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목회-이 시대의 새로운 제자직에로의 부름 :: 2009/02/04 07:59

                                        평화목회의 실습 (2)

                   이 시대의 새로운 제자직(평화의 제자직)에로의 부름

참고: 막 4:35-41/6:45-52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판단은 두 개의 축에 의해 측정되어질 수 있다. 하나는 성서 및 전통의 깊이에서 퍼 올린 영적인 통찰에 대한 타당성(validity)과 또 하나는 우리의 삶의 맥락에 관계하는 적합성(reference)이 그것이다. 전자는 복음의 근거로서 계시/통찰의 부분에 속한다는 점에서 초월의 의미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항구적 영적 능력의 차원에 있지만 후자는 ‘삶의 자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시대적 상황에 따른 지속적인 변화를 요청한다. 그 변화는 바로 제자직의 정체성의 문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자직은 먼저 ‘오라’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마가복음에 보면 첫 번째 제자직은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에게(1: 16-17), 그리고 세관에 있던 레위에게(2:14)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부르심을 통해서이다. 이 첫 번째의 부름은 우리의 안전(security)에 근본토대가 되었던 일상에서의 소유, 물질, 이 현세적인 욕구충족에로의 방향정위(orientation)로부터 방향전환(de-orientation)으로 부름받은 자의 삶을 바꾼다. 그래서 그러한 따름은 자신의 과거의 행동, 집착, 관계, 지향을 버리는 자기 부정의 행위에 근거하게 된다. 일종의 소명에로의 부름이 일상의 가치와 지향성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를 따르다가 두 번째의 부름이라는 ‘부름속의 부름’을 우리가 듣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안전이 일상이 아니라 종교성이란 안전한 성체,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영적인 음식(비유로 말씀하심)의 배부름이나 신체적인 음식(오병이어)의 배부름이라는 안락과 종교적 위로로부터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재-정향(re-orientation)에 초점이 있다. 여기에는 ‘저편으로 건너가자’라는 ‘가라’의 앞서 나아감의 원심력의 행위가 형성되어진다. 여기서 초점은 ‘오라’가 아니라 ‘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호숫가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재촉하며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한 ‘가라’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여기서는 매우 다르다. 저녁이라는 어둠과 거센 바람이라는 상황이 존재한다. 폭력(violence)의 두 양상이 존재한다. 하나는 외적 상황으로 어둠과 거센 바람(역풍)이 있고 또 하나는 불안, 공포, 절망이라는 실존적 경험이다.  예수는 그런 삶의 맥락에서 ‘재촉하며’ 행동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나아감의 목표는 바로 ‘저편’에 있는 군대 귀신들린 자와 질병에 고통 받는 자들의 치유와 온전함(healing and  integrity)의 회복 그리고 소외된 그들의 공동체로의 복귀(fellowship)이다. 그 결과로 샬롬의 실제적인 통치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 언어, 의식의 소유를 넘어 실재로 누리는 살아있는 평화요, 하나님 나라의 육화이다.  

여기서 우리는 평화와 폭력(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니라 폭력)의 두 주제를 극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로부터 ‘제자’를 구별하는 것은 바로 무리와 달리 제자는  폭력의 상황들을-어둠, 거칠음, 소외, 고통, 질병, 불안, 공포, 절망- 의식(awareness)하며 그것들에 대한 맞서 나아감이라는 행동(praxis)이 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그런 폭력의 상황에 맞서 ‘꾸짖고’(4:39) 또한  ‘더러운 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5:8)고 명하는 사건에, 병자들의 치유(6:55)의 사건에 눈으로 목격한다. 뿐만 아니라 그런 폭력적 상황-거친 바람-에서 ‘고요하고 잠잠하라’는 그의 행위와 어둠과 역풍 속에서 ‘나다(It's me)'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심을 경험함으로써 평화의 증언자(witness of peace)가 된다. 이런 폭력의 상황에서 예수가 진실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어떤 존재인지를 제자들은 진실로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삶의 현장에 이를 적용한 예를 한번 살펴보자.
 
1990년대 초 동부 로스앤젤러스에서 가톨릭 십자가선교회(Dolores Mission Catholic Church)의 회원들인 한 그룹의 여성들이 갱들의 폭력이 자신들의 이웃에 가져오는 무거운 비용에 대한 해결을 찾고 있었다. 교구 안에서 8명의 갱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갱들의 살인과 부상이 거의 매일 일어났습니다. 어느 특별히 폭력이 극심하던 주간에, 그 여인들은 기도그룹으로 모여 지금의 본문으로 성서읽기를 하고 있었다. 한 여인이 갑작스러운 발견과 놀람으로 마치 전기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폭력의 궁지에 상응하는 것으로 이해된 것을 동료들과 나누었다.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는 그들이 살고 있는 보일 하이트 거리에서 벌어지는 갱 전쟁이고 자신들은 개인의 안전에 두려워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보트에 의존하듯이 자신들도 문을 꼭 걸어 잠군 자신의 집안 속으로 도피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안전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확신을 가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선 밖으로 나오는 것임을 설명하였다. 제자들이 물위를 걸었듯이 폭력으로 찌든 거리 속으로 들어가면 폭력을 잠재울 것이란 확신이었다. 긴 토론 후 그날 밤 70명의 여성들이-소수의 남성포함- 갱 구역 속으로  페리그리나치온 (순례 행진)을 시작했다. 전투준비를 하던 갱들이 놀라는 것을 보고 어머니들은 그들을 초대하여 음료와 간식을 제공하고 갱들이 어렸을 때 익숙했던 노래를 같이 부르도록 초대하였다. 매일 밤, 어머니들은 걸었고 일주일내 갱과 관련된 폭력은 급격한 감소가 있었다. 새롭게 형성된 조직 - ‘이웃의 평화를 위한 위원회’ -가  전쟁의 규칙을 깨고 그들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출현에 대해 대응하였다. 비폭력적으로 관여함으로써 그들은 고조되는 폭력과 보복의 오랜 관습에 도전하고, 폭력의 지대를 사랑의 지대로 변혁시켜갔다.

어머니들은 ‘저편’에 있던 갱들의 인간성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고 그들 안의 두려움과 염려를 내보내고 갱들의 인간적인 얼굴을 대면함으로써 의사소통과 변혁의 과정을 창조하게 되었다. 여성들은 실직과 경찰들의 잔인성에 대한 갱들의 고민을 듣고 빵공장, 빵집, 그리고 아동양육센터를 세우고 몇몇 일자리를 창출하여 갱 멤버들이 일자리를 얻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갈등해결기술이 배우게 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좀 더 인간적인 환경을 창조하는 데로 나아가는 조치들을 시작했다. 그들은 이것을 함께 인간이 되는 위험을 무릅씀으로서 해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물위를 걷기”라는 비전을 통해 해냈던 것이다.
  
우리는 폭력의 격노하는 폭풍우의 한가운데 살고 있다. 이 폭풍우는 내적, 개인간, 구조적, 문화적, 국가적, 국제적 폭력 등의 수많은 형태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안전은 그런 상황으로부터의 회피나 종교적 성채(castle)가 아니라 그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어둠과 폭풍우속에서 ‘나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분을 주목함으로 주어진다.

2009. 2. 5.
(고난함께 소식지 119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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