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성회수요일후 목요일 :: 2009/02/06 09:24
성회 수요일후 목요일
신30:15-20; 눅9:22-25
생명의 길의 선택
사순절 초기에서 성서묵상은 ‘다가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금주 묵상의 기초가 된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서서 말한다.
“오는 나는 너희 앞에 생명과 번영,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 나는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놓는다. 생명을 선택하라. 그러면 너와 네 자손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목소리를 유의하며 그에게 굳게 지키면 살 것이다.”
선택하라! 그것은 명령이다. 생존과 구원에, 그리고 지금과 장차 미래의 우리 삶이 질에 그것은 결정적이다. 미국 인디언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모두가 나와 땅위에 앉아서 미래의 7세대 자녀들에 미칠 결과를 고려해서 선택한다. 아무것도 개인적이거나 자기 혼자만의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공동적이고 개인 간의 관계적인 것을 통해 선택하게 된다. 똑같이 모세의 너희(공동체)와 네 자손(미래세대)을 고려해서 주의 입장에 서서 너의 모든 행위를 결정하라고 말한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바로 앞서서 모세는 백성들 앞에 선다. 그들은 함께 사막을 인내해 왔고 한 세대가 그 여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노역의 이집트에 대한 그들의 집착과 그들의 속박의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다. 진실로 그들은 하나님과 서로에 속하고 유산으로 준 ‘축복’의 땅에 속하는 야훼의 백성이 되는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들은 신실함, 서로 결속함, 하나님과 서로를 신뢰함에 대한 그 무언가를 배워왔다. 시나이 황무지에로 도피했던 초라한 백성이상이다. 그들은 계약속으로 들어가고 있고 그들 앞에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조상에게 있는 하나님의 법과 힘을 통해 친밀히 맺어졌다. 정의를 배우고, 두려움을 통해 살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책임과 자신들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무에 대한 필요성을 경험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했고 계속해서 하고 계신 지에 대한 기억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아는 것은 자신의개인적 신앙과 행동이 공동체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공동체를 느리게 하고 우회하게 하거나 혹은 약속의 땅에로 점차 움직여가게 공헌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까워졌고 이제는 위험의 시기이자 복종에 대한 감각을 시험하는 시기이다.
그들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법에 복종이나 불복종인가가 드러날 것이다. 생명을 내올 것인가 아니면 죽음과 파괴를 자초할 것인가가 달려있다. 하나님의 현존, 지원, 힘 그리고 가까이 하심 없이는 그들 모두가 이미 타인에 의해 점유된 약속의 장소에 직면하기 전에 희망 없이 버려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단지 가나안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수준의 친밀성과 지식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선택해야 할 시간이다. 그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한 정신과 한 의도로 선택해야 할 시기이다.
교제와 결합된 행동을 부르는 라구나 푸에블로의 기도가 있다:
“나는 내 숨을 네 숨에 더하나니, 우리의 날들이 이 땅에서 오래가기를, 우리 백성들의 나날들이 오래 가기를, 우리가 한 사람으로 되기를, 우리의 가는 길을 함께 끝마치기를!”
누가복음은 생명을 선택하라는 명령을 확대하고 이제 인자와의 게약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더한 것을 요구한다. 인자는 타인에게 의해 부과된 고통의 시간에 직면하고 있다: 그 자신의 추종자들과 사람들의 지도자에 의한 배척, 그리고 십자형에 의한 죽음의 선고. 그리고 나서 그는 제 3일에 올리어지게 된다. 이는 진지하고 힘들며 그것이 함축된 것은 두렵기까지 하다. 예수는 먼저 가서 우리를 앞서지만 우리가 그를 뒤따른다면 우리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고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의 발자국을 따름으로 시작해야 한다. 생명을 구하려 하거나 거기에 집착하는 자는 누구나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잃고자 하는 자는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인자를 위해 행해진다면! 선택하라. 생명과 축복을 선택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과 저주를 선택하라!
예수의 십자가에 덧붙여서 우리는 종종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상징인 ixthus 곧 ‘물고기’라는 말의 그리스어의 표현을 보게 된다. 혹은 어린 양에 대한 묘사, 유월절 희생, 승리와 영광의 배너를 혼자 지고가기 등을 본다. 이들 모두는 우리 신앙의 기본적인 상징들이다. 십자가의 상징은 자기 자신을 기도에 헌신하고, 서로 축복하는 방법이거나 그룹으로서 축복받는 방법이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신앙의 제의적 표현, 공적인 인정이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에 달린 자를 믿는 자들이다.
예수의 직접적인 당대인들과 동료들에게서 예수가 직면해야 하는 선고는 두려운 것이지만 점령군에 의한 억압과 지배의 손아래서 행해지는 그 나라의 항시적인 실재이기도 하다. 이 거부, 이 십자가, 이 형벌적 죽음은 힘이 없는 이들에게 내리는 권력과 무기를 가진 이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비인간적인 고통이었다. 그것은 폭력이었고 대중을 복종시키기 위해 통제하고 공포를 집어넣었다. 그래서 절망과 분노, 가난 그리고 미래의 자유에 대한 희망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중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
초기 세례 의식은 종종 입문자를 침례하기 전에 그리고 신앙 고백하기 전에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하고서 그들에게 상기 시킨다: “당신은 구해졌지만 그것은 당신의 무릎으로 그리고 십자가의 표 아래서 구해졌습니다.” 기독교 신자의 일상적 삶으로 들어가기 위한 이러한 입회식은 자신을 부인하고, 비우고, 하나님의 의지와 타인의 필요에 복종하라는 이 명령의 수용에 기초한다. 이 종교에서 이득은 전 세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대한 것에 대한 자신의 집착을 상실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른 왕국을 섬기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기도, 금식 그리고 자선은 이러한 자기 부정의 실천과 십자가를 매일 지는 것의 기초였다. 기독교인은 매일 공동체 안에서 타인들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물건과 봉사를 포기하도록 요청받았다. 4세기 밀란의 주교이자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스(Ambrose)는 사순절에 설교하였다:
“주의 물건들을 혼자 소유하는 것, 모두에게 속한 것을 혼자 즐기는 것이 어찌 악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것이 모두의 주님이신 분에게 속한 물건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가 그의 봉사자인 것처럼 그것들도 모든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것은 모두에게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것은-세례를 받아들이고 인자를 따르는 이 그룹에 포함되는 것- 심각한 결과들을 지니고 있고 의무와 책임들을 함축한다. 사순절 두 번째 날에 우리는 이것이 일상의 훈련이고 생명을 위한 선택임을 듣는다. 공통적인 것에서 삶, 타인을 돌보는 삶, 어려움과 시련에 직면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 우리의 현재 희망을 넘어 풍성한 삶으로 회복시켜줄 삶에 대한 선택. 생명과 축복을 선택할 시간, 더 귀한 삶, 모든 사람을 위해 젖과 꿀이 흐르는 삶, 신실하게 인내하는 정의와 거룩함의 삶에 매달리기를 선택할 시간이다. 처음에서 그것은 매우 위협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는 다른 이들이 간 발자국을 따르고 많은 이들이 우리에 앞서서 신앙으로 갔다.
헨리 뉴먼(John Henry Cardinal Newman, 1801-90)은 기독교인으로서 성장하기 위한 자신의 투쟁동안 기도를 썼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종일 지원하시길 기원하나이다. 어둠이 길어지고 저녁이 다가오며, 바쁜 세상이 침묵하며, 삶의 흥분이 끝나고 우리의 일이 행해질 때까지. 그러면 그분의 자비 안에서 그가 우리로 하여금 안전하게 쉬게 하시고 거룩하게 쉬게 하며 마지막까지 평화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멘”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대학졸업 및 청년 실업자들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