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목회의 두 원리-소금과 빛 :: 2009/08/19 11:06

                                                  평화목회의 두 원리-소금과 빛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참조본문: 마5:13-16



마태공동체가 자신들이 속한 유대교 전통속에서 예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갱신운동을 시작함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변과 분리시키는 데 있어서 그 중심핵은 바로 신에 대한 영광을 어떻게 돌리는가에 대한 해석과 실천의 문제에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신에 대한 응답의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에 로마제국의 약탈과 지배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갈릴리주변의 강력한 민중봉기와 이에 따른 여러 대량 학살들의 끔찍한 상황들, 성전국가(temple-state)가 가진 제사장계급과 헤롯당원들이 민중을 배반하고 제국주의의 대리자(client)로서의 지배체제와의 공모와 관련한 상황인식에 관련되어 어떻게 공동체를 회복하고 이를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신앙에 근거한 실천 전략과도 연결된 것이다.

전쟁과 수탈, 무장 봉기와 보복 학살, 성직계급의 특권보호를 위한 지배체제와의 공모 등으로 얼룩진 당시 사회경제적 현실은 일반 민중의 삶을 황폐케 하고 극심한 절망과 사회기반의 해체의 위기를 가져오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상황에서 예수와 그의 신념공동체는 성전(temple)을 중심으로 한 율법주의의 규레준수와 성전의 제사문화를 넘어 마을회의(sinagogue)를 중심으로 한 풀뿌리 지역운동을 기반으로 마을에서 마을을 다니며, 국가안보와 지배이념을 넘어 풀뿌리 서민의 삶을 보호하는 인간안보(human security), 공동안보(communal security)를 지향하는 변혁운동으로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이 변혁운동에 대한 예수의 신념은 바로 시내산 십계명의 재표현으로서 산상수훈(5:1-12)의 진복팔단과 그에 대한 실천요강(13절-16절)이다. 이는 산상수훈은 호두로 표현하면 그 ‘속’이고 실천요강은 ‘겉’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산상수훈은 바로 신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가에 대한 교리적, 개념적 진술이 아니라 그 강조점은 이 지상적 삶에서의 가치와 의미문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앙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이 우리에게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살라고 요청하시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제의적 삶에 대한 진술은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지상적 삶에 있어서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요청인 것이다.

실천요강으로 보자면 이는 더욱 뚜렷하다. 16절은 이렇게 기술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를 성찰하면 신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은 우리의 기도나 제의와 같은 직접적인 봉헌행위로가 아니다.(독자는 이 말에 매우 충격을 받거나 어리둥절하리라) 영광을 돌리는 방식은 내 안의 빛이 타자 곧 이웃에게 전해져서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삶의 실제적인 실천행위-을 보고서 그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때 나의 신에 대한 영광돌림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즉 신에 대한 영광은 직접적인 제의봉헌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 곧 지상에서의 실천행위를 통해 타자가 인정함으로 이룩되는 우회의 방식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본문에 대한 나의 이러한 주장은 앞 구절을 더 성찰할 때 뒷받침되어진다. 소금과 빛은 그냥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다. 세상에 대한 맛에 대한 그 유용성으로 소금의 실존과 가치가 판단되고 등경위에 두어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그 효용성으로 인해 빛의 존재의미가 정의되어진다. 소금과 빛은 ‘우리/그들’의 논리라는 게 없다. 신앙의 내적인 영역의 제한도 없다. 그것은 경계없이 ‘내(內)집단/intra-group'을 넘어서서 외부로 퍼져나간다. 본문이 보여주듯이 불특정 다수의 ‘세상,’ 일반인인 ‘사람,’ 내 종교 신념을 넘는 ‘산위에 있는 동네’와 ‘모든 사람’이라는 사회적 공공성에 그 효과와 효험성이 있을 때 빛과 소금은 제대로 자기 정체성을 갖는다.          

이 지상적 삶의 덕성으로서 진복팔단은 실천요강인 빛과 소금의 공공적 실천을 통해 확증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평화목회의 중심축인 빛과 소금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평화와 비폭력을 추구하였던 수많은 실천가와 평화교회들(퀘이커, 형제교회, 메노나이트 등)이 실천전략으로 지녀온 확신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신적인 빛(divine light)에 대한 확신과 세상에서 사회적 증언으로서 화해(reconciliation)의 직임에 대한 것이다. 

이 빛은 단언할 수 없지만 경험되어지는 ‘하느님의 그 무엇’으로서의 내적 확신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어둠과 무지를 밝힌다. 즉 세상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는 ‘분별’(discernment)을 가능하게 하는 영적인 실재이다. 빛은 분별, 능력, 생명(진정한 자아의식)을 가져다준다. 이 빛으로 인해 궁극적인 것에 대한 감각, 사리를 깨닫는 힘, 진리에 대한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그러나 이 빛은 교리나 지적인 소통에 의해 발휘되지 않고 영혼에서 일어나는 알아차림을 통해 열려진다. 그것은 습득되기 보다는 베일이 벗겨져 있던 것이 노출되는 것이다.

화해는 사회적 증언으로서 이는 타자가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서 그들이 신께 우리의 행실을 인정받기 위해 타자 속으로 개입하는(engagement) 것이다. 이는 ‘이웃을 내 몸처럼’ 여기는 타자의 나와의 유사성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manifest)이다. 이웃을 내 몸으로 연결하기(connection), 사회적 약자이든 생태적 약자이든 그들의 고통이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표현하고 그러한 윤리적 민감성을 갖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타자를 강제, 처벌, 비난, 보복, 희생의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 이해, 대화, 연결, 자비로 상대의 진실과 내 진실이 서로 맞잡게 하는 것이다. 비난과 처벌의 악순환이 아닌 ‘잃은 자’가 ‘생명’을 얻고 이를 더욱 ‘풍성하게’ 얻도록 한다(요10:10). 정의를 세우는 방식은 악에 대한 보복적 징벌을 통해 상대를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인간성을 되찾고 진리의 편에서 선을 행하도록 돌려 세우는 관계맺기에 있는 것이다. 태초에 있었던 일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즉, ‘어둠속에서 빛이 있으라’ 하신 창조자의 사역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어둠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빛을 잉태하도록 돕는 것이 화해이다.      

이 성서본문이 또한 놀라운 것은 빛(분별, 은총)보다 소금(화해)을 앞세웠다는 것이다. 먼저 화해이고 이에 대한 힘은 빛으로부터 온다. 이것이 마태공동체를 주변 유대공동체로부터 구별해내는 자신의 정체성이다. 제단에 예물 드리기 전에 먼저 이웃과 갈등을 먼저 풀라(24절), 눈은 눈으로가 아니라 대적하고 고발하고 억지로 하자고 하는 자에게는 더욱 적극적으로 -왼뺨 돌려대기, 속옷주기, 10리 가주기- 상대를 껴안아 그의 대적, 고발, 억지를 무력화시키라(38-42절).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문자적인 의미에서; 43-44절). 5장 마지막 절에서 예수는 말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여기서 온전하기는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신에 대한 이해와 그들로부터 나의 지킴-보다 나은 방식으로서 상대속으로 들어가는 화해(아가페의 활동)의 질적인 영역이다.   

본문은 공통적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예수의 말을 듣는 ‘너희는’에 대해 지목하고 있다. ‘너희는’ ‘세상’과 관련된 변혁적 활동을 위해 부름을 받는 자들이다, 예수 당시나 지금이나 관계없이. 복음은 이렇게 ‘지상적 영성(mundane spirituality)’을 통해 그리고 신학이 있다면 ‘일하는 신학(working theology)’을 통해 삶에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능력의 활동이다. 이것이 당시에 각종 억압과 전쟁피해로부터 상처와 무력감을 지닌 오클로스(민중)의 삶을 재건하는 예수의 사회적 프로젝트였다. 예수를 종교지도자로 본다는 것은 성서의 많은 부분을 간과한다. 오히려 그는 매우 능동적인 평화활동가이자 전략적인 조직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분별과 화해-감리교로 말하면 은총과 사회적 성화-, 이는 하나님 통치의 실현을 위한 두 통로이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름이 아니라, 내적 구원과 사회적 구원의 두 영역이 아니라 뫼비우스 고리처럼 안과 밖이 서로 연결된 상호성(inter-being)의 통합적 관계를 갖고 있다.


2009.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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