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관련 성서연구 자료 :: 2006/02/16 18:42

제 16회 민들레공동성서연구: 평화와 경제

일시: 2월 20일(월)-22일(수)
장소: 에덴 기도원

첫째마당: 하느님의 정체성과 자비의 경제학

성서본문: 아모스 2:6-3,2, 5:21-27

현대 평화학에 있어서 경제문제는 가장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평화학이 전쟁방지에 관련된 직접적인 폭력(‘소극적 평화’)과 관계되어졌다면, 요한갈퉁이 제기하였던 ‘구조적 폭력,’ 곧 제도적이고 간접적인 폭력중의 하나로서 가난과 경제정의 문제(‘적극적 평화’)는 최근의 다양한 지구화문제(금융, 군사주의, 질병, 환경재앙 등등)에 있어서 국제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심각하게 관심을 갖는 주제이다.

지금까지 수세기동안 기독교는 세속화와 과학의 도전에 대한 자신의 성을 구축함에 있어서 ‘사실(fact)'과 ‘가치(value)' 그리고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영역을 구분하여 교회의 영역은 후자-가치와 영적인 삶-의 영역을 지키는 것으로 여겨옴으로써 하느님의 통치를 개인의 내면적인 세계와 교회영역내로 축소시킴으로써 세상의 악신과 권세에 대응함에 있어서 무력증을 보여 왔고, 제도권의 교회가 경제와 몸-살림을 신앙의 영역으로 인식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기독교전통에서 ‘공동체’와 ‘살림’을 위한 경제에 관심을 갖고 온 흐름은 노동과 명상, 평등과 공동체주의의 가치를 추구해온 은둔의 수도원전통이었다.

“평화와 경제”라는 주제하에 세 번에 걸친 성서연구의 본문을 선택해야 하는 제한성 때문에 우선적으로 기독자로서 경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관점에 대한 시사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초기 예언전통의 아모스를 우리는 선택한다. 이는 이른바 ‘자비의 경제학’의 근거와 원칙을 알고자 하는 것이지만, 아모스를 접하면서 ‘쉽지않구나’라고 느끼는 이유는 그에게서 풍겨나오는 격렬함, 저주, 분노, 충격적인 도전의 언어에 우리가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역겨움을 분노로 폭발시켰다.(“흩어 버리리라”, “내던지리라” “어찌 벌하지 않으랴” “저주받아라”) 하느님의 목소리가 침묵하는 세상에서 아모스는 홀로 하느님의 힘찬 음성에 사로잡힌 모습으로-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로(3,4)- 포효하는 그 분위기에 압도되고 만다. 하느님의 화살통에서 튕겨나온 화살처럼 다가오는 아모스의 격정을 어떻게 차분히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아모스가 출현한 여로보암 2세의 통치(786-746BC)의 이스라엘의 북왕국은 강대국 앗시리아와 시리아의 세력약화기간에 국경도 확장시켜(하맛, 다마스커스까지 확장)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던 시기다. 나라 안은 풍요와 사치로 인해 도시들은 우아하게 단장하고 궁궐은 풍족하였고 부자들은 상아로 장식한 여름별장과 겨울별장을 갖고 있었으며(3,15) 비단베개가 있는 화려한 침대위에서(3,12) 값진 향유를 발랐으며(6,4-6). 바산의 암소라 불리는 부유한 여인들은 술에 취해(4,1) 음탕한 향연을 벌렸다. 한편 나라 안에는 부정의가 팽배하여(3,10) 가난한 자는 시달림과 착취를 당하고 마침내 종으로 팔려가는 처지였다.(2,6-8, 5,11) 재판관은 뇌물로 판결을 내렸다.(5,12)

위에서 진술한 사회적 상황들은 인간역사에 보편적인 상황들이며 오늘날의 상황도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모스가 자신이 경험하는 사회적 상황에 질겁을 하고 격노하는 것은 그가 특별히 윤리적 민감성을 남보다 더 갖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모스가 무엇을 말했는가에서가 아니라 그가 누구를 말했는가에 주목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는 삶을 어떤 영원한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말대로 예언자는 세상을 하늘의 초점 안으로 끌여 들이며 사물을 하느님을 통해 보는( ⇗ ⇘ ) 것이다. 그의 의식의 궁극적 대상과 주제는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이 누구신가는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하는 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요키는 출애굽의 사건속에 나타난 하느님이시다.

출애굽사건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출발하는 시원적 사건으로서 자기-축적과 자기-만족의 억압적인 정치경제적 상황(‘지배의 경제학’)으로부터 자유와 책임의 살림 공동체(‘자비의 경제학’)로 부르신 하느님의 선제행위에 근거한다. 두 번에 걸친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그분이 어떤 분인가를 명확히 한다. 하느님백성으로의 첫 시작의 동기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은 ... 신음하며 아우성을 쳤다. 이렇게 고역에 짓눌려... 울부짖으니...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이스라엘 백성을 굽어살펴 주셨다”(출2,24-25)는 것이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시 계약을 맺을 때 하느님은 자신을 다시 계시한다.“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출34:6) 이스라엘은 이렇게 자비의 하느님을 깨닫기까지 기나긴 세월을 보내야 했다.

광야 40년의 유랑생활에서 이러한 자비의 하느님을 모세 홀로가 아닌 백성 모두가 경험하게 된 것은 메추라기와 맛나의 제공받음에서였다. 하늘로부터 선물받은 양식을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으며” 남겨둔 음식은 “구더기가 꿇고 썩는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 (출16,13-20) 고역에 신음하던 종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지는 과정에서 만난 이 사건의 교훈은 결국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자비에 기초하며, 주어진 것은 선물로 받은 것이어서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와 명분이 없음을, 그리고 평등한 배분의 삶에로의 초청에 대한 신의 의지를 깨닫게 해준다. 아모스도 이를 회상시킨다.

누가 너희를 에집트에서 구해 내었느냐?
내가 아니었더냐?
나는 너희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어 주었고
아모리족을 너희 앞에서 멸해 버렸다. ...
이스라엘 사람들아
사실이 그렇지 아니하냐?
-야훼의 말씀이시다. (2,10-11)

아모스가 당시의 착취와 불평등 경제에 분노하는 것도 도덕적 이상에서가 아니라 자기를 불러내신 분이 하느님이요, 자신의 심장속에서 말하는 분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이 있어 그가 돌보신다. ““살고 싶으냐? 나를 찾아 오너라”(5,4) “살고 싶으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라”(5,14) 여기서 하느님을 아는 것과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 동시에 추구된다. 이러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동일성의 근거는 하느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깨달음에 기초한다.

두 본문이 대표하는 아모스의 비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2장 6절 이하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서 성실성의 결여와 서로 자비를 베풀지 않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회적 부정의와 경제적 약탈의 문제이다. 죄없는 자를 빚돈에 종으로 팔고 미투리 한 켤레 값에 팔아넘김(2,6,7)은 단지 도덕적 타락의 문제만이 아니다. 하느님에게도 크나큰 손실을 입힌다. 왜냐하면 계약을 통해 하느님과 이스라엘백성은 서로 책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 관심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비의 하느님은 가난한 자, 힘없는 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신다.

둘째는 종교제의의식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비판이다. 일반사람에게는 성전과 사제직과 분향이 종교였다. 제단에서 성스런 불길이 타오르고 사제, 향불, 엄숙한 회중, 찬가, 순례자들이 함께 만드는 엄숙함과 경건의 분위기는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과 자발적인 헌신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하다. 당연히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과 제사드리는 것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고대종교생활에서는 믿었졌다. 그러나 아모스와 그 후계자들은 희생제보다 도덕성이 더 근본이라고 주장한다(아모스5,21-27, 호세야6,6, 미가 6,6-8, 예레 6,20; 7,21-23). 예배의 가치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도덕적인 삶에 따라오는 것이고 부도덕이 판을 칠 때는 예배드리는 것이 오히려 혐오스러운 것이라 주장했다. 하느님을 섬기는 근본적인 길은 정의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5,21-24)

성과 속, 신성과 세속의 차이를 구별짓는 것이 경건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일반적인 종교적 사유의 바탕이다. 신들이 요구하는 것은 희생제, 분향, 그리고 신의 힘에 대한 숭배이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러한 생각에 대범한 역설과 도전을 던진다. 순례절, 분향제, 번제물, 곡식제물, 친교제물 등의 종교의 의무는 속임수와 착취가 진행되는, 경제-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에서는 무용하고 오용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하느님께 다가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과 내적인 일체가 되는 것이 우선적이다. 이것이 자비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아모스는 제사가 정의를 대신할 때 그 제사 행위를 경멸하고 비난하였다.

정의는 따라서 어떤 이념이나 규범이상이다. 희랍인에게 정의는 “정당한 몫을 각자에게”주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 정의는 하늘의 신성한 관심이다. 야훼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비의 실천이라는 주장이다. 정의가 하느님께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약자에 대한 자비의 통로이며 인간의 고통받음이 하느님을 욕보이고, 자비가 속성인 하느님의 심정을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는 균등한 정의가 아니라 언제나 고아와 과부들에게 대한 자비로 기울었다. 하느님의 정의는 자비하심과 불쌍히 여기심을 포함하고 있다.

만군의 야훼께서는 그 공평하심으로 인하여 기림을 받으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은 정의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리라 (이사 5,16)

의례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느님은 장엄함으로 기림을 받거나 전능의 힘으로 거룩하심을 드러내실 것이라 믿는 데, 그게 아니라 공평과 정의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은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대한 도전이다. “살고 싶으냐? 나를 찾아 오너라”(5,4)와 “살고 싶으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5,14)은 서로 꿰뚫린 하나의 말씀이다. 가난한 자와 약자에게 자비의 경제학을 생활화하는 것은 자비의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반대로 이들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하느님을 거스리는 셈이 된다.

너희가 나를 거슬려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는지,
나는 죄다 알고 있다.
죄많은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물리치는 자들아!
너무도 세상이 악해져서
뜻있는 사람이 입을 다무는 시대가 되었구나! (5,12-13)

질문:

1. 각기 다른 성서번역을 통해 본문을 읽고 묵상해 보자. 다른 번역이 주는 새로운 통찰이 있는지 찾아 보자.

2. 아모스를 질겁하게 만든 사회적 상황은 오늘에도 날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 정황이다. 몇몇 중요하지도 못한 가난뱅이들이 어느 정도 불의한 일을 당했다 해서 영광의 도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온 민족이 포로가 되어 끌려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보기에 사소한 것에 과대하게 대응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그의 사회적 불의와 종교제의의 오용에 대한 격렬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3. 2의 문제에 관련하여 어느 정도 아모스의 태도가 이유있다(정당성의 여지가 있다)고 동의가 된다면, 아모스는 나의 생활경제와 교회의 경제부문에 있어서 어떤 면들에 대해 불편해 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내용과 이유)

4. 하느님의 마음에 들 만한 경제운영의 원칙들이 있다면 무엇일까? (자기 자신과 교회가 따를 수 있는 경제원칙)



둘째 마당: 꼴찌를 배려하는 자비의 경제성서본문: 마태 20:1-16


마태기자의 공동체는 80년대 안디옥에서 유대계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공존하면서 유대교 전통을 위에 서서 이방인에 대한 개방성을 갖고 있었다. 마태 공동체는 기존의 유대계의 권위주의와 미온적 신앙, 내부의 약자, 작은 자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비판이 강하다. 마태가 그리는 예수 상은 미천한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종교나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크나큰 자애를 보여준다.

본문의 포도원의 일꾼에 대한 비유는 전체적으로 볼 때 18장에서 이어지는 교회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부분에 해당하며, 이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십자가 수난에 대한 세 예고가 교회에 대한 가르침 부분(18:1-20,34)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기독교신앙공동체의 방향을 설정해 주고 있다. 즉 그 내용은 교회는 작은 이, 잃어버린 이들에게 특별히 주목하며, 용서를 실천하는 형제들의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예수께 결합된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에 따라 살아야 하는 지불능력이 없는 빚쟁이와 같다는 것이다.

본문과 연관된 흐름의 맥락을 살펴보면 예수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이후 그분의 정체성이 밝혀지는 베드로의 신앙고백(16,13-20)에서 예수를 따르려는 제자는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16,24)하며, 이는 자기를 죽여서 형제들의 공동체인 교회(에클레시아, 마태만이 복음서에서 이 용어를 사용, 16,18; 18:17)에서 서로 돕고, 작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전적인 용서를 행함으로써 가능한 것임을 18장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섬김의 삶은 제자들의 진정한 의식의 전환과 삶의 태도의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수와 어린이, 부자청년 그리고 마지막에 고용된 일꾼의 비유를 통해 밝히고 있다(19장 20장의 요지)

본문에 앞서 나오는 부자청년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19:16-26)는 영생을 얻는 길에 있어서 종교적 삶보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삶의 실천의 우선성을 다루며 바늘 귀의 비유처럼 ‘작아지지 못한 자’는 구원에 장애가 됨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첫째와 꼴찌’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어지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는 첫째와 꼴찌에 대한 시각전환의 결론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어 마지막 수난에 대한 예고와 더불어 여리고의 두 소경에 대한 치유(‘시각교정의 완성’)후에 예루살렘으로 인자는 입성하게 된다.

포도원은 예언자들이 종종 인용하는 비유(이사야5,1-7, 아모스 9,13-15, 에스겔 15장, 요엘 1,7-12)에 등장한다. 그만큼 유대인들의 삶에 친숙할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일터로서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주요 원천이었다. 본문의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기 위해’ 아침 6시, 9시, 12시 3시 5시에 걸쳐 각각 장에 나가 일꾼을 걷어 들인다. 첫 번째 일꾼들에게는 하루 일 데나리온 (많이도 적지도 않은 하루 품삯)주는 조건으로, 그리고 두 번째 일꾼들에게는 ‘일한 만큼/상당한’(dikaion, 의로운) 품삯을 주기로 하고 보냈으며, 열 두시와 세시의 일꾼들에게도 ‘그와 같이’하였으며, 오후 5시의 일꾼에게는 아무런 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포도원으로 보냈다.

해가 뜨는 시각(오전 6시)부터 해지는 시각(오후 6시)까지의 하루 일에 관해,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일꾼부터 각각 하루 품삯 일 데나리온을 모두에게 주게 되자, 맨 처음에 온 일꾼들은 마지막에 온 일꾼들과 비교하면서 똑같이 받는 것에 불평을 하였다. 주인은 약속한 대로 지불하였고, 나머지 사람들도 그들처럼 주는 것이 자신의 뜻이며, 자신의 것을 남에게 후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반문하게 된다.

이 본문의 비유는 현실의 노동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이 두 차원의 상호관계를 대조시킨다. 실제 생활의 일반고용주라면 나중에 온 품꾼들을 함부로 다루고 일한 시간만큼의 품삯을 주어, 품삯을 깍으려 할 텐데, 포도원 주인의 태도는 다르다. 이야기를 통해 시장에는 필요 이상의 노동력이 남아 돌고 있으며, 심지어는 수확기에도 농촌 노동자의 실업이 흔한 것을 알 수 있다(“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다.” 20,7)

이 비유는 고용주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자비와 계산법은 일반 고용주와 다르며, 그의 자비에는 일반적으로 각박한 삶속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경험들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일꾼들의 일반적인 세속의 경험속에 나오는 기대와 고용주의 다른 행동의 대비를 통해 우리는 현실 세계를 더 잘 통찰하게 되고, 비유가 주는 충격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익숙했던 삶의 세계와 계산법이 얼마나 추한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준다.

하느님의 자비는 불평하는 ‘먼저 온 일꾼’과의 대비속에 드러난다. 먼저 온 일꾼들은 실제로 나중에 온 일꾼보다 더 많이 일 했다. 먼저 온 일꾼들이 품삯의 공정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요구를 나타내는 방법이 그릇된 것이다. 그들은 품삯의 공정성에 대한 요구를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로 만들었다. 즉 그들은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도 품삯 일 데나리온을 주는 데 질투했다(20,15). 이 비유 속에 숨은 교훈은 진정으로 비난받는 것은 어떤 임금체계나 정당한 임금 요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태도에 있다. 하느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시며 작은 자, 약한 자와의 연대를 품고계신다(‘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20,14) 먼저 온 일꾼들은 특권을 요구하며, 그러한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며 무자비하다.

품삯과 그날의 노고는 일치해야 한다는 정의감을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로 삼은 먼저 온 일꾼/품꾼들의 말 뒤에 감춰져 있는 현실은 자명하다. “당신은 그들을 우리들과 같게 하였나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작은 자들’은 사회계급적·경제적 의미에 있어서 하층민이며 그들은 실질적인 자비를 필요로 하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의 결과는 인간간의 연대성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특권’이 아니라 ‘섬김’을 요구한다(20,26-27). 이 포도원 비유에는 하느님 안에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하느님 나라-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평화와 경제 문제와 관련하여 본 포도원 비유에서 얻을 수 있는 관점의 하나는 자비의 경제에 있어서 개인적 차원의 호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비를 경제적 시스템화하는 가(자비의 구조화) 하는 문제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어둔 그늘의 몇몇 양상을 들면, 빈곤국가의 채무의 악화, 다국적 기업의 시장지배, 투기자본의 팽창과 노동시장의 악화와 국제적 이주노동자의 증가, 빈곤·실업·사회 안전망의 해체, 환경파괴의 가속화 등이 눈에 띠는 현실이 되었다. 슈마허는 인간중심의 경제학을 제창하며 다음과 같이 현 경제시스템을 비판한다. “경제학이 국민소득이나 성장률, 자본산출비용, 투입·산출 분석, 노동의 이동성, 자본 축적 따위의 큰 추상 개념을 초월하여 빈곤이나 좌절, 소외, 절망, 사회 질서의 분해, 범죄, 현실도피, 스트레스, 혼잡, 추악함 및 정신의 사멸 따위의 현실 모습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러한 경제학은 버리고 새로이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마태복음서에서 신체와 관련된 여섯 가지 자비의 행위들을 명쾌하게 말했다(25:34-46). “굶주림, 목마름, 나그네 됨, 헐벗음, 병듦, 감옥에 갇힘 -이런 것들이야말로 이런 것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의 경제학에 반하는 상황들이다. 그리고 우리를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것은 그분이 “내가 굶주렸을 때에, 내가 목말랐을 때...”라고 말하는 주의 음성을 우리가 듣는 데 있다.

1. 각기 다른 성서번역을 통해 본문을 읽고 묵상해 보자. 다른 번역이 주는 새로운 통찰이 있는지 찾아 보자.

2. 아침 일찍 온 일꾼과 마지막에 온 일꾼(혹은, 9시, 12시 3시 포함)에 소속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직업군을 나열해 보자. 예수님 당시에는 누구를 지칭하며, 오늘날에 와서는 누구를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3. 먼저 온 일꾼이 기대하고 그들의 태도에서 암시하고 있는 경제시스템과 포도원주인이 품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대안적인 경제 시스템의 차이는 무엇일지 상상해보자.

4. 성서는 관점을 보여주지 구체적인 실천과 그 적용의 몫은 듣고 결단하는 이들에게 맡긴다. 우리 생각에 ‘마지막 일꾼’ 혹은 ‘작은 자’를 배려할 수 있는 경제적 시스템이란 어떤 것들일까? 현존하고 있는 대안 경제 시스템들을 참조로 그 가능성과 의미를 생각해 보자(보충자료 참조)?


셋째 마당: 자비의 경제학의 구체적 행동양식

성서본문: 눅16:19-31


<<본문의 이해>>

한 저자의 작품인 누가-행전이 신약성서 전체 분량의 28%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다른 복음서에 이미 공통적으로 많이 있어서 별 특별한 것이 없다는 선입견과 더불어 누가기자의 민중에 대한 따사로운 관심이 엘리트 신학자들의 삶의 자리(sitzen im leben)와 많은 차이가 있어서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해서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청자들이 자기 존재 전체가 진동할 정도의 위협을 느낄 만큼의 혁명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는 데 특히 편집자로서 그만이 가진 L문서를 놓고 볼 때 그의 독특한 사상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그만이 가진 자료를 살펴보면, 마태가 그 시작을 다윗계보의 정통성부터 나열하는 반면에 누가는 이미 ‘끝장이 난 자’인 늙은이들의 꿈으로부터 시작되어 주변화된 여인의 송가, 빈들의 목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처음부터 심상치 않게 전개된다.

역시 신약성서의 복음의 복음이라 할 수 있는 복 있는 자에 대한 가르침은 마태와 그 어조를 완전히 달리한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가 ‘산위에서’ ‘8복음’을 가르친 것으로 전승을 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평지에서’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린 사람, 지금 우는 사람, 사람의 아들로 인해 박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복의 현존을 말하면서, 마태의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굶주린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등에 대한 언급을 삭제해 버렸다. 누가가 복 있다고 한 사람들은 생의 현실에서 가장 힘듦을 당하는 사람들이며, 어떤 정신적·영적 영역의 언급도 없이 오직 사회·정치적 삶의 현장에서 밑바닥에 있는 자들인 것이다. 더욱이 축복과 더불어 한 짝으로서 “화있을진저”가 함께 동반되어 “부요한 사람,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에 대한 심판을 선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눅 15장의 잃은 양, 잃은 은전, 잃었던 아들(후자 둘은 누가만의 자료)의 비유를 통해 the lost, the last, the least에 대한 예수의 특별한 관심이 보여진다. 또한 마태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의 문구와 달리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로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선포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누가가 전하는 예수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누가만의 자료인 “어리석은 부자”(12:13-21)의 비유, 해고당할 때를 생각해서 부자에게 빚진 자의 빚을 임의로 탕감하는 “불의한 청지기”(16:1-15)의 비유, 그리고 마태와 마가에 함께 있는 “부자청년, 낙타, 바늘귀”(눅18:18-27)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와 소유문제간의 적대성(공존하지 못함)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누가자신만의 자료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72명의 제자를 파송할 때 무소유로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10:4) 다닐 것을 권고한다.

본문에 따르면 부자와 나사로의 처지가 매우 대조적인 상황으로 언급되고 있다. 부자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이었으며, 반대로 나사로 거지는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식탁의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는” 신세였다. 이것이 내세에서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고, 부자는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결과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은 부자는 온갖 복을 다 누렸었고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성격이나 태도에 상관없이 사회적인 처지만으로 운명이 갈리게 된다.

누가는 이 이야기 속에 운명의 갈림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승에서 서로 문간을 놓고 같이 살았던 부자와 나사로의 가까운 거리는 내세에 있어서 아무도 부자의 처지를 도울 수 없는 거리간격으로 벌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형제들에 대한 경고의 요청은 이미 알고 있는 모세와 예언자의 말로 충분하다는 대답으로 무시되어진다. 이는 이미 예수가 앞의 13절(“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에 대한 구체적 비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상황에서 확대해석하면 하느님의 자비중심의 경제시스템과 재물이 포함하는 이익과 탐욕중심의 경제(‘비인간화된 자본주의’)는 함께 섬길 수 없으며, 기독자로서 택일이라는 결단을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이야기의 교훈은 부자에게는 나사로가 ‘남’처럼 보였다는 데 그 문제점이 있다. 여리고에서 강도만난 사람에 대한 비유에서 예수는 ‘남’사이였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불행과 고통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준 사람’(10:36)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타자가 ‘이웃’으로 얼마큼 철저히 보이는가의 문제가 본문의 이야기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윤리적 관점으로서 ‘남의 이웃화 (befriending of Others)'의 문제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더 궁극적인 문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예수의 관점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존재론적(ontological)인 근거의 문제이다. 누가는 하느님이 어디계신가에 대해 명확한 제시를 하였다. 곧 “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보는 표”(2:12)라는 것이다. 바닥(the bottom)에 계신 하느님! 바닥의 민중이 하느님의 관심과 뜻을 담고 있다는 이 깨달음.

예언자와 예수의 메시지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경제학-본인은 ‘자비의 경제학’이라 부름-은 타자를 이웃/벗으로 고려하는 경제학이며 이는 단순히 윤리적 동기에서 나오는 요청이 아니라 신의 의지와 마음속으로 일치해 들어가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속에서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눅12:21)고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하느님은 타자화된 ‘남’속에 자신을 숨기시고 거기서 현현하신다는 누가의 번뜩이는 신앙관이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의 경제학은 단지 종교적 의례인 단지 제의식사를 넘어 일상의 삶에서 ‘함께 나누어 먹음(平和)’에서 구현되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일상속에서의 함께 나누어 먹음이 신을 알게 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바로 엠마오의 길에서 제자들이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뗄 때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는 누가만의 메시지 속에 잘 나타나있다: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보았는 데...”(눅24:30-32).

성서가 제시하는 경제질서는 부의 경제학(자기확대와 ‘타자보다 더 많이’의 경제)이 아닌 자비의 경제학(가난한 이의 필요에 기초한 경제)이다.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양식이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경쟁시장에서 재화의 공급과 수요의 거래로 단순화할 수 있다면, 시장체제의 효율성만 강조하는 현재의 경제적 흐름은 ‘사회적 약자’와 ‘작은 자’를 타자화/주변화시켜 도덕적 자본을 고갈시킨다. 즉 끝없는 소비욕구를 부채질하여 인간심성의 물질화를 통해 양심, 정의, 봉사, 희생, 자유의 가치를 해체시킨다. 거래 주체간의 가격과 질만이 문제되면서 인간간의 사랑, 감사, 연민, 연대감과 같은 비공식 경제활동을 사소화시키는 야만의 경제학으로 변질되게 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경제는 탐욕과 과식의 경제학이 아니다. 작은 자, 약자와의 연대능력을 강화시키고, 약자의 자립과 존엄성을 긍정하고, 사회적 공공선과 도덕적 자본을 진일보시키며, 지속가능한 대안 경제를 생활화하고 구조화(시스템화)하는 과제를 풀어주는 경제인 것이다.


<<질 문>>

1. 본문은 다른 번역본으로 읽고 묵상하자.

2. 부자가 왜 거지 나사로의 처지에 대해 아무런 동정이나 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부자도 정상적인 사람의 판단을 갖고 있었다면, 왜 부자에게는 그것이 괜찮았을까? 동정심을 없게 만드는 사상, 윤리의식, 세계관은 무엇일까?

3. 부자된 인간, 부자된 교회가 무엇이 잘못인가? 잘못이라면 어느 정도의 부자된(가난한) 인간, 부자된(가난한) 교회가 적당한가?

4. 교회가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비의 경제학, 샬롬의 경제학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무엇이 있는가? 자신의 교회에서 우선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 한 두 가지만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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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6 18:42 2006/02/1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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