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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 (AVP) 모델의 효과 와 그 의미 :: 2011/07/19 16:44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의

실제와 그 효과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 AVP'의

사례를 중심으로-   

                                                                                          박 성 용 박사


제1장 들어가는 글

제2장 새로운 패러다임인 '회복적 정의'의 특징과 한국사회에서 논의 현황

제3장 회복적 실천 프로그램의 원리와 감옥에 있어서 그 적용

제4장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프로그램의 내용과  그 효과분석

제5장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프로그램과 회복적 정의

결 론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프로그램의 내용과 그 효과 분석

AVP모델의 효과 연구 분석과 그 의미

 

내면의 신성하고 선한 근본적인 능력에 대한 각성과 비폭력적 해결 기술에 기초한 AVP가 별다른 세인에 대해 광고없이 자발성과 헌신력에 기초하여 현장에서 현장으로 풀뿌리에서 풀뿌리로 옮겨지고 있는 규모가 벌써 50여개 나라로 퍼져가고 있다는 것은 AVP워크숍의 성공에 대한 반증이다. 그리고 재소자들이 스스로 진행자가 되어 다른 재소자를 자발적으로 돕는 시스템이 운영된다는 것은 그 긍정적인 효과를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퀘이커의 일하는 특성에 영향을 받아 스스로 하는 일을 잘 자랑스럽게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로 인해 75년에 시작된 AVP 워크숍에 대해 그 성과에 대한 평가 보고서를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은 불과 2000년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필자는 여러 나라 AVP 공동체들이 보유한 재소자들을 위한 AVP 워크숍의 성과에 대한 평가연구서들을 기초로 이들 평가연구보고에서 나타난 비교 데이터들의 간략한 내용과 그 성과 결과 그리고 특히 참여자들의 경험에 대한 자기 보고들을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주로 자료는 미국 AVP공동체에서 나온 것들이 많지만 뉴질랜드, 르완다, 남아공화국 그리고 영국의 AVP공동체를 방문하여 얻은 연구 자료만을 포함하며 다른 몇 가지 보고 자료들은 비슷한 사례이기에 생략하기로 한다. 이들 다양한 지역의 보고 자료들은 AVP 워크숍이 문화적 편견에 상관하지 않고 다문화적 적응과 참여자들의 효과적인 변화에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고 있다는 필자의 신념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먼저 미국에서 행해진 주목할 만한 연구들은 슬로안(Sloane), 왈라스(Walrath) 그리고 밀러와 쉬포드(Miller&Shuford)에 의해 행해졌다. 슬로안은 델라웨어의 주립 감옥에서 위반행위 비율에 대한 AVP의 결과들을 연구했다. 통제그룹(비교대상그룹)과 경험그룹(AVP참여자그룹)으로 나눠진 비교그룹들은 델라웨어 교정소(Delaware Correctional Center)에 의해 제출된 명단들에서 무작위로 선택되었다. 그 통제 그룹은 자원한 37명의 재소자로부터 왔지만 아직 2002년 2월까지 AVP훈련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경험 그룹은 2002년 2월까지 훈련을 마친 31명의 재소자들이었다. 감옥 규칙의 기록된 위반행위를 기록함으로서, 훈련 시작 전부터 훈련기간까지 반사회적 행동의 발병도의 변화는 의존하는 변수(the dependent variables)였고, 거기에서 AVP 수료자들은 통제 그룹과 비교되었다.

슬로안의 연구 보고서들의 특징은 2000년 미국전체인구의 1.3%에 해당하는 1백4십만의 재소자들의 과밀한 연방 및 주립 감옥의 현황에서 재소자 한 명당 연간 12,000달러를 지출하는 상황에서 재소자에게 행해지는 일반교화프로그램들은-예를 들면, 일반교육개발(GED)훈련, 대학코스, 직업훈련, 기본문해교육 등- 별로 재범율의 감소에 기대에 못 미쳤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반면에 협상과 관용, 소통과 자기 확신 등의 사회적 기술을 가르친 AVP의 경우에는 40이전의 나이, 특히 청소년에 대해 그리고 고등학교 이상의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들에 대해 인종에 관계없이 효과가 있었다는 비교결과를 내 놓았다. 참여한 재소자들은 AVP가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고 보고하였다:

 

* 문제를 다루는 데 새로운 시각을 준다.

* 갈등에 대한 대안적 접근에 대해 구체적인 예들을 제공한다.

* 잠재적인 폭력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도구와 기술을 제 공한다.

* 내가 본받을 수 있는 역할 모델을 제공한다.

* 다른 AVP 동료들이 AVP 원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 게 한다.

*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구축한다.

* 낡은 습관적 패턴을 깨뜨린다.

*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갖게 한다.

* 위협을 주지 않는 상황을 제공한다.

*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실습하게 한다.

왈라스(Walrath)에 의한 연구는 존 합킨스 대학(John hopkins University)의 연구과제로 메릴랜드에서 중급-안전(medium security) 교정 시설에서 행해졌다. AVP 워크숍을 듣기로 예정된 재소자들 명단에서 경험그룹 53명이 선택되었고 그 경험 그룹은 AVP에 대해 아직 자원하지 않았던 이들 41명이 비교그룹으로 선택되었다. 이 수용시설은 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나 평가기간에는 약 50%가 초과 수용되었으며 연구표본으로 참여한 재소자들의 평균 형기확정은 20년으로 1년부터 종신형까지 다양하고 범죄내용으로는 강도, 살인, 폭행 그리고 성폭력까지 여러 층이었다. 경험그룹과 통제그룹의 조사는 1995년 1년 기간을 걸쳐 이루어 졌다(입문 워크숍들은 오직 1달에 1회 열렸다).

이 연구에는 AVP참여자의 개인의 내면과 행동에 대한 충격에 대한 좀더 직접적인 평가를 포함하고 있다. 4개의 개인의 내면에 대한 전문영역의 측정방식을 도입하여 분노표현, 자기존중, 생활지향테스트, 자기통제에 관한 학계의 이론을 도입하여 재소자들에게 자기의 갈등대면에 관련된 빈번도를 측정하는 10개 항목에 대한 자기-보고 질문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들을 통해 나온 결과물은 경험그룹이 통제그룹 보다 분노를 표현하고 경험하는 수준이 중대하게 낮았고 낙관성이 더 높은 경향을 보여주었다. 양쪽 그룹의 재소자들은 개입이후 6개월간 총체적인 자기-존엄에 대해 상당히 낮았지만, AVP에 참석한 재소자들은 AVP 훈련 6개월간 갈등대면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밀러와 쉬포드(Miller&Shuford)는 좀더 최근에 재범률에 대한 AVP의 효과에 대한 연구보고를 발표하였다. 주에서 가장 큰 교정시설인 델라웨어 교도소(Delaware Correctional Center)에서 1993년-2001년까지 AVP 참여 재소자들에 대한 무작위 샘플을 채취하여 조사하였다. 그의 연구대상자중 175명은 자료수집 1년 전에 출소하였고 162명은 2년 전에 그리고 148명은 3년 전에 각각 이미 출소한 사람들이었다. 각각 3년간의 축적자료들을 분석하여 석방 3년 끝에 AVP 참여자들이 일관성 있게 전반적으로 현저하게 재범율과 상습범죄율이 낮았다고 보고하였다. 다음은 그 결과에 대한 각각의 표이다:

 

감옥에의 재귀환율

조표준그룹   45.8%      62.5%          70.8%

AVP 그룹           28.0%      40.1%          46.9%

                       1년차       2년차            3년차

 

 

재범률

대조표준그룹    20.8%       37.5%         58.3%

AVP 그룹        10.3%        24.7%         31.1%

                   1년차         2년차          3년차

 

 

폭력적인 중죄 재범률

AVP 그룹         2.9%        4.3%          5.7%

                    1년차       2년차          3년차

 

 

밀러와 슈포드가 보고한 폭력적인 중죄 재범률에 따르면 AVP 그룹의 폭력적인 재 위반율은 3년 후 5.7%이며 재 위반의 대다수는 비폭력적임을 보여준다. 이들 연구자는 낮은 3년간의 폭력 누범율과 AVP 그룹에 있어서 3년 누범률의 저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언급한다:"이들 놀라운 결과는 AVP가 재범과 같은 것을 줄이는 데 효과적임을 제시한다.”

AVP워크숍이 문화적 장벽 없이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이미 전 세계 AVP 공동체들의 존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다른 문화에서의 그 성과를 일별하기 위한 참조가 되는 것은 르완다에서의 AVP에 대한 평가이다. 2003년 8월에 두 연구자(Niyongabo & Yeomans)는 르완다의 4 지역에서 개인적으로 워크숍에 참가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39명과 만나 AVP에 대한 그들의 경험과 효과를 조사하였다. 이들 회견의 결과들은 주제별로 AVP 워크숍 방법론, 가장 영향 받은 프로그램 요소, 르완다 문화에 대한 관계, 인종적 분리의 극복, 용서, 가카카(Gacaca)* 과정에 대한 공헌, 상하수직관계, 여성, 가족, 그리고 종교 그리고 회견자들의 결론적인 언급 등으로 구성되었다. 연구자들은 평가보고를 통해 AVP가 가카카 과정에 관여한 판관들에게만 아니라 참여자들이 그들의 가정과 매일의 일상적 삶 안에 있는 갈등을 해결하도록 돕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가리킨다.

다른 평가 연구는 뉴질랜드 AVP 프로그램에 대해 실시되었다. 뉴질랜드AVP는 1992년 5월에 오크랜드(Auchland)에서 시작되고 그곳의 문화적 사회적 환경에 맞추어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을 밟았다. 2002년 연구를 시작할 때까지 그동안 약 6,000명의 공동체 사람들과 5,000명의 재소자들이 AVP 워크숍에 참석하였다 당시 약 100명의 훈련된 자원 진행자들이 워크숍을 통해 배출되었다. 연구자인 필립스(Philips)는 참여자들의 경험과 AVP 효과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81개 워크숍 평가양식과 과거에 AVP워크숍에 참여한 공동체 및 전직 재소자들 635명에게 발송하여 응답하여 돌아온 146개의 조사 설문지(이중 45명이 재소자)를 통해 분석하였다.

AVP 목표들을 성취함에 있어서 워크숍의 도움에 대한 축적적인 비율은 컴퓨터로 처리되었고, 그 결과는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대답한 것에 따르면 워크숍은 5개 주제 목표에 대해 "시간의 대부분" 도움을 주었고 다른 두 목표에 대해서는 "때때로" 그리고 "거의 항상" 도움을 주었다고 참여자들이 느꼈음을 보여주었다. 질적 분석을 위한 자유대답방식 질문들로부터는 공동체의 감각, 자기 확신, 표현의 명료성 혹은 이해, 증진된 기술과 지식, 의사소통기술, 신뢰, 친밀감과 안전, 책임감, 자기-존중 혹은 자기-가치 그리고 공손함이 증가되었다고 응답자들은 진술보고 하였다. 필립스는 "이 연구의 결과들은 AVP 워크숍들이 AVP목적과 목표들을 충족하기 위해 공헌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결론을 내렸다.

남아공화국에서 AVP워크숍 평가는 2004년 10월과 11월에 열린 폴스무어(Pollsmoor) 감옥의 장기수(maximum security) 시설에서 시작된 워크숍에 대한 참여관찰과 10회의 다른 참여자들(6명)과 진행자들(4명)과의 인터뷰에 의한다. 재소자들의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개인적 진술들에서 자기존중, 신뢰관계의 성장, 갈등해결기술의 활용 자기존중 등의 긍정적인 평가가 보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공화국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상황으로 인한 수용시설의 300%까지 재소자들이 수용되는 열악한 수용시설과 관리들의 부패 등 사회적 상황과 교정환경의 악화, 교도소내 높은 폭력과 비좁고 갇힌 상황에서 비폭력 대안을 감옥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평가도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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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9 16:44 2011/07/19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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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모델의 역사와 그 내용 :: 2011/07/19 16:38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의

실제와 그 효과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 AVP'의

사례를 중심으로-   

                                                                                          박 성 용 박사


제1장 들어가는 글

제2장 새로운 패러다임인 '회복적 정의'의 특징과 한국사회에서 논의 현황

제3장 회복적 실천 프로그램의 원리와 감옥에 있어서 그 적용

제4장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프로그램의 내용과  그 효과분석

제5장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프로그램과 회복적 정의

결 론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프로그램의 내용과 그 효과 분석

제 1절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모델의 역사와 그 내용

 

AVP는 다양한 폭력의 현장 속에 있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는 힘을 주기 위한 폭력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의 방식을 습득하며, 삶의 비폭력적인 방식의 핵심인 희망과 공동체의 정신을 발견하여 적극적인 비폭력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경험함으로 배우기(learning by experiencing)'의 방법에 의한 자기 발견적인(self-heuristic) 워크숍을 제공하는 자원가들의 자발적 조직체이다.

2010년 현재로 전 세계 52개 나라에서 운영되고 있는 AVP워크숍은 그 처음 발단이 1970년 초에 감옥에 있는 폭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티카감옥(Attica prison)에 있는 재소자들이 요청함에 의해 여기에 갈등해결에 관심 있던 퀘이커 실무자들에게 요청함으로 시작했다. 재소자들은 청소년 범죄자들이 그들의 대부분의 삶을 감옥 시스템 내에서 사는 것에 대해 공동체를 보호하고 이들 젊은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폭력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르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였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그들의 요청에 응답하여 공동체 갈등에 대한 퀘이커 프로젝트에 관여하게 되었고 첫 번째 감옥 워크숍을 고안해 내어서 1975년 그린하븐(Greenhaven) 감옥에서 열게 되었다

AVP 실천가들이 자발성과 비영리적 특성 그리고 풀뿌리 현장에서 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는 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AVP 워크숍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소문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AVP 워크숍은 빠르게 뉴욕 주 감옥 시스템 전반에로 퍼지게 되었다. 몇 년 이내 나라 전체를 통해 다른 감옥 시스템들에게도 전달되었다. 폭력과 갈등문제는 감옥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와 단체에서도 있는 문제이기에 AVP워크숍은 감옥만이 아니라 공동체, 학교 그리고 기타 교회나 종교기관, 시민사회단체 등에도 그룹으로 존재하는 대부분의 단체에 적용되고 있다.

AVP 워크숍 프로그램은 3일간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단계는 입문(기초) 워크숍, 심화 워크숍, 그리고 진행자 훈련 워크숍으로 이루어진다. 입문 워크숍은 긍정심, 의사소통, 협력, 창조적 갈등해결의 내용을 특징으로 한다. 심화과정의 경우는 갈등과 관련된 두려움, 분노, 의사소통, 용서, 획일화(stereotyping), 남녀관계, 편견 혹은 참여자들이 중요하다고 동의하는 기타 주제를 다루게 된다. 진행자(facilitator)워크숍은 소모임을 이끌기 위한 팀 구성, 팀 계약, 아젠다 설정, 실습, 변혁적 힘에 대해 말하기 등으로 구성되어 진행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일단 세 단계를 거친 후에는 수석진행자를 도와 실습의 경험을 쌓으면서 진행자로서 팀을 구성해 다른 워크숍을 실제로 이끌게 된다.

기본적으로 각 AVP 워크숍은 참여하는 자의 참여의지의 자발성에 근거하여 참여자와 진행자가 모두 서클의 형태로 모여 서로 배우고 스스로 발견해내는 경험적인 워크숍의 형태로 진행된다. 보통 3명의 팀으로 진행자가 참여하며, 진행자와 참여자들의 욕구에 따라 속도와 내용에 있어서 약간씩 변형을 갖고 있지만 전체적인 틀에 있어서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과 교육현장에 대응하는 신축성을 발휘한다. 여기서 참여자는 아무런 강제 없이 서로 동의된 일련의 근본 규칙들을 통해 주제에 대한 대화와 그룹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AVP 참여자로서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이들 그룹 연습들은 전략적으로 고안된 것으로 오랜 실천을 통해 그 효과가 증험된 것들이다. 이들 그룹실습들을 통한 경험나누기를 통해 참여자들 간에 안전과 신뢰의 공동체를 빠르게 건설하게 되고 생생한 정서적 교류와 관계회복을 통해 개방된 나눔의 분위기가 빠르게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변혁시키는 힘"이란 개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는 방법들을 발견하기 위해 자기 안에서 도달하게 되는 각 사람의 본래적인 신성한 능력 혹은 선함이며 이를 통해 자기 존중과 타인배려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대한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내적 에너지와 폭력상황에 대한 비폭력적 대응의 기술들, 그리고 각각의 연습 소단위를 통해 나타나는 강하게 지원되는 정서적 교류와 친밀감, 생생하게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에너지 공급게임(이른바 “재생놀이(light & livelies)"가 여기 속한다) 등을 통해 참여자는 자존감, 배려, 존중, 신뢰, 연결이라는 긍정적인 삶의 태도와 가치인식을 빠른 속도로 스스로 취득하게 된다. 워크숍의 목표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자신과 타인을 긍정함으로 자기-존중감을 세우며, 의사소통에 대해 배우고, 협력과 갈등해결의 기술을 익혀서 스스로 비폭력적인 삶을 사는 능력을 익히는 것이다.

어떻게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 AVP" 프로그램이 자신이 원하는 목표들-자존감, 배려, 존중, 신뢰, 연결-들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이론적 설명에 있어서 비텔(Bittel)은 범죄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낮은 자기-가치와 낮은 자기-존중은 결국 책임감과 상호 신뢰의 결여로 이어져서 손쉽게 폭력과 그 악순환으로 가기 때문에 그런 발전의 순환을 본질적으로 역전시키는 기능을 AVP워크숍이 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다음은 그의 이론을 보여주는 표이다:

 

 

 

범죄를 발생시키는 배경 요인들

(Crimnogenic Bacground Factors)

⇓                                                            ⇓

낮은 자기-가치& AVP 관여하기

                                                       자기-존중 자기-가치 & 자기-존중구축

⇓                                                                         치유⇓

신뢰의 결여                                             신뢰 조성 (가면 떼기)

⇓                                                                       치유

무력화(Disempowerment)                             선택들의 노출

⇓                                                                      치유

책임성의 결여                                          책임을 발전시키기

⇓                                                                     치유

폭력                                                  폭력에 대한 비폭력 대안들

 

그는 AVP 워크숍이 이런 순환을 역전시킴에 의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자기-가치와 자기-존중을 세움을 통해,

신뢰를 촉진시키고, 자신이 선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며 책임감을 발전시켜,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갈등의 상황에서 폭력에 대한 대안을 선택할 수 있게 인도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AVP가 어떻게 작동하는 지 보여주는 슬로안 (Sloane)의 아래의 AVP 개념 도식을 보면 더욱 보편적인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도표 1(Figure 1)에서 보면, 재소자는 각자의 개인적 사회배경과 성격들을 가지고 오는 데 대부분 정상적인 사회 발달을 결여하여 있고 나이, 교육, 사회경제적 요소들과 같은 다양한 인구학의 요소(demographic factors)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AVP 워크숍은 참여자에게 자기-존중이나 존엄감의 분위기를 제공함으로서 기꺼이 소통하려는 의지를 일으킨다. 스스로를 소통할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로 보게 되고, 소통을 통해 애정어린 신뢰를 구축하게 됨으로서 감정과 다른 이로부터 배움을 갖게 됨으로서 타인들을 받아들일 만한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애정적인 신뢰가 증가하면서 타인이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게 되며, 이것이 '정상적인' 사회적 행위에 가까운 결과들을 불러내고, 더욱이 연습들을 통해 애타성과 공동체성의 감각이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 연습을 통해 협상, 갈등전환 그리고 소통의 사회적 기술을 응용하는 과정을 통해 폭력적인 자동반응대신에 비폭력적인 성찰된 반응을 가져오게 함으로써 더욱 안전하고 긍정적인 실천력을 강화하는 환경을 제공하게 된다.

여기서 보듯이 자기 확신과 신뢰의 분위기 그리고 비폭력적인 사회적 대응의 기술들은 토론과 의사소통을 촉진시킴으로서 친사회적인 행동에 기여하게 된다. 자기 확신과 신뢰감 그리고 사회적 기술과 감정표현의 능력과 같은 친사회적 도구들의 실습은 고정관념을 줄이고 협동력을 향상시킴으로서 갈등과 분노를 주목할 정도로 줄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전환점은 이러한 신뢰, 편안함(예, 웃음, 개인적 대화, 접촉, 이야기 교환), 사회적 기술, 타인존중의 행동들이 빠르게 작동하면서 친 사회적인 행동이 급속히 상승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의 내부 그룹들 간의 애정어린 신뢰감이 일정수준 형성되는 순간에 이러한 변화는 급상승하게 되면서 새로운 확신과 태도변화가 일어나면서 변모된 생활태도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된다.

 

주목할 것은 여기서 배움이 전문가의 상담, 조언 등의 방식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공동의 경험과 지혜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그룹 개인들이 제공하는 다양한 경험들이 성찰되면서 스스로 자기 학습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AVP 워크숍에 있어서 모든 참여자는 자발성에 기초하여 대안을 선택하며 그렇기 때문에 인도자는 상대에게 뭔가 해결의 대답을 주는 ‘훈련가’가 아니라 "진행자 (facilitators)"란 용어를 사용한다. 보통 2~4명이 함께 팀으로 참여자들과 함께 경험하며 이는 충고나 가르침이 아닌 자기 발견적(self-heuristic) 경험에 기초하는 AVP 철학을 반영한다. 이에 대해서는 AVP 기초 워크숍 매뉴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것은 추구하고 나누는 과정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대답은 그들의 질문과 그들의 문제라는 - 그들 자신 내부에 – 동일한 장소에 묻혀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일은 자극을 제공하고 그들로 하여금 해결을 위해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그것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는추구자 친화적인 (seeker-friendly)’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진행자 훈련 워크숍을 받은 후에 진행자 자격을 얻은 이는 더 경험 많은 진행자와 더불어 실습하며, AVP 워크숍에 참여한 적지 않은 재소자들이 AVP의 영향을 받아 감옥 안에서 진행자로서 헌신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다른 재소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뉴욕 감옥 시스템에서는 두 세 재소자 진행자들(inmate facilitator)이 일반적으로 리더십 팀으로서 한 "외부" 진행자와 일하며, 몇몇 감옥은 재소자 진행자의 커다란 "간부단 (Cadre)"이 있어서 그곳에서 워크숍을 위한 리더십 팀을 보낸다. 예를 들면 뉴욕의 싱싱 교도소에서는 AVP가 25년 이상 제공되었던 곳으로서 때때로 출옥에 의해 숫자의 변동은 있지만 거의 50여명의 재소자 진행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매주 "지원" 모임들이 이 리더십 팀을 위해 제공되고, 이 팀은 진정으로 자기 삶을 바꾸기를 원하고 감옥제도 안으로 다시 오지 않으려는 재소자들을 위한 지원 공동체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뉴욕에서는 수많은 이들 전직 재소자 진행자들은 “착륙활주로(Landing Strip)”라고 부르는 지원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출소한 재소자들의 일거리와 사회에로의 복귀 그리고 그들의 필요들을 돕는 것을 지원한다. 또한 델라웨어에서는 감옥에서 AVP 워크숍을 5단계로 더 심화된 과정을 재소자들이 참여하게 하여 앞에서 설명한 세 단계 외에 진행, 그리고 감독상담 회원되기 등의 과정을 추가로 밟게 해서 전문적 능력을 키워 감옥안에서 비폭력 공동체를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게 한다.

전 세계를 통해 AVP 공동체는 대부분 별다른 금전적 보수 없이 자발적 자원(voluntarism)의 원칙 하에서 폭력의 풀뿌리 현장들을 중심으로 일하는 비영리, 비종파적 특색을 지니며 2년에 한 번씩 국제총회를 통해 커리큘럼을 보완확대하며, 진행능력을 위한 훈련실습과 세계 곳곳에서 들어오는 워크숍 요청에 대한 협의 등을 하고 있다. 비-계급적이면서 상호협조적인 분위기를 지닌 AVP 진행자공동체는 평화로운 영혼을 성숙시키고 비폭력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세계의 폭력과 갈등의 현장에 접목시키는 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AVP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접목시켜서 뒤에서 진술하듯이 놀라운 성과들에 대한 연구보고들이 나오고 있다.

폭력상황에 있어서 매우 긍정적인 변화의 효과를 나타내는 AVP 워크숍의 비밀을 알려면 AVP 참여자로서 이를 직접 경험해야 한다. AVP 실천가로서 필자는 재소자에게 어떤 일이 AVP 워크숍에서 벌어지는지를 약간 소개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가 감옥에 있게 하는 것은 재소자를 비도덕화시키고 관계로부터 차단되어 우울하게 된다. 수감기간이 길수록 재소자는 보통 들어올 때보다 더 낮은 자기-존중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AVP는 3일간의 집중코스를 통해 참여자들이 두려움이나 비판당하는 것 없이 말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말하는 ‘정서적 안전’의 공간을 주게 된다. 이 안전공간은 비밀 지키기와 타인 존중, 그리고 경험 나눔을 통해 형성된다. 여기서 타자를 신뢰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긴장을 풀게 만들며 돌봄과 공감의 활동요소들이 자신들의 닫힌 가슴을 열게 만든다. 대부분의 재소자들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고 고백하며 이는 대부분이 과거에 많은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인 상처의 경험이 있고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고 보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낯선 사람, 특히 다른 재소자로부터 자신의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겨짐을 체험하는 것은 큰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을 마무리 평가시간에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AVP 워크숍에서 받은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과 타인에 대한 배려감은 갈등을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며 폭력적인 대응보다는 비폭력적인 대응을 추구하는 에너지를 제공하게 된다. 그리하여 감옥 안에서 동료 참여자와의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서로를 돕는 협력적인 지원구조를 만들어내며 어떤 재소자들은 수년 만에 처음으로 가정과 공동체에 접촉하게 되고 석방 후에도 재소자를 돕는 지원시스템을 만들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NGO단체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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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9 16:38 2011/07/1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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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훈련/평화교육/회복적 정의 모델로서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의 역사와 그 의미 :: 2011/07/13 11:43


21세기 새로운 제자직에로의 부름과 회복적 정의 실천의 AVP 모델

(주제: 폭력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교정 사명자의 역할)

박성용 박사,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국내 조직가

----------- 목 차 --------

1. 신을 만나는 새로운 자리로서 ‘뒤’와 ‘아래’

2. 뒤와 바닥의 실천자로서 마더 데레사와 샤를 드 푸꼬

3. 회복적 정의로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

4.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훈련(AVP)'의 역사와 그 의미

5. 향후 발전 계획과 미래에 대한 전망



4.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훈련(AVP)'의 역사와 그 의미

지금까지 회복적 정의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실제로 감옥에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성서의 회복적 정의의 입장을 재소자들의 자기 회복과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독교내에 이루어진 AVP란 모델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 AVP의 출현과 변혁적인 힘

1970년대에 뉴욕의 매우 철저한 보안으로 둘러싸인 감옥인 그린하븐(Greenhaven)에서 종사하고 있는 한 그룹의 수감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기에서 다른 접근이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젊은이들이, 종종 흑인들과 사회적으로 불이득을 당하는 배경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일들이 그들에게 힘들게 진행되어갈 때 어째서 폭력에 자주 의존하는지 궁금해 하였다. 이들은 평화교회인 퀘이커의 몇몇 회원들을 초대해서 그들이 “씽크탱크”라 부르는 그룹에 참여시켰다. 이 “씽크탱크”안에서 그들은 문제들을 뒤돌아보고 갈등해결에 대한 비폭력적인 방법들에 전렴하게 되었다.

그들은 좋은 결말을 가진 갈등에 대해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들은 갈등이 팽창해서 폭발하기 쉬운 상황으로부터 공기를 뺄 수 있는 그것이 무엇일까를 궁금해 했다. 그래서 갈등이 비극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사례들을 묻고 그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공격자가 자신의 의도를 멈추고 자신의 폭력의 계획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사례들속에 일정한 원리들이 희생자가 될 뻔했던 사람들의 대안적인 대응조치속에 존재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

뉴욕 센트럴 공원에서 저녁에 도서관에서 집으로 걸어가는 젊은 여인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느 한 남자가 그녀를 뒤따라와서 명백하게도 치근덕거리려고 합니다. 그녀는 돌아서서 그의 눈을 뚜렷이 바라보며 말합니다. “아 참 행운이군요, 당신이 내가 가는 길에 걷고 계시다니. 이 책들이 너무 무거웠거든요.” 그는 완전히 얼얼한 기분으로 그 책을 건너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를 평화롭게 집문앞까지 바래다주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난 것 같지 않지만 진실로 여기에 무언가 흥미로운 것이 일어났다. 단순히 폭력상황이 멈추어진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두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는 희생자가 자신이 무장할 필요없이 약함을 그대로 가지고도 상대가 힘을 못썼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가해자도 폭력적인 범행을 하는 데로부터 보호되어 자신의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었다. 아무런 거대한 위협이나 그자신이 폭력에 직면하지도 않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간단한 요청에 의해 보호되었던 것이다. 치명적인 상황이 놀랍게도 평화로운 결론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희생자가 될 뻔했던 자들이 그들이 행한 것과 같은 방식을 행할 수 있는 마음과 용기의 상태를 발견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그들의 놀라운 행동이 사건의 진행을 가까스로 바꾸게 되었는가? 많은 사례들은 이런 종류의 놀라운 경험에 대해 보도하면서 이를 통해 종종 갑작스런 강건함과 침착함 그리고 그들 자신을 훨씬 넘어서는 힘에 대한 느낌을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감옥의 씽크탱크는 폭력적인 행동을 변환시키는 힘, 장래의 성폭력자(prospective rapist)를 신사로 바꿀 수 있는 힘이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었습니다. 그들은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변혁시키는 힘 (Transforming Power)”란 용어를 주조해 냈다.

AVP에서는 변혁시키는 힘이란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그 변혁시키는 힘이라는 실재 그 자체가 중요하다.

다른 예) “사랑의 걷기 "

1990년대 초 동부 로스앤젤러스에서 카톨릭 십자가선교회의 회원들인 한 그룹의 여성들이 갱들의 폭력이 자신들의 이웃에서 가져오는 무거운 비용에 대한 해결을 찾고 있었다. 교구안에서 8명의 갱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갱들의 살인과 부상이 거의 매일 일어났다. 어느 특별히 폭력적인 주간동안에, 그 여인들은 기도그룹으로 모여 이 살육에 대한 해결책을 간구하고 있었다.

그날 모임의 성서 읽기는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가시다”였다. 어머니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 - 갑작스러운 발견과 놀람으로 전기충격을 받아서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신들의 궁지에 대해 깨달은 바를 나누었다.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는 그들이 살고 있는 보일 하이트(Boyle Heights) 거리에서 벌어지는 갱 전쟁이었다.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안전에 두려워하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그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보트에 함께 좌충우돌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들도 문을 꼭 걸어 잠군 자신의 집안 속으로 도피했다. 그들이 안전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확신을 가지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선 밖으로 나오는 것임을 믿었다. 그러나 보트에 있었던 이들처럼 그들의 마비상태가 그들이 안전할 것이란 것을 궁극적으로 보장해 주지 못했다. 자신의 집에 퍼붓는 유탄들에 의해 살해당할 수 있거나 혹은 대낮에 시장으로 걸어가다가 총알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 여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제자들처럼 우리들은 그분이 마법을 쓰는 것처럼 이 위기를 해결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부르짖고, 우리를 구하시도록 그분께 탄원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보트로부터 나오라. 내게 오라: 그 보트로부터 나오라. 안전함의 환상을 뒤에 나두라. 보트로부터 나와 물위로 걸으라. 물위로 걸으라 ’- 폭력으로 찌든 거리속으로 들어가라 - 그러면 우리가 함께 폭력을 잠재우게 될 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지금 말하고 있는 건가요?” 다른 사람들이 조금은 날카롭게 물었다. 그녀는 설명하기를 자신은 그들이 갱들의 전쟁 지대 한가운데에서 함께 걸어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느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갑자기 미쳤다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긴 토론 후, 그날 밤 70명의 여성(그리고 소수의 남성)이 갱의 구역부터 마을을 지나 다음 마을까지 페리그리나치온 (순례 혹은 행진)을 시작했다. 그들이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가 깜짝 놀란 갱멤버들을 만날 때, 어머니들은 그들을 초청해서 같이 기도하자고 하였다. 어머니들은 그들에게 음료와 간식들을 제공하였다. 기타가 조제되어 그들은 남미의 미코아칸, 잘리스코 그리고 치아파스로부터 온 그들에게 익숙한 고대의 노래를 부르는 데 함께 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날 밤을 통해 8 전쟁지대에서 갈등은 까닭 모르게 그리고 혼란스럽게 억제되었다. 사람들은 당황해 했고, 갱 단원들도 혼란스러워 했다.

매일 밤, 어머니들은 걸었고 일주일내 갱과 관련된 폭력은 급격한 감소가 있었다. 새롭게 형성된 조직 - 이웃의 평화를 위한 위원회 -가 ‘전쟁의 규칙을 깨고’ 그들 지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출현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관여하고 간섭함으로써 그들은 고조되는 폭력과 보복의 오랜 각본에 도전하고, 얼마동안 새롭고 더 창조적인 각본을 창조하였다. 그들의 것은 자신의 이웃으로 걸어가는 물리적 여행이상의 것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것이 전쟁의 지대로부터 사랑의 집으로 가는 근본적인 영적 여행이었다.

이러한 위험의 지대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들은 평화를 위한 순간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그 공간에서 모든 당사자들이 그들의 인간성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갱 멤버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처음으로, 그들을 돌보는 다른 인간 존재를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마비시키는 두려움과 염려를 내 보내고 갱들의 인간적인 얼굴을 충분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여성들이 그들의 밤 시간 여행을 “사랑의 걸음걸이 Love Walks"라고 명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폭력이 고조되는 순환을 간단히 개입한 것 이상을 실현해 냈다. 그들의 인간성에 대면함을 유발시킴으로써 그들은 의사소통과 변혁의 과정을 방출해 냈다. 그들의 행동은 갱 멤버들과 자기 자신들을 변화시켰다. 여성들은 실직과 경찰들의 잔인성에 대한 갱 멤버들의 깊은 고뇌에 대해 들었다. 이것은 이번에는 멕시코스타일 빵공장, 빵집, 그리고 아동양육센터를 개발시켰고, 몇몇 일자리를 창출하였고 갱 멤버들에게 일자리기술을 얻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갈등해결기술이 배우게 되는 공간이 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갱들도 이 프로젝트들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폭력적인 상황에서 비극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이 두 사례속에 희생자들은 ‘변혁시키는 힘’이 일어나도록 무엇을 했을까?

우선 그들은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내면의 두려움을 내보내고 자신을 신뢰하였고, 사건이 긍정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 변혁적인 힘이 일어날 수 있는 데는 5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 자아에 대한 존중

* 타자에 대한 돌봄

* 반응하기전에 생각하기

* 비폭력 해결을 추구하기

* 최선의 것을 기대하기

여기에는 나 자신과 타인들을 보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폭력적인 몸짓 뒤에 있는 사람의 인간성을 보는 것이다. AVP 이론가들은 사람들이 폭력에 의존하는 이유는 몇가지 근본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 그들의 낮은 자기 존중감이 위협받은 느낌을 위한 문지방을 극도로 낮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단순한 접근도 이미 공격으로 인식할 수 있고 그래서 즉각적으로 그들의 방어기제들(defense mechanisms)을 작동시킨다.

* 이들 방어기제들은 그래서 쉽게 폭력적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시민생활방식에서 진정한 욕구, 불일치 혹은 분노를 소통할 방법을 거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로서 내 욕구와 소원들을 협상할 수 없을 때 그때는 나는 좀 더 쉽게 단지 움켜쥐거나 때리는 경향을 갖게 된다.

* 세 번째로, 문제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정에서는 건설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전통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해븐 그룹은 그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젊은 범법자들의 태도를 비폭력적이고 협력하는 방식들로 전환시키기 위해 주목이 필요한 세 번째 영역으로서 적극적인 협력(positive cooperation)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발견된 원리들로부터 그린해븐 씽크탱크는 “AVP" 모델을 개발하였습니다.

◉ 조직과 워크숍으로서 AVP

AVP는 다양한 폭력의 현장속에 있는 개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해방시키는 힘을 주기 위한 폭력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실제적인 대안을 찾고, 삶의 비폭력적인 방식의 핵심인 희망과 공동체의 정신을 발견하게 하는 경험적 워크숍(experiential workshop)을 제공하는 자원가들의 조직체이다.

어째서 우리는 AVP에서 사람들을 훈련시키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존엄성과 자기-존중, 그리고 자기-실현을 위한 기회를 가진 삶은 모든 사람이 지닌 생득권(태어나면서 가진 권리)임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폭력에 의해 점철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제도들, 가치 그리고 오락 속에 깊이 새겨있는 폭력에 대한 반응이다. 몇몇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향을 받지만 폭력에 대한 능력을 갖지 않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폭력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사람들이 이런 방법으로 살아야만 한다고 믿지 않는다.

* 우리는 적대감과 파괴력을 협력과 공동체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 우리는 이 힘이 모든 곳에-우리에게, 우리의 반대자에게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 우리는 이 힘‘속으로 조율될’ 수 있고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와 우리의 반대자가 평화와 존엄에 대한 우리의 생득권을 다시 얻을 수 있게 함을 믿는다.

* 우리는 이 힘으로 전환되는 역동성은 배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훈련(AVP)은 더욱 건설적인 삶과 좀 더 건강한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이러한 신념과 역동성을 나누는 방식이다. AVP 워크숍은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는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할 일은 탐구자에게 친절한(seeker-friendly) 환경과 약간의 도구와 기술들을 제공해서 사람들이 자기들 안에서 해결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순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며 그가운데서 크고 작은 폭력들과도 만나게 된다. 각 사람의 지각력, 의사소통의 여지, 갈등 해소의 능력과 감정의 높낮이에 따라 순간적으로 반응 하게 되고 많은 경우 상처와 후회가 따른다. AVP는 모든 참석자들이 폭력과 갈등을 해소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는 연습을 통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변화시키는 힘 Transforming Power>에 의해 평화로운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정도의 학력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지식중심이 아닌 체험중심으로 짜져있고 그 과정속에 즐거움과 자발성을 도입한다.

AVP 워크숍은 책상 없이 원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서 진행되며 모든 참석자의 능동적 참여로 과제가 주어지고 혼자, 파트너별, 소그룹별 표현, 만들기, 역할극, 침묵, 놀이와 웃음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며 주제는 진지하지만 과정은 즐거운 방법들이 도입되어 강력한 자기 존중과 타인배려, 신뢰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 AVP의 효과에 대한 연구

AVP는 원래 1975년 뉴욕 교도청에 속해 있는 그린헤이븐 교도소의 청소년 재소자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종교와 교화 위원회의 부탁으로 퀘이커 교도들이 시작한 후 첫 번 세미나가 끝나자 미국 전역과 카나다에서, AVP라는 이름으로 급속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90년대부터 유럽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폭력의 희생자이자 제공자인 재소자의 인격적 변화에 대한 AVP의 놀라운 효과에 따라 폭력이 있는 어느 곳에도 이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급속히 번져나가 이제는 세계 42개국에 국가별 지부가 형성되어 있고 이들이 함께 모이는 국제총회도 열고 있다. (* 국제 AVP- www.avpinternational.org; 영국-www.avpbritain.org.uk; 미국-www.avpusa.org)

미국 델라웨어 주립 감옥에서 행해진 AVP의 효과 연구에 따르면 (총인구중 1.3%에 해당하는 1백 4십만명이 재소자로 있고 재소자 1명당 연간 12,000달러 지출) 재소자에게 행해지는 일반교화프로그램들은-예를 들면, 일반교육개발(GED)훈련, 대학코스, 직업훈련, 기본문해교육 등- 별로 재범율의 감소에 기대에 못미치쳤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반면에 협상과 관용, 소통과 자기 확신 등의 사회적 기술을 가르친 AVP의 경우에는 40이전의 나이, 특히 청소년에 대해 그리고 고등학교 이상의 수준의 교육을 받은 자들에 대해 인종에 관계없이 효과가 있었다는 비교결과를 내 놓았다.

또한 재범률에 대한 다른 연구보고에 따르면 각각 3년간의 축적자료들을 분석하여 석방 3년 끝에 AVP 참여자들이 일관성있게 전반적으로 현저하게 재범율과 상습범죄율이 낮았다고 보고하였다.

재범률

대조표준그룹          20.8%            37.5%               58.3%

AVP 그룹                 10.3%             24.7%              31.1%

                                   1년차            2년차               3년차

폭력적인 중죄 재범률

AVP 그룹           2.9%             4.3%                     5.7%

                            1년차           2년차                   3년차

AVP 참가 재소자들의 코멘트:

“기적적인 변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AVP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나는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AVP를 통해 나는 증오, 성냄 그리고 절망으로 뭉쳐있는 사람으로부터 인간성의 보호와 풍성케 하는 데 내가 책임이 있음을 믿는 사람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진실로 무엇인지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었다. 단지 대학에서 3일 보내는 것과 같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들은 것에 대해 진실로 감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 10년간에 경험한 것중 이 3일이 최고였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 프로그램을 즐겼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결속감을 준다. 우리 모두는 이야기 하고 진실로 가슴 따스한 소통을 하였다. 전에 이와 같은 것 그 어느 것도 경험한 바가 없었다.”

“나는 내 주변에 방어벽을 쌓아 두었다. 그러나 AVP는 누군가에게 말 할 수 있게 하였고, 내 감정들을 노출시키고 어떻게 내가 진정으로 느끼는지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게 하였다. 나는 이 코스를 끝내면 사람들은 삶에 대한 다른 전망을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내 말을 문제시하지 말고 직접 당신이 시험해보라.”

범죄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관계를 소원하게 한다면 AVP는 재소자로 하여금 낙인받은 가해자를 회복된 개인으로 변화시키는 기회를 제공한다. AVP는 재소자가 범한 범죄보다는 현재의 갈등에 대한 비폭력 대응과 미래의 좀 더 평화스런 삶의 가능성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AVP가 개인의 본래적 선과 긍정적 잠재성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AVP의 우선적 목표는 재소자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긍정의 능력을 강화함으로써 타인을 배려하고, 비폭력 소통기술을 통한 관계회복을 통해 온전한 자아와 사회로의 책임감 있는 복귀를 고취한다. 그런 면에서 과거에 무엇이 행해졌든 미래의 가능한 삶에 대해 중심을 둔다.

5. 향후 발전 계획과 미래에 대한 전망

AVP의 가치는 각 개인에게 있는 근본적인 선이 경험과 변혁시키는 힘의 경험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아와 타인을 돌보고 존중하는 신뢰를 회복하며 폭력적인 상황앞에서 강력한 비폭력의 대안의 삶을 제공하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지금까지 재소자를 위한 기독교의 노력은 주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변화가 있게 된다는 신앙고백적이면서 숨겨진 개종주의가 지닌 실질적인 그 효과에 대한 의문성과 교정복지 시설의 현대화만큼 못 미치는 재소자 자신의 내적인 변화의 실패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다.

이미 한국에서는 평화단체를 중심으로 독일 AVP의 도움으로 지난 2년간 소개와 입문, 심화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이 워크숍은 성격상 15명 내외의 소그룹을 통한 참여적 학습방법을 요구하기 때문에 현재는 40명이 심화과정을 끝낸 상태이다. 그중에 절반은 최종 인증과정인 가을에 열리는 진행자워크숍을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배출되게 되면 내년부터는 한국말로 자체로 AVP 워크숍을 자유롭게 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학교와 공동체만이 아니라 감옥에도 이 모델을 적용할 수 있게 된다. 바라기는 교정사명자들도 이 워크숍을 통해 재소자를 위한 평화선교에 강력한 도구를 얻을 수 있고 그 기회를 갖이 나누기를 “AVP 한국활동가모임” 조직가로서 진심으로 희망하고 있다.

AVP는 사람과 관계의 치유와 미래를 향한 변화를 모색하는 실천적 특성을 지닌다. 특히 ‘회복적’이란 말의 의미가 상처와 손상이전의 원상상태로의 복귀란 의미가 아니라 미래로의 향함과 의미있는 삶에로의 사람과 관계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라면 AVP 모델은 회복적 정의의 실현에 중요한 공헌을 할 수 있다. 그에 대한 미래적 지평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연대하기이다. 감옥에서 회복적 실천은 외부공동체와의 연대가 중요하다. 이는 감옥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길은 단순히 구제(charity)의 입장이 아니라 관계회복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문제에 관련있다. 여기에는 재소자를 돕는 자원가의 역할과 활동이 커다란 잠재적 가치를 지닌 돌봄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미 AVP는 감옥에서의 워크숍을 통해 외부 공동체 구성원들을 참여자로 데려왔고 재소자를 진행자로 세워서 공동체 구성원들과 재소자가 함께 비폭력 삶을 배우는 과정의 기회를 제공해서 서로의 신뢰를 구축한다. 그리고 재소자중 AVP진행자가 되어 출소이후에도 재소자의 문제를 서로 돕는 공동체를 미국, 영국, 독일, 아일랜드 등지에서 AVP를 통해 엮어내었다. 회복적 원리에 따라서 국가나 사법당국이 할 수 없는 재소자 자신의 능력부여와 돌봄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은 AVP의 활동과 맞물려 증폭되게 된다.

둘째 프로그램에 있어서 AVP와 다른 회복적 프로그램과의 연대이다. 이미 AVP는 자기존중, 의사소통, 공감을 통해 재소자가 회복적 정의의 과정속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가치와 관점 그리고 태도를 준비시켜준다. 피해자-가해자간의 대면에 있어서 가질 수 있는 적대감과 두려움을 해소시키는 데 유용한 기술과 태도를 AVP는 가해자에게 제공한다. 여기에 중재, 갈등해결의 전문적 기술, 비폭력 대화 등과 같은 다른 회복적 프로그램이 AVP 참여자들에게 보완적으로 제공되는 것은 서로 상생의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셋째는 감옥과 사회를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으로 구축하기이다. 아직 AVP는 감옥의 현 체재내에서 재소자의 성장과 변화를 돕고 있다. AVP는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감옥 시스템을 어떻게 재 구축하는가에 대해 연대하여 통찰을 받을 수 있다. 개인과 인간관계에 주로 초점을 두고 있는 AVP가 강제와 처벌의 가치가 존재하는 사회를 갱신하는 데 회복적 정의는 공헌하며, 회복적 정의는 태도와 신념에 있어 준비가 된 AVP 참여자와 실천가를 활용하여 형벌적 사법제도와 사회의 회복적 재구축에 대한 연대를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더 넓은 비전에는 교정실무자와 정책 입안자, 사법실무자들의 참여와 협력도 필요하다. 현재 한국은 회복적 정의문제가 일부 형법학자들의 이론담론으로만 형성되어 있고 그 실천적 프로그램에는 아직 상상력이 못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시민사회의 인프라 구축없이는 이 회복적 실천 프로그램이 가능하지도 않고 지속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AVP는 해외 40여개 나라에서 재범율을 현격히 낮추고 가해해자를 회복시키며, 관계를 치유하고, 공공의 선을 강화하는 데 매우 탁월하다는 것이 참여재소자들의 일관된 증언과 여러 연구문헌을 통해 입증되어왔다. 그리고 이 AVP 프로그램은 폭력이 가능한 현장 어느 곳에서도 그 효과가 있다. AVP는 문제가 되는 갈등 그 자체의 비폭력적인 대응만이 아니라 일생에 자기존중과 타인배려의 태도를 유지시킴으로서 그 효과가 일생을 지속하게 된다. 그 이유는 AVP는 머리로 이해되는 것을 넘어 가슴속에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교정선교에 있어서 긴 역사를 지닌 세진회와 법무부교정기독선교연합이 AVP라는 전문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면 새로운 차원의 교정사명자와 재소자가 우애 공동체를 이루고 회복적 정의를 실천하는 든든한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게 될 것임을 믿는다. 이러한 비전이 곧 실현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같이 협력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데레사의 허름한 오막집의 어둔 구석에서 램프를 켠 이야기처럼 어둔 감옥에서 램프를 키는 영혼들이 일어나기를...“누추한 곳은 램프를 감추고 있습니다.

작고 익명의 사람이 길을 열어 줍니다“라는 마더 데레사의 고백이 우리의 삶속에 서 확신과 능력으로 체험되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2009년 5월 16일 산성교회에서 열린 제 29회 교정 사명자 세미나 (기독교 세진회 주최)에서 전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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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3 11:43 2011/07/1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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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기독교 제자직과 회복적 정의 :: 2011/07/13 11:37

21세기 새로운 제자직에로의 부름과 회복적 정의 실천의 AVP 모델

(주제: 폭력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교정 사명자의 역할)

박성용 박사,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국내 조직가

----------- 목 차 --------
서론-문제의식

1. 신을 만나는 새로운 자리로서 ‘뒤’와 ‘아래’

2. 뒤와 바닥의 실천자로서 마더 데레사와 샤를 드 푸꼬

3. 회복적 정의로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

4.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훈련(AVP)'의 역사와 그 의미

5. 향후 발전 계획과 미래에 대한 전망



2. 뒤와 바닥의 실천자로서 마더 데레사와 샤를 드 푸꼬

초대교회의 가장 순수하고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우리가 거의 잊고 살았던 이 <뒤>와 <바닥>의 신앙수행의 길이 현대에 와서 다시 꽃피게 되는 사례는 바로 마더 데레사와 샤를 드 푸꼬라는 성인을 통해서이다.

영국 BBC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세상의 칭송을 받게 된 마더 데레사는 실제로는 <바닥>과 <뒤>의 수행 곧 어둠과 누추함을 신의 사랑의 불꽃으로 밝힌 분이다. 그는 실상 ‘어둠의 성인’으로서 가장 가난한 자들을 섬김속에서 그들 안에서 신을 보고, 가난과 고통 그리고 어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동일시함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신으로 섬겼다. 소유한 것없이 가장 넘치는 사랑의 삶을 살았던 그녀의 삶의 비결은 ‘작은 자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란 복음의 말씀에 따라 ‘익명의 그리스도’를 모두에게서 보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겼기 때문이다.

그녀가 명상과 고요속에서 수행을 하던 수녀원을 나와서 캘커타 빈민들속으로 들어가 병든 사람, 버림받은 사람들을 돌보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은 바로 36세인 1946년 9월 10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의 출발점이자, ‘부름속의 부름’이라고 데레사가 지칭한 사건이다. 피정을 위해 콜카타의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 삼등 열차에 몸을 싣고 다르질링을 향해 가는 도중에 복음서 마태 25장 31절을 읽다가 이 말씀들이 폐부를 꿰뚫는 감전되는 듯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가 성서의 말씀에 의해 극적인 체험을 가진 것처럼, “저 역시 성마태오의 거룩한 말씀의 광채에 멈추어 서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데레사는 고백하였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주었다....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그녀는 성서를 덮고 묵상기도 속에 잠겨 들어갔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이 말씀이 가슴에 꽂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위로조차 포기하고 비참하고 불행한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살고 계신 사랑하는 임(그리스도)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일하고 그를 돌봐드려야 한다는 내적인 목소리를 듣고, 대주교의 길고 어려운 허락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1948년 4월에 교황청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8월 18일에 수녀원을 등지고 의지할 자 없이 홀로 집도 없이 가난한 자를 찾아 세상속으로, 거리로 나서게 된다.

그녀가 시작한 곳은 콜카타의 한 지역인 모티즈힐에서였다. 이곳은 빈민가로서 구정물, 가난, 무지, 질병, 버림받음, 타락이 난무한 곳이다. 처음으로 가난의 뼈저린 현실을 경험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불안과 고뇌를 난생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마더 데레사는 버림받은 사람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고, 이들 안에서 사랑과 헌신의 물 한 방울이 없어 ‘목마르다’고 외치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을 시작하였다. <음지>와 <바닥>에 있는 곳에 그리스도를 만나는 성소(sanctuary)를 세운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피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 가장 더러운 일은 늘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마더 데레사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가난한 버림받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집인 ‘니르말 흘리다이’(임종자의 집)을 여느 것을 시작으로 ‘병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협력자회’ ‘사랑의 선교회’ 본부인 ‘마더 하우스,’ ‘마더 데레사 협력자회,’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어린이들의 집’, 나병환자 공동체와 ‘평화의 마을,’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집, 원주민을 위한 집, 판레스타인 난민구호의 집 등을 연달아 열고 동구권과 남미 등 수많은 나라에서 구호센터를 열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에는 예수님을 더러운 구유, <바닥>에 있는 자로부터, 코를 막지 않고는 다갈 수 없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해야 한다는 그녀의 가난한 이들과 그리스도의 동일시에 대한 신앙적 체험이 그 중심에 있었다. “나병환자든 죽어가는 사람이든 불구자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든, 소외된 사람이든 그 누구든지 간에 그 사람은 우리에게 가장 가난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이시다.”이렇게 그녀는 말한다.

사랑의 수녀회에 지원자가 들어오면 데레사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손가락을 다 펴게 한 다음, 하나하나 꼽으면서 다음 ‘손가락 복음’의 다섯 단어를 말한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You did it to me)"(마25:40) 지원자와 데레사는 그 다섯 단어를 함께 반복하고 함께 웃는다. 이 말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운 사람들을 만지고 씻어주고 섬길 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반감을 없애주는 만병통치약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것은 묵주, 십자가, 접시, 사리 세벌뿐이지만 이 다섯 손가락 복음은 그들에게 사랑과 즐거움의 무한한 원천이 되어 고통받는 가난한 자들을 섬기게 된다.

이 다섯 손가락의 복음은 데레사 자신의 영적 어둠의 경험인 ‘버려짐’과 ‘메마름’에 대한 인도자가 되고 그 내적 어둠은 결국은 정화되고 깊이를 얻게 되었다. 데레사는 단순히 인간 사회에서 짓밟히고 내버려진 이들을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뒤>와 <바닥>의 수행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리스도의 고난, 즉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그리스도의 목마름에 대한 고통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1997년 9월 5일에 죽음을 맞이하기 전 20년간 심장병과의 싸움과 허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그 어둠과 고통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전 세계를 돌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섬김과 위로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이미 2001년에는 그녀를 따르기 위해 삼천오백 명의 수녀와 약 사백 명의 수사, 천명의 선교 활동가 백육십구 개의 교육기관, 천삼백육십구 개의 진료소, 칠백오십오 개의 수도원이 생기게 된다.

이야기 예) ‘어둡고 누추한 곳’에 켜진 ‘등불’

저는 버크에 와서 처음으로 수녀님들을 만났을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버크 외곽으로 나갔습니다. 외곽의 넓은 지정 구역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양철과 낡은 마분지 등으로 만든 아주 작은 오두막에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작은 오두막 중 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그곳을 집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방 한 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방 한 칸에 모든 살림이 다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집에 사는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당신 잠자리를 정리하고 옷을 빨고 방을 청소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저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라고만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저에게 허락해주면 더욱 괜찮아지실 거예요.”

그러자 마침내 그가 허락해주었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봉투를 하나, 또 하나, 또 하나 꺼내더니 하나씩 열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그 사람 아버지의 작은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사진 속 얼굴과 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본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를 정말 많이 닮으셨네요.”

내가 그의 얼굴에서 아버지H아 닮은 점을 발견하자 그는 무척 기뻐했습니다. 저는 사진에 축복을 한 다음 돌려주었습니다. 두 번째 봉투, 세 번째 봉투에 든 사진에도 축복을 내리고 나자 사진은 다시 그의 주머니 속으로, 시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방을 청소하다가 방구석에서 먼지가 가득 쌓인 커다란 램프를 발견했습니다.

“이 램프는 안 써요? 정말 아름다운 램프네요 안 쓰세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램프를 켜겠습니까? 몇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고 또 몇 달이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위해 그걸 켠단 말입니까?”

그래서 내가 말했습니다.

“수녀님들이 오시면 켜시겠어요?”

그가 말했습니다.

“예”

그래서 하루에 5분에서 10분 정도에 불과했지만 수녀님들이 그 사람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녀님들이 램프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그 사람은 램프를 켜는 습관이 들었습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수녀님들은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그를 찾아가서 만나곤 했습니다. 저는 그 후 그 사람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 년 후에 그가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마더에게 말해주세요. 마더가 제 인생에 켠 불빛이 아직 타오르고 있다고요.”

데레사는 종종 강론을 통해 말하였다. 어둡고 미천 한 곳은 신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어둡고 누추한 마굿간의 구유에서 누워있었으니까.

“누추한 곳은 램프를 감추고 있습니다.

작고 익명의 사람이 길을 열어 줍니다.

따라서 내가 작은 자에게 해 준 것은 그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회복시켜 줍니다. 메마른 내 일상속에 이야기를 찾았으니까요.

내 줌과 봉사로 상대가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정작은 그가 나의 도움을 받아준 것이 나에겐 진정 고마운 것입니다.

빛은 나도 경험하는 것이니까요...“

그녀의 기도문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존경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사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칭찬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명예로워지려는 욕망으로부터

찬양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선택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인기를 끌려는 욕망으로부터

모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경멸받는 두려움으로부터

질책당하는 고통의 두려움으로부터

비방당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잊히는 두려움으로부터

오류를 범하는 두려움으로부터

우스꽝스러워지는 두려움으로부터

의심받는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소서

오 주여, 우리의 마음도 당신처럼 되게 하소서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사랑받게 하소서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존경받게 하옵고

주여! 이런 욕망에서 벗어나도록 저에게 은총을 베푸소서.

나는 젖히시고 다른 사람들이 선택받게 하시고

나는 눈에 띄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찬양받게 하시고

모든 일에서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택하여 주시고

내가 성스러워지려고 하는 것만큼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성스럽게 하소서.

샤를 드 푸코의 예도 특이하다. 그의 삶이 특이한 것은 살아생전 아무런 제자도 없이 죽었으나 사후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영향력이 생겨나면서 그의 통찰에 영감받아 세계 곳곳에서 20개 가까운 다양한 재속 수도회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낮은 곳’과 ‘마지막 자리’에서 신의 현존을 발견하고, 형제성소와 세속의 성화라는 새로운 현대 영성의 샘을 판 사람이었다.

샤를 드 푸코가 살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식민시장의 쟁탈과 군국주의의 부활, 국가간 전쟁과 계급투쟁, 인종과 이념간 갈등으로 황폐해지고 분열의 골이 깊어져 가는 시대였다.

그는 방황을 하면서 극도의 쾌락주의와 무질서의 삶에 빠져 살았지만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통해 신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사셨던 그 장소에서 강생과 육화의 신비에 대한 종교적 확신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론적 통찰을 얻게 된다. 이 나사렛 순례를 통해 위블랭 신부의 강론이 메시지가(“주님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만큼 철저하게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셨기에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영혼속에 각인이 확인되고 구체화되는 헌신의 동기를 받게 된다. 그가 이 순례에서 발견한 것은 ‘나자렛의 숭고한 노동자의 겸허하고 숨겨진 삶’이라는 강생과 육화의 신비였다.

그에 따르면 나자렛의 예수는 무한한 겸손 곧 무한하시고 완전한 분이 이 지상에 한 인간 그것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분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는 위대함에 연연하지 않고 존경에서 초탈하며, 아무도 알지 못하게 그는 나자렛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하시며 사셨고 최악의 치욕속에서 죽으셨다는 강생의 신비에 그는 매료되어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비천과 무명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 가난한 장인으로 사셨던 우리 주님의 발길이 다녔던 나자렛의 거리를 걸으며 나 자신이 예감하고 상상했던 삶을 살고 싶은 갈증에 불타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신념으로 그는 주인이 한 것처럼 작기 위해 마지막 자리를 찾기 시작하였고, 가난과 비천, 고통과 고독 그리고 버림받는 삶을 성실히 추구하였다. 이 육화의 신비야 말로 샤를에게는 신의 궁극적 선을 표현하는 삶으로 이해되었고 ‘비천’과 ‘낮은 자리’야말로 성소, 신의 현존의 장소임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생 동안 ‘내려오는’ 일만을 하셨습니다. 육화하며 내려오시고, 어린 아기가 되어 내려오시고, 순종하며 내려오시고, 가난한 자 되며 내려오시고, 버림받으며 내려오시고, 피난 가며 내려오시고, 박해받으며 내려오시고, 사형 인도받으며 내려오시고.... 항상 마지막 자리를 선택하시며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샤를의 직감은 바로 이러한 ‘낮은 자리’에로의 추구가 그리스도교 계시의 본질이며 그것이 단순히 말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천의 근거이자 과제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현대 그리스도교 영성과 성소에 대한 새로운 지평과 갱신의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낮은 자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겸손과 존경 그리고 세심한 배려로 그들을 대함으로 새로운 성소(sanctuary)의 길을 열었다. 성체(미사와 같은 예배의식)에서 신을 만나는 ‘성체성소’를 지키며 기도의 생활을 추구했지만 또한 일상의 삶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섬김과 사랑속에 신을 만난다는 ‘형제성소’의 새로운 수행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복음서의 꾸준한 묵상을 통해 샤를은 신을 사랑할수록 더욱 이웃을 ,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게 된다는 육화와 강생의 신비에 심취된다. 따라서 그가 순명을 이야기 할 때 이는 사랑의 단계에서 가장 끝단계인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완전히 낮추어지는 단계’ 곧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자신에 대해 죽는 단계라고 고백한다. 그는 이를 위해 “비천함과 가난함과 천한 육체노동의 길을 따르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 수도자의 지위를 버리고 ‘만인의 형제’로서 사하라 사막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신이 성체안에 현존하시듯 가난과 억압으로 일그러진 모든 사람들 안에 참으로 현존하신다는 확신은 샤를 형제의 삶을 변형시킬 뿐 아니라, 그의 삶에 통합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은 “선의 사도”(우정의 사도직)로서 모든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형제로, 누구에게나 온유로 대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게 된다.

그가 죽는 날(1916년 12월 1일) 마침 사촌 여동생에게 이런 글을 그는 남긴다: “우리가 무화(無化)된다는 것은 예수와 하나가 되고 뭇 영혼들에게 베푸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거의 매 줄마다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사랑을 위해 자신이 무화되기, 세속의 성화, 종교와 인종의 벽을 넘어서는 형제성사(sacrament of friendship)에 대한 그의 투철한 실천은 살아생전에는 아무도 따르는 자가 없었지만 그가 남긴 글로 인해 영감받아 이제 20개의 그를 따르는 재속수도회와 수많은 익명의 활동가들에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목을 받으며 마르지 않은 샘이 되고 있다.

그가 죽는 날 마씨뇽 L. Massignon에게 이렇게 썼다:

“구유와 나자렛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사용하신 방법은 가난, 비천, 굴욕, 버려짐, 박해, 고통, 십자가입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무기이며, 당신 생명이 우리 안에 계속되도록 맡기라고 하시는 천상 정배의 무기입니다. 이 유일의 모델을 따릅시다. 그러면 틀림없이 많은 선을 행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살고 계시는 분의 삶을 사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는 더 이상 인간적이거나 가련한 것이 아니라 신적 효력을 지닌 그분의 것입니다.“ (1908년 1월 15일, 게랭주교에게 보낸 편지)

마더 데레사와 샤를 두 푸꼬는 전통적인 신을 만나는 길로서 교회안에서의 예배 곧 성체성소만이 아니라 가장 작은 자에 대한 섬김으로서 신을 만나는 길 곧 형제성소/우정성소(sactuary of fellowship)의 새로운 길을 새로 개척해 주었다. 수도원의 침묵과 명상의 공간 밖으로 나가 시장과 골목, 어둠의 장소에서 신을 만나는 재속수도회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세속을 성화하고, 기독교 신앙의 가장 잊혀진 복음의 길인 <뒤>와 <아래>의 길을 회복시켜 준 것이다.

교정 사명자의 길은 바로 이 전통속에 서 있다. 마더 데레사의 ‘5 손가락 복음’, “그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You did it to me)"(마25:40)와 동일하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주었다....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여기 있는 형제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속에 자신을 감추었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작은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섬기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맡은 제자직은 복음의 가장 진수, 그동안 감추어진 복음이지만 가장 오래된 참된 복음을 실천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나를 따르라”라고 명하신 분에 대해 제자로서 가야 할 가장 진실한 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가장 작은 자와의 일치와 자기 동일화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섬길 수 있지 아니하고 가장 작은 자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교정 사명자의 길에 대한 결단과 헌신을 얻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내 직업에 대해 불안해하거나 열등하게 생각하며, 비전과 의미가 약했던 이유가 바로 <위>와 <앞>에 대한 추구의 영향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되고 이제는 <뒤>와 <아래>야 말로 신에 가장 가까운 길임을 깨닫게 됨으로써 내가 서야 할 자기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보이게 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뒤>와 <아래>에 계신다는 이 근본 복음을 깊이 성찰하며 끊임없이 그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그분은 우리에게 보여지게 되고, 다가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21세기 새로운 제자직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요청이시고, 우리는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고 교정선교의 근본이 된다. <뒤>와 <아래>를 통해 그분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얻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의 말씀인 “너희는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주었다....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말씀에 응답하여 어떻게 감옥에 갇힌 작은 자를 통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섬기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이것이 바로 지금부터 두 번째로 이야기 하고 싶은 재소자에 대한 섬김의 한 프로그램으로서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훈련(AVP)"에 대한 소개와 이것에 근거가 되는 회복적 정의에 대한 문제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언제나 이 AVP를 소개할 때, 그리고 한국에 처음 소개될 때 참여자들이 당황스러웠던 것은 대중 강연을 통해 이것이 무엇이다라고 소개받는 것과 그것이 실지로 어떻게 작동되는 지를 워크숍으로 경험할 때 질적인 깊은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 자리에서 참으로 아쉬운 점이기도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까닭은 폭력 가해자든 피해자든 혹은 교정사명자이든간에 이 AVP 프로그램의 핵심은 누군가 전문가가 가르치는 데 있지 않고 스스로 발견하고 배우는 자기 체험 학습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먼저 기억하기를 부탁하는 것은 누군가가 상대방을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고 남을 통해 배움이 일어난다는 이 교육학적 원리를 AVP가 지니고 있다는 말에 집중해 주시기를 부탁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치유와 성장은 스스로의 발견과 내적 체험을 통해 일어난다고 AVP 실천가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본인은 AVP의 근간이 되는 회복적 정의-혹은 성서적 정의라고도 부름-문제를 다루고 이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하고 싶다. AVP는 상업적인 목적을 지니지 않고 순수하게 자발적인 섬김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필요이상의 광고를 하지 않으며 AVP에 대해 스스로 체험하여 맛보는 길이 가장 잘 이해하는 길이다.

3. 회복적 정의로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

범죄를 행한 ‘거칠고 악한 인간(?)’이란’세상의 딱지붙인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그에 맞는 처벌과 교정작업을 할 것인가에 대한 현재의 응보적 정의와는 달리 깨어진 관계에 관심을 두는 회복적 정의를 지지하는 이론가들은 이 회복적 정의 개념을 범죄 문제에 응답하는 단순한 정책, 프로그램 그리고 그 실천에 대한 가치체계로서만 이해하지 않는다. 이들은 회복적 정의를 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참회, 용서 그리고 화해와 같은 원리를 가진 영적 과정으로 본다. 이는 우리가 누구이고 서로에 대해 무엇을 행할 수 있으며 우리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선한 삶과 공통의 선에 대한 비전과 관계되어진다.

여기에는 회복적 정의에 대한 성서적 이해에 기초한다. 성서에 따르면 정의(mishpat, sedeqah)는 샬롬, 계약, 율법(토라), 속죄와 용서와 같은 근본 토대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성서적 정의는 개인과 사회,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하여 본다. 샬롬은 폭력이나 무장갈등이 없는 소극적인 개념을 넘는 용어로서 조화와 온전성, 건강과 번영, 통합과 균형을 갖춘 적극적인 개념이다. 시들은 식물은 폭력이 없어도 샬롬으로 여기지 아니하며 충만히 생생하게 있을 때 샬롬으로 정의된다. 즉 여기에는 우리 실존의 번영과 건강함의 상태 곧, 하나님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번영과 건강함을 포괄한다.

계약은 관계의 당사자들간에 맺는 책임과 권리 그리고 헌신에 관여한다.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맺어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계약은 모든 다른 민족들의 유익을 위해 의도된 계약이자 이를 위한 충실성의 표시이다. 율법의 수여는 국가의 강제적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축복과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서 기인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하면 평화와 정의가 결과되어진다. 속죄와 용서는 죄인을 하나님의 정의의 요구를 해치지 않고 용서를 해 주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구원을 성취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데 사용된다.

성서에서 정의는 모두가 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류와 세상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에 관여한다. 건강하고, 지속적이며, 생명을 주는 관계와 연관되며, 이는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 이해하는 성서의 두 주요 사건이 하나님의 정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첫 번째 것은 하비루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사는 계약공동체로 형성되어간 사건이다. 예언자들은 거듭해서 이를 언급한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서 노예됨으로부터의 해방과 사랑의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 이렇게 볼 때 정의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이해하는 중심이 된다.

여기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정의가 엄격한 수학적이거나 법률적인 논리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가능성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용납에 있고,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따라서 성서적 정의에서는 정의와 자비가 상충되지 않으며 오히려 자비가 건강한 관계외 회복을 성취한다. 따라서 실패가 일어날 때 정의라는 음식은 자비라는 조미료로 간을 맞추게 된다. 그렇지 않고 자비가 없다면 정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와 심판은 멸망이 아니라 성취, 곧 잃은 자가 생명을 얻고 그것도 풍성하게 얻는 (요10:10)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뿐만 아니라 창조론의 입장에서도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상태로의 회복과 유지가 창조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분명하게 정의가 ‘회복적’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이렇게 처벌과 강제의 현재의 형사사법 원리와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회복적 정의를 위치시키는 데는 범죄에 대한 다른 이해와 가치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위반자와 처벌의 댓가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지 않고 범죄에 관련된 당사자들이-가해자, 그들의 가족, 희생자, 그리고 공동체- 능동적으로 각자를 존중하고 그들의 관계를 회복하고 공통의 선에 공헌하게 하는 데 목표가 있게 된다. 재소자의 상황에 회복적 정의를 적용한다면 그것은 깨어진 관계를 치유하고, 비난하는 대신에 건설하며, 관련자들로 하여금 이해, 치유 그리고 용납하는 공간을 마련하고 궁극적으로는 상대방과 자신을 위한 더 나은 삶을 선택하도록 돕는 것이다.

따라서 회복적 정의는 그가 일으킨 고통에 대한 고통을 부과하기가 아니라 사법참여자들을 회복시키고 치유하여 사람과 관계를 다시 건설하여 “일을 올바르게 만드는” 데 관심한다. 그리고 이 회복적 정의에 따른 재소자를 위한 프로그램의 공통된 근본 가정은 비강제적으로 참여적인 방식을 통해 협력적인 관계를 회복하는 데 있다. 처벌적이고 권위적인 방식보다 회복적이고 참여적이며 자발적인 방식이 행동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신념이 있는 것이다.

만일 가해자들로 하여금 범죄의 충격과 원인에 책임지기를 원한다면 건강한 관계와 안전이 필요하다. 이 존경, 돌봄, 신뢰와 겸손을 구비한 회복적 환경을 통해서야 수치나 두려움 없이 책임과 치유를 증진시킬 수 있게 된다. 가해자가 스스로 떠맡아야 할 배상책임은 또한 개인적 치유 없이는 내적인 동력을 갖지 못하며 장기적으로는 사회로의 복귀이후 능동적인 회복적 가치들을-존경, 돌봄, 신뢰, 겸손- 지속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재소자에게는 내적인 평화와 정체성이 형성되며 개인적인 결단의 힘이 강화되고 정서적 신뢰에 의해 관계가 형성되면서 감옥이 지닌 폭력 각본의 드라마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다. 현재의 범죄와 과거의 희생의 기억에서 붙잡힌 수치, 비난 그리고 행동에 대한 변명과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거칠고 악한 인간’이라는 자기-이미지를 지원하던 신념체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회복적 성장과 변화를 경험을 하게 된다.

(생략)

* 이 글은 2009년 5월 16일 산성교회에서 열린 제 29회 교정 사명자 세미나 (기독교 세진회 주최)에서 전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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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3 11:37 2011/07/1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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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새로운 제자직에로의 부름과 회복적 정의 실천의 AVP 모델 :: 2011/07/13 11:32

21세기 새로운 제자직에로의 부름과 회복적 정의 실천의 AVP 모델

(주제: 폭력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교정 사명자의 역할)

박성용 박사, 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국내 조직가

----------- 목 차 --------
서론-문제의식

1. 신을 만나는 새로운 자리로서 ‘뒤’와 ‘아래’

2. 뒤와 바닥의 실천자로서 마더 데레사와 샤를 드 푸꼬

3. 회복적 정의로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

4.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훈련(AVP)'의 역사와 그 의미

5. 향후 발전 계획과 미래에 대한 전망

문제의식-

1. 교정사명자의 자기정체성과 미션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입장에 대한 고찰, 그 수많은 직업중에 하필 끝이 안보이는 교정사명자의 길을 -내 의지가 아니요 우리는 성령의 부름이라고밖에, 붙잡혔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걸으면서 내 삶의 의미문제에 대한 근본문제를 묻게 된다. 과연 교정 사명자라는 것은 성서와 신앙의 전통에서 얼마만큼 가치있는 것인가?

2. 교정의 사명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근본 패러다임-여기서 패러다임이란 삶을 근본적으로 보는 가치관, 태도를 규정짓고 그것을 통해 삶을 분별하는 안경과 같은 것임-인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성서적 정의)에 입각하여 가해자, 혹은 폭력전과자라고 사회가 분류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어떻게 삶으로 다시 세울 것인가?

이 두 문제 의식에 따라 본인의 강의 목표는 교정사명자이자 기독자로서 (1)우리는 자신의 교정사명이 어떻게 신에 대한 신앙응답으로, (2)자기 성장의 중요한 현장으로 고백할 수 있으며 그리고 (3)가해자에 대한 교정복지가 실제로 AVP 프로그램 사례를 통해 어떻게 체현될 수 있는 지 이를 통해 (4)앞으로 전개되는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삶의 실재는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초점을 둔다.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중심 내용들을 담게 된다.

- 폭력과 어둠에서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성서적 고찰

- 복음의 새로운 신앙실천유형의 예로서 마더 데레사, 샤를르 드 푸코의 영적 수행의 사례와 그 의미

- 회복적 정의(사법)으로서의 교정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

- 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폭력에 대응하는 새로운 평화훈련") 모델의 가치와 그 의미

1. 신을 만나는 새로운 자리로서 ‘뒤’와 ‘아래’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가에 대한 근본이해에서 출발한다. 이 인식은 사회적으로 고난받는 여러 계층의 무리인 하비루라는 여러 민족의 집단들이 하나의 사명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 비결이며, 신약에서 ‘복음-기쁜 소식’이라는 새로운 부름을 통해 유대인들 중에 새 이스라엘이란 자각을 통해 기독교인으로 전환시킨 가장 근본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가는 또한 우리가 신앙하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준다.

예를 들어 구약에 있어서 사회적 유랑민이자 노예들이었던 하비루들(히브리인들)은 출애굽 경험을 통해 고통을 통해 울부짖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구원과 해방의 하나님 곧 장소에 고정된 엘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하나님인 야훼,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자기 계시-I will be that I will be, 나는 미래의 되어야 할 그 이다-를 받으면서 그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신약에서는 두 사형수와 함께 해골산 골고다에서 십자가형을-십자가형은 로마법의 10가지중에 가장 극형- 받으신 분을 우리의 구주라고 신앙고백하면서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기독교의 출발점이 이루어진다. 기독교의 자기본질이해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이 두 경험은 최소한 우리에게 고통과 상실, 어둠과 폭력의 내적이고도 사회적인 상황에서 기독교가 태동되었다는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본경험은 역사적 변천을 통해 사라지고 만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4c 초에 십자가를 전쟁터에서 자신의 정적을 무찌르는 상징으로 쓰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카타콤이라는 지하교회로서 기독교가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로마의 국가종교, 제국의 종교로 바뀌면서 왕과 귀족들의 지배의 삶을 지지하는 이념종교로 기독교가 바뀌게 된다. 그 이후 발전되는 중세기의 ‘위’로 향한 고딕식의 교회형태, 권위와 힘을 지지하는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은 노예인 하비루와 십자가 옆의 두 사형수와 함께함이라는 인식을 잃어버리고, 기독교는 교황이-이름 그대로 왕보다 높은 황제로서- 세상권력 위에서 다스리고 통치하는 1000여년의 긴 세월을 지속하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는 바로 이 ‘위’에 대한 거부(protest-저항하다)에서 나오려는 몸부림이었지만 아직 우리의 현실과 교회의 모습은 이 ‘위’에 대한 숭배의 자취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어서 교권정치의 현실을 우리가 여전히 보고 있다.

♧ 위로 향하는 영성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지금까지의 신앙의 주류 모델이 되었던 이 ‘위(up)’ 그리고 ‘앞(front)’에 대한 신앙 모델을 지지한 성서의 이야기의 예는 바로 야곱의 사닥다리 (창 28, 10-19)에 대한 꿈이다.

그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가로챘다는 이유로 집으로부터 추방되어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빈들에서 밤을 맞이하면서 돌베개로 잠을 잔 그곳에서 사닥다리 꿈 체험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을 그는 하느님의 집 -벧엘이라 부르게 된다.

이 체험의 원래의 성격은 사실상 후손 지향적, 땅-지향적이며 대지와 밀착된 꿈이었고 실상 돌베게를 베는 <바닥>의 체험이었다. 빈들/황야가 신과 연관된 장소라는 근본 체험 그리고 나중에 얍복강가에서 다시 나오듯이 뒤로 쳐진 자, 모든 소유와 가족들을 앞으로 보내고 자신은 뒤에 남아 뒤로 쳐진 자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후대 기독교 신앙전통에서는 그리스적 사고(일자와의 일치)와 제국종교가 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초월적인 하느님을 경험하기 위해 대지에서 벗어나 위로 향함으로 변질된다.

예) 하늘, 위의 추구. 끊임없이 위의 것을 사모함

하느님과의 교제는 상승의 길을 통해서이다.

한계단 한계단 올라감이 신앙의 단계이다.

하강은 선으로부터 멀어짐, 결여, 추함, 어둠을 뜻한다

명상/기도는 위로 올라감, 하느님에게로 올라감을 의미하며,

하느님께로 내려감은 아니다.

신앙의 과제는 따라서 위로 향한 완전의 추구에 놓여있게 된다.

그 결과로 소수 영적 엘리트가 중요시 된다. 그러나 원래 이는 야곱과는 상관없었다.

당신은 어느 단계에 있는가라는 신앙의 척도에 대한 대답의 길은 ‘위로 오르기’와 ‘앞으로 나아가기’의 영성의 정도에 의해 판단되었다. 이는 점차 위를 성역화하게 되며 꼭대기는 거룩하고 이 꼭대기에 있는 사람 그리고 앞으로 나간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행위와 상호작용을 가름하는 척도/규범이 된다.

♧ 앞으로 향하는 영성

<위로향함>의 신앙전통은 근대의 이성과 계몽주의, 역사적 진보주의 등의 영향으로 ‘앞’으로의 신앙관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위로향함의 신앙관과 방향만 바꾸어졌지 그 내용은 똑같은 것이었다.

가나안으로 진군하는 하느님으로 이해된 출애굽의 하느님은 진군하고 앞으로 가는 하느님이 아니라, ‘함께 하심’ amongness 의 하느님을 의미했다. 전진과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 예로 2-3주면 갈 수 있는 가나안 진입을 40년이 걸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전진이 아니라 함께 하심이 초점인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향하는 전진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앞에 있는 것들의 쳐 없애버림, 적을 징벌하고 도륙하며 상대방을 정복하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면서 기독교 신앙은 앞으로 빨리 나간 자, 많이 성취한 자-그것이 학문적이든, 사회적이든, 종교적이든- 뭔가를 이룬 자들을 지지하는 ‘앞’으로의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앞으로의 무서운 질주는 수많은 동물들의 목소리 없는 죽음을, 거대한 쓰레기와 상처, 그리고 죽음의 잔해들, 약자들의 뒤쳐짐을 남기고도 무감각해지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을 만들어 놓았다.

♧ 대안으로서의 <뒤>와 <아래>

모세가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새 언약 공동체로서 이스라엘로 시작하는 그 첫 시작의 순간에 회막안에서 여호와를 만나 묻는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주의 길을 내게 보여주소서라는 모세의 요청에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이 이러합니다.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 33,13,21-23)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앞>으로의 길이 아니라 등을 통해 <뒤>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의 이야기가 여기에 나온다. 그리고 그는 약속에 땅에 들어가지 않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전권을 물려주며 <뒤>에 남는 자가 되었다.

위와 앞이 초월, 영광, 장엄함, 신비, 풍부함, 무상을 넘는 불멸의 광희를 말한다면 뒷면은 어둠, 비신비, 더러움, 약함, 육의 실재이다.

그러나 여기서 가나안의 새 시작이 어떻게 시작하는 지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등><뒤>와 더불어 시작되고 있다. 그러기에 예언자들은 <앞>의 뻔지르함 뒤에 쳐져 있는, 아무도 상관하지 않은 <뒤>의 인생들-과부, 고아, 나그네, 이방인들-에 대해 주목할 것을 거듭거듭 증언하고 있다.

* 엠마오의 두 제자이야기:

한때 열정을 품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정면으로 걸어가던 예수의 제자들 중,

이제는 예루사렘을 등으로 하고 뒤로 향해 걷던 엠마오의 제자들이 있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앞>에 등을 돌려 <뒤>로 가는 그 상심과 낙담의 경험속에 한 낯선 자가 말을 걸어 왔다. 땅거미가 찾아들고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민박을 하면서 그 이상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힘들어하는 동료를 보고 강한 연민이 솟구치며 서로를 품을 수 있는 각성이 일어난다. 부활하신 주심은 그렇게 <뒤>로 향하는 자에게 맨처음 나타나셨다.

* 그리스도 탄생의 이야기

구유에 놓인 분이 그리스도임을 알아보는 표적이 될 것이다. <아래>를 통해 주의 길을 알게 된다. 그래서 영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의 겸비, 케노시스 사상. 하락의 하나님-하나님과 동등한 본체이시나 자신을 비우고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을 증언한다.

모세가 물었던 ‘주의 길을 알려주소서’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물었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이 질문에 교정사명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는가에 대한 시각의 교정이다.

그리스도는 뒷골목으로 오셔서 초라한 모습으로 <뒤>와 <아래>의 길로 오신다.

<뒤>와 <아래>에 있기에 쉽게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가볍게 생각 할 수 있어서 우리는 간과하고 있지만 바로 그 뒤와 아래의 길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길이 된다.

신의 <등> 그리고 그리스도의 <아래>를 통해 그분을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뒤>와 <아래>의 인간 실존의 상황들-어둠, 잊혀짐, 버리워짐, 낮음, 가난, 상처받음, 눈물-이 신을 대면하는 성소가 됨을 의미한다.

우리가 오늘 날 신을 다시 만나고 그분을 체험할 수 있는 곳도 바로 우리가 <뒤>와 <아래>에 눈을 뜰 때 가능하다.

하늘 천사의 증언은 “구유에 놓인 그가 구세주이다”였다. 즉, 가장 바닥에 놓인 자가 그 분이시다라게 성서의 메시지이다. 엠마오라는 <뒤>로의 걸어감을 통해 우리는 어떤 낯선 자가 나와 함께 길을 이미 걷고 있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뒤>로의 걸어감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변화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다.

거칠고, 연약하며, 빛 잃은 궁지의 상황 속에서 제대로 눈을 뜬다면 때로는 뜻밖의 보물을 얻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뒷모습>이다. <뒤>를 통해서도 하느님께 닿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인생일 것인가.

가말리엘 문하의 제자로서, 유대인중의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학문적 성취와 가문을 갖고 앞으로 질주하던 바울이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서 낙마하여 인생이 바뀌어졌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의 참상, 신앙인의 고집불통과 이방인들의 아픔, 그리고 자연계의 우주적 고통이라는 하느님의 <뒤>를 경험하면서 뒤에 있는 자, 꼴찌들을 위한 사도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가 경험한 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죄가 있는 곳에 은총이 풍성하다”는 체험이다.

말위에서 떨어지면서 본 그 <바닥>에 대한 경험이 눈을 뜨게 해 주었고 새로운 실재를 열어젖혔다. 특권이 아니라 헌신의 길, 분열이 아니라 화해일치의 길, 매 맞고 강도만나며 지쳐도 일어서는 길을 얻은 것이다. <뒤>와 <바닥>은 낙오의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자리이다. <뒤>와 <바닥>은 신에게 가장 가까운 거리이다.

* 이 글은 2009년 5월 16일 산성교회에서 열린 제 29회 교정 사명자 세미나 (기독교 세진회 주최)에서 전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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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3 11:32 2011/07/13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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