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그린 텍스트 읽기 -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 2008/04/13 23:20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본문: 레위기 25장 1-13
창세기의 창조사건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 인간을 만드신 6일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7일에 마치셨다고 하셨다. 이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존재물들의 창조만이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라 사실상 제 7일의 ‘안식하심’자체도 그분의 관심인 것이요, 실상 안식이 창조를 완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동을 위해 안식이 휴식의 중간 정지의 임시 역이 아니라 실상은 종착역이고 기쁨을 회복하는 안식이 그분이 행하신 일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있으라”하신 가라사대 사건을 통해 존재물들의 ‘있음’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보기에 좋았다’는 선함(Goodness)은 서로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각 존재는 단순히 있음으로서가 아니라 그 본래의 가치(inherent value)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제 7일을 단순히 축복만이 아니라 안식일인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2:2)라는 성서의 주장은 안식이 거룩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는 존재화->축복됨(blessing)/선함(goodness)->성사화(sacramentalization)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존재물들의 신의 거룩성안에서의 포용이라는 (존재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속에 존재가 포함되는) 안식의 궁극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은 다음을 위한 휴식의 일시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최고의 질(선함을 넘어 거룩함을 부여받기)을 경험하는 궁극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창조사건이 안식의 존재론적 의미를 드러내주는 터전/기초를 제시한다면 안식년/희년의 주제는 창조사건에서 드러난 안식의 존재론적 의미를 사회윤리화하는 데로 이어지고 있다. 안식의 동일한 주제가 이제는 삶에로 적용되는 것이다. 안식을 통해 시간이 거룩함을 덧입고, 축복과 조화, 고요함, 일없는 존재함의 순수성과 희열을 통해 영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과 피조물을 신의 현존의 궁극 경험(peak experience)을 하게 된다. 신도 자신이 최고의 충만함을 안식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the land itself must observe a sabbath to the Lord)”는 말은 단순히 만물의 최고 영장과 우월적 특권의식을 갖는 인간이 열등한 다른 동식물을 돌보는 윤리적 자비행위나 의무감의 실행에 대한 명령이 아니다. 이미 창조사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안식이 존재를 완성하게 하고 창조의 궁극목적이기 때문에 신의 샬롬의 질서화에 대한 그분의 의지의 수행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자, 인간의 자기 행위에 대한 절제와 제한성을 요구하는 신의 명령인 것이다.
창조사건과 출애굽 사건은 자유의 질서화와 안식의 공유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거룩함은 어느 공간의 개별 사물이나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라 안식 그 자체에 부여된 것이다(“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안식의 맛봄이라는 시간(일곱째 날)이 거룩함을 구축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맛보는 거룩함과 신의 거룩함은 서로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 땅이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는 것은 그러므로 안식을 주지 못하는 인간의 모든 노동행위에 대한 신의 분명한 반대와 경종을 뜻한다. 생존(existence), 축복(blesing), 선함(goodness), 안식(sabbath) 그리고 거룩함(sacredness)라는 창조사건의 일련의 흐름은 모든 피조물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모든 생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에 따라 6일/6년간은 열심을 다해야 하지만 일곱째 날/일곱째 해는 안식을 통해 존재의 최고의 질적 경험-고요, 평화, 축복, 조화-을 통해 궁극 완성의 가쁨을 맛보아야 한다. 이것이 보시기에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보시기에 좋은’ 것의 윤리적 실천이기도 하다.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25:6)는 말씀은 권력을 지닌 인간의 자기 관심과 자기이익의 남용을 억제시킨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안식하도록 부른다. 사회전체, 자연전체가 안식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단순히 주일성수, 안식일 준수를 고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안식을 땅에 세우고 낙원을 맛보는 것이 필요하다. 안식일은 이러한 지복적인 낙원을 암시하는 은유이며,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확증한다. 땅에서 이윤을 짜내려는 우리의 노력은 땅에게 안식을 주어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균형을 가져야 한다. 이는 화해의 사역인 것이며 힘의 지배가 아닌 돌봄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안식년의 소출이 단순히 사회적 약자인 종, 품군 그리고 식객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안식년의 혜택은 생태적 약자들인 “땅에 있는 들짐승”(25:7)에게까지 미친다. 이는 창조사건의 제 7일의 안식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결과이다. 묵히고 먹이게 하라는 안식년의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에 대한 돌봄의 포괄적인 관심은 단순히 윤리성을 넘어서서 신의 초월성을 지칭하는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속에 뿌리박혀 있다. 소유대신 존재가, 움켜쥠 아닌 내어줌이, 독점과 지배가 아닌 분배와 돌봄이, 정복이 아닌 조화의 초월적 감각을 통해 이러한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향한 주목하기가 나타나게 된다.
땅이 여호와앞에 안식하게 하라는 것은 인간의 의무가 아닌 인간의 자기 승화의 문제요 자기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삶을 삶 되게 하며 모두를 본래의 창조사건이 경험하였던 ‘보기에 좋았다’와 ‘칠일을 거룩하게’하신 궁극의 삶의 목표를 실현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여호와의 신성하심의 속성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서는 단지 존재의 자기 공간확보로서 생태보존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회적·생태적 약자의 충만함, 고요, 평화, 조화라는 안식의 궁극상태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것이 거룩함을 구성한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2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