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만나는 하느님 :: 2006/03/12 23:13
2006년 3월12일 본문: 출 33,18-23
“그러나 나의 얼굴만 보지 못한다...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보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
♧ 위로 향하는 영성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지금까지의 신앙의 주류 모델이 되었던 성서의 한 모델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것은 야곱의 사닥다리 (창 28, 10-19)에 대한 꿈이다.
그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집으로부터 추방되어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빈들에서 밤을 맞이하면서 돌베개로 잠을 잔 그곳에서 사닥다리 꿈 체험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을 그는 하느님의 집 -벧엘이라 부르게 된다.
이 체험의 원래의 성격은 사실상 후손지향적, 땅-지향적이며 대지와 밀착된 꿈이다. 그리고 나중에 얍복강가에서 다시 나오듯이 뒤로 쳐진 자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 기독교 신앙전통에서는 그리스적 사고(일자와의 일치)와 제국종교가 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초월적인 하느님을 경험하기 위해 대지에서 벗어남으로 변질된다.
예) 하늘, 위의 추구. 끊임없이 위의 것을 사모함
하느님과의 교제는 상승의 길을 통해서이다.
한계단한계단 올라감이 신앙의 단계이다.
하강은 선으로부터 멀어짐, 결여, 추함, 어둠을 뜻한다
명상/기도는 위로 올라감, 하느님에게로 올라감을 의미하며,
자비는 아래로 내려감, 이웃에게로 내려감이지 하느님께로 내려감은 아니다.
신앙의 과제는 따라서 위로 향한 완전의 추구에 놓여있게 된다.
그 결과로 소수 영적 엘리트가 중요시 된다. 그러나 원래 이는 야곱과는 상관없었다.
당신은 어디 단계에 있는가라는 신앙의 척도에 대한 대답의 길은 오르기의 영성이다. (많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좌절이 오르기를 합법화함, 실패가 참을 증거함-그러기에 아무나 가는 것이 아니다. 희생의 대가가 요청된다. 많은 힘의 소모를 필요로 한다.)
이는 점차 위를 성역화하게 되며 꼭대기는 거룩하고 이 꼭대기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와 상호작용을 가름하는 척도/규범이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은 내려 오셨다고 했던 전통도 있었다. 사도바울의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의 겸비, 케노시스 사상. 하락의 신에 대한 그의 주장은 그러나 실제로 주류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 앞으로 향하는 영성
<위로향함>의 신앙전통은 근대의 이성과 계몽주의, 역사적 진보주의 등의 영향으로 ‘앞’으로의 신앙관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위로향함의 신앙관과 방향만 바꾸어졌지 그 내용은 똑같은 것이었다.
가나안으로 진군하는 하느님으로 이해된 출애굽의 하느님은 진군하고 앞으로 가는 하느님이 아니라, 함께 하심 amongness 의 하느님을 의미했다. 전진과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 예로 2-3주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전진이 아니라 함께 하심이 초점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펼쳐지는 앞으로 향함이 주는 바가 무엇인가? 무서운 질주, 속도에 대한 어지럼증. 브레이크 없는 발전에 대한 숭배. 그러나 뒤에 남겨놓은 것은 무엇인가?
고속도로위에 쉽게 보는 동물들의 목소리 없는 죽음들. 고속 질주하는 문명의 뒤에 남아 있는 거대한 쓰레기와 상흔들과 사회적 기반의 해체.
♧ 대안으로서의 <뒤>
첫 번째로 <뒤>의 문제를 의식하게 해 준 사건은 조령관문의 고사리마을에서 살 때 그곳 분교가 되기 직전의 초등학교 운동회의 경험이었다. 사회자가 장중을 흥을 돋우기 위해 경기마다 해설과 독려를 하던 중이다. 오후 늦게 남은 경기중 줄다리기 경기를 설명하면서 <뒤로 가야 이기는 경기>라고 소개할 때, 여러 가지 실패의 경험으로 영혼이 몸살을 앓고 있었던 때여서 그 말에 내 영혼 전체가 진동하는 충격을 경험하였다. “지금까지 모든 경기가 다 앞으로가야 이기는 경기였는데, 이번 경기만은 뒤로 가야이기는 경기입니다...”
아이들, 아낙네들, 청년들, 노인들 모두가 어울려서 뒤로 끌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내면에서 어떤 위로와 희열이 범벅이 되는 감동을 경험하였다.
* 등산의 경험
나의 등산행은 일종의 수행이어서 누구와 좀처럼 같이 가지를 않고 혼자간다. 그리고 등산은 목표를 향해 감보다는 전체를 느끼는 것이며, 이는 때때로 멈춰서 뒤로 돌아다 보기를 통해 가슴을 울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 필라델피아 시내의 모습의 특징
유학동안 필라델피아에서 경험한 대조의 경험-보이는 곳으로서의 앞, 안보는 곳으로서의 뒤의 차이. 보이는 정면은 너무나 그럴듯하고 번화가로서의 화려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뒤로 두 블록만 가보면 무너진 건물, 온갖 낙서와 쓰레기. 퇴락한 모습이 너무나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앞의 상가들과 뒤의 이 빈곤한 흑인동네의 모습의 대비에 대한 인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만난 성서의 뒤로 만나는 하느님.
앞/정면이 초월, 영광, 장엄함, 신비, 풍부함, 무상을 넘는 불멸의 광희를 말한다면 뒷면은 어둠, 비신비, 더러움, 약함, 육의 실재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위>와 <앞>에 대한 매력을 잃고 나서부터 나는 뭔가 뒤에 쳐져버린 내 자신을 발견하였다. 뜨거운 열정을 지닌 목회에 대한 매력을 못 느꼈으며, 그렇다고 학위 받은 후 유명한 학자로서 기대의 꿈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모르나 시민사회에 기웃거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앞으로 향해감이 무엇을 뜻하던 간에, 일단 나의 인생이 그 track에서 벗어남으로 문득 끈을 놓고 나서부터는 사는 것이 이중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 하나는 산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아서 무거운 중압을 느끼는 것과 약한 것에 대한 주목과 관심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신이 은폐된, 침묵하는 삶의 현장에 눈길이 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평화의 영역으로 내 발이 들어서게 된 동기이다.
-한때 열정을 품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정면으로 걸어가던 예수의 제자들 중,
이제는 등을 대고 뒤를 향해 걷던 엠마오의 제자들이 있었다.
열정이 기억으로 바뀌고
활활 타오르던 영혼의 불길이 타버린 재로 변화되어, 어떤 꿈과 환상이 거품처럼 걷히고
비로소 자기의 일상의 세계가, 지루하고 무거운 일상의 무게가 누르는 시간의 압력을 받게 되었다.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기억과 언어만이 남은 그 시간과 공간의 무거움 속에서,
살아봐야지 하는 어떤 삶의 격려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필라델피아 땅속 지하철안에서 사는 두 참새에 대한 기억들.
어떻게 그리로 들어왔는지 나갈 재주 없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주는 빵 부스러기, 간식부스러기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같다.
저 너머에 대한 기대를 잃고 나서도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는 힘과 생의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 해답으로서 나에게 다가온 일종의 계시 - “뒤로 보는 하느님” “뒤로 열려있는 하느님.”
위로 향한 초월이 이제 의미가 없어져 버린 지가 오랜 이 생의 삶에서,
또한 어느 해방신학자들처럼 미래로서의 초월에 대한 기대도 없어진, 강한 생의 무거운 압력 속에서 <위의 하느님>도 <앞의 하느님>도 아니라 <뒤의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 엠마오의 두 제자이야기:
땅거미가 찾아들고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민박을 하면서
그 이상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힘들어하는 동료를 보고 강한 연민이 솟구치며 서로를 품을 수 있는 각성이 일어난다. 나의 일, 나의 문제를 넘어서서 지치고 낙담한 동료가 눈에 들어오면서 일종의 새로운 각성이, 생에 대한 의지가 솟구치게 된다.
저 하늘로 날아갈 수 있는 길이 닫히고, 지하철에서 살아가는 그 갑갑함이랄까, 제한된 자유의 운명속에서도 동료가 있고, 우연히 놓아주는 빵 부스러기라는 선물로 인해 우리는 생에 대한 격려를 받는다.
No Exit, 출구 없음의 삶의 공간 안에서도 선물로 주어진 동료, 선물로 부여받은 생이라는 자각이 우리의 생을 지탱시키고 의미를 부여한다. 아무런 초월과 은총의 경험이 부재된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지치고 낙심됨으로 속알이 터져나오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앞에 있지 않다. 뒤에 계시다. 그래서 우리가 못 보는 것이다.
정문앞 큰 거리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화려한 행차를 하시지 않는다.
뒷골목으로 오셔서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다.
쉽게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가볍게 생각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그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가 된다.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는 앞의 말을 다시 강조하며 뒤에서 다시 설명하는 풀이말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그 앞의 “내 모든 선한 모습”은 “나의 얼굴”에 대응되고, “돌보고 싶은 자를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를 가엽이 여김”은 ‘뒷모습’의 대응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돌보아주고 싶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인간 실존의 상황’이 신의 뒷모습이란 말인 셈이요, 우리가 신의 뒷모습을 통해서만 신을 대면한다함은 그러한 인간실존의 상황들-어둠, 잊혀짐, 버리워짐, 낮음, 가난, 상처받음, 눈물-이 신을 대면하는 성소가 됨을 의미한다.
앤더슨이란 성서학자가 쓴 “드라마로서의 성서”라는 책에는 신이 무대를 만드시고 구원의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많은 신앙의 증인들을 스포트라이트로 비추시다가 갑자기 스포트라이트를 ‘나’에게 비추며 “이젠 네 차례다. 무대위로 올라와 구원의 드라마를 연기하라”는 게 성서의 근본 메시지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무대 위, 혹은 무대 정면에 앉아 있는 것조차 하나의 특권/힘을 지닌 자에게 -경제적이든, 문화적이든 상징적이든- 속한 것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무대 뒤/밖에선 생존의 고역, 잊혀짐, 이름 없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삶이 존재하는 것이다.
무대위의 연기자들은 -주연, 조연, 혹은 단역이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남들이 자기 삶에 주목하는 특권을 누리며 하다못해 무대앞 관객들조차도 그것을 보고 즐기며, 최소한 입장료를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특권층인 셈이다. 그러나 무대 뒤/밖은 다른 현실이 존재하며 잊혀진 영역인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무대밖/뒤의 삶의 영역에 매우 민감하여 교회 안에 들어서는 것, 세례를 받는 것이 구원을 보장해 주고 이것이 교회 밖의 사람들과 나를 구별하게 한다면 차라리 교회밖에서 추방된 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심정을 신부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노동현장, 전쟁터에서 ‘추락’ ‘뿌리 뽑힘’ ‘은총 없이 살기’를 통해 ‘신을 기다리며(그녀의 책제목)’사는 일상의 수도자가 되었다.
저 너머에 대한 기대를 잃고 나서도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는 힘과 생의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위도, 미래로부터도 힘을 받을 수 없을 때, 절망하지 않고 우리의 생이 격려 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뒤>에 눈을 뜨는 것이다.
은총이 경험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내 기대나 희망이 실현될 가망이 없는 그 곳에서,
뼈아프게 저려오는 절망 속에서 어떤 낯선 자가 나와 함께 길을 이미 걷고 있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같이 가는 그 낯선 자가 그 어떤 형태로든 나의 주목을 받게 되고, 연민을 가지고 같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그에게 허락함으로서 새로운 변용을 체험한다.
--“낯선 자가 궁극자로 바뀌는 것이다”
낯설었던 뒤의 경험, 잊고자 하는 그 경험, 무너지는 그 경험이 연민으로 품고 끌어들이며 같이 묵고 가자고 벗으로 삼는 그 순간, 더 이상 그 경험은 낯선 자가 아니라 궁극자로 변모된다.
어린 왕자이야기처럼 낯선 자를 길들이고, 길들인 자에게 책임을 느끼면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평화문제를 신앙의 화두로 삼고, 쉽게 지치는 상황을 접할 때, 뒷모습으로만 신을 볼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격려를 받는다. 쉽게 무시될 수 있고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사물, 사람, 일거리에 대해 정성을 들이게 된다.
그리고 참아낼 수 있고 용납할 수 있게 된다. 힘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위로와 너그러움을 얻게 되었다. 많이 관대해지게 되고 자비를 느끼며 살게 된다.
거칠고, 연약하며, 빛 잃은 궁지의 상황 속에서 제대로 눈을 뜬다면 때로는 뜻밖의 보물을 얻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뒷모습>이다. <뒤>를 통해서도 하느님께 닿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인생일 것인가.
가말리엘 문하의 제자로서, 유대인중의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학문적 성취와 가문을 갖고 앞으로 질주하던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낙마하여 인생이 바뀌어졌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의 참상, 신앙인의 고집불통과 이방인들의 아픔, 그리고 자연계의 우주적 고통이라는 하느님의 <뒤>를 경험하면서 뒤에 있는 자, 꼴찌들을 위한 사도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경험한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풍성하다”는 체험이다.
말위에서 떨어지면서 본 그 <뒤>에 대한 경험이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새로운 실재를 열어젖혔다. 특권이 아니라 헌신의 길, 분열이 아니라 화해일치의 길, 매 맞고 강도만나며 지쳐도 일어서는 길을 얻은 것이다. <뒤>는 낙오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자리이다. <뒤>는 신에게 가장 가까운 거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