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에 대한 신학적 성찰 :: 2009/01/30 17:42

핵무기에 대한 신학적 성찰

                                                                                    박성용 박사/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주 제:  핵없는 평화세상                  
일시 : 2009. 1.29. 오후 2-5시
장소 : 프레스센터 19층
주최: 평화한국


1.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처한 전례 없는 위기로서 핵위협

21세기 현대 기독교인들은 과거 2천년 신앙의 선배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바로 지구온난화에 따른 급속한 환경파괴와 핵무기를 통한 또 다른 인류와 생태계의 멸종 그리고 미래세대의 종말이라는 위기 상황이다. 과거에 있어왔던 종말론은 주로 개인의 심리적 영적 비전에 의한 어느 특정 신앙공동체에 감염이 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주로 그 영향이 특정종파나 특정 그룹에 그리고 그 시간의 지속성이 짧은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 상황에 대한 진단은 주로 최첨단의 컴퓨터 시스템과 과학의 시뮬레이션 예측모델을 통한 아카데미 진영의 과학자, 사회학자들이 이를 전파하고 있고 일반 시민들도 언론매체에 의해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어서 점차적으로 지구적 위기상황으로 되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에게는 역사의 종말 -최후의 아마겟돈의 전쟁의 예처럼-에 대한 사상은 낯선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과거의 전통적인 역사의 종말 사상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신앙이었지 핵 대량살상이라는 인간인 우리의 작품으로서는 전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 사상에는 그 근본이 인류의 구원-남은 자-에 대한 거대한 계획과 재창조-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과 창조질서의 재 회복(new creation)이라는 긍정적인 전제가 조건으로 있었다. 그러나 핵무기는 인류의 완전한 전멸-모든 개개인의 희망과 열망의 종식-, 다른 수많은 종(species)들 그리고 미래세대의 끝장남이라는 전적인 미래의 종식이라는 영원한 종말의 가능성을 우리는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현실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에 있어서는 아직도 대다수의 의식에는 신앙적 주제로서는 낯설고, 진지한 고민이 되지 않고 있으며 두려울 정도로 ‘전능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낭만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도 하다.

세계의 화약고로서 중동이외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대국들이-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한국- 몰려있는 한반도에서 그리고 한반도 갈등주체들 중 어느 나라도 핵무기를 쉽사리 사용할 수 있는 현실을 살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기독교인들이 핵무기의 위협의 위험성에 사태인식만이 아니라 핵무기 자체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판단이 무엇보다 요청된다. 왜냐하면 핵무기의 사용은 정치군사적인 전략전술의 문제이기 전에 역사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신앙의 근본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핵무기 사용 그리고 러시아의 체르노빌과 미국의 쓰리마일 섬의 핵 누출의 심각성과 지금까지의 그 후유증의 역사적 교훈을 우리는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동화된 핵무기 시스템에 있어서 어느 개인의 부적절한 판단이나 실수의 가능성에 대한 인간 지성의 취약성과 그에 대비하여 그 결과로 오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대규모 파괴라는 엄청난 인간의 힘의 규모의 불균형에 대한 윤리적 자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자각은 기독교 영성에 관련되어 있다. 나의 삶과 운명,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형제자매와 동식물들이 그리고 나와 같은 수백수천만의 시민 개인들의 삶과 운명이 그들의 동의 없이, 사전 예고 없이, 정치군사적 소수의 엘리트의 군사전략적 판단에 의해 맡겨져 있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있게 된다. 이는 이미 한반도에서 남한에 통보없이 미국이 북한에 대한 몇 차례의 핵공격이라는 실제적 가능성을 검토한 바 있었다(예, 94년 제 1차 핵위기사태시기).


2. 핵전쟁을 부추기는 기독교 이데올로기들

2001년 9.11사태를 통해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하에 벌어지고 있는 전 세계적인 군사 분쟁들-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 이면에는 영미 기독교보수주의의 문화적 타자/이념적 타자에 대한 ‘적(enemy)' 이미지가 큰 작용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악의 축‘이란 기독교의 종말론적 언어에 의한 ’적‘의 이미지가 아이러니한 것은 악의 축으로 지명된 이슬람국가와 이슬람 무장단체(예, 알케에다)들이 미소 냉전시대에서는 철저하게 미국의 편이었고 미국 CIA의 도움으로 성장한 단체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이 냉전이후 민족적 정체성과 경제적 자립이라는 과제를 추구함으로써, 영미의 정치군사 엘리트들과 군산복합체 다국적 기업의 국가이익을 위협함으로써-세계유류시장의 패권유지- 9.11사태의 보복 대상이자 영미의 국가이익의 희생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악의 축’으로 일단 설정됨으로서 대중들의 눈과 귀는 가려졌고 전쟁개입의 진정한 원인이 무엇이고 어떤 결과를 그곳 민간인들에게 가져오는 것인지에 대한 인간적 동정심을 잘라 버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이제 악에 대한 심판의 신성한 전쟁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독교보수주의 진영에게 악의 축이라는 기독교 종말론적 이미지는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와 ’‘인종적 타자’(ethnic Others)에 대한 파괴를 돕는 주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였다. 일단 적이 설정되면 사실판단에 대한 지적성찰과 그 결과에 대한 반성성적 고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참상의 심각한 결과들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죄없는 수십만의 민간인의 사상자, 수백만의 빈곤화, 전쟁에 참여한 미군병사들의 대규모 정신질환, 그리고 더욱 강력해진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공격이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전쟁에 대한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취해왔다: 원시기독교적 평화주의, 의로운 전쟁론, 그리고 거룩한 전쟁론이 그것이다.

오늘날 역사평화교회들인 퀘이커, 메노나이트 그리고 형제교회가 잇고 있는 원시기독교 평화주의는 원래 로마군인과 황제에 대한 충성과 맹세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조화될 수 없어서 군복무를 거절하였다. 이것의 근거는 십계명의 다른 신을 숭배하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그리고 그리스도의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원시기독교와 초기 교부들은 4세기 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에 대해 투항하지 않았고 대게 거부와 비협조에 기초한 비폭력 평화주의로 살아서 많은 이들이 이로 인한 불이득과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사람에게 복종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사도행전5,29)는 것은 유대인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자명한 것이었고 이는 초기 기독교 평화주의의 특징이자 주된 흐름이었다. 병역거부에 있어서 무기보다 죽음을 선택한 순교자들이 속출하였다. 이 원시기독교적 전통은 역사적 평화교회들에 의해 징집, 병역, 전쟁세, 전쟁을 위한 여타의 보조업무에 대한 거부라는 형태로 오늘날 존속하고 있다. 오늘날 2만이 넘는 과학자들 기술자들도 미국의 선제방위전략(“별들의 전쟁”)에 대한 함께 일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보다 황제에 대한 순종을 거부했던 것과 같은 형태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국가주의와 국가권력의 우상들에 대한 거부를 통해 권리의 포기, 생활의 불안정, 협박과 박해의 반복을 직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의로운 전쟁론’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를 전쟁의 상징으로 처음 사용하여 이긴 후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 지하(카타콤)종교였던 기독교를 국가종교 더 나아가 제국종교로 바꾸면서 서서히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다른 종교들이 누리던 특권을 국가종교로서 기독교에 이양하면서 기독교인들은 국가에 대한 불안과 무관심한 충성을 버리게 되었고 로마제국의 유일한 국가종교로서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군복무와 전쟁참여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정치관행들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의로운 전쟁론은 결정적으로 어거스틴(353-430년)이 로마의 국가철학에 의해 이 교리를 공식화하고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5년)가 완성하였다. 최소한 이 의로운 전쟁론은 증오나 복수와 같은 주관적 동기가 아닌 평화를 목표로 전쟁이 오직 최후의 수단인 경우, 충분한 협상이 결렬이 되었을 때 방어를 위한 전쟁을 할 수 있다는 소극적이고 최소한도의 방어적 전쟁개념이었다. 또한 여기에는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전쟁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조건들도 내포되어 있었다.

기독교의 가장 나쁜 유산은 아마겟돈의 전쟁 혹은 십자군전쟁이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여기에서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 된다. 여러 유보조건들이 고려된 마지못해 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은 하나님이 흡족하게 여기는 적극적인 개념으로서 전쟁이 된다. 십자군 전쟁에 전사한 병사들은 그들이 그동안 저지른 모든 죄는 사해지고 영웅으로 숭배 받게 된다. 그들이 흘린 피로 그들은 천국이 보장된다. 왜냐하면 그 전쟁은 하나님의 원수들을 섬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쟁에는 이슬람과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정당한 전쟁’의 기준들을 위반하는 일들이 허용된다. 부시대통령이 대표하고 있는 기독교보수주의진영이 말하는 ‘악의 뿌리’ ‘불량국가’ ‘적그리스도’는 이 십자군의 정신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최소한 ‘방어용’으로서 핵무기에 대한 논쟁을 놓고 볼 때도 핵전쟁은 의로운 전쟁이 아니라 거룩한 전쟁의 개념속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핵전쟁은 필연적으로 무고한 자들-군인보다 수배나 많은 민간인들, 자연의 식물동물, 미래세대-에 대한 파괴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적의 진영에 있다는 것으로 인해 그들은 적으로 간주되고 함께 멸망해야 하는 필연적인 논리를 갖게 된다. 또한 과거 창과 활에 의거했던 정당한 전쟁의 ‘방어’에 관한 전쟁이론은 오늘날 현대화된 무기기술에 의해 전면적인 양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전방과 후방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공격능력이 최선의 방어로 되면서 구조적으로 방어가 공격능력체제로 전환되면서 안전의 문제는 심각한 정도로 훼손되어 버렸다. 어디든 안전하지 않고 누구든 공격대상이 되어진 것이다. 

정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이 영혼의 문제에 국한하고 이세상안에서 기독교인의 평화행동이 아닌 주관적 태도에 서 있음으로서 권위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국가신학, 군비신학에 봉사해 오게 되었다. 의로운 전쟁과 거룩한 전쟁을 위해 군비를 확장하려는 정책을 대중화하고, (신)보수주의가 국가주의와 결탁하면서 “가족, 국가, 종교”를 지키는 (군사적, 강제적) 힘의 정치를 신성시하는 국가종교의 이데올로기로 전환하게 된다. 신앙은 그래서 친구냐 적이냐 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래서 적의 편에 있다면 그것이 노인이든, 아이이든, 동식물이든 적에 준하는 섬멸의 대상으로서 타당성을 부여받는다. 여기서는 응보를 위해 사용되는 전쟁 혹은 테러는 -테러와의 ‘전쟁’- 보복적 강제의 힘의 사용이라는 성격을 가지면서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가 된다. 이들의 전쟁은 신의 구원론적 역사에 참여하고 인간으로서 신의 활동을 대리하는 것으로 숭상되어지는 것이다.  


3. 핵무기 숭배 뒤의 종교적 태도

기독교의 큰 계명의 하나는 바로 십계명 첫째 계명인 다른 신을 예배하거나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핵무장은 제국주의라는 신과 제국의 공포스런 무기에 대한 우상에 대한 정신적 영적 숭배를 인간의 의식속에 암암리에 유포시킨다. 이미 일본의 원폭피해자 70만명중 10%가 한국인이었고 현재도 원폭 2세가 2천 300명이 신체적,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일본·미국의 정부들은 이들의 고통스런 경험들에 대한 회피와 부인을 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피해당사국이면서도 정부나 일반 시민들은 이들 현실에 대한 ‘정신적 무감각(psychic numbing)'의 상태인 것이다. 이는 핵 숭배와 무기경쟁에 대한 놀라운 환상과 헌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핵을 포함한 최신 무기에 대한 집단 무의식적 숭배와 환상은 인내와 창조력을 가진 평화적 문제해결의 희망을 잘라내고, 미래세대와의 소통을 포기하며 자연과의 관계를 단절한다. 그리고 핵으로 상징되는 ‘불멸의 힘’에 대한 절대 의존을 강화시킨다. 그래서 새로운 힘 숭배에 대한 근본주의적 태도로서 ‘힘’이 구원한다는 사고방식과 절대적 힘의 상징으로서 핵에 대한 신비적인 불멸의 감각을-우리는 안전하며 최고의 힘을 지니고 있다- 지닌다. 또한 핵작동실험을 삼위일체(Trinity)로 암호명을 붙이고 핵무기들의 이름위에 종교적 상징이름들-아트라스, 나이키, 제우스, 오리온, 타이탄, 포세이돈, 트라이던트-란 이름을 붙임으로서 핵의 존재를 신비하고 거룩한 것으로 채색시키고 대중에게 그 소유에 대한 자랑스러운 긍지를 확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암암리 핵보유국이란 것이 수치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숭배와 위엄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핵보유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이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강화시킨다. 

이라크전의 암호명은 어둠속에서 미사일의 대량적인 집중포화로 상대의 전투의지를 꺽어 버리는 ‘충격과 떨림(shock and awe)'라는 종교적 경험의 일종이었다. 이와같은 악몽같은 지옥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적‘으로 분류된 타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적 끝장의 심리적 경험을 유출한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이쪽의 사람들은 이를 통해 구원적 사건으로 즉, 악에 대한 심판과 승리의 환희라는 유사-종교적인 절정경험을 제공한다. 핵의 첫 사용의 경우처럼 세계대전 종결에 있어서 일본은 이미 본토 폭력으로 전의를 상실하였음에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여한 것은 제국주의 국가의 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였고, 핵 투하를 통한 무제한적인 대량살상의 그 절대성에 대한 환희, 핵이 주는 메시야적인 절대적 권능을, 즉 혼돈과 적대세력에 대한 심판으로서 신의 대리행동을 수행함으로서 무질서로부터 회복을 자축하게 된다. 어둠과 적대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자본주의 문화를 지켜낸 최고의 수단이 된다. 그것도 절대적 파괴를 통해서 단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참화에 대해 적들의 희생과 그 후세대들의 핵 피해의 고통은 응벌의 당연한 결과로 간주됨으로서 가해자 측의 영혼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핵폭탄 사용자들은 동서로 분열된 것을 단번에 핵폭탄의 투하라는 구원행위를 통해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위대한 일을 -심지어 초자연적일 정도로- 해 내게 된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악의 무리들은 이 핵의 위엄 앞에서 굴복해야 하고, 절대적 공포의 상징을 통해 악의 무리를 전멸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인해, 핵무기의 발전에 도전하는 무리들은 혼돈을 가져오는 위험한 인물들로 혹은 국가질서 교란자로 아니면 친공산주의자로 꼬리표를 달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핵의 평화(Pax Atomica)라는 절대공포에 의한 평화가 칭송되어진다. 그러나 9.11사태의 교훈이 증명하듯이 역사적 진실은 가장 강력한 국가는 가장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무장할수록 공격받는 것에 가장 취약해 진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안전, 안보의 문제는 단순히 군사력에 의해 의존되지 않을 만큼 상호의존적인 여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의 결과이며 이것들이 오히려 안전의 문제를 더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핵 강대국 러시아는 이미 경제·사회적 요소로 해체되었고, 지금의 핵강대국인 미국은 작년 말에 불어닥친 거대한 금융부실이라는 핵폭팔로 인해 미래에 대한 시계제로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대한 파문으로 핵강대국인 일본과 심지어 중국도 휘청거리고 있다. 핵에 의한 절대공포의 평화는 신화(myth)라는 사실에 우리가 빨리 깨어날수록 우리의 삶은 안전해진다.            

핵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비판적 태도의 한 예를 적용하자면 바로 라인홀드 니이버(1892-1971)가 말한 죄의 근본으로서 권력의 오만, 지식의 오만, 도덕적 오만이 핵 제조와 사용에 적용되어질 수 있다. 일반시민의 동의 없이 소수 엘리트의 군사적 효용성과 정치판단에 따른 핵사용이라는 무제한적인 권력의 남용이 있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에 대한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정보교류를 통한 지식의 독점과 의사결정의 기밀주의, 그리고 전문가라는 의사결정의 독점이라는 지식의 오만이 여기에 축적된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누가 옳고 진정으로 의로운 지, 누가 섬멸되고 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소수 정치군사 엘리트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군사작전상 민간인에 대한 피해의 불가피성과 민간지역에 대한 폭파에 대한 약간의 변명은 있지만 군사적 효과는 그대로 인정된다. 이렇게 핵무기에 대한 유사-종교적인 신념은 결과에 대한 윤리적 책임문제를 간과하게 된다. 신념이 정당하면 윤리적 실책은 용서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4. 현대판 ‘로마제국의 평화’에서 ‘그리스도의 평화’에로 전환

샬롬은 하나님의 의지이자 그분의 본성이다. 태초에 다양한 만물을 불러내어 서로 어울려 존재하게 하셨고, 그들의 어울림을 보고 ‘좋다’고 하셨다. 예언자를 통해 독사, 늑대와 어린애기와 양이 서로 함께 놀고(이사야)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시85,11)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 그렇기에 폭력, 테러, 빈곤과 위협에 기초한 군사적 평화는 반성서적이다.

성서가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평화는 ‘로마제국의 평화(Pax Romana)'와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이다. 팍스 아토미나(‘핵에 의한 평화’)로 정점이 되는 전자는 황제의 제국을 위한 군사 통치에 의한 평화이다. 정복과 추방, 약탈과 노예화, 권리박탈을 통해 정복당한 자들에겐 수치와 고통과 통곡을, 승리자에겐 특권과 소유물과 정복을 의미하였다. 무기와 법에 의한 강제적 통치기술에 따른 평화이자 거대한 직업군대에 의한 평화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는 가난한 자들 약자들에 의해 시작한다. 왕궁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평화를 시작한다. 제국이 제공하는 폭력으로 강요되는 질서라는 지배와 종속이라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평화(요14,17)이다. 이는 분리가 아니라 사랑의 결합, 화해와 비폭력에 기초한 평화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산상수훈의 평화이념이 너무 이상적이라고 하고 현실주의란 이름하에 비실용적이라고 거부한다. 그들은 예수보다 더 현명(?)해졌다.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의 전통을 가장 잘 지킨다는 현대의 기독교 정통교회들은 이러한 변형된 로마의 평화와 의로운 전쟁이나 성스런 전쟁을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변형시키고 오히려 예수를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들이 무시한 작은 교단들인 퀘이커, 메노나이트, 형제교회 등 역사적 평화교회들은 그 초기부터 지금까지 예수의 산상수훈을 진실로 여기고 여기에 충실하고 그대로 따르기까지 한다. 그것도 수백 년의 전통을 여태까지 잇고 있다.      ‘


나오면서: 반전반핵운동의 결집을 제창하며

핵시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신학자 골든 카우프만의 지적처럼 핵은 우리의 피조성을 간과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적하며, 약자와 가난한 자를 위한 섬김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리며, 탄식하는 자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성령의 역사에 반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에게 반하기에 핵은 악마적 속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핵우산은 거짓우상이 된다.

이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립선언문(1948년)에는 의로운 전쟁이 현대의 무기의 무차별적인 파괴앞에 무용함을 확인하고 분쟁의 해결방식으로서 전쟁은 신에 대한 범죄이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무시임을 밝히고 이에 대한 세계 기독교인들의 각성과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해결방식을 시작 때부터 꾸준히 제기해 왔다. 한국교회협의회(KNCC)도 1985년 34차 총회에서 강대국의 무력대결과 힘에 의한 평화는 위장된 사탄의 평화논리임을 밝히고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한 핵전쟁의 공포와 위험에 대한 경종을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새해들어와 이명박정부에서는 통일교육을 안보교육으로 회귀하고 미국의 핵우산이라는 핵방어 프로젝트와의 무용한 결합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현정권의 의지 뒤에는 한국 기독교의 의로운 전쟁과 성스런 전쟁의 추종이라는 위험한 이데올로기적 사고방식이 종교적 신념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에 대해 충실해야 한다. 진정한 평화는 공포의 균형과 위협의 맞대응이라는 군사 안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이제는 대안으로서 인권과 정의로운 사회구조에 기반한 인간안보(human security)와 동북아 시민세력에 의한 공동안보라는 대안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미 테러와의 전쟁이 준 결과는 오히려 무장을 주장하는 이슬람근본주의 부흥을 가져왔고, 아프가니스탄에서 개시 몇 개월만의 전쟁끝이란 선언이 무색하게도 아프가니스탄의 전쟁은 오히려 점화되고 이미 3조의 돈이 들어갔다. 이라크를 여기에 더하면 가히 천문학 숫자이고 이것이 지금의 미국을 휘청거리게 하고 있다. 이 돈은 제 3세계와 자국의 가난한 자들의 복지와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비를 절취한 것이다.

지금까지 기독교계가 군축과 평화적인 변화, 한반도 평화정착과 대북의 인도적 지원에 대해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이는 단순히 자선차원의 인도적 지원이나 평화정착에 대한 선언문 낭독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문제이다. 실질적인 정책의 변화를 위해서는 종교계와 시민사회계의 반전평화운동의 다양한 캠페인과 평화협정을 위한 여론의 압력, 풀뿌리 반전운동의 인프라 구축과 시민역량의 결집, 국제평화운동과의 네트워크 특히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평화시민세력의 연대활동이 아카데미아를 넘어서서 실제적인 시민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 적극적 갈등해결과 소수자 존중의 사회통합을 위한 평화헌법과 평화부와 같은 새로운 상상력에 의한 제도적 기반마련도 필요할 것이다. 우선은 일반대중이 한국징용인들 7만 명의 핵 피해와 피폭 2세들에 대한 참상의 기억을 현실화 하는 작업을 통해 핵 위험에 대한 민감성을 대중이 느껴야 할 것이다.  

핵의 문제는 단순히 북핵만의 문제가 아니다. 북핵의 생산은 이미 수차례의 미국의 핵위협과 매년 공격적인 한미전시훈련, 미일동맹군의 전시훈련의 결과라는 점을 우리가 일부 시인한다면 한반도 전체를 둘러싼 비핵화의 해결을 과제로 한 다양한 소프트 프로그램들을 통한 신뢰구축없이는 가시화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북아 시민사회의 다양한한 역할이 중요해지고 이 시민사회의 한 핵심인 종교계의 지도적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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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30 17:42 2009/01/30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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