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에 의한 공감받기-자비로운 세계에 대한 확인 :: 2007/11/15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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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에 의한 공감 받기 -자비로운 세계에 대한 확인 비폭력 의사소통(NVC)은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어떠한가(가치)와 어떤 대안적 생각을 우리가 하는 가(사고체계)와 연결되어 있다. 이는 로젠버그의 말대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것으로 사는 ‘생생한 삶’의 문제이자 희소성의 논리에 근거한 경쟁과 성공을 위한 옳고 그름의 사고방식에서 ‘보다 풍성한 삶’에 기여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강력하고 자연스런 욕구이자 본성임을 간파함에 근거한다. 로젠버그가 종종 인용한 수피 신비가 루미의 말, “옳고 그름을 넘는 들판에서 거기서 우리 만나자”는 자비의 세계에 대한 비폭력의사소통의 비전을 잘 표시하고 있다. 이것은 창조영성가 매튜폭스의 자비를 영성의 근간으로 보는 것과도 상치한다. 아래는 빈 들판의 동물에서 자비의 영성의 모델을 보는 매튜폭스(그의 책, 영성-자비의 힘)로부터 영감받아 그의 이야기를 근본 의도를 살리되 내 생활경험을 통해 내용을 많이 바꾸어 보았다. 이는 동물을 통해 NVC 공감의 에너지를 얻는 예로 삼기 위함인 것이다. 대게의 NVC 수행자들은 이 제안에 무척 낯설게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공감 혹은 공감파트너로부터의 공감받기라는 부분에는 익숙하지만 이것이 좀 더 생태적인 타자들이 우리가 지닌 긍정적인 ‘느낌’과 ‘욕구’를 강화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공감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 생생한 기쁨의 표현 동물들은 행복을 추구하거나, 저장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있는 순간의 살아있음의 충만성(being fully present)의 공감능력을 통해 살아간다. 그래서 그들의 눈, 발걸음, 귀 움직임 하나하나는 그 순간과 그 공간에서 충만히 거기 있어 생생함을 그대로 느낀다. 2. 죄책을 느끼지 않는 환희 동물들은 배부른 후 남은 것을 참으로 버릴 줄 알고, 포만감 있으면 그대로 둘 줄 알며, ‘시간낭비’나 체면손상에 대한 죄책감 없이 축제를 즐길 줄 안다. 동물들은 이 순간의 강렬한 삶이 영원과 오랜 지속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의 편견을 불식한다. 난 동물들이 종종 자기 먹이를 다른 동물에게 뺏기는 순간에도 금방 포기를 할 줄 알고, 낙심하지 않은 것을 어렸을 때 보고 매우 신기해 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난 장난감이나 간식을 빼앗길 때 매우 화가나고 울음을 많이 터트렸기 때문이었다. 닭이나 오리를 때로는 잡아 죽이는 일이 벌어져서 속상해서 할아버지나 동네 사람들이 몽둥이로 개를 때리는 것을 보고 마음 아프기도 했는 데, 정작 당사자는 얼마 안지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뛰놀고 아양을 떤다. 난 그때 개들은 슬픔을 못 느끼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기 어미가 죽거나 짝을 잃었을 때 며칠을 밥 안 먹고 꿈적 안하며 울음을 내는 것을 보고 달리 생각했었다. 그렇게 앓고도 빠르게 회복하여 또 신나게 뛰어논다. 3. 놀이로서의 삶 동물들은 끊임없이 놀이를 즐긴다. 어른, 아이 구별 없이. 그리고 그 놀이로 인해 공동체는 지속한다. 그것은 너와 나의 죽음을 택일하는 승부의 세계가 아니다. 때로는 적대적이라 할 수 있는 고양이와 개도 같이 즐겁게 노는 것을 목도할 수 있다. 때로는 오리가 사나운 개 뒤를 쫓으며 개가 도망가는 광경도 목격되기도 한다. 개가 송아지를 핥고 있는 것도 본적이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강자의 심각한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노는 것은 개에게 천성적인 것인가 보다. 내가 개를 좋아하는 것도 그들이 놀이에 미쳐있기 때문이다. 위로 뛰고 아래로 구르며 달리고 뒹글고 하는 모습은 보는 이에게 조건 없이 에너지와 웃음을 준다. 상실감에서 보는 나를 치유하기도 한다. 4. 말하지 않고 의사소통하는 능력 말을 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동물들을 우릴 가르친다. 우리의 언어는 때때로 무서운 소외와 파괴력을 지닐 때가 있고 소음이 되거나 방해가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사소통은 다양하다. 벌들은 춤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물개는 몸짓으로, 새는 지저귐으로 한다. 단순히 응시만으로도 동물사이에는 의사소통이 흐른다. 단순하게 살고 침묵을 포함할수록 그들의 공감능력은 높아진다. 난 곰, 사자, 개, 뱀 등 많은 동물들이 말없이 서로를 포개어 껴안고 오랫동안 누워 있으면서 아주 흡족하고도 충만한 순간을 보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말함으로 상대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공감으로 상대를 인식하는 방법을 체득하고 있던 것이다. 말하기 전에 알아차림, 상대를 아는 것보다 이미 함께 존재함, 신호보다 오히려 바라봄으로 적절히 대응함, 상대의 감정표현에 대해 온전히 반응하기 - 이런 것들이 소통의 본질임을 동물들은 알려준다. 5. 개방성과 감수성 우리 인간들은 상대방의 표현 없이는 어떻게 반응할지를 어려워한다. 그러나 동물들은 예민한 감수성을 발전시켜왔다. 예를 들어 개들은 자기 집으로 들어가면 누가 우울하고 슬픈지 알고 사태 수습을 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몇 마리의 개를 기른 적이 있다. 내가 오는 발자국을 그는 수십 미터 집밖에서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소리와 정확히 구분하고 미리 문 곁에 와 대기하며, 내가 들어오는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다. 화가 나있을 때는 점잖게 다가와 꼬리를 흔들고, 즐거우면 더 크게 짖으며 응답한다. 내가 TV에 응시하고 있으면 조용히 다가와 귀찮게 하지 않고 옆에 누워 있는다. 지독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개고기 먹는 사람들 중에 회자된 이야기가 있다. 여름에 개를 잡기 위해 때리다가 달아나는 개를 주인이 불렀더니 되돌아오더라는 이야기다. 자기를 몽둥이로 패는 주인에게 의심 없이 다가오는 이 전적인 개방성에 대해 문득 난 놀라움을 느낄 때가 있다. 미래에 대한 저축이나 고민 없이 그들은 삶이 조건에 아주 상처받기 쉬운 상태로 있지만 그대로 자신을 개방하여 있다. 6. 아름다움 솔개가 하늘을 천천히 곡예하며 나르는 모습을 보라. 거침없이 흘러가는 강물위로 팔딱이며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그 생생한 점프와 다이빙의 멋짐을 보았는가. 호랑이나 큰 동물들의 느릿느릿하면서도 온 근육이 서로 연결되어 조화되며 기품 있게 걷는 걸음걸이, 우리 딸이 그토록 미쳐하는 말들의 근육질의 역동적인 다리의 환상적인 교차됨과 움직임. 철새들이 포물선을 이으며 날아가는 장관의 질서지음. 난 어렸을 때 지붕위에서나 나무위에서 정확하게 공중 낙하하여 착지하는 고양이의 그 유연하고도 섬세한 동작에 반해서 지금은 미안한 일이지만 시골에서 살 때 마당에서 고양이를 여러 번 하늘로 던지면서 그 고양이의 정확하고도 우아한 착지를 즐기곤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동물이 상처를 받았을 때 자기를 치유하는 조용하고도 끈질긴 몸동작이었다. 가던 차에 받혀 상처 난 발을 조용히 한 구석에 앉아 끊임없이 혀로 핥으면서도 자신의 어린 강아지들이 보채는 엄마젖싸움에 스스로의 품을 드러내고 있는 그 모습 속에는 아픔을 넘어서 그 것을 대해 스스로를 치유하는 숭고한 미학적 운동을 본다. 7. 관능적인 것의 영적 깊이
8. 대지와 공간에 대한 밀착감 우리는 하늘과 추상적인 이념에 진리의 개념을 둔다. 그러나 동물들은 이와는 반대이다. 대지가 바로 그들의 삶의 터전이고 공간이 그들의 즐거워하는 대상이다. 그들은 대지 지향적이다. 대지와 공간을 선물로 살아간다. 변형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즐긴다. 그 대지가 주는 풍성함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자기 집을 짓기 위해,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고 산을 허무는 일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그 공간을 집으로 여긴다. 9. 유머 감각 동물들은 삶의 근본적인 변증법과 역설에 통달해 있다.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 따스함과 추위, 낮과 밤이 지닌 이중적인 질서에 대해 충분한 교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익살을 부릴 줄 안다. 강아지, 고양이, 도야지 등이 끊임없이 벌이는 실수와 실책들을 얼마나 익살스럽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먹이사냥의 실패에도 모유다툼의 실패 속에서도 그들은 익살을 부린다. 난 종종 고양이가 먹을 작은 동물들을 입으로 물고 와서 그대로 먹지 않고 놀다가 놓치는 일을 목격한 적이 많다. 그것들은 별다른 상처 없이 그대로 달아났던 것이다. 10. 고요한 존엄성 동물들은 연약함속에서도 그 나름의 독특한 존엄성을 지닌다. 이는 동물 특유의 생에 대한 감각과 그들의 생에 밀착한 특성에서 나온다. 그들은 홀로의 침묵 속에 익숙하며, 침묵 속에서 아침의 시작과 저녁의 끝을 종료하는 데 있어 특유한 본성적인 숭고한 몸짓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난 개들이 침묵 속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서 있는 모습이나, 보름달에 특유하게 짖어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고양이도 유순하면서도 잠자코 앉아 있는 모습 속에서 범접하기 어려운 그 어떤 위엄을 때때로 느낄 때가 있다. 말 우리에서 가만히 휴식하고 있는 말의 눈동자를 가만히 지켜본 적이 있는가? 시골에서 오후 때면 소를 데리고 나가 뒷산 언덕배기에서 소를 부려놓고 스스로 풀을 뜯게 하는 책임을 맡은 적이 있었다. 한가롭게 풀을 뜯는 그 장면이나 겨울에 볏단을 잘게 작두대로 썰어 콩깍지와 함께 데워 여물을 쑤어 갖다 주면 누워서 되새김질하며 먹는 소의 그 커다란 눈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조용하면서도 기품어린 자태는 내가 인간-심지어 어른-들로부터는 느껴볼 수 없는 경이의 것이었다.
오랜 군 생활을 한 아버지와 그와 함께 있던 어머니로부터 시골의 외숙모 댁에서 키워진 나는 일찍부터 외로움과 날 강하게 지원하는 부모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을 어렸을 때부터 일찍 겪었다. 초등학교 들어갈 시절에 부모가 날 찾아가서 강원도에서 커진 나는 아버지의 심한 알콜중독증으로 웃어본 일이 별로 없이 살았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면서 나에게 힘을 준 것이 바로 인간이기 보다는 자연이고 동물들의 세계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에코페미니즘을 내 학문영역 속에 받아들일 지점에서 확인하였다. 위로와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자연이었고 이들이 공감 파트너였다는 것에 대해 새삼 감사하면서 세상이 자비로 이루어져 있고 이 자비로 인해 우리의 삶이 풍성함을 다시 한 번 확인 해 본다.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