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적 대화 보조 자료 - 자비에 대해 :: 2007/10/10 03:10

 

NVC 보조 자료                               자비에 대해    
        


(이 발췌 자료는 공감적 대화의 과제로서 연결하기와 자비를 나타내기를 통해 삶이 풍성해짐과  우리의 욕구/가치 밑바닥에 있는 신적 에너지와의 연결에 대해 이해가 안가는 분들에 대해  그 의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독교적인 자비의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이는 어떻게 우리의 삶이 희소성의 법칙에 의한 경쟁, 우열의 전쟁의 지대가 아니라 자비에 근거한 풍성함의 법칙에 의한 호혜와 신적 에너지에 근거하고 있다는 NVC의 입장에 대해 자비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이 이를 어떻게 지지하는 지를 일별할 수 있게 한다. 이는 NVC의 풍성하기와 자비로워지기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이다.) 



“하느님은 한 모상, 한 형상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느님을 생각나게 하는 자이다.

하느님이 고통과 가쁨을 함께하시는 것처럼

인간도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자비는 우리의 삶에서 유배되었다. 우리가 자비로부터 도망치게 된 것은 자비에 대한 무지, 때로는 망각에 가깝고 때로는 억압에 가깝고 때로는 자비를 왜곡하고 통제하고 억누르려고 하는 의식적인 노력에 가까운 무지 때문이었다. 이러한 자비의 유배는 독과 고통을 초래하게 마련이어서,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1. 자비는 연민이 아니라 축제이다.


자비는 우리의 문화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동정이 아니다. 자비는 누군가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는 것도 아니고, 고통에 몰입하는 것도 아니다.


자비를 연민과 동정심을 변질시킨다면 그것은 자비를 성숙한 삶에서 아예 추방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연민에는 암암리에 분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때때로 자신의 대상을 고통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약하고 열등한 존재로 여기기도 한다.”


반면에 자비는 상대를 약하거나 열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자비란 다른 사람의 약점에세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약점을 지니고 있나는 자각의 힘에서 발동된다. 자비는 우리 모두의 상호 관계성을 깨달음으로써 발동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불쌍하고 딱한 존재로 깍아 내리는 것은 곧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다. “연민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대부분 실제로는 위장된 만족에 불과하다.”


연민은 주-객 관계에서 비롯된다. 주-객 관계에서 일차적인 것은 타자와의 분리이다. 가령, 연민은 타자가 겪는 아픔의 원인을 실질적으로 덜어주지는 않으면서 감정과 느낌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연민은 ‘감상적인 눈물의 사치’를 수반한다. 그렇게 눈물을 짜내는 연민의 정은 결국 자선사업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은 ‘선한 자선사업’으로 알려지게 된다.


경주에서 낙오된 이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낌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태도는 소위 자선이라는 것의 동기가 된다. 어떤 이가 타자에 대해 연민의 정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는 자비를 가지고 있는 지를 구분하는 것은 “당신은 이 사람과 함께 축제를 벌입니까?”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자비는 참된 ‘동류의식’이나 기쁨을 포함하기 마련이며, 기쁨과 축제는 자비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의 한 부분이다.


자비는 축제와 동일한 단계에서 작용한다. 자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함께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즐거워하고(축제) 다른 사람의 슬픔을 슬퍼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체감의 자각이다. 축제와 슬픔, 이 두 차원이야말로 참된 자비의 전체를 이룬다.


축제란 기억하기 위해 잊는 것이다. 축제는 자아, 문제들, 어려움을 잊는 것이다. 축제는 버리는 것이다. 자비 역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공통의 기반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통의 완화를 마음에 그리기 위해 자아를 버리고, 문제들을 버리고, 어려움을 버리는 것이다. 축제 없는 자비란 있을 수 없고, 자비의 에너지를 늘리지 않는 진정한 축제도 있을 수 없다. 축제를 벌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자비의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자비는 일체감이라 불렀던 것, 혹은 ‘같은 피조물과의 친밀감“과 관계가 있다. 이 친밀감은 우리의 친밀감을 축하하라고 꼬드긴다.


2. 자비는 감상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고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비는 순수한 감정이나 감상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아픔을 경감시키는 일에 종사한다.

감상주의는 행위로부터의 도피, 정치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정의 실천으로부터의 도피다. 자비를 감상적으로 다루는 것은 자비를 파괴하는 것이다.


자비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단순히 감정을 꾸미는 것과는 무관하다. 자비는 행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자비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과 관계된 것이지 단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감상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과 선한 목자의 예).


우리는 타자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신을 사랑할 수 있다. 신은 “내가 굶주렸을 때에...”라고 말한다. “굶주림, 목마름, 나그네 됨, 헐벗음, 병듬, 감옥에 갇힘-이는 고통의 실재들이다. 그리고 신은 이러한 고통의 실재들 속에 내재한다. 따라서 우리의 자비의 행위는 신을 사랑하는 행위이기도하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괴로워할 때 그들뿐만 아니라 신도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그는 말한다. “남에게 주어라. 그러면 신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눅6:36-38). 그에게는 자비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주는 행위였다. 그에 따르면 나는 나일 뿐만 아니라 우리이기도 하며 우리는 서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은 새롭고 오묘한 신비를 소개한다. 우리는 신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신도 고통을 당하신다.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덜어줄 때 하느님의 고통도 덜어진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지, 제사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나 신을 아는 것이다”(호세 6,6)  예언자 호세아는 자비를 예배와 전례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고 있으며, 신을 아는 지식과 자비를 동일시한다.


3. 자비는 사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도취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다


자비는 에너지를 사유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자비는 지나치게 사유화된 감각 방식과 행동 방식을 실제로 제거한다. 자기본위는 거짓보다 훨씬 뿌리 깊은 곳을 흐르는 고약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자기 방어와 철옹성이라는 병적인 상태가 된다.


자비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도취적인 것이 될 때, 무엇인 사라지는가. 그것은 초월이 사라진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신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신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신의 사랑이 우리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요일4:12)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참된 자비의 강력한 증거를 물려주었다. 개인주의자들과 감상주의자들 그리고 병적으로 사로잡힌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자비를 되찾아, 본래의 자리, 곧 공적인 자리로 옮겨 놓았다. 여기서 말하는 공적인 자리는 자원, 일, 기술, 경제, 시장, 제 3세계 국가이다. 만일 자비가 경제계와 공적이고 도덕적인 결단의 장에서 활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소멸하고 말 것이다.


4. 자비는 인간미 넘치는 인격주의인 것만이 아니라

   넓이로는 우주적이고 에너지의 관점에서는 신적이다


인격주의, 혹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도 자비의 한 예일 것이며, 진실로 자비를 발전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비는 인격주의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 왜냐하면 자비는 정의를 실천하여 사회구조를 개조하고, 인간끼리 주고받는 에너지는 물론이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주고받는 에너지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마틴 부버는 나와 너의 경험이 사람끼리의 경험인 것은 물론이고 사람과 나무, 사람과 동물, 사람과 음악과 회화와 기타 예술들,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경험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자비는 인격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주 전체와 피조물 전체에 미친다. 그러므로 자비의 우주적인 차원은 감상주의가 자비의 이름이 되지 못하게 한다.


또한 자비는 신의 속성이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신은 자신을 이렇게 나타낸다. “나는 야훼, 야훼다. 온유와 자비의 신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출34,6). 야훼는 자비로서의 신을 뜻한다. 신은 ‘자비로운 분’이라고 불리운다.


신을 자비의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이 타자의 고통에 괴로워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신은 괴로워한다. 신은 고통을 겪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비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신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은 불행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만일 내가 인간의 고통, 인간의 고뇌, 인간의 불행을 덜어준다면 그것은 곧 신을 돕는 셈이 될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내가 사람에게 하는 행위가 곧 신에게 하는 행위가 된다. 내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것은 곧 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된다.


자비는 개인이나 개인적 특성을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우리에게 단순한 인격주의를 넘어서게 하여, 에너지가 사람과 하느님, 식물과 광물, 동물과 음악, 행성과 태양 사이의 어디에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주가 자비를 통해 인격화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5. 자비는 금욕적인 초탈이나 추상적인 명상이 아니라 열정적인 관심이다


자비는 타자의 고통과 아픔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그러한 아픔을 알고, 그 아픔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나누고, 가능한 한 그것을 맛보는 것이다. 자비는 고작 타자의 감정을 아는 것, 혹은 타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느끼려면 자비가 넘치는 학습 경험에 절대 필요한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그것은 에너지를 억제하기 보다는 에너지를 변형시킨다. 그것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열정과 자비사이에는 중요한 관계가 있다. 신은 너무나 숭고해서 냉담하고 우리의 세계에 시선을 던질 수 없는 철학자의 추상적 신이 아니다. 예언자의 신은 너무나 관심이 많고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기시기에 자기 피조물로부터 멀어질 수 없다. 그분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고, 심지어 인간의 행위와 운명에 의해 감동받기까지 한다. 자비는 내장과 창자에서 일어나는 열정과 파토스와 깊은 관심을 내포한다.


6. 자비는 지성을 반대하지 않고 만물의 상호 연결을 알고 이해하려고 한다


자비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모든 생물이 상호 의존한다는 예리한 인식에 뿌리박고 있다. 모든 생물은 서로의 일부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자비를 발전시키는 것은 만물이 상호 의존한다는 인식을 보다 예리하게 발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7. 자비는 종교가 아니라 삶의 길, 즉 영성이다


길과 종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영적인 사람들은 삶의 길이나 영성에 몰두하는 한편, 제국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 예수나 모세 혹은 아모스와 같은 이들이 가르친 길은 사회적 자비와 적극적인 관계를 갖는다. 종교에 대한 열의는 제국의 설립자들에게 봉사하게 마련이다.


영성으로서 자비는 신의 길을 걷는 기술이다. 이 길은 의식의 단계보다 훨씬 깊은 곳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온전한 자세, 깨달음 내지는 영성이다. 자비가 우리의 영성이 될 때 신의 기다림과 고통이 그칠 것이다. 사람들이 자비를 드러내 보이기를 기다리는 신의 자비도 풀려날 것이다.


8. 자비는 도적적인 계명이 아니라

  가장 충만한 인간 에너지와 신적인 에너지의 흐름이자 흘러넘침이다.


자비는 영성이자 생활방식이며 행동방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삶속에 있는 모든 것을 대하는 방식이다. 자비는 창조계를 중시하는 영성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거룩하고 신성하게 대하는 것이다.


자비는 윤리적인 체계는 아니다. 자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충만한 신 경험이다. 모든 참된 영성이 그러하듯 자비도 윤리를 담고 있지만, 윤리를 넘어서는 것, 곧 삶을 경축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으로 성장하고 부풀어 오른다. 자비는 신과 인간 사이를 뚫고 나가는 것(돌파)이다. 그것은 인간이 신처럼 되는 것이며, 자신의 신적인 근원, 곧 신의 “형상과 모상”을 회복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자비의 돌파는 이원론적이고 분리주의적인 사고와 행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분리는 신의 존재와 달리 인간의 존재를 포함한 모든 존재의 단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비는 이러한 상처를 치유한다. 왜냐하면 자비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분리시키지 않고 그 둘을 동시에 경험하기 때문이다.


자비를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신께서 우리 안에 계실 것입니다.”(요일 4, 12) 신이 우리의 이웃 안에 있기 때문에 이웃 사랑은 신 사랑이 된다. 마찬가지로, 신의 아픔은 현실의 아픔 속에 있기 때문에 현실의 아픔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것은 신의 아픔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자비야말로 영성 생활의 가장 충만한 경험일 것이다. 자비만이 초월이라고 할 만하며, 명상이라고 할 만하다.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덜어줌으로써 우리는 실로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을 눈여겨보고 신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라고 예수는 간략하게 말했다(마25:4)).

 

9. 자비는 이타주의가 아니라 자기 사랑과 타자 사랑이 하나가 된 것이다


일반적인 어법에서 이타주의는 자기를 희생하여 타자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타주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타주의의 지배적인 의미라면 자비는 실로 이타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비가 뿌리박고 있는 온전한 통찰력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나와) 다르지 않고, 나는 내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타자를 사랑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며, 나 자신의 가장 좋고 가장 크고 가장 충만한 자기 관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아픔이기도 하고, 신의 아픔이기도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덜어주는 데 몰두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기쁨이다.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이타주의는 이원론, 분리, 자기 구별을 가정하는 데,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원론과 분리와 자기 구별이 결코 기초 에너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릴 것이다.


자비는 우리 자신을 제외한 채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에서의 이타주의가 아닐 것이다. 자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생존의 가능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만물에 스며든 동일한 사랑이다.


신성을 자비라고 여기는 성서의 가르침을 보건대, 예수는 신적이기 때문에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기쁨을 함께 했기 때문에 신적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이 믿는 그분은 자비의 화신, 자비로운 신의 아들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너희도 자비의 자녀, 신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들이 자비롭다면, 그들도 신적이지 않을까?


기쁨과 축제, 행위와 정의 구현, 관념과 이상, 정열과 관심, 깨달음과 생활방식, 우주적이고 신적인 자각 및 상호작용과 같은 자비의 모든 요소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자비가 송두리째 위협을 받는다. 왜냐하면 모든 에너지는 저마다 마치 수레바퀴의 바퀴살처럼 다른 에너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자비는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에서 태어난 열정적인 생활방식이다.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가장 풍부한 에너지와 우주의 에너지를 합하여 다음과 같은 한 쌍의 과제로 들어가는 것이다. 1) 정의를 수행함으로써 동료 피조물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2) 우리가 자비롭고 유일한 신의 선물로서 공유하는 존재와 시간과 공간을 경축하는 것. 자비는 우리가 우주 및 그것을 만든 창조주와 맺는 친밀한 관계이다. 자비를 우리가 그러한 친밀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취하는 행동이다. 


(매튜 폭스 『영성-자비의 힘』에서 자비의 의미에 대해 발췌 정리함)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2007/10/10 03:10 2007/10/10 03:10
Trackback Address :: http://ecopeace.pe.kr/trackback/156
[로그인][오픈아이디란?]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