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친교 :: 2005/12/03 16:27
제 15차 민들레 공동성서연구
일시: 2005. 12. 5.(월) - 7.(수)
장소: 민들레 성서 연구원(에덴기도원내)
첫째마당: 평화의 사귐으로서 식탁친교 공동체
성서본문: 출 24:1-11
<<본문이해>>
인간의 사귐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곳으로써, 그리고 사귐의 구체적 표현은 식사(table-fellowship)이다. 식사를 함께함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들 사이에 상호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식사는 한 가족으로서, 혹은 확대된 공동체 식구로서 인증하는 행위가 되며, 부적절한 식사관계는 바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친교와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는 평화 -함께 나누어 먹음-의 관계가 깨어짐을 초래한다. 성서에 따르면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매체이다. 공동식사는 그 공동체가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받은 양식을 통해 어떤 사회를 꿈꾸며, 또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이는 출애굽의 식사전승을 통해 확인된다.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등장으로서 출애굽 사건은 에집트(억압의 땅)로부터 가나안(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하비루 집단의 광야생활과 관련 있고 이들의 자기 정체성과 하느님과의 계약, 한 운명공동체로서의 의식은 ‘누구와 무엇을 먹는가?’라고 하는 식사의유형에서 구체화되어있다. 즉 에집트에서의 식사, 유월절 식사, 그리고 시내산의 계약식사가 그것이다.
에집트에서의 식사는 7년간의 연속적인 기근을 통해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상황에 몸과 토지를 바쳐 바로의 종이 되고(“우리가 파라오의 종이 되겠나이다”; 창47:25) 얻게 된다. 불의와 불평등의 경제, 억업과 착취의 정치와 파라오를 신격화하는 종교체제 속에서 파라오 왕의 양식의 독점을 위해 건축 중인 곡식 저장용의 도성, 비돔과 라므세를 건설하기 위해 흙벽돌을 만드는 고역으부터 얻는 ‘고통/억압의 빵’의 식사이다.
유월절식사는 하비루 노예들이 먹는 ‘고통/억압의 빵’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서 ‘자유/해방의 빵’을 구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가야 함을 결단하면서 먹은 식사이다. 이는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묶고, 그 공동체가 하나님의 행동의 충만한 때인 카이로스적인 시간앞에 서서, 현재의 어려움을 넘어서서 과감히 미래로 향해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본문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는 예배와 계약식사를 묘사한다. 시내산에서의 예배의 의미는 외적으로 이집트로부터 탈출을 마감하고 이제 약속의 땅을 향한 새로운 여행을 시작한다는 것이며, 내적으로는 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을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가진 하나님의 자유와 해방의 백성이 되게 만드는 역할이었다. 이런 신앙적 결단을 구체화하고 해방공동체로서의 의미를 강화시킨 것이 시내산의 공동식사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로 들어가는 식탁교제공동체로 서술한다. 시내산의 계약은 이스라엘 종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둘로 나뉘는 데 하나는 피의 계약에 관한 것(3-8절)이고 다른 하나는 계약식사에 관한 것(9-11절)이다. 이 계약식사는 본문이 말한 전체적인 상황의 결론의 역할을 하면서 그 공동체적인 계약의 의미를 강화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법규를 상세히 설명할 때와 계약서를 백성에게 읽어 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두 번씩이나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3절; 7절)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과 백성들간에 계약의 관계에 들어감을 입증한다. 그 계약의 확증으로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다. 9-11절은 계약체결의 절정으로서 공동식사를 묘사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11)가 뜻하는 바는 사귐의 궁극적 상태에 대한 예표이며, 이 계약식사를 통해 하느님의 정치를 담은 평등적 식탁공동체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출범에 대한 비전이 근본적으로 계시된다.
이 계약식사에서 억압의 정치, 불평등의 경제, 거짓 신에 대한 예배로 가득찬 에집트의 삶·사회구조의 모순이 폭로되고, 계약의 공동식사를 통해 경험된 하느님의 현존은 하느님의 공의가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될 것임을 예표한다. 하느님의 공의는 윤리적 삶으로서 법규(계약서)를 통해 명시화(formalization)되고, 그 뜻과 열정은 화목제와 공동식사를 통해 체현(internalization)되어지고 결단되어진다. 이 식사는 이제 계약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참여자, 그리고 참여자들 간의 교제의 식사, 하늘의 '맛나'라는 새로운 ‘양식’을 평등하게 수용할 공동체속에 구조화하는 삶에로 전진을 다시 다짐하고 결단하는 식사이다.
시내산에서의 공동식사(11절)은 식탁친교 공동체운동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가나안땅까지 광야의 전 기간을 직접 그들을 먹이셨다는 데 있다. 광야경험을 응축시킨 이 공동식사의 신학적 관점은 여호와이레(하나님께서 준비하심)과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의 신앙적 경험과 이에 상응하는 이스라엘의 윤리적 책임과 헌신이 근본토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공동식사의 경험은 경제(빵)에 대한 신앙적 관점과 정치(공동체윤리)의 확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하느님의 식탁과 파라오의 식탁에 대한 판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스라엘 제의의 역사는 무엇을 먹는가 하는 문제가 어떤 하느님을 섬기는가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계약식사는 평화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제공한다. 즉 공동식사는 공동체로 하여금 평화는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공동체화 함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평화(함께 나누어먹음;平和)는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공동실존으로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의 평화는 해방의 사건을 만들어내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평화는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는 힘이 된다.
공동식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샬롬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시내산의 계약식사는 하나님의 구속행동을 통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계약관계-를 재확인하고 두려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평화안에서 새로운 여행을 할 수 있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한다.
<<질문>>
1. 출애굽 사건은 “00으로부터 탈출”만이 아니라 “00으로의 지향”과 관계되어 있다. 에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중간의 길인,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의 정신(근본목적)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지향성)?
2. 신앙의 갱신을 위해 드려진 번제와 화목제(공동체가 제물을 같이 나눔)의 정신이 오늘날 어떤 형태로 형식화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그 참 정신을 오늘의 예배에 어떻게 반영할 수 있는가?
3. 새로운 계약 공동체로서 출발하며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계명을 받고 “백성들은 입을 모아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따르겠습니다”(3절)라고 그 실천의지를 표명하였다. (19:8 참조) 그리고 이는 피의 서약이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하느님의 의지와 목적을 따르기 위해 새로운 대안의 계약공동체로서 생명·평화 공동체를 위한 십계명을 기존의 십계명을 중심으로 리모델링해보자. (각자의 교회에서 지킬 수 있는 실천적인 계명으로)
둘째 마당: 평화의 예배
성서본문: 롬 12:1-2, 9-18
<<본문이해>>
바울이 로마에 있는 가정교회들의 교우에게 보낸 서신으로서 로마서는 서두 문안인사에서 “하느님 우리 아버지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1:7)를 기원하며 서신의 목적을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 주려는”(1:12) 뜻임을 밝히고 있다. 그가 소개하고자 하는 복음은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며 이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데, 이는 공로가 아닌 하느님의 신실성과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는”(5:1)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율법이 아닌 “은총의 지배”(6:14)를 받고 있기에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6:19) 권면하고 있다. 이를 위해 특히 성령께서 인간본성의 나약함을 도와서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생명과 평화”(8:2,6)를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이자 상속자가 되고 영광도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자로 삼으신다고 한다(8:15-17, 26).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시고, 올바른 관계를 놓으시며 그리고 영광스럽게 하신다(8:30). 이는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8:39)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9장-11장의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경우에서 보듯이 율법을 통해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던 유대인은 찾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죄로 인해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되었듯이, 하느님에 자비에 대해 우리의 진실한 응답(“접붙임”; 11:22)이 요구되어진다.
이렇게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복음의 포괄성(inclusivism)에 대한 강조를 통해 율법주의가 아니라 은혜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체계적으로 진술한다. 구체적으로는 9장-11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와 갈등에 대한 문제로서 하느님의 자비와 보편적 구원의 경륜을 강조한다. 이는 8장 마지막 절(38-39)의 구체적 적용이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교리적 설명의 결론은 11장 마지막절(36절)에서 하느님의 주권성과 은총으로 선물되어진 삶에 대해 재강조하고 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본문 서두의 “그러므로”(12:1)는 앞에서 끝난 환희의 찬가(11:33-36, 이는 이사야와 욥기의 인용임)와 연결되어 하나님의 한없는 은총과 자비의 위대하심에 대해 신실한 응답으로 그리하라는 것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적 설명(1-11장) 전체와 기독교 공동체내에서 상호사랑에 대해 말하는 로마서 12-16장(윤리적 실천) 전체를 서로 연결하고 있다.
12장은 앞의 11장까지의 교리적 설명이 끝나고 그 구체적인 윤리적 실천이 시작되는 장이자 16장까지의 구체적 삶의 적용에 있어서 총괄장이라 볼 수 있다. 12장 본문의 핵심어휘는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ten logiken latreian hymon)"이다. 여기서 예배로 번역된 latreia는 의식이외에 service(봉사, 섬김)의 의미로도 번역된다. 이에 따라 본장을 구분하면 하느님에 대한 봉사/섬김(1-2절), 신앙공동체에 대한 봉사/섬김(3-8절), 그리고 세상/이웃에 대한 봉사/섬김(9-21)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섬김의 세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영역으로 ‘산 제물’과 ‘진정한 예배’라는 단어와 의미구조에 있어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진정한(logikos)“는 어떤 것의 참되고 핵심적인 본질에 부합한다는 의미에서 ‘진정한’을 뜻한다.
본문을 예배문제로 적용하기에 앞서 몇 가지 용어들에 대한 주의를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첫째, ‘형제(자매) 여러분’이란 애정 어린 용어의 사용은 어떤 특정한 사항을 강조할 때 사용한다.(1:13; 7:1; 10:1 등) 여기서 각기 다른 가정교회에 속한 그들을 서로 맺어야 할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이처럼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동료로서 바울은 그들 자신과 가정교회들을 하나로 연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고한다.
둘째, 따라서 “여러분 자신(여러분의 몸)”의 몸은 개인의 몸이자 공동체적 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몸은 우리의 전 존재를 의미하며 “바치십시요”의 권고형은 강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의 크심에 감격하여 자유로 응답하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셋째, 제물을 수식하는 세 형용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이란 강조어를 주의 깊게 묵상해야 한다. 이는 기꺼이 온전한 드림의 삶을 살라는 전인적(wholistic) 개념이 응축되어 우리의 존재 자체가 신앙의 증언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을 사랑 가운데 철저히 내놓을 때 우리는 자비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원천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다시 사신 그분과 함께 새 생명을 얻었다(6:4,8)는 바울의 말과 연관되어 있다.
위 세 형용사는 다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와 맞물려 서로간의 의미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전인적 개념과 연관된 또 하나의 동사인 “분간하게 하다(dokimazo)”는 ‘실천하여 증명하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배우다’ 혹은 ‘검증하여 입증하게 하다’로 번역될 수 있어서 그 뜻은 실제적 사용/실험을 통해 무언가의 진정성을 밝히고자 노력하는 것에 관련된다. 이를 “형제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검증하고 입증하는 것은 각자 개인이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공동체를 통해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8절 이하의 권고들은 사실상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삶에서의 구체적 적용을, 또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사례로서 일상의 삶에서 구현하는 예들이다. 이는 성령의 열매(단수)가 9가지 구체적 삶의 적용에 대해 다른 기능으로 나타나듯이 ‘산 제물’의 구체적 삶의 맥락에 적용되는 다양한 태도/가치들이다. 이들에 대한 결론의 말로써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라고 권면한다. 나머지 절은 그 외의 것은 하나님께 맡기자는 덧붙임이다.
예배는 하느님 나라의 성례전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바울의 말은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도모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일을 추구합시다”(14:17-18)이다. 평화의 예배가 하느님 나라의 성례전이라 한다면 힘의 근거로서 “성령의 역사(토대)”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 지상에서 누리는 상태로서 “정의·평화·기쁨의 맛봄(사역)”은 예배의 근본적인 요소이다.
본문이 주는 평화예배로 핵심 요소는 역시 통찰/분별(discernment; 1-2절)과 능력강화(empowerment; 9-18절)를 통해 구현된다. 이는 진리(하느님의 뜻)에 대한 분별과 선과 평화를 위한 능력의 부여받기(empowerment)에 초점이 있다. 요한기자는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영적으로 참되게”(신령과 진정으로; 4:23)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통찰/분별과 능력이 어울린 상태에 대해 요엘은 이렇게 묘사한다. “너희의 아들과 딸은 예언을 하리라.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리라”(3:1). 이러한 통찰과 능력강화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의 부음을 통해(요엘) 또는 사랑의 하느님의 선제적 행위(바울)에 힘입어 되는 것이다-“하느님의 자비(복수형)가 이토록 크시니”(12:1).
평화의 예배의 목적과 그 결과는 변화되는 것(transformed)이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의 많은 부분이 세상의 가치에 순응하는 것(confomed)속에 머물러 있기에 이는 특히 강조되어야 한다. 평화는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변화의 사역은 우리의 의식적 사고와 이해의중심지인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폭력(“박해하는 사람들”-14), 결핍(“딱한 사정”-13), 속박(“교만”-16), 염려와 절망(“우는 사람”-15)의 상태에 대항하는 평화의 건설은 ‘산 제물’로서의 자기와 공동체의 자기 갱신에 의해 그 해결의 실마리가 열릴 수 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탄원과 임재, 기억, 말씀선포, 기쁨과 감사의 찬가, 일치와 친교, 헌신과 봉헌, 결단과 파견 등의 예배순서와 내용 속에 평화가 어떻게 수육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1. 진정한 예배가 되기 위해 오늘날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만든 틀 속에서 어떻게 순응해 왔는가?
2.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서로 토론해 보자? 특히 세 형용사 “하느님께서 받아 주실” “거룩한” “산”의 의미를 숙고하고 그 의미를 제물로 바침에 연결해 보자.
3. 평화의 예배를 위해, 예배 속에 들어가야 할 내용, 원칙(평화정신) 그리고 예배 틀에 대한 제안을 해 보자.
셋째마당: 봉사(Diakonoia)-평화 공동체의 확대
성서본문: 눅16:19-31
<<본문의 이해>>
한 저자의 작품인 누가-행전이 신약성서 전체 분량의 28%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다른 복음서에 이미 공통적으로 많이 있어서 별 특별한 것이 없다는 선입견과 더불어 누가기자의 민중에 대한 따사로운 관심이 엘리트 신학자들의 삶의 자리(sitzen im leben)와 많은 차이가 있어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해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청자들이 자기 존재 전체가 진동할 정도의 위협을 느낄 만큼의 혁명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는 데 특히 편집자로서 그만이 가진 L문서를 놓고 볼 때 그의 독특한 사상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그만이 가진 자료를 살펴보면, 마태가 그 시작을 다윗계보의 정통성부터 나열하는 반면에 누가는 이미 ‘끝장이 난 자’인 늙은이들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어 주변화된 여인의 송가, 빈들의 목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처음부터 심상치 않게 전개된다.
역시 신약성서의 복음의 복음이라 할 수 있는 복 있는 자에 대한 가르침은 마태와 그 어조를 완전히 달리한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가 ‘산위에서’ ‘8복음’을 가르친 것으로 전승을 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평지에서’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린 사람, 지금 우는 사람, 사람의 아들로 인해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복의 현존을 말하면서, 마태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굶주린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등에 대한 언급을 삭제해 버렸다. 누가가 복 있다고 한 사람들은 생의 현실에서 가장 힘듦을 당하는 사람들이며, 어떤 정신적·영적 영역의 언급도 없이 오직 사회·정치적 삶의 현장에서 밑바닥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더욱이 축복과 더불어 한 짝으로서 “화있을진저”가 함께 동반되어 “부요한 사람,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눅 15장의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었던 아들(후자 둘은 누가만의 자료)의 비유를 통해 the lost, the last, the least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관심이 보여진다. 또한 마태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의 문구와 달리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로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선포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누가가 전하는 예수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누가만의 자료인 “어리석은 부자”(12:13-21)의 비유, 해고당할 때를 생각해서 부자에게 빚진 자의 빚을 임의로 탕감하는 “불의한 청지기”(16:1-15)의 비유,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 함께 있는 “부자청년, 낙타, 바늘귀”(눅18:18-27)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와 소유문제간의 적대성(공존하지 못함)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누가자신만의 자료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72명의 제자를 파송할 때 무소유로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10:4) 다닐 것을 권고한다.
본문에 따르면 부자와 나사로의 처지가 매우 대조적인 상황으로 언급되고 있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이었으며, 반대로 나사로 거지는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식탁의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는” 신세였다. 이것이 내세에서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고, 부자는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결과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부자는 온갖 복을 다 누렸었고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성격이나 태도에 상관없이 사회적인 처지만으로 운명이 갈리게 된다.
누가는 이 이야기 속에 운명의 갈림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승에서 서로 문간을 놓고 같이 살았던 부자와 나사로의 가까운 거리는 내세에 있어서 아무도 부자의 처지를 도울 수 없는 거리간격으로 벌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형제들에 대한 경고의 요청은 이미 알고 있는 모세와 예언자의 말로 충분하다는 대답으로 무시되어진다. 이는 이미 예수가 앞의 13절(“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에 대한 구체적 비유의 역할을 하고 있다.
봉사(diakonia)는 일반적으로 ‘남’에 대한 ‘나’의 섬김의 행위로 인식되어 왔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이야기의 교훈은 첫째로 부자에게는 나사로가 ‘남’처럼 보였다는 데 그 문제점이 있다. 여리고에서 강도만난 사람에 대한 비유에서 예수는 ‘남’사이였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불행과 고통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10:36)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남이 ‘이웃’으로 얼마큼 철저히 보이는가의 문제가 본문의 이야기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윤리적 관점으로서 ‘남의 이웃화 (befriending of Others)'의 문제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더 궁극적인 문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예수의 관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ontological)인 근거의 문제이다. 누가는 하느님이 어디계신가에 대해 명확한 제시를 하였다. 곧 “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2:12)라는 것이다. 바닥(the bottom)에 계신 하느님! 바닥의 민중이 하느님의 관심과 뜻을 담고 있다는 이 깨달음.
따라서 봉사는 남의 이웃화를 넘어서서 신의 의지와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신에게로 들어가는 일치의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속에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눅12:21)고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하느님은 타자화된 ‘남’속에 자신을 숨기시고 거기서 현현하신다는 누가의 번뜩이는 신앙관이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출애굽사건의 계약 식사속에 예표한 “그들은 하느님을 뵈오며 먹고 마셨다”(출24:11)는 누가에 와서는 그 식사교제공동체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눅14:12-24의 식사초대의 대상으로서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같은 사람”(13)을 부르고, 아직도 좌석이 남아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23) 하라는 말씀속에서 식탁교제의 범위와 대상이 바닥(the bottom)과 가(the marginal)의 사람들을 코이노니아의 대상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식사초대직후에 하신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에 대한 명시이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6) 우리가 흔히 식사에 나와 친한 부모, 처자, 형제자매와는 달리 ‘바닥’과 ‘가’의 사람들을 초대함에 있어서 ‘나’가 ‘그들’에게 하는 봉사(service)라면 아직도 진정한(평등한) 식사교제는 아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나’와 ‘남/그들’의 관계에서 호스트가 ‘나’가 아니어야 한다는 해석마저 나올 수 있다. 이는 자비의 하느님(그리고 선물로서의 삶)에 대한 체험이 선행될 때 가능해 진다.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속에서 식탁교제공동체의 정신이 단지 제의식사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함께 나누어 먹음(平和)’으로 구현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고 이러한 일상속에서의 식탁교제운동이 진정한 사크라멘트(sacrament, 성례전)요 신을 알게 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바로 엠마오의 길에서 제자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뗄 때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누가만의 메시지 속에 잘 나타나있다: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보았는 데...”(눅24:30-32).
결론적으로 봉사(diakonia)는 구제(charity)의 수준을 넘어서, 식탁교제공동체운동의 일상화, 세상화하는 문제이며, 주의 식탁을 함께 나누는 잔치에 소외된 자 없이 모두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 ‘모두’중에 ‘바닥’과 ‘가’에 있는 자들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우리가 식탁을 준비해도, 그 자리를 이끌 호스트는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의 의미이다. 친교는 부의 경제학(자기확대와 ‘타자보다 더 많이’의 경제)이 아닌 샬롬의 경제학(가난한 이의 필요에 기초한 경제)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렇게 친교는 봉사의 내용과 방향의 성격을 규정해준다. 식탁친교의 예에서 보듯이 이 친교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나오게 된다. 새로운 제자들의 무리가, 새로운 대안 공동체로서...
<<질 문>>
1. 부자가 왜 거지 나사로의 처지에 대해 아무런 동정이나 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부자도 정상적인 사람의 판단을 갖고 있었다면, 왜 부자에게는 그것이 괜찮았을까? 동정심을 없게 만드는 사상, 윤리의식, 세계관은 무엇일까?
2. 부자가 만일 이 비유를 꿈으로 꾸었다고 상상하고, 그 꿈으로부터 깨어난 부자가 얻게 될 교훈이나 생활태도는 무엇일까?
3. 부자된 인간, 부자된 교회가 무엇이 잘못인가? 잘못이라면 어느 정도의 부자된(가난한) 인간, 부자된(가난한) 교회가 적당한가?
4. 교회가 세상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나눔/친교를 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무엇이 있는가? 자신의 교회에서 우선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 한 두 가지만 만들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