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하구와 평화-강화 민중미학의 4중주로서 침탈, 분단, 저항 그리고 생명평화 :: 2009/11/22 09:12
-강화 민중미학의 4중주로서 침탈, 분단, 저항 그리고 생명평화-
박성용 박사/비폭력평화물결 대표
-----목 차-------
서 론
1. 강화에 대한 어린 시절의 회상과 미래에 대한 예감
2. 작은 자들의 공생터전으로서 갯벌
3. 열강의 지배와 침탈에 대한 저항의 강화 민중
4. 소통과 상생을 위한 한강하구에서 생명평화의 새 흐름
5. 21세기 새로운 미래로서 한강하구
결 론
서 론
서해안에서 최근 11월에 일어난 남북 함선간 포격사건은 한국전쟁이후 정전협정의 상황이 언제나 중대한 위기상황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 준다. 그리고 서해안 한 지역의 안전이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의 안전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지도 알려준다. 이런 의미에서 강화를 포함한 한강하구에서 자발적인 시민단체들과 현지주민들에 의한 생명평화운동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이미 강화지역에서 생태적으로 강화갯벌이 갖은 공생문화와 역사문화적인 제세이화 접화군생 인식론에 근거하여 전란에 대응한 강화 민중항쟁의 역사적 전통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강화와 한강하구는 문명의 젖줄을 시작하는 입구로서 있었음에도 대게는 주변화되고 잊혀진 곳이었으나 국란의 위기상황에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민초들에 의한 위기극복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생태역사문화적인 조건들이 강화와 한강하구의 정체성이며, 현재의 분단상황을 극복하고 화해와 상생, 평화통일의 미래를 위한 전초지로서 미래의 사명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래의 사명을 이끄는 주체는 바로 한강하구의 생태와 역사가 보여준 작은 자들의 각성과 그들의 생명평화를 위한 공동의 지혜와 헌신에 의한다.
강화와 한강하구의 지정학적이고 역사문화적인 의미와 이에 대한 재 해석은 바로 그러한 미래의 창출을 위해 중요하다. 강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는 개인사에 어떻게 민족사가 얽혀있으며, 한강하구의 생태적 역사적 독특성을 일별함으로써 갖는 화해상생과 평화통일의 미래를 위한 강화와 한강하구의 역사적 사명과 그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특히 강화와 한강하구의 토착적 독특성은 작은 자, 민초들의 집단적 지혜와 공동의 노력이었음을 주지하고 이것을 계승발전하는 생명평화의 시민운동이 강화와 한강하구가 줄 수 있는 미래의 자산이며 이 민중의 저항과 초월의 미야말로 평범하면서도 세계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것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일본의 군사주의 문화의 부흥에 맞서는 평화헌법 9조의 국제적 시민운동과 연대하여 동북아 평화 공동체를 위한 꿈을 꿀 때 평화에 대한 힘은 더욱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1. 강화에 대한 어린 시절의 회상과 미래에 대한 예감
전쟁 포화가 멎은 5년 후 나는 강화 양사면 철산리 철곳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오피 군인부대여서 건빵 얻어 먹던 곳이 이제는 통일전망대로 바뀌고 태어난 마을도 김신조 간첩사건이후 철조망 쳐지고 마을도 강제로 헐려서 뒤로 이동해서 스무 가구정도 있던 곳이 우물과 옛 잔해만 남아있는 곳이다.
2킬로도 채 안된 건너편 북쪽에는 민둥산 아래에 전시마을이 있고 마을 사람들이 나와 논밭에 가는 것도 보이던 철곳마을의 시절에 대한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단편적인 기억만이 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새벽이면 먼저 일어나 가마솥에 소여물을 쑤고 왕골로 화문석을 틈틈이 많은 시간을 들어 만들었으며 종종 강화읍 장날이면 새벽에 걸어나가 계란과 화문석, 혹은 다른 돈 될만한 것들을 지고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시곤 하였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스피커에서 그리고 북쪽에서 쌍방이 대남 대북 선전 방송과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오는 것 이외에는 평온한 마을이었고 전쟁에 대한 별다른 이야기를 나는 듣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집들의 마당은 안이 들여다보이는 어깨정도 높이의 돌담으로 안이 들여다 보였고 마당에는 대문이 없고 집안에 들어갈 때만 양쪽으로 열리는 미닫이 대문들이 있었다. 돌담과 마당은 막히되 꽉 막지 않은 열린 공간을 만들어 저녁이면 마실오는 마을사람들이 화문석을 깔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60년대 당시에는 철조망이 쳐있지 않아서 조강과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교차되는 보뚝 갯벌에서 여름에는 물을 끼어 올려 미끄럼 타는 재미가 여간 즐겁지 않았다. 그런 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저쪽 시범마을 주변에 뭔가 흉측한 두려운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봐도 우리와 똑같은 멀리 모습에 고개가 갸우뚱거리기도 하였다. 가끔씩 주어드는 삐라를 딱지로 만들거나 혹은 모아서 학교나 지서에 갖다 주면 공책으로 바꿀 때에야 약간 그림과 글씨내용이 묘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우리의 일상사는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남북의 선전 스피커의 카랑한 적대적인 목소리에 대해 그리고 삐라에 대해 우리는 익숙해져 있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무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나는 그 '침묵의 문화'속에서 성장하였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서 그리고 서울 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강화는 잊혀져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스한 품과 등잔의 기억도 잊혀졌고 어쩌면 별로 변화없는 철산리도 철이 들면서 낯설어져서 중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는 후부터는 발길을 끊었고 몇 차례 이외에 철산리는 완전히 의식에서 잊혀졌다. 강화를 다시 찾은 것은 미국유학생활도중 아버지의 위암이 도져서 임종하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국으로 온지 1주일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강화에 산소를 마련할 때였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도착하고서 마지막 아버지(아버지는 평남 성천이 고향이었다)께서 주신 말씀이 자신이 바로 '켈로부대' 출신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일생 알콜중독에 빠지게 된 비밀이었고, 자기 고향에 침투해서 군사정보를 빼내고 후방교란작전을 하던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 두었다가 이제야 목사인 나에게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자신을 임진각에 데려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임종후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몇 년 후 2006년부터 나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7.27한강하구 평화의 배띄우기 한국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강화를 매년 찾게 되었고 금년엔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세계행진'의 이름으로 세계평화활동가들로 하여금 강화 철조망을 걷게 하고 철산리 통일전망대 망배단에서 평화통일을 기원하고 세계언론에 한국의 분단상황과 실향민의 아픔을 기사로 보내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기도 하다.
파편화된 기억을 더듬는 것은 바로 그 속에 한국의 아픈 민족사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고, 한 강화출신인 나의 가족사속에 강화 민초들이 겪는 고통과 비극의 아픔이 강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잊혀지고 망각된 개인의 삶 뒤에 민족의 공적 역사가 그렇게 조강의 물길처럼 흐르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제 새로운 미래를 위한 변혁의 상상력을 탄생시키고, 남과 북의 경계선에서 태어난 나에게는 이제 남북을 잇고 치유하며 증오와 단절을 생명평화의 새로운 기운으로 전환시키는 염원을 아로 새겼다. 말하지 못한 것을 이제는 말하고 드러내며, 가슴에 깊이 파묻힌 비밀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불꽃을 영혼에 점화시킨다.
2. 작은 자들의 공생터전으로서 갯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조강이 되어 서해로 흐르는 영역이 한강하구이다. 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임진강이 북쪽의 관산반도를 돌고 오른쪽에 한강이 김포반도를 돌아 서로 합치면서 북과 남의 물들이 만나 하나가 되어 어울려 흐른다. 이 아래 펼쳐진 갯벌에는 온갖 생명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내가 살던 철산리에서는 두루미를 비롯한 천둥오리를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갯벌은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1만년의 세월의 흐름속에 서서히 형성되어 온다. 그것은 하늘의 달의 인력, 땅에서 강상류의 토사물들의 이동, 풍력과 바닷물, 지리적 여건과 강물의 이동속도 등의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의 상호 관계와 균형 그리고 긴 과정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갯벌은 그 어느 요소 하나의 불균형으로 인해서도 쉽게 상처받고 그 생명력이 흔들릴 수 있다.
한강하구의 갯벌은 서해안의 갯벌과는 약간의 지리적 특성이 다르다. 그것은 조수 간만의 흐름만이 아니라 민물과 바닷물이 서로 엮여져 있고, 남과 북의 물들이 만나져 내려오며, 육지와 바다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특이한 특성이 존재한다. 즉 상호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보이는 다른 영역과 다른 세력이 서로 흐름을 통해 소통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다. 어느 한 영역이나 한 세력도 그 갯벌을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서로 쓸려 나가고 올라오며, 민물이 흘러내려가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상호 역동적인 흐름속에서 새로운 소통방식을 찾아내고, 거기서 특이한 존재방식을 익히게 된다.
한강하구의 갯벌은 따라서 상호포섭과 융융무애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곳이고, 서로 이질적인 타자들이 상대를 끌어들이고 안으며, 주고받으며, 잇고 연대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면서 그러한 힘과 세력의 상호 관계속에서 형성된 자기 고유의 지정학적 삶의 패턴들을 만들어 낸다. 어느 힘과 세력 하나가 전체를 지배할 수 없고 나가고 들어옴, 밀리고 올라오는 일시적인 逆과 反의 카오스(혼돈)가 이질적인 것의 새로운 통합과 통전의 코스모스(질서)를 형성한다.
그러한 이질적인 것들의 통합과 통전의 질서를 감내하는 갯벌은 결국 강하고 큰 것들은 견디지 못하고 작고 여린 것들의 집합 장소이자 그들의 상호 관계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어느 시인의 글처럼 바람이 불면 먼저 누웠다가 다시금 일어나 무리로 서는 갈대는 한 예이다. 염습지에서도 잘 크고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다양한 생물적 여과기능을 하여서 영양염류나 중금속등의 물질 순환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급류와 강풍에 줄기가 잘리거나 꺽이며 한파에 말라 죽어도 뿌리는 그대로 살아남아 다시 줄기가 솟아올라 무리져 생존하며 철새와 작은 동물의 서식지를 제공한다.
갯벌 바닥에 사는 저서생물들은 흐름에 민감하다. 썰물이 나갈 때면 그토록 조용하고 자취없던 표면에 순식간에 자신의 집을 구축한다. 작고 작은 게들이 무리져 옆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면 감탄을 하게 된다. 가장 작고 여린 것들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갯벌은 흐름에 순응하면서도 상호지원하고 서로의 터를 범하지 않으며 공생의 삶을 살아간다. 일찍이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흘러 내려가는 곳을 우리는 조강(祖江)이라 시조가 되는 강이라 불렀고 만물이 융합되고 소통되며 관계를 맺어 생명을 윤택하게 하는 발원의 강으로 인식하였다.
한강하구의 조강과 갯벌이 갖는 원융무애, 상호포섭의 삶의 원리는 생태적인 지리적 특성만이 아니라 역사문화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홍익인간, 제세이화라는 민본사상과 민족의 출발지이자, 역사이래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 되어 주었다. 역사문화적인 측면에서 포함과 상호융섭의 풍류문화는 이질적인 남과 북, 자연과 역사, 서양과 동양, 엘리트와 민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좌익과 우익간의 긴장과 소통, 저항과 초월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역사문화적인 흙탕물의 격류속에서 크고 강한 것들은 부서지고 작은 것들이 퇴적되어 남아 끈질긴 생존을 영위한다.
그리하여 문명의 보루이자 입구였던 한강하구는 주변화되어 머물러 있게 된다. 그리고 남북분단의 현실과 휴전협정으로 생긴 중립수역으로서 한강하구는 '정치적 호수'가 되어 그 흐름을 멈추고 작은 자들이 아닌 큰 자들의 소통이 아닌 대결의 장으로 변질되어 자기 정체성을 잃고 침묵하며 고립되어 있게 된다. 긴 역사동안 한강하구는 강화에서 마포까지 장삿배와 시선배가 드나들며 땔감, 소금, 해산물, 쌀, 생활 잡화를 실어 날랐다. 나루터와 포구를 통해 막힌 것을 잇고, 흐름을 따라 뱃사람들은 물길과 물때를 따라 살았으며 경계 짓지 않고 살았던 곳이 이제는 고립된 침묵의 호수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3. 열강의 지배와 침탈에 대한 저항의 강화 민중
한반도 역사문명의 젖줄인 한강하구는 문화적으로는 주변에 있었지만 군사문화적 충돌에 있어서는 그 중심에 있었다. 군사적 충돌은 제국주의적 외세와 민족 자존의 치열한 대결이며 그 장이 바로 한강하구인 것이다. 강화는 이 군사적 충돌에 있어 가장 감당하기 힘든 적을 맞이하여 싸웠고 내부의 정치권력의 허약성과 체제모순으로 인해 이 힘든 싸움에세 수많은 전란과 희생의 아픔을 겪은 곳이다.
몽고침략시기는 고려의 문신귀족정치의 와해와 무신정치의 등장, 그리고 수많은 민란으로 점철된 때이다. 1232년 고려조정이 강화천도를 단행함으로써 관의 군사전략적인 판단 오류와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일은 바로 민중항쟁세력이 항몽전선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군사전략이 바로 강화를 통해 이루어졌고, 산성과 해도로 들어가 방어하며 싸우는 이런 군사전략의 한계와 관리들의 도주로 인해 오히려 자생적으로 농민, 노비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항쟁세력을 만들어 대몽항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항쟁도 봉건정권은 이들의 세력화에 대해 정권이 배신하고 봉건정권은 무자비한 탄압을 하게 된다. 1270년 원종이 몽골의 요구로 개경환도를 하면서 삼별초와 민중항쟁세력대 몽골군과 관군간의 대결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민중이 애국적 열정을 가지고 항전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조정은 민중을 버리고 적과 연합하여 민중을 탄압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왕조권력의 부패와 관리들의 무능력에 의해 토탄에 빠진 사회를 살린 민중의 지도력과 자강자립의 주체로서 민중의 힘은 몽고군과 관군에 의해 오랜 항전을 통해 소멸하고 말았지만 역사의 교훈은 끈질긴 민중의 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오랜 전란과정에서 민초들은 성곽 축조와 간척지 방조, 양곡의 수탈 등의 가혹한 고통을 감내하게 되었다.
강화는 또한 근대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에 있어서 새로운 중심이 된다. 병인, 신미 양대 양요를 통해 한강하구는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노출이 되었고 그들의 신식 화약무기와 군사전략에 아무런 대비가 없던 조선왕조는 군사문제에 있어서 전략과 전술 훈련 그리고 병참에 있어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프랑스와 미국과의 강화에서 일전은 관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휘자 지략과 용기-양헌수, 어재연, 어재순-로 겨우 막아내었다. 조선군의 투혼의 역사이면에는 관민간의 협력의 중요성, 민의 보위 능력과 그 필요성에 대한 교훈을 낳았다.
한국전쟁을 통해 한강하구는 또 다시 세계냉전체제의 모순의 폭발을 가슴으로 안게 되었다. 강화지역은 전쟁전후기간에 좌익계 조직, 미군첩보부대휘하의 켈로부대 등 유격대활동과 우익무장단체인 민주청년반공돌격대, 대한 정의단, 서북청년회 등이 오가며 득세하였고 연백을 비롯한 북한의 피난민들이 내려와 실향민의 아픔을 한강하구는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광폭한 전란의 카오스와 야만의 바람은 강화를 휩쓸고 지나며 그 역사적 아픔의 살아있는 잔해를 한강하구 곳곳에 심어 놓았다.
이러한 야만의 역사에서 민중의 가멸찬 지혜는 빛을 더욱 발휘하였고 왕조와 이승만 정권이래의 화려한 국가주의 이념속에서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변방에 있는 민초들은 그대로 역사의 아픔을 감내하면서도 자주 자강의 노력들을 보여주었다. 힘을 지닌 권력층의 역사적 관점에서 쓰여진 여러 위인들의 전기에도 불구하고 강화의 역사는 아직도 민중의 역사를 담고 있다. 갯벌의 군생하는 갈대와 흙탕물속의 망둥이의 도약, 게들의 옆으로 걷기가 생태적으로 민중의 공생과 흐름의 초월, 권력에 따르지 않는 저항의 상징을 보여준다. 수많은 보와 대, 섬들을 연결하여 생긴 수많은 간척지는 화려한 문화적 상징은 아니지만 거기에 들어간 민초들의 수많은 수탈과 억압의 노역과 민중항쟁의 열정을 보여주는 강화의 상징이다.
변방의 위치에서 작은 자들은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관리들이 전란시에 도망가고 전술미숙의 실패와 무능력을 대치하여 공동안보의 연대의 힘을 발휘하였다. 위에서 내려오는 흙탕물의 역사적 격류와 카오스의 힘의 밀려옴에 대해 저항과 이상에 대한 집단적 힘을 발휘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유지를 위해 민중항쟁세력들을 반란자로, 민족주의자를 우익에 충성하지 않은 빨갱이로 딱지를 붙여온 분단과 냉전의 논리가 한강하구에서 일어났다.
성공과 번영에 대한 엘리트들의 꿈은 다시 새로운 한강문명시대를 맞아 살아나고 있지만, 한강하구가 가진 좌우, 남북, 민물과 바닷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상호교호하고 포섭하는 접화군생, 제세이화, 화광동진의 지정학적인 이상은 잊혀져 망각의 흐름속에 사라져가고 있다.
4. 소통과 상생을 위한 한강하구에서 생명평화의 새 흐름
지정학적으로 주변부에 위치한 한강하구는 문명의 번성시절에는 쉽게 무시되었음에도, 오욕의 시기에는 가장 안전한 보루의 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한강이 민족사의 젖줄이기 때문에 그 한강의 입구에 한강하구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진술하였듯이 지정학적으로 한강하구는 민물과 바닷물, 육지와 바다의 상호교호작용과 소통이 생태적인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문화사적으로 남과 북, 국내세력과 해외세력,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경계선에서 힘의 역학적인 상호작용이 있을 때 자생적인 民이 지닌 집단 지성의 예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감각과 공동의 저항과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하구는 체질적으로 흐름과 역류속에서 서로 잇고 소통하며 자생적인 자기정화와 공생의 생태적 문화적 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우리의 삶의 방식이 이에 따를 때 문명은 꽃을 피워낸다. 그러나 한국전쟁이후 분단의 상황과 냉전의 질서는 이 한강하구를 단절과 상호적대의 장으로 만들면서 흐름을 주도해야 할 민족의 심장이 멈춰져 있어왔다. 정전협정의 결과로 휴전선이 그어져 더 이상 소통과 공생의 장을 한강하구는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와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분위기와 서울시의 한강 거북선을 통영으로 옮기는 사건 그리고 개성공단의 조성, 김포 강화 등의 지역자치지역에서 한강하구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논의가 계속 발전적으로 있어왔다. 이 논의가 중요한 것은 ‘한강하구’ 문제를 둘러싸고 관련된 다양한 이해집단과 관심과 요구가 분출한 가운데 남과 북이 화해의 역사를 새롭게 열어갈 귀중한 기회 역시 이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단체는 정전협정의 어느곳에도 한강하구에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있다는 말이 없으며 오히려 민간선박의 안전운행에 긍정적인 조항이 있음을 발견하여,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에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를 2005년부터는 매년 실시해 왔다. 이 항해의 상징적 사건은 다시금 소통과 공생의 한강하구의 특성을 복원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다시금 한강하구는 주목을 받으면서 전 국민과 언론 그리고 정치계에 화해와 교류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고 남북의 극렬한 대치속에서도 2.13합의와 10.4 회담에 이르는 화해무드에까지 오는 데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평화의 배띄우기 사업은 실질적으로 미군이 통치하는 유엔군사령부가 정전협정에는 없는 새로운 용어인 ‘관할권’을 주장하며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를 제한시켜왔다. 대중운동으로서 평화의배띄우기 행사가 원래의 목표인 실향민의 아픔의 치유와 민간교류의 평화적 공간으로서의 한강하구에 대한 비전이었고 이것이 ‘관할권’의 주장으로 막히자 시민단체들은 내부 학술토론을 통해 한강하구에서 유엔사의 주장에 대해 공부하면서 뜻밖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유엔사의 법적 정체성과 그 역할 그리고 한강하구에서 관할권 주장이 매우 모호하고 법적 정당성을 유엔법과 국제법에 의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결함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평화의배띄우기 조직위원회는 한국정부, 미국 그리고 유엔이 나서서 유엔사의 올바른 위치를 정립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렇게 평화의 배띄우기 캠페인은 화해와 상생의 평화를 위한 대중운동만이 아니라 이제는 현안문제를 시민이 해결하는 성찰과 대안제시운동을 함께 시작하면서, 공동의 지혜와 선의를 모아. 대립과 갈등, 죽임과 전쟁의 최전선인 한강하구를 소통과 화해와 상생의 실질적인 생명평화지대로 열어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노력 속에는 몇 가지 원칙이 존재한다.
- 이 사업은 원래 실향민들의 아픔과 절망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고, 끊어진 민간선의 뱃길을 열어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희망을 담은 사업으로서 출발하여, 서해안의 군사적 갈등에 대한 민간인들의 평화에 대한 노력을 구체화함으로서 한강하구지역을 비폭력적인 생명평화지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지역민의 평화염원의 실천).
- 한강하구 각 지역 조직위원회를 통해 1년 1회로 끝나는 일회성의 사업이 아니라 지역적 특성과 조건에 알맞은 평화, 인간발전과 지속가능한 발전, 생태의 가치가 실현되는 예술과 문화적 활동-평화는 무기와 폭력이 아니라 춤과 노래로!-이 강화되어 시민들이 보다 쉽게, 다양하게 참여하는 행사기획으로 발전되어질 것이다(생명평화의 대중문화형성).
- 한강하구의 각 주변지역의 특성에 맞는 생명평화 공동체문화의 형성을 위해 타당성 있는 지역 요구의 합리적 해결을 위한 연구사업과 전문가와 지역자치단체 실무자들이 참여하는 공동 워크숍을 실시함으로써 합리적인 해결방안과 상호협력의 협치 문화를 조성함으로써 선진국가발전의 원동력을 일으켜 내어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천을 강화한다(풀뿌리 민주화를 위한 시민사회 역량강화).
- 이산가족 및 물자교류사업, 공동치수사업, 환경보존과 생태탐구사업, 위험물공동제거, 질병공동관리 등 한강하구와 전체 한강지역을 포함하는 생명평화지대화 사업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상호 복지를 위한 민간차원의 화해협력사업에 일조하며, 한일간의 평화헌법을 위한 공동연대, 국제평화캠프 등의 국제연대사업을 통해 장차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구축에 기여한다(아시아평화공동체 형성과 국제 평화리더쉽 강화)
5. 21세기 새로운 미래로서 한강하구
한강하구의 생명계는 생태적으로도 이질적인 민물과 바닷물의 흐름과 역류의 평형적 균형과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역사문화적으로도 외세의 침탈과 이에 대한 민중저항의 역학관계가 첨예화된 곳이다. 문명의 충돌과 세력의 충돌속에서 수많은 민초들의 고역과 희생이 뒤따랐다. 몽고침략시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서구열강의 침략, 한국전쟁을 통하여 한강하구의 민초들은 억압과 희생을 당했다. 그리고 국난의 위기에 있어서 고려와 조선왕조의 관리들의 부패와 무능력에 대해 국가를 건진 이들은 바로 민중저항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전후 그리고 독재정권시절에 한강하구는 좌우익간의 충돌, 민간인 학살과 좌익척결의 사나운 칼바람이 몰아친 곳이기도 하다. 그 분단과 냉전의 논리는 한강하구를 고립된 정치적 호수로 만들었고, 이를 뚫기 위한 저항과 노력도 과거와 똑같이 시민세력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지금 강화를 포함한 한강하구 여러 지역에 '국가안보'를 위해 과거에 축조된 성곽, 보, 진 그리고 철조망과 전망대들이 군사문화와 자국중심의 국가민족주의의 체험학습장이 되어 지배왕조와 지배정권의 이념을 지지하는 재생산지가 되는 것을 필자는 경계한다. 한강하구의 독특한 생태적 특성과 역사정치적 교훈은 작은 자, 민초들의 공생능력과 자치능력이 위기를 구하는 대안적 힘이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와 희생의 집단적 기억을 재방향화 하여야 한다. 민중저항세력이 군사적 국가안보에서 동북아 평화안보와 시민주체의 세력화를 통한 공공선에 의한 공동안보라는 새로운 시민운동으로 전환할 때인 것이다.
강화를 포함한 한강하구의 독특한 미는 소통의 미, 민의 미, 작은 자의 미이다. 노자가 말했듯이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약한 것은 생명의 무리이다. 한강하구에서 신문명의 태동은 가장 많은 고난과 아픔을 경험한 민초들이 강제와 지배의 힘을 넘어서서 소통과 협력의 힘을 의지하고 군사의 힘이 아니라 사회자본(신뢰, 네트워크)의 힘을 통해 자국중심의 국가주의를 넘어 동북아평화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강화하고 이를 위해 노력할 때 찾아온다. 철산리 통일 전망대에세 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강하구의 지정학적이고도 시대적인 요구들을 바라볼 때 온다. 그 요구들은 다음과 같다.
- 한강이 주는 가치· 문화적 이미지는 단절 없는 흐름, 여러 갈래로부터 발원하는 다양성의 포섭과 그것들의 융합 및 소통으로서 발생하는 일치와 다양한 생명체들의 건강과 그들의 번성함이다. 무력갈등과 이산가족의 아픔이 가장 강하게 잔존하고 있는 한강하구와 그 주변의 DMZ유역을 포섭, 융합 및 소통을 위한 생명평화지대로 전환하여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실현한다.
- 한강하구를 평화의 비폭력적 대중화를 위한 전 국민적 캠페인을 활성화하는 지역공간으로서 그 기능을 심화 발전시키고, 소통과 상호관계성에 기초한 다자협력의 파트너십과 지도력을 통해 지역주민과 이해당사자들의 욕구, 지혜, 상상력, 노력을 수렴하고 재 강화한다.
- 한강하구 지역조직을 중심으로 사회분열, 대립, 갈등을 통합하고 사회자본의 공공영역 확대를 위한 이슈형성 주체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시민사회, 종교계, 지방자치, 기업 등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협력과 대화를 통한 과제실현의 협치 문화를 지향한다.
결 론
외세와 전쟁 그리고 폭력이라는 야만의 격류를 감당해온 한강하구는 소통과 공생의 본래모습을 잃고 이별과 적대의 장소가 되어 눈물의 강이 흐르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한강하구의 생태적 독특성인 공생의 원리와 역사적으로 민초들의 수난과 이에 대한 저항의 지혜를 모아 군사문화와 냉전논리를 지양하고 공공의 선과 공통 인간성에 바탕을 둔 평화주의를 실현할 때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아픔의 기억은 변혁을 위한 에너지가 되며 창조적 상상력을 위해 공헌하게 된다.
중심에 선 지배엘리트 권력의 화려한 전시적인 과시문화와 토착성을 잃은 얼없는 상업문화를 넘어서서 주변인으로서 그리고 작은 자의 공생의 삶의 원리를 드러내는 화해상생의 민중문화를 침탈과 분단에 대항하는 저항과 생명평화의 세력화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강화와 한강하구는 평창이나 다른 생태문화마을보다 유리한 조건에 있지 않다. 여기의 독특성은 분단이 남긴 DMZ 영역이 아니라 민간인, 민간선박에 개방되어 있는 중립구역(Neutral Zone)이라는 사실이다. 강원도가 'DMZ평화생명마을'을 통해 분단과 생태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을 관광상품화 한 것처럼 강화와 한강하구의 중립구역은 화해상생, 평화통일을 위한 대중들의 평화감수성에 기여하는 장소로 중요하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한강하구 갯벌의 소통과 공생의 원리에 주목하고 하늘과 숲 그리고 갯벌에서 사는 작은 생명체들의 삶에 대한 따스한 배려 그리고 한강하구 민초들의 저항과 초월의 몸짓을 읽어내며 이들 생태-역사의 작은 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체험하며 이를 드러내는 한강하구 민중미학이 토착적이면서 지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서 민중저항운동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그리고 중립구역과 DMZ를 생태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보편성과 인류애를 담은 생명과 평화를 위한 시민운동으로 승화될 때 한강하구는 새로운 평화통일문명의 발원지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그중의 하나의 예가 일본의 평화헌법을 위한 시민운동과 연대하고 국제평화캠프 등을 개최하면서 공공의 선을 위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경우이다. 금년 2009년에는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세계행진' 행진단이 강화를 방문하고 중립수역 철책선을 밟았으며 지역주민과의 대화에서 현지인들의 강화와 교동의 평화의 섬으로의 전환에 대한 제안들도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한강하구의 아픔과 고난의 기억이 새롭게 지혜의 길잡이가 되어줄 때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우며 자비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다.
미 주)
1) 한강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서로 달리 불렸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수(帶水), 고구려에서는 아리수(阿利水)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郁里河), 신라는 상류를 이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로 불렀으며 한산하(漢山河)라고도 했다. 한수(漢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백제 때이며 고려에서는 열수(列水)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이 서로 다르다. 검용소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골지천이며 정선으로 접어들면서 조양강, 그리고 동강이 되었다가 다시 남한강으로 불린다. 여주에 다다르면 여강 양평을 흐르는 강은 양강이 되며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비로소 한강이 된다. 그러나 서울을 흐르는 한강은 경강, 그리고 임진강과 만나서는 조강이라고 불렸다.
2) 켈로부대(K.L.O-Korea Liason Office)는 군번없는 부대로서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부와 미국전략정보국 CIA의 전신인 OSS가 공동으로 운영한 대북공작 첩보부대였다. 한국군도 미국군도 아닌 국적불명의 이 부대는 북한에서내려온 젊은이들을 북한의 후방에 침투시켜 정보수집과 후방교란, 파괴방해공작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필자의 아버지는 켈로부대 경력이 인정되지 않아 다시 한국군에 입대해 육군 중위까지 있다가 만년제대를 하였다.
2009.11.21. 강화 오마이뉴스강당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