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2주 금요일 :: 2009/03/04 10:42


사순절 제 2주 금요일

창 37:3-4, 12-13, 17-28
마 21:33-43, 45-46

메시지:     우리가운데 가장 작은 자들의 고통에 대해 돌보기

오늘 우리는 아들에 대한 두 이야기를 듣는다. 하나는 창세기에서 온다. 그것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 레아와 라헬에 의한 이스라엘(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것이다. 다른 것은 예수가 대 제사들과 백성들의 원로들에게 말한 것으로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도조의 몫을 받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그의 아들을 보낸 토지 소유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작인들은 그들이 포도원에서 받을 것에 대한 이상한 합리화를 통해 그 아들을 죽였다. 내일의 복음서 읽기는 예수가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에게 말한 이야기임을 주목하라. 이 두 독서는 중첩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함께 읽을 때 수많은 연결이 존재한다.

요셉의 이야기는 가족을 파멸시킬 수 있는 불균등한 사랑과 친절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그의 모든 아들중에 가장 사랑했다. 왜냐하면 그가 늙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신구를 단 옷을 지어 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유별나게 그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형들은 미워서 정다운 말 한 마디 건넬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오게 될 분위기는 그 시작에 있어서 불길함을 보여준다-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사람에 대해 특별한 선물과 대우를 해 주는 사랑이 그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야기 처음부터 요셉은 이러한 편애로 형제들이 살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꿈을 자랑하고 다른 형제들이 그에게 절을 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함으로써 이것이 더욱 다른 형제들로부터 격리를 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말하기를 거절하고, 그들 가운데 그가 있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형님들에게 보냈는 데 그들은 세겜에서 양들을 치고 있었다. 요셉은 복종하여 도담에 있는 그들을 따라잡았다. 그들은 멀리서 오는 그를 보고-아마도 그의 옷을 통해 그를 식별하고서-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그를 “환상장이 master dreamer"라는 이름으로 놀렸고 구덩이에 그를 던져 넣어 그의 아버지에게 야수가 그를 잡아먹었다고 말할 참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분노는 그의 꿈에 대한 것으로서 이는 그들을 힘없고 그보다 오직 더 못한 것으로 그들 모두를 대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

요셉의 형 루벤이 그를 구하려고 한다. 그는 형제들에게 대안을 제시한다: 그를 당장 죽이는 대신에 구덩이에 넣고 거기에 내버려 두자. (루벤은 돌아와서 그를 구할 셈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가오는 요셉을 잡아서 그를 우물 구덩이에 던진다. 그러나 루벤은 그의 계획대로 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이스마엘 사람들(아브라함에 의한 하갈의 자식의 후손들)의 약대상들이 길리아드에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형제 유다는 요셉을 종으로 팔 것을 제안한다: 그를 우리가 죽여서 그의 피를 감추기 보다는 그를 팔자-결국 그는 우리의 형제, 우리 자신의 골육이 아니냐.“ 그 말이 동의되어서 그들은 요셉을 은 20냥에 판다- 그 돈은 가장 두 번째 형제의 피의 값이었다.

이러한 사건의 전환은 요셉을 단련시키고 그를 신실하게 가르치는 긴 역사로 만든다. 어느날 형제들은 빈곤한 처지로 이집트로 먼 길을 걸어 와서 그들의 형제앞에 절한다. 그러나 그 길은 용서, 화해로 인도되고, 특히 모든 형제들의 아버지인 이스라엘에게는 축제와 커다란 기쁨으로 가족이 재회되는 길이 된다.

두 번째 독서에서는 예수께서 한 비유를 지도자들에게 말한다. 그는 상황을 설정한다: 땅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그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포도주를 짜는 큰 확을 만들고 망대를 세우고서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서 먼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포도 수확철이 되자 주인은 즉시 그의 종들을 보내 그의 포도의 몫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노예들을 붙잡는 것으로 응대한다. 그들은 한 사람은 때리거나 어느 사람은 돌로 치고 다른 사람은 죽였다. 주인은 다른 노예들을 보내어 포도에 대한 그의 몫을 다시 얻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같은 방법으로 취급당한다.

이제 주인은 그의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내 아들에게는 존중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들을 보았을 때 그들 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들의 잘못된 논리는 아들은 모든 것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고 아들이 없다면 그들이 대신에 유산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범한 살인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사악함과 사기 때문에 어떤 재산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살인자로서 그들에게 내려지는 정의, 변호, 심판에 대해 아무런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을 붙잡아 그를 포도원 밖으로 끌고 나가 그를 죽인다. 그 행위는 일어났고 그 이야기는 말해졌다. 이야기꾼들가운데는 한 옛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는 말하는 자가 말하는 것을 멈출 때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는 그것을 알았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청자들에게 질문하기 때문이다, “이제 포도원의 주인이 돌아 올 때 이들 소작인들에게 무엇을 할 것이라고 상상하는가?” 예수는 대사제들과 원로들이 그 상황을 다루고 판단하기를 의도한다.

유대공동체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아는 것처럼, 예수는 포도원의 이미지가 이스라엘의 땅을 상징하며, 계약은 포도원 소유자와 소작인들 간의 협정임을 안다. 계약이 하나님은 수확철에 그의 정당한 몫을 받아야 함을 요구한다는 것을 그는 안다. 하나님이 거부될 때, 하나님의 종들인 예언자들은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보내어져 그들에게 약속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본성을 상기시킨다.

이 포도수확은 그의 백성들 간의 관계의 질(quality)이다: 아나윔-땅의 가난한 자-에게 대한 정의. 어떻게 “이들 중의 작은 자”들이 취급되는 가가 어떻게 국가가 사막에서 주어진 명령들을 성취하는 데 신실한가에 대한 기준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한 때 이집트에서 노예였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며 그들은 다른 이들을 그들의 억압자가 그들을 대한 것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에 그들 가운데 작은 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관대함과 돌봄에 의해 알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야훼는 아버지가 첫 아들에 대해 돌보는 것처럼, 어머니가 수고와 고통으로 낳은 자녀들을 돌보는 것처럼, 가장 작은 자이고 가장 고역을 당한 그들을 돌보셨기 때문이다. 수확량이 배려되지 않고 한나님이 존중받지 않으며 제의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예배되어지지 않을 때, 예언자들은 야훼에 의해 그들의 입에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보내졌다.           

예수의 말은 약식으로 축약된 형태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에 의한 불신실함의 긴 이야기와 거절되고, 죽이고 혹은 추방당한 예언자들의 긴 결합의 이야기를. 끝에서 전환은 주인이 그의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지고 소작인들의 왜곡된 논리는 그들이 아들을 죽이면 아들과 아버지에 속한 권리를 그들 스스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추론은 병들고 폭력적인 것이다. 그건 인간의 마음이 가질 수 있는 증오, 이기심 그리고 폭력으로 가득차 있다. 그건 우리에게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늙은 아버지를 돌보지 않고 혹은 그들의 범죄가 그들의 남은 생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 그를 죽인 것을 회상시킨다.

예수는 토지 소유자의 아들이지만 그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로들과 대 사제들의 형제이다. 예수는 환상장이(꿈장이)와 같은 위치에,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중에 가장 사랑받는 이의 위치에 있다. 그의 평화와 정의에 대한 꿈이 많은 이들을 자신의 가슴속에서 살인자로서 반응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의 가슴을 위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를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이해의 똑같은 결여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살인하는 사악함의 반응이 얼마나 우리 가슴과 마음에 깊이 유지되고 있고 종종 가장 가난한 자들에 대해 우리가 돌보지 않음과 정의에 대한 결여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얄팍하고 불명예스러운 예배속에서 종종 노출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하실까? 원로들은 대답한다: “그는 사악한 무리들에게 나쁜 결말을 갖다주고 포도철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이다.” 그들은 판단한다. 백성들의 원로들처럼, 그들은 예수가 채용한 종교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의 인간적 정의에 대해 알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와 그의 사명에 관련해서 그들 스스로를 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마지막 의지처로서 그들에게 보낸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를 존중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들은 그렇지 않고 종종 우리도 그렇지 않다. 예수는 그들에게 한 인용을 제시한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구조물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을 행한 분은 바로 주심이시고 우리에게는 놀랍게 보인다.”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거절하고 그를 축이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악과 증오를 구하기 위해 역사속으로 몰래 들어오셨고, 어느날 형제들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요청할 수 있고 그들에게 용서를 줄 수 있도록 요셉을 인도하신다. 예수는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이들에게 같은 것을 행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고 오직 한 가지를 의도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행동, 곧 우리의 흉악하고 증오스런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게 하기-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로부터 탈취를 당해서 풍성한 수확을 내는 나라에게 주어질 것이다.” 예수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그가 그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들은 그를 체포하려고 했으나 예수를 예언자로 간주하는 군중들이 무서웠다. 그들은 손을 대지 못하고, 그들의 분노와 증오는 커져갔다.

우리는 예수가 우리들에 대해 말한다고 깨닫는가?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로서 우리의 행동들은 무엇인가? 우리 대신에 다른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는 시기하고, 거칠은 조건하에서 신실하게 투쟁하는 다른 이들을 우리는 증오하는가? 우리는 종종 자신이ㅡ 행동의 결과들에 대해 고려함 없이 그리고 정의와 심판에 대한 생각없이 행동하는가? 예언자를 다룰 때 오직 두 개의 선택만이 존재한다: 회개하고 우리가운데 가장 작은 자들에 대한 돌봄에 의해 과거 행위를 속죄하거나 오만하게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의 계약에 대한 우리의 불신실함으로 우릴 대면하는 가난한 자들의 현존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가슴에 예수가 질문하는 것을 듣는가: “그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이들 소작인들에게 그가 어떻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 세상을 향한 중보 기도: 북한 주민의 복지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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