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텍스트 묵상 -창1장 ~2장 4절 있는 것을 보고 좋으셨다 :: 2008/03/26 12:57
있는 것을 보고 좋으셨다.
창1장:1절-2장 4절
한 처음에...
한 처음에 사건이 있었다. 카오스(무질서)/혼돈/어둠이 ‘있으라’는 사건을 통해 코스모스(질서)/샬롬/밝음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처음을 열었다. 그리고 성서기자는 시작의 본질은 그러하다고 증언하였다. 샬롬의 질서화가 시작이었고 그것이 창조의 원뜻이었다. 그리고 이 샬롬의 질서화는 각 존재가 출현하고 자신의 삶의 공간을 하나씩 잡아가면서 형성되었다. 창조자께서 한 처음에 한 번에 본인의 뜻을 이룰 법도 한 데 6일씩이나 시간이 걸려서 각 존재는 질서에 따라 자신의 삶의 공간과 시간을 얻었고, 그렇게 창조주 하나님도 시간을 들여 정성을 들여서 이 한 처음을 시작한 것이다.
있으라...
그렇게 각 존재는 태어났다.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고 성서는 증언한다. 창조자가 각 존사물을 존재케 한 것은 단순히 창조작업을 통해 출현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각 사물의 의지가 그에게 호소하여 나타난 것도 아니다. “있으라”는 것은 단순한 권유가 아니다. 그것은 명령이다. 각 사물의 존재의 중심에는 창조자의 궁극적 의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의지가 창조 사건을 만들어 냈고, 각 존재는 한 처음을 여는 가라사대 사건의 응답이었다.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응답으로서 출현한 피조 세계는 자신의 있음을 통해서 그분의 ‘있으라’를 계시하며 이를 통해 있으라 하신 분의 여운을 전달한다.
봄 날 이른 아침 한송이 꽃봉오리의 열림은 이런 ‘있으라’의 음성을 메아리로 가슴속에 전달한다. 힘들게 등산길을 올라가다 정상에 잠시 쉴 때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의해 일어나는 몸의 공명-아 이토록 부드럽고 시원함이여!-은 보이지 않는 있음의 충격을 맛보게 한다. 들판에서 훝어내리는 빗줄기와 코끝을 아리게 하는 흙냄새도 ‘살아있음’의 전령을 알게 한다. 아, 살아있다는 것, 무상으로 왜라는 의문없이 그저 여기 존재한다는 희열 그리고 그 속에서 문득 ‘있으라’의 보이지 않는 단호한 궁극의 음성을 확인한다. Beings 속에서 우리는 'to be'의 메시지에 충격을 맛볼 때 거기서 Isness이신 궁극자의 손짓을 어렴풋이 그러나 확연한 가슴 떨림으로 만나게 된다.
보시기에 좋았다...
한 개개의 존재들이 거기 ‘있음’은 단순히 존재에로의 명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존재의 거기 있음에 의해 그리고 그로 인해 신도 심미적 충격과 공명을 받는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감탄과 울림이 일어난다. 신의 마음이 움직인다. 거기 있는 존재는 그렇게 그냥 거기 있음으로만 있지 않는다. 그것의 거기 있음은 신성한 분의 마음을 움직이고 공명을 일으킬 만큼 신성의 본질을 그 중심에서 갖고 있기에 ‘보시기에 좋았다’는 또 다른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있으라’가 외연적(원심적) 창조사건이라면 ‘보시기에 좋았다’는 내연적(구심적) 창조 사건이다. 그 분으로부터 나온 것과 그 분에게 돌아가는 것이 'to be' (beings가 아님)를 통해 엮여져 상통한다. 따라서 ‘있으라’의 존재형성과 ‘보시기에 좋았다’는 존재력은 창조사건의 본질이요, 궁극자의 본질과 관계된 것이며, 혼돈(무질서)와 어둠이 극복되는 근본원리이기도 하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신의 심미적 감동은 각 사물의 존재적 가치의 ‘있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각 존재의 주체성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각 존재의 나름의 ‘그러함 suchness’과 차이가 그러한 거룩성을 움직이는 심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의 ‘있으라’하신 명령의 존재화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to be'의 존재력이 ’진실함 the real’을 구성하는 것이다. 실재(the reality)는 이런 the real을 통해 존재의 구조를 가지며 실재적인 것은 그 실재성(the being real)을 있음으로 갖기에 좋았다는 확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매우 좋았다...
창조의 엿샛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것을 통해 인간의 창조에 대한 ‘심히(very)’가 아니다.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한 ‘심히 좋음’이다. 그 좋음의 깊이와 넓이는 바로 생명체의 다양성, 각 존재의 있음이 주는 스스로의 자율적 주체됨과 다름, 그리고 그 다양성과 주체간에 형성되는 상호교제가 그 ‘심히’를 이룬다. 그렇게 다양성, 교제, 주체를 보고 심히 좋다는 기쁨과 축하하심이 발생된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창조의 개별 사물과 존재들만이 실재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창조의 의미는 단순히 자기 공간을 가진 것만으로 그리고 존재력을 지닌 것만으로도 아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사건의 구성은 단순히 각 개별 존재들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그 창조사건 사건마다 이루어지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기쁨과 축하, 그리고 각 존재를 다 불러내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서 다시 강하게 확인하신 기쁨과 축하도 창조사건의 한 측면이라는 의미심장한 선언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 혹은 실재(the real)의 구성요소는 이렇게 각 존재의 그 존재함(다양성, 주체, 교제)과 더불어 이루어 지는 기쁨/축하함의 자기 응답이 함께 있을 때에 이루어진다. 각 사물의 응답 -있게 됨-과 더불어 신의 응답-좋았다, 심히 좋았다-은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루며 실재를 구성한다.
안식하시다...
창조의 사건은 엿샛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7일에 끝난다. 여기에 창조의 정점이 있다. 그리고 모든 창조의 시작은 이를 위해 궁극적으로 목표되어져 있다. 일부러 힘들게 창조자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한 번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을 지속적으로 사건의 말씀을 내신 것은 그 목적을 분명히 하려 함이다. 그것은 바로 심히 좋음을 유지하고 그 여운을 품어안는 안식하심에 있다. 이 휴식을 통해 신과 모든 실재들은 안식/평화속으로 들어간다. 먼저 신의 선제적 의지(initiative will)가 있었고, 그에 의해 사물의 있음이 현실화되었고, 각각의 존재의 주체됨과 다양성 그리고 그들의 한 전체 안에서의 교제됨이 좋음과 심히 좋음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좋음과 심히 좋음의 점증됨/고조된 심미적 기쁨은 안식을 안식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안식은 신적 의도-존재의 있음-기쁨의 확인이 제대로 연결되고 각각의 것이 그대로 참이고 그대로 온전히 됨으로써 가능해 진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안식이 창조의 면류관이 된다는 것은 바로 신과 모든 실재가 비로소 심히 좋은 상태를 서로 맛보는 신비의 깊이와 일치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신이 쉼으로 그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제대로 볼 수가 있다. 주목하라. 여섯째 날 마지막으로 하신 것은 인간을 만드심이 아니라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심이고 그로 인해 심히 좋았다는 탄성이었다는 것을! 안식은 이 심히 좋음을 깊이 만끽하게 한다. 그 신의 쉼으로 인해 모든 만물도 자신의 풍성함과 생생함이 더욱 여실히 드러나 진다. 그 있음의 깊음이여! 그 총체적인 있음의 교향곡으로 각자는 서로를 음미하며 상대의 진실성(the real)이 더욱 충만하게 된다. 이 안식으로 -더 이상 일없음- 인해 각 존재는 더 이상 할 일없음의 온전성을 취득하고 그러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성이 확보된다. 신은 안식을 통해 각 존재의 보증을 확인한다. 기쁨이 어우러진 평화로서의 안식이 창조가 실현하고자 한 목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