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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성자이야기-세속의 성화와 형제 성소의 새로운 영적 개척자, 샤를 드 푸코 :: 2009/05/13 10:23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비천의 사막은 거룩함의 우물을 지니고 있다

-세속의 성화와 형제 성소의 새로운 영적 개척자, 샤를 드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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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회의주의, 과학적 실증주의 그리고 군국주의의 식민지 팽창이라는 병적 혼란의 어둔 밤에 새로운 별을 잉태한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의 삶과 그의 영향은 매우 기이하다. 왜냐하면 살아생전 아무런 제자도 없이 죽었으나 사후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의 영향력이 생겨나면서 그의 통찰에 영감받아 세계 곳곳에서 20개 가까운 다양한 재속 수도회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낮은 곳’과 ‘마지막 자리’에서 신의 현존을 발견하고, 형제성소와 세속의 성화라는 새로운 현대 영성의 샘을 판 사람이었다. 그의 시도는 완성된 결실은 없었지만 그의 시도와 그가 제기한 새로운 영성의 통찰은 오늘날 종교의 물질화와 제도화 그리고 화려한 사업들에 대한 대안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며 욕망과 사치로 지쳐버린 현대인에게 참된 삶에 대한 갈증을 덜어주는 생수를 공급해 준다.



“나는 멀어져 갔습니다. 점점 더 멀어져 갔습니다......

샤를 드 푸코가 살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식민시장의 쟁탈과 군국주의의 부활, 국가간 전쟁과 계급투쟁, 인종과 이념간 갈등으로 황폐해지고 분열의 골이 깊어져 가는 시대였다. 그는 1858년 프랑스 동부 한 도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6살 이전에 부모님을 여의고 환경의 변화로 상처받으면서 쓰라린 공허감과 불안으로 예민해진 무분별한 아이로 성장한다.

샤를에게서 특이한 것 중의 하나는 다른 성인들에 나타나는 어린 시절의 깊은 종교적 체험이나 그 어떤 영적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중에 피정의 묵상시간에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유년기는 “게으름, 음식에 대한 탐욕, 거짓말, 배은망덕, 부끄러운 죄들, 허영심, 오만, 자만심”으로 가득 찼다고 고백하였다. 소년기에 있어서도 “...저속한 말과 독서, 거짓말, 도둑질, 부끄러운 죄들, 오만과 무분별한 허영심, 지독한 이기주의,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어리석은 낭비”로 인해 극도의 쾌락주의에 탐닉하였다.

방황의 사춘기를 지나면서 신앙을 잃고 쾌락과 무질서의 삶에 빠진 그 전형적인 이야기가 바로 22살에 청년 장교로서 아프리카 북서부 알제리에 파견되었던 당시의 일로 알 수 있다. 기병학교시절에 유산으로 물려받은 재산으로 고급 양복점과 양화점을 다니고 고급주를 마시며 대단한 미식가로서 그 당시 하루에 수백 프랑을 그는 돈을 물쓰듯 손쉽게 썼다. 군인으로서 사치와 방탕, 그리고 정부와 놀아나던 그는 결국 군기위반과 풍기문란으로 정직처분까지 받았으나 그의 돈으로 얻은 인심덕분으로 겨우 졸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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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는 아무런 경건의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군을 떠나 1983년 6월부터 1년간 위험한 모로코 지리 탐험을 통해 비로소 그는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멸시와 비참하고 험한 극기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여정을 통해 나그네로서 약자의 상태를 맛보고 그곳에서 자기를 받아준 유대인과 무슬림의 충실함과 관대함에 감명을 받으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눈이 떠지게 된다. 특히 그곳 무슬림의 증거적 신앙은 큰 충격이 된다.

이슬람교는 내 안에 엄청난 전율을 불러일으켯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사는 이 신앙, 이 영혼들을 보고서, 나는 이 세상의 일보다 더 크고 진실한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성서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앙리 드 카스트리에게 보낸 편지, 1901.7.8)

축제와 권태로움에 빠져 있던 그가 비기독교인의 충격을 통해 종교적 심성의 회복하고 현대 종교인들이 거의 상실한 ‘회심’의 길을 걷는 인연을 맺는다. 파리에서 모로코 여행기를 출판하고자 머무는 동안 지적이고 덕망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면서 가톨릭을 알고자 하는 열정을 갖고 위블랭 신부를 만나면서 그의 일생은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주님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셨기에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샤를은 자신이 신의 자비로 인해 생명을 찾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통해 신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사셨던 그 장소에서 강생과 육화의 신비에 대한 종교적 확신의 경험과 자신의 전 삶을 규정짓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론적 통찰을 얻게 된다. 이 나사렛 순례를 통해 위블랭 신부의 강론이 메시지가(“주님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만큼 철저하게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셨기에 아무도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영혼속에 각인이 확인되고 구체화되는 헌신의 동기를 받게 된다. 그가 이 순례에서 발견한 것은 ‘나자렛의 숭고한 노동자의 겸허하고 숨겨진 삶’이라는 강생과 육화의 신비였다.

그에 따르면 나자렛의 예수는 무한한 겸손 곧 무한하시고 완전한 분이 이 지상에 한 인간 그것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분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는 위대함에 연연하지 않고 존경에서 초탈하며 아무도 알지 못하게 그는 나자렛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하시며 사셨고 최악의 치욕속에서 죽으셨다는 강생의 신비에 그는 매료되어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비천과 무명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채 가난한 장인으로 사셨던 우리 주님의 발길이 다녔던 나자렛의 거리를 걸으며 나 자신 예감하고 상상했던 삶을 살고 싶은 갈증에 불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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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은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는 신념으로 그는 주인이 한 것처럼 작기 위해 마지막 자리를 찾기 시작하였고, 가난가 비천, 고통과 고독 그리고 버림받는 삶을 성실히 추구하였다. 이 육화의 신비야 말로 샤를에게는 신의 궁극적 선을 표현하는 삶으로 이해되었고 ‘비천’과 ‘낮은 자리’야말로 성소, 신의 현존의 장소임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생 동안 ‘내려오는’ 일만을 하셨습니다. 육화하며 내려오시고, 어린 아기가 되어 내려오시고, 순종하며 내려오시고, 가난한 자 되며 내려오시고, 버림받으며 내려오시고, 피난 가며 내려오시고, 박해받으며 내려오시고, 사형 인도받으며 내려오시고.... 항상 마지막 자리를 선택하시며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밤의 순례자) 

샤를의 직감은 바로 이러한 ‘낮은 자리’에로의 추구가 그리스도교 계시의 본질이며 그것이 단순히 말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천의 근거이자 과제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현대 그리스도교 영성과 성소에 대한 새로운 지평과 갱신의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낮은 자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겸손과 존경 그리고 세심한 배려로 그들을 대함으로 새로운 성소(sanctuary)의 길을 열었다. 성체(미사와 같은 예배의식)에서 신을 만나는 ‘성체성소’를 지키며 기도의 생활을 추구했지만 또한 일상의 삶에서 가난한 자에 대한 섬김과 사랑속에 신을 만난다는 ‘형제성소’의 새로운 수행의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에 대한 친절과 애정과 형제적 사랑을 통하여, 그리고 겸손과 온유를 통하여 사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안에서 드러나지 않게 사는 모든 영혼에게 말합니다.
세상의 성화를 위하여 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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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렛 예수의 숨은 생애가 세상을 피한 조용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가장 작은 자들에게 더 깊이 다가가기 위한 길임을 깨달은 샤를은 이제 가난과 겸손 그리고 노동을 실천하는 수도회로 알려진 트라피스트회에 입회하여 첫 7년을 지내고 나자렛 글라라 관상 수도회의 문간에서 은수자로 4년을 보낸다. 관상생활을 통해 그는 주를 사랑하는 것은 그분처럼 가장 버림받아 멀리 있는 이웃이 되는 것임을 깨닫고, 수도원의 안전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문명세계로부터 단절된 사하라 사막 오지로 들어가 가난한 원주민 곁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그는 기독교 복음의 정수인 ‘사랑의 완전한 단순성’을 순명으로 받아들여 이렇게 고백한다: 

“나로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닮기를 추구하지 않는 사랑,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고, 그 삶을 같이 살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이 없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샤를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스승이신 그분처럼 아주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가 되는 일에 온몸으로 투신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1901년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굶주림과 마른 모래폭풍의 사하라 사막으로 떠나 베니 아베스(Beni-Abbes)와 타만라셋(Tamanrasset)에서 단순히 사막의 유목민들과 친구이며 형제가 되고자 노력한다. 그는 힘들여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혀 나간다.

“... 저는 닮고 같아지려는 절대적 요구를 외면한, 특히 사랑하는 이의 삶의 고됨과 어려움을 공유하지 않는 그런 사랑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일하시며 구차하고 힘든 노동자의 삶을 사셨는데, 제가 저의 재산을 가지고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종이 주인보다 높은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자리)

복음서의 꾸준한 묵상을 통해 샤를은 신을 사랑할수록 더욱 이웃을 특히 작은 자들을 사랑하게 된다는 육화와 강생의 신비에 심취된다. 따라서 그가 순명을 이야기 할 때 이는 사랑의 단계에서 가장 끝단계인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완전히 낮추어지는 단계’ 곧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자신에 대해 죽는 단계라고 고백한다. 그는 이를 위해 “비천함과 가난함과 천한 육체노동의 길을 따르는 것”을 실행하기 위해 수도자의 지위를 버리고 ‘만인의 형제’로서 사하라 사막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저의 집을 ‘형제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군요.
그것이 저를 흐뭇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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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의미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모심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먹히우는 자가 되는 것이라는 이해를 가진 샤를은 또한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제단의 성사를 형제들의 성사와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가슴깊이 각인하여 모든 사람과 섞이고 환대, 봉사, 그리고 가장 미소한 이들과의 형제적 나눔을 실천한다. 종교와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상대가 자신을 모든 이의 형제로 보고 그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04년 4개월의 길고도 험한 사막횡단 끝에 사막의 오지인 호가르에 정착한다. 여기서 그는 은둔소를 외딴 곳이 아니라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한다. 단순히 사막의 유목민들의 형제가 되려고 애쓰면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개종보다는 사랑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를 위해 그의 전 삶을 건다. 그는 가장 가난한 이들을 맞아들이면서 그들의 필요에 세심해 지면서 그들의 현실 조건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실체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노예제도가 프랑스당국자들과의 공모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에 대한 여론을 일으키려고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자선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해야 합니다. 현 정부가 어떤 면에서 우리가 돌보는 이들에게 중대한 불의를 행할 때, 정부에 그 사실을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책임한 목자”(겔34장)나 “잠든 보초, 짖지 못하는 개”(사56,10)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이 성체안에 현존하시듯 가난과 억압으로 일그러진 모든 사람들 안에 참으로 현존하신다는 확신은 샤를 형제의 삶을 변형시킬 뿐 아니라, 그의 삶에 통합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은 “선의 사도”(우정의 사도직)로서 모든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형제로, 누구에게나 온유로 대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게 된다. 거기서 병약한 자로 눕게 되자, 당시 17개월이 넘는 기근에 허덕이던 투아레그인들이 약간의 우유를 얻기  위해 십리안의 염소들을 찾아다녀서 그를 살려낸다. 이제 비로소 깊은 신뢰가 싹트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항불운동이 전개되어도 현지인들과의 우정 때문에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하여 홀로 끝까지 남아 있다가 결국은 무장약탈집단의 폭력의 희생자가 된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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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죽는 날(1916년 12월 1일) 마침 사촌 여동생에게 이런 글을 그는 남긴다: “우리가 무화(無化)된다는 것은 예수와 하나가 되고 뭇 영혼들에게 베푸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거의 매 줄마다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사랑을 위해 자신이 무화되기, 세속의 성화, 종교와 인종의 벽을 넘어서는 형제성사(sacraement of friendship)에 대한 그의 투철한 실천은 살아생전 아무도 따르는 자가 없었지만 그가 남긴 글로 인해 영감받아 이제 20개의 그를 따르는 재속수도회와 수많은 익명의 활동가들에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주목을 받으며 마르지 않은 샘이 되고 있다.  

“저는 그리스도교 신자, 이슬람 교도, 유대인, 우상숭배자 등 모든 사람들이 저를 자기들의 형제 즉 모든 사람들의 형제로 여기는데 익숙해지게 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제가 사는 집을 ”우애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제게 매우 감미로운 일입니다.” (1902.1.7)


신의 존재는 사랑을 증험한다(샤를이 남긴 몇가지 메시지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공식적으로 공의회에서 선포한 그 시대에 샤를은 이렇게 까지 말한다:
 
"우리는 주님에 관한 말을 직접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떠나가버릴 테니까요. 먼저 그들과 신뢰를 다지고,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작은 봉사를 하고, 그들에게 좋은 의견을 들려주고, 그들과 우정을 맺고, 조심스럽게 그들의 종교를 열심히 믿으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1905년 12월 16일, 드 봉디 부인에게 보낸 편지)]

...애덕은 편협하지 않습니다. 애덕은 예수님의 마음이 끌어안으시는 모든 사람을 끌어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그들이 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함으로서. 곧 나와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을-한 사람도 빠짐없이-친절, 상냥함, 형제적 사랑, 덕행의 표양, 그리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겸손과 온유로서 끌어안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하느님이나 종교에 관해 말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인내로우신 것처럼 인내하고, 하느님께서 선하신 것처럼 선하고, 친절한 형제가 되어주고, 기도해줌으로서 다가가야 합니다.  ..(1912.5.3. 요셉 하우어스에게 보낸 편지)]

그가 죽는 날 사촌 여동생에게 보낸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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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화(無化)된다는 것은 예수와 하나가 되고 뭇 영혼들에게 베푸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거의 매 줄마다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고통받거나 사랑할 때, 이 세상에서 달리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고통받는 것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랑하는 것을 늘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고 싶어하며, 또 사랑하고자 하는 원의는 이미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충분치 않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정말 사실이지요. 우리는 결코 충만히 사랑할 수 없으나, 우리를 흙에서 빚어내시고, 한 어미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며 거짓말을 모르는 선하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오는 자를 나는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날 마씨뇽 L. Massignon에게 이렇게 썼다:

위험과 희생과 헌신이 더욱 필요한 자리를 주저하지 말고 청해야 합니다. 명예는 그것을 원하는 이에게 넘겨주고, 위험과 수고는 늘 요청하십시오. 이러한 행위안에 혹시나 교만이 꺼여들까 염려하지 말고 평생을 소박하게 이 원칙에 성실하십시오. 이러한 의무를 실천합시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께 아주 겸손하게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안에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청합시다. (1916.12.1 사망-폭력의 희생자가 됨)

누군가 우리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불의의 잔혹한 죽음을 당신 손으로 축복하신 선물로서 받아들인다면 달콤한 은총의 선물로 기꺼이 따르는 선물로서 당신께 감사드리게 된다면, 우리가 그 죽음을 우리 자신의 원의로 바치는 희생으로 당신께 드리는 것이라면,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당신의 말씀과 “그는 털을 깎였을 뿐만 아니라 말 한 마디 않고 죽임을 당했다”(사 53:7)는 모범을 따르기 위해서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사랑의 순수 안에서 죽는 것일 터이고, 우리의 죽음은 당신께 참으로 향기로운 희생이 될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고 뭇사람의 눈에는 순교가 아닐지라도 그것은 당신의 눈에 순교일 것이고, 당신의 죽음을 가장 완전하게 따르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모방하지 않으면서 그분처럼 되고 그분이 하신 일을 하지 않으면서 고통 다앟고, 괴로움 중에 죽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그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고통 당하시고 괴로움중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시관을 쓰셨을 대 우리는 장미 화관을 쓰기를 바라면서 그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알하신 방법으로 그분을 사랑합시다. (하느님의 선하심, p194)]

구유와 나자렛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사용하신 방법은 가난, 비천, 굴욕, 버려짐, 박해, 고통, 십자가입니다. 이것들이 우리의 무기이며, 당신 생명이 우리 안에 계속되도록 맡기라고 하시는 천상 정배의 무기입니다. 이 유일의 모델을 따릅시다. 그러면 틀림없이 많은 선을 행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살고 계시는 분의 삶을 사는 것이며, 우리의 행위는 더 이상 인간적이거나 가련한 것이 아니라 신적 효력을 지닌 그분의 것입니다.“ (1908년 1월 15일, 게랭주교에게 보낸 편지)

<<샤를 드 푸코의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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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9.15.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남
1876.10.30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입학
1883.6.10 모로코 탐험
1886.10.30. 회심
1890.1.16. ‘눈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
1890.7.11 아크베스 트라피스트수도원 도착
1897.1.23.트라피스트 수도회 탈회
1897.3.10. 나자렛 클라라 수녀원의 잡역부
1901.6.9 사제 서품
                                                   1901.10.28. 베니아베스에 도착
                                                   1905.8.11 타만라셋(호가르)에 정착
                                                   1916.12.1 타만라셋에서 살해
                                                   2005.11.13. 시복

(2009/5-6월호, 법무사저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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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13 10:23 2009/05/13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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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토요일 :: 2009/04/04 07:41

사순절 제5주 토요일

겔 37:21-28
요 11:45-57               고통과 희생을 통한 새로운 성소의 건설

지금 이때는 예수를 위한 마지막 안식일이다. 그가 누구이고 세상에서 그가 행하신 것 그리고 그가 가르친 말씀 모두는 다음 8일간의 사건을 향해 움직여 간다. 에스겔로부터 읽는 독서는 하나님의 견해로부터 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성취하실 것에 대해 말한다. 복음서는 좀더 직접적인 관점으로부터의 견해 즉 그 순간에 권력에 있는 이들의 견해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지 모르던지 간에, 그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다. 독서는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본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이 유배되었던 나라들로부터 취하여 고국으로 다시 데려다 주기 위해 그들을 모을 것이다. 하나님이 의도한 것은 일치, 한 나라, 하나의 땅, 그들을 인도한 한 왕이고 결코 그들이 다시금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최종적으로 진실해지고 우상, 혐오, 위반 그리고 변절의 죄들을 멀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항상 그것은 똑같은 희망이다: 그들은 복종할 것이라는 것. 하나님은 평화, 계약만큼이나 오랜 수세대에 걸친 지속적인 평화를 원하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하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이는 나 하나님이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모두는 하나님의 성소가 그들 가운데 영원히 세워질 때 이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심 단어는 성소(sanctuary), 하나님이 그들을 감싸실 피난과 안전의 장소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성전을 의미하게 되고 심지어 도시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제단주변의 안쪽 영역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건물 이상의 것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 인류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될 성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 그의 영이 내재하시는 교회이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의 성소,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성소 그리고 잃어버린 자들 모두를 위한 쉬는 터전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희망이고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약을 믿는 자들 모두의 소명이다.

선한 목자의 계속 반복되는 이미지는 성소의 장소를 넘어 한 사람에게 가는 보호와 안전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예레미야 31장에서 야훼는 목자가 그의 양떼를 인도하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목자들은 고통에 견디고 강건한 영혼을 지닌다. 그들은 험악한 날씨와 고독에도 익숙하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늑대들, 야생 개들 그리고 도둑들과 싸우기도 한다. 그들은 지팡이를 갖고 다니며 개들이 양떼를 몰게 하고 그들을 함께 보호한다. 목자들은 매일 매일 양들이 필요로 하는 물리적인 모든 것들을 돌본다: 음식, 풀, 물, 보호. 양떼들과 함께 있는 목자는 모두를 불러 모으고 집으로 돌아가는 강한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는 유배된 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백성들, 언덕에 흩어진 양들이 모여 우리에 들어오는 것처럼 지상의 모든 곳곳으로부터 돌아오는 백성들에게로 확장된다. 백성들은 그들의 노동의 추수로 인해 소리치고, 노래하며 춤추고 즐거워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목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음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위로하고 그들의 슬픔을 닦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안식일에서는 위로의 약속, 고통과 슬픔후의 생명의 약속이 있다. 그것은 이제 올무가 예수에게 가까움으로서 시작된다.

우리는 모든 그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예수에게 일어나는 것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대화의 서약 Vow of Conversation』에서 토마스 머튼은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의해서만 오직 봉인되고 열리는 책으로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 그러난 우리는 역사를 짐승의 견해로부터 읽기를 선호한다. 우리는 변종과 권력의 입장에서 역사를 본다-금수(the Beast)와 그것의 가치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가난한자, 자기를 방어할 수 없는 자에게서 자신의 수난을 계속해서 겪으시고 그의 수난은 금수를 멸망시킨다. 권력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것들과 함께 멸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그리스도는 시간의 끝에까지 고뇌에 있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지금의 세상의 고통의 빛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그리고 세상에서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도. 설교 62번에서 버나드 클레보(Bernard of Clairvaux)는 이렇게 썼다:

두 가지 일이 유배중에 있는 교회를 위로한다: 과거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억과 미래에 있어서 교회가 생각하고 믿기에 성자들 가운데 교회가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관상이 그것이다. ... [교회의] 관상은 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상은 무엇이 기대될 것인지를 알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것의 근원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안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는 즐거운 기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나사로를 살리신 것 직후에 대한 것이다. 나사로에 대한 예수의 생명의 선물은 예수께 친구와 추종자들을 데려다 주지 않고 그의 적들이 그에게 대적하도록 이끈 발아점(trigger point)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다는 것은 항상 당황스러운 일이다.

항상 그렇듯이 군중은 나뉘어진다. 어던 이들은 믿고 다른 이들은 바리새파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한 것을 보고한다. 대 사제와 바리새인들은 전체 산헤들린은 소집해서 예수와 그의 일에 대해 토론한다. 그들은 만일 그가 이런 종류의 것들을 하게 되면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관심한다. “만일 우리가 그로하여금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놔두면 전 세상이 그를 믿게 될 것이다. 그러면 로마인들은 쳐들어와서 우리의 성소와 나라를 붕괴시킬 것이다.”

그들의 장소, 그들의 성전을 잃는다는 두려움 그리고 로마인들과의 불편한 공모가 논쟁의 핵심이다. 예수는 죄와 악의 세상에 빛과 생명인 하나님의 뜻에 열정적인 헌신을 함에 의해서 이 모든 것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속에서 활동하심을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특정한 권력의 영역에 -그들의 권력이 작동하는 똑같은 장소들에- 제한하기 때문이고 그래서 통제를 잃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그 당시의 대 제사장인 가야바는 일어나 말을 한다: “당신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전 나라가 멸망하는 것보다 [백성을 위해]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는 또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예수를 처리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안에서 그리고 그 결정을 통해 역어지는 하나님의 길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가바야는 예수는 나라를 위해 죽고 그들 모두를 , 사실상 모든 나라들을 언젠가 에스겔이 예언한 때로 하나로 모아질 것이라고 예언하기위해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결정은 예수를 죽이기로 되었다. 그것이 그들의 직접적인 문제를 푸는 정치적으로 편리하고 실행 가능한 선택이었다. 그 결정은 권력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요새를 보호하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예수는 은신하여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는 사막근처 지역에 있는 에브라임에 가서 거기서 제자들과 머물며 앞에 일어날 것을 대비하고 있다. 그는 정치가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떻게 음모와 계략들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인지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폭력이 어떻게 불안을 일으킬 것인지를 안다.

유대 유월절이 가까웠고 사람들은 도시로 밀려들어오고 있었지만 일어날 모든 것에 거의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예수를 볼 오T다. 그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루머와 그의 말을 들어왔고, 특히 그들은 죽음으로부터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를 들었다. 모두가 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고 그가 축일에 있을 것인지 궁금해 했다. 예수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보고해야 한다는 말이 나갔고 그는 체포될 수 있다. 그는 이제 공공의 위협이 되고 이미 혐의를 받았으며 그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그는 죽어야만 한다.

그가 체포되기 전에 그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그 며칠 동안 진행 중인 것을 알고 있는 예수의 마음과 심정은 어떠했었을까? 에티 힐레섬(Etty Hillesum)은 나치수용소에서 죽고서 발간된 그녀의 잡지에서 1942년 5월 18일 이렇게 썼다:

위협이 점점 커져오고 공포는 날마다 증가한다. 나는 어두운 보호벽처럼 내 주변에 기도를 끄집어 내어 누군가 수도원 방에 들어가듯이 그 안에 움츠리다가 다시 더 침착하게 더 강하게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온다. 나는 내 가 파편이 되어서 내 존재가 잃어지고 전적으로 황폐하게 되는 것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보호막이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무릎 꿇고 끝 날을 맞이할 때가 다가옴을 상상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또한 기도해야 한다. 아빌라의 데레사(St.Teresa of Avila)는 그녀의 수녀들과 교회에 이 기도를 남겨주었다:

아무것도 그대를 혼란시키지 않기를.
아무것도 그대를 두렵게 하지 않기를.
모든 것은 지나가나니-
하나님만이 변하지 않으신다.
인내가 모든 것을 얻으리라.
하나님을 지닌 자가 결핍함을 멈추리라-
하나님만이 충분하다.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다문화가정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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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4 07:41 2009/04/04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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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금요일 :: 2009/04/04 07:39

사순절 제 5주 금요일

예레미야 20:10-13
요한 10:31-42

메시지           권력자들의 시도와 하나님의 시도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낙담시키고 용기를 꺽지만 그것은 단순히 고뇌에 찬 말이 아니라 확신과 힘으로 차있는 말이다. 예레미야의 운명은 힘들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고 그에 대해 뒷소리를 한다. 공포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특히 그가 생각하기에 친구라 믿었던 이들이 이제 자신이 어떤 잘못을 벌이는지 감시하는 것을 깨닫는 데는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들은 그를 올무로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그에게 복수할 수 있고 그들의 힘과 소원은 전국에 퍼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언자와 예언자의 하나님에 반항한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결과가 어찌되든 하나님이 말하라고 명령한 것을 선포하는 이외는 다른 삶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가 섬기는 분을 알고 ‘장사와 같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알며, 그의 대적자들이 스스로 걸려 넘어져 그를 이기지 못할 것임을 믿는다. 그들이 그렇게 할지라도 결국에 그들은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지를 꺾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그들은 부끄러움에 처할 것이고, “길이길이 잊지 못할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고난받는 이들의 기도, 절망하는 이들의 기도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하기 때문이다:

오 만군의 야훼여, 사람의 뱃속을 아시고
심장을 꿰뚫어 보시는 공정한 감시자여
이제 이 백성에게 제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이 눈으로 그것을 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전에 들었다. 그것은 심판에 대한, 스스로를 의롭다 여기며 그들을 반대하는 어느 누구든 그의 운명의 결정하는, 특히 진리를 말하고 그들을 회중의 눈에 드러내는 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들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지배하도록 하는 보편적인 기도이다. 예레미야의 기도는 찬양과 기도로 끝난다! 과거와 심지어 그 자신의 생애에서 하나님은 사악한 자들의 권력으로부터 가난한자를 구해내신다!

출애굽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성하는 것은 이집트의 노예의 일관된 커다란 소리침을 들으시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했다. 비탄에 빠진 이들, 하나님에 대적하는 다른 이들의 죄와 공모 때문에 고난받는 이들은 야훼가 그들과 함께 하며 예언자의 말씀에서 그들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입증하고 폭력당한 낮은 자들을 일으켜 세울 때가 옴을 알게 된다.

시편은 응답한다, “내가 비탄속에서 주게 부르짖으니 그가 내 목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이 악에 저항하고, 그들 자신의 약함이나 그 시대의 문화나 기류에 종속되기를 거절하는 이들의 일관된 기도이다.  종종 그것은 예수의 기도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확실히 그의 대적자의 손에 그 자신의 파괴에 앞선 시간에 그러한 기도를 드린다. 시편 18편은 하나님을 묘사한다: 우리의 하나님은 야훼시니, 우리의 힘, 반석, 요새, 구원, 피난처, 방패, 구원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듣는다. 비판에 빠진 이들의 목소리는 하나님이 듣는 목소리가 된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하나님의 가슴을 찢기 때문이다. 그것이 지상에서 일어난 것에, 모든 피조물에 대해 하나님의 희망을 깨뜨리는 것에 증언한다.

예수는 이제 막 돌을 맞으려고 한다. 그들이 돌을 집으려 할 때 예수는 땅에서 일어나 저항하며 그들이 범하려는 자신의 행동과 살인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한다. 그의 목소리는 주목을 이끈다:“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예수는 가르치고, 치유하고, 용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곤핍한 자들에 다가갔다. 그는 그들 앞에 서서 이들 행동 어느 것 때문에 그들이 그를 돌로 치려고 하는지를 알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일들을 무시하고 말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그가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신성모독을 저질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그렇게 쉽게 행동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는 성서로 되돌아가 그것들을 인용하며 들려준다: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 하신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다.
아버지께서는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 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예언자들조차도 그들 내부에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들은 또한 계약의 하느님께 속한 참으로 신실한 백성,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을 뜻하는 인간의 아들과 딸이라 불리워졌다. 예수는 그런 용법을 사용하고 그것을 아버지로서 하나님과의 특정한 관계에 확장한다. 말씀은 활동에 진정한 터전에 기초한다.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 연합, 가까움에 의해 다른 이에게 속해있는 것이 알려진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일들을 할 수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도전을 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신앙을 그에게 두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가 행하고 믿은 행위들을 그들은 인정할 수는 있다. 이들 작업은 항상 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종을 준다. 그들의 율법과 계약이 그들에게 계속해서 되풀이 된다: 가난한 자들이 보호받고, 고아와 과부들이 돌봄을 받으며, 감옥에 있는 이들이 자유로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이 존중을 받으며 낯선 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환영받아야 한다. 곤핍한 이들속의 삶의 질은 공동체의 신앙이 낮다는 것을 반영한다. 그리고 나라, 특히 지도자와 사제들, 부자와 엘리트들은 그들의 곤핍함에 대해 책임이 있다.

교회공동체의 삶은 사회에서 포용하지 않은 이들, 처리해 버릴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삶의 질과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결코 하나님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그들의 억압자들, 감독관들과 노예 주인들과 같을 수 없다. 그들 가운데 있는 가난한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이웃에게 빚진 친절과 존경으로 대우받아야 한다. 이것이 계약이다. 신실한 이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은 신적 형상과 닮음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다.

그러나 일단 다시 그들은 예수의 말을 곡해한다. 그의 말은 자신들이 사랑과 신앙이 없고, 율법을 따르는 것을 실패했다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어떤 명령도 없기를, 심지어 하나님에 의해서도 없기를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시대의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오랫동안 성령의 능력속에 있는 예수와 아버지를 아는 특권을 지녔었다. 그런데 우리가 한 일은 무엇인가?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우리는 진실로 그 시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거나 말씀의 계시에 더 개방적이고 더 거룩하다고 생각할 위치에 있지 못하다.

예수는 강하게 말한다: “아버지는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이것이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이러한 일들을 믿으라.”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에게 가서 그를 체포하려 시도하지만 그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신다. 그들이 붙잡으려하는 것은 정확하게 그들이 하나님에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입장을 타당하게 하도록 이용하기. 그들은 신앙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할 수 있는 실행가능의 진술로 낮춘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을 떠나고 요르단을 건너 요한이 초기에 세례를 준 곳으로 간다. 그는 집으로, 성령이 그에게 충만하게 다가온 곳으로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확증한 곳으로 간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종, 내가 선택한 자라. 그의 말을 들어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왔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활동을 쳐다 보았고 그를 믿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의 활동이 우리 가슴에 있는 하나님을 믿는가?

필 맥마누스(Phil McManus)가 그의 책 『우정』에서 보고한 것처럼 가난한 멕시코 여인들 한 그룹이 수도에 가서 그들의 남편의 사면을 탄원하였다. 그들은 정부청사앞에 있는 플라자에서 금식과 기도 철야농성을 조직해서 관리들과의 모임을 주선하였다. 다음 대화는 그들을 영접한 관리와 이루어 졌다:

관리: 기도와 금식의 행동에 관해 이것은 무엇인가? 어째서 이런 것들을 행하는가?

여성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 누군가 너희 뒤에 있다. 누군가가 너희 마음에 이런 생각들을 주입했다.

여성들: 그것에 대해  당신이 옳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뒤에 계시고 우리의 머리에 아이디어를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관리: 이것은 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어째서 너희는 그것에 하나님을 혼합시키는가?

여성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관리: (아마도 어떤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자들의 주해를 잃은 모양이다) 하나님은 부자와 가난한 자간에 어떤 자별을 두지 않는다.

여성들: (이들은 확실히 레오나르드 보프나 다른 해방 신학자들을 읽지 않았고 단지 그들은 이미 말한 도움을 준 자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어째서 세상은 그렇게 하고 우리를 더욱 힘들게 다루시는가?

관리: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며) 알았다. 그만하자. 하나님을 이 문제에 혼돈하지 말자. 나는 그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다.

여성들: 그래요. 우린 이해합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고려대상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당신은 돈에 신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이 없고 그것이 어째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선한 일들은 우리를 곤란하게 할 수 있다. 예레미야를 기억하라. 예수를 기억하라. 예수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멕시코 여성들과 많은 남녀들을 기억하라. 아버지는 그들을 그의 자녀라고 부르시고 그들이 존엄과 존경으로 대우되기를-요구가 아니라- 기대한다.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새터민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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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목요일 :: 2009/04/04 07:37

사순절 제 5주 목요일

창 17:3-9
요 8:51-59

메시지            죽음이전에 제대로 사는 것 배우기

창세기 부분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하고 그와 모든 시대를 위한 계약을 맺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계약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 운명, 그리고 세상에서 그의 의미를 바꾼다. 그는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가 된다. 그의 자손은 극히 비옥할 것이고 이는 생물학적인 의미만에서가 아니라 신앙과 자신의 자손들과의 예배에 있어서도 그렇다. 왜냐하면 왕들이 그의 가문에서 나오고 다른 나라들이 이스라엘에 와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존경을 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계약의 개시자, 유지자, 양쪽에 대해 권리와 책임을 펼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를 통해 신실하실 것이고 모든 시대를 통해 계약을 유지할 것이며 결코 어떤 이유에서든 그 계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지금 머무는 땅, 가나안 전체 땅을 영원한 소유로서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그들의 유일한 하나님. 반대로 한가지만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를 뒤따르는 이들에게 있어서 요구되어진다: 그들은 계약을 지켜야만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속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어야 한다. 계약은 독서의 초점처럼 보이지만 독서의 진정한 중심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약이고 아브람은 그에게 다가오셔서 역사와 이스라엘의 종교를 움직이시는 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가 엎드려 있다.

시편 105편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지를 더 말한다. 후렴은 하나님의 입장에 대해 상기시킨다: “주님은 그의 계약을 영원히 기억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함, 놀라운 행위, 징조, 심판을 기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하나님의 종들, 선택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하고 최소한 천여 세대동안 하나님께 매여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기억되어진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개인으로서 그리고 한 백성으로서 함께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다른 역사와 나라들의 가운데서 살게 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주어지게 된다. 우리의 태도는 아브라함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엎드리고, 계약을 지키며 겸손하고 복종하며 경청한다.

다시 예수와 그의 당시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논쟁하고 예수는 먼저 행동한다: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한 사람이 내 말에 충실하면 그는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입장은 물론 그들을 화나게 하는 데 충분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유들을 내뱉는다. 아브라함은 죽었다. 예언자들은 죽었다. 그리고 당신들은 당신의 말을 지키는 누구도 죽음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치명적인 비꼼이 명료해진다: “확실히 당신은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것처럼 행동한다. 혹은 선지자도 죽었거늘 너는 스스로를 누구라 생각하는가?” 이것이 갈등의 핵심이다. 예수는 그의 본질이외의 어떤 다른 인물로 가장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친밀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만을 듣고 복종하고 행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계약을 온전히 성취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이렇게 신실한 친구의 후손중의 하나이고 그는 신실함 그 자체이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길에만 전적으로 헌신한 분이다.

그는 자신의 후렴구에로 되돌아간다: 나는 하나님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한다. “나는 그분을 잘 알고 나는 그의 말을 지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는 아브라함에 대해 추가적인 언급을 함으로써 정곡을 찌른다: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가 주의 날을 볼 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예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의 오심, 계약의 성취를 기뻐한다.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의 말속으로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을 주장한다. 그들은 그것들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고 율법, 계약 그리고 예언자에게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 특정한 것이나 쉽게 범주화할 수 있는 것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을 명료히 보여주는 그들의 오랜 역사를 무시한다. 하나님이 언급한 모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 심겨진 씨앗이 되었고 그들의 신실함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힘과 자비에 의해 이들 씨앗은 성장하고, 더욱 더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듣기를 원하지 않고 그래서 거부한다: “당신은 아직 오십도 되지 않았잖는가! 어떻게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하는가?” 그들은 아브라함에 대한 전체 약속이 생명에 대한 것, 죽음을 극복하고 아브라함의 이름, 기억, 신앙을 천 세대를 걸쳐 연장하는 계약에 관한 것임을 잊고 있다. 아브라함은 계약의 요구를 지키는 데 신실한 후손들에게서 살고 있다. 그들은 달리말하자면 죽은 자들이다.

예수는 그리고서 강하게 선포한다: “나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 이것은 이집트에서 바로를 대면하기 전에 모세가 산에서 질문한 응답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칭될 수 없음을 선포한다. 항상, 하나님은 신비이자, 알 수 없고 말을 넘어서 계신 분이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하나님안에서 살고 감추어져 있는 자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이라고 가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의로 그의 말을 잘못 해석하고 돌을 들어 그를 치려고 한다. 그들은 거기서 그때 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가까웠지만 아직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숨기고 성전을 빠져 나간다. 

예수는 그들의 마음에 도달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종교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성서와 전통을 자기 자신의 아젠다를 위해 사용하는 이들이 항상 존재해왔다. 그들은 듣지 않고 하나님을 그들의 용어로 정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 그들의 죽음의 길을 지원하지 않는다. 예수가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 더욱 충만한 삶, 죽음보다 더 강한 삶을 그들에게 이해시키고자 그들과 변론한다.

안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와 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말해진 배움과 제자직에 대해 말하는 한 수피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많은 사람들이 시장에 모여 스승에게 질문들을 한 때가 있었다. 몇몇은 심각하게 진리에 관심하고 그들이 알기 원하는 하나님이신 분의 선과 생명의 힘에 일치해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 관심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서 오고 친구들에 의해 따라왔다. 어떤 이들은 단지 거기에 있었다. 여러 명들이 그 스승을 무효화시키고 그를 덫에 걸리게 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고 그들 자신의 그룹에 대한 위협으로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스승 자신의 추종자들도 있었는 데 이들은 토론들이 끝나고 오랜 후까지는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날 모든 질문이 죽음, 무덤 그리고 사후의 삶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처럼 보였다. 이는 매우 당황스러웠고 특히 스승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러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든 질문들에 대한 응답에 있어서 스승은 오직 웃기만 했기 때문이다. 때때로는 부드럽게, 단순히 껄껄거리며 때때로는 소란하게 매우 불손하게 웃었다. 때때로는 즐거워하며, 때때로는 거의 발작적일정도로 웃었다. 질문하는 이들과 듣는 이들은 분노, 혼란, 모욕감속에서 반응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단지 웃기만 하였다. 마침내 스승은 그들 모두로부터 걸어 나가 사라졌다.

후에 그날 밤 제자들은 그에게 심문하면서 그가 아침에 대해 말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는 무슨 뜻이었는가? 그들은 진정으로 마음이 산란해지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들을 조롱어린 진지함으로 바라보고 말했다, “내생-죽음후의 삶-에 대해 질문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그들 모두는 이것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결코 이생에 전연 관련없는 다른 생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제자들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했고 한 사람이 툭 튀어 말했다: “그러나 스승이시여, 사후의 삶이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예 아니오라고 대답해 주십시오!” 스승은 다시 크게 웃었다.  그리고서 한 질문을 되물었다: “내가 알기 원하는 것은 죽음이전에 삶이 존재하는가이다.” 그리고 그는 모두를 쳐다보았다: “너희중 어느 누가 진실로 살고 있는가?”

그래서 고난주간이 오기전 금주에는 십자가와 죽음을 직면하기 전에, 우리의 세례의 약속을 기억하고 죽음이전에 그의 생의 종식을 향해 예수와 걸어가기 전에, 그것이 질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살아 있는가?
   


**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언론의 공정성과 공공의 유익을 위한 방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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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4 07:37 2009/04/04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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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사순절 묵상-사순절 제 5주 수요일 :: 2009/03/31 07:02

사순절 제 5주 수요일

단 3;24-30
요 8:31-42

메시지             생명의 하나님을 선택하기


금주의 나머지 기간 동안 독서는 점차 험악해져 간다. 예수를 살해하는 것이 불가피해져가는 때까지 진행되어져 간다. 그의 말, 추리, 성서의 인용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성이 그들을 격노하게 만든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그를 반대하는 다른 이들과의 논쟁을 함으로써 그들의 행동과 동기 그리고 그들이 진실로 누구인지에 대한 의도를 드러내신다. 그는 죄를 거부하고 악을 지명하는 예언자 이상이다. 그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고 많은 이들이 그에게 방향을 돌려 그를 영원히 침묵시키기만을 의도한다.

첫 독서는 다니엘서로부터 온다. 느브갓네살 왕의 어전에 있어서 세 젊은이들에 대한 친숙한 이야기이다. 사르닥, 메삭, 아벳느고, 그들은 금신상에 예배하기를 거부한다. 음악이 연주될 때마다 모두는 엎드려 그것에 예배하도록 되어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화로에 던져져서 산채로 태워지게 된다. 왕은 인격화된 오만을 드러낸다: “내 손으로부터 너희를 구원해줄 수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세 젊은이들은 심지어 왕 앞에서 자신들을 방어조차 않는다. 그들은 누구를 섬기는지를 알고 있고 그들 앞에 서있는 이 사람, 왕은 아닌 것이다. 그는 그들을 죽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하나님과 어디에 서 있을 것인지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왕에게 말한다: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해 주실 힘이 있으시면 왕께서 소신들을 활활 타는 화덕에 집어 넣으셔도 저희를 거기에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왕의 신을 섬기거나 왕께서 세우신 금신상앞에 절할 수 없습니다.”   

왕의 반응은 예측할 수 없는게 아니다: 그의 얼굴은 ‘노기에 차서’ 안색이 달라져 어느 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지피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군인들 가운데 몇 명이 그들 셋을 묶어 화덕에 집어넣게 하였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네 사람이 아무런 탈없이 걷고 불속에서 걷고 있고 한 사람은 신의 아들처럼 보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 단어는 천사 혹은 몸으로 나타난 영이 형태로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느브갓네살 왕은 무릎을 꿇고 세 신앙인의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한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찬양받으시기를, 그를 믿는 종들을 구하시기 위해 그가 천사를 보내셨구나. 그들은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그들 자신의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신에게 섬기거나 예배하는 대신에 그들의 몸을 내주었구나.”

야훼의 그 세 추방된 종들은 포로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에 대해 증언하고 그들의 신앙은 왕으로 하여금 무릎꿇게 한다. 하나님은 개입하여 세상의 권력에 심히 시련을 당하고 지배받는 이들과 동행함으로서 신적인 힘을 나타내 보여주신다. 물론 비록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고 역사와 지배적인 권력들이 자신의 경로를 가도록 하게 할지라도,이것은 하나님이 예수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실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역사의 일상적인 경로와 삶과 죽음의 일상적 경로를 헤뜨리실 것이다. 예수는 그의 하나님을 반대하는 이들 앞에서 다니엘 시대의 세 친구처럼 용기있고 신실하다. 그리고 그 반응은 똑 같다: 격노함.

오늘의 독서의 모두는 하나님의 본성과 누구의 하나님이 하나님인가에 대한 것이다. 시편은 다니엘서로부터 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칭송하는 기도이다. 깊이를 통찰하시고 케루빔과 하늘의 궁창위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영원히 모든 것을 넘어서는 찬양받으시게 합당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이것은 느브갓네살 왕이 결코 예기치 못한 하나님이시고 그 대신에 그는 예배의 가치가 있고 힘있는 것의 기초로서 자신의 권력에 의존한다. 그는 자신을 예배하고 다른 사람도 같은 것을 행하도록 요구하고 강요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복음서 독서는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언급한다:“만일 너희들이 내 가르침에 따라 살면 너희는 진실로 내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것은 힘의 선언, 하나님의 견해로부터 실재에 대한 선언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조차 이것에 주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아직 자유롭지 못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격렬하게 논쟁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고 결코 우리는 누구에게도 종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들은 신앙으로 자신의 조상들을 확신하고 그들의 뿌리에 의존하여 자신들은 자유롭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진실로 누구인지를 스스로 보도록 의도한다-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우리가 진실로 누구인지를 보도록 한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

이것은 물론 우리 모두를 포함한다. 예수는 합법적인 아들과 가정에서 노예를 비교한다. 노예는 집에서 영원히 살지 못하지만 아들은 영원히 산다. 오직 아들이 종들을 자유롭게 한다면 종들은 자유로워 질 것이다. 예수는 듣는 이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함을 잘 알고 있고 그러나 또한 그들은 그를 죽이려고 시도하고 있음을 잘 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비난한다: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 말을 너희가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현존에서 내가 보아온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를 행한다.

그들의 힘과 자유의 근거는 전혀 정반대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로 아브라함에게 집착한다. 그러나 예수는 교사, 설교자, 예언자이고 그는 그에 대항하는 그들의 말과 추리를 사용한다. 아브라함은 신앙에서 살고 방문했을 때 천사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관대함을 보여주었고, 하나님께 순종했으며 그가 심지어 어디로 갈 지 몰랐을지라도 그의 본토를 떠났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 도시를 위해 하나님과 논쟁하여 악한 백성을 파멸로부터 구하려고 시도하였다. 만일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식이라면 그들은 그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신앙의 자녀, 계약의 자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들에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진리를 그들에게 말하는 사람이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하는 것처럼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격노해져서 증오로 눈이 멀었다. 그들은 정확하게 예수가 그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을 안다: 사생아가 되는 것에 대한 비난!

우리는 거의 치명적인 것이 발생함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느브갓네살 왕처럼 행하고 반면 예수는 조용하고, 그가 진리를 말함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밀을 드러낸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예수는 전에 그토록 많이 말한 것을 되풀이 하며 대답한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는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내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분은 바로 그이시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나마 안다면 예수의 말은 우리의 가슴에서 울릴 것이요 그러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 혼자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와 격리되어서는 우리중 아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예수와 떨어져서는 우리는 죄에서, 노예로 살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예수의 자유와 힘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생명의 하나님보다 다른 신을 예배하는 것 대신에 불길에서 기꺼이 죽기 원하는 세 젊은이들의 자유를 알지 못한다. 

누가 우리의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가 우리의 가슴속에서 울리는가?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는가? 사랑은 와서 가버리고, 섬기거나 사랑하는 다른 것들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느낌이 아니다.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예수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그 어떤 권력에 대항하여 신실하게 기꺼이 서있는 것이다. 우리는 폭력, 전쟁, 비인간성, 가난, 모욕, 불의, 부당함, 물질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 국가주의에 대항하며 서있는가? 우리는 우리 존재를 다바쳐 심지어 몸으로도 세 친구들이 한 것처럼 불의하고, 공모하며 자기를 섬기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가?

3월 24일은 엘 살바도르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살인에 대한 기념일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서로 죽이지 말라고 호소한 후에 제단에서 총탄에 맞아 순교했다. 그의 말은 권력있는 자들의 가슴에는 아무런 울림이 없었지만 그 말씀들은 가난한 이들의 가슴에서 존중되어왔다. 1979년 4월 1일의 그의 말씀은 수년간 더욱 강하게 메아리 친다:

“성서귀절로 보자면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은-즉, 문제속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고, 우리의 관여를 요구하는 것이 어떤 것이든 밖에 서있기를 원하는 이들은- 그들의 삶을 잃을 것이다.

고통없이, 문제속에 들어가지 않고, 매우 조용하게 안정되게 아무것도 결여함이 없이 좋은 연결들로-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사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어떤 선이 있을 것인가? 그들은 자신의 삶을 잃을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만일 네가 네 삶과 사명을 나처럼 열매맺기 원한다면 나처럼 행하라. 자신을 땅속에 묻는 씨앗으로 바꿔지라. 두려워 말라. 고통을 피하는 이들은 홀로 남게 될 것이다. 아무 것도 이기심보다 더 홀로이지 않다. 그러나 당신들이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부터 당신의 생명을 준다면 내가 나 자신의 삶을 모두에게 주었듯이, 너희는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당신은 가장 깊은 만족감을 가질 것이다. 죽음이나 위협을 두려워 말라. 주가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악에 대항하여 예수와 함께 서있는 시간이 왔다. 진실하게 되고 세 젊은이들처럼, 오스카 로메로처럼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우해 일어선 그토록 많은 수천 명들처럼 사랑하고 예배할 시간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참되신 분, 우리를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분을 아는 유일한 방식이다. 
 
 
    
 ** 세상을 위한 중보 기도: 위협당하는 자연생물의 생존과 보호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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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31 07:02 2009/03/3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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