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선환 박사의 삶과 신학 :: 2005/06/11 12:19
변선환 신학의 새로 보기
변선환 박사 고별인사 육성으로 듣기
http://tvpot.daum.net/clip/ClipViewByVid.do?vid=eDnqE-6wlBU$
(이 육성자료는 일아 변선환 박사가 1992년 5월 7일 금란교회에서 감리교의 정치부흥사들이 중심으로 행한 종교재판에 의해 희생되어 목사직 박탈과 감리교 축출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행한 고별인사이다.)
서론: 변선환 박사에 대한 회상
여성신학의 방법론과 관련해서 자주 인용되는 슬로건으로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공적인 것이다(the personal is the political/the public)"란 주장이 있다. 본인이 이 주장은 환기시키는 이유는 변선환 신학을 다시 보는 데 있어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한 사상가의 신학적 진술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태도와 내면적인 가치관과의 관련성을 통해서 볼 때 더욱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신학적 담론에 대한 공적토론에 앞서서 한 개인의 사적인 삶의 태도와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사상과 글에 대한 중대한 통찰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세인의 위험인물(?)로서의 변선환이라는 일반적 인식의 근거가 그가 저술한 몇몇의 글에 대한 단편적인 오해로부터 발생하고, 신학이 나오기 이전에 변선환이라는 한 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출발한다고 보기에 그의 삶의 일부를 옆에서 지켜본 제자로서 당연히 증언해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지니고 있었던 스승 변박사에 대한 단편적인 회상들이 이제 하나의 실로 꿰어져 보다 분명한 인상으로 다가온 것은 이번 발표의 기회에 읽게 된 그분의 전집 7권을 이곳저곳 읽어 내려가면서부터이다.
80년대 초 감신에 들어가서 대하는 변박사에 대한 인상은 학생들에게는 까다롭고 소수 엘리트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어서 보통수준에 있는 나 자신은 무척 어려운 분으로 느껴졌기에, 흥미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도 멀리도 있지 않는 거리에서 그의 수업을 즐겨들었다. 질문을 일으키고 기존 관념을 흔들어 놓는 그분의 강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수년을 거르지 않고 항상 기도와 함께 시작하였다. 기도의 음색은 조용하면서 약간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단조롭게 이어졌지만 내용의 중심어는 대게 “진리” “열린 영혼” “역사에 대한 책임”등이었고, 강의는 기도의 조용한 어투와는 딴판으로 소위 말하는 ‘지적부흥회’로 이끌려져 거의 언제나 다음 수업시간 종이 칠 때 끝나곤 하였다.
자주 이야기 하여서 머리에 박힌 그분의 상투어가 생각난다. “조직신학은 조지는(?)신학이다.” 교수님은 왜 남들처럼 저서를 출판하시지 않으시냐고 물으면 신학이 계속 바뀌는 데 무슨 책출판인가하시며 “너희들은 나를 징검돌로 삼고 건너라”하셨고 “내가 변씨인 것은 변하니까 변씨이다”로 응수하셨다. 학부말기부터 읽기 시작한 존 힉(John Hick)과 폴 니터(Paul Knitter)에 대한 소개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소개, 그리고 대학원에서 아세아신학 실습에 이르기까지 타신앙의 도전에 대한 지평융합의 문제와 “이제는 서양신학은 각주로 써야한다”고 신학적 주체성의 문제를 거론하신 것도 기억이 난다.
신학적 주체성의 문제는 동양의 신학자는 아세아의 영혼으로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신학자로서 선배들이나 본인이 혼줄이 나는 주제어였다. 따로 모이는 연구그룹에서 종종 당하는 것이었지만 야스퍼스를 전공했든, 하이덱거를 전공했든 그 누구를 전공했던 간에 “당신의 이야기로 말해봐!”로 제자들을 다그쳤고, 요약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 속에서 ‘사상의 샘’이 터지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때로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제자들을 호통 치는 면이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들도 알지 못하는 그분만의 외로움이 늘 있었다. 그럴 때면 금촌의 고 윤성범 학장의 묘지를 찾으셨고, 말년에는 불쑥 제자들의 목회현장에 나타나시곤 하셨다.
본인은 그분으로부터 두 가지 각인된 신학방법을 자연스럽게 각인 받았다. 하나는 학부시절 때 감동 깊게 들은 ‘기독교 문학’시간에서 받은 것이다. 도스토엡스키, 그리엄 그린, 헬만 멜빌, 엔도 슈사꾸 등등의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새겨받은 “고뇌하는 양심”이란 단어이다. 허무와 악 그리고 어둠을 직시하는 저항적이며 고뇌하는 인간성에 대한 각인이었다. 두 번째는 불트만, 틸리히, 야스퍼스 등등 당시에 꽤나 이해하기 힘든 신학자들의 소개를 통해 수없이 들은 “지적인 정직성/성실성(intellectual sincerity)”이었다. 고백하건대 각인된 이 두 교훈- 고뇌하는 양심과 지적인 정직성-은 여러 차례 생의 불확실성과 절망에 대면하여 흔들릴 때마다 무의식적인 나침판의 역할을 해왔다.
90년대 초 부흥사들로부터 이단시비로 세계 감리교역사상 처음으로 교단축출이란 극심한 고통을 통과하면서도 따사롭게 변하신 그분에 대해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93년 유학중 가족을 데리러 나온 기회에 종로5가에서 그가 자기 제자들과 자주 가시던 냉면집(“우래옥”)에 갔다가 나왔을 때, 그가 인도에서 리어카장사와 농담하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잊을 수 없었다. 이미 서로 친한 듯한 분위기를 통해 자신을 낮추시는 인간적인 면모가 그 리어카장수에게 대하는 태도에서 배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그동안 내가 너무 높은 자리에만 있어서 세상을 몰랐지. 땅에 신을 대지 않고 차안에서 편안하게 돌아다니기만 했지 않겠어.” 수년째 같은 것으로 신어서 빛바래지고 구겨진 그 낯익은 구두로 종묘까지 걸으면서 내는 그 너털웃음에 대한 인상이 잊혀지지 않았다. 낡은 구두와 언제나 백묵가루가 뭍어있는 양복-이는 학생들을 학문의 도가니속으로 빨아들이는 그의 열정을 기억하는 심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제자들에게 남긴 최고의 메시지는 그의 죽음의 모습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원불교의 학술대회를 위해 원고를 쓰다가 글 쓰는 자세로 돌아가신 그의 최후의 모습은 하나의 계시적 사건과 같았다. 종교적 타자(the religious Others)를 위한 철저한 지적헌신이란 메시지는 종교간의 대화가 일부에서 제기하듯 하나의 지적유희가 아닌 생을 거는 헌신의 문제라는 것과 나의 문제가 아닌 타자를 신학 작업의 중심(centering of Others)에 놓는 가교(架橋)를 한국 신학사에 놓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건너가도록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변선환 신학을 다시 보는 데 있어서 일부러 추상적인 메타담론(불교와 기독교간의 대화, 아시아신학, 다원주의 종교신학 등등)대신에 그의 삶에 대한 작은 이야기로부터 서론을 시작하는 것은 변선환교수는 신학자 이전에 프로테스탄트형 구도자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기도와 명상이라는 전통적 방법대신에 실존론적 생의 의미물음에 대한 지적성실성과 양심화라는 학문의 길을 통해 그는 진리체험이라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변선환 신학을 구도하는 신심의 신학, 자유체험의 여로를 향한 열정이 담긴 신학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본 논문의 핵심인 것이다. 이를 위해 그의 신학목표는 초지일관하게 개인과 사회의 ‘인간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 인간화를 위해 종교체험과 정의로운 삶을 통전적으로 연계하는 그의 종교해방신학은 개인 삶의 갱생과 사회의 변혁을 요구하는 예언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런 예언자는 언제나 시대를 앞서 살거나, 시대의 흐름에 거슬려 살았기에, 교리에 있어서 융통성을 지닌 감리교에서 축출이라는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의 심통(心統)제자가 아닌 나로서 변선환신학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있지만 본인 나름의 변선환 신학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점을 진술하고자 한다. 무릇 관점없는 중립의 입장이란 불가능하므로 과거에 변선환-존 힉-레오날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라는 다원주의 신학자의 영향 하에 공부해온 본인은 먼저 변선환 신학을 지지하는 입장에 선다. 그럼으로 그를 비판한 글에 대한 몇 가지 논점을 서술하고, 계속 변하고 징검돌 밟는 것처럼 건너가시는 변선환 신학의 여러 흐름 속에서도 그가 신은 빛바랜 구두가 보여주는 변하지 않는 근본토대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변선환 신학의 새로운 접목점으로서 대화의 실천으로서의 여성해방신학과 종교평화운동에 대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1. 변선환신학에 대한 비판의 논점들
변선환 아키브로부터 건너 받은 변선환 신학에 대한 논평은 카톨릭의 심상태 교수, 감리교의 장왕식 교수 그리고 개신교 타교단의 황덕형 교수의 것이다. 심상태교수의 “한 카톨릭 신학자가 본 변선환 박사의 타종교 신학”은 변박사의 신학적 업적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많이 부각시키고 있다. 즉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에서 시작된 타종교에 대한 개방적 시각에 변선환교수가 이를 철저히 밀고 나갔으며(10면), 신중심적 비규범적 기독론의 입장에서 타종교와 열려진 대화와 협력을 통해 상호보완과 상호변혁을 일으키는 세계공동체 형성(13-15면), 그리고 변선환 교수의 대화를 위한 신학적 근거가 ‘언표불가능한 구원의 신비,’ 해방의 신비를 밝히는 구원론(17면)이라고 규명하였다.
심상태교수의 카톨릭 입장에서의 평가는 첫째, 변박사가 웨슬리의 선행은총의 입장에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리교적 신학자이며, 둘째, 변선환 신학의 중심은 쟁론중심의 ‘신론’이 아닌 사회정치적 해방열망과 환경파괴 등의 절박한 지구문제에 관심어린 ‘구원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21면). 셋째, 카톨릭 교회의 그리스도 중심적 포괄적 성취론을 넘어서는 ‘신중심적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은 각 종교가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보완과 정화가 성취된다는 점에서 종교혼합주의라는 오해와는 거리가 멀다고 일단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심상태 교수는 ‘신중심적 비규범적 그리스도론’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및 구원 진리의 ‘규범적 기준’으로서 나사렛 예수에 대해 간과하고 “‘배타적 그리스도중심적 신학 패러다임’을 ‘신중심적 신학 패러다임’으로 대치하여 양자택일의 관계”로 나갔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신론과 기독론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보다 면밀한 신학적 해명이 따라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부정적 의미의 종교혼합주의라는 혐의”와 “그리스도 신앙의 정체성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권고하고 있다(24면).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카톨릭 신학자로서 아킬레스건인 ‘규범적 기준’이 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끝까지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심상태교수의 주장은 이렇다.
물론 하느님이 만인의 구원을 세계창조 이래 애당초부터 이미 원하시기 때문에, 예수의 역사적 출현 이전에 당신 자신을 만인에게 계시하시어 만인이 구원에 이르는 가능성안에서 생활토록 하셨음이 틀림없으나, 하느님의 이러한 구원 계획을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나자렛 예수를 통해서 인지하기에 이른다.(23면)
심상태 교수는 예수의 독특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배타성, 절대성의 언어를 안 쓰고 타종교가 구원의 길이라는 점에서는 타종교에 대해 열린 문을 제공하고 있으나 기독자들에게는 규범적 기준이 된다는 점을 고수하고 있다. 즉 기독교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생활의 규범이고 타 종교, 타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은 성령의 현존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경의의 대상이 된다(24면)고 주장한다.
장왕식 교수는 변선환 신학을 서구의 신식민주의적 패권주의와 문화적 우월주의로부터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찾는 작업에 있어서 변선환 교수의 불교적 기독교를 보고 있다. 이는 종교의 권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한 비판의 입장에서 변선환 신학의 긍정적 측면을 보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종교적 제국주의를 넘어서서 타종교가 신학의 주체가 되는 변선환교수의 “타종교의 신학”은 주체들 간의 대화라는 점에서 타종교를 통한 배움과 보완의 길이 열리게 된다.
기독교인으로서 불교로부터 배우는 한 가지 예는 기독교의 직선사관이 하나님의 구원을 역사의 어느 한 점에 배타적으로 고정시키는 오류와 흑백논리의 사고에 의한 자기 중심적 역사관에 대한 병폐에 대해 불교의 렘마의 논리학(“A는 A면서 동시에 非A이다”)이 공헌할 수 있다는 변박사의 주장을 장교수는 상기시킨다. 여기서 혼합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장왕식교수는 종교사적으로 “어느 종교도 혼합주의를 면한 적이 없으며”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울, 요한, 초대교부, 그레코-로마문명의 중세기독교에서 보듯이 기독교의 역사도 혼합주의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실상 현재 보수적 한국인들이 믿고 받드는 기독교도 혼합주의를 통해 선교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혼합주의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장 교수는 변선환 교수의 “불교적 기독교”가 기독교인으로 머물면서 불교를 통해 변화된 기독교에 머물면서 기독교가 불교의 좋은 점을 배우면서 자신을 변혁해 나가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변선환의 혼합주의는 기독교를 위협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39면). 타종교의 신학마저 더욱 기독교인다워지기 위해 추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장 교수는 변선환교수의 다원주의 신학이 너무나 신중심적 다원주의에만 집중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는 한 종교가 가진 독특성을 상실하는 약점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장 교수는 기독론 중심의 다원주의의 입장이 기독교의 독특성과 유일무이성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모든 종교의 종교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이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이해를 받을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을 토론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장왕식 교수와 심상태 교수는 같은 의견을 갖는다.
위의 두 논문이 변선환교수의 학문적 업적에 대한 긍정적 태도의 입장에서 비판적 고찰을 한 것이라면 황덕형 교수의 논문 “변선환의 토착화 기독론: 미지의 신을 찾아서”는 그 제목이 제시하는 것처럼 변 박사의 신학에 대해 매우 도전적이고 비판적이다. 우선 도입부문에 있어서 카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이 토착화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속에서 한국의 단군신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김지하처럼 가톨릭신도가 단군이데올로기의 전도사가 되는 예에서 보듯이 신화와 역사를 혼동하는 이러한 낭만적원시성에 대해 한국교회의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598면) 왜냐하면 “전통문화의 신학적 수용은 문화와 계시의 관계를 다루는 중대한 문제”로서 문화신학의 정당성에 대한 신학적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이다. 그는 이 신학적 판단의 정당성의 근거에 대해 이렇게 과감하게 주장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그리스도의 주권의 계시속에서 이해 할 수 있는 능력, 즉 우리의 신앙을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이해 할 수 있는 판단력의 제고가 모든 신학적 사유의 핵심”(599면)이라는 것이다.
황교수는 변선환 교수의 토착화론에 있어서 그의 기독론이 위의 사례처럼 ‘혼돈과 연관’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입장에서 기독론의 핵심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단 한가지이며 이에 대한 답변이 기독론의 전체의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점을 흐릿하게 만든 변선환의 기독론의 문제점 (혹은 더 정확히 문장 어투로 읽자면 위험성)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
본인이 황교수의 논문이 참으로 심각하다도 느끼는 것은 그가 지닌 전통신학자로서의 입장에서 교리수호의 차원에서의 신학적 판단의 일방적 성격-기독론은 이래야 한다-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변선환교수의 주장에 대한 잘못 이해가 심각한 수준을 넘어서서 의도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이미 논문제목에 달은 “미지의 신을 찾아서”라는 부제달기(우리가 아는 기독교 신과는 다른 신이란 의미에서)와 토착화신학은 단군신앙의 부흥의 방조와 신앙의 혼돈초래라는 도입부분의 도식에서부터 의도적으로 드러나 있다. 몇 가지 잘못 이해한 부분을 검토하기로 하자.
첫째, 황 교수는 변 박사의 전통적 선교방식에 왜 대화의 문제가 국제선교대회에서 하나님의 선교개념으로 바뀌고 개종이 아닌 대화로 바뀌고 있는지에 대한 변 박사의 신학적 근거와 그 역사에 대한 긴 설명은 생략한 채 변선환전집 4권, “Missio Dei 이후의 선교신학” 참조.
변 박사는 개종을 위한 선교를 반대한다고 부정적 언어를 도입한다. 인용어가 상당히 보수교인을 자극할 수 있는 변 박사의 글을 첨삭확대하여 도입하고 있으며 예, “왜 우리는 어떤 간교한 수단을 써서든지 비 기독교인을 회개시키고 강제로 세레하려고만 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글은 바로 앞글 “왜 우리들은 선의를 가지고 있는 비기독교인이나 비종교인들이 자기를 스스로의 종교적 정신적 전통속에서 인류 공동체 형성을 향하는 새로운 휴머니티를 회복할 수 있다고 지적인 성실성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긍정하여 주지 못하는 것일까?”에 뒤를 잇는다. 이 두 질문 중 선교에 대해 신중히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앞의 질문을 생략하고 “어떤 간교한 수단을 써서든지”란 문장의 질문을 인용함으로서 보수주의 신앙인의 거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변 박사가 주로 쓰는 타종교, 타문화란 단어대신에 “이방종교” “이교적인 종교” “이단의 시대” “이교” “이방문화”라는 종교적 타자에 대한 부정적 판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안에 이방종교가 버젓히 존재해 왔고 존재하는 현실에 적합한 언어는 무엇인가?” ... 이들 제 3의 교회에게 제기된 문제란 어떻게 복음을 이교적인 종교와 정치적 체계에 적응시키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 모습은 구체적으로는 소위 “이단의 시대”를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도록 준비 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다원주의가 갖을 관용의 필요성은 기독교와 이교사이의 외적 관계에만 관여되는 것이 아니다.”(필기체 첨가)
결국 변선환의 그리스도는 “철두철미 이방문화를 섬기는 종”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둘째, 황 교수는 변선환의 기독론은 “이 세계위에 하나의 세계신학을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중심적인 하나의 통일된 종교신학”으로서의 세계신학은 기독교와 예수의 역사성을 무시한 “보편적이며 우주적인 신 체험에 바탕”을 둔 세계신학이라고 한다. 변선환교수의 초월자 체험이라는 보편적 근원에서 만나서 대화하고 협력하자는 꿈은 여기저기서 지속되는 종교로 인한 전쟁의 사례로 보듯이 그의 미지의 신에 의해서 보장되는 타종교와의 공존은 무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은 종교전쟁이 대화와 협력의 세계공동체를 꿈꾸는 변 박사의 대화신학의 무용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교전쟁의 대부분은 편견과 무지, 그리고 정치적 힘의 오용에 따른 종교의 이념적 기능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변선환박사의 지구신학이란 모든 종교를 통합하는 하나의 세계신학-이는 실지로 불가능한데 어느 누가 세계의 모든 종교를 다 안단 말인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타종교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지구적 관점을 지닌 다원성을 포괄하는 에큐메니칼한 신학을 말한다. 이는 종교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어느 신학자도 하나의 세계신학을 실지로 구상한 사람이 없다는 데서 증명된다. 변 박사의 기독교와 예수의 역사성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과거의 역사적 일점에 국한시키는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주의의 근거로서 예수의 역사성이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 상황에서 약자를 위한 섬김의 결단을 무제약적으로 사신 예수의 삶을 산다는 점에서 신앙의 역사성을 변 박사는 주장한다.
셋째, 변선환 신학의 방법론적 전제에 대해 그의 기독론은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는 것은 파니카에 대한 견해이며 이에 대해 변 박사는 역사성을 상실한 파니카의 신학에 대한 비판을 황 교수는 간과하고 있다. 변선환 신학이 카우프만의 하나님 개념은 경험이 아닌 상상력에 의한 구성적 개념이라는 점에 있어서 같다(608면)는 점에서 “변선환 기독론은 철저하게 상징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기독론”(609면)이라고 한다. 또한 우주적 로고스에 의한 서구전통의 해체라는 점에서 양성론과 그리스도의 선재 그리고 부활의 현실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참된 자기를 만나는 기독론이란 점에서 “심미적인 실존의 자기 결단의 운동”이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변 박사의 기독론은 인간의 실존적 구조해명과 연관하기 때문에 사실 “아무런 내용이 없는 빈 상자”와 같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학적 판단의 중심은 “그리스도가 중시되는 언어”의 획득이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나는 종이 되고 그는 주인이 되는” 사건의 언어를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학의 언어가 신앙의 언어이고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진술이 있어야 하는 데 변선환 기독론은 이것이 빠져있고, 그런 점에서 내용이 없는 “그림자 기독론”이며 변선환 교수의 신앙은 유명론적이고 하나님의 비밀로서 예수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변 박사의 신학은 기독교적이 아니라고 황교수은 주장한다. 그의 변선환 토착화론에 대한 반대의 입장은 명확하다: “진실한 토착적 신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는 십자가의 명상에서 자라나는 것이다!”(615).
그리스도를 중심에 넣고 사유하려는 황 교수의 전통적인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 양성론, 그리스도의 선재, 육체의 부활 등처럼 전통기독론에 대한 황 교수의 방어의 노력은 “그리스도가 중시”되지 않는 언어는 불경죄에 속한다는 그 나름대로의 신학적 입장에서 이해가 가능한 진술이다. 문제는 그러한 종교적 신화에 근거한 자기-독백적 언어가 현대인과의 의사소통을 얼마만큼 가능하게 하는 가하는 문제(신학의 적합성)와 그리스도에 대한 그러한 신화적 진술이 명제적 언어인가 아니면 초대교회의 고백의 언어인가(헌신과 삶의 의미를 표현하는 태도언어)하는 문제(성서신앙에 입각한 타당성), 그리고 정통기독론의 실체적 입장이 기독교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연관되어 폭력을 지원해 왔다는 비판에 대해 얼마만큼 황 교수는 전통기독론으로부터 대답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침묵하면서, 아무런 대안이 없는 비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신학함에 있어서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
변 박사가 오늘의 다원시대를 맞이하여 존 힉의 코페르니쿠스적 패러다임 전환이란 말에 동의를 하는 것은 종교적 우주라고 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이 전적으로 바뀌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신학의 본성과 우리의 현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학의 본성과 방법에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예고한 것이다. 다원주의 실재에 대한 인식은 이미 신학 방법론에 있어서 루비콘 강을 건너 이제는 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는 패러다임의 변화로 말 해 질 수 있다.
패러다임의 문제는 토마스 쿤(Thomas Kuhn) Thomas S.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Chicago&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2).
이 과학적 훈련에 있어서 적용한 실재(reality)를 이해하는 틀로서, 이는 우리시대에 신학을 함에 있어서 ‘무엇’ 그리고 ‘어떻게’라는 중심문제에 통찰을 제공한다. 쿤의 파라다임 변화의 성격에 대한 중요한 지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전통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이상증세(anomalies) 혹은 역기능에 대한 각성에서부터 온다. Ibid., 52-53.
둘째, 이상증세 혹은 역기능의 계속적인 위기가 과학적 훈련의 중심주제가 된다. Ibid., 68,74, 82-90.
셋째, 이 이상증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과학자들의 공동체가 모형(paradigm)의 선택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Ibid., 93ff.
마지막으로 새로운 모형의 선택은 문제의 본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즉, 이론, 방법 그리고 평가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새로운 사고모형과 더불어 실재는 다르게 인지된다.
과학적 패더다임의 변화에 있어서 그 ‘내용’과 ‘방식’에 대한 쿤의 설명은 우리시대에 신학을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공헌을 한다. 1) 하나의 해석적 체계로서 모든 모형은 역사적(비시간적인 것이 아님)이며 상황적이다. 2) 이상증세(혹은 위기)는 모형변화(paradigm shift)의 필수요건이다. 3) 모형과 실재는 상호관련이 있으며 상호의존적이다. 4) 새로운 모형이 살아남는 데는 그 모형을 의미 있게 보고 거기에 종사하는 수련자들의 인식론적이며 실존적인 회심과 헌신, 즉 때때로 그들에게 새로운 모형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목숨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의 회심과 헌신을 요구한다.
모든 신학적 모델은 문화적 시각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독특성은 특정한 시대와 장소의 도전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한스 큉이 기독교역사의 시대적 분석에서 보여주는 바이다. Hans Kueng, Christianity: Its Essence and History, trans. John Bowden (London:SCM Press, 1995). Hans Kueng and David Tracy ed., Paradigm Change in Theology: A Symposium for the Future, trans. Margaret Koel (Edinburgh: T.&T. Clark LTD, 1989) 3-33.
그는 기독교 과거에 있어서 5개의 다른 모형들(원시기독교의 종말론적 모형, 초대교회의 헬레니즘적인 모형, 중세의 로마가톨릭 모형, 개신교의 개혁적 모형 그리고 근대 계몽주의 모형)을 소개하고, 우리시대에는 에큐메니칼 모형을 제시하였다. 각 시대마다 다른 모형(패러다임)의 형태가 존재하는 이유는 각 시대의 기독교공동체는 다른 문화적 상황에 속해 있고 각기 다른 형태의 위기들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초기 유대-기독교 공동체의 희랍화과정속에서 역사적 예수는 존재에 대한 실체적 관점에 입각하여 신적인 그리스도로 등극되었다. 어거스틴의 신학은 그의 성적경험, 신플라톤주의, 반-펠라기우스주의 그리고 로마제국에 대한 이교도의 침략의 위협에 의해 형성되었고, 반면 쉴라에르마허와 하르낙의 신학적 틀은 근대과학, 세속주의 및 개인주의와 같은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
우리가 신학의 본성을 우리의 역사의식의 관점에서 경험적이며, 해석적이고 역사적인 체계로 인정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기독교증언의 진리가 각 시대의 기독교전통의 문화적 편견가운데 선포될 수 있는 가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데이빗 트래시(David Tracy)는 가다머의 방법을 따라서 두 개의 상수(constant)로서 유대-기독교 전통과 우리 현시대의 경험간의 상호비평적 상관관계의 방법을 소개한다. Paradigm Change in Theology, 34-62.
즉, 이들 본문과 해석자는 종교적 진리의 의미추구에 있어서 공통적인 주체가 된다. 본문과의 대화를 통해서 해석자는 자신의 전이해/문화적 편견을 의식하게 되고, 심지어 본문역시 문화적 왜곡을 가졌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가능방식”으로서 본문에서 묘사된 다른 방식에 대면하게 된다.
본문과 해석자간의 상호능동적인 대화의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왜곡과 편견은 검토되고, 교정 받으며 심지어는 비판적으로 상호 대면할 수 있도록 드러내진다. 그러므로 기독교 증언의 진리는 본문 혹은 해석자 단독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과 해석자간의 상호 능동적이며 비판적인 대화의 자기발견적인(heuristic) 과정을 통해서 그 자체를 계시한다. 실재에 대한 신실하고 해방적인 감각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본문과 해석자간의 계속적인 대화로서 신학적 행위로 인하여 쉴레벡스가 주장하듯이 기독교정체성은 “유일회적으로 고정될 수 없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문화적 중재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깊이에 있어서의 일치에 있다.” Ibid., 313.
사실상 기독교정체성은 단순한 신조보다는 관계적이며, 실존적이고 교제적인 삶의 살아있는 방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3. 변선환 신학의 파라다임 전환의 성격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변선환 신학의 성격을 드러내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된다. 이를 요해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상증세 (anomalies)에 대한 각성 - 선교사 신학과 전통신학이 제기하는 프톨레미적 종교적 세계가 과학기술, 종교학, 인구의 대량이동 등으로 인한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로서의 하나되는 지구촌이라는 새로운 우주의 경험으로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의 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변선환 전집 1권, 17면.
이러한 세계사적 요인이 ‘독백의 시대에서 대화의 시대’ Leonard Swidler, John Cobb, Paul Knitter, Monika Hellwig, Death or Dialogue? From the Age of Monologue to the Age of Dialogue (London, Philadelphia: SCM Press, 1990).
로의 이전이라는 신학적 루비콘 강을 건너게 하는 사건이 되었다.
이는 현대의 형이상학, 윤리학, 심리학등에서 실재, 나, 삶에 대한 이해가 바뀐 것에도 연루된다. 즉, 기존의 진리개념이 절대적, 정적, 배타적인 이해에서 역사주의(Leopold von Ranke), 지식사회학(Karl Mannheim), 언어학(Ludwig Wittgenstein), 해석학(Hans-Georg Gadamer, Paul Ricoeur)등의 영향에 힘입어 실재와 사물의 의미를 역사적, 의도적(intentional), 관점적, 해석적인 입장에서 인식자(knower)와 인식된 것(the known)이 상호 관계적, 대화적이라는 인식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심리학(Jean Piaget, Erik Erikson)에 있어도 자아의 정체성은 상호성, 관계성, 대화에 기초하며, 자아초월과 자아실현은 타자에 대한 이해능력과 관계되어 있음을 밝혀내었다. 이러한 형이상학과 심리학의 입장은 결국 윤리학도 인간의 책임문제를 타자의 기대와 필요에 대한 상호관계성에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재(reality)에 대한 새로운 변수로서 상호성(mutuality), 관계성(relationality) 그리고 대화(dialogue)의 요소가 삶에 대한 인식론적 지평을 바꾸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세속화를 통한 삶의 허무주의에 대응하는 전통종교의 무력성과 이데올로기, 지구화로 인한 새로운 사회적 충격과 빈곤화, 그리고 핵전쟁의 위협 등의 급박한 전 지구적 문제들(global issues)은 한 종교, 한 집단의 노력을 넘어 전 인류 공동의 책임성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변 박사는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제 진리에 대한 명제적 이해, 진리주장의 선포와 변증(orthodoxy)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한 공동 정행(collective orthopraxis)이 요구되어진다는 것이다. 변선환 신학은 이렇게 현대적 상황이 안고 있는 두 이상증세-실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전 지구적이고 긴급한 문제의 도래-에 대해서 기존의 전통신학이 새로운 상황에 대한 신학적 상관성(theological relevance)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전집 7권, “인간화를 위한 공동체” 273면.
2) 기존 모델이 가진 역기능의 계속적인 위기 - 신학은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정치·문화적 상황(context)과 연관되어 있다. 기존의 전통적 선교신학체계가 새로운 상황의 도래에 대한 신학적 상관성의 상실이라는 일면을 넘어서서 기독교가 서양의 식민주의와 문화적 제국주의의 침탈과정에서 그에 편승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는 신학의 식민주의와 비인간화에로의 역기능에 대해 변선환은 주목한다. 전집1권,“종교간의 대화 백년과 전망”
이는 그동안 기독교의 절대성 주장에 숨은 기독교의 승리주의와 개종운동이 과거 유럽에서 유태인학살 그리고 동양에서의 식민주의라는 역사적 과오를 눈감게 하였다는 반성과 더불어, 동양의 침탈에 대한 기독교의 어두운 역사의 청산에 대한 아시아신학자로서의 자성이 변선환 신학에 나타난다.
서구 식민주의 배경으로 하여서 너무나도 쉽게 주장할 수 있었던 개종주의 선교라는 배타주의 신학의 패러다임은 오늘날 선교사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시대착오의 원죄가 되었다. 성육신의 사건, 신의 인간화의 사건은 절대자이신 하느님이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버리고 상대화하였다는 놀라운 사건이다. 유대교 문화권 속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무수한 세계 종교들이 다원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아시아 종교와 한국 종교 속에 들어오셔서 사랑으로 관계하고 대화하면서 인간 기초 공동체를 세우는 구원의 역사를 지속하고 계신다. 전집 7권, 273면.
종교의 역기능의 예는 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맹목적인 경직화된 근본주의로 인해 종교의 이름으로 “인종차별, 성차별, 종교차별, 종교재판, 마녀사냥, 제국주의, 대량학살”이 벌어지고 있고 이러한 현상의 뿌리는 자기종교에 대한 배타적 주장이 만들어 내는 “교만, 불신, 편견, 증오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전집 1, 31면.
기독교의 배타적 절대성의 주장은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역기능을 오늘도 수행하고 있고, 서구문화의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적 주체성의 자각상실이라는 문제의식을 간과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변선환은 주장한다. “악마는 밖에만 있지 않고 우리 안에도 도사리고 있다.” 전집 1, 383면
따라서 변선환은 종교의 역기능에 대한 자기비판과 참된 휴머니티를 각 종교가 회복하여 시련위에 선 지구촌의 문제를 직시하여 세계평화에로의 대화와 협력을 하는 패러다임 전환의 모험을 우리는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3) 새로운 신학적 훈련공동체의 형성 - 변선환의 진술에 의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승리주의의 굳게 닫힌 문이 열리는 사건이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난 것은 칼 라너의 신학적 입장이 반영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의 “익명의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의 시작으로서, 이는 선의를 가진 타종교인도 신의 은총이 임재한다는 입장선회에서 본다. 이러한 성취주의적(inclusive) 입장은 개신교가 WCC의 뱅쿠버회의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포괄주의 입장속에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물꼬가 트이고, 결국 1977년 태국 치앙마이에서의 “대화지침”속에서도 포괄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1988 WCC 스위스 바아르(Baar) 대화모임을 통해 나온 1990년 바아르 선언문에서야 포괄주의를 넘어서서 성령중심의 종교다원주의 모델이 도입되면서 에큐메니칼운동은 새로운 “신학적 루비콘 강”을 건너는 상황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전집 3, 70면.
90년에 바아르 선언은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신학 작업의 중심과제로 삼는 일군(一群)의 신학자들의 창조적 열정과 헌신의 결과였다. 변선환은 80년대에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훈련을 추구하는 공동체들과 더불어, 열려진 신앙의 우주속에서 기독교 정체성을 찾는 문제와 씨름하게 되었다. 전 지구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신학공동체속에서 변 박사는 대화를 통해 두 가지 흐름을 자신의 신학 작업에 구체화시킨다.
첫째는 제 1세계 신학자들이 가진 종교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우주에 대한 각성과 그 신학적 방법론과의 대화이다. 존 힉, 한스 큉, 슈버트 옥덴, 존 캅, 데이빗 트레시, 폴 니터, 레오날드 스위들러 등의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에 대한 관심에 주목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종교다원주의의 도래에 따른 새로운 신학적 반성으로서 기독론의 문제(예수의 독특성문제), 구원과 진리평가문제, 대화와 지구공동체형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이들의 신학적 작업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변 박사가 아시아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인 라이몬 파니카, 스탠리 사마르타, 린 드 실바, 아로이스 피에리스, D.T. 나일스, 기타모리 가조, 야기 세이치 등의 신학 작업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제 1세계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이 타신앙, 타종교를 대화의 대상(object)으로서 보고, 낯선 자인 그들을 동료화(befriending)하는 작업에 아직 머무르고 있어서 그 중심에는 기독교적 자아중심의 신학적 확장이라는 작업의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세아 신학자의 작업들은 종교다원주의가 새로운 실재로서의 경험이 아닌 이미 자기 문화속에 오랫동안 수육된 전통이었고, 서구의 신학적 포로로부터 탈출하여, 이미 자신의 문화속에 존재하는 다종교·다문화에 대한 재각성이라는 창조적 변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타신앙·타종교가 더 이상 낯선 자가 아닌 자기 속에 있는 또 하나의 자기정체성의 일부로서 살아왔기에 “나”와 “나 아님” 혹은 “그러함”과 “그렇지 아니함”을 동시 포괄하는 문화적 인식론(예를 들어 ‘즉의 논리,’ ‘렘마의 논리’)의 입장에서 종교적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고 주체(subject)로서 끌어들이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신학적 주체성이라는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문화와 복음의 문제를 ‘토양’과 ‘종자’가 아니라, 동양에 의해 기독교 복음의 서구양식도 변화를 받는 ‘접목’으로 이해하는 신학적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4) 새로운 패러다임과 더불어 달라진 실재감각 - 패러다임이 달라지면 그에 따라 실재에 대한 이론, 방법, 평가가 달라진다. 즉, 새로운 실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라는 우주에 있어서는 기독교의 자기 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절대성에서 본 타신앙·타종교에 대한 저주와 투쟁이라는 승리주의자의 관점이 변화된다. 타 종교안에서도 자기중심(self-centeredness)에서 실재중심(reality-centeredness)으로의 존재변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한 공동복지와 사랑의 지구촌락에 대한 새로운 헌신이 생기게 된다.
타자와의 관계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갱생된 자아정체성을 회복하면서 길벗으로서 종교적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새로운 진리체험에 대한 신앙의 역동성이라는 창조적 신학작업에 대한 역동성을 얻게 되었다. 변선환은 새롭게 얻은 기독교인의 자아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밝아오는 대화의 시대에서 진리는 더 이상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이거나 독백적이거나 배타적일 수 없다. 진리는 비절대적(상대적)이며, 역동적이고 대화적이며 관계적이다. 경험된 진리, 개념으로 명제화된 진리(교리)는 역사성과 언어의 한계성, 사회와 문화의 하부구조에 의하여 제약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화의 시대에 살아 갈 수 있는 개방적인 새 사람, 진리의 역사성과 함께 진리 체험과 그 표현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를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종교인은 타자를 적으로 보지 않고 진리의 길에 나선 길벗으로 보며, 서로 배우고 이해하며 자기 생각을 비절대화하고, 인간 관계를 가질 줄 아는 대화적 사고, 비판적 사고의 세계에서 살아갈 줄 아는 새로운 삶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 1집. 23면.
선교는 이제 타자의 개종이나 자기 종교의 확장이라는 정복이 아니라 샬롬안에서의 교제와 샬롬의 증거 4집, 202-203면
이다. 또한 신앙과 사랑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동일시의 차원으로 이해된다. 즉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 것이며 예수가 행한 무한한 사랑의 가능성에서 제자들은 신의 현재를 보았기에 4집, 207면. 변선환이 신앙과 사랑을 동일시하는 성서의 근거는 요일 4:7-8 구절,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라는 구절과 막2:1-12의 중풍병자를 데려와 지붕을 뚫고 내리는 그의 친구들의 사랑의 행위를 보고 살아았는 신앙을 보았다는 구절의 인용에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랑과 고백의 언어-명제적 언어가 아니라-가 가능하였다고 변 박사는 주장한다. 사랑의 교제를 통해 이제 종교적 타자는 낯설은 이방인이 아니라 서로 배우는 ‘길벗’이 된다. 변 박사가 교실에서 자주 인용하였듯이 “기독교인이면서 되어져가는 불교인”(라이몬 파니카) 혹은 “나는 좋은 기독교도가 되기 위해서 불교를 배우고 좋은 불교도가 되기 위해서 기독교를 공부하고 있다”(빌헤름 군데르트)라는 예에서 보듯이, 상호보완과 상호변혁이라는 대화의 삶이 열리는 것이다.
4. 변선환 종교해방신학의 몇 가지 중심사상과 그 미래
수업시간에서 변선환의 강연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수없이 공중에서 낙하산 떨어뜨리듯 내리붓는 여러 신학자, 종교학자들의 사상들에 대한 소개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징검돌’을 계속해서 놓는 그의 작업을 주목하다 보면 각기 다른 징검돌의 놓임에도 불구하고 그 진행에 있어서 일정한 방향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가 소개한 불트만, 야스퍼스, 후리츠 부리로부터 시작해서 여러 다원주의 종교신학자들, 그리고 일본의 불교학자들에 대한 강의의 이면에는 변 박사의 신학이 일정한 방향으로의 흐름과 성장이라는 과정을 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본인이 그의 말년에 본 퇴색하였지만 그가 변함없이 수년을 신고 온 그의 “낡은 구두”라는 상징이 뜻하는 바이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그의 신학의 여정의 목표와 여정의 중심의도가 무엇이었을까? 본인이 그로부터 감동을 받은 것은 그의 신학적 지식의 전문성과 광대함보다는, 오히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기 전 그의 영혼 안에서 불붙고 있는 그 어떤 지향점을 향한 열정(pathos)에 의한 감염이었다. 여러 다양한 신학의 내용이전에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신학의 관점과 자세에 대한 이끌림이 있었고 이 관점과 자세는 그의 신학의 중심 주제로 발전해 나갔다고 믿는다. 본인이 주목하는 몇 가지 되새겨야 할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1) 자유체험과 인간화를 향한 정통실천(orthopathy)의 우선성
변선환의 신학적 정체성은 한 중심축을 가진 세 개의 동심원인 웨슬리신학, 에큐메니칼신학 그리고 종교다원주의신학을 관통하며 형성되어 있다. 그의 근본적인 신학적 기반은 바로 웨슬리전통이 가진 경건(종교체험)과 사회적 성화의 통합이며, 이를 달리 말하자면 자유와 은총의 내면적 체험이라는 자기초월의 영역과 정의를 위한 행동으로 표현된다. 이는 웨슬리안으로서 올더스게이트의 체험을 중시하고 그 체험이란 신 앞에서의 주체적 변화(인격적인 변화)와 사람들 사이의 정의와 사랑의 새 질서 창조(객체적 실제적 변화)라고 해석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전집 4권, “감리교 신학과 교리,” 178면.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만물의 우주적 갱신과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적 경륜에 새로운 생각과 새 뜻과 새 정열을 가지고 참여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크리스찬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교리와 정통실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 올바른 신체험(orthopathy)이 올바른 실천(orthpraxis)과 깊이 관계되며 “정의와 자비와 진리의 외적 실천”이라는 사회적 성결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전집 4권, 180면.
곧 본래적 자기의 주체성 회복을 통한 영적인 통찰과 종교적 정열이 사회정의를 향한 변혁과 동료존재에 대한 책임성을 자각하는 인간화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정통경험(orthopathy)의 신학은 그의 다원주의 신학에 있어서 종교성과 사회적 해방을 포괄하는 패러다임으로서의 종교-해방 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정통경험은 영적인 통찰의 회복이라는 점에서 정론(orthodoxy)과 이어지며, 사회적 성결을 위한 정행(orthopraxis)과도 연결되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역사적 결단의 행위를 상실한 파니카와 야기 세이치의 우주론적 신학에서 보는 내면성 중심의 신학이나 종교성없는 사회적 실천위주의 정치신학에 변 박사가 일부는 동조를 하면서도 이들을 비판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생께서 강의실에서 역설한 말이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프로테스트 곧 저항하는 것이다. 악마화하는 세력에 대한 저항이 개신교의 생명이요 특징인 것이다.” 변선환에게 있어서 신학의 언어는 궁극자에 대한 설명이나 진술을 위한 개념화가 아니라 악마화하는 세력에 대한 저항을 가져오는 행동과 태도를 일으키는 수행의 언어이다. 그가 불트만의 비신화화를 거쳐서 야스퍼스와 후리츠 부리에 이어지는 비케리그마화의 실존론적 해석에 정열을 쏟은 것은 계시신앙의 대상화를 통해 자유와 책임적 결단의 선물이 아닌 구원의 객관적 보증으로서 그리스도의 신화가 이용되는 우상화에 대한 철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라는 과거사건을 신적인 객관적 표증으로 의존하는 것은 인간의 가능적 실존으로서의 본래적 자기로 돌아가는 성숙의 길을 막는다는 점에서 우상화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선환은 그리스도사건을 “인격적 책임성의 무제약성을 나타내는 신화적 표현”이라고 본 후리츠 부리의 견해에 같이 한다. 변선환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무제약적 책임성의 자각이라는 범례로서 보며 이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적 실존인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신화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진리, 책임적 자아와 책임적 공동체의 진리다. 그러기에 무제약적인 책임성이 있는 곳, 사랑이 있는 곳, 그 어디에나 그리스도가 계신다. 종교다원주의와 한국적 신학, 30면.
변선환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실존적 자유이자 사회적인 자유로서 인간의 전체적 해방과 인간성의 회복을 지향하는 것이다. 전집 4권,199면.
하나님 말씀인 복음은 신조나 교리속에 고정화되고 추상화될 수 없고 역사속에서 인간화라는 사건으로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집 4권, 204면.
교리속에 고정화하거나 추상화할 수 없는 종교적 진리의 속성에 대한 변 박사의 유명한 농담이 기억난다. 선불교의 불립문자 견성성불이라는 진리체득방식에 관심을 갖은 가톨릭 영성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에게 한 승려가 머튼에게 물었다고 한다. “진리의 직접체득을 위해 불교에서는 살불살조,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시는 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리스도를 죽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말에 머튼도 감히 대답을 못했다는 것이다. 선생께서 이 일화를 당시 우리에게 던져준 것은 자유체험과 궁극성에 대한 집착간의 딜레마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
2) 구원중심(soterio-centered)의 종교해방신학
선생의 신학여정은 80년대 전반기와 후반기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엿보인다. 80년대 초기에는 엘리트 종교다원신학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고등종교의 진리주장에 대한 지적대화, 다원주의적 신학방법론 등에 관심을 보였다. 소위 존 힉, 폴 니터 등에 힘입어 “신중심적 비규범적 기독론”에 대한 국내 소개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이상학적 대화의 흐름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세계종교회의의 지구윤리형성과 “민중해방을 지향하는 민중불교와 민중신학”의 논문이 보여주는 것처럼 가난한 자의 고통과 해방 그리고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종교간의 대화와 협력이라는 실천중심, 구원중심의 신학 작업의 초점이 옮겨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곧 somebody의 엘리트적 내적대화에서 nobody라는 침묵하는 타자를 끌어안는 종교해방신학을 구체화시키는 새로운 변신이었다.
선생의 “민중해방을 위한 민중불교와 민중신학”은 그의 관심이 기존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적해석의 울타리를 넘어, 기득권자의 현상유지로서의 지배이데올로기의 수단이 된 종교의 기능을 비판하고, 민중의 고난에 책임 있게 응답하기 위해 해방의 영성체험과 사회변혁의 통전적 일치를 강조하는 새로운 신학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기독론은 선포된 자로서의 등극된 높이의 기독론이 아니라 민중으로 변모한 예수, 민중인 미륵에서 보듯이 선포자로 오신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인 것이다. 선생의 구원중심의 종교신학방법론은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해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용화세계(미륵하생신앙)의 구현에서 보여지듯 종말론적 사건의 내역사화(inhistorization)속에서 궁극초월의 경험(그리스도 혹은 미륵의 현존)이 가능하게 되는 구원중심의 신학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구원중심의 신학은 언제나 교회, 사찰의 좁은 영역이 아닌 세계, 고난당하는 민중의 삶의 자리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예를 들어 변선환은 아시아 지역의 여러 불상의 모습을 구별하고, 동남아시아의 평온한 모습의 열반상, 중국의 대웅전안의 장엄한 모습의 좌불, 일본의 입상의 관음불과는 달리 한국의 불상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이 한국에 오셔서는 자연석에 급하게 새겨진 미륵불처럼, 가난한 민중, 학대받는 민중과 함께 사찰 밖으로 쫓겨나서 학대받으며 고문당하고 있다. 산간이나 전답에 버려져서 누워 있는 와불이나 거꾸로 땅 속에 하체가 박혀 있는 매몰불은 바로 이 지역, 구 백제 땅에 살고 있는 민중의 모습을 닮고 있다. 전집 1권, 370-1면.
성전의 영문밖의 고난의 길을 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찰밖의 와불이나 매몰불로 나타나 있는 미륵하생신앙은 바닥(the bottom)과 주변(the margin)을 구원사건의 중심(recentering of the margin)으로 변모시킨다. 이는 선생이 구원의 안전한 벽이라는 종교적 울타리에서조차 내버려진 존재, 곧 nobody로서 존재하는 바닥존재들을 향한 인간화라는 과제를 철저한 추구한 결과가 드러낸 새로운 경지인 것이다. 그가 한때 학장으로서 자가용을 타고 다니며 발로 땅바닥을 접촉하지 못했었다는 겸손한 고백, 사모님께서 알면 혼날 것이라고 하면서도 우래옥 냉면집 주변의 리어카장수들과의 소탈한 대화, 종묘의 여러 꽃들 속에서 이미 존재하는 화엄과 하느님 나라의 상징화에 대한 이야기속에 그는 자신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바닥과 가에서 “깊은 차안성”의 신비와 사회변혁을 위한 에너지의 모태를 보고 있었다. “비인간화된 사물, 아무것도 아닌 놈(no body)”의 장소가 “새로운 세계의 개벽을 알리고 증거”하는 중심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비유한 베트남의 승려, 틱낫한의 “전화(戰火)의 바다속의 연꽃”에 대한 비유가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 1집, 380면.
무(nothingness)체험이 오히려 충만함(fullness)의 현시의 장소가 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nobody는 구원의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자 구원자의 자기현시의 통로가 된다.
3) 진리이해와 공동작업을 위한 수단으로서 대화
대화는 선생의 신학에 있어서 진리를 이해하는 방식이자 통로이다. 대화는 인간의 본래적 자아의 정체성이 공동인간성이라는 것과 모든 존재에 현존하는 신의 보편적 사랑의 수여에 대한 각성에서 출발한다. 선생은 말한다. “대화의 참된 근거는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공동인간성과 함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속적인 사랑의 보편성이다.” 제 3집, 143면.
대화는 지적인 거리(intellectual distance)를 두고 타 신앙을 이해하는 '나-너’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상호간에 “공동 경험, 공동 과제, 공통된 확신, 그리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공통의 환상” 제 4집, 178면.
을 나누게 된다는 점에서 변혁된 공동인간성이라는 성숙된 ‘우리’의 관계로 이끌게 된다. 선생은 주장한다. “그리스도교가 타종교와 만나고 대화한다는 것은 종교를 인간성 회복을 위한 해방의 누룩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아울러 그 종교의 영성을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제 4집, 180면.
이런 점에서 대화는 서로의 신앙을 순화시키고 풍성하게 하며, 공동인간성을 위해 각자의 에고속에 있는 고립된 폐쇄성을 깨어 에고중심에서 실재중심으로 변혁시키게 된다.
대화는 진리의 이해와 그에 따른 자유에로의 열린 개방성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인격적 경험을 가져오는 진리체득의 길인 동시에 공동인간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은 같이 사는 지구촌의 긴급한 공통과제에 대한 협력이라는 책임과 헌신에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 대화는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서 실제생활에서 벌어지는 고난과 갈등을 해결하는 사랑과 정의의 인류공동체 형성이라는 “실천중심, 해방중심, 그 나라중심의 다원주의적 대화” 제 1집, 335면.
가 요청되는 것이다. 이는 자유, 정의, 민주주의에로의 원동력이 초월자와 관계된 휴머니티와 도덕성에 근거한 세계종교의 대화와 협력에 딸려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긴급한 생존과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하는 전 지구적 문제 앞에서, 그리고 지구촌의 인간화의 과제를 위하여 대화와 협력을 통해 동료의식을 갖는 것은 현 상황에서는 절실한 과제인 것이다.
4) 저항과 해방의 힘으로서 신학적 상상력
종교적 신념은 그에 따른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는 종교가 가치판단, 세계관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변선환을 포함한 존 힉, 레오날드 스위들러, 폴 니터 등이 주장하였듯이 정통적인 기독교의 배타적 정복주의는 예수라고 하는 역사의 일점에 신의 계시를 독점화시킨 “예수의 독특성(Uniqueness of Jesus)"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신학적 전략은 타인들의 우주(the universe of Others)속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해치는 예수의 독특성에 대해 다르게 이해하고, 이 독특성의 언어를 초대교회의 고백과 사랑의 언어로 해석 연인간에 사랑의 언어인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의 예에서 보듯이 겉으로는 배타적 언어로 보이는 이 문장의 속뜻은 아름다운 자에 대한 사실판단의 진술이 아니라, 연인인 상대에게 느끼는 나의 사랑의 진실을 나타내고 있는 고백의 언어인 것이다.
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충분히 살려내면서도 다른 한편 타신앙에 열린 마음을 갖는 신학 작업을 전개하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악의 실재 앞에서 기존의 신념체계가 무력할 때 자유와 해방의 경험이 어떻게 가능하며 그 해방의 도구가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다원주의 신학자들이 그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의미, 궁극적 삶의 요체를 우리는 신에게(혹은 그리스도에게) 부여한다. 신은 의미경험, 삶의 궁극성으로 경험되는 모든 실존적 가치의 근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며, 우리에게 ‘어떻게’ ‘무엇을’ 살 것인지를 방향을 지시한다. 따라서 신(그리스도)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신의 예정론과 전지전능성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의 주도권은 신에게 있고 악의 문제도 신에게 돌아가 나의 결단은 이차적이게 된다. ‘저 위 하늘에 계신 신’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떨어져 지켜보고 계시다가 사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심판을 하시기에 이 세상에서의 악에 대해 인내를 신은 요구하신다. 여기서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우리가 행동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종교적 신념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의 궁극성에 관한 모든 신념을 신/그리스도에게 귀결시켰다면, 신/그리스도에 대해 다른 이해, 다르게 보기는 우리가 궁극적이라고 믿고 그래서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한 신념체계를 흔드는 ‘틈’과 ‘사이의 공간’을 허락한다. 쿤이 말한 것처럼 패러다임이 달라지면 실재도 달라지는 것이다. 궁극적 존재를 다르게 본다는 것은 다르게 보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저항’과 ‘변혁’의 에너지와 출구를 허락하는 것이다. 궁극성의 이름으로 굳게 구조화된 장벽에 구멍이 뚫리면서 ‘열린 밖,’ 새롭게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된다. 새로운 상상력은 새로운 실재를 불러들인다. 여기서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은 ‘자유혼’의 형성을 위한 무기가 된다.
변선환 자신은 신학과제에 있어서 다루기에 가장 무섭게 생각하고 가장 어려운 적을 ‘편견’과 ‘독선’이라고 믿었으며 이는 근본주의자들의 태도처럼 종교적 신념체계로부터 지지받는다고 생각했다. 타자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 가는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근거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가장 궁극적인 것에 대한 태도와 관점을 내포하기 때문에, 궁극적인 것(신/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없이는 ‘편견’과 ‘독선’에 대한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 변선환 신학의 새로운 상상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