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성서연구 :: 2005/06/02 17:43
녹색공동성서연구 인도: 박성용 박사
주제: "녹색에너지로 녹색교회를“일시: 2005. 5.23-25
장소: 민들레성서연구원
주최: 기독교환경연대, 기독교대한감리회환경선교위원회, 민들레성서연구원
공동연구 1 창조신앙의 재 발견과 피조물의 탄식
성서본문:
창세기 1: 1-8, 20-28
롬: 8:18-24
도움말:
1) 달라진 관점-종교의 진리검증을 위한 잣대로서 환경/생태
환경을 주로 문젯거리(‘환경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취급하는 기존의 환경담론들은방법론에 치중하고 있어서 오늘날 환경이란 주제가 갖고 있는 종교적 성격, 즉 현대 사회의 새로운 구원론적 성격을 간과한다. 이제 환경은 개별종교의 가르침의 적합성, 의미성을 판단하는 메타담론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곧 환경문제는 가치관이나 태도를 넘어서서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측면, 즉 인간의 종교적 관습이나 교리적 요인들이 배후에 있다(환경파괴와 착위에 대한 종교적 관습과 교리가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전례없는 전지구적 생태파괴의 심각성과 문제해결의 급박성에 대한 우리의 상황인식에 의해 촉발된다. 인간존재가 지구와 지구위의 모든 생명에 큰 위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과 신학은 부적절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지구의 지속적인 황폐화안에 얽혀 있는 인간적 태도들과 주장들을 변경시키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Lynn White, Robert Hunter, Sallie McFague)
2) 신학적 배경- 종교개혁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전통적인 구속신앙은 은총과 구원의 문제를 ‘역사’속에서 인간과 신과의 개별적이고, 내적인 관계로 이해함으로서 ‘창조자’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폭을 제한시켜왔고, 신의 활동영역으로서 ‘자연’과 생의 동료로서의 생태적 타자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을 약화시켜왔다. 이런 점에서 창조신앙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 일어나고 있다. 창조신앙은 새로운 지구가 한번 들렸다가 떠날 숙박소가 아닌 돌보아야 할 집으로 자각시켜주며, 생태적 타자와의 관계에 의한 인간/나의 정체성을, 지구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재-정위 해준다.
3) 성서본문의 읽기 가이드-
(1) 창조이야기는 만물(인간만이 아닌)에 대한 하느님의 우주적 의도-우주적 샬롬공동체-가 있었다. 만물은 “생겨라/존재하라”는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생겨났으며 만물은 자신의 공간과 생의 목적을 신으로부터 받았고, 사물의 존재자체 대한 인정과 가치(‘보기에 좋았다’)의 근거는 창조자 하느님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목적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목적대로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2) 창조는 무질서와 혼돈(chaos)로부터 질서, 조화(cosmos)로의 변화에 있으며, 단지 올바른 관계뿐만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생육번성하라’)을 목적으로 한다. 생태적 삶에 있어서 혼돈과 무질서의 주제는 인간의 사회적 삶에 있어서는 불의, 착취, 폭력, 억압, 불의한 질서로 나타나며 이들은 모두 ‘빈곤한 존재상태’ 머물게 됨으로 창조신앙의 풍성한삶에 대한 창조자의 의지에 위배된다.
(3) 창조의 완성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이다. 여기에서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이 만나지게 된다. 안식을 통해 세계는 성화되고 축복된다. 안식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창조가 가진 불가침성을 인정하며 창조의 사귐 속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기쁨을 통하여 이 날이 거룩하게 된다. 안식이 창조의 최종목표로 볼 때 자연과 몸은 도구적 실용성을 갖는 게 아니다. 안식일의 충만함과 기쁨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에 대해 참다운 관심과 배려를 하게 된다.
(4) ‘더 풍성하게 존재케 하라’는 창조자의 위탁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의도이신 ‘창조성’을 삶의 관계속에서 구현해야할 책임이 있다. 이는 자기 실현의 자율성과 자유를 통해 더 풍성케 존재(요10:10-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함)케 하라는 의미이다.
(5) 샬롬은 모든 피조물을 포용하는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성서의 비전의 본질이다. 억눌리고 박탈당한 자들이 힘과 존엄성을 얻게 되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은 인간만이 아니라 전체 피조물-짐승들, 풀, 별, 분자-에게까지 요청된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멸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피조물의 고통에 주목하고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인간성회복의 근본토대가 되고 오늘날 기독교 생태신앙의 근거가 된다.
질문:
1. 창조이야기를 통해 피조물간의 관계, 생명질서의 원칙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창조신앙이 우리의 전통적인 구속신앙에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3. 창조의 완성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이다. 안식일의 사상은 성서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나타나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4. 오늘날 피조물의 탄식의 예는 무엇이며 이들 현상에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자?(우리의 일상의 삶, 공동체, 지구적 수준의 입장에서) 그리고 피조물 탄식(생태적 폭력)이 일어나는 원인들은 무엇인가?
5. 위의 질문들과 관련하여 오늘날 하느님의 목적대로 사는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보자 (우선적인 것 5가지)?
공동연구 2 생태적 친교와 생명평화
성서본문
이사야 11:6-9
마태 6: 25-34
도움말:
1) 달라진 관점- 생태적 약자에 대한 구호적 입장에서 동반자(eco-fellow)로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 대한 입장이 생태적 타자를 돌보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인간의 우월성(무언가 나은 것이 있다)에 대한 인식으로 이해됨으로서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운동은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구호(relief)의 차원에 많이 머물고 있다. 이는 나-너의 관계에서 생태적타자를 ‘너’로 대상화함으로서 관계가 종속화되어 ‘나’인 인간은 ‘너’인 자연에게 베풀는 독백(monologue)의 관계를 형성하여, 너가 도구화됨으로서 생태적 타자인 ‘너’로부터 배우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자연을 의미있는 동반자로 생의 신비를 공유하는 대화의 파트너로 인식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중대한 새로운 도전이 된다. 그 도전의 내용은 관계적 이미지로서의 자아관, 생물권의 다양성과 공생에 근거한 평등주의, 복합성과 탈 중심화에 대한 감각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신학적 배경- 기존의 기독교 신앙/영성은 주로 개인구원을 지향하고, 위/하늘을 향한 영성의 방향이 교권의 위계적 질서와 관료화에 이념적 수단이 되었으며, 역사와 인간들의 사회제도적 권력관계내에서 사유함으로서 우주적 신비를 등한시 하였다. 창조신앙은 근원적인 선(goodness)이 생명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들 간의 근본적 관계성에 있음을 고백하며 창조물들이 성스러움, 연관성, 경이로 충만하며,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문자(성서)와 역사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들을 통해서도 전달된다는 신념을 공유한다. 자연의 모든 존재가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로 인정되고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현존을 비추어 주는 거울로 보는 태도를 갖는다. 그 예로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1182-1226)의 해 달 불 물 잡초 병 죽음까지 형제자매로 보는 생태적 공동체에 대한 신비체험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와 존 뮈어등의 자연의 성례전화의 입장에서, 심층생태학(Arne Naess)과 대지윤리학자(Aldo Leopold) 등의 생명평등주의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3) 성서본문의 읽기 가이드-
(1) 기독교의 적색은총(red grace)는 이제 녹색은총(green grace)와 더불어 이해되어져야 한다. 녹색은총은 자연이 생명의 풍요와 함께 영혼의 정화를 일으키는 근원적인 성지(natural sanctuary)임을 아는 것이며 자연이 개발이데올로기(성장과 발전)에 의한 물질적 부의 획득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과 숨결과 현존을 느끼게 하는 영적 안내자가 됨을 아는 것이다. 이는 구속사의 시간/영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공간/몸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요구한다.
(2) 이사야의 늑대, 표범, 사자가 새끼양, 송아지 어린아기와 어울리고 딩굴고 장난하며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는’ 상태에 대한 비전은 생태정의가 실현되는 생명평화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3) 예수의 가르침,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은 생태적 타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삶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예가 된다 (욥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이해하는 열쇠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이해로부터였다). 다른 존재의 소리, 타자의 언어를 들음은 그 자체로서 구원의 문이 될 수 있다.
질문:
1. 본문이 우리/자기자신의 삶에 충격을 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2. 우리의 삶에서 생태적 타자가 주는 삶의 지혜나 만남의 경험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3. 생명간의 친교를 방해하는 요소/원리(철학,가치관, 종교적 가르침)은 무엇이고 생명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원리는 무엇인가?
4. 생명평화에 가장 반대의 상황에 처한 ‘환경부도사태’(IMF금융위기로 인한 국가부도사태의 예처럼)의 심각성의 하나는 에너지문제이다. 생명간의 친교를 위해 녹색에너지에 대한 여러 의미를 숙고해 보고 생활에 적용할 여러 방식을 토론해보자.
공동연구 3 사회·생태적 화해와 교회의 책임
성서본문:
호세아 2:18-25
골 1:15-20
도움말:
1) 달라진 관점- 자연의 치유가 없다면 결국엔 인간의 구원도 없다.
사회생태학과 생태여성학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사회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연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적용된 것이다. 위계질서의 사회적 성격이 더 근본적인 위상을 차지하며 그러한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자연의 지배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전체를 경제(이득과 자본논리)에 복속시킴에서 사회적 폭력과 생태적 폭력이 가중되었다면 이제 화해의 과정은 경제체제(경제성장과 번영)가 사람과 자연에 봉사하는 체제로 나아감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인식의 무지와 편견은 사회적 폭력뿐만 아니라 생태적 폭력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회관계에 대한 생태학적 혁명이 선행되지 않으면 어떤 환경운동도 환경관리주의, 환경관리윤리에 불과하다. 생태운동이 모든 측면에서의 지배의 문제를 포괄하지 않는다면 우리 시대의 생태운동의 근원적인 원인을 제거하는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생태운동이 단순히 오염통제나 환경보존을 위한 통제라는 개혁적 수준에 머문다면, 한마디로 보다 광범위한 혁명의 개념으로 다루지 않고, ‘환경주의’에 머문다면 자연적, 인간적 착취라는 기왕의 체제에 봉사하는 운동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전 지구적 환경재앙의 해결에 있어서는 공동의 수행과 세속적인 일을 통한 하느님 나라 실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요구되어진다. 또한 개인의 의지적 결단만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폭력적 구조에 의한 간접적 폭력, 제도적 폭력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공동의 대응모색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방식에 있어서도 복합적인 노력들이 필요로 한다. 즉 공동체주의, 탈도시화, 산업의 탈중심화, 대안적 기술, 유기농업, 성장의 억제, 새로운 자연주의적 감수성 등의 포괄적인 다자적 노력이 수행되어야 한다.
2) 신학적 배경- 인간중심적인 그리스도론이 지닌 ‘역사’중심의 패러다임은 구원을 영혼의 축복이나 인간실존의 개별성으로 축소된 나머지, 자연은 부지불식간에 인간에 의한 엄청난 착취 아래 놓게 하였다. 자연계의 치명적인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의식이 증대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역사’라는 현대의 패러다임의 한계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고대의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그 물리적 구원론을 다시금 질문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고대에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권세들과 많은 영들 그리고 여러 우상들과 대결시켰다. 오늘날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인간에 의해 혼돈속에 빠지고 독한 쓰레기로 오염되며 보편적인 죽음으로 저주받는 자연과 대결시켜서, 인간을 절망에서 구출하고, 자연을 파괴로부터 보존하려고 해야 한다. 창조과정 안에 있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구원이 인간과 신과의 여기서 인간의 구원은 인간과 신사이의 일대일 관계에서만 완성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구체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현상적인 자연세계의 고통과 파괴를 치유해야 가능함을 제기한다. 왜나하면 우주의 창조물 자체는 하나님에게서 창조된 것이므로 그 자체로 신성한 기원을 동일하게 가지며, 그것들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성서본문의 읽기 가이드-
(1) 그린피스운동처럼 지구의 생태적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는 산업, 국가, 정치적 힘들의 넓은 범위들에 맞선 정치적인 운동은 신학적 신앙적 국면을 갖으며 그 근거는 호세아서의 “하늘의 청”과 “땅의 청”은 서로 관계되어 있고, 신으로부터의 선물, “정의,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 진실”에 대한 생명평화운동가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이들은 생태 운동을 사회운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절대적 신앙차원에서 수행하며 이 시대의 환경위기를 구원론적 과제로 상정하고 그 해결을 위해 헌신한다.
(2) 저항과 변혁에로의 생태운동의 근본은 골로새서의 선언처럼 “만물과 화해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경험을 기초로 한다. 이들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상호관련성을 확증하는 지구적 의식을 강조하며 하며, 전체지구는 우리 몸의 부분이고, 지구의 전율적인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신성이며 그러한 신성을 해치는 인간의 행위는 용납되지 못하는 범죄행위 곧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만물과 화해하신 그리스도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충성심을 종족적 국가적 종의 정체성을 넘어 확장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질문:
1. 1장 20절은 생태적 화해(“들짐승과 공주의 새와 밭의 해충이 해치지 않음”)과 사회적 화해(활, 칼 등 무기를 없앰)의 동시성을 예시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늘과 땅의 만물과의 화해’이다. 이것이 가능한 삶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성서는 말하는가?
2. 1의 삶의 조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의 삶의 모습/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우선적인 것부터 열거)?
3. 상호관계적 원리의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몸으로서의 교회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가?
4. 우주만물과의 화해하시는 그리스도라면, 이제 우리는 어디서/어떻게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가? 특히 녹색에너지의 사용이 녹색의 그리스도와의 화해사건을 어떻게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는가?
5. “골로새서의 만물과 화해하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성만찬의 경험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선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