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즐기고 응답하기 :: 2007/11/18 01:15

                       6장:  분노를 즐기고 응답하기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의 부분이다. 당신은 그것과 친하게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Tori Amos, 팝록가수


“나에게 음악은 우리의 고통을 표면으로 끌어내는 수단이다. 그 고통을 겸손하고 부드러운 장소로 데리고 오면 그것의 화는 상실할 수 있게 되고 다시 자비가 될 수 있다.”

- Paula Cole, 가수겸 작곡가


지금까지 우리는 감정과 욕구의 측면에서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토론해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특히 듣고 표현하는 데 있어 도전을 받는 감정의 꾸러미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wild card)'이 하나있는 데 그것이 분노이다. 판단에 관련되었고 금세 분리로 이끌어지며, 심지어는 물리적 폭력을 수반하는 분노는 불과 같다: 위험하고 파괴적이며 통제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모든 감정처럼 분노/화는 또한 하나의 선물로 보여질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이 휘발성이 강한 감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분노가 어떻게 우리의 가치를 확인하게 하고 진정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지를 알아보도록 한다.


♣ 오직 한 사람이 당신에게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화를 기억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어느 다른 누구도 당신을 화나게 할 수 없다;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2장에서 이 아이디어를 만났다-우리의 느낌들은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욕구에 의해 원인되어진다―. 그리고 이 개념은 화를 이해하는 데 중축을 이룬다. 먼저 이것은 커다란 도약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의 느낌들에 대해 타자를 비난하는 것은 물론 화의 통합된 부분이다. “난 당황스럽고, 두렵고, 상처받았거나 슬퍼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행한 것에 대하여 당신의 잘못이야. 당신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어!”라는 것이 이 감정 뒤에 있는 우선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타자의 행동(혹은, 자기 판단의 경우에는 우리 자신들)은 우리의 화에 대해 자극 아니면 방아쇠이다. 우리가 보는 행동에 대해 우리자신들에게 우리가 말하는 방식은 ‘해야만 해 should’라는 사고를 차용하며, 사실상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의 실제적인 뿌리 원인이다. 화는 생각과 판단이 혼돈된 감정인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수희는 그녀의 부모가 자신이 태수와 데이트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을 원치 않는다. 태수는 다른 윤리적 배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부모가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태수는 그것에 대해 화가 나있다. 그의 분노에 대한 자극은 수희의 태도-그녀가 그에 대해 자기 부모에게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원인은 태수의 생각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나에 대해 말해야만 돼. 그녀는 그가 수치를 느끼거나 두려워하게 해서는 안돼.” 다른 생각들이 태수의 분노를 더 크게 지필 수 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면서 관계에 대해 어떻게 헌신할 수 있는 지 궁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이다. 그의 해야만 해라는 생각이,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격노의 원인인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우리의 욕구들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분노에 응답할 것인지에 대해 알아차림과 통제를 얻는 첫 단계가 된다. 만일 우리가 원인-결과에 대한 생각에로 떨어져버린다면- 당신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하도록 만들었어―, 우리는 온전한 자율, 책임 그리고 선택함을 잃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타인의 행동들을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인으로서 우리도 또한 우리의 행동과 선택들에 대한 책임을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어떻게 우리가 응답할지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하며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각 상황을 피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원인으로가 아니라 단순히 잠재적인 자극으로 볼 필요가 있다.


♣ 그러한 신호들을 주목하기!


화를 아는 데 있어 두 번째 중요한 것은 그것은 홍수배수문(floodgate)과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감정들의 넘쳐나는 흐름으로부터 결과되는 강한 느낌이다.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우리 안에서 슬픔, 초조함, 상처 혹은 두려움의 감정을 자극할 때, 우리는 전형적으로 이들 감정들을 경험하고 그것들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 자극이 강할 때 그리고 ‘현전하는 up'하는 욕구들이 빠르게 증폭할 때 우리는 ‘과부하’가 걸리게 된다. 압도당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최소한도로 되고 우리는 심지어 감각을 잃어 마비될 수도 있다. 우리의 감정들은 심지어 온전한 의식의 범위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바로 이런 순간에서 우리는 분노의 강한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고 아마도 심지어는 격노하게 된다. 싸이렌이나 깜박이는 빨간불처럼 화는 무언가가 주목이 필요한 ‘긴급’ 신호로서- 어떤 욕구들이 크게 충족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긴급 emergency'이란 뿌리의미는 출현하다 혹은 보이게 되다인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화를 이해하는 것은 - 우리의 느낌과 욕구들의 ‘긴급함’으로서 - 화를 이해할 수 있고 사실상 우리의 안녕/복지에 그것이 어떻게 이바지하는 지를 이해하는 데 돕는다. 우리의 분노와 그것을 촉발하는 자극을 검사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들을 이해하는 귀중한 방식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의 욕구에 대해 주목하고 그것에 신경 쓰도록 하게 하는 자명종처럼 행동한다.  


♣ 분노를 공감적으로 수용하는 도전


“분노의 원인보다 그것의 결과들이 얼마나 더 치명적인가” 

                                         -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2세기 로마 황제


화가 강한 감정이고 잘못행한 것에 대한 판단과 관련되어 있기에 우리 대다수는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어렵다. 실습을 통해 우리는 보통 누군가가 타인을 향해 분노를 표현할 때 공감적으로 응대하는 것을 배울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분노나 격노함의 ‘목표’일 때 그 사람의 안에 있는 느낌과 욕구들을 추측하는 것은 하나의 투쟁일 수 있다. 그 순간에 자기-연결됨과 거기 현존해 있는 것은 도전일 수 있다. 이것은 특히 화가 자기 판단을 자극할 때 혹은 우리가 벌이나 비난을 두려워 할 때 진실일 수 있다. 우리는 이들 각각의 상황을 차례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 자기 자신의 판단에 대한 두려움을 직면하기


“분노의 중독은, 포도의 중독처럼, 우리를 타자에게 보이자만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숨긴다.” - John Dryden, 17세기 영국 시인이자 극작가


만일 우리가 분노와 결합되어 있는 판단의 모두 혹은 일부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또한 우리가 취한 행동에 대해 상처를 받았다면 우리는 쉽사리 자기-판단에로 갈 수 있다. 사실상 그렇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판단을 ‘스테레오’로 듣게 된다 - 우리 자신의 내면과 바깥 양측으로부터. 그렇게 자극된 상태에서는 분노를 듣는 것은 특히 어렵다; 우리는 격앙되어있다. 이해, 수용 그리고 공유된 이해를 위한 욕구를 포함하여 우리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의 고통에 의해 너무나 산만해져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격노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듣는 것은 어려워진다.


이 현상은 상황이 매우 강하지 않을 때조차도 일어날 수 있다. 아무도 소리치거나 욕설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같은 판단을 갖는다면 다른 이의분노를 충분히 듣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예를 들어 내 다문화 심리학 수업에서 학생들은 종종 너무 많은 읽고 쓰고 퀴즈를 내는 많은 요구들이 있는 것을 불평한다. 내가 수업을 디자인한 바에 대해 확신을 느끼면서 그들의 관심을 듣는 것에 개방하지만 종종 그들이 속이 타 초조해함을 느낀다. 그러나 내가 즐기는 것보다 더 많이 학생들은 자신이 원한 점수를 받지 못한 것에 화를 낸다. 이런 것들을 직면하면서 나는 많이 싸우고 내가 그들의 견해에 좋아하는 만큼 개방적이지 않을 수 있다. 내적으로 나는 점수를 매긴 것에 대해 매우 갈등을 느낀다; 나는 평가하거나 ‘보상-벌’ 체제에서 일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점수를 매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성실함과 편안을 주지 않는다. 나 또한 학생들이 투자한 학습과 노력 모두에 대해 돌봄을 받는 것을 느끼는 것에 대해 회의가 든다. 나는 또한 가르치는 것을 사랑하고 내 일을 유지하길 원한다. 점수를 제출하는 것은 교수에 대해 기대되어진다. 이런 규범을 도전하는 것이 내시간의 효과적인 사용일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우리가 동의, 자기 판단이나 두려움에 의해 자극을 받는 그 순간에, 잠시 멈추고 자신의 느낌과 욕구들에 자기-연결을 갖는 것은 특히 도움이 된다. 우리는 자기-공감을 실행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 정직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말한다. 예를 들어 위의 상황에 관련하여 나는 우리 대학에서 시스템이 다르기를 어떻게 내가 원하는지를 성찰할 수 있다. 나는 또한 내 학생들의 배움, 돌봄 그리고 성장에 얼마나 내가 기여하기 원하는 지에 대해 성찰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소통하는 이들에게 진정으로 이것을 표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 어떻게 내가 이런 대화가 도전이며 내가 느끼고 욕구하는 것을 고백하면서. 그 자체로 이런 종류의 투명성은 공유된 이해에 크게 기여하고 분노와 경멸을 흐트러트릴 수 있다.



♣ 당근과 막대기: 타인에게 있는 화를 두려워하기


“거대한 분노는 칼보다 더 파괴적이다.” -인도 격언


때때로 타인의 화는 실제로 내안에서 두려움이나 공포를 자극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화가 날 때 물리적인 상처나 벌 받음을 경험하거나 현장을 본다면 우리는 이것이 현재 다시 우리에게 일어날 것에 대해 두려워할 수 있다. 우리는 상흔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고 혹은 그것을 충분히 인식하거나 어떻게 현재 사건에 관련되는 지를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충격을 지닌 수 있다. 누군가 지적하듯이 화(anger)와 위험(danger)사이의 차이는 한 글자인 것이다. 우리 중에 어떤 이들은 이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우리 대부분은 타자가 승인이나 수용하는 것에 보는 데 익숙해 왔다. 누군가 우리에게 화가 나있다면 우리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행했다고 가정한다. “그건 내 잘못이야-또 다시 저질렀네!” 이런 종류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우리는 “그들이 내가 OK라고 생각하면 그러면 난 OK임이 틀림없어”라고 믿으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누군가 우리가 말하거나 행한 것에 의해 상처받았다고 느낀다면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바꿔져야 한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무의식적으로 유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타인의 감정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기 자신의 내적 가치와 욕구들보다 그들의 반응을 우리 행동의 지침으로 사용한다.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이러한 관심은 유명한 치유사 Virginia Satir에 의해 “사람들-기쁘게 하기”로 묘사된다.


우리중 많은 이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다수 우리는 보상과 체벌로 성장해 왔고, 우리가 ‘옳은’ 일을 한다면 보상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고통을 받을 것으로 말을 들어왔다. 우리는 수많은 방식으로 예를 들어 점수, 저녁 식사후 대접, 주 수당, 비난 그리고 육체적 체벌(뺨 때리기 혹은 엉덩이 때리기)을 통해 상을 받아왔고 체벌을 당해왔다. 성인으로서 이런 시스템은 지불, 격려금, 기일후 벌금, 그리고 교통범칙금 등을 통해 지속된다. 마치 개들이 곡예를 하도록 훈련받듯이 그 결과는 우리가 타자를 우리의 선택의 가이드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떨어지는 것은 또한 쉽다. 왜냐하면 우리는 또한 타자의 느낌들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시작부터, 우린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왔다, “나는 화가 나, 왜냐면 네가 마루에 네 장난감을 놔두어서.” “그는 슬퍼해 왜냐면 네가 그와 놀아주지 않으니까. 너는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네 트럭차를 같이 나누지 않을래?” “그녀는 자신의 상사가 행한 것 때문에 격노해 있어.” “난 네가 항상 ‘아니’라고 말해서 우울해.” 사람들이 되풀이해서 그들의 감정들이 우리의 행동에 의해 원인이 된다고 소통을 할 때, 우리가 혼란스러운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대다수 우리는 자신들이 자율과 선택으로부터 행동한다고 믿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벌과 상의 제도/체제 속에 익숙히 살아오면서 우리는 어떻게 그런 ‘제도/체제’가 우리의 결정을 가리키고 있는지 거의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 제도/체제는 너무나 설득적이고 투명하다 - 우리는 온전히 그것을 보거나 인식하지 못한다. 거의 매일 우리는 두려움이나 사회 규범에 의해 유발된 결정을 한다. 우린 자신들에게 아마도 물을 것이다, “내가 사로잡히면 어떻게 될까? 내 부모는 뭐라 말할까? 내 친구들은 이해 해줄까?” 반대로 우리는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을 얼마나 종종 성찰 하는가 - 우리가 진실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어떻게 살고 행동하기를 원하는 가에 대해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고 충분히 자신의 가치들에 대해 인식함이 없이는 우리는 충분히 통전적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전혀 충분히 살 수 없을 것이다.


10대 때 나는 어머니에게 어째서 그녀가 애를 갖는 것을 선택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내 오빠가 19살인 해 결혼했고 1년 후 나를 낳았다. 그녀는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 “그건 단지 모든 이들이 그때 행한 것이야. 결혼하고 애를 갖는 것이었어.” 그녀가 결혼하고 애를 갖는 것은 수용과 포함(“적응됨”) 그리고 단순하기와 편안(삶에 있어 다음단계를 알지 못함)을 위한 하나의 전략이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듣고 내가 택한 행동들을 숙고하면서 난,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며 슬픔을 느꼈다. 이는 내가 중요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충분한 인식이나 선택없이 ‘자동적으로’ 행한 것도 포함된다.  승인은 겉으로 보면 수용, 편안 그리고 평화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가격을 지불하게 된다. 그건 정직하거나 ‘진정한’ 상호작용을 지원하지 않는다. 타자의 분노에 어떻게 듣고 응답하는 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게 힘을 준다.


♣ 테이블을 바꾸기: 타자에 대한 화를 표현하기


대부분 사람들은 화를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괜찮을 것이다. 신체적으로 화는 종종 답답함, 압력 그리고 제한을 경험함으로 오는 긴장이 크고 불편한 감각이다. 화가 날 때 우리는 아마도 연결, 소통의 편안함, 이해나 신뢰를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긴급하게 움직임과 휴식을 원하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것들은 중요한 욕구이다. 우리가 판단을 함께 나눔에 있어서 이들 가치들에 역점을 두어 다루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 누군가 당신에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이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느끼는가?  그들의 행동은 당신이 듣도록 격려하는가- 아니면 동의하지 않고 되받아 싸우게 하는가? 우리의 판단을 나눔이 호소력을 지닐 수 있다, 특히 그것이 어느 정도의 표현을 제공한다면.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우리가 듣고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게 지원하겠는가?


화는 정당하지 않는가?


우리의 욕구와 느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들로부터 그것들의 자극을 분리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그건 또한 우리에게 자극을 제공하거나 자극을 수행하는 사람보다 특정 행동들(자극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이것은 특히 깊은 상처의 경우 특히 사실이다. 그럴 때 우리가 경험하는 상처는 우리 자신의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의 결과임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운전자가 빨간불에 달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부러진 발로 지금 병원에 있지 않았을 것이고, 봄방학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당신의 파트너가 다른 사람과 관계하지 않고 당신을 떠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마음이 괴롭진 않았을 것이고 혼자이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 경우에 특별히 상대에 대해 판단을 하는 것은 쉽다. 자극 혹은 방아쇠 그리고 당신이 느끼고 있는 것은 명료하고 단순히 원인과 결과처럼 보인다.


고통이 우리 안에서 자극될 때, 특히 거대하고 상처가 있는 고통일 때 우리는 또한 누군가가 우리의 비탄에 대해 비난을 받거나 “대가를 지불”하기를 원할 수 있다. 우리는 상대방이 그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우리의 고통에 대해 맛을 보기를 원한다. 우린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내가 당한 방식으로 당할 수 있기만 한다면 그들은 내가 견디고 있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들은 그것이 무엇과 같은 지 알 것이고 미래에는 다르게 행동하겠지.” 이런 순간들에는 우리는 아마도 상호성, 이해 그리고 자비를 원할 것이다. 또한 아마 그 사람이 우리의 삶에 행한 영향에 대해서 책임과 인식에 대한 욕구를 우리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런 사고방식은 공감에 대한 잘못 인도된 시도로 보여질 수 있다. 우리는 상호성, 공유된 경험 그리고 책임을 창조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상대방이 고통이나 응보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고는 현실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의 고통을 즐기는 쪽으로 이끌 수 있다. 사실상 그들이 단지 좀더 고통과 분리에 기여하고, 고통과 손실의 악순환을 지속할 때 그들은 공감을 얻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와 상대방들이 행한 선택을 확인하고 이들 선택들과 우리가 지닌 가치들 사이에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회복, 조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욕구를 포함하여 욕구들의 성취에 결과를 좀더 가능하게 하는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자비로운 의사소통은 타자에 대한 이상주의, 친절 혹은 관대함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연결을 창조하는 것에 대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극적으로 우리자신의 욕구와 관심들이 고려되고 충족되는 승산(the odds)을 증진시킨다. 


♣ 우리의 화를 통해 움직이기


NVC를 실습함에 있어서 우리는 화를 피하거나 억누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자극하는지와 움직임속에 어떤 가치가 떠올라 있는지 밝히기를 추구한다. 우리는 이 정보를 나누기고 우리의 욕구와 관심에 역점을 두는 요청을 추구한다. 아마도 당신은 화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아는 유일한 방법이 판단과 비난이기 때문에 당신의 화를 표현하는 것에 두려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 이면에는 진정으로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무엇을 당신이 원하는지 알게 됨으로서 당신은 얻고자 하는 것을 보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게 되고 당신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을 요청하게 된다.


당신의 화에 대응함에 있어서 몇 가지 원칙들이 특히 도움이 된다. 이들 중에 많은 것은 앞서서 이미 다루었고 여기서는 단지 그것들을 검토만 한다:


* 당신 자신의 느낌과 욕구에 대해 책임을 지라; 자극을 원인으로부터 구분하라. 우리 각자는 상호작용에서 일어난 것에 대해 50%의 책임이 있고 우리의 경험(자극된 느낌과 욕구들)에 대해 100% 책임이 있다. 나는 내 행동이 다른 사람에 의해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책임이 없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에 의해 내가 경험한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에 대해 그들은 책임이 없다.


* 다른 전략들이나 결과들에 대해 개방하라. 우리의 욕구들은 단지 한 방법으로 혹은 한 사람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고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자신들을 불행, 절망 그리고 폭력의 가능성을 조성하게 된다.


* 시-비 에너지로 응답하도록 유혹받을 때 또한 너의 목표와 목적을 기억하도록 하라-그것이 다른 사람과의 연결인가, 당신 둘을 자극하는 문제에 역점을 두는가 아니면 당신이 ‘옳은’ 것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인가?


* 판단을 사용하라. “판단 쇼”에 대해 주목하라. 당시의 생각과 의견의 에너지와 내용을 들으면서, 당신은 더욱 쉽게 당신의 느낌과 욕구들에 연결될 수 있다.


* 판단과 화의 사슬을 깨는 가장 활력 있으면서 종종 잊고 있는 연결은 공감이다- 우리의 느낌과 욕구를 날카롭게 인식하게 될 필요가 있는 공감을 얻어서 우리는 어떤 잘못의 파편없이 그 느낌과 욕구들을 취약하게나마 나눌 수 있다. 자기 공감은 우리 자신의 화와 타인의 화를 다룸에 있어서 결정적인 기술이다.


♣ 화와 더불어 춤을 추기


어떻게 이런 모든 원칙들이 행해지는 것을 볼 수 있을까? 몇 주 전에 학 학생과 그가 수업을 종료하는 것과 그의 가족 문제를 다뤄야 하는 도전에 대해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심각한 병에 걸려 있어서 오직 짧은 생만 살 것이라고 말을 들었고 그의 가족은 입원비를 대느라고 고전하고 있었다. 그의 학교일에 대한 준비를 하고서 그는 그의 17세 누이의 행동이 그에게 매우 화를 자극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밤에 온종일 나가서 술과 마약을 즐기고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의 부모를 비탄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이 이미 당황하고 있을 때, 누이가 그렇게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는 것에 격노하고 있었다.


“나는 누이에 대해 매우 격노하고 있습니다. 난 그녀가 얼마나 생각이 모자라고, 남 고려안하며, 미숙한지를 말해왔지요. 난 그녀를 견디어내야 했어요.”

“그래, 네가 진정으로 화가 나 있는 것을 난 알고 있어.”

“그래요. 난 화가 나있어요! 어째서 그녀는 그토록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걸까요? 내 어머니는 거의 미칠 지경이고 나는 그녀를 이처럼 긴장하고 있는 것 보는 게 견딜 수 없어요. 그녀는 모두가 더 미치지 않도록 도와주어야만 해요.”

“너는 진정으로 이 순간에 누이의 협력과 지원을 원하고 있구나, 그렇지 않니?”

“물론이지요. 우리는 바로 지금 다루어야 할 더 많은 문제가 필요 없어요.”

“너는 또 그녀가 해침을 당할까봐 걱정이 되는구나?”

“당연히 그렇죠.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좋은 것이 없어요. 그녀는 좋은 애지만 오직 17살이죠. 난 진정으로 일어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아요. 그녀는 집에 있어서 공부하고 내 아버지와 시간을 가져야 해요. 그것이 그녀가 해야만 하는 것이죠. 나는 그녀가 방탕한 생활을 할 것임을 알고 있어요.”

“난 네가 그녀에게 일어날 것에 대해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고 추측하는데.”

“예 진실로 그래요. 그리고 난 정말 지금 당장 내 아버지가 우선순위가 되길 원해요.”

“난 얼마나 네가 누이를 사랑하고 있고 얼마나 고통과 비탄으로부터 그녀와 네 가족을 보호하려는 지를 특히 네 아버지가 아픈 것에 대해 보호하려는 지를 이해해.”

“예 그렇습니다. 난 진정으로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좀 눈물을 흘렸고 잠시 침묵을 하였다. 몇 분후에 우리는 대화를 지속했다. 여기서 그가 원하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는 누이의 욕구들을 고려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해를 창조하고 앞으로 향할 방법을 발견하는 데 열쇠가 되는 단계이다:


“난 네가 누이에게 네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을 말하고, 그녀의 안전에 대해 네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하는 것을 어떻게 네가 느끼는지 궁금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그 말을 진정으로 듣기를 좋아한다고 난 생각해.”

“예,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녀 또한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고통을 역시 갖고 있다고 난 추측해.”

“예, 그것도 사실이라고 확신합니다.”

“집에서 멀어져 있고 술을 먹는 것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부터 어떤 위로를 얻으려 하는 것이 그녀의 전략인지 궁금해. 그리고 그녀의 친구로부터 어떤 지원을 아마도 얻으려는지도?”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난 그녀가 함께 하는 애들 몇 몇을 알아요. 그들이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난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친구들과 늦게 밖에 있는 전략이 그녀가 그토록 절망적으로 원하는 그녀에게 위로와 편안을 주지 않는 것도 가능하지. 그러나 그것 또한 그녀의 선택이지-그리고 자율성에 대한 욕구, 어떻게 네가 일을 처리할 것인지 결정하는 자가 되는 것은 진정 특히 그런 나이에 큰 일이지. 그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네가 아는 것처럼 된다면 그녀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책임을 지는 자라는 것을 네게 입증하는 방식으로 네가 말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하기를 선택할지도 몰라.”

“난 그것에 대해 생각을 못했는데요.”

“그리고 그건 신뢰와 존경과 같은 다른 욕구들 또한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야.”


그리고 대화는 그렇게 진행되었다. 그의 화에 대한 공감을 주고 그의 판단을 드러내면서 그는 누이에 대한 돌봄과 안전에 대한 그의 욕구들에 대해 관심했고 그녀가 스스로 선택하여 자신의 돌봄, 위로 그리고 우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해야만 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일단 그가 자신의 욕구의 가치에 연결될 수 있게 되자, 그는 시비의 에너지로부터 멀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녀에 주어진 말을 들으며 느끼게 되었고 그들 양자와 가족들을 위해 작동할 수 있는 전략에 대해 도달하게 되었다


어떻게 화날 때 내가 공감을 발견할 수 있을까?


당신이 화를 느끼는 다음번에는 당신 자신과 타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부터 공감적 연결로 전환하도록 시도하라. 여기에 기본 단계들이 있다:


1. 멈춤, 휴식 그리고 숨쉬기. 이 순간에 당신의 몸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2. 너의 머리를 통해 활동하는 모든 판단들을 즐기라. 이들 판단의 사고들을 관찰하라 그러나 그런 생각을 지닌 것에 대해 당신을 나무라지 말라. 그것들이 지나도록 허락하고 단순히 그것들을 인식하라.


3. 당신 자신의 느낌들과 욕구들을 확인하라-진실로 앉아서 그것들과 함께 있으라. 당신의 몸 그리고/혹은 느낌에서 변화를 느낄 수 있는지 보라.


4. 준비되었을 때 타인의 느낌과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을 추측하라. 만일 당신이 준비되지 않았으면 3 번 단계로 되돌아가라.


공감주기를 하라, 가능하면 먼저 타인을 위해 공감하기를 시작하라. 당신이 타인을 위한 공감에 집중하기를 할 수 없다면, 당신 자신에게 더욱 공감을 주라. 당신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표현하고 필요하다면 아래 5와 6 단계사이를 오고가라. 여기에 다시 구체화된 단계들이 있다:


단계 1 - 중심을 잡고 연결되기를 하라


당신은 아마도 이것을 진행하기 위해 어떤 숨쉬기 방을 원할 것이다. 특히 화에 대한 당신의 응답하는 패턴이 굳어져 있고 대안에 대해 거의 경험이 없을 때 시작 할 때 숨쉬기 방을 필요로 할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를 비우거나 10 번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면서 좀 깊은 숨쉬기를 시도하기를 원할 수 있다. 잠시 밖으로 나오거나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허락 하라. 그 자리를 빠져 나오는 것(step away)이 가능하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휴식을 요청할 수 있다-“몇 초만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이 시간을 자기-연결에 사용하라. 당신이 이런 기술에서 추가적인 지원을 원한다면 명상과 알아차리기 훈련이 또한 멈추고, 휴식하면 자기-연결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단계 2 - 판단 쇼 즐기기


이것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비난하고, 비판하적이며  타인을 향하는 언급 말할 때이다. 흐름을 멈추지 말고 그것을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 단순히 그것을 관찰하라. 패턴과 리듬을, 그 아래 있는 주제와 공통된 위협들을 주목하라. 당신은 심지어 자신의 판단의 창조성, 역설 혹은 유모어를 감사할 수 있다. 당신의 ‘우선적인 절규“를 미숙하게 멈추려고 노력하지 말라. 당신의 판단이 댐의 물처럼, 격노함과 에너지가 그것의 자연적인 코스를 채우는 것처럼 너의 판단들을 분출되게 하라. 결과적으로 그것은 실개울로 낮아지며 흐르게 될 것이다. 그 지점에서 이들 판단들을 느낌과 욕구로 번역할 수 있는지를 보라.


여기서 유일한 열쇠는 당신의 판단들이 침묵으로 당신자신에게 가장 즐겁거나 최소한 당신이 화를 쏟아 붇는 그 사람의 현존에서 큰 소리 내게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런 판단의 대 홍수가 그에게 공감을 제공하는 단지 한 단계임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마도 당신만큼 쇼를 즐기지 않을 것이다.    


단계 3- 당신의 느낌과 욕구들을 확인하기


당신의 판단에 의해 제공된 정보의 풍부함이 당신의 느낌과 욕구들을 확인하는 것을 더 쉬운 과제로 만든다. 당신의 판단은 무엇이고 그것들 뒤에 있는 느낌과 욕구들은 무엇인가? 느낌목록들에서 몇 가지 느낌들을 선택하라. 그것들을 분류하라. 그것들이 맞는가. 더 강한 말이 적당할 것인가? 덜 강한 말이? 욕구목록으로부터 맞는 욕구들을 선택하라. 욕구들을 당신 자신의 말로 자유롭게 말하거나 목록에 있지 않는 욕구들을 생각하라. 당신은 이 상황에서 가장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욕구들과 가치들이 충족되지 않는가?


단계 4- 물물 교환할 시간: 타인의 느낌과 욕구들을 추측하라

이는 어려운 것이다. 당신 자신의 느낌과 욕구들에 대해 주목한 후에는 타인이 경험한 것을 추측할 시간이다. 깊은 심호흡을 하고, 상대는 당신처럼 똑같은 근본적인 욕구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상대의 처지를 상상하도록 하라.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았는가? 이런 상황에 의해 상대에게서 무엇이 자극을 받을 수 있다고 당신은 추측하는가? 만일 당신이 그들의 말이나 행동에 의해 자극받는다면 자기 자신에게 어느 정도 공감을 주어라. 일단 당신이 필요한 공감‘산소’를 얻는다면 상대에게 공감하기로 돌아가라.


단계 5와 6- 공감 섞기


당신 자신의 느낌과 공감을 인식하고 이번에는 상대의 느낌과 공감을 추측하고 당신 자신의 느낌과 공감을 표현하라. 공감을 상대에게 할 때 세 가지 공감 추측함으로 시작하고 매번 피드백을 기다리라. 상대에게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보라. 가능한 한 명확한 관찰, 내적 느낌, 개인적 욕구 그리고 비강제적인 요청의 모델에 집중하라.


1. 나의 도덕적 의견대신에 사건들과 내 감정 및 욕구들을 묘사하라.


2. 어떻게 내 욕구들이 내 느낌을 생산하는지를 설명하고 내가 하는 것/내가 응답하는 방식을 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 것임을 인정하라.


3. 내가 다음에 원하는 것을 기술하거나 그들이 특히 긍정적이고 실행가능한 말로, 다음에 원하는 것에 대한 나의 이해를 명료히 하라.


기억하라. 화의 가장 효과적인 표현은 비난의 사용에 관여하지 말라. 비난은 타자를 당신의 관심으로부터 막는다. 비난이 진술되거나 함축되든지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혼란이 당신의 잘못이다!”라는 것이 청자에 의해 감지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당신 자신의 욕구를 즐기거나 쉽게 충족되는 방식으로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험적으로 이것을 시험해 보기 원하는가? 다음 페이지에 있는 실습이 분노와 판단을 번역하여 느낌과 욕구로 이끌게 할 것이다.


♣ 지옥으로부터 공감


공감해주기에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은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의도이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공감 “공식”(당신이 ...를 욕구하기에 ...를 느끼니?)의 하나를 사용하지만 영혼은 거기에 있지 않다면 화자는 다음을 알게 될 것이다: 연결되기 보다는 당신은 “그런 심리학 허풍을 버리라!”나 “어째서 당신은 정상인처럼 말할 수 없는가?” 혹은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이 내게 말할 필요가 없어” 같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공허한” 영혼없는 공감은 받기에 매우 불편하며 그것은 종종 “지옥으로부터 공감”을 받는 것을 언급된다. 어떤 점에서는 결코 공감을 안 하는 것보다 더 악화된 것이다.  

만일 스스로가 지옥으로부터 공감을 주는 것을 발견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당신 자신의 욕구가 그 순간에 널찍함, 움직임, 편안 혹은 돌봄에 대한 당신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아마도 당신은 먼저 당신자신에게 주목함 없이 상대에게 공감주기를 선택하고, 당신은 가장 곤핍한 사람일 수 있다.  아마도 대화의 가운데 당신의 의도가 오해되었다는 것에 당신은 두려워하거나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진술되거나 적중되지 않았다면 두려움은 종종 공격-공감적 반응의 바로 반대-으로 해석된다. 당신이 상대의 욕구에 초점을 두기를 시도할지라도 당신에게 당면한 느낌과 욕구를 지니고 있다면 당신은 분산이 되고 충분히 현존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당신의 공감이 진정이지 않다고 알게 한다면 아마도 충분히 현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자신의 공감의 컵을 채워야 할 필요가 있다. 잠시 당신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체크할 시간을 갖고 스스로에게 긴급 자기-공감을 주라. 만일 당신이 원하는 자기-연결과 현존을 얻을 수 없다면 당신이 필요한 공감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대화를 연기하기를 원할 수 있다.


종종 “거짓 공감”의 외침을 이끌어내는 두 번째 상황은 당신이 먼저 좀 더 공감적인 청자이기를 배우는 때이다. 여기에 당신은 좀더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작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에게 가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좀 더 안심! 당신의 공감 안테나를 꽂고, 그들은 당신이 원하는 연결을 얻을 만큼 강하지 않다. 당신은 듣고 돌보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하지만 당신이 얻는 모든 것은 불만족과 소음이다.


무엇을 할까? 항상 그러하듯이 정직이 가장 좋은 정책이다. 당신 자신이 설명하라. “나는 진정으로 우리의 소통의 질을 증진시키길 원해 그리고 다른 방식의 말하고 듣기를 시도하라. 좀 어색하기는 할지라도 그 순간당신은 나를 참아낼 수 있는가?  당신은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의사소통하는 당신의 시도에 대해 어떤 공감을 얻기를 원할 수 있다. 오랫동안 설정된 의사소통 패턴을 바꾸는 것은 손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인정을 얻는 것을 원할 수 있고, 누군가 다른 이로부터 최소한 먼저 모든 당신의 노력에 대해 ‘상처받은 상’을 원할 수 있다.


♣ 자비로운 대화 색인


내가 처음 NVC를 배우기 시작할 때 나는 극도로 흥분했다. 그 어느 것보다도 나는 그것을 내가 소중히 여기는 남편과 함께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견고히 방어하는 방식으로 수년간을 의사소통을 해왔다. 때때로 우리는 전보다 더 잘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고 정말로 흥분했으며 NVC에 대해 희망을 두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갈등이 생겼고 우리 중 한 명 혹은 둘이 감정적으로 격양이 디ㅗ어 우리는 옛 습관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우리의 새로 발견된 친밀성을 잃고서 고통과 손실의 감정이 더욱 커졌다. 가까움이 더욱 커졌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것은 더욱 또한 커졌다.


갈등의 시기에 내 남편은 내 눈에는 거대한 적,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고 내 행복을 무너뜨린 자가 되었다. 우리의 의사소통에 대한 영향은 황폐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일을 늦추고 내 자신에 대해 좀 인내를 가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고통스런 수많은 일화 후에 나는 “자비로운 대화 색인”이란 것을 개발하였다. 어떤 어려운 대화중에 어떻게 1부터 10까지 범위에서 타인에게 어떻게 느끼는지를 감시하였다. 10을 매기는 것은 이 사람이 내 눈에는 인류에 대한 신의 선물임을 의미한다. 1을 매기는 것은 내가 이 사람을 히틀러처럼 나의 가장 나쁜 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느낌이 7 이하로 내려갈 때 나는 말하는 것을 멈추고 방이나 집을 나가서 “미안해, 지금 가야해”라고 빠르게 말하면서 머물러 있게 된다. 의미있는 연결은 척도가 올라갈 때까지 일어나지 않음을 난 알고 있다. 난 단지 기다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척도가 올라가거나 혹은 내가 공감 친구로부터 공감을 받은 후 올라간다. 내가 자기 공감에 대해 좀더 기술이 있으면 나는 때때로 방을 나가지 않고도 나의 자비로운 대화 색인을 빠르게 올릴 수 있다. 


♤ 실습8: 색인을 작동시키기


당신 스스로가 화가 나거나 불안함을 느끼는 다음번에 이 색인을 적용하라. 1부터 10까지 척도 속에서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당신은 적으로 당신이 다루는 사람을 보고 있는가? 어떻게 이런 인식이 당신이 택한 선택에-빠져나가거나 계속 관여하도록- 정보를 주는가?


세상에서 분노-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친구들과 가족만이 우리에게서 화를 방출하게 하는 이들이 아니다. 특히 전에 충족시키지 못한 욕구나 욕구가 활성화되도록 충격을 준다면 심지어 낯선 자와의 상호작용도 자극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예를 들어보고 행동에서 자기-공감을 해보자.


내가 자전거 타는 것은 많은 욕구를 내게 충족시킨다. 이는 환경에 대한 돌보기, 육체적 움직임, 그리고 재미 등을 포함한다. 자전거위에서는 도시가 친밀하고 익숙하게 느껴진다. 나는 맨하튼 다리에서 서서 지나가는 열차를 바라보고 이스트 강위의 바지선과 유람선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충분히 살아있고 만족함을 느낀다.


내 자전거를 타는 것은 또한 고통의 커다란 자원이다. 거의 매일 나는 고려, 돌봄 혹은 안전에 대한 내 욕구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고들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문을 열고 멈추거나 신호 없이 내 앞 길로 들어온다. 차는 내 자전거와한발자국정도의 거리에서 진행하고, 거의 나를 칠 정도가 된다.  어떤 운전자들은 도로에서 “이봐, 길에서 네 살찐 엉덩이를 치워!”와 같은 말을 소리 지른다.


어떻게 내가 그런 갈등에 응답하는가? 수년간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는 응답해왔다. 나는 되받아 고함지르고, 차 유리나 차 지붕위로 내 주먹을 치곤하였다. 나는 신체적 안녕을 원했지만 사실상 내 나약함과 위험은 증가하였다. 나는 무언가가 변해야 됨을 안다. 나는 NVC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실험해 보기로 결정하였다.


♣ 화를 소유하기


너를 화내게 하는 자가 너를 정복한다 - 엘리자베스 케니, 20세기 호주 간호사


내 분노의 원인을 생각하면서 나는 시작하였다. 내 경우에 그것은 명백하였다-운전자는 부주의하고 이기적이다! 나는 비난하는 생각 속에 갇혔다. 그러나 우리가 토론하였듯이 누군가 다른 이가 당신을 화나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다른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길에서 위험을 직면하는 것을 알지만 나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내가 자신의 행동을 쳐다보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또한 성실함을 가치 있게 여긴다. 때때로 나는 내가 주의 없이 혹은 산만하다고 생각한 것을 길 위에서 하고 있음을 안다. 각각의 사건에 있어서 나는 스스로를 비난한다. “그런 위선자가 되지 말자!” “불황에선 당신은 누군가를 자를 수 없지 않는가?” 내가 타인에게 화를 낼 때, 자신에게 비난한다. “어째서 그렇게 지나치게 반응하는가?” 내 자신의 내부 비판자는 열을 받는다. 물론 내적으로 혹은 바깥으로 비난을 돌리기보다는 나는 다른 선택을 한다: 공감적 연결.


처음에 나는 운전자에게 공감주기를 시도하였다. 나는 그가 또한 움직임, 널찍함, 안전 그리고 편안에 대한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추측하였다. 길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아마도 신경과민을 느끼거나 군중들이 많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적으로 본 것에 대해 공감주기는 나에게서 작동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적인 것이며 모두가 내 머리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너무 많은 고통 속에 있다. 이것이 “교육이전에 공감하기”가 필요한 명백한 사례이다. 이 욕구를 인식하면 나는 공감 동료로부터 도움을 받고 내가 자전거 타는 동안 내가 분노할 때마다 ‘긴급 자기-공감“을 실천하기를 시작하였다.


내 자신의 욕구에 공감주기를 하면서 내가 필사적으로 안전, 고려, 그리고 편안을 원하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나는 보여지기를-문자적으로 길 위에서- 원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어떻게 내가 삶에 기여하는지를 보여지기를 원했다. 내 사고 방식에 따라 나는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혹은 소음을 내지 않음으로 내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환경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기여에 보여지고 감사받기를 원했고 책임과 내가 취한 인식에 대한 감사를 받기 원했다. 나는 또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에 대한 존중을 원한다, 특히 내가 좀더 연약한 이들을 위한 존중을.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들의 욕구가 중요하게 여기기를 원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 나는 깊은 고통을 느낀다. 수백 수천의 상황 속에서 나는 사람들이 “지배적 힘 power over”를 사용하고 “힘이 옳음을 정한다”로부터 행동하고 있음을 본다. 매번 자극하는 사고가 길에서 일어나는 때 나는 단번에 내가 세상에서 보는 이들 모든 더 큰 상황을 기억한다. 이것이 내 자신의 충격과 두려움과 그 순간에 돌봄, 안전 그리고 고려에 대한 욕구와 혼합되어진다.


휴! 그렇게 많은 욕구들이라니! 그것들 모두를 명백히 하려면 몇 달이 걸릴 것이다. 과정에서 나는 어떻게 자전거 타기가 세상에 대한 희망과 신뢰를 느끼는 한 전략인지를 인식하였다. 나는 그토록 희망을 원했고 고려와 안전에 대한 내 욕구가 충족 안 되는 때마다 나는 두려움과 절망을 느꼈다. 내 마음속에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그 무언가가 진행되어 진다: “만일 내가 자전거를 타는 데 안전하지 않다면 나머지 세상에 있어서는 무슨 희망이 존재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에너지 소비를 바꿀 것인가? 지구 온난화를-그리고 전쟁을- 끊내라?” 화산구가 활동하게 하는 것처럼 이 모든 더 큰 ‘지구적’ 고통과 두려움은 심지어 가장 작은 ‘지역적’ 사건이나 사고와 더불어 분출된다.     


나는 또한 내 자전거로부터 원하는 것은 완전히 실행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였다. 길 위에서 모든 운전자가 매일같이 내가 원하는 인식을 갖는 것- 그 인식위에서 기꺼이 행동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은 결코 없었다. 그러고 나자 나는 내가 상호관계 하는 모든 운전자에 대한 진정한 자비를 느꼈다. 그들은 사실상 그들이 바로 터지도록 준비된 다이너마이트 한 다발을 지나갈 대 그들은 한 자전거 타는 자를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서 나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였다.


내가 내 자신의 욕구를 알면 알수록, 그것을 충족할 실행가능한 전략들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나는 점진적으로 안전에 대한 내 욕구를 충족시킬 도로를 발견하였다. 이는 내가 전에는 결코 주목하지 못한 사랑스런 공원과 리틀 이태리의 몇 몇 한적한 도로를 포함한다. 나는 결코 귀찮아하지 않고 손 신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신호는 뉴욕에서 다른 자전거 타는 이들에게는 볼 수 없던 것이고 그들은 결코 이 손 신호가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운전자들이 응답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손짓하는 것이 나타냄, 고려 그리고 안전을 증가시킴을 확신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전에 이런 전략들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 웃긴다고 생각한다. 내 의견으로는 그것들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백하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남을 비난하는 데 열중해 있어서 운전자들이 길에서 내게 공간을 내주어야 한다고 확신해서 나는 결코 다른 선택들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었고 고치는 것은 그들의 책임이었다. 일단 내 욕구에 대해 명백해지고 충족할 수 없는 욕구들에 대해 애도하고 나서 나는 이 특정한 상황에서 충족할 수 있는 욕구들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나는 환희와 힘이 남을 느꼈다. 나는 희망 없이 보인 상황에 대해 이해와 움직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인식, 책임, 선택, 안전 그리고 편안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였다.


내 자전거 타기 습관을 고치는 것에 덧붙여서 나는 내가 “공격적인” 자기 공감이라고 부르는 것을 실천하기를 지속한다. 만일 길 위에서 화가 나면 나는 앉아서 진정으로 내 느낌과 있는 시간을 갖고 깊이 그것에 대해 공감주기를 한다. 때때로 내가 분노가 일어나면 길옆으로 나와서 내 판단과 그것에 동기를 주는 고통과 앉아있는 ‘시간 갖기’를 취한다. 내가 운전자에게 관여하기를 선택할 때, 나는 스스로 매우 다르게 표현한다. 나는 어떤 언급을 하기 전에 인간적 연결이 중요함을 배웠다. 나는 어느 비난이나 심지어 관찰로 시작하지 않고 질문으로 시작한다, “헤이, 잘 지내고 있나요?” 만일 내가 동료 인간에게 인사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내 입을 열기 전해 어떤 ‘공격적’ 공감이 내게 필요하다는 좋은 신호이다. 


내가 공감적으로 관여할 때 나는 극적으로 다른 결과를 발견한다. 지난 주 나는 NVC 기술을 길에서 내 길을 막은 운전자에게 사용하였다. 그는 충격을 받고 내가 그에게 일어난 것을 말할 때 당황하였다. 그의 편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다음번에는 내가 진행하기 전에 진정으로 보겠다”고 하였다. 연결과 돌봄에 대한 내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었다.


나는 여전히 타인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내가 보는 것과 좀더 고려와 돌봄을 사랑하는 것을 항상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물론 때때로 여전히 내 가치에 따라 충분히 일관성있는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안전, 확신 그리고 선택에 대한 내 욕구는 이제 훨씬 더 만족되었다-널찍함과 편안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내가 화에 대해 응답하는가에 있어서 자기-공감과 선택은 내게 생명구조대이다- 이 자전거 타는 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생각 깊은 구명복“이다.

       

♤ 실습 9: 행동하는 공감


한번 이상 당신을 자극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라. 이는 파트너나 방 동료가 화장실 종이를 갈지 않는 것과 같은 ‘작은’ 일 일수 있다. 그것이 떨어졌을 때 자기 공감을 실습하거나 친구로부터 공감을 얻어라. 당신에게 자극하는 ‘핵심’ 욕구들은 무엇인가? 어떻게 이들 욕구들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비전에 대해 말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타인과 살고 상호관계하기를 당신은 원하는가? 당신은 이것을 저널에 쓸 수도 있다.


♣ 앞으로 나아가기


대부분 사람들에게 분노/화는 그것을 표현하든 받게 되는 상관없이 다루기에 도전적인 감정이다. 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그리고 공감을 실습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 열정적인 감정의 에너지를 다스려서 타인과 자기 자신에게 더 잘 연결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 종합: 심화 학습


1. 누군가가 당신에게 대해 화가 났던 시간을 생각하라.


1) 어떻게 그가 화가 났는지 너는 알았는가? 그가 무엇을 말하거나 행했는가?


2) 어떤 욕구가 이 화에 의해 당신에게서 자극되어졌는가? 당신은 염려, 두려움 혹은 슬픔을 느끼는가?


3) 이 사람에 대해 그리고/혹은 이 사람의 화와 관련해서 어떤 생각, 판단 혹은 “해야만 함”을 가졌었는가?


4) 화를 내는 이 사람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혹은 상대에게 무엇을 요청하고 싶어하는가? 


2. 당신이 화가 난 누군가 상대를 생각하라. 이 사람에게 관찰, 느낌 욕구, 요청으로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편지를 쓰라. 당신의 첫 번째 초안은 판단과 비난일 수도 있다- 그것도 좋다. 당신이 느끼는 것에 공감주기를 하고 나서 공감에 대한 당신의 편지를 쓰는 것에로 되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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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8 01:15 2007/11/18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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