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2주 수요일 :: 2009/03/04 10:38
사순절 제 2주 수요일
렘 18:18-20
마 20:17-28
메시지 세상나라의 권력과 하나님 나라의 권력의 차이
이번 주의 독서는 이야기로 가득 차다. 이 이야기들은 헌신, 속임, 권력, 명성 그리
고 거절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현기증 나게 압도하여 예수께서 그의 아버지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경험에 마음을 열도록 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오늘 본문은 특히 너무 잔인하고 냉혈적이어서 가슴에 담기가 어렵다. 그것은 실제로 계약의 땅에 사는 이들인 예루살렘 시민과 유대 백성들에 의해 음모되어진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를 파멸시키려 하고 있고 그들이 하려고 하는 것과 그것이 그들과 타인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매우 이성적이다.
우리가 예레미야에 대항할 계책을 고안하자. 그건 사제들로부터 가르침을 잃는 것이 아니고, 현자로부터 상담에 대한 손실도 아니며 예언자로부터 메시지를 잃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자의 혀로 한 것에 의해 그를 때려잡자. 우리가 조심하여 그의 모든 말을 주목하자.
이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종교적이라고 여기도 있다. 그들은 종교의 구조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 확신을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고문자요 살인자로서 권력을 지닌 이들에 의해 지원을 받고 있다.
예레미야는 곤경에 빠져 있는 그를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도록 고뇌에 차서 소리쳐 부른다. 그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간원하고 마찬가지로 대적자들이 말하는 것에 또한 주의 깊게 들으시길 간원하며, 정의에 열정을 지닌 모든 이들의 전통에서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그는 죄의 희생자들을 대신하는 목소리가 된다. 그는 사회와 삶의 기존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묻는다: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웅덩이를 파도록 선이 악으로 보상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그들을 위하여 말하기 위해 그들로부터 당신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당시앞에 서 있음을 기억해 주십시오.”
예레미야는 죄많은 나라와 마음이 완고한 백성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그들을 위해 간원한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삶의 위험에 처해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를 미워하고 거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정이 없고, 후회하지 않으며 자기 의와 죄에 몰두해 있다. 그와 같은 백성들로부터 유일한 방어막은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사리판단을 할 수 없고 개종할 수 없다. 그들은 결정을 내리고 자신이 서있는 곳에 무덤을 판다. 선한 자를 적극적으로 박해하는 데로 움직이고 진리가 나타나거나 하나님과 서로에 대해 정의와 회개 그리고 용서를 말하는 이들이 있는 것을 견디어 낼 수가 없다. 예레미야의 위치는 물론 예수께서 그 자신의 사회와 종교적 구조속에 있는 지도자와 교사들이 있던 곳에 자신을 발견한 위치와 같다. 가장 위험한 백성은 그자신의 의를 확신하여 악을 행한다고 하는 그러한 슬프고 탄식할만한 실재인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그자신의 위치와 그의 출현이 나라와 성전의 구조와 권력에 갖는 효과에 대해 확신한다. 제자들에게 순진하지 않고, 악이 순수한 선에 대결하는 열정에 깨어있고, 인간이 진리를 대면해서 그들의 방향을 돌리는 것을 피하려하는 그 범위를 제자들이 알아차리도록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물론 그들의 악을 위해 속죄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수는 그들이 그에게 할 것에 대해 진술함에 있어서 직접적이고도 거칠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인자는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들은 그를 사형 선고를 할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그를 넘겨서 조롱과 채찍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 그러나 삼일 만에 그는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예레미야처럼 항상 거룩하신 분앞에 서서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정의로운 분노를 피하도록 말하는 인자인 예수에 대한 신앙에 대한 신학적 진술이다. 이 분이 영광중에 오시는 분, 우리가 일요일에 변화된 모습으로 자신의 행위와 신앙 그리고 기도에 근거해서 모든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하나님의 걸구함을 어렴풋이 알게 되는 분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듣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인물이 되길 기대하신 메시야, 예루살렘을 강한 나라로 만들어 로마를 전복시키고 그들의 땅에서 이들 증오와 경멸받은 억압을 몰아 내 줄 메시야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이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를 듣고자 하지 않았다-그는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지도자가 결코 아니라 사람들을 자신의 장님 됨으로부터 구하려고 하는 예언자라는 것을. 제자들은 그러한 눈멀음, 자기-의와 죄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가 예언자임을 원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진리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힘을 원했다. 그와 연합하는 것이 그들의 이기적인 열망에 이득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의 사촌인 그들의 어머니가 그에게 와서 요청을 한다. 그녀는 의지가 놀라웠으나 자신의 요청이 지닌 직접적이거나 장기적인 결과를 전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그리고 추측컨대 야고보와 요한도- 권력을,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이 되는 이와 가깝게 연합된 것으로부터 오는 권력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그들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유에 대해 귀가 먹었다. 그녀는 요청을 한다: “당신의 나라에 있어서 내 두 아들을 하나는 당신의 오른 편에 다른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시기를 약속해 주십시오.”
누구든 예수가 그의 말을 듣기를 완고하게 거절하는 데서 느끼는 슬픔을 오직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변화산상에서 우리 내부나 우리 주변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한 하나님의 목소리에 의해 자문을 받았다) 예수는 그녀와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잔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그들에게 그가 마시는 잔을 기꺼이 마실 것인지 묻는다-고통, 거부, 고문, 십자가형과 죽음의 잔을. 그들은 재빠르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속에 다른 잔을 생각하고 있다-권력의 세상에서 좀더 진부하고 적당한 잔- 그 잔은 권력, 성취, 지위, 계급, 다른 그룹에 대한 억압, 위에 있는 이에 대한 단순한 거절을 축하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에게 약속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주어야 하는 것들은 그의 것이 아님을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그의 아버지께 속해 있다. 그것은 인자의 고난에서 친하게 나눔으로 오는 친밀한 교제의 힘이요 그럼으로서 예언자들의 재판석을 나누는 것이어서 개인이나 예수의 대표자를 선택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예수가 복종하는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이다. 아버지에 의해 주어지는 고통과 기쁨의 예약된 자리와 장소가 있다.
물론 나머지 제자들은 화가 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가서 그들 사이에 불화, 증오 그리고 분열을 야기하였다. 그들 모두 권력을 추구하고, 봉사를 설교하고 작은 자를 돌보라는 예수의 제자들이기 보다는 성나고 마음이 좁은 고용인들처럼 행동하였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권력과 영향에 자신을 높일 것을 계획세워왔다.
그래서 예수는 인내하며 그들 모두에게 주님의 나라에서 어떻게 일이 작동되어가는 지를 다시금 상기시키기 위해 그들 모두를 불렀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 가운데서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그들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알고 있다. 높은 사람들이 자신의 중요성을 느끼도록 하고 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철저한 단절, 예수의 지배와 세상에서 권위와 위대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넓은 심연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를 깨닫고 그가 한 것처럼 심지어 타인들을 위해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그의 남은 생을 보낸다.
그의 공동체에서 권위와 권력은 주로 타인을 위해서, 세상의 지배적인 문화와 구조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갖지 않은 이들을 위해 사용되어진다. 예수는 전복적이다. 그는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이들을 굳건히 잡고 이기심, 자기-의 그리고 유사-종교의 지배에 빠진 이들을 보호하는 데 열중하고 계신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누구든 남을 섬겨야 하고 너희 가운데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모두의 필요를 섬겨야 한다. 사실은 인자도 남에 의해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 그 자신의 삶을 주려고 온 것이다.
이 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100% 과녁을 맞추기를 그가 열망하는 황소의 눈이다. 그것은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표이다. 성령의 힘으로 채워진 종이 되는 것, 많은 죄인들, 악을 행한 이들, 불의, 조직적인 악, 개인적인 죄의 역류의 희생자가 된 더 많은 이들에게 몸값이 되기를 열망하기. 이것이 그들이 희망한 모든 것에 대치되어지고 예수를 따르는 데 경계를 정하게 한다. 이것은 그들이 희망하거나 원하는 길이 아니다. 이제 제자들은 결정할 때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 권력과 대결하고 예언자를 죽이는 장소로 갈 것인가? 아니면 미묘하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의 제자와 친구가 되는 데 대한 그들의 헌신을 취소하고 약속을 어길 것인가?
그들은-우리는-예수의 입장으로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그분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이 세상에서 그래서 고통당하셨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편단심의 선택때문이었다. 시편기자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의 우선성을 기억하고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 섬겨야 할 유일한 힘으로서 하나님을 위한 절대적인 필요를 기억하고 시작하는 좋은 장소가 된다.
당신은 나의 은신처시오니
나를 잡으려고 쳐 놓은 그물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당신의 손에 내 영을 맡기오니
나를 구하소서 오 주님, 오 신실하신 하나님
한결같으신 사랑으로 오 주님 나를 구하소서.
사람들의 비방소리 들려 오며
협박은 사방에서 미쳐 옵니다.
그들은 나를 노려 무리짓고
이 목숨 얿애려고 음모합니다.
한결같으신 사랑으로 오 주님 나를 구하소서
그러나 오 주님 나는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은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나의 운명을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내 적들과 박해자의 올무에서 나를 구하소서
한결같으신 사랑으로 오 주님 나를 구하소서 (시 32:4-5, 13-15)
우리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몇 가지 것들이 존재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기를 가르치신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적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이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허락한다. 그것이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 권력이요 권위인 것이다.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감옥에 있는 재소자들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