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기 그러나 사양하기 -공감적 대화 자료 :: 2007/11/2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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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기 그러나 사양하기 “당신은 지금까지 내가 봐 온 사람 중 최고이다. 누구도 친구로서 너를 뛰어넘지 못한다.” “당신의 선물은 훌륭하다! 완전하고 매우 사려 깊은 것이다!” “넌 매우 좋은 어린이어서 네 장난감을 집어라. 나는 네가 훌륭해서 매우 너를 사랑한다.” “나는 진실로 당신을 칭송한다. 당신은 매우 머리 좋고 열망 있으며 인기 있다. 그리고 당신은 매우 정직하고 충성스러우며 관대하다. 나는 당신과 같이 되고 싶다...” 위의 내용이 당신에게 말해졌다고 상상해보라. 어떻게 당신은 느낄까? 많은 사람들은 “최고의” 혹은 “훌륭한”이라고 말한다. 감사와 존경의 말을 당신은 듣고 있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그러나 이런 진술들은, 기쁨을 표현하긴 하지만, 모두가 청자와 그의 행동을 평가하는 판단들이다. 우리 대부분은 비난보다 칭찬을 좋아하지만, 판단은 ‘선-악’의 지속성속에서 ‘시-비’ 사고의 형태인 것이다. 그런 사고는, 긍정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타자의 의견에 대해 우리가 평가하는 것을 지원한다. 그리고 그런 진술은 타자의 복지에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기여하고(혹은 기여안하고) 있는 지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위의 두 번째 감사를 보면 ‘훌륭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도에 있어서 ‘좋은’ 혹은 ‘잘하는’것보다 더 강한 반면에 무엇이 정확하게 화자를 기쁘게 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선물을 받은 자가 감사함을 느꼈는가? 선물이 평안, 창조성 혹은 재미에 기여하는가? 명료한 관찰과 만족한 욕구를 듣지 않아서 어째서 선물이 그렇게 놀라운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마지막 예인 칭찬에서는 화자는 상대가 머리 좋고, 열정적이며 인기 있다고 언급한다. 정직과 관대는 보편적인 욕구이다. 그러나 어떤 행동들이 이런 욕구들이 충족되는 데 기여하는가? 어떤 명료한 관찰도 주어지지 않을 때, 심지어 ‘정직’과 ‘관대’는 판단이 된다. 우리는 화자가 보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하고 관대한 것 혹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기쁨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칭찬들은 모두 승인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모든 이를 기쁘게 하려로 노력할 때 우리는 아무도 기쁘게 할 수 없게 된다. 어떤 기초위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당신은 결정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안내가 상대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면, 우리가 자동적으로 상대에 대한 반응을 우리 선택을 위한 기반으로 추구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아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대한 감각을 상실할 수 있다.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고 충족된 욕구에 관련하여 표현될 때 줌에 대한 감사는 삶에 있어 훌륭한 동기부여와 궁극적인 ‘힘의 연료’가 된다.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감사를 사용하며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을 때, 타인에게 줌에 있어서 큰 의미와 기쁨이 존재하게 된다. 줌은 그 자체로 ‘보상’이다. 어떻게 듣고, 어떻게 주고 그리고 필요할 때 성실성을 가지고 ‘No thanks"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그런 종류의 감사이다. 이것을 아래에서 살펴보자. 예: 내 고등학교 과학 선생은 내게 많은 칭찬을 해서 나는 결국 좀 더 많은 과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이는 해부, 절단 그리고 조직학과 같은 고급과정들을 포함한다. 2년을 거치면서 나는 심지어 과학에 흥미조차 갖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 모든 수업을 단지 내가 감사와 보여지는 것에 굶주렸기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가 내가 그것에 ‘좋은 자질’있다고 말하기 때문에 해 온 것이다. 나는 이것을 내 과학 선생과 나누었고 그는 상처를 받고 실망했음을 난 말할 수 있다. 나는 그가 다른 종류의 반응을 내게 주기를 원했지만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음을 알았다.
감사의 힘 욕구는 모든 삶의 추동시키는 동력이다. 우리가 타자의 복지에 기여할 때 우리는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것이 어째서 타자를 돕고 지원하는 것이 그토록 만족스러운가에 대한 이유이다. 우리가 자신의 삶을 풍성케 하는 것을 행할 때 우리는 직접적인 응답 시스템인 우리의 느낌들 곧 우리에게 자신의 욕구들을 충족시키는데 우리가 성공했는지 안했는 지를 말하는 느낌들을 우리는 갖고 있다. 그러나 타자에 기여하는 행동을 우리가 취할 때는 우리가 사실상 성공했는지 그들이 우리에게 말을 안 해주면 알 방도가 없다. 감사를 받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의도적이든 아니든) 기여했는지 우리가 ‘시험’할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방법이다. 때때로 특히 사람들이 서로를 잘 알 때나 상황이 명확할 때, 단순한 ‘감사해요’나 미소는 충분하다. 그러나 ‘욕구에 기초한’ 감사를 받음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과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선택이 욕구를 충족시키고 지금과 미래에 의사 결정에 대해 명료함을 주는 지를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감사는 우리를 어둠속에 내버려 둔다. 관찰, 느낌 그리고 욕구를 포함한 ‘공감적 감사’를 주는 것은 빛을 켜는 길이다. ♣ 종종 요청없이 NVC하기 삶을 풍성케 하는 감사를 줌에 있어서 그리고 어떻게 한 행동이 상대에게 기여하는지를 명료하게 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지 NVC 모델의 처음 셋 -관찰, 느낌 그리고 욕구들을 사용한다. 여기에 감사를 말할 때 이들 단계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려준다. (관찰) 당신이 감사한 무엇을 당신은 특별히 관찰하였는가? (느낌) 이 행동은 당신에게서 어떤 느낌을 자극하였는가? (욕구) 당신에게서 어떤 욕구들을 이 행동이 충족 혹은 지원하였는가? 이들 행동들과 일관된 어떤 가치들을 당신은 지녔는가? 이들 단계는 당신에게 아마도 친숙할 것이다. 그러나 감사를 표현함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몇 가지 점들이 있다. 대부분 종종 감사함으로써, 당면한 느낌은 ‘감사한’ 혹은 ‘고마운’ 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따사로운, 감동의 혹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정확할 수 있다. 당신은 그 순간에 당신에게 실제로 ‘진실한’ 것을 스스로 보기를 확인할 수 있다. 위 단계들을 보면서 당신은 또한 NVC 모델에서 요청이 빠진 것을 주목할 수 있다. 감사는 만족된 욕구에 대한 축하이기 때문에 보통 요청할 필요가 없다 - 만일 당신이 더 연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당신의 감사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알기를 원치 않는다면. 몇 가지 감사의 사례를 보고 NVC 모델로 이들 감사를 바꾸어 보자. 감사: “나를 위해 항상 거기 있어주어 고맙습니다. 당신은 내게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NVC: “지난 밤 버스 대합실에서 3시에 나를 데리러 와 주었을 때 감동했어. 당신의 돌봄과 지원이 진실로 내게 많은 것을 뜻해, 특히 내 엄마가 아픈 상황에서는.” 감사: “당신의 선물은 대단해요. 나는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 NVC: “그 새 식당에 대해 당신이 내게 준 선물 티켓은 바로 내가 필요했던 것이어요! 난 내 논문을 끝낸 것을 축하하길 원했지만 내 남자친구와 난 자금이 충분치 않아요. 이제 우리는 고상하게 축하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난 정말 흥분이 되어요.” 감사:“당신은 내가 만난 가장 좋은 아이야. 나는 네가 좋은 행동을 할 때 그만큼 더욱 널 사랑한단다.” NVC: “난 진실로 네가 장난감을 선반에 되돌려 놓은 것에 감사한단다. 이제 질서가 잡혔고 방을 돌아다니는 데 편해졌네.” 감사: “난 우리의 우정을 굉장히 감사합니다. 당신은 내가 진정으로 칭송하는 분이십니다-당신의 정직, 충성 그리고 이기심 없음에 대해.” NVC: "나는 당신이 나에게 얼마의 돈을 기꺼이 빌려 주신 것에 진정으로 감동했습니다. 특히 당신이 내가 행한 선택을 좋아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는 데도. 나는 매우 지지 받고 있고, 돌봄을 받으며 신뢰받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들 예를 살펴보면, 당신은 이것들이 ‘공식적인’ NVC 모델을 매우 친밀하게 따르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욕구들’이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으며 오직 몇 몇 사례에서 당신은 명백하게 언급된 보편적인 욕구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감사의 각각에 있어서 명백한 관찰이 주어진다― 저녁 식사를 위한 선물 티켓 혹은 새벽 3시에 정류장에 마중 온 것 등. 느낌이 언급되어 있다- 감사, 흥분 혹은 감동과 같은 것들. 그리고 직접적으로 언급은 안 되었지만 욕구가 명백히 충족되었고 암시되었다 - 축하, 돌봄, 안전, 편안 혹은 지원 등. 이들을 큰 소리로 읽어보라. 당신은 관찰(O), 느낌(F) 그리고 욕구(N)를 통한 감사(OFN 감사)가 더 만족스럽고 의미있음을 발견하였는가? OFN 형식에 있어서 당신은 받는 자의 경험에 대한 영향, 그들이 느끼는 것과의 연결 그리고 충족된 욕구들에 대한 감사를 명백히 보게 되어서 더 나은 이해와 연결을 즐길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완전한 그림과 공유된 이해를 보여준다. 당신은 또한 우리의 행동들이 상대에게 기여한 방식이 우리가 기대한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당신이 배운 것에 의해 놀랄 수 있다. 예를 들어 선물 티켓에 관하여 제한된 예산을 지닌 학생은 확실히 그것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그 학생이 어떻게 자신의 논문을 방금 끝내고 축하하기를 원하였는지를 듣는 것은 새로운 수준의 풍성함과 가치를 선물에 보태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OFN 감사는 항상 긍정적으로 진술된다. 감사를 줄 때 물론 우리는 성취와 ‘당면한’ 감정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칭찬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부정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장난감을 집어 든 아이의 경우에 부모는 “네가 장난감을 집어 든 것은 훌륭하다. 여기는 매우 어지럽혀져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누군가 그들이 듣고 있는 음악을 끈다면, 그것을 요청한 사람은 아마도, “감사합니다. 그건 정말 내게 골치를 아프게 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상황에 있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해 언급함에 있어서 - “어지럽힌” 그리고 “머리 아픈”- 우리는 충족된 욕구들에 대해 듣는 것과 같은 명료함, 만족함 그리고 연결을 가질 수 없다. 긍정적으로 우리의 욕구를 진술하기-질서, 안전, 혹은 평화와 같은-는 우리의 욕구가 이해되고, 행동하게 되며 우리와 축하하게 되는 기회를 증가시킨다. 그것은 또한 미래에 충족되는 것들에 대한 기회를 증가시킨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우리가 무엇을 원치 않는 지보다는)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칭송는 어떠한가? 그것들은 좋지 않은가? “당신이 피아노를 치는 방식은 믿을 수 없을 정도야! 당신은 환상적인 음악가야.” “당신은 매우 머리가 좋아.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당신은 전교에서 가장 잘 하는 운동선수야. 내가 당신이 한 것과 같은 성적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어.”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칭송들이 상대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고 확신과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 긍정적인 판단을 듣는 것을 좋게 느낀다면 그들은 부정적인 것을 들을 때 기분이 나쁠 것으로 생각하는가? 우리가 상대의 판단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과 자신의 선택을 생각하는 것을 결정해야 하는가? 종종 칭찬을 해 줄 때 우리는 연결과 공유된 이해를 원한다. 그러나 판단에 기초한 칭송/칭찬은 상대방이 행한 것 혹은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화자(speaker)의 의견에 주목한다. 그것들은 화자에게 감명을 주는 무엇이 정확히 일어난 것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는다. 예를 들면 “완전한”이란 무슨 뜻인가? 어느 판단과도 같이 ‘완전한’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것을 뜻할 수 있다. 판단처럼, 그런 감사 또한 감사를 받는 자를 사람이 없는 정적이고 감동 없는 공연에 놓이게 한다. 어떤 사람도 항상 ‘완전하게’ 피아노를 칠 수 없다. 아무도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종종 판단에 기초한 칭찬은 우리를 불만족스런 감정에 남겨 둘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화자의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칭찬의 세계적인 진술의 이상에 따라 살려는 책임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화자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서, 우리가 특별히 그 순간에 행한 것을 알 때 훨씬 기분이 좋아진다. 감사의 경우처럼, 판단에서 자유로운 칭찬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OFN 모델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의 안녕/복지에 기여하는 무엇을 우리는 보고 들었는가? 어떻게 이 행동에 대해 생각하면 어떻게 우리는 느끼고 있고 어떤 욕구들이 충족되었는가? 다시 말하자면 요청은 아마도 우리가 어떻게 타인들이 우리의 감사와 칭찬을 듣는지 궁금하지 않다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OFN 감사와 칭찬을 해줌에 있어서 당신은 단순히 ‘응답 feedback'으로서 그것에 언급하기를 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상대의 말과 행동이 우리의 삶에 기여하는지에 대해 “되돌려” 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교환속에서 (주과 받음 - 그리고 상대가 우리가 받은 것을 알게 함) 상대에 기여하는 진정한 기쁨이 경험된다. ♣ 이중 판단 -칭찬이 아닌가? 판단에 기초한 칭찬에 대해 주목해야 할 다른 것이 있다: 판단은 양쪽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위 세 번째 칭찬에서 보듯이 때때로 화자가 상대에게 칭찬을 할 때 그들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비교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내가 당신처럼 되었으면...” 혹은 “그런 좋은 일을 내가 가졌으면...” 또는 “내가 ..을 행했더라면”이라고 말하면, 그는 그가 행한 행동에 의해 충족되지 않은 자기 자신의 행동과 욕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그가 자기 자신의 결핍으로 보는 것에 대한 거울로 (혹은 최소한 그것에 대한 자신의 해석) 당신이 실행한 것을 단순히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당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기여하겠는가? 이런 종류의 ‘내면화된 inverted' 칭찬을 듣는 것은 실제로 즐거운 일이겠는가? 축하라기보다는 그런 ‘칭찬들’은 사실상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 전략으로서 칭찬 자기-비판의 한 형태라는 것에 덧붙여서 칭찬은 또한 현존하지 않는 한 방식으로 사용되며 상대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당신이 슬프거나 낙심할 때 누군가 칭찬을 사용해서 당신을 위로하려고 하는 것을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이를테면 그들은 말할 수 있다. “한 개의 낮은 점수로 상심하지 마-모두가 네가 얼마나 머리 좋은 지 잘 알고 있지. 넌 교실에서 가장 잘해.” 이와 같은 칭찬이 어떻게 만족을 주거나 위로가 되는가? 당신이 그런 진술 뒤의 의도를 들으면서 잠재적으로 이해와 지원에 대한 당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한편, 그런 ‘칭찬들’은 당신의 느낌에 부정적이고 어떻게 당신이 느끼는 지를 고정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으며 확신을 주는 데 거의 효과적이지 못하다. 당신의 느낌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신에 그것은 다른 사람의 현존과 돌봄의 선물을 갖는 것에 훨씬 더 만족스러워 한다. ♣ 칭찬-혹은 강제? 상대의 복지/안녕에 대한 기여는 가장 우선적이고 만족스러운 인간의 욕구중의 하나로 연결, 신뢰 그리고 의미를 촉진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보상, 승인 혹은 보답을 원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과 혹은 상대의 복지에 기여하고자 하는 우리의 내적인 욕구에 응답해서 하는 행동사이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판단에 기초한 칭찬과 감사는 쉽게 경계를 희미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장의 시작에 세 번째 칭찬에서 소년은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좋은 애’라고 고려받기를 원해서 장난감을 들었는가? 아니면 그는 만일 ‘좋은 애’가 아니라면 무언가가 일어날 것임을-그는 아마도 역정을 듣거나 벌을 받을지 몰라서- 경험으로부터 아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혹은 그는 질서, 고려 그리고 안전을 좋아하는 그의 어머니에게 그것이 기여하는지 알고 있기에 그것들을 집어 들었는가? 이는 전에 우리가 생각해 온 질문에로 돌아간다.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어째서 우리는 그들이 그것을 하기를 원하는가? 만일 우리가 판단에 기초한 감사와 칭찬을 한다면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동기는 쉽게 두려움이나 승인 혹은 보상에 대한 욕망으로부터-상대에 대한 기여와 가치를 나눔이 아니라- 올 수 있다. ♣ 칭찬을 비-전략화하기 de-strategizing 만일 칭찬이 감사와 축하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지 의심이 든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전략과 상관없이-그것이 벌이나 보상, 비교(부정적인 자기 판단)이든 혹은 당신의 느낌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이든- 당신은 OFNR로 되돌아 갈 수 있다. 당신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에 대해 공감을 줄 수 있다(부정적인 자기 판단의 경우에). 당신은 화자가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시도하는지(보상과 벌을 사용하는지 아니면 당신을 위로하려고 칭찬하는지) 검토할 수 있다. 때때로 침묵 공감의 형태로 이들 욕구들이 무엇일지 당신 자신에 대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당신은 그 순간에 다른 목적들을 위한 칭찬의 사용에 무엇이 동기를 부여하는지 명료함과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어떤 전략도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시도이다. 우리 대다수는 다른 목적을 위해 감사를 사용하는 데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사용된 감사가 사실상 축하가 아닌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순간에 공감적 응답을 함으로써 우리는 연결을 새롭게 할 수 있고 사실상 어떤 욕구가 축하되거나 애도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 행동에 있어서 OFN 응답: 삶을 풍성하게 하기, 선택을 강화시키기 행동에 있어서 이들 원칙들의 실제 예를 살펴보자. 한 달 전, 난 한 선생과 조교가 학교 소그룹 학생들의 수업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들 둘은 종종 학생들이 말하는 것을 칭찬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잘했어,” “최상이야,” “큰 일했어.” 등이었다. 수석교사는 학생들이 많은 비판을 받는 데 익숙해져 왔고 거의 칭찬을 받지 못했다고 내게 말했다. 그는 학생들의 자신감을 북돋우기를 원했다. 나는 그의 의도를 소중히 생각하고 그의 돌봄과 헌신에 대해 감동받았다. 또한 그가 학생들에게 칭찬하는 방식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내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감각보다는 교사의 판단에 의존하도록 격려하고 있음에 대해 걱정하였다. 어느 날 보조교사가 한 학생 존에게 폐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학생의 포스터가 ‘훌륭해 정말 훌륭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그에게 “당신의 그림에 대해 좋아하는 그 어떤 것이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대칭을 - 폐의 양쪽이 조화된 것 - 좋아한다고 말했고 조수에게 그것에 대해 무엇을 좋아하는 지 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좋아하는 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곧 존은 그가 또한 좋아하는 것을 지적하였다. 만일 우리가 이런 대화를 갖지 않았다면 나는 존이 한 그토록 ‘훌륭한’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제 그는 스스로 볼 수 있고 그것에 기초하여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자기 확신과 신뢰를 구축하는 데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 감사하기라?! 우리 문화에서 명료하게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뜻하지 않는 데도 ‘감사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배워왔다. 어린 나이 때부터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든 안하든 선물을 받을 때 ‘감사해요라고 말해야지’라는 말을 들어왔다. 어렸을 때 선물이나 행동이 사실상 내 욕구를 충족하는지 한 번이라도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겸손해’야만 했고 내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다. 그런 감사를 요구하는 것은 나와 상대방사이의 연결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이고 감사를 촉진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나 정직과 진정성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는 서로 연결됨을 느낄 수 있을까? 어떻게 선물과 공헌들이 사실상 우리와 우리 삶에 기여함에 대해 온전한 이해가 없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우리가 감사할 수 있을까? 심지어 어른으로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입맛과 가치에 일관되지 않는 선물을 받는다. 때때로 사람은 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의도에서 무언가를 하지만 의도대로 충족하지는 못한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 응답할 수 있을까? 이 주제는 내 수업에서 최근에 생생한 토론을 가져왔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선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가장해야 할까, 돌려주어야 하나 아니면 그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할까? 당신은 누군가의 ‘도움’이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을 알려주지 않아야 하는가? 당신은 단지 그 선물 뒤의 의도의 아름다움에 대해 당신의 감사를 표현하기만 하면 될까? 물론 이들 전략들 각각은 다른 욕구들을-고려와 편안함을 포함하여- 만족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진정으로 느끼고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는지 아닌지를 정직하게 나누고 그 것을 돌보기 원한다면 이것은 그 자체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고, 친밀함과 이해를 촉진시킬 것이다. 몇 년 전 한 사건이 내게 이것을 예증시킨다. 그때 나는 우연히 내 형제의 딸, 내 조카가 좋아하는 인형을 발견하였다. 나는 그들이 서해안에 살고 있어서 종종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러시아 연구에 조예가 깊고 이 인형은 전통적인 러시아 옷을 입고 있음을 알았다. 내 조카도 인형을 좋아하는 나이였고 해서 나는 이것이 찬탄할만한 것이라 생각했다. 매우 격정이 끌어 오르고 들떠서 나는 선물을 사서 그녀에게 보냈다. 얼마후 나는 내 형제에게 물었다. “모니카가 인형을 받았니? 그녀가 좋아하던?” “글쎄. 그래. 그녀는 받았어. 우리는 그것을 보내준 생각과 네가 우리를 생각한 것에 대해 감사해. 그러나 실상 모니카는 결코 인형을 좋아하지 않아. 우리는 누군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었지. 나는 당신이 상관치 않을 것이라 여겨.” 나는 기쁨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서 보낸 나의 ‘완전한’ 선물이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해 슬퍼했고 실망하였다. 그러나 계속된 토론에서 나는 어떤 종류의 것에 내 조카가 관심 갖고 있고 어떤 것은 좋아하지 않는 지에 대해 새로운 어떤 것을 배웠다. 나는 또한 형제의 정직과 신뢰에 대해 감사했고 결과적으로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더 잘 알게 됨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내 실망은 연결과 감사의 느낌으로 바꾸어졌다. ♣ 겸손인가 진실인가? 사람들이 ‘겸손하기’에 대해 말할 때 그건 종종 상대를 ‘해치지’ 않기 원하는 상황에서 이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는 진정성, 이해, 연결이 있을 때, 상처나 불안과 같은 충족되지 않은 욕구와 관련된 느낌들은 빠르게 변한다. 아무 상관없이,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응답을 ‘가장’하기를 원해야 하는가? 실망할 때 웃음을 보이고 우리가 ‘아니오’를 뜻할 때 ‘예’를 말하기를 원하는가? 혹은 진정한 연결과 감사를 포함해서 진정성과 사실적인 것을 원해야 하는가? 우리가 충족된 욕구를 충분히 알지 못하고 어떻게 우리의 행동이 상대에게 기여할지도 충분히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사실상 감사를 듣는 데 있어서 만족스러울 수 있는가? 그것은 마치 답례로 받은 포장된 커다란 상자가 안에 비어있음을 발견하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우리 모두는 물론 상대를 돌보고 고려하는 것을 바란다. 상대의 느낌을 고려할 때 혹은 어떻게 너의 정직이 받아들여질 지를 고려할 때, 그 순간에 당신이 무엇을 느끼고 욕구하고 있는 지에 대해 모두를 알아차리고 그것의 복잡성에 대해 상대와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대의 느낌에 대해 당신이 돌보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주저함과 관심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또한 당신이 정직과 신실함을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당신은 진정한 연결을 원함을 나눌 수 있다. 당신은 또한 그들이 선물이나 지원을 해 준 것에 대해 충족되고 충족되지 않은 욕구들-돌봄과 고려등과 같은 것들을- 모두를 언급하기를 원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의 의도로서 당신이 본 것을 존중할 수 있다. 우리는 충족된 욕구들을 존중하되 동시에 정직하고 진실할 수 있다. ♣ 감사의 결여 감사는 참되고 욕구에 근거할 때 투명한 금과 같다. 그것은 전체적인 주고받는 시스템에 에너지를 주고, 확인하고 축하하며 충족된 욕구들을 촉진시킨다. 그러나 감사가 그토록 에너지를 주고 만족스럽다면 어째서 우리의 삶에는 그것이 그리 많지 않은가? 옛 격언이 말하는 것처럼 대부분 사람들은 많이 차있는 것보다 반이 비어있는 것으로 잔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의 욕구가 충족될 때 우리는 만족스럽고 성취감을 느끼는 이유이다. 반대로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이것은 너무나 불편하여 우리는 더욱 표현하고 행동하기에 호소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에서 즐기는 것을 축하하지 않도록 이끌며 우리가 결여한 것에 주목하게 한다. 아마도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감사의 결여에 대해 설명한다. 당신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은 직장, 집, 학교에서 당신이 한 것에 대해 감사를 느끼는가? 당신이 타인들의 안녕에 기여하는 당신의 노력이 보여지고 인식되어진다고 느끼는가? 당신의 기여가 목표를 맞추고 있고 그러할 것이라고 당신이 의도한 기여대로 경험하는지를 당신은 느끼는가? 슬프게도 대부분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이 보여지고 인식되고 감사하게 여겨짐을 느끼지 못한다. 얼마나 우리가 놓쳐버린 기회인가! ♣ 감사를 즐기기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자만하도록’ 칭찬하지 않게 혹은 우리 자신에 의해 너무 감동받지 않도록 말을 들어왔다. 어떤 사람이 칭찬이나 감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오, 그건 진실로 대단한 것 아니야’ 혹은 ‘난 정말 걱정스런 일을 행했어. 아무것도 좋은 일이 아니야’ 혹은 ‘난 단지 행운이었어’처럼 말함에 의해 화자의 말을 부정하거나 최소화한다. 어째서 우리가 칭찬을 듣기가 어려운지에 대한 여러 이유가 존재한다. 그거나 그것 대부분은 아마도 보통 판단으로서 일어나는 칭찬과 관련되어 있다. 판단 받을 때 심지어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판단하게 하고, 종종 부정적으로 우리 자신을 남과 비교하게 이끈다. 위에서 토론한 것처럼 우리가 긍정적으로 판단할 때 그리고/혹은 남으로부터 긍정적인 판단을 들을 때 우리는 ‘실행 불안’을 경험할 수 있고 후에 똑같은 비판가를 실망시키지 않을까하는 전망을 경험할 수 있다. 수년간 나는 감사를 받는 것에 싸워 왔는데 그것들이 판단에 기초한다면 여전히 그러하다. 나는 또한 어떻게 나의 행동이 기여해왔는지 아는 것을 물론 즐긴다. 나는 이제 사람들에게 좀더 정보를 위해 묻는 것을 배워왔고 그 결과를 매우 즐기고 있다. 나는 더욱 많은 감사를 즐길 뿐만 아니라 또한 단 하나의 행동이 모임에 기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욕구들이 있는 지 감사하게 되었다. 최근에 시를 읽다가 나는 이런 실험을 시도했다. 한 사람이 나의 활동을 읽은 것에 대해 나에게 감사할 때마다 나는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충족된 한 욕구를 말하기를 요청한다. 계속해서 화자와 나는 그 결과에 의해 놀란다. 어느 한 사람도 같은 욕구를 말하지 않으며 한 순간 숙고한 후에 각자는 그들이 확인한 것에 의해 만족하고 놀라워하는 듯 보였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들에게 읽기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대해 전적으로 새로운 감사를 준다. ‘말라빠진’ 칭찬을 욕구로 번역하는 것은 행운의 쿠키를 여는 것과 같다! 워크숍 발표를 가르치고 실시하면서 나는 종종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야기에 있어서 당신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한 가지 것을 나에게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일반적인 감사의 진술을 좀더 유용한 OFN 진술로 바꾸는 데 도움을 준다. 시를 읽는 실험과 비슷하게 그것은 나에게 수많은 ‘행운의 쿠키’를 열고 그로부터 배우게 한다. 그리고 나는 또한 타자에 대해 더욱 배운다-그들이 무엇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들을 무엇이 움직이게 하는 지를. 사람들이 내 발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비슷하게 나는 반응하려고 시도한다. 가정은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준다면 더 이상의 상세한 내용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보이다. 실재는 다른 사람이 무엇을 행했든 명료한 관찰과 충족되거나 충족아된 욕구들을 지닌 피드백은 극도로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상세한 설명과 돌봄을 주는 것으로 ‘건설적인 비판’에 대해 말한다. OFN 피드백은 ‘건설적인 칭찬’-당신 자신의 욕구를 좀더 충족하고 타인에 기여하는 당신을 지원하고 돕는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러한 ‘칭찬’을 듣고 당신 자신은 감사를 더욱 주고받기를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내용을 갖고 있고 ‘긍정적’이며 가장 좋은 방식으로 ‘건설적’이기 때문이다. ♣ 감사의 결여를 탐구하기 우리 대부분이 거의 경험하지 않고 있는 감사의 이면에 놓여있는 느낌과 욕구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나는 학생 몇몇으로 하여금 특정의 사람으로부터 받기를 원하는 감사를 O, F 그리고 N을 사용해서 쓰도록 요청했다. 한 학생이 이런 감사를 그녀의 아버지가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을 썼다: 금년에 축구팀에서 어느 다른 소녀들보다 더 골을 많이 넣는 것을 내가 보았을 때, 나는 매우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 나는 네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하기 위해 너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우리가 함께 훈련하는 것에 의해 그런 발전의 한 부분이 되어 온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는 네가 강하고 건강한 인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을 보는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너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원하는 대학의 축구 장학금을 네가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나에게 주었다. 왜냐하면 나는 대학이 너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너의 대학 비용을 감당할 만큼 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은 그가 이전에 사랑한 여자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이 나를 품에 안아주고 내 가정과 학교에 대한 문제들을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 주었을 때 나는 매우 따스함과 지원해주고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돌보아 주는 것을 느꼈어. 사랑과 돌봄에 대한 내 욕구는 당신이 그렇게 했을 때 잘 충족되었어. 그러고 나서 나는 그들에게 각각 이런 방식으로 감사를 표현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사람이 충족하기를 원하는 욕구들을 추측해보라고 요청하였다. 첫 번째 학생은 이렇게 썼다: 내 생각에 그는 내가 그렇게 열심히 잘 활동하지 않음에 대해 어떻게 그가 느낄지 내게 말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였다. 나 또한 그에게 내 감정을 말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안다. 그는 내가 그가 강하고 ‘진정한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또한 좀 더 돈을 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많은 부끄러움을 갖고 있었음을 알고 있고 아마도 그는 이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의 감정을 더욱 상하게 하고 우리가 그를 덜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두 번째 학생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여자 친구는 내 사랑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지녔는지 내가 알기를 원치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것이 그녀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의 독립심과 자율성을 위협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듣는 이런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이야기들 속에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느끼는 감사를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공통적인 도둑이다. 아마도 그들은 상처받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들을 판단할지 두려워한다. 아마도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느낌을 말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혹은 그들의 감사가 그것을 받는 이에 의해 어떻게 듣게 될 지도 두려워한다. 우리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감사에 대해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대신에 ‘거칠은 사랑’에 익숙해 있다 - 어떻게 우리가 비판과 요구를 통해 ‘돌보는’ 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 때때로 우리가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유일한 시간은 불쾌함을 말하는 이로부터 온다: “당신은 지금 X를 좀 더 잘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Y를 할 필요가 있어요.” 두려움과 ‘빈번한’ 감사를 하지 못하는 것과 더불어,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욕구들이 경쟁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 임금을 받고 있는 아버지는 그가 원하는 돈을 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그의 슬픔과 유감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딸에 대해 그의 감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여자 친구는 그녀의 감사를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존엄성과 자율성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할 때 욕구들은 그러나 결코 갈등하지 않는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희소성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두 개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선택하는 전략들은 때때로 다른 욕구들을 충족시키려는 전략들과 갈등할 수 있다. 그러나 욕구들 그 자체는 경쟁하지 않는다. 예로 들면, 자녀의 운동 재능의 발전을 격려하는 욕구는 자기 자신의 기여와 성실성을 보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갈등하지 않는다. 자율성에 대한 욕구는 연결에 대한 욕구와 갈등하지 않는다. 당신은 분리된 인격이 되는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의미 있는 방식으로 누군가와 연결될 수 없다.
경쟁하는 느낌과 욕구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어떻게 우리는 항해할 수 있고 심지어 두려울 때조차 우리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길은 우리가 그 순간에 느끼고 욕구하는 모든 것과 연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원한다면 우리의 욕구들의 복잡함에 대해 투명해 지는 것이다.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기 전에 우리는 또한 살아있는 다른 층에 있는 감정들을 언급하기를 원할 수 있다. 축구선수 딸의 경우에 예를 들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적게 벌고 너의 교육에 대해 지불할 수 있는 내 능력을 생각할 때 나는 슬픔을 느껴. 그리고 또한 진정으로 얼마나 네가 축구를 잘 하고 있는 지에 대해 진정으로 자랑스럽고, 네가 운동을 배우는 데 어떻게 내가 너를 지원하는 지에 대해서도 그러하단다. 나는 이것이 너로 하여금 재정적으로 대학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매우 행복하고 안도감이 든단다. 여자 친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은 내가 진정으로 내 자율성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나는 좀 수줍음을 타고 심지어 이것을 말하는 것에 당황스럽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이 얼마나 내가 당신의 모든 지원을 감사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합니다. 나는 얼마나 애정과 돌봄을 지금까지 즐거워했는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명백하게 될 때 당신은 아마도 연결요청을 하기를 원할 것이다. 당신의 말이 어떻게 들리고 ‘마음에 와 다가왔는’ 지를 물을 수 있다. 특히 우리가 나약함을 느낄 때 연결과 공유된 이해는 심지어 더욱 중요하게 된다. 사람들이 가치에 기초한 감사나 판단 없는 칭찬을 줄 때, 그들이 우리와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을 듣고 소화하는 것은 훨씬 더 쉽게 된다. 거짓된 겸손이나 부정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는 추리 자신과 그들을 위해 충족된 욕구들을 축하하는 데 우리는 참께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공유된 가치와 상호 돌봄에 대한 축하가 되게 된다. ♣ 자기 자신을 감사하기 그리고 자신의 선택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원하는 감사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감사를 그다지 주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기여하는 자이기에 우리 자신의 노력을 당연히 여기는 것을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오직 자기에 대한 감사를 표현함에 의해서만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효과적인 것을(혹은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가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아차리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에 대한 감사는 ‘행동 수정’에 관여함에 있어서 매우 즐겁고 스트레스 없는 방식을 제공한다 - 우리가 가장 삶에 기여하고 가치를 발견하는 행동에 초점을 두고 그것을 재 강화하는 행동 수정에 있어서. 물론 우리는 항상 우리가 행한 선택에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충족되지 않은 욕구 때문에) 후회하는 선택들은 내가 지금 축하하는(충족된 욕구 때문에) 다른 방식에 있음을 발견한다. 양쪽을 이해하는 것은 나로 하여금 충분히 축하하고 내 가치에 의거하여 행동하게 도와준다; 감사는 진정으로 자기 수용, 편안 그리고 조화를 지니고 돕게 된다. 예를 들어 많은 방식에 있어서 내가 수년간 살아왔고 여전히 사랑하는 아일랜드를 떠난 것에 여전히 슬퍼한다. 떠나서 나는 명료함, 이해, 자기-돌봄, 각성과 선택(어떻게 내가 떠남을 결정함에 있어)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더 이상 거기에 살지 않음으로 나는 종종 아름다움, 의미, 자연과의 연결 그리고 공유된 가치(다른 사람들 가운데)에 대한 ‘현전하는’ 욕구‘를 가져왔다. 떠남의 결과로 그러나 나는 시간을 갖고 배움, 자기 발전, 그리고 자기 수용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왔다. 나는 또한 내 파트너를 만나서 그는 내 생에 수많은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기여했다! 만일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녀를 확실히 거의 못 만났을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아무리 고통스런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이것에 대해 나 자신에게 감사를 지금 표현할 수 있다. 내가 그토록 내가 사랑하고 나에게 그토록 많은 욕구를 충족시킨 장소인 아일랜드를 떠나는 것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생각할 때 나는 삶에 대한 나의 열정, 나의 단호함 그리고 끈질김에 대해 놀라워한다. 내가 그 어떤 것에도 생존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내 자신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감사, 확신, 자기 수용과 평화를 준다. 궁극적으로 충족되지 않은 욕구를 애도하는 것과 동시에 충족된 욕구를 축하하는 것은 축하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가장 삶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우리의 안녕/복지에 기여하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다. ♣ 감사함으로 살기 가치에 근거한 칭찬과 감사의 정신과 어떻게 그것이 충분히 우리 자신이 되고 타인을 존경하며 삶에 기여하는 지는 마리안 윌리암슨(Marianne Williamson)에 의해 잘 요약되어 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우리가 미숙하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우리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우리의 어둠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빛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묻는다, 재기발랄하고, 훌륭하고, 재능 있고, 멋진 나는 누구인가? 실제로 그렇지 않은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신의 자녀이다. 당신이 작게 노는 것은 세상에 기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 주변으로 불안전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움츠러들어 있는 것에 대해 각성되어야 하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 모두는 자녀들이 하듯이 빛나도록 의도되어졌다.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신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태어났다. 그것은 우리중의 몇몇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이에게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비추게 함으로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다른 이들이 같을 것을 하는 허락을 주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됨으로서 우리의 현존은 자동적으로 타인을 해방시킨다. 매일 당신 자신과 타인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당신이 실습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것이 자비로운 관계를 촉진시키고 당신이 가장 삶에서 소중히 여기고 바라며 더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을 더욱 충분히 인식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식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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