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2주 목요일 :: 2009/03/04 10:40
사순절 제 2 주 목요일
렘 17:5-10
눅 16:19-31
메시지 심판의 기준으로서 정의와 친절
오늘의 독서는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쇠락하고 있고, 우리가 소환당하고, 또한 우리의 충성은 거짓말이 되었다.
예언자의 이미지는 전적으로 반대편에 있다: 첫 번째 이미지는 사막에서 덤불이다. 그것은 소금쩍이 일어나서 아무도 자라지 않는 대지에서 자란다-이미 거의 죽은 상태이다. 두 번째는 물가에 심은 나무이다. 그것은 뿌리가 개울가로 뻗어 열이나 가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성하고 타인들을 위해 열매를 맺는다. 덤불은 그 생명력이 끊겼지만 나무는 영양과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의 영혼의 상태, 신앙과 행동의 질은 어느 것을 반영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알고 있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그늘, 쉼의 장소, 풍성한 열매, 생명 그리고 희망을 타인들에게 주는 지, 아니면 우리가 남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자기 내부에서 움츠려있는지를 묻는다.
뒤따라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삐걱거리고 후회로 가득차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의 마음은 천길 물 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 야훼만은 그 마음을 꿰뜷어 보고
뱃속까지 환히 들여다 본다.
그래서 누구나 그 행실을 따라
그 소행대로 갚아 주리라.
하나님은 우리 쪽에서 거짓된 인상이나 인식부족과 상관없이 우리가 행하는 대로 사는 이유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상기시켜 주는 것이 두 사람의 이야기속에서 구체화된다: 부자, 전통적으로 이름하여 탐닉자로서 그는 신뢰함으로써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고 육신의 강함과 타인을 신뢰한다. 그는 인간이 된다는 것에 대한 아무런 의식없이 산다. 다른 사람은 탐익자의 문간에서 사는 거지로 피부에 염증이 있고 식탁에서 떨어지는 조각들에 염원한다. 개가 그의 종기를 햝고, 이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친절이다 왜냐하면 다른 인간들로부터는 아무런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나사로이다. 탐익자는 그가 지금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나사로는 그 사람의 집의 문에서 누워있고 잊혀졌다 나사로의 신뢰는 하나님께 있다. 그 외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서론에 해당한다. 거지는 죽고 천사가 그를 집으로 데려갔다-아브라함의 품으로. 그 아브라함은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관대하지 않고 폭력적인 것에 대해 거기 거주하는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지나가실 때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을 자신의 식탁에서 음식을 제공한 사람이다. 부자도 역시 죽어서 묻혔고 그 자신이 고통의 한 가운데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눈을 들어 멀리 있는 아브라함을 보았고 나사로가 그의 품에 가까이 어린이처럼 휴식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진실로 고문이자 고통이다. 그는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보았고 그것에 대해 동경한다. 그는 천국의 문에서 거지가 되었다.
탐익자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요청하면서 나사로가 손으로 물을 찍어 자신의 혀에 대해 기운이 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화염으로 고문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탐익자가 나사로를 인식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가 식탁보를 정리할 때는 나사로를 무시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나사로가 그에게 그의 갈증을 축일 물 한방울을 주도록 간청한다.
그러나 나사로는 천구에서는 선택을 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조상인 아브라함이 판단을 내리고 그 결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째서 그런 결정이 내렸는지를 신중하게 탐익자가 확인하게 한다.
너는 살아있는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었음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안을 받지만 너는 거기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것이 모두가 아니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심연이 있어서 여기로부터 너에게 건너가려하는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아무도 건너올 수도 없다.
심연은 한때 쉽게 열려질 수 있는 문이었지만 타자의 필요에 대해 무시하는 반복된 선택들로 인해 그 분을 우리를 분리시켰고 건너갈 수 없게 되었다.
탐익자는 홀로 그 심판을 받아들이지만 그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그의 집에 보내어 그의 다섯 형제들에게 그들의 앞에 무엇이 놓여있는지-심판- 경고하도록 요청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인지 시들어 가는 죽음인지를 알려주도록 하게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강경하다. 그들은 그들이 필요한 모두를 가졌다: 모세, 율법, 예언자의 말들. 땅에 정의가 존재하고 음식, 의류, 주거와 존엄이라는 기본적인 필요물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돌봄이 존재 할 때 계약은 명예롭게 된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바리새인들, 곧 정확히 그들이 말하는 바를 아는 이들에게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믿을 수 없는 끝말을 한다. 아브라함이 탐익자에게 그의 가족은 예언자들과 율법의 말을 들어야한다고 말할 때 그 부자는 말한다, “누군가 죽음으로부터 나와서 그들에게 가기만 한다면, 그들은 회개할 것입니다.” 역사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한 표징 곧 일상성의 패턴을 흔드는 표징이 응답을 요구하는 표징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타인들을 향한 정의와 친절을 행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반문한다:“만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들은 누군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난다할지라도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표징, 기적 그리고 인간적인 것의 와해는 이기심, 탐욕 그리고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이들로부터의 거리두기를 통해 이미 죽은 이들의 가슴에서 생명을 불어넣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탐익자와 나사로의 비유이다. 행운의 전복은 심판이 있기 오래 전에 무엇이 실재인지를 노출시킨다: 한 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는 영혼, 예배 혹은 신앙이 없다. 다른 한 사람은 세상에 의해 천대받았지만 하나님의 계약에 충실한 이들에 의해 아이처럼 돌봄을 받아야 한다.
탐익자가 행해온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을 위해 아브라함은 모델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예배, 진정한 성실함으로서 거지인 나사로의 몸과 삶을 그들 자신의 가슴과 삶속에 품으라. 예수는 예언적으로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예언자의 발자취를 신실하게 따르기를 그들이 거절하는 것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계약과 그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심지어 예수처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난 이조차도.
비유는 강직하다. 그것은 우리가 먼가 진지한 성찰을 하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자신의 문들을, 우리 자신의 생에 대한 입구와 출구를-일터, 교회, 우정, 단체, 취미-바라봄으로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똑같은 관용없음과 불감성으로부터 고통당하고는 있지 않은지 보게 한다. 만일 우리가 공동체의 선한 구성원을 만드는 율법을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우리는 정의, 자유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한 존엄성에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언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귀가 먹고 하나님 나라, 우리 형제자매의 가장 작은자들 가운데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선포하는 이를 믿지 않게 된다.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그 문들을 보도록 다짐을 받고 있고, 우리를 기다리는 자를 보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보도록 간구하시며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바로 다음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밖에 있는 가난한 자 그리고 곤핍한 자 다수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심판받고 있다.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방치된 청소년들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