣다
텍스트: 출애굽 3장
한 때 왕궁의 화려함과 지배통치의 혜택을 누리던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긴 세월을 무위도식의 생활로 보내고 있었다는 것은 겉으로 볼 때는 문제없었던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내면에 있어서는 매우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임이 짐작이 간다. 낯 선 곳, 광야의 일상은 언제나 평범하였고, 똑같았으며, 중요한 일이라곤 들짐승에 양이 물려가는 정도였으니 그 심적인 막막함과 단조로움의 반복은 모세의 내면세계에 있어서 그리 쉽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 놓고 있었을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양떼를 몰고 가던 모세는 떨기나무(가시덤불, a bush)를 통하여 거룩한 분의 나타남을 경험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그리고 사명을 갖는다. “이제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부르짖음을 듣고...알고,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라는 한 영혼의 소명에로의 부름은 바로 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뒤이어 이슬람교의 존재근거를 낳는 시원적 사건으로서 ‘출애굽 사건’을 가져온다. 이리 저리 떠돌며 방황하고 사회적으로 낮은 천민들로서 다양한 민족, 사회신분을 갖고 있던 ‘하비루(히브리인)’들이 이 출애굽 사건의 경험을 통해 신성함(십계명 1-4)과 상호배려(십계명 5-10)의 계약공동체라는 새로운 존재집단인 ‘이스라엘’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갖고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출애굽 사건이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자신을 계시하였으며 그를 아는 우리는 누구이고 어떤 삶의 미션을 받았는지를 알게 하는 패러다임을, 한 관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도기독교에서는 잊혀 왔지만 언제나 예언자적 전통속에서, 수도원을 통해, 공동체운동과 기독교 사회개혁운동과 오늘날의 기독교생명평화운동에 맥을 이어왔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 지상의 삶에 관심하고(“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고통에 선제권을 지니고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신다(“보고, 듣고, 알고, 인도해 내리라”)는 것이다. 지배, 억압, 그리고 고통과 포로됨의 애굽생활이라는 현실이 지닌 어둠의 통치에 대항하는 샬롬의 통치에로의 신의 의지를 그들은 확인하고, 계약을 통해 거룩함과 상호배려의 신앙공동체(이스라엘)의 건설에로 소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이렇게 수동적 존재로서 삶의 환경에 의해 이끌려 온 그와 하비루들이 역사화라는 삶의 과제와 의미를 능동적으로 살아내는 데는 바로 한 떨기나무/가시덤불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한 자연물을 통해 그는 신성과의 만남, 부르심의 경험 그리고 회복된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가 수많은 세월동안 늘 지나가며 보았던 평범하고도, 별 유익한 대상도 아니며, 특이한 독특성과 주목을 끌지 못하던 자연적 존재의 ‘사라지지 않고 불타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그는 뭔가 큰 충격을 받고 인생이 전환되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어쩌면 사라지고, 망각되며,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가시덤불’은 갑작스럽게 ‘to be'라는 삶의 궁극성을 열어 보이면서 신을 깨닫게 된다. “I-am-that-I-am." 연약하고 사라질 존재조차도 'to be'의 권리가 있다는 존재감각을 경험하면서 그 ’to be'(있으라!)의 궁극 현실로서 the power of 'to be’혹은 ‘to be'의 근원 에너지로서 신성의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기 삶의 ‘to be’(있으라!)를 회복하게 된다.
토마스 머튼은 말했다. “개체안에 전체성이 존재한다.” 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존재에는 전체성(wholeness); 원래 구원<salvation>이란 말은 라틴어 salus에서 왔다. 이는 salvation, health 그리고 wholeness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이 숨어있다. 한 개체인 떨기나무와 개체인 한 존재인 모세는 이 ‘전체성’의 현시를 통해 삶의 궁극성과 자기 삶의 우주적 힘을 회복하게 된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분열되고 사라져 없어지는 개체를 넘어서서 전체성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궁극적인 거룩하신 존재(“I-am"이라 스스로를 소개하시는 Is-ness이신 분)에 열려지게 된다.
일상의 으레 그렇게 돌아가는 패턴속에 거추장스럽거나 눈을 줄만한 아무런 것도 없던 덤불/떨기나무에 대한 자세한 주목은 뜻밖의 만남과 은총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에게 속해있는가? 삶은 누가 관할하시는가? 궁극적인 것은 무엇인가? 확연하게 투명해지고 명료해진 그는 이제야 비로소 사라짐의 너머의 영원, 일상의 세상의 중력을 넘는 은총에 의해 사로잡히게 된다. ‘가시덤불이 사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는’ 것을 목도하면서 그는 이제 자신의 고통어린 덤불을 오히려 영혼의 불꽃으로 승화시켜 그 후 40년을 신과 그의 백성을 위해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게 되었다. 그 ‘떨기나무의 불꽃’의 현전이 가슴에 담겨 일생을 자신도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살았기에 그의 나이 120세의 임종을 맞이할 때도 “그의 눈은 아직 정기를 잃지 않았고 그의 정력은 떨어지지 않았다”(신34:7)고 한다.
신의 파토스(열정)에 감염이 되어 그는 그렇게 또 다시 뒤따라오는 수많은 다른 가시덤불들을 점화시켜 불꽃으로 일어서게 하고 있다.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내 백성을 가게 하라.” 신에 의한 창조물은 단순한 객체/물건이 아니다. 모두가 자신을 넘어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지어주신 분을 어느 방식으로든 지시하고 환기시키며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 분’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들은 사라져 뒤로 물러나는 겸비를 지닌다. 자기 주장없이 궁극을 드러내는 겸비를 보여준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1-4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