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시민사회'에 해당되는 글 23건

폭력과 전쟁에 대한 작은 실천- 작은 희망의 징조들 :: 2010/07/15 09:50

                                작은 희망의 징조들

4월에 우리는 프랑스에서는 해바라기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해바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역의 농부들은 이미 수천 개의 씨앗들을 심어왔고, 그들이 아무것도 없는 맨 언덕을 볼 때도 이미 해바라기들을 볼 수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거기 있다. 그들은 단지 태양, 열, 비 그리고 7월의 조건만을 결여할 뿐이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틱낫한, 살아있는 붓다, 살아있는 그리스도-



희망의 징조는 해바라기의 연약하고, 놀라게 하는 작은 씨앗과 같다. 내가 평화의 문화에 대한 씨앗을 볼 때 이미 전쟁 지대의 사막에서조차 일어서 올라오는 녹색의 발아들을 본다.

국제 관계에 있어 시민사회의 점증하는 영향력은 희망의 주요 징조이지만 내 삶의 대부분은 유엔의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라 매일의 일상사의 작은 영역에서 보낸다. 희망의 징조들 모두는 평화의 문화에 대한 작은 표현들에서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시민사회의 공공의 목소리는 수천 개의 활동에 기초한다. 각각은 틱낫한의 해바라기처럼 작고 결과가 없는 것처럼 외형적으로는 보인다. 각 행동은 우리가 우리 사회로 하여금 갈등의 도전에 대응하기 원하는 방식을 형상화하는 존중, 돌봄 그리고 협력의 습관들을 형성한다.

소수의 해바라기들

빅토리아라는 내 고향마을에는 작은 한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아침에 가두에 서서 아이들이 도착할 때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환영하고 있었다. 전체 스텝들은 어떻게 학교를 환영의 공간으로 만들 것인지에 있어서 훈련을 받았다. 여러 다른 학교에서 아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었고 우간다에 있는 학교와 미술품을 교환하교 있었다.

비록 교회 출석은 캐나다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었지만 교회의 사회 행동과 봉사에 대한 투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교회들은 일요일에는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중 밤에는 사람으로 차고 그 때는 집없는 이들이 추위로부터 와서 식사를 대접받고 쉼터로 있게 된다. 교회들은 베트남 징병 모집자들이 70년대에 했던 것처럼 캐나다에 오는 미국 군대 저항자들 주변에 모이고 있다. 성소 운동 (the sancturary movement)은 미국이 징병을 회복시키는 경우를 위해 대비하고 있었다.

토론토는 "아기를 위한 소년들(Boys for Babies)"라고 불리우는 6학년 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 각 교실은 1달에 한 번 교실에 오는 2살 이하의 영아가 소개되어진다. 학생들은 여러 달 동안 아기의 성장과 발달을 다룬다. 그들은 아이들의 어휘, 음식, 그리고 이정표들의 입장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 배운다. 교실에 대한 요구는 너무 커서 교사들은 아기가 있는 자원 부모를 충분히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한 뉴욕 택시 운전수인 호삼 압달라의 이야기는 2005년 8월에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30살인 이 분은 택시 트렁크에 놓고 내린 한 유대 상인에게 200,000달러 가치가 있는 다이아몬드로 채워진 자루를 돌려주었다. 압달라는 기자들에게 최고로 좋은 부분은 그의 아버지가 좋은 무슬림으로서 기대된 정직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그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말하였다.

용서 프로젝트 Forgiveness Project는 가슴에 증오를 심지 않기로 선택 하지만 끔찍한 잘못을 용서할 능력을 발견하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웹사이트이다. 영국의 한 국회의원인 안토니 베리 경은 1984년 아일랜드공화군(IRA)가 영국 브링톤에서 보수 당 당원대회를 주최하는 호텔을 폭파했을 때 살해되었다. 조는 보이지 않는 적을 비난하는 것을 멈추기로 선택하고 2000년에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죽인 남자인 패트릭 맥기를 만나는 치유의 여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세 시간 대화했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기 위해 있는 노력을 다했다. 둘 다 지금은 아일랜드가 "고뇌기"라고 부르는 시기로부터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통해 작업하도록 돕는 프로젝트에 관여하였다. 그들의 이야기가 용서 프로젝트 웹사이트에 있다.

관대함, 정직, 자비 그리고 유머라는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은 정글이라고 믿게 하는 폭력, 분노 그리고 두려움의 이미지에 반대한다. 친절함이란 행동 모두가 보고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세상은 정글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양육하고 쉼터를 주는 열대림으로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존중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당신의 신앙을 가난한 자와 불이득을 당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줄서기에 놓기, 고정관념을 깨기, 정직하기 그리고 웃을 때를 알기는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심는 씨앗들이며 그것들이 희망의 추수를 가져오게 된다.

적을 비난하고 비인간화하는 데서 우리의 마음은 닫혀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서의 일부를 잃으며 우리는 문제의 부분이 된다. -Jo Berry-

용서 프로젝트 Forgiveness Project: www.theforgivenessproject.com


("흘린 피로 충분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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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5 09:50 2010/07/1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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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힘 :: 2010/06/06 10:01

비폭력의 힘

-도덕적 우주의 호(arc)는 길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를 향해 구부러져 있다- <마틴 루터 킹>

평화주의자이자 정치 과학자인 진 샤프는 수천 개의 비폭력 개입을 문서화하고 성공에 공헌하는 요소들을 분석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넓게 배포되었는데 과거 반세기에 정부를 변혁시키려는 지하 민주주의 운동들에게도 배포되었다. 1991년 미카일 고르바초프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멈추기 위해 사람들이 모스코바 거리로 나갔을 때 그들은 손에서 손으로 진 샤프의 글들을 복사해서 돌려보고 있었다.

비폭력은 긴 그리고 영웅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 샤프는 기원전 494년 고대 로마에서는 평민들이 도시 밖의 언덕으로 철수해서 그들의 슬픔을 항의하였다고 썼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봉사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며칠 후 통치자는 그들을 위해 좀더 나은 조건들을 제공하기로 동의하였다. 그 언덕은 거룩한 산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상원이 개혁을 막으려는 시도를 했던 기원전 258년에 군인들은 거룩한 산으로 행진하면서 시위하였는데 거기서 군인들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고 위협하였다. 상원은 결국 군인들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간디가 1900년대 초에 남아공에서 한 시민 불복종의 실험은 정부의 불의한 관행들을 멈추기 위한 비협력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가 인도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발전시켜서 영국의 통치에 도전하기 위한 비폭력적인 저항을 사용했다. 1930년 그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에 대한 영국의 독점에 저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소금은 모두가 필요했고 가난한 이들은 허락이 된다면 스스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상품이었다.

그는 먼저 총독 어윈경에게 소금세법을 수정하기를 요청하였다. 그가 아무런 응답을 받지 않았을 때 간디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댄디이 해안마을까지 240마일을 앞서 걸어갔다. 해안에서 그는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으로 나는 영국 제국의 터전을 뒤흔들고 있다."

인도 전체를 통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소금을 만들거나 불법적으로 샀다. 한 달 후, 간디는 감옥에 갔고 이 때 그의 추종자는 60,000명에 달했다. 소금 행진은 한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은 자신의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고 1947년에 그들은 인도를 잃게 딘다.

비폭력 행동들은 수동적이지 않으며 조심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 행동들은 많은 훈련을 조심스럽게 기획하고 용기 그리고 몽둥이로 때리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훨씬 더 강하고 잘 무장된 상대방을 직면하는 비무장한 개인의 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의 가장 깊은 수준 속에 통합시킨 한 도덕적 원리의 장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당신보다 분명히 더 연약한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하고 참으로 겁쟁이의 짓이라는 것이다.

간디는 사람들이 억압과 불의에 대항한 비폭력을 사용하기를 선택한다면 적용해야 하는 원리들에 대해 깊이 숙고하였다. 그의 삶, 그의 수많은 캠페인들 그리고 그의 저작들은 미국 남부에서의 민권운동,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의 종식 그리고 일련의 긴 독제 정권들에 대한 민주적 변화를 가져온 벨벳 혁명들에 대한 터전을 제공하였다.

간디는 이런 행동이 개념을 사티아그라하라고 불렀고, 이는 힌두어 "진리"와 "확고히 붙잡음"이라는 단어가 결합한 말이다. 마틴 루터 킹은 그의 기독교 신앙을 비폭력 행동에로 가져가서 비폭력의 힘을 성 바울의 사랑의 개념에 비교하였다. 킹은 또한 이것이 단순한 한 전략보다 더 위대한 것임을 보았다. 그것은 더 커다란 힘을 접촉하는 길이었다. 설교자로서 그의 위대한 기술은 다른 시민 불복종 행동들을 기독교와 남부 미국에 잇는 교회들에 견고한 기초를 작조 일관된 운동 속으로 가져간 것이었다.

알바마주 몽고메리는 로자 팍스가 1955년에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그녀의 자리를 내주는 것을 거부하여 체포되었을 때 세상의 뉴스를 탔다. 흑인들이 운동에 동원되면서 마틴 루터 킹은 그들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되었다. 1960년에 78개 도시에서 연좌농성이 있었다. 약 70,000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하였고 3,000명이 감옥에 갔다. 백인 회사에 대한 보이콧, 점심 계산대에서 연좌농성, 그리고 시위가 남부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비폭력 시민 불복종의 훈련에 참가하고 조직적인 사람모집이 수천 명의 사람들을 좀더 운동 속으로 인도하였다.

마침내 1964년 대통령 린돈 존슨에 의해 시민권 조항이 통과되었고 1965년에는 투표권 조항이 뒤따라 통과되었다. 미국 민권운동의 전설중의 하나는 "우리 승리 하리라"는 노래이다. 이는 전 세계에 걸친 모든 나라에서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의 성가가 되었다.

참고

* Bombay Sarvodaya Mandal (간디 서적 센터): www.mkgandhi.org/

* Mahatma Gandhi Foundation: web.mahatma.org.in

* A Force More Powerful and Bringing Down a Dictator: www.aforcemorepowerful.org
 

출처: "흘린 피로 족하다"(Enough Blood Shed)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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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10:01 2010/06/0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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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정화 | 2010/06/09 14:14 | PERMALINK | EDIT/DEL | REPLY

    대표님, 무더위에 건강하신지요.
    이글 초록당사람들 홈페이지(http://koreagreens.org) 메인화면 <자료>게시판에 보이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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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유산 :: 2010/05/18 09:11

                                         간디의 유산

 

비폭력은 인류가 행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것은 인간의 천재성에 고안된 파괴의 가장 강력한 무기보다 더 강력하다. -마하트마 간디

우리는 세상에서 보기를 원하는 변화를 안다. 그것은 타인들에 대한 폭력적인 지배의 종식이다. 우리는 수백만의 용기있는 사람들이 도덕적인 힘을 지니고 폭력을 받아들이기를 끈질기게 거부함에 의해서 그것을 패퇴시켜 온 것을 안다. 비폭력을 사용함에 의해 혹은 간디가 불렀던 아힘사에 의해, 그들은 압도하는 군사적 힘을 격퇴시켰다.

간디는 20세기의 높이 우뚝 선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삶에 자신이 가르친 것을 인격화시켰고 그렇게 함에 의해서 정부는 통치받는 이들의 허락없이는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진리에 대해 강도 높은 연구를 하고 비폭력은 군사적 힘을 패배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여서 어떻게 비폭력이 작동하는지 무엇이 비폭력의 목표들을 더 다가가게 하는 지 그리고 무엇이 비폭력의 효과를 침해하는지 탐구하도록 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취하고 있는 길이 대영제국으로 하여금 인도를 통제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것임을 완전히 확신하였다.

모한다스 간디는 1869년 인도에서 태어났다. 청년으로서 그는 법학을 공부하러 영국에 깄다. 비록 돌아와서 잛은 시간 인도에 서 실습을 하였지만 그는 곧 인도 회사를 대표하기 위해 남아공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서 그의 삶을 변화시킨 경험을 그는 하게 된다. 프레토리아로 가는 열차의 일등석 열차표를 그가 구매했지만 한 백인이 일등칸에 머물러 있는 그에 대해 불평을 하자 그는 거부되고 플랫포움에서 그 날 밤을 지내도록 내팽개쳐졌다.

간디는 좌절하고 반항심을 가졌고 후에는 그 사건을 그의 생에 있어서 분수령이 되는 사건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불의에 대항하여 일어서고 1914년까지 인도인들을 차별하는 법률에 저항을 인도하며 남아공에 남아있었다.

그가 인도로 돌아오던 시기에는 행동하는 비폭력의 힘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실험하였던 잘 알려진 지도자가 되었다. 수백만의 인도인들은 그를 마하트마, 혹은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른다. 그는 파업, 비협조, 그리고 대중적인 시민 불복종을 실험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구의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결코 수동적인 저항이 아닌 방식으로 간디는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 사람들에게 관여하도록 하여 현안문제에 복종하던지 아니면 무장안한 시위자들에 대항하는 폭력을 휘두르든지 하는 전략들을 추구하였다. 매번 영국인들이 폭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 폭력이 자신들이 도덕적 권위를 낮추고 인도인들의 반대를 증가시켰다.

간디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영국에 의한 사악한 몰매들에 대해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그러나 그들의 권위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지속하도록 확신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그의 추종자들이 폭력에 의존하게 될 때 그들은 힘에 의해 패배당하고 신용을 잃게 된다는 것을 되풀이 하여 확인해 주었다.

우리는 그가 힘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기록하고 어떻게 힘이 변화될 수 있는지 보는 행운을 지녔다. 왜냐하면 그의 말들은 그 당시에 있었던 만큼이나 오늘날에도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힘은 두 종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처벌에 대한 공포에 의해 얻어지는 것과 다른 하나는 사랑의 행동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사랑에 기초한 힘은 처벌의 공포로부터 유래하는 힘보다 수천 배 더 효과적이고 영구적이다.

인내가 무엇보다 가치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시간의 종료지점가지 지속해야 한다. 그러면 살아있는 신앙은 가장 어두운 폭풍우 한가운데서도 지속할 것이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정복될 수 없는 신앙에 의해 불붙은 확고한 정신을 지닌 한 작은 몸은 인류의 역사의 과정을 변경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말이나 저술에 의해 개종시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삶으로 그렇게 진실로 개종시킬 수 있다. 당신의 삶이 모두가 연구할 열린 책이 되도록 하라.

그의 진리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간디는 철학과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인도인의 신앙들의 종교적 텍스트들을 연구했다. 그는 심오하게 바가바드기타, 요가의 실천과 철학을 설명하는 힌두교의 도덕적 담론의 종교 서적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20세기의 하반부는 전쟁과 핵전멸의 공포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또한 이는 간디의 유산이 인도를 넘어 퍼져 나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군사적 독재하에 살고 있는 많은 이들이 어떻게 정의에 대한 길에 대해 생각하는 지를 심오하게 변화시켰다. 간디는 자신들의 삶을 그가 가르친 이상들에 봉사하는 데 투신하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암살당했다. 이는 인도가 독립을 얻은 후 1년도 채 안된 때이다. 그러나 그의 전설은 여전히 세상을 두루 걸쳐 비폭력적인 혁명에서 펼쳐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비폭력이 작동하고 그것이 다른 문화들 속에서 어떻게 유효한지에 대한 수많은 예들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가장 높은 그것에 대한 부름이 있고, 비폭력을 통해 작은 숫자의 사람들이 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참고 자료

* Bombay Sarvodaya Mandal(Gandhian Book Center): www.mkgandhi.org

* Gandhi, 1982 Richard Attenborough 감독의 영화

* Mahatma Gandhi foundation: web.mahatma.org.in

*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 간디 자서전

www.nalanda.nitc.ac.in/resources/english/

etext-project/Biography/gandhi/index.htm


<흘린 피로 충분하다: 폭력, 테러 그리고 전쟁에 대한 101가지 해결책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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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8 09:11 2010/05/1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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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문화 :: 2010/05/12 08:29

폭력의 문화

만일 한 부족의 노래와 연극들이 폭력과 전쟁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 부족의 어린 소년들이 전쟁 놀이와 폭력적으로 경쟁적인 스포츠를 어릴 적부터 즐긴다면, 그 부족의 그림, 조각품 그리고 도기그릇들이 싸움과 전쟁 장면을 묘사한다면, 이는 평화롭고, 부드러운 부족이 아님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 Myriam Miedzian, Boys Will Be Boys

폭력과 공격이 남성의 이상으로 치하될 때, 남자들과 소년들은 남성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에 대한 왜곡된 기대의 올무속에 갇히게 된다. 유네스코는 폭력은 단순히 갈등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아이 양육부터 스포츠와 오락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 모든 부분에서 표현되고 있음을 인식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유엔은 새로운 세기의 첫 10년인 2001년부터 2010년을 "세계 어린이를 위한 평화와 비폭력의 10년"이라고 선언하였다.

우리가 폭력을 방지하려고 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격려하고 촉진하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세계는 미국문화에 의해 지배되고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CNN으로부터 무엇과 같은 지에 대한 결론을 유출한다. 사실상 그들이 보는 것은 광고주들이 보여주기 원하는 미국 문화의 이미지들이다. 광고 대행사들은 폭력적인 프로그램들이 그 매개가 TV, 영화, 비데오 게임 혹은 컴퓨터 게임이든간에 청중들을 매료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뉴스 편집자들은 어떤 이야기가 방영되어야 하는 지 결정하기 도움을 주기 위해 "그것이 피를 흘리면 그것은 이끌게 된다"는 안내서를 사용한다. 그 결과는 우리가 하루 24시간 방영되는 폭력적인 문화를 시청하는 것이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로 폭력을 통합시키도록 야기한다. 불행하게도 영화와 TV는 좀더 극적이게 되고 시청자들이 그것에 습관화되도록 노골적이게 되는 폭력에 대한 꾸준한 음식을 우리가 먹도록 제공하게 된다.

우리가 지닌 폭력의 여러 측면들은 우리에게 보이질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너무나 친숙해서 우리는 그것들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종종 폭력과 전쟁을 영광스럽게 하는 장난감이 주어진다. 많은 다른 문화들은 그런 장난감을 갖고 있지 않다. 토요일 아침 TV에 많은 애니메이션 만화들은 극도로 폭력적이다. 그것들이 그보다 덜 폭력적일 수 없는 이유는 등장 배역들이 귀엽고 멋진 작은 새와 고양이들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안방극장에 잇는 대화를 주목해 본다면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종종 단순히 무례함, 냉소, 부정한 언어 그리고 무시임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그들이 보는 것을 모방하고 우리도 그렇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광고주들은 한 건당 30초짜리 광고에 수백만 원씩 지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한 대학교실에서 영화는 점차적으로 아름다운 여성들을 잔인하게 폭력적인 살인자로 묘사한다고 비평을 했을 때, 한 학생이 15개의 현재 인기있는 영화로부터 7분짜리 콜라쥐 장면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들은 매우 성상품화된 여성들이 섬뜩한 살인자로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고, 많은 경우에는 끝에가서는 자유롭게 된다. 그가 준 콜라쥐는 시청하기에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더욱 섬뜩한 것은 오늘날 유포되고 있는 일인칭 비데오 게임들이다. 여기에는 게임하는 사람이 한 여성을 뒤따라가서 강간하고 그녀를 죽이고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북미 문화에 있어서 가치는 약 80년전에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성공은 지혜, 용기, 고결함 그리고 인내와 연계되어 있었다. 지금은 부가 가장 가치있는 특성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변화는 사랑받고, 갈채 받으며, 힘 있고 싶어하는 우리의 갈망이 쇼핑하러 가는 것에 의해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는 메시지들에 의해 우리가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은 아니다.

폭력의 문화 그 근저에는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보다 우선한다는 가정이 있다. 회사는 이런 가정을 확대하여 그들의 권리는 환경 보호와 사회 책임을 원하는 공동체의 권리에 우선한다는 것을 뜻하게 만든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재소자들은 적십자사나 언론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로 옮겨졌을 때, 많은 인권 전문가들은 반대했다. 그들은 관타나모 만(Guantanamo Bay)과 이라크의 아부 그라입(Abu Ghraib) 감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소자들에 대한 고문과 인격상실을 예측했다. 세계에 쇼킹한 것은 정치 지도자들이 고문을 정당화하는 시도를 했다는 것이다 .

문화의 폭력성이나 비폭력성의 측정은 어떻게 그 문화가 범죄자라고 선고한 이들을 다루는가에서 나타난다. 진보적인 사회는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들을 사용한다. 이 프로그램들은 희생자에 대한 범죄의 충격을 다루며 가능하다면 가해자를 사회복귀하는 데 고안된 조치들을 부과하고 범죄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다. 어떤 곳들에서는 특히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선고를 내리는 서클들은 어떻게 선고받은 사람이 보상을 하고 결과적으로는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여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전체 공동체를 관여시킨다.

참고 자료들:

* Peaceful Childhoods Kit(지구적 생존을 위한 캐나다 의사회로부터)     www.pgs.ca

* UNESCO Culture of Peace: www.unesco.org

* Voice of Women for Peace Workshop Kit: www.peace.ca/vowworkshopki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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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2 08:29 2010/05/1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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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하구와 평화-강화 민중미학의 4중주로서 침탈, 분단, 저항 그리고 생명평화 :: 2009/11/22 09:12

한강하구와 평화

-강화 민중미학의 4중주로서 침탈, 분단, 저항 그리고 생명평화-

     
                                                                                        박성용 박사/비폭력평화물결 대표

-----목 차-------
서 론
1. 강화에 대한 어린 시절의 회상과 미래에 대한 예감
2. 작은 자들의 공생터전으로서 갯벌
3. 열강의 지배와 침탈에 대한 저항의 강화 민중
4. 소통과 상생을 위한 한강하구에서 생명평화의 새 흐름
5. 21세기 새로운 미래로서 한강하구
결 론


서 론

서해안에서 최근 11월에 일어난 남북 함선간 포격사건은 한국전쟁이후 정전협정의 상황이 언제나 중대한 위기상황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 준다. 그리고 서해안 한 지역의 안전이 한반도와 동북아 전체의 안전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지도 알려준다. 이런 의미에서 강화를 포함한 한강하구에서 자발적인 시민단체들과 현지주민들에 의한 생명평화운동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이미 강화지역에서 생태적으로 강화갯벌이 갖은 공생문화와 역사문화적인 제세이화 접화군생 인식론에 근거하여 전란에 대응한 강화 민중항쟁의 역사적 전통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강화와 한강하구는 문명의 젖줄을 시작하는 입구로서 있었음에도 대게는 주변화되고 잊혀진 곳이었으나 국란의 위기상황에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민초들에 의한 위기극복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생태역사문화적인 조건들이 강화와 한강하구의 정체성이며, 현재의 분단상황을 극복하고 화해와 상생, 평화통일의 미래를 위한 전초지로서 미래의 사명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미래의 사명을 이끄는 주체는 바로 한강하구의 생태와 역사가 보여준 작은 자들의 각성과 그들의 생명평화를 위한 공동의 지혜와 헌신에 의한다.

강화와 한강하구의 지정학적이고 역사문화적인 의미와 이에 대한 재 해석은 바로 그러한 미래의 창출을 위해 중요하다. 강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는 개인사에 어떻게 민족사가 얽혀있으며, 한강하구의 생태적 역사적 독특성을 일별함으로써  갖는 화해상생과 평화통일의 미래를 위한 강화와 한강하구의 역사적 사명과 그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특히 강화와 한강하구의 토착적 독특성은 작은 자, 민초들의 집단적 지혜와 공동의 노력이었음을 주지하고 이것을 계승발전하는 생명평화의 시민운동이 강화와 한강하구가 줄 수 있는 미래의 자산이며 이 민중의 저항과 초월의 미야말로 평범하면서도 세계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확신한다. 이것이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일본의 군사주의 문화의 부흥에 맞서는 평화헌법 9조의 국제적 시민운동과 연대하여 동북아 평화 공동체를 위한 꿈을 꿀 때 평화에 대한 힘은 더욱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1. 강화에 대한 어린 시절의 회상과 미래에 대한 예감

전쟁 포화가 멎은 5년 후 나는 강화 양사면 철산리 철곳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오피 군인부대여서 건빵 얻어 먹던 곳이 이제는 통일전망대로 바뀌고 태어난 마을도 김신조 간첩사건이후 철조망 쳐지고 마을도 강제로 헐려서 뒤로 이동해서 스무 가구정도 있던 곳이 우물과 옛 잔해만 남아있는 곳이다.

2킬로도 채 안된 건너편 북쪽에는 민둥산 아래에 전시마을이 있고  마을 사람들이 나와 논밭에 가는 것도 보이던 철곳마을의 시절에 대한 생각을 하면 모든 것이 단편적인 기억만이 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새벽이면 먼저 일어나 가마솥에 소여물을 쑤고 왕골로 화문석을 틈틈이 많은 시간을 들어 만들었으며 종종 강화읍 장날이면 새벽에 걸어나가 계란과 화문석, 혹은 다른 돈 될만한 것들을 지고 나가 저녁 늦게 돌아오시곤 하였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스피커에서 그리고 북쪽에서 쌍방이 대남 대북 선전 방송과 노래가 가끔씩 흘러나오는 것 이외에는 평온한 마을이었고 전쟁에 대한 별다른 이야기를 나는 듣지 못하였다. 대부분의 집들의 마당은 안이 들여다보이는 어깨정도 높이의 돌담으로 안이 들여다 보였고 마당에는 대문이 없고 집안에 들어갈 때만 양쪽으로 열리는 미닫이 대문들이 있었다. 돌담과 마당은 막히되 꽉 막지 않은 열린 공간을 만들어 저녁이면 마실오는 마을사람들이 화문석을 깔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60년대 당시에는 철조망이 쳐있지 않아서 조강과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교차되는 보뚝 갯벌에서 여름에는 물을 끼어 올려 미끄럼 타는 재미가 여간 즐겁지 않았다. 그런 놀이를 하면서 우리는 저쪽 시범마을 주변에  뭔가 흉측한 두려운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봐도 우리와 똑같은 멀리 모습에 고개가 갸우뚱거리기도 하였다. 가끔씩 주어드는 삐라를 딱지로 만들거나 혹은 모아서 학교나 지서에 갖다 주면 공책으로 바꿀 때에야 약간 그림과 글씨내용이 묘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우리의 일상사는 그냥 그렇게 흘러갔다. 남북의 선전 스피커의 카랑한 적대적인 목소리에 대해 그리고 삐라에 대해 우리는 익숙해져 있었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무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나는 그 '침묵의 문화'속에서 성장하였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서 그리고 서울 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강화는 잊혀져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스한 품과 등잔의 기억도 잊혀졌고 어쩌면 별로 변화없는 철산리도 철이 들면서 낯설어져서 중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는 후부터는 발길을 끊었고 몇 차례 이외에 철산리는 완전히 의식에서 잊혀졌다. 강화를 다시 찾은 것은 미국유학생활도중 아버지의 위암이 도져서 임종하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한국으로 온지 1주일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강화에 산소를 마련할 때였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도착하고서 마지막 아버지(아버지는 평남 성천이 고향이었다)께서 주신 말씀이 자신이 바로 '켈로부대' 출신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일생 알콜중독에 빠지게 된 비밀이었고, 자기 고향에 침투해서 군사정보를 빼내고 후방교란작전을 하던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 두었다가 이제야 목사인 나에게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자신을 임진각에 데려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임종후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몇 년 후 2006년부터 나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7.27한강하구 평화의 배띄우기 한국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강화를 매년 찾게 되었고 금년엔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세계행진'의 이름으로 세계평화활동가들로 하여금 강화 철조망을 걷게 하고 철산리 통일전망대 망배단에서 평화통일을 기원하고 세계언론에 한국의 분단상황과 실향민의 아픔을 기사로 보내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기도 하다. 

파편화된 기억을 더듬는 것은 바로 그 속에 한국의 아픈 민족사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고, 한 강화출신인 나의 가족사속에 강화 민초들이 겪는 고통과 비극의 아픔이 강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잊혀지고 망각된 개인의 삶 뒤에 민족의 공적 역사가 그렇게 조강의 물길처럼 흐르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제 새로운 미래를 위한 변혁의 상상력을 탄생시키고, 남과 북의 경계선에서 태어난 나에게는 이제 남북을 잇고 치유하며 증오와 단절을 생명평화의 새로운 기운으로 전환시키는 염원을 아로 새겼다. 말하지 못한 것을 이제는 말하고 드러내며, 가슴에 깊이 파묻힌 비밀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불꽃을 영혼에 점화시킨다.


2. 작은 자들의 공생터전으로서 갯벌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조강이 되어 서해로 흐르는 영역이 한강하구이다.  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왼쪽에 임진강이 북쪽의 관산반도를 돌고 오른쪽에 한강이 김포반도를 돌아 서로 합치면서 북과 남의 물들이 만나 하나가 되어 어울려 흐른다. 이 아래 펼쳐진 갯벌에는 온갖 생명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내가 살던 철산리에서는 두루미를 비롯한 천둥오리를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갯벌은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1만년의 세월의 흐름속에 서서히 형성되어 온다. 그것은 하늘의 달의 인력, 땅에서 강상류의 토사물들의 이동, 풍력과 바닷물, 지리적 여건과 강물의 이동속도 등의 여러 복합적인 요소들의 상호 관계와 균형 그리고 긴 과정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갯벌은 그 어느 요소 하나의 불균형으로 인해서도 쉽게 상처받고 그 생명력이 흔들릴 수 있다.

한강하구의 갯벌은 서해안의 갯벌과는 약간의 지리적 특성이 다르다. 그것은 조수 간만의 흐름만이 아니라 민물과 바닷물이 서로 엮여져 있고, 남과 북의 물들이 만나져 내려오며, 육지와 바다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특이한 특성이 존재한다. 즉 상호 이질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보이는 다른 영역과 다른 세력이 서로 흐름을 통해 소통하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이다. 어느 한 영역이나 한 세력도 그 갯벌을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서로 쓸려 나가고 올라오며, 민물이 흘러내려가고 바닷물이 들어오는 상호 역동적인 흐름속에서 새로운 소통방식을 찾아내고, 거기서 특이한 존재방식을 익히게 된다.

한강하구의 갯벌은 따라서 상호포섭과 융융무애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곳이고, 서로 이질적인 타자들이 상대를 끌어들이고 안으며, 주고받으며, 잇고 연대하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면서 그러한 힘과 세력의 상호 관계속에서 형성된 자기 고유의 지정학적 삶의 패턴들을 만들어 낸다. 어느 힘과 세력 하나가 전체를 지배할 수 없고 나가고 들어옴, 밀리고 올라오는 일시적인 逆과 反의 카오스(혼돈)가 이질적인 것의 새로운 통합과 통전의 코스모스(질서)를 형성한다. 

그러한 이질적인 것들의 통합과 통전의 질서를 감내하는 갯벌은 결국 강하고 큰 것들은 견디지 못하고 작고 여린 것들의 집합 장소이자 그들의 상호 관계에 의해 형성되어진다. 어느 시인의 글처럼 바람이 불면 먼저 누웠다가 다시금 일어나 무리로 서는 갈대는 한 예이다. 염습지에서도 잘 크고 오염물질을 정화하는 다양한 생물적 여과기능을 하여서 영양염류나 중금속등의 물질 순환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급류와 강풍에 줄기가 잘리거나 꺽이며 한파에 말라 죽어도 뿌리는 그대로 살아남아 다시 줄기가 솟아올라 무리져 생존하며 철새와 작은 동물의 서식지를 제공한다.

갯벌 바닥에 사는 저서생물들은 흐름에 민감하다. 썰물이 나갈 때면 그토록 조용하고 자취없던 표면에 순식간에 자신의 집을 구축한다. 작고 작은 게들이 무리져 옆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면 감탄을 하게 된다. 가장 작고 여린 것들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갯벌은 흐름에 순응하면서도 상호지원하고 서로의 터를 범하지 않으며 공생의 삶을 살아간다. 일찍이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흘러 내려가는 곳을 우리는 조강(祖江)이라 시조가 되는 강이라 불렀고 만물이 융합되고 소통되며 관계를 맺어 생명을 윤택하게 하는 발원의 강으로 인식하였다.

한강하구의 조강과 갯벌이 갖는 원융무애, 상호포섭의 삶의 원리는 생태적인 지리적 특성만이 아니라 역사문화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홍익인간, 제세이화라는 민본사상과 민족의 출발지이자, 역사이래 한반도 문명의 젖줄이 되어 주었다. 역사문화적인 측면에서 포함과 상호융섭의 풍류문화는 이질적인 남과 북, 자연과 역사, 서양과 동양, 엘리트와 민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좌익과 우익간의 긴장과 소통, 저항과 초월의 역사문화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역사문화적인 흙탕물의 격류속에서 크고 강한 것들은 부서지고 작은 것들이 퇴적되어 남아 끈질긴 생존을 영위한다.

그리하여 문명의 보루이자 입구였던 한강하구는 주변화되어 머물러 있게 된다. 그리고 남북분단의 현실과 휴전협정으로 생긴 중립수역으로서 한강하구는 '정치적 호수'가 되어 그 흐름을 멈추고 작은 자들이 아닌 큰 자들의 소통이 아닌 대결의 장으로 변질되어 자기 정체성을 잃고 침묵하며 고립되어 있게 된다. 긴 역사동안 한강하구는 강화에서 마포까지 장삿배와 시선배가 드나들며 땔감, 소금, 해산물, 쌀, 생활 잡화를 실어 날랐다. 나루터와 포구를 통해 막힌 것을 잇고, 흐름을 따라 뱃사람들은 물길과 물때를 따라 살았으며 경계 짓지 않고 살았던 곳이 이제는 고립된 침묵의 호수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3. 열강의 지배와 침탈에 대한 저항의 강화 민중

한반도 역사문명의 젖줄인 한강하구는 문화적으로는 주변에 있었지만 군사문화적 충돌에 있어서는 그 중심에 있었다. 군사적 충돌은 제국주의적 외세와 민족 자존의 치열한 대결이며 그 장이 바로 한강하구인 것이다. 강화는 이 군사적 충돌에 있어 가장 감당하기 힘든 적을 맞이하여 싸웠고 내부의 정치권력의 허약성과 체제모순으로 인해 이 힘든 싸움에세 수많은 전란과 희생의 아픔을 겪은 곳이다.

몽고침략시기는 고려의 문신귀족정치의 와해와 무신정치의 등장, 그리고 수많은 민란으로 점철된 때이다. 1232년 고려조정이 강화천도를 단행함으로써 관의 군사전략적인 판단 오류와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일은 바로 민중항쟁세력이 항몽전선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군사전략이 바로 강화를 통해 이루어졌고, 산성과 해도로 들어가 방어하며 싸우는 이런 군사전략의 한계와 관리들의 도주로 인해 오히려 자생적으로 농민, 노비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항쟁세력을 만들어 대몽항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항쟁도 봉건정권은 이들의 세력화에 대해 정권이 배신하고 봉건정권은 무자비한 탄압을 하게 된다. 1270년 원종이 몽골의 요구로 개경환도를 하면서 삼별초와 민중항쟁세력대 몽골군과 관군간의 대결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민중이 애국적 열정을 가지고 항전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조정은 민중을 버리고 적과 연합하여 민중을 탄압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왕조권력의 부패와 관리들의 무능력에 의해 토탄에 빠진 사회를 살린 민중의 지도력과 자강자립의 주체로서 민중의 힘은 몽고군과 관군에 의해 오랜 항전을 통해 소멸하고 말았지만 역사의 교훈은 끈질긴 민중의 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오랜 전란과정에서 민초들은 성곽 축조와 간척지 방조, 양곡의 수탈 등의 가혹한 고통을 감내하게 되었다.

강화는 또한 근대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에 있어서 새로운 중심이 된다. 병인, 신미 양대 양요를 통해 한강하구는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노출이 되었고 그들의 신식 화약무기와 군사전략에 아무런 대비가 없던 조선왕조는 군사문제에 있어서 전략과 전술 훈련 그리고 병참에 있어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프랑스와 미국과의 강화에서 일전은 관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휘자 지략과 용기-양헌수, 어재연, 어재순-로 겨우 막아내었다. 조선군의 투혼의 역사이면에는 관민간의 협력의 중요성, 민의 보위 능력과 그 필요성에 대한 교훈을 낳았다.  

한국전쟁을 통해 한강하구는 또 다시 세계냉전체제의 모순의 폭발을 가슴으로 안게 되었다. 강화지역은  전쟁전후기간에 좌익계 조직, 미군첩보부대휘하의 켈로부대 등 유격대활동과 우익무장단체인 민주청년반공돌격대, 대한 정의단, 서북청년회 등이 오가며 득세하였고 연백을 비롯한 북한의 피난민들이 내려와 실향민의 아픔을 한강하구는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광폭한 전란의 카오스와 야만의 바람은 강화를 휩쓸고 지나며 그 역사적 아픔의 살아있는 잔해를 한강하구 곳곳에 심어 놓았다.

이러한 야만의 역사에서 민중의 가멸찬 지혜는 빛을 더욱 발휘하였고 왕조와 이승만 정권이래의 화려한 국가주의 이념속에서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변방에 있는 민초들은 그대로 역사의 아픔을 감내하면서도 자주 자강의 노력들을 보여주었다. 힘을 지닌 권력층의 역사적 관점에서 쓰여진 여러 위인들의 전기에도 불구하고 강화의 역사는 아직도 민중의 역사를 담고 있다. 갯벌의 군생하는 갈대와 흙탕물속의 망둥이의 도약, 게들의 옆으로 걷기가 생태적으로 민중의 공생과 흐름의 초월, 권력에 따르지 않는 저항의 상징을 보여준다. 수많은 보와 대, 섬들을 연결하여 생긴 수많은 간척지는 화려한 문화적 상징은 아니지만 거기에 들어간 민초들의 수많은 수탈과 억압의 노역과 민중항쟁의 열정을 보여주는 강화의 상징이다.

변방의 위치에서 작은 자들은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관리들이 전란시에 도망가고 전술미숙의 실패와 무능력을 대치하여 공동안보의 연대의 힘을 발휘하였다. 위에서 내려오는 흙탕물의 역사적 격류와 카오스의 힘의 밀려옴에 대해 저항과 이상에 대한 집단적 힘을 발휘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유지를 위해 민중항쟁세력들을 반란자로, 민족주의자를 우익에 충성하지 않은 빨갱이로 딱지를 붙여온 분단과 냉전의 논리가 한강하구에서 일어났다.
성공과 번영에 대한 엘리트들의 꿈은 다시 새로운 한강문명시대를 맞아 살아나고 있지만, 한강하구가 가진 좌우, 남북, 민물과 바닷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상호교호하고 포섭하는  접화군생, 제세이화, 화광동진의 지정학적인 이상은 잊혀져 망각의 흐름속에 사라져가고 있다.     


4. 소통과 상생을 위한 한강하구에서 생명평화의 새 흐름

지정학적으로 주변부에 위치한 한강하구는 문명의 번성시절에는 쉽게 무시되었음에도, 오욕의 시기에는 가장 안전한 보루의 역할을 해왔다. 이것은 한강이 민족사의 젖줄이기 때문에 그 한강의 입구에 한강하구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진술하였듯이 지정학적으로 한강하구는 민물과 바닷물, 육지와 바다의 상호교호작용과 소통이 생태적인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문화사적으로 남과 북, 국내세력과 해외세력,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경계선에서 힘의 역학적인 상호작용이 있을 때 자생적인 民이 지닌 집단 지성의 예리한 시대적 요구에 대한 감각과 공동의 저항과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강하구는 체질적으로 흐름과 역류속에서 서로 잇고 소통하며 자생적인 자기정화와 공생의 생태적 문화적 시스템을 갖고 있어서 우리의 삶의 방식이 이에 따를 때 문명은 꽃을 피워낸다. 그러나 한국전쟁이후 분단의 상황과 냉전의 질서는 이 한강하구를 단절과 상호적대의 장으로 만들면서 흐름을 주도해야 할 민족의 심장이 멈춰져 있어왔다. 정전협정의 결과로 휴전선이 그어져 더 이상 소통과 공생의 장을 한강하구는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와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분위기와 서울시의 한강 거북선을 통영으로 옮기는 사건 그리고 개성공단의 조성, 김포 강화 등의 지역자치지역에서  한강하구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논의가 계속 발전적으로 있어왔다. 이 논의가 중요한 것은 ‘한강하구’ 문제를 둘러싸고 관련된 다양한 이해집단과 관심과 요구가 분출한 가운데 남과 북이 화해의 역사를 새롭게 열어갈 귀중한 기회 역시 이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민단체는 정전협정의 어느곳에도 한강하구에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있다는 말이 없으며 오히려 민간선박의 안전운행에 긍정적인 조항이 있음을 발견하여,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에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를 2005년부터는 매년 실시해 왔다. 이 항해의 상징적 사건은 다시금 소통과 공생의 한강하구의 특성을 복원하는 것이었고 이로 인해 다시금 한강하구는 주목을 받으면서 전 국민과 언론 그리고 정치계에 화해와 교류의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고 남북의 극렬한 대치속에서도 2.13합의와 10.4 회담에 이르는 화해무드에까지 오는 데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평화의 배띄우기 사업은 실질적으로 미군이 통치하는 유엔군사령부가 정전협정에는 없는 새로운 용어인 ‘관할권’을 주장하며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를 제한시켜왔다. 대중운동으로서 평화의배띄우기 행사가 원래의 목표인 실향민의 아픔의 치유와 민간교류의 평화적 공간으로서의 한강하구에 대한 비전이었고 이것이 ‘관할권’의 주장으로 막히자 시민단체들은 내부 학술토론을 통해 한강하구에서 유엔사의 주장에 대해 공부하면서 뜻밖의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유엔사의 법적 정체성과 그 역할 그리고 한강하구에서 관할권 주장이 매우 모호하고 법적 정당성을 유엔법과 국제법에 의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결함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평화의배띄우기 조직위원회는 한국정부, 미국 그리고 유엔이 나서서 유엔사의 올바른 위치를 정립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렇게 평화의 배띄우기 캠페인은 화해와 상생의 평화를 위한 대중운동만이 아니라 이제는  현안문제를 시민이 해결하는 성찰과 대안제시운동을 함께 시작하면서, 공동의 지혜와 선의를 모아. 대립과 갈등, 죽임과 전쟁의 최전선인 한강하구를 소통과 화해와 상생의 실질적인 생명평화지대로 열어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 노력 속에는 몇 가지 원칙이 존재한다.

- 이 사업은 원래 실향민들의 아픔과 절망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하고, 끊어진 민간선의 뱃길을 열어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희망을 담은 사업으로서 출발하여, 서해안의 군사적 갈등에 대한 민간인들의 평화에 대한 노력을 구체화함으로서 한강하구지역을 비폭력적인 생명평화지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지역민의 평화염원의 실천).

- 한강하구 각 지역 조직위원회를 통해 1년 1회로 끝나는 일회성의 사업이 아니라 지역적 특성과 조건에 알맞은 평화, 인간발전과 지속가능한 발전, 생태의 가치가 실현되는 예술과 문화적 활동-평화는 무기와 폭력이 아니라 춤과 노래로!-이 강화되어 시민들이 보다 쉽게, 다양하게 참여하는 행사기획으로 발전되어질 것이다(생명평화의 대중문화형성).

- 한강하구의 각 주변지역의 특성에 맞는 생명평화 공동체문화의 형성을 위해 타당성 있는 지역 요구의 합리적 해결을 위한 연구사업과 전문가와 지역자치단체 실무자들이 참여하는 공동 워크숍을 실시함으로써 합리적인 해결방안과 상호협력의 협치 문화를 조성함으로써 선진국가발전의 원동력을 일으켜 내어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천을 강화한다(풀뿌리 민주화를 위한 시민사회 역량강화).

- 이산가족 및 물자교류사업, 공동치수사업, 환경보존과 생태탐구사업, 위험물공동제거, 질병공동관리 등 한강하구와 전체 한강지역을 포함하는 생명평화지대화 사업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남-북간의 긴장완화와 상호 복지를 위한 민간차원의 화해협력사업에 일조하며, 한일간의 평화헌법을 위한 공동연대, 국제평화캠프 등의 국제연대사업을 통해 장차 동아시아 평화공동체의 구축에 기여한다(아시아평화공동체 형성과 국제 평화리더쉽 강화)


5. 21세기 새로운 미래로서 한강하구

한강하구의 생명계는 생태적으로도 이질적인 민물과 바닷물의 흐름과 역류의 평형적 균형과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역사문화적으로도 외세의 침탈과 이에 대한 민중저항의 역학관계가 첨예화된 곳이다. 문명의 충돌과 세력의 충돌속에서 수많은 민초들의 고역과 희생이 뒤따랐다. 몽고침략시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서구열강의 침략, 한국전쟁을 통하여 한강하구의 민초들은 억압과 희생을 당했다. 그리고 국난의 위기에 있어서 고려와 조선왕조의 관리들의 부패와 무능력에 대해 국가를 건진 이들은 바로 민중저항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전후 그리고 독재정권시절에 한강하구는 좌우익간의 충돌, 민간인 학살과 좌익척결의 사나운 칼바람이 몰아친 곳이기도 하다. 그 분단과 냉전의 논리는 한강하구를 고립된 정치적 호수로 만들었고, 이를 뚫기 위한 저항과 노력도 과거와 똑같이 시민세력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지금 강화를 포함한 한강하구 여러 지역에 '국가안보'를 위해 과거에 축조된 성곽, 보, 진 그리고 철조망과 전망대들이 군사문화와 자국중심의 국가민족주의의 체험학습장이 되어 지배왕조와 지배정권의 이념을 지지하는 재생산지가 되는 것을 필자는 경계한다. 한강하구의 독특한 생태적 특성과 역사정치적 교훈은 작은 자, 민초들의 공생능력과 자치능력이 위기를 구하는 대안적 힘이 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와 희생의 집단적 기억을 재방향화 하여야 한다. 민중저항세력이 군사적 국가안보에서 동북아 평화안보와 시민주체의 세력화를 통한 공공선에 의한 공동안보라는 새로운 시민운동으로 전환할 때인 것이다.

강화를 포함한 한강하구의 독특한 미는 소통의 미, 민의 미, 작은 자의 미이다. 노자가 말했듯이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요 약한 것은 생명의 무리이다. 한강하구에서 신문명의 태동은 가장 많은 고난과 아픔을 경험한 민초들이 강제와 지배의 힘을 넘어서서 소통과 협력의 힘을 의지하고 군사의 힘이 아니라 사회자본(신뢰, 네트워크)의 힘을 통해 자국중심의 국가주의를 넘어 동북아평화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강화하고 이를 위해 노력할 때 찾아온다. 철산리 통일 전망대에세 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강하구의 지정학적이고도 시대적인 요구들을 바라볼 때 온다. 그 요구들은 다음과 같다.  


- 한강이 주는 가치· 문화적 이미지는 단절 없는 흐름, 여러 갈래로부터 발원하는 다양성의 포섭과 그것들의 융합 및 소통으로서 발생하는 일치와 다양한 생명체들의 건강과 그들의 번성함이다. 무력갈등과 이산가족의 아픔이 가장 강하게 잔존하고 있는 한강하구와 그 주변의 DMZ유역을 포섭, 융합 및 소통을 위한 생명평화지대로 전환하여 화해와 상생의 가치를 실현한다.

- 한강하구를 평화의 비폭력적 대중화를 위한 전 국민적 캠페인을 활성화하는 지역공간으로서 그 기능을 심화 발전시키고, 소통과 상호관계성에 기초한 다자협력의 파트너십과 지도력을 통해 지역주민과 이해당사자들의 욕구, 지혜, 상상력, 노력을 수렴하고 재 강화한다.

- 한강하구 지역조직을 중심으로 사회분열, 대립, 갈등을 통합하고 사회자본의 공공영역 확대를 위한 이슈형성 주체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시민사회, 종교계, 지방자치, 기업 등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협력과 대화를 통한 과제실현의 협치 문화를 지향한다.


결 론

외세와 전쟁 그리고 폭력이라는 야만의 격류를 감당해온 한강하구는 소통과 공생의 본래모습을 잃고 이별과 적대의 장소가 되어 눈물의 강이 흐르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한강하구의 생태적 독특성인 공생의 원리와 역사적으로 민초들의 수난과 이에 대한 저항의 지혜를 모아 군사문화와 냉전논리를 지양하고 공공의 선과 공통 인간성에 바탕을 둔 평화주의를 실현할 때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아픔의 기억은 변혁을 위한 에너지가 되며 창조적 상상력을 위해 공헌하게 된다.

중심에 선 지배엘리트 권력의 화려한 전시적인 과시문화와 토착성을 잃은 얼없는 상업문화를 넘어서서 주변인으로서 그리고 작은 자의 공생의 삶의 원리를 드러내는 화해상생의 민중문화를 침탈과 분단에 대항하는 저항과 생명평화의 세력화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강화와 한강하구는 평창이나 다른 생태문화마을보다 유리한 조건에 있지 않다. 여기의 독특성은 분단이 남긴 DMZ 영역이 아니라 민간인, 민간선박에 개방되어 있는 중립구역(Neutral Zone)이라는 사실이다. 강원도가 'DMZ평화생명마을'을 통해 분단과 생태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그것을 관광상품화 한 것처럼 강화와 한강하구의 중립구역은 화해상생, 평화통일을 위한 대중들의 평화감수성에 기여하는 장소로 중요하게 사용되어져야 한다.

한강하구 갯벌의 소통과 공생의 원리에 주목하고 하늘과 숲 그리고 갯벌에서 사는 작은 생명체들의 삶에 대한 따스한 배려 그리고 한강하구 민초들의 저항과 초월의 몸짓을 읽어내며 이들 생태-역사의 작은 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체험하며 이를 드러내는 한강하구 민중미학이 토착적이면서 지구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동력으로서 민중저항운동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그리고 중립구역과 DMZ를 생태평화지대로 만들기 위해 보편성과 인류애를 담은 생명과 평화를 위한 시민운동으로 승화될 때 한강하구는 새로운 평화통일문명의 발원지로서 그 역할을 하게 된다. 그중의 하나의 예가 일본의 평화헌법을 위한 시민운동과 연대하고 국제평화캠프 등을 개최하면서 공공의 선을 위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경우이다. 금년 2009년에는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세계행진' 행진단이 강화를 방문하고 중립수역 철책선을 밟았으며 지역주민과의 대화에서 현지인들의 강화와 교동의 평화의 섬으로의 전환에 대한 제안들도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한강하구의 아픔과 고난의 기억이 새롭게 지혜의 길잡이가 되어줄 때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우며 자비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다. 


미 주)

1) 한강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서로 달리 불렸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대수(帶水), 고구려에서는 아리수(阿利水)라 했으며 백제는 욱리하(郁里河), 신라는 상류를 이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로 불렀으며 한산하(漢山河)라고도 했다. 한수(漢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백제 때이며 고려에서는 열수(列水)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이 서로 다르다. 검용소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골지천이며 정선으로 접어들면서 조양강, 그리고 동강이 되었다가 다시 남한강으로 불린다. 여주에 다다르면 여강 양평을 흐르는 강은 양강이 되며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만나 비로소 한강이 된다. 그러나 서울을 흐르는 한강은 경강, 그리고 임진강과 만나서는 조강이라고 불렸다.


2) 켈로부대(K.L.O-Korea Liason Office)는 군번없는 부대로서 맥아더 사령부, 정보참모부와 미국전략정보국 CIA의 전신인 OSS가 공동으로 운영한 대북공작 첩보부대였다. 한국군도 미국군도 아닌 국적불명의 이 부대는 북한에서내려온 젊은이들을 북한의 후방에 침투시켜 정보수집과 후방교란, 파괴방해공작 등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필자의 아버지는 켈로부대 경력이 인정되지 않아 다시 한국군에 입대해 육군 중위까지 있다가 만년제대를 하였다.

2009.11.21. 강화 오마이뉴스강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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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2 09:12 2009/11/22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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