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써클 Circle of Trust 모임을 제안하며 :: 2009/04/07 16:04
'신뢰의 써클 Circle of Trust' 의 모임을 제안하며
박성용
-지난 번 우리 모임의 성격과 방향에 대한 것에 대해 잠정적으로 1달에 1회 만나는 것으로 대략적인 이야기가 정리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거주지 이전과 생활패턴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또 하나의 내적인 이유는 졸업생 학부모라는 특성이 지닌 에너지의 감소가 있기도 합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신뢰의 써클 circle of trust'이라고 부르는 성장 공동체 모형에대한 실습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랜 기간 (많게는 5년 짧게는 1년)을 정규적으로 ‘얼굴을 대면하는 face to face' 모임을 가져왔습니다. 한때는 새로운 가능성(다른 곳에서 생태 공동체 혹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의 교육공동체. 어떤 사업)의 실현에 대한 기대나, 가치있는 삶(생태, 대안적 삶 등)에 대한 비전의 공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러 정보의 나눔, 학습, 혹은 아이들이 다니던 원주 현장에 대한 연결의 시도도 있었습니다.
지난 1년간은 비폭력 대화라는 실질적인 자기 문제의 해결과 삶의 인식에서의 다른 패러다임에 대한 충격들을 경험하기도 했고, 느낌과 욕구에 근거한 삶의 이해로부터 오는 새로운 지평에 대한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했습니다.
저는 여기까지 우리가 오면서 누구를 알고 그 무슨 주제들에 대한 정보의 축적보다 어째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배경과 삶의 환경을 가진 우리가 성격도 취미도 관심사도 그리고 직업도 다양한 우리들이 가까이 서로 바라보면서 모임을 지키려고 해 왔는가에 대한 질문을, 이 전환점에 서서, 혹은 위기의 시기에 서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언가에 취해 매주 1주일에 하루 몇 시간을 바치게 된 이유에 대해 좀더 명료한 그 무엇이 다가옴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흥미, 취미, 관계, 가치, 대안적 삶, 공동체, 아이문제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것들은 우리 내면의 깊숙이에 있는 ‘진실한 삶’에 대한 갈망의 외피였었다는 것이지요.
그 목마름은 처음엔 그 사람이 가진 매력적인 성격과 태도에 대한 반함-“이우학부모에 이런 분이 있었구나에 대한 찬탄”-으로부터 서로를 알고 교제하고 싶다는 아주 소박하면서도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시작되었습니다.
재미있고 놀라운 것은 서로가 40년이 넘으면서 성취한 것 -사회적 지위와 명예, 전문성-이 그다지 다른 사람을 좌지우지 하는 힘으로 발휘하지 않는 분위기를 가져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견해에서 다양한 차이의 시각들이 때로는 갈등과 긴장의 요소가 되기도 했지만 신뢰의 분위기라는 컨테이너가 용케 그것을 용해하기도 했지요. 그리고서 사회적인 충격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쳐서 몇 분들은 생계문제에 대한 휘청거림과 그로 인한 떠남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깨닫는 것은 40이 넘으면서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파편화되어있고, 연약한 기반위에서 ‘아무런 일 없는 것처럼’ 사회적 지위나 역할속에 숨어서 분열이 되어 있는가 하는 가에 대한 충격입니다. 우리의 대화가 사회적으로 일어나는 사건, 타자의 이야기 (주로 아이의 문제) 혹은 미래에 같이 한 번 해볼 수 있는 기대에 대한 논의들이 실제로 자신의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에 대한 충실한 표현인가에 대한 회의입니다.
비폭력 대화라는 수단을 통해 우리가 경험한 것은 바로 내가 진정으로 지금 느끼고 있고 바라고 있는 것에 근거한 삶의 통전성과 진실의 경험의 문제였습니다. 이는 갈등이 단순히 의사소통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으로 습득된 습성화된 관습적 자동응답이 아닌 ‘주목하기 noticing'가 새로 열어 보이는 드러냄, 연결됨, 알아차림, 줌이 주는 자기초월감각, 선물로서의 타자, 그리고 불확실성이 주는 신비에로의 여정, 대결 confrontation에서 만남 encounter로의 변형, 선물gift 로서의 순간 등에 대한 새로운 삶의 통찰이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파편화되어 있고 연약한 기반에 서있으면서도 속으로는 허물어져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채로 아이이야기, 놀이, 취미에 대해 ‘그것’과 ‘너’에 중심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 나를 지루하게 하고 모임을 지루하게 하였던 것은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외교적으로 ‘난 괜찮아’라고 자기보호의 본능에 입각해서 상대방 앞에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미 오랜 시간을 통해 상대의 장점에 대해 ‘단물’은 다 빨아 먹은 -그것이 동료든 내 옆에 자는 아내이든- 상태에서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똑같은 패턴의 것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혹 누구는 굿바이를 준비할 수도 있고 자기 껍질속으로 다시 들어가 과거 이우학부모시절의 한 때의 좀 다른 특이한 경험에 대해 지난 과거로 감사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적적해지고 아쉬울 때 졸업생 학부모 모임을 오랜 시간후에 한 번 있게 되면 반가운 마음으로 참석해서 ‘과거의 순간’을 재현하고 또 다른 형태의 ‘너’와 ‘그것’에 대한 대화를 하고서 굿바이를 반복할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우리 학이시습 모임이 무언가 프로그램에 대한 성취에 전렴하거나 -그것이 공동체의 꿈이든, 학습에 대한 열정이든, 대안적 사업에 대한 기획이든- 혹은 오랜 시간의 만남만큼 누구보더 더욱 가까운 친밀성의 표준으로 모임의 목표로 가지고 갈 순 없다는 사실을 요즈음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5년간의 초기 멤버로서의 나의 경험은 아무리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홀로의 경험’은 실존적으로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며 이것은 각 개인의 독특성을 규정하는 자유의 근거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의 제안은 그 어떤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든 이 ‘홀로의 경험’을 인정하되 ‘가슴속의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를 열어 심층의 샘에 의한 보이지 않는 힘에 신뢰하며 여정을 떠나는 연습에 대한 것입니다. 신뢰의 써클에 대한 모임성격의 제안을 하려고 하다가 글이 길어졌습니다만 상대를 가르치고 교정해주려는 시도없이 서로의 홀로됨을 ‘보호하고 접하고 인사하는’ 법(파커 파머의 용어)을 배우는 모임을 갖자는 것이지요.
홀로됨을 ‘보호하고 접하고 인사하는’ 모임이란 침범하지도 도피하지도 않으며, ‘겉’의 담화보다는 내면으로 떠나는 ‘가슴으로 말하기’에 근거한 모임 형태를 말합니다. 의견과 아는 것이라는 ‘조언해주기’에서 이해와 신뢰의 영역이라는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기’에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우린 여기에서 시사성에 관한 것을 넘어서서 좀더 자유롭게 자신의 고통과 좌절 그리고 어둠을 이야기하는 깊이에로의 여정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좀 더 정중한 태도가, 모임에서 동의하에 서로를 윤택하게 하는 규칙들(전심으로 경청하기, 상대의 말에 개입하거나 조언하지 않기, 가르치려고 하지 않기, 유머를 사용하기 등등)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제가 기독교인이어서 사순절 묵상을 하고 있었는 데 최근에 다가오는 말이 바로 ‘잃어버린 사람이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얻기 위함’이란 구절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자’ the lost에게 ‘생명’(진실한 삶)이 허락되고 삶의 ‘풍성함’이 만끽된다는 이 이해가 오랫동안 가슴을 맴돌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언어로서가 아니라 삶의 본래적인 의미에서 ‘잃어버린 자’로서의 자각과 치유된 생명으로서 우리가 만나서 상대의 낯설음과 차이가 오히려 ‘충만함’의 선물로 다가올 수 있는 모임이 된다면 이야말로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만일 저의 제안에 동의를 할 수 있다면 저는 먼저 파커 팔머의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이란 책을 천천히 그리고 주의깊게 우리가 두세 번 읽고 몇 개월간 그것에 근거한 실습을 제안합니다. 제가 재작년에 읽고 다시 읽고 있는 데 위에서 이야기한 ‘신뢰의 써클’에 대한 성장모임에 대한 실제적인 가이드가 자세히 있습니다. 원한다면 몇 권을 주문해서 이번 모임에 나눠갖는 것은 어떨까요?
주변은 황폐함에서 어느 새 다시 생명의 싹이 돋고 여린 꽃들이 미소를 품어내고 있습니다. 얼마못가면 속절없이 지고 말 여린 존재들이 지금 순간속에서 맑고 환하게 그냥 거기 있습니다. 남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자기 홀로의 내면에서 나온 것들이 그렇게 열려진 것이겠지요.
50이 넘어서 내가 황폐해진 존재라는 것, 잃어버린 자였고 그것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뭔가 헛껍데기에 씌워 살아왔다는 아픔이 아리게 번져갑니다. 그래서 T.S.엘리웃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황폐함, 그 주검의 무리들속에서 싹을 티워내는 그 아픔이 산하에 펼쳐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생명’과 ‘충만함’에 대한 예감이, 성취는 아니지만 다가오는 실재로서의 선물이 보인다면 그 얼마나 황홀한 감동이겠습니까.
이번 일요일에 또 다른 선물로 만날 수 있기를 ....
2009.4.6. (이우대안학교 학부모동아리 학이시습에 올린 글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