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대화 실천가의 자기 경험(I) :: 2008/09/18 10:00
비폭력 대화 실천가의 자기 경험
우리의 삶의 현장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가 가치판단과 생활태도를 익히고 배우는 일종의 효과적인 “폭력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스포츠 경기, 정치·외교적 상황, 사업관계, 교육 시스템, 사법제도, 심지어는 개인관계에도 ‘승/패’ ‘시/비’의 사고방식에 의한 ‘강제언어’의 홍수 속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이 강제언어는 비난, 충고, 판단, 진단, 평가 등을 통해 작동되고 개인이나 그룹에 대해 낙인을 찍고 이는 정도야 다르지만 상처를 남기며, 마음속에는 두려움, 수치, 의무, 죄책감 혹은 복종을 남긴다. 이렇게 “power-over"의 관계 언어로 프로그램화된 나의 의식과 생활습관이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된 상태에서는 선택의 동기, 행동의 방향성, 소통의 과정, 인간관계의 형태에 있어 굳어진 패턴을 형성하게 된다.
느낌과 욕구에 기초한 공감언어를 배우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실재의 세계가 열리는 경험을 했다는 고백은 나만 아니라 수많은 비폭력대화 실천가들의 공통된 경험이기도 하다. 나의 경우에는 소통방식에 있어서 무엇이 막힌 부분이었는지 과거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이 이제 이해되었다는 것에 끝나지 않고 생을 이해하는 근본 패러다임(인식틀)의 변화에 중요한 공헌을 비폭력 대화의 철학과 가치관이 주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강력한 욕구이다”라든지 “삶의 실재는 자비와 풍성함에 기초하고 있다”라는 비폭력 대화의 근본적인 인식론은 매우 다양한 결과를 초래한다. 나의 정체성, 가치체계, 타자를 보는 관점과 관계방식, 삶에서 성취해야 할 목표와 관심사, 힘에 대한 이해, 살려는 에너지에 대한 출처와 획득 방식, 바람직한 사회체계, 생태계에 있어서 동식물에 대한 태도와 위치 등에 대해 전과는 매우 다른 관점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50가까이에서 이처럼 나 자신을 보는 눈과 세상을 보는 눈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나 자신에게도 기대하지 못한 것이었다.
‘평가’없는 관찰, ‘생각’과 구분된 느낌, ‘전략’이 아닌 욕구(needs), ‘요구(demand)'아닌 요청이라는 비폭력 대화의 4요소는 매우 간단하고 이해하기도 쉽지만 그 속의 세계로 들어가면 방대한 실재가 열리게 되어 당황하게 되고 얼마나 깊숙이 내 생각, 언어, 행동이 폭력의 올무에 갇혀 있었는지 놀라게 된다. 아니 절망하게 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 절망감은 일종의 거짓의 실재, 허망한 가상적 욕망의 구축물에 발을 디딛고 있었다는 통찰로부터 오는 지난 모든 노력의 헛수고에 대한 일종의 자각일 수도 있다. 혹은 그동안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나 자신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삶을 소외시키는 생각, 언어, 행동‘의 패턴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오는 충격일 수도 있다.
비폭력 대화를 실습하면서 지금까지 얻은 몇 가지 통찰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안전(security)에 대한 이해의 변화이다. 우리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성채(castle)를 쌓는다. ‘너’의 타자성이 나를 침범할 수 없게 하는 자기 방어의 확고함이다. 이는 물질적인 소유, 명성과 영향력이라는 비물질적인 공고함, 혹은 노력과 태도 혹은 성격에 있어서 강함이든 너/그들과 격리된 나/우리의 정신적, 사회적 혹은 물질적 자기방어의 성채를 통해 안전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에 의해 결국은 너/그들은 낯선 존재로 변화되고 궁극적으로는 ‘적’으로 이미지화되며, ‘나/우리’는 경직되고 굳어버린 에고의 피해자가 된다. 비폭력 대화에 있어서 안전의 문제는 자기 방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통능력, 관계를 통해 얻어진다. 타자는 경쟁자가 아니라 춤에서의 경우처럼 또 다른 삶의 춤, 에너지의 공급자이다. 연결되기가 두려움과 무력감이라는 엔트로피를 변환시킨다. 흥미있는 것은 이 연결하기는 고통, 상실감, 패배, 절망을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나, 우리의 안전은 강력한 자기 방어 체제가 아니라 부드러움, 약함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나의 정당성과 옳음을 확인하고 그리고 상대의 잘못과 실수를 지적하는 도덕적 우위라는 ‘비난, 비판, 충고, 평가’의 행위가 아니라,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한 느낌과 욕구의 드러냄은 약한 것을 통해서 상대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차원으로 인도한다. 이는 서로 안에 있는 인간성과 주고자하는 자연스런 욕구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마음에 무장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약할수록 상대는 삼가고 주목한다.
둘째는, 욕구의 신성한 에너지에 대한 충격이다. 느낌을 드러내는 원인으로서 욕구들-주거, 돌봄, 휴식, 사귐, 평화, 재미, 창조...-은 그 자체로 보편적이고 아름답다. 이 잠재적 휴면기속에 있던 이 욕구들이 갈등의 상황에서 비폭력대화로 주목되어지고 내면에서 자기공감이나 공감추측으로 현실화(actualization)되어질 때 그것은 긍정적 에너지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긍정적 에너지는 삶의 실재이자 근본토대로서 신의 자비의 실재를 드러낸다.
욕구에 주의집중 할 때 추상적 차원에 있던 그 욕구들은 실재화(realization)의 과정을 통해 이기심이란 제한된 자아의 껍질을 벗기고 신성화된 에너지에 접촉하게 한다. 지적인 두뇌작용이 아닌 가슴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영혼에 불길이 당기면서 빛의 경험, 즉 따사로움과 남 덕택에 산다는 은총에 붙잡힘, 상호의존이라는 연결됨의 충족감, 확장된 자아의식이 넘치게 된다. 그 가슴으로부터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게 자발적으로 봉사를 하게 된다. 이는 의무, 복종, 체벌의 두려움, 보상욕구, 죄책감이나 수치심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 서로 주는 것을 즐기는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성의 분출됨에서 일어난다.
셋째는 폭력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폭력은 전쟁이나 분쟁과 같은 외면적이고 물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 제도적인 시스템에 의한 구조적인 폭력만도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삶을 소외시키는 도덕적 판단과 이에 연결된 강제언어에 있다. 뫼비우스띠처럼 안의 것은 밖의 것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로젠버그가 폭력에 대해 통찰을 주는 것은 ‘감정적 노예단계’에 대한 것이다. 감정적 노예단계란 남의 느낌에 내가 책임이 있다는 의식상태이다.
예를 들어, 감정적 노예상태란 “너의 (늦음, 약속지키지 않음, 잘못) 때문에 내가 화났어/ 짜증이 나/답답해”란 공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너의 ~ 때문에 내가 ~ 느껴라는 이 말속에서 나의 감정은 나의 책임이 되지 못하고 상대에 의한 원인으로 잘못 오해된다. 진실은 나의 느낌은 언제나 내 내면의 가치, 소망/기대 그리고 욕구에 의거해서 일어나는 것이지(자극) 상대방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원인)라는 통찰에 있다.
‘네가 늦어서 내가 화가 났잖아’는 ‘나는 약속을 중히 여기기에 네가 약속한 9시보다 30분 늦게 와서 내 맘이 상했어’라고 고칠 수 있다. 이를 통해 나는 내 느낌과 행동에 대해 100% 내가 책임을 질 수 있게 되고 상대를 비난하지 않게 된다. 상대방은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도 ‘나는 ~하기 때문에 나는 ~라고 느껴’란 말(I-statement)을 통해 말하는 사람의 내면에 실제로 살아 있는 것 (what is alive)에 주목할 수 있고, 느낌의 원인이-책임에 대한 중시- 드러났기에 더 적절히 응답하게 되고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명료함을 얻게 된다.
네가 늦어 내가 화났어라는 진술어는 상대방 비난하기로 들려서 두려움, 죄책감, 수치, 의무 등의 비자발적 상태로 만들어 놓을 뿐만 아니라 행동보다 그의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청자는 화자의 느낌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암묵적인 윤리적 생활패턴의 시스템이 작동하게 되고 여기서 우리는 정서적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덫에 걸려 자율적 주체로서 행동양식을 포기하게 된다. 내가 상대의 느낌에 책임이 없다는 말은 언뜻 오해하면 매우 차거운 인간형을 지시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음미하면 무거운 의무부담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자율성의 공간을 회복하고 상대와 좀더 욕구에 근거한 본질적인 관계형성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다.
삶을 풍성하게 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목표와 나의 지금의 현실간에 깊은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려고 하는 이유는 비폭력 대화가 주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인식이 주는 때때로의 통찰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비폭력 대화가 갈등해결의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삶을 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개인간의 관계를 넘어서 나의 내면적 자아와의 대화와 세계를 재형성하는 변혁적 틀거리를 제공한다는 데 매료를 느끼면 실습과 적용의 고통과 낭패감이 훨씬 견딜만할 정도가 된다고 나는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