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평화운동 "푸름"의 창립식에 부쳐 :: 2006/07/04 19:49

 

(2006. 6.29)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시민사회계에는 평화와 생명이라는 담론이 강하게 회자되고 있다. 통일이란 단어 이외에 평화와 관련된 NGO 단체만도 수백 개가 새로 생겨날 정도로 자생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자발적 조직체로서 이러한 생명과 평화를 위한 단체들의 급부상은 한편으로는 정보교류에 따른 시민의식의 성숙이 초래한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이 그만큼 급박하게 어려워져가고 있다는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역류로서, 금융자본, 빈곤, 환경재앙, 질병, 이주노동의 세계화라는 물결은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로서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일반적인 무력감과 생존을 위한 힘겨움이 팽배하고 있고, 한국사회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간격이 49.5배라는 심각한 분열증상을 안으면서 사회적 기반의 붕괴와 인간안보의 해체라는 거대한 파도를 민초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어느 시대든 살기 쉬운 때가 없지 않았냐는 자조도 있을 테지만, 우리가 맞이하는 힘듦의 위기 경험은 그 속도와 규모에 있어서 선조들이 경험한 것과는 그 축을 달리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구상의 동물 종이 1890년대까지는 1년에 1종이 멸종했다고 치면 요즘은 시간당 1종이 소리 없이 영원히 우리의 눈에서 작별인사 없이 사라지고 있다. 악 개발과 화석에너지의 문제는 이제 환경재앙으로 다가와 이상기후증상은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빨리 적응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어져 있고, 이념과 계층 간의 갈등과 폭력의 문화는 만연한 사회적 현상이다. 통일에 대한 욕구는 있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는 북이 낯선 타자로만 존재하며, 잊혀진 영역이다. 대안적 담론으로서 평화란 화두가 등장한지도 수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 흐름이 자리매김을 하기엔 겨우 시작의 단계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런 사회적·지구적 위기상황 속에서 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하던 일련의 형제자매들이 미래세대를 위한 평화교육을 운동적 차원에서 승화 발전시키고자 푸름이란 이름하에 모여 활동한지 2년이 지난 오늘, 개소식을 통해 세상에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자신들의 출발을 여러 벗들, 선배 후배들 앞에 선언하게 됨은 매우 역설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평화가 자기 실존의 의미근거로 살겠다는 비장한 자기 각오로서 출발을 선언한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삶의 불안정성 앞에 생존을 위한 무거운 싸움이 뒤따르게 된다는 자발적인 진흙 속으로 들어감에 대한 위험한 생에 대한 투신에 대한 자기 확인인 것이다. 이렇게 개소식을 통해 평화활동가로서 자기 결단을 여러 사람들 앞에 집단적으로 확인하는 이 자리가 환영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지만, 최소한 새로운 출발을 공언하는 자리에 대한 격려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간디는 단지 겨우 수만에 해당하는 영국군이 어떻게 수억의 인도인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갖고 살았다. 이는 오늘날에도 어떻게 소수의 지배계층의 향락과  대다수 선한 사람들이 눈물과 고통이 공존하는지에 대한 미스터리를 우린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다.  이 미스터리가 해결되는 길은 우리의 의식이 변화되고, 거짓실재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저항 없이는 해결할 길이 없다. 과연 그런 변화가 가능한 것인가? 어디서 희망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가?


철옹성의 백인지배 문화의 미국에서 흑인인권운동이 불붙은 것은 아주 작은 자의 사소한 그러나 결코 그 무게가 가볍지 않은 작은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몽고메리 카운티에서 한 한 가정부가 버스에서 지쳐서 백인자리에 앉음으로, 그리고 스탠드 바 식당에서 흑인 대학생 서너 명이 백인자리에서 물러가지 않음으로 발생하였다.


평화운동은 이렇게 작은 자들이 저항함을 통해 변혁담론을 만들어 냄으로서 불이 붙게 된다. ‘아닌 것’에 대한 성찰과 저항으로서의 자기 투신이, 의식(counsciousness)과 생활양식(lifestyle)에서 투영되어 나올 때 변혁의 움직임은 일어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평화운동을 온 맘, 정성 , 뜻을 기울인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하였다. 전자는 영혼 만들기 수행(soul-making practice)이요 후자는 이웃의 타자를 자기 몸으로 만드는 수행(embodiment practice)인 것이다. 신이란 진리로 자기 영혼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타자를 자기 몸으로 만듦으로 의식과 실존양식이 통전적으로 결합함으로 평화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을 푸름에 적용한다면, 평화단체로서 「푸름」이 한 기관으로서는 폭력과 평화에 대한 투명한 자기 의식성을 갖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운동체로서 「푸름」은 생활양식으로서 개인과 사회변화라는 운동성을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고 평화활동가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근본자세이다. 퀘이커교도들은 영혼안에 있는 신성한 빛이라는 자기-의식과 더불어, 몸으로 진리를 표현해 내는 사회적 증언이라는 생활양식을 결합함으로써 평화교도로서의 삶을 확고하게 붙잡고 산다.  진리는 단순히 추상이나 이해가 아니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참살이로서 견고히 지켜나가야 할 삶의 방식 (the way of life)이다. 그래서 쿼이커교도에게는 신앙이란 신적 빛의 내적 경험(experience)과 공개적으로 자기 삶을 그 빛에 의해 걸어감(walking in the Light publicly)을 의미하는 것이다.


푸름이 이제 등불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 등불에서 다른 심지로 불을 점화함으로써 불타는 영혼들이 무리로 일어서지기를 이 개소식을 통해 기대한다. 성현이 말하기를 “평화로 향하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고 한 것이 참이라면, 평화 없이 참 인간될 길은 없다. 평화는 우리 실존의 근거이며, 평화운동은 인간화의 길이며, 참살이를 실현하는 수단과 목표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한 맘을 품고, 동지를 얻으면, 어느 덧 자신이 달라져있고, 세상도 살맛이 나게 됨을 우리가 함께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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