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평화-공동성서연구 :: 2005/09/22 13:33

-광복 60주년 기념 제 14차 공동성서연구-

일시: 2005. 9월 5일 -7일.
장소: 민들레 성서연구원


제 1 주제: 백성의 신음과 분단으로부터의 통일

본문: 에스겔 37: 1-23

성서의 상황이해: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미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멸망하고 남유다는 선왕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통한 부흥의 모색도 609년 이집트군과의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아왕의 전사로 몰락하기시작하여 시드기야의 반란의 댓가로 마침내 587년 무너져버렸다. 앗시리아는 정복지역의 무리들을 여럿으로 쪼개어 “용광로”정책에 따라 제국의 여러 지역에 정착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없앤 반면, 바벨론은 피정복지의 우수 엘리트를 제국으로 끌여들여 체제안에서 합리적인 대우를 받게 함으로써 제국에 봉사하도록 하고, 본국에는 가난한자와 지도자의 부재로 반란의 요지를 없애버리는 동화-지배 정책을 취하였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면서 쓴 에스겔서에는 4 가지 주요 환상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제 1장의 하나님의 보좌-마차에 대한 환상, 8-11장의 하느님의 영광을 떠나게 하는 가증한 것들의 환상, 37장의 마른 뼈에 대한 환상 그리고 40-48장의 새 성전에 대한 환상이다. 포로로 끌려간 고역과 뿌리뽑힌 삶의 모습은 말 그대로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37:11)라는 마른 뼈의 모습속에서 드러난다. 이는 이중의 죽음, 곧 삶의 진액이 고갈되고 소망마져 박탈된 애통과 비극의 상황에 처해진 것이다.

에스겔의 해석에 의하면 국가의 몰락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파괴는 이스라엘 백성의 철저한 죄성에 기인하며 그 죄는 왕, 제사장, 관료, 거짓 선지자들, 엘리트들이 관여되었다. 포로기는 이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심판이기도 하다. 이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상황을 자신의 부정과 불의를 정화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하느님은 자신의 명예를 찾기 위해 그의 백성들에게 돌아오고 백성들은 땅과 축복을 받게 된다. 하느님의 정의는 세워지고 옛 북왕국과 남 왕국의 하나님백성들을 연합시킬 것이다. 이전의 죄악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막기 위해 보다 근본적인 철저한 개혁 곧 심성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느님은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고 그의 영/신을 주입시켜(36:26-27; 37:1-14) 생기가 돋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새로운 성전을 통해 성화된 공동체(37:27-28; 40-48장)로 살게 될 것임을 전망한다.

신학적 성찰과 오늘상황에의 적용:

서구로부터 수입된 전통적 신학과 신앙의 방법론적 순진함은 구조악의 실재와의 대결에 대한 무력성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본래 신앙의 명료한 진술로서 신학은 서로 갈등하는 신앙의 컨텍스트, 삶의 전투에 초연한 진술이 아니라 싸움의 한 복판에서 주어진 진술이었다. 하비루라는 떠돌이 집단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는 애굽에서의 상황과 본문의 바벨론 포로기는 상황적 맥락의 연속성이 있다. 둘 다 제국주의의 지배하에서의 상황에 있었으며 하느님의 개입도 하비루 백성의 신음과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과 마른 뼈의 상황으로 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신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스라엘 신앙표현의 중요한 방법은 “부르짖다, 들으신다 구원하신다”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신앙의 표현은 부르짖는 것이다. 깊은 곳에서 부르짖음이 사건의 시작이다. “이 뼈들이 살아 날 것 같으냐?”(37:3) 진액이 빠져 생기마저 잃은 참혹함과 절망의 심연을 제대로 응시할 때, 하느님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된다. 샬롬의 부재로서 불의와 착취의 상황은 개인적 죄의 결과만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제국주의)에도 기인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이 바로가 통치하는 애굽의 노예생활(억압을 당하였고 억압에 안주하며 삶)에서 자유라는 새로운 광야로 인도받아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생활계명을 받아 거룩한 백성으로서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일구어 낸 것처럼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이제 새 영, 새 마음을 받아 스스로 서는 큰 무리(민족공동체)가 된다. “숨이 불어 왔다. 그러자 모두들 살아나 제 발로 일어서서 굉장히 큰 무리를 이루었다”(37:10)

민중신학자들에 따르면 성서는 민중의 사회전기로 읽어야 하며 그리스도교전통의 민중의 이야기와 오늘의 한국 민중의 이야기가 합류해야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땅의 회복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새로운 현실로서 흩어진 집단들이 거룩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자주적인 공동체의 회복을 말한다. 이는
왕조사관, 제국주의 사관, 지배엘리트의 사관이 아니라 민족·민중적 사관의 중심성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는 지배세력의 사회적 기반확대에서 민중이 자기운명 결정의 주체로 성장해 나가는 방향을 말한다. 분단으로부터 통일은 새로운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부흥이라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아닌 풀뿌리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이는 경제적 빈곤, 사회문화적 편견,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인간의 해방작업이 선행조건인 것이다.


민중이 어떻게 노예가 되었는가에 대해 성서는 별 말이 없다. 어떻게 시력과 청각 혹은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가에 대한 과정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갈 때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한 우리 자신들이 그 삶의 자리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다. 무엇이 우리의 무거운 짐/고역인가. 우리의 노예상태는 어떠한가? 절망과 냉소의 시기에, 모든 것이 붕괴되고 모두가 지쳐버린 시기에, 무엇이 중심을 지탱하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자유를 야기시키고 또 그 자유가 어떻게 찾아오겠는가? 환상이라도 철저히 꾸고는 있는가?


질 문:

1. 한반도의 분단의 이유는 무엇이고, 교회는 어떤 책임이 있는가(사회·정치적 영적차원)?

2. 에스겔의 마른뼈의 살아남과 남북이 하나가 되는 환상을 예로 들어, 환상/꿈이 어떤 힘과 기능을 갖고 있으며, 우리 민족사에 이와 비슷한 환상/비전이 어떻게 이어져 왔고 환상이 미친 영향은 무엇들이었는지 사례를 들어보자.

3. 본문의 새롭게 창조되는 하나된 이스라엘의 조건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우리가 새롭게 창조하는 평화로운 통일조국의 이상향에 대한 에스겔의 비전과의 연속성은 무엇이고 혹은 다름이 있다면 무엇인가?

4. 고난(포로됨과 분열됨)을 통해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나 개인과 민족의 고난의 예를 통해 각각 어떤 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II. 제자도(그리스도인됨)의 새 지평: 저편으로 건너감

성서본문: 마가복음 4:35-5:2; 6:45-52

성서본문 이해

66-70년 로마와 유대간 전쟁에 의한 압력과 고통,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멸망의 경험은 마가로 하여금 “어떻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망함에 대한 경험은 그리스도인됨(제자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제자직에 있어서 “방향을 돌려 turn around" 길을 가고, 실재를 "명확히 보는 see clearly"(8:25) 분별의 삶을 요구한다.

철저한 망함의 경험으로부터 시작은 우주적 사건에서 윤리적 사건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길을 재개(re-opening)하는 삶에로 제자도의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1:2-3의 이사야서 인용에서 글을 시작하는 예에서 보듯이 ‘길(정의와 자비의 길)을 만들고, 길을 열어나가는 삶’의 모형은 육지에서 ‘곧’ ‘하자마자’ ‘즉시’라는 계속적인 반복어를 통해 길을 떠남에 대한 강조가 드러나고 갈릴리 호숫가의 ‘항해(voyage)'를 통해 강화되며, ‘도중에(on the way)'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에 대한 가르침이 이루어진다. 특히 마가는 거의 같은 이야기를 두 번씩 반복함으로써 첫번째 행위나 사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이를 테면 오천명/사천명을 먹이심, 벳세다/여리고 소경의 치료, 그리고 오늘 본문이 되는 두 번의 항해이야기이다.

두 항해를 비교해보면 첫 번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이후 일어나며, 후자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후일어난다. 공통점은 항해는 ‘무리’로부터 하느님 나라에 대한 훈련을 받는 제자들을 분리시키고, 날이 어두운 때 항해가 일어났으며, 항해하는 데서 제자들이 역경을 겪는다는 데 있다. 그리고 건너간 곳이 이방 땅이었다. 그리고 사건에 대해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이 공통이다. 그러나 두 본문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차이가 드러난다. 첫 번째 항해는 예수께서 함께 하신 것이고 두 번째는 제자들이 먼저 항해한 것이며, 첫 번째에서는 군중을 ‘남겨 둔 채’ 떠났지만 두 번째는 예수께서 스스로 군중을 ‘돌려 보내셨다.’

예수의 태도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첫 번째 항해에서는 배에서 잠자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역경에 처한 제자들을 향해 가신 것이다. 건너감의 사건을 통해 첫 번째 항해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고’ ‘호령하여’ 바람을 그치게 하고 바다는 잔잔하게 한다. 여기서 “고요하고 잠잠해져라"는 평화(irene; 히브리 shalom)에 해당하는 말이다. 두 번째 사건은 바람과 바다가 초점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인식 ‘유령이다’의 문제였다. 예수는 자기 신분("나다”)을 길을 건너감을 통해 노출시켰으나, 제자들은 마음이 무디어져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다.

신학적 성찰과 오늘상황에의 적용:

성서의 평화(shalom; irene)는 분리, 적개심, 공포, 혹사, 불행으로 치닫는 모든 것들을 퇴치하시는 하느님의 꿈과 의지와 관계한다. 그리고 이 평화는 개인을 넘어 모든 피조물을 포용하는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성서의 비전의 본질이다. 이를테면 평화는 공동체적인 조화로운 삶을 즐겁고 효과있게 하는 모든 원천들과 요인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성서의 샬롬은 완성된 정적인 상태를 칭하는 목가적인 평화/평안이 아니다. 이는 위협가운데 존재하는 평안이요, 불안에 항시 직면하고 투쟁과 시련을 겪는 가운데 얻는 역사적(물질적, 육체적) 평안이며 개개인 함께하는 연대적 평안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평안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보고 서로 나누고 기뻐하는 삶을 경험한 사람들의 평안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는 예수의 말씀의 예를 통해 보듯이 평화가 공동체의 저항과 시련속에서 얻는 것이기에 마가의 주요 인물은 엘리트 계급이 아닌 평범한 민중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예수의 기적이야기를 가능한 낮추고 예수가 만난 민중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도록 힘을 북돋는(empowering) 촉진자로서의 사역을 행한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5:34, 10:52).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

구속사적 관점에서 시간중심의 개념에 익숙한 우리는 평화를 종말의 어느 때의 완성에 대한 사고에 쉽게 물들여 있다. 그러나 마가는 ‘공간(space)'의 재배치를 통해 평화의 문제를 이끌고 나가며 제자직의 의미를 ‘우리가 어느 공간/장소에 속하는가’의 문제속으로 이끌어 들인다. 즉, 그는 힘(영향력, 가치)의 배분 장소인 중심(center)과 주변(the marginal)이라는 두 공간속에서, 힘을 독점하였던 기존의 중심으로서의 한 성전(성전파괴예고, 13:2;휘장이 갈라짐 15:38), 회당(악령이 소리침1:23) 예루살렘(예수의 심문과 박해)으로부터 단지 중심의 들러리 역할이었던 주변의 장소들, 곧 가정, 빈들, 길이 오히려 치유와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변환시켰다. 전위(轉位; trans-position)의 공간에 대한 의미배치를 통해 전도된 가치와 불균형에 대한 재정립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에서 두 사례를 주목해 보자. 육지의 사역에서 특히 강조되는 공간으로서 ‘길위에서(on the way)'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조건에 대해 이렇게 물으신다. “길에서(on the way) 무슨 일로 다투었는가?”(9:33)라는 제자들에 대한 힐책이다. 첫째(중심)가 아닌 꼴찌(주변)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뒤를 잇는다. 두 번째 강조되는 공간은 항해(길을 열음)이 이루어지는 호숫가(주변)이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항해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4:35)"고 권하시고 손수 모범을 보이신다. 두 번째 항해에서는 ‘채촉하여’ 제자들이 스스로 건너가도록 독려하신다. 그러나 이 건너감에 대해 제자들은 기진해버리고 건너가는 것이 두려워지고 결국은 실패하게 된다. 문제의 근본적인 심각성은 건너가는 예수가 ‘유령’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말한다. 예수가 자신의 신분을 노출(“나다, 안심하라.”)한 곳이 바로 이 건너감에서였다는 것이다.

본문은 혼돈에서 평화(샬롬)에로 나아감과 어둠속에서 건너감을 배우는 제자직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한다. “고요하고 평안하라”가 들려지는 곳은 옛것, 이쪽에 대한 거절과 타자, 저쪽의 끌어안음을 지향함속에서 들려진다. 가진 자의 영역에서, 있는 것의 유지와 만족감에 대한 관심에서 악령에 의해 탈취된 자에로, 샬롬을 갈망하는 대상에 대한 관심에로 나아감으로, ‘이미’에 초점을 맞춤에서 ‘아직 아님’에 시야의 초점을 맞춤에서 새로운 인간성(‘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옴, 5:15)이 일어난다. 군대귀신에 들려 분열된 삶을 사는 사람을 일치에로 회복시킨 이 사건이 건너감을 통해 일어난다.

필사적인 안전을 향한 모든 나의 노력속에서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가? 나를 탕진시키고 두려움에 떨게 하는 실체의 근본은 무엇인가? 이 시대에 신앙을 지탱할 원천들을 거의 탈진한 시기에서, 어떤 돌파의 경험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질 문:

1. 제자들이 항해를 시작한 때는 저녁이 되어 어두울 때였다. 도대체 왜 예수는 낮이 아니라 밤에 제자들을 건너가라고 했을까? 어두울 때 건너간다는 게 나/우리에게 무슨 뜻으로 다가오는가?



2. 예수께서는 ‘저편으로(the other side)’ 건너가자고 하셨다. 이쪽과 저쪽, 우리와 그들을 갈라놓는 이분논리가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정치경제적 측면, 신앙의 측면...) 즉, 누가 이쪽이고 누가 저쪽에 있는지, 그리고 이쪽과 저쪽의 구분으로 얻어지는 삶의 양태는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자.



3. 두 번째 항해에서 초점은 예수가 물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는 초자연적 인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였다(he was about to pass by them)”(6:48)에서 보듯이 그분만이라도 건너감을 지속하려는 것이다. 건너감속에서 예수는 자신의 신분-“나다”-을 보였고 제자들은 그를 “유령이다”고 소리쳤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예수를 유령으로 보는 이 심각한 착시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제자들처럼 우리도 어떤 삶의 경우에 예수는 “나다”라고 하시는 데, 우리는 예수가 안계신 것처럼 혹은 비현실적인 예수로 판단하게 되는가?

III. 평화를 실행하는 신앙공동체

성서본문: 에베소 2:12-22

성서본문이해:

에베소서는 골로새서, 디모데서, 디도서와 함께 후속바울계 공동체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계 공동체(가정교회)는 주로 도시에서 형성되어 이원론적 헬레니즘의 영향을 다른 어떤 기독교공동체보다 많이 받고 있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의 세월을 보낸(행19:1, 8-10)인연으로 설립된 후기바울 공동체는 바울운동을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당시 이들의 삶의 자리는 그토록 열광한 재림에 대한 기대는 점차 불확실한 소망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점차 가중될 조짐이 강화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또한 바울이 포로수감생활을 하면서 그의 카리스마적인 영향력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복음해석의 다양성과 공동체내에서의 불협화음이 고조되는 갈등과 위기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에베소기자가 속한 공동체는 이러한 위기상황의 조건속에서 비조직적인 산만한 모습으로는 그 시대의 도전을 극복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고, 소종파적이고 비타협적인 운동의 역동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고 보편주의적 사상과 윤리에로의 전환과 더불어 공동체의 존재의미에 대한 재 해석을 하게 되었다. 즉, 재림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여 미래가 아닌 지금/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는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공동체내에서 실천규율로서 사랑과 일치, 섬기고 나눔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실현(골3:11참조)하며, 차별없는 평등과 섬김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4:2-4). 이를 통해 열광과 임박한 종말론의 분위기를 지금/여기에서의 하나님 나라운동의 계승과 질적인 발전을 도모하게 되며, 하느님 나라 운동이 올바른 제도로 자리잡도록 하기위한 신앙적/이념적 틀을 제공하게 된다.

현실의 착취구조속에서 예수운동의 계승하기 위해 어떻게 하느님 나라운동을 올바르게 잇는새로운 모습으로 발전시킬 수 있겠는가의 고민은 조직/구조/행정체계의 통일성의 노력을 통해 보여진다. 그리고 기독교공동체가 이런 통일된 조직체로서 질서를 유지하고 또 세상의 ‘미혹하는’ 철학과 이단 사설에 대항한 신앙과 실천의 이념적 기반을 어떻게 다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에베소기자는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선과 정의와 진실”(5:9)의 열매를 맺는 조직체계를 제도화함으로써 변혁적 누룩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에베소공동체는 교회란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서 자신을 통해 실현될 것으로 자각한 도구, 즉 지금/여기에서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로서 보고 이를 우주적인 보편적 교회(1:22-23, 3:10-11)로 보고 보편주의적 윤리를 강조하며, 분열로 와해된 세상을 통일시키는 그리스도의 주권과 역할을 강조(1:9-10)하였다. 하느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만유를 하나되게 하는 역사하심은 첫째로 자신과의 하나됨(옛본성이 죽고 새 본성이 출현, 2:1-10), 둘째로 타인과 하나됨(분리의 담을 헐고 규정을 폐지, 2: 14), 셋째로 하나님과의 화해(2:16) 넷째로 분열된 세계에서 새로운 통일을 세우는(하느님의 한 가족, 2:19) 데 있다.

이러한 과제를 위해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과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의 목적(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새사람이 됨)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기독교 진리안에서의 삶은 새로운 삶의 양식(사랑의 생활과 빛의 열매, 5:1-20)을 요구하며,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우주적인 작업의 적대자인 사탄과의 투쟁에 있어서 영적투쟁이 필요하기에 하느님의 전신갑주(6:10-20)라는 무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싸움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6:12)이기 때문이다.

신학적 성찰과 오늘상황에의 적용:

성서에 있어서 세계사의 중심적 비전은 공동체 안의 모든 피조물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조화와 안정을 이루면서 살므로 다른 모든 피조물의 기쁨과 안녕을 구현하는 것이다. 에베소기자는 공동체의 평안은 결코 우상적인 자기 확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소명을 삶에서 구체화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평화는 다른 관계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지배로서의 힘(power-over)이 아니라 연결되고 일치하며 나누는 힘(power-to, power-with)에서 평화는 가능해진다.

우리가 성육신의 진리를 믿는다면 역사적 현실의 한복판에 있는 샬롬으로의 성육신, 곧 역사안으로 들어왔고, 한 인간으로 나타났고, 한 개체적 삶이 될 뿐만 아리나 공동체의 몸이 되는 진리를 믿는 것이다. 이 샬롬은 전례적인 경험이나 신화적 진술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깊은 분열에 직면하여 비전을 들이대는 그러한 것이다. 출애굽 기사가 인간경험의 핵심문제로서 억압과 지배문제를 제기하고 유월절의 기억은 “우리는 한때 노예였으나 지금은 자유인이다”는 확증을 근본으로 한다.

교회의 신앙은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하느님의 비전을 파악하고 그 비전을 향하여 살도록 의도되었다는 이중적 확신-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새존재로의 헌신-속에 근거한다. 변화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용기, 현재와 다른 존재가 되도록 성령으로부터 기대되고 있다. “원수된 모든 요소”를 없애고 자유와 일치에로 하느님은 부르신다. 사회의 분열과 원한이 뚜렷하고 그것을 극복할 만한 방법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던 1세기에 이는 매우 혁신적인 언급이다. 이 별것 아닌 작은 공동체는 커다란 도시의 저항에 직면하여 세상이 참으로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전혀 다른 비전을 고지하고 있다. 세상은 이는 분리와 소외가 아니라 일치를 위해 의도되었다는 것이다. 억압과 분열에서 자유와 일치에로의 초대- 이는 우리 세계를 움직이는 중심 가치들에 대한 과감한 항거이다.

파괴적이며 악마적인 세력과 힘들에 대한 대응없이 하느님과 이웃과의 화해/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기 위해 우리에게 부과되는 요구는 무엇인가? 어떻게 교회가 분열된 세계 속에서 일치(자유를 함께 소유)를 위한 하느님의 뜻에 봉사할 것인가?

질 문:

1. 평화를 위해 섬기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과 주목함이 왜 우리의 신앙 삶과 목회에서 사라지고 있는지(우선권에서 밀리고 있는지) 그 이유와 과정을 이야기 해보자.

2. 에베소 기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바쳐서” 원수된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되게 하셨고,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셨다(2;14-15)고 한다. 평화는 몸을 바치고 희생함없이 단순한 담론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몸을 바치고 희생함의 삶이 어려운 것인가? 도대체 희생한다는 것은 무슨 요구를 뜻하는 것인가?

3. 에베소에서 보듯이 평화는 단순히 원수된 자끼리의 갈등없는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 새로운 존재로서의 만남이 전제되는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도 단순이 막힌 담의 헐음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한반도의 평화통일의 과제는 무엇이고 이에 대한 교회의 자세와 역할은 무엇인가? 그리고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우선순위로 3가지만 열거해 보자.



<< 12월 초에 실시하는 제 15차 공동성서연구는 "기독교와 평화교육"을 주제로 실시하며 교회나 각 자의 삶의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대한 제안이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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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22 13:33 2005/09/2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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