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목회실습'에 해당되는 글 12건

한국에서 기독교 평화 제자직의 현실과 그 동향 :: 2011/07/08 14:23

                                디아코니아와 평화

-하나님의 주권성을 갈등, 폭력 그리고 지배체제 위에 세우기-

박성용 박사 비폭력평화물결대표

(본 원고는 연세대의 "2011년 미래교회 컨퍼런스"/2011.6.29에 발표된 글이다)

--- 목 차 ---

서론: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계의 불확실성의 위기와 그 대응의 긴급성

1. 디아코니아 사역의 중심인 샬롬 통치의 실천

2. 복음의 핵심으로서 평화와 화해

3. 세상 권세와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복음

4. 예수를 뒤따르기: 평화와 화해의 탈지배적 삶에로의 평화 제자직

5. 새로운 현실과 오늘의 평화 제자직

6. 평화제자직의 수행으로서 갈등전환과 평화구축을 위한 전략짜기

7. 한국에서 기독교 평화 제자직의 현실과 그 흐름

8. 평화 제자직으로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

결론: 평화증언의 목회는 예언적-사도적 전승을 잇는 가장 복음적인 길이다


7. 한국에서 기독교 평화 제자직의 현실과 그 흐름

- 국내 평화운동의 약진과 새로운 평화운동의 분화: 국제적으로 1999년 시애틀에서 국제NGO들과 활동가들에 의한 WTO각료회의 무산과 2001년 9.11사건 및 2003년 2월의 이라크 전쟁반대 국제시민운동의 점화와 더불어 국내의 2000년 6.15남북공동성명 2002년 미군장갑차여중생압사사건을 포함한 미군기지 평택이전반대 등의 상황은 2000년 이전의 민족 및 민중문제 그리고 통일과 환경문제에 집중하던 시민사회운동에 평화운동이라는 새 분화구를 열게 하였다. 대부분의 평화단체들은 사실상 이러한 국제적 흐름과 국내상황에 조우하여 2000년 전후로 새로 생겨난 신생단체들이었다.

필자도 2005년에 한 풀뿌리 평화단체에 소속하여 활동하면서 처음에는 7.27한강하구평화의배띄우기 사업과 한국평화활동가대회의 기획과 진행을 통해 평화진영의 이슈와 활동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갖기 시작하였다. 수년간 평화활동가연차대회를 준비하고 기획하는 모임을 통해 그간의 시위위주의 평화운동은 지속적인 평화담론과 평화 인프라 구축에 대한 욕구, 그리고 전쟁반대의 소극적 평화에서 구조적 평화로의 모색과 군사정치적 투쟁에서 생활문화속으로 들어가는 평화의 일상화와 내면화, 새로운 평화패러다임과 새 투쟁영역(양심적 병역거부, 해외분쟁지역 평화운동에로의 진출, 생명평화탁발수행, 평화교육훈련운동의 태동)과 이슈별 연대활동(예, 주한미군기지문제, 양심적 병역거부<대체복무>운동, 제주강정마을해군기지반대, 군축/비핵화운동)의 강화 그리고 메타담론으로서 평화담론(평화국가와 평화체제 구상, 평화협정, 동북아권 평화공동체의 구축모색)의 활성화라는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평화운동에서 기독교 평화운동의 자리매김과 그 활동: 원래 운동가이기보다는 연구자였던 과거 경력에 의해 그리고 비폭력 운동의 확산에 필요한 모델의 개발과 훈련과제에 대해 관심을 갖은 필자는 수년간 평화활동가연차대회에서 권고된 평화활동가들의 재충전과 훈련의 과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는 당시 대회에 참가한 기독교 배경의 평화단체 활동가들과 연대한 "기독교평화아카데미(기평아)"의 출범으로 나타났다. 기평아는 퀘이커와 감리교 배경의 <비폭력평화물결>, 에큐메니칼운동 배경의 <청년평화센터 푸름>, 해외갈등지역에서의 평화캠프를 주도하던 장로교계 청년들의 <개척자들>, 그리고 역사적 평화교회인 메노나이트계열의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가 공동주관하여 기독교 평화일꾼을 양성할 목적으로 학기제 운영을 2006년부터 기획하여 4년간 운영해 왔다. 여기에는 갈등해결, 성서와 평화, 평화신학, 비폭력영성과 실천, 해외평화캠프운영사례 등의 각 단체들의 훈련 모델을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여러 명의 젊은이들이 이와 연관하여 해외의 메노나이트계 훈련 사업이나 퀘이커계 훈련센터에 다녀오면서 각 평화단체의 실무자로 활동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실제로 기평아의 경험은 동북아에서 평화훈련 센터의 필요성으로 발전하여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의 펀드 10만불을 받아 2008년부터 <Northeast Asia Regional Peacebuilding Insititute(NARPI)>설립 구상에 들어가 한국, 일본, 몽고, 대만, 중국, 러시아 6개국 평화단체들이 실행위원으로 참가하고 필리핀의 <Mindanao Peacebuilding Insititute(MPI)>를 모델로 2011년부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평화활동가 양성을 위한 6개 강좌가 8월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는 국내 평화훈련을 지원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가들의 훈련과 네트워크 및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업이 흘러갈 예정이다. 이러한 지역적 운동의 다른 연대운동은 필자가 관여하는 일본의 헌법 9조(평화조항)의 수호를 위한 <평화헌법시민연대>와 <한일평화100년네트워크>의 한일간의 지역평화운동의 강화와 한일간 평화교류의 활성화이다.

- 기독교 평화훈련 모델과 그 적용의 현실과 비전: 평화활동의 현장을 확보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미 진술하였듯이 활동가 자신의 능력배양, 핵심역량과 시스템 구축이다. 필자가 국내에 처음 소개한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평화훈련 모델에는 여러 평화단체들과 공동연대하여 워크숍을 진행한 요한 갈퉁의 "TRANSCEND", 조지 레이키의 "비폭력직접행동", Fellowship of Reconciliation의 "비폭력 영성과 실천" 등의 모델에 대한 소개 사례가 있지만 다음에서 소개되는 모델들은 현재 꾸준히 '훈련 공동체'를 형성해서 활동가들이 자체 모임을 갖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고 있는 것들이다. 소개되는 모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평화의 내면화와 일상화 그리고 구체적인 평화실천에 기반한 훈련 모델이고 개인, 종교기관/교회, 학교, 지역아동센터, 폭력방지기관(교도소포함) 등에 서서히 파급되어가고 있는 주목할만한 모델들이다.

- "갈등해결 조정자(mediation)" 모델(평화여성회내갈등해결센터,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 주관): 2000년대 초 평화활동 및 지역 활동을 하는 활동가들이 미국 종교친우봉사회(AFSC)의 재정지원으로 3년간 훈련을 통해 나온 결실로서 갈등에 대한 조정중재 훈련과 이를 진행하는 조정자 양성을 하고 있다. 원래 이 모델은 74년 캐나다에서 메노나이트계 활동가에 의해 개발되어진 것으로 한국에서는 주로 학교 수업, 교회학교, 교회가 관여한 지역학교, 법원의 화해권고위원으로서 청소년 학교폭력 당사자 조정, 학교폭력조정, 지역단체의 갈등해결 워크숍 등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 특히 또래조정과정을 통해 청소년 스스로가 동료의 갈등상황에 개입하여 비폭력적인 해결을 유도하는 청소년 또래조정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모델(AVP한국활동가모임, 비폭력평화물결 주관): 75년 미국 재소자의 재범률 감소를 위해 퀘이커 씽크탱크가 교도소와 함께 개발한 모델(AVP; Alternative to Violence Project)로 감옥, 학교, 공동체/단체등에 폭력을 전환시키는 힘의 원리와 폭력에 대한 비폭력 대응, 자존감과 타인 배려, 그리고 신뢰의 공동체와 의사소통의 통합적인 주제들을 활동과 성찰 그리고 놀이를 통해 강력한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모델이다. 한국에서는 독일 퀘이커 재단과 퀘이커 모임의 지원으로 2007년 첫 입문워크숍을 시작하여 2009년에 첫 전문 진행자들을 배출하여 활동하고 있고 주로 목회자, 시민활동가 교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 세계 52개 국가에서 실시되고 있고 상업성을 배제한 자원봉사에 원칙에 근거하며 2박 3일의 집중코스를 통해 입문, 심화, 진행자과정을 통해 활동가를 배출한다. 3~4명의 팀진행으로 진행되고 있기에 지금은 주로 진행자양성에 초점을 두고 점차 일반 재소자와 보호감찰받은 학생들 그리고 학교영역에로 확산될 예정이다.

- "청소년평화지킴이(HIPP)"모델(비폭력평화물결 주관): AVP의 자매모델(HIPP; Help Increase Peace Program)로서 퀘이커의 AFSC가 개발한 청소년 학교용 프로그램으로 미국 20개주, 호주와 독일 등에서 진행되고 있는 모델이다. 원형(circle) 수업으로 진행되며 참여자 자신의 개인의 경험을 자원으로 하여 자기존중, 의사소통, 갈등해결과 폭력전환, 사회변화기획과 승승의 문제해결 등의 중심주제를 통해 이야기나눔과 성찰, 활동 그리고 충전놀이라는 도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국에서는 2010년부터 초/중학교, 지역아동센터, 교회학교 등에 실험적으로 적용되고 있고, 진행자양성과정이 진행중에 있다. 청소년은 성인진행자와 더불어 워크숍을 공동진행할 수 있으며, 동아리나 기타 일상생활속에서 평화활동기획등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평화훈련 및 평화교육 모델로서 AVP나 HIPP들은 자기긍정, 타인존중, 협력, 소통, 갈등전환, 그룹 프로세싱(문제의 분별과 협력적 해결), 신뢰의 공동체 형성, 정의실천과 기획 등의 훈련주제들을 민중교육론의 차원에서 교육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개인의 경험과 상호응답의 관계 속에서 자기 속에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참여자들 스스로가 과정을 통해 자기 성장과 배움을 얻는 자기발견식(self-heuristic) 배움을 갖도록 한다. 그리고 이는 또다시 현장에서 워크숍 진행자로서 설 뿐만 아니라 배움 과정에서 얻은 통찰을 일상에 적용하는 인식의 전환과 갈등상황에서의 적용능력과 도구를 갖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들 모델은 개인으로 활동가로 남지 않고 신뢰와 훈련의 커뮤니티를 구축하여 정규적으로 서로의 성장과 현장을 돌보는 힘과 기술을 서로를 통해 얻고 지원하는 활동을 확대해 나간다.

- "비폭력 대화(NVC)" 모델 (한국비폭력대화센터외 비폭력평화물결 등 주관): 한국에서 꾸준히 전파되어온 토마스 고든의 "부모역할훈련/교사역할훈련"의 나전달법과 적극적 듣기 이외에 먀샬 로젠버그의 이 모델(NVC; Nonviolent Communication)은 심리학 임상, 갈등해결, 분쟁조정 등의 영역에서 전세계에 파급력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한국비폭력대화센터가 주로 상담자, 지역 활동가, 교사 등의 참가자들의 주목을 받고 한국에서 소개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비폭력평화물결은 영성수련으로서 공감능력향상과 관계적 평화를 위한 비폭력대화의 그 적용가능성을 모색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주로 시비논리(옳고 그름/좋고 나쁨)의 언어행위와 지배와 강제의 인식을 바꾸어 느낌과 욕구에 근거한 대화능력의 효용성을 깨달아 자비로운 소통과 이를 통한 삶을 풍성케하는 공동체의 건설에 도움을 준다.

-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모델 (회복적 정의 네트워크가 주관): 위에서 말한 비폭력 평화물결, 기독교 세진회, 평화여성회내 갈등해결센터, 한국아나뱁티스센터(KAC), 한국교정복지협회 등이 주축으로 2009년 말부터 연대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는 원래 성서적 정의(biblical justice)로도 알려져 있으며, 강제, 처벌, 구금, 배제의 응보적 정의에서 깨어진 관계의 개선과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갈등 당사자와 관련 공동체의 협력적인 문제해결과 책임이행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사법계만이 아니라 교육과 일상에서 실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운동을 모색하기 위한 관련단체 실무자들과 활동가들의 모임이다. 여기에는 갈등조정, AVP, 비폭력대화 등의 모델이 서로 함께 하며 각 영역의 경험을 회복적 정의에 사안별 수렴하는 과정을 갖고 있다. <2010년 12월 초에 "회복적정의 전문훈련가 양성 국제 워크숍"을 마중물로 하여 금년부터 전국적인 교도소 자원봉자자(약 5,000명)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세진회의 "회복적 정의 훈련" 워크숍, 학교와 지역현장에서 회복적 정의에 입각한 갈등조정(갈등해결센터, KAC)과 회복적 교육(비폭력평화물결)을 중심으로 그 활동이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

- "마음비추기 피정"(Gardening People's Heart) 모델: 이 모델은 퀘이커 교육 사상가이자 실천가인 파커 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 Courage to Teach; CTT)의 한국 자매 모델로서 대안학교 교사와 시민활동가들에 의해 진행팀이 구성되어 미국 CTT의 해외 연수를 통해 한국에 이식된 모델이다. 역사평화교회인 퀘이커 전통의 내면의 스승(신성한 빛)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자연의 4계(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이미지를 인생에 적용하여 자기 성찰과 삶에 대한 힘을 얻는다. 침묵, 강제없는 자발성에 기초한 대화로의 초대, 존재와 관련된 압축적인 시의 묵상, 개인 성찰과 파트너와의 나눔 및 전체 나눔 등을 통해 내면의 영혼을 만나는 작업을 한다. 특히 이 모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4~5명의 소그룹의 <명료화 모임>을 통해 지시, 조언 없이 문제를 갖고 있는 "중심인물"에 대해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하고 상대의 말을 거울비추기로 반영함을 통해 스스로 자기 문제를 명료히 보고 자기 내면의 지혜에 의거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갖는다. 원래 이는 학교현장에서 지쳐가는 교사들을 위한 프로그램이었으나 시민활동가, 목회자들, 영성수련가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개신교 관상기도인 '살렘' 모델과도 비슷하다는 평을 한다.

○ 지금까지 소개된 평화훈련 모델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특성을 지닌다.
첫째, 현장(교회, 폭력예방단체, 학교 등)에서 요구되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과제에 지식, 태도, 기술을 제공하기에 참여자의 만족도가 매우 높고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한 증언들이 보편적으로 있다.
둘째, 각 모델은 개인중심이 아닌 공동체적 가치와 자발성 그리고 헌신력이 강한 특징을 가지며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조직된 정규적인 '훈련과 배움의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심화와 발전을 하고 있다.
셋째, 기독교인으로서의 평화능력 그리고 교회의 평화목회의 가능성에 대한 실제적인 상상력과 사역에 대한 능력의 도구가 된다.
넷째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사람, 다른 그룹과의 소통, 지역 현안이나 공동과제에 대한 연대와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사회에서 그리스도 제자직의 수행에 관하여 평화훈련단체와 교회/종교기관과의 협력사업의 시너지 효과가 가능하다.


(중간 생략)

결론: 평화증언의 목회는 예언적-사도적 전승을 잇는 가장 복음적인 길이다

디아코니아(섬김)의 핵심은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있고, 이는 복음, 제자도 그리고 교회의 존재이유에 있어서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섬김이 단순히 고통받는 이에 대한 사회적 구제(charity)에 대한 모든 영역을 폭넓게 의미한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사회복지국가를 꿈꾸는 시민국가들의 흐름속에서 교회의 역할의 많은 점들이 넘겨져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독특성이자 우선적인 사명은 타자에 대한 섬김의 범위이자 타자는 누구를 포함하는가이다. 진술하였듯이 예수와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이웃사랑은 가장 힘들은 타자로서 원수 및 적대자를 이웃의 범주에 포함하고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적대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로 갱신하는 화목의 직임이 제자들에게 부여되었음을 필자는 지금까지 논증하였다. 그러기에 이는 하나님의 보편적 의지인 샬롬의 통치에 응답하는 예언적-사도적 전승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직의 근본이라는 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요지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의식이 있다.

첫째는 폭력, 지배, 불의는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자칭 신심깊은 정통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진리가 안전하고 갈등없는 교회안의 공간에서, 찬양과 기도의 영혼의 자리에서, 동질성을 지닌 기독교인들 내부의 종교적 제의의 공간에서, 신을 만나는 기쁨과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였지만, 어째서 하나님의 주권성은 그런 안전의 공간에서만 기려져야 하는 것인가? 오히려 갈등과 파괴가 있는 곳에서, 그분의 하나님의 주권성을 강하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주권성을 세우고 그분의 능력을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는가? 왜 폭력, 지배, 불의의 공간과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무력하고 눈감고 계신다는 것을 참아내야 하는가?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성을 제한하고, 증언백성으로서의 책임회피는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다.

둘째로 기독교인으로서 좌나 우, 진보나 보수 진영 어디에 속하든 상관없이 힘의 근원을 무력, 강제, 위협, 처벌, 배제와 격리라는 지배적 힘을 통한 상대방의 고통주기와 이를 통한 변화를 모색한다는 생활관행과 사고패턴의 문제점이다. 그러한 생활스타일은 언제나 갈등과 분열, 파괴와 위협의 근본원인이 된다. 우리가 실제로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보편적인 종교, 곧 폭력이라는 종교를 암암리 믿고 있는 현실에 대한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 특히 스스로 보수기독교인-곧 기독교 진리의 사수자-라고 하는 이들의 적대자에 대한 관점은 매우 강력한 논쟁과 배타주의, 적에 대한 처벌과 강제 그래서 자신의 '옳음'을 논증하고 적에게 '승리'하는 것에 양보가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도전받는 것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육신의 진리 곧 '진리와 은총이 눈에 보이는 실재'이자, 허상이 아닌 구체적인 실재(reality)로서 작동한다는 신앙적 일관성이다. 진리/진정함 그리고 은총/자비가 구체적인 몸을 입고 우리 삶에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빼앗기지 않고 작동하며 적에게도 그것을 일관성있게 실천해야 한다는 복음의 진리를 우리는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간디의 말대로 진리가 유일한 실재이라는 고백처럼 진정함과 자비의 실재가 우리에게 유일한 현실이자 힘의 근원임을 다시 배워야 한다. 평화는 신의 본성이자 신에게 가는 유일한 길이고 목적이자 그 자체가 과정이다.

우리가 서있는 시대적, 사회정치적 상황의 도전속에서 가장 오래되면서도 새롭게 대두되는 평화의 제자직과 이에 대한 증언으로서 교회(신앙공동체)의 궁극적 사명에 대한 본질적인 정체성의 확인, 그리고 이를 통한 전략의 기획이 여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평화제자직과는 구별되게 전례없는 지구화된 위기 상황에 직면한 오늘의 평화제자직에 있어서 단순히 사명(what)에 대한 고취와 당위성을 넘어서 과거 기독교평화전통과 비폭력평화운동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평화를 위한 갈등사회학 등의 사회과학방법론(how)을 신앙의 실천 내용에 포함해야 하는 이유이다. 단순히 개인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이나 비저너리의 투신을 넘어 앞서 평화구축의 틀짜기에서 진술하였듯이 핵심역량을 양성하여 활동하는 현장에서 서게 하며 이들간에 힘의 부여(empowerment)와 돌봄이 가능하게 되는 지속적인 '배움과 증언의 커뮤니티'라는 공동의 지도력이 중장기적인 기획(3년~5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매년 27만이라는 청년들이 가장 민감한 나이에 적을 죽이는 연습을 몸에 체질화하여 사회속으로 배출되어 나오고 있다. 군사학과 관련된 수많은 대학의 학과들과 연구소들이 정부와 기업의 막강한 펀드를 통해 자신의 추종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반면에 이 사회에 스스로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매년 배출되고 있는 것일까? 오백명 혹은 천명? 이미 게임이 안되는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핵심역량에 대한 훈련에로의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자각은 비유하자면 해안가 옆 들판에 잘 지은 성채에서 사는 모습과 같다. 안전을 위한 강한 방어망을 구축하지만 쓰나미와 같은 강력한 홍수와 높은 파도가 덮쳐서 성채를 파괴하고 안으로 밀려오고 있는 상황이다. 건축가는 자신의 공간만을 잘 관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안전이 밖의 안전과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폭력과 갈등, 파괴와 손상의 강력한 홍수와 높은 파도에 대응하는 중요한 요소는 평화지도력과 핵심역량을 세우고 이들을 지속적으로 훈련하고 파견하는 시스템을 함께 구축하는 일이다. 앞의 평화구축 장에서 진술하였듯이 이슈에 대한 분석만큼이나 관계짜기와 하부 시스템 구축(중간 및 풀뿌리 지도력 세우기) 그리고 훈련과 교육 및 이들 훈련가에 의한 사회변화 기획은 앞으로 시급히 고려해야 할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마태(25,31-46; 최후의 심판)와 누가(24:13-35; 엠마오로 가는 길)는 그리스도에 대한 만남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종말의 때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형제가운데" 실재했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이었고 그들이 알던 그리스도와는 다른 모습으로 "낯선 자"로 나타나 그분을 새롭게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전혀 기대치 않은 장소와 대상을 통해 은밀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의 깨어있음을 각성시킨다. 우리 주변과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가난, 폭력, 전쟁에서 고통받는 이들은 신비스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매개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원수가 존재하지 않게 하고 적대자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적극적으로 대결하는 능동적 비폭력의 수행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성한 부름의 내용이다. 이는 제자로서 기독교인의 존재 전부와 직결되는 삶의 방식인 것이다. 폭력과 전쟁, 군사와 경찰의 힘, 감금의 교도소와 징벌의 법제화된 강제, 그리고 학교에서 처벌과 징계라는 이세상의 평화의 구축 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의 평화를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신약의 사건의 중심을 다시 보아야 하고 세계사의 긴 비폭력평화운동의 전통에 의한 전략적 통찰을 얻으며 화해된 미래 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전과 지혜를 담아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에 다가서는 기독교인 개인과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모험과 결단이 필요하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1/07/08 14:23 2011/07/08 14:23
Trackback Address :: http://ecopeace.pe.kr/trackback/490
[로그인][오픈아이디란?]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1세기에 있어서 기독교 평화제자직 :: 2011/07/08 14:18

                                      디아코니아와 평화

-하나님의 주권성을 갈등, 폭력 그리고 지배체제 위에 세우기-

박성용 박사 비폭력평화물결대표

(본 원고는 연세대의 "2011년 미래교회 컨퍼런스"/2011.6.29에 발표된 글이다)

--- 목 차 ---

서론: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계의 불확실성의 위기와 그 대응의 긴급성

1. 디아코니아 사역의 중심인 샬롬 통치의 실천

2. 복음의 핵심으로서 평화와 화해

3. 세상 권세와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복음

4. 예수를 뒤따르기: 평화와 화해의 탈지배적 삶에로의 평화 제자직

5. 새로운 현실과 오늘의 평화 제자직

6. 평화제자직의 수행으로서 갈등전환과 평화구축을 위한 전략짜기

7. 한국에서 기독교 평화 제자직의 현실과 그 흐름

8. 평화 제자직으로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

결론: 평화증언의 목회는 예언적-사도적 전승을 잇는 가장 복음적인 길이다


5. 새로운 현실과 오늘의 평화 제자직

1) 과거 신앙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전례없는 새로운 도전과 현실들

- 현재 상황의 위기성과 긴급한 응답의 요청: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시대적 실존적 상황은 전쟁, 질병 기후환경 그리고 금융의 지구화속에 지구 한쪽 구석의 한 사건이 전 세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는 어느 마을, 지역, 국가, 인종, 종교의 벽없이 넘나들며, 통신매체와 운송수단의 발전은 기존의 영토개념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악화된 지구환경과 빈곤 그리고 전쟁과 폭력 특히 핵 위협은 지구의 연약함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확실성, 미래세대와 생태적 타자들의 안전에 대한 긴급하고도 얼마 남지 않은 조치할 수 있는 시간제한의 부담을 우리가 안고 있다. 지구의 안전을 전제로 했던 모든 과거의 신학과 신앙실천의 행위들은 재검토와 자기 수정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며 그 위기와 파괴의 규모 및 그 복잡한 연관성으로 인해 공동의 선을 위한 의지를 가진 모든 개인과 조직들의 협력이 여러 부문과 영역에서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 위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신앙실천으로서 평화구축과 전략구상의 필요성: 예언자-사도적 전통에서 샬롬의 통치라는 복음의 근본 이해는 이제는 단순히 설교와 신학적인 선언, 종교적 언설을 넘어 개인의 갱생과 사회의 변혁이라는 전략적 수행(strategic practices)을 신앙의 내용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받는다. 우상과 지배체제에 대한 분별(discernment)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정치적 개입(engagement)을 통한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미 초대교회에서 단순히 말씀의 증거만이 아니라 성만찬을 통한 나눔의 실천을 예배속에 포함하고, 역사평화교회가 말씀의 전례만 아니라 비즈니스 미팅을 예배(예, 퀘이커)로 동일하게 여기는 것을 이제는 확대하여 사회변화를 위한 전략에 도움을 주는 사회과학(심리학, 갈등사회학, 평화학)을 신앙실천속에 담는 새로운 제자직의 수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미 기독교평화운동과 기독교 민권운동은 간디 등의 비폭력 역사경험들이 지닌 사회학적 접근방법들의 이해와 훈련을 통해 결실을 맺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갈등전환, 조정중재훈련, 비폭력훈련, 비폭력직접행동, 시민에 의한 사회방어, 제3자갈등개입(the Third Party Conflict Intervention)과 평화구축(Peacebuilding) 등등의 모델들이 권력과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일반대중을 주체로 한 여러 모델들이 오랜 민중저항운동을 통해 형성되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웃을 위한 토착적인 신학으로서 민중신학이나 종교해방신학이 당위(what)에 대한 신학적 진술은 지니고 있으나 그 방법(how)에 대한 전략적 신앙실천에 있어서는 약하고 그래서 효과있는 변혁담론으로 현장에서 접목되지 않고 신학자의 담론에 머물러 있게 된다.

2) 기독교 평화운동과 간디주의로 인한 비폭력 평화운동의 재 점화

- 기독교 평화주의의 주요 내용: 우리가 예수와 성령을 통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우리의 일치와 온전함을 원하신다. 분리와 지배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치유와 형제자매됨을 갈망하신다. 복음의 핵심이 평화와 화해를 위해 일하는 제자직과 그러한 신앙공동체로의 부름에 따르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통해 변혁을 위한 비폭력의 힘을 부여받는다.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이 분리되고 끊어진 것을 치유하고 일치시킨다.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인 실재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함없이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를 생생하게 하고 변혁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슬을 끊고, 지배나 상처의 어떤 형태든 변화시키며, 모든 분리와 파편화를 치유할 수 있으시다. 폭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소명은 진정한 평화를 위한 조건을 모양 짓기 위해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힘과 협력하는 것이다. 이런 영에서 우리는 가정, 직장, 교회, 거리, 더 큰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의 자아 속에서 능동적인 비폭력의 실천에로 부름을 받는다. 이것은 비폭력이 단순히 기술이나 전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자신의 삶과 세상의 삶에 있는 폭력 체제를 전복시키는 영적 여정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평화와 정의를 위한 이런 갈망을 심어주신다. 바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갈등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능동적 비폭력에 관여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행위이자 사랑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길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행동하도록 우리를 변형시킨다. 이는 세상을 여러 가지 적의 캠프로 나누는 폭력 체제/시스템의 경향성에 저항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고, 옮음과 그름을 나눔을 통한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고, 폭력의 파괴성에 대한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인식과 행동을 지니지만 이는 상대방이 절대적으로 취소할 수 없이 사랑할 수 없거나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니다. 모든 당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자아, 곧 자신의 존재의 중심에 거하는 하나님의 정의할 수없는 실재와 접촉하게 일깨우는 것은 창조적이고 용감한 행동이다. 예수, 바울, 프란체스코, 마틴루터킹 그리고 역사평화교회 등의 평화활동이 증언하듯이 적대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적인 사랑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방식으로 우리의 상대자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분열과 상처의 깊이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성스러움을 누구에게나 보는 데서 시작한다. 비폭력 평화운동은 이렇게 우리의 상처와 우리가 싸우는 이들 안에 있는 이 온전한 전체성(wholeness)을 만나는 영적 과정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적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거룩함이 우리 자신 안에서 그리고 타자 안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창조성, 인내, 성실함 그리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함을 요구한다. 우리가 비록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비폭력의 역동성을 삶에 적용하면서 우리 자신과 적대자들안에 있는 거룩성과 자비를 해방시키는 데 참여하도록 우리는 초대되었다.

- 간디의 능동적 비폭력의 힘의 수용을 통한 기독교 평화운동의 심화: 지배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하나님의 탈지배적 질서의 실현을 위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샬롬의 통치) 운동은 간디가 "진리실험"으로 규정한 적극적 비폭력(active nonviolence)의 실천을 통해 재 점화되고 더욱 심화되었다. 간디는 "나에게 진리가 하나님이고 비폭력의 방법을 통하지 않고 진리를 발견할 길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신에 대한 만남을 종교적 제의가 아닌 생활실천영역에서 비폭력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강력한 실천성을 제시하게 되고 이는 기독교평화운동을 재점화시킨다. 그의 진리의 힘(사티아그라하라; 문자적으로 sat-진리, 영혼; agraha-확고한, 세력, 유지함, 붙잡음을 뜻함)은 개념이나 영혼의 영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투쟁을 위해 갈등상황에 직면하여 쌍방이 지닌 더 큰 "진리에로 확고하게 향함"을 위한 창조적인 비협조와 공동의 선을 위한 협력적 프로그램을 통해 작동한다. 이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갈등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그리고 상대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고난을 기꺼이 당하는 용기를 부여한다.

사티아그라하는 투쟁의 초점을 갈등 당사자들로부터 원칙으로 재방향시켜서, 싸우는 두 입장/세계관/원리/가치간의 투쟁에 대해 강요된 승리, 법적 판단, 혹은 타협이나 회피가 아니라 대적자들간에 자신의 좁고 낡은 입장을 버리고, 동시에 그들의 두 입장을 구현할 수 있는 충분히 넓고 관대한 해결을 추적하는 상황을 창조하도록 만든다. 각자 지닌 진리의 조각의 긍정성을 포괄하여, 갈등아래 더 깊은 조화를 지향하는 해결방법을 시도한다. 이는 갈등 당사자들 양측의 진정한 요소와 아닌 요소를 분석하여 서로로부터 진정한 요소를 모으고 상대로부터 발견된 진리에 자신을 수정하여 서로 발견된 더 큰 진리를 쌍방이 얻는 방식으로 동의를 구하여 투쟁을 끝내게 된다. 이는 신이 모든 존재안에 있다고 모두의 내면은 신성하다는 확고한 신앙에서 나온 실천적인 갈등해결방식이다. 이 갈등해결방식을 통해 우리는 신을 대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리가 신이고 이 신에게 가는 유일한 길은 비폭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실천을 통해 살아계신 힘(a living force)이신 신을 만나게 된다.

3) 폭력과 지배의 분열된 세상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현대 기독교 평화 단체들

- 억압과 지배 그리고 폭력에 대응하는 기독교평화운동단체들: 능동적 비폭력의 방식을 통해 샬롬의 통치를 개인과 공동체, 지역과 국가 및 국제관계에 개입하는 오늘날 기독교평화운동단체들은 그들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간의 풀뿌리 갈등현장에서의 문제해결을 위한 헌신성과 전문성으로 인해 존경을 받으며 또한 실질적인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여기서는 필자가 주로 관계하는 비폭력 영역에서의 기독교계 평화훈련 활동 단체들 일부를 소개한다. 퀘이커에서 시작한 교도소, 학교, 공동체의 폭력의 전환을 위한 Alternative to Volence Project(AVP)네트워크(전세계 52국가에서 진행) 그리고 미국, 호주, 독일 등에서 청소년 학교를 대상으로 하는 Help Increase the Peace, 갈등조정자와 평화훈련가의 양성과 비폭력개입과 화해를 추구하며 미국과 전 세계 인권및 갈등개입에 유명한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2000여 이상의 루터교 지도자들의 폭력에 대한 비폭력 수행을 지도한 Pace e Bene 그리고 Lutheran Peace Fellowship, 가족과 신앙공동체에 훈련 워크숍을 제공하는 Institute for Peace & Justice, 기독교 성직자와 평신도를 위한 갈등해결에 탁월한 훈련 과정을 제공하는 메노나이트계열의 Lombard Mennonite Peace Center, 가장 비폭력 기술에 있어 정교한 훈련을 세계 특히 독재하의 반군들에게 밀림에 까지 찾아가서 변혁을 위한 비폭력 기술을 가르치는 Training for Change (소장인 George Lakey는 퀘이커임) 등이 있다. 이외에도 Metta Center for Nonviolence, The King Center, Eastern Mennonite University, Peace and Justice Center, FaithTrust, 그리고 Religious Peace Fellowship 등을 들 수 있다.

내전과 무력갈등에 있어 기독교인으로서 국제 분쟁에 개입하여 평화를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매우 전위적인 국제 단체들로서는 Christian Peacemaker Teams(www.cpt.org), Peace Brigades Intn'l(wwww.peacebrigades.org) 그리고 필자가 소속한 한국의 비폭력평화물결이 가입단체로 활동하고 있는 Nonviolent Peaceforce (www.nonviolentpeaceforce.org) 등은 유엔 등의 국제평화활동 단체로서 그들의 자발적인 헌신에 대한 명성을 얻고 있다. 이들은 다른 난민보호 그리고 국제구호를 위한 단체들과는 달리 단순한 긴급구호를 넘어 국제시민으로서 무력분쟁의 현장에 들어가 분쟁에 개입하고 현장의 주민들이 자기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여기에는 현지 인권/평화 활동가의 암살로부터의 보호와 동행, 선거 및 폭력사태 감시와 국제사회 보고, 현지 종교 지도자 및 활동가를 위한 훈련 워크숍 지원, 현지 활동단체를 국제기구와 연결과 국제사회 홍보, 국제 감시, 갈등당사자간의 대화모임주선, 예비방지를 위한 네트워크, 현지 오피니언 리더들을 위한 평화능력강화모임 등을 목적으로 활동한다.

4) 국가단위 갈등분쟁에 개입하는 교회의 시도와 영향들

비폭력 운동이 소극적이고 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간 혹은 작은 집단이나 공동체정도의 수준에서만 가능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오해이자 편견이다. 이미 영어를 주로 쓰는 캐나다의 프랑스어를 쓰는 퀘벡에 대한 배려의 조처가 캐나다 기독교연합회의 노력으로 일어났고,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분쟁에 대한 카토릭과 개신교간의 꾸준한 대화의 결실이 있었으며, 필리핀에서 카톨릭 정부군과 이슬람군간의 무력분쟁에 대한 카토릭 주교단과 이슬람 지도자들간의 평화를 위한 주선들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덧붙여 짧은 사례 둘을 소개한다.

- 남아공의 흑백갈등의 화해사례: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의 대통령 취임은 그간 독제정권이나 흑인민중의 해방운동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오직 악화된 궁지만이 지속적이어서 재앙을 가져올 첨예한 갈등의 상황에서 투쟁의 수단으로 화해를 취한 그와 교회의 선택의 결과였다. 1976년 소에토(Soweto)에서의 학생 봉기로부터 시작한 갈등에 대해 남아공 교회협의회(SACC)와 투투주교가 이끄는 남아공 카토릭 주교단회의(SACBC)가 공동으로 인종차별반대에 대해 공동 협력하면서 그리고 여기에 수많은 기독교 활동가들이 참가한 연합민주전선(United Democratic Front)의 지도력하에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새 물결 구축되었다. 이들은 신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값싼 화해에 대한 교회신학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정의없는 화해는 없다는 Kairos Document를 1983년 발행하여 행동의 가이드로 삼았다. 정부의 억압과 보수언론의 비판에 대응하여 복음주의 범교회단체인 Africa Enterprise에 의해 후원받은 국가화해추진원(National Institute for Reconciliation; NIR)이 설립되고 화해를 인종차별을 종식시키는 투쟁의 도구로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성취하는 과정으로 설정함으로서 갈등의 조정과 모니터링을 하는 비판적 연대의 역할을 하였다. 이는 정의, 인간의 신성함 그리고 해방을 위한 억압받는 이들의 입장에서서 새로운 민주사회의 길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상대방의 체면은 일정부분 살려주되 희생자의 목소리와 배상을 위해 만델라는 취임후 그해 10월 국회를 통해 <진실과 화해 위원회> 활동을 입법화함으로써 과거를 극복하고 치유와 화해를 통한 미래 건설에 힘을 얻게 되었다.

- 독일과 폴란드간의 국경분쟁의 화해: 중세기 튜토닉 기사단의 슬라브 땅의 식민지화와 기독교화,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와 공모하여 프러시아가 폴랜드를 세쪽으로 분할하여 국가를 해체한 18-19세기를 통해볼 때 폴란드는 독일제국으로부터의 침탈을 통해 독일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1차대전에 잠깐 폴란드는 독립을 했지만 2차 대전 때 히틀러는 다시 침공하여 지도자와 지식인을 죽이고 카토릭 교회를 굴종시켰으며, 독일제국을 위한 농산물 제공지 그리고 6백만의 유태인과 수백만의 폴랜드인 그리고 다른 유럽인들을 죽이는 죽음의 수용소로 이용하여 결국 폴란드인의 1/4의 인구를 앗아가 버렸다. 전쟁의 참패로 연합군이 1945년 8월 포츠담회의를 통해 폴란드의 동부는 스탈린이 주장하여 러시아로 편입시킨 반면에 그 댓가로 독일에 속한 서부의 영토(실레시아, 포메라니아, 그리고 동 프러시아 일부)를 폴란드에 넘겨서 이른바 오데르-나이세 강을 따른 국경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이로서 독일인 수백만의 인구가 또한 독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 국경선에 대한 불만족은 양쪽에 항시 있었다.

1960년대에 독일개신교 교회(EKD)는 개신교 사회윤리의 빛에서 이슈를 연구하는 위원회를 지명하였고 이 위원회는 "추방된 독일인이 상황과 동부 이웃에 대한 독일 국민의 관계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Ostdenkschrift(동부를 기억하는 글)"로 회자화 되면서 격심한 논쟁과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이는 독일인의 본토로부터의 추방이 국제법에 저촉하는지 적절한 수정이 필요한지에 대한 연구였고 이들의 슬픔에 대한 깊은 동정과 함께 여러 이유로 인해 결론적으로 국제법에 대한 호소는 불확실하며, 폴란드인들의 두려움에 대한 이해가 담긴 요지의 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독일과 폴란드간의 화해에 대한 느린 과정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1965년 바티칸 제2공의회에 참석한 36명의 폴란드 주교들은 로마에서 화해과정을 개시하는 편지를 독일 주교들에게 보냈다. 여기에는 폴란드 나라에서 (1966) 기독교 선교 100주년의 축하를 준비하는 언급, 폴란드의 쓰라린 과거의 역사로부터 포츠담 회의의 인위적인 분할과 폴란드내 거주하는 독일인들의 상황과 독일인으로서 폴란드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 헤드위그(Saint Hedwig) 그리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신을 희생한 막시밀리안 콜베 등의 폴란드 성자들에 대한 언급, 전쟁이후의 상흔에 대한 경험들과 새국경선에 따른 수백만 독일인들의 이주의 고통에 대한 유감과 사과 그리고 이 땅은 폴란드에 있어서는 생사의 문제가 되는 이유를 언급한 편지였다. 이 편지도 많은 폴란드인들에게는 사과에 대한 분노와 매국노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지만 이는 확실히 지성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들 문건들을 기초로 일련의 독일-폴란드 화해의 공적인 모임이 1966년 벤스베르그시에서 행해지고 스스로를 Bensberger Kreis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에 의해 1968년 Polen-Memorandum이라는 문건이 발행되어 국경선에 대한 미온한 자세를 지신 독일정부를 압박하여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였다. 이 문서는 신학자 요한 뱁티스트 메츠의 정치 신학의 입김이 들어가 있고 칼라너와 조셉 라칭거도 여기에 싸인을 하였다. 메츠는 복음의 탈-사유화를 주장하고 예수의 메시지는 평화와 정의의 복음으로서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을 지니기에 독일에서 복음의 선교에 대한 테스트는 폴란드와의 화해에 달려있다고 문서는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보복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현재의 국경선을 용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쌍방간의 화해를 위해 역사 교과서의 교정을 제시하여서 나중에 1970년 양국간의 무역 협정후에 <폴란드- 독일간의 학교 위원회>가 창설되었다. 문서 마지막 장에서는 독일인의 문화적 우월 의식에 대한 비판과 과거 폴란드인에 행한 폭력에 대한 애도 그리고 평화를 위한 새로운 헌신이 담겨있었다. 이 문서는 많은 독일인들에게는 분노를 자아냈지만 화해를 위한 폴란드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화해를 원하는 지성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서로를 초청하여 대학과 공적인 장소에서 윤리적 토론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의 정치적 결단이 독일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나온 1990/1991의 두 나라 정상간의 화해조약체결이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1/07/08 14:18 2011/07/08 14:18
Trackback Address :: http://ecopeace.pe.kr/trackback/489
[로그인][오픈아이디란?]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복음의 핵심으로서 평화와 화해 :: 2011/07/08 14:14

                                      디아코니아와 평화

-하나님의 주권성을 갈등, 폭력 그리고 지배체제 위에 세우기-

박성용 박사 비폭력평화물결대표

(본 원고는 연세대의 "2011년 미래교회 컨퍼런스"/2011.6.29에 발표된 글이다)

--- 목 차 ---

서론: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계의 불확실성의 위기와 그 대응의 긴급성

1. 디아코니아 사역의 중심인 샬롬 통치의 실천

2. 복음의 핵심으로서 평화와 화해

3. 세상 권세와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복음

4. 예수를 뒤따르기: 평화와 화해의 탈지배적 삶에로의 평화 제자직

5. 새로운 현실과 오늘의 평화 제자직

6. 평화제자직의 수행으로서 갈등전환과 평화구축을 위한 전략짜기

7. 한국에서 기독교 평화 제자직의 현실과 그 흐름

8. 평화 제자직으로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

결론: 평화증언의 목회는 예언적-사도적 전승을 잇는 가장 복음적인 길이다


2. 복음의 핵심으로서 평화와 화해

1)유대종교의 갱신과 로마의 평화를 대체하는 기독교운동의 탄생:

-원시그리스도공동체가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당시 유대교에 대한 변혁운동에서 자신의 길을 가게 된 것은 두 가지 근본적인 인식과 가치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첫째는 유대교가 지닌 야훼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로서 종교적 제의(율법, 정결법 등등)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었다. 두 번째는 당시 로마 제국이 약속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힘과 권력 그리고 무기와 전쟁에 의한 지배와 소수 지배 엘리트 집중의 부의 축적에 의한 평화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었다. 원시그리스도공동체의 이러한 종교적 제의를 통한 거룩의 길과 무기와 부의 통치로서의 로마의 평화에 대한 거부는 제 3의 길로서 이 지상에서 평화와 적극적 비폭력의 길로서 현실화된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의 수행과 이에 대한 참여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종교적 제의를 통한 거룩의 길에 대한 유대교변혁운동으로서 그리고 무기와 권력에 의한 힘의 평화에 대한 대치로서 원시그리스도공동체는 그 상징적 표현으로서 종교적 제의의 중심인 시나고그(회당)대신에 민중의 마을집회인 에클레시아를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장소인 교회로, 로마의 10가지 형중 가장 잔인한 십자가형을 자신의 종교적 심볼로, 정복과 전쟁의 승리의 희소식으로서 유앙겔리온(good news)을 탈지배와 비폭력의 평화의 소식으로서의 복음으로 180도 전환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러한 전환을 통해 자신의 삶의 과제와 정체성이 무엇인지, 즉 무엇에 대해 반대하며 투쟁하고 무엇을 건설해야 하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최소한 예수를 대표로 하는 이들 그룹들은 종교의 울타리가 아니라 임마누엘이라는 궁극경험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탈-지배와 비-폭력의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라는 소명을 위해 일어서며 이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연해진 개개인의 내면과 공동체의 사건이 된다.

2) 공관복음서에서 예수의 샬롬통치의 선포과 그 성격:

-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선포한 복음은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에 대한 선포와 이에 대한 실천과 연관되어 있다. 샬롬의 통치는 침투해 도래하고 있고("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라") 이는 세상이 주는 샬롬과 다르다(요14:27). 이는 지배와 위로부터의 강제, 칼과 권력 그리고 군사와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총과 아래, 섬김과 비폭력 그리고 일치를 통해 구현되는 새로운 현실성이다. 비록 이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처럼 현재적 실현은 단지 징조와 작음으로 시작되지만 엄연한 현실이며 이에 응답하는 자들에게 능동적인 현실이 된다(마3,2; 4,23; 눅10,9;11,20, 17,21;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이 샬롬의 통치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가운데 역사하고 변혁시키며 세상 권력과 투쟁하는 '세력 force'로서 나타난다.

- 마태기자는 산상수훈을 통해 "평화를 이해 일하는 자는 행복"(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가 축복을 받은 자임;시편 18:27; 25:9, 34:17-19, 37:11; 73:1; 149:4)하며 평화를 위해 일하기와 적을 사랑하기의 상호 연결을 통해 둘 다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표시한다: "너의 적을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너는 하늘에 있는 네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5:44-45a) 자녀는 아버지의 이미지와 그분의 일을 보유한다. 그리고 여기에 평화를 위해 일하기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성을 반영하는 기독교인 소명의 헌장(산상수훈)이 있고 이것이 마태공동체의 예수의 제자도의 핵심이 된다.

마태에게서 또 하나의 특징은 적에 대해 폭력을 행하는 제국주의적 메시야 희망에 대한 반대와 그 대안의 제시이다. 그것은 지배적인 로마의 제국적인 통치나 회당의 야합 통치에 저항하도록 힘을 주고 이 둘로부터 구분하는 전략을 준다(20:25; "이방인의 통치자처럼 되지 말라). 여기에는 1세기 로마황제들을 위한 보편적인 칭호인 "하나님의 아들"((theou huios; 14:33; 27:43, 54)을 차용하여 갈릴리 목회를 시작하며, 폭력적인 메시야정통성을 희석하기 위해 이방인들의 기여(동방박사의 탄생설화등장, 백부장의 십자가에서의 고백) 그리고 정치적 승리의 입성대신에 비천한 나귀타고 입성함으로써 정치적 승리에 대한 "다윗 아들"의 메시야적 기대를 마태는 변형시킨다(11:29; "나는 온유하며 겸손하니...") 그리고 이를 목자 이미지를 넣음으로서 정복이 아닌 돌봄의 정치학과 자비의 해석학으로 바꾼다.

- 마가에 있어서 평화를 위해 일하기 주제는 너희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시작되는 "길위에서(on the way)"(8:27)에서 길을 떠남부터 예루살렘 입성직전(10:52)까지 길을 가며 가르친 예수의 3차례의 수난예언, 십자가, 겸손 그리고 종됨에 대한 가르침에 응축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는 제자가 됨은 권력, 특권 그리고 지위의 추구 대신에 십자가를 지기, 어린이와 같은 순진한 마음을 갖기, 그리고 낮은 자로서 종으로 살기를 주문한다. 이것을 결론하여 9장에서 예수는 "서로 평화하라'(50; eireneuete en allelois)고 명한다. 이러한 "길위에서" (en tē hodō)의 가르침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계의 질서화를 위한 탐욕적 욕망과 모방적 경쟁에 대한 대안적인 실천을 주문하고, 지배적인 제국 이미지인 "길=정복"이란 기존 관념을 전복시키며 이를 위한 비폭력 전사인 인자는 영광이 아닌 많은 이들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통해 몸값을 치루기 위해 존재함을 노출시킨다. 메시야의 승리방식은 십자가와 묶여 있고 이는 기대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승리방식으로 온다: 자기-부정의 방법, 겸손한 섬김 그리고 자기 삶을 타인에게 주기 그 자체, 이것이 마가가 전한 예수의 비폭력적 삶의 방식이다.

- 누가-사도행전(같은 저자)은 서두의 마리아 찬가(1:51; 권세있는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에서 보듯이 억압에 대한 사회변혁에 열망이 강하게 나타나있다. 시험하는 자의 광야의 세가지 유혹("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은 형이상학적 아들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어떤 왕이 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다. 누가가 전한 "하나님 나라 복음"(4:43)은 "주의 은혜의 해"의 선포로서 이는 압박과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희년의 성취와 연관되며 평등성과 민중을 지향하는 누가-행전의 저자는 마태와는 달리 "평지"에서 8복 대신에 "4복+4화"의 선언을 통해 부요하고 배부른 자로 대별되는 엘리트귀족층에 대한 심판을 선고한다.

예수가 꿈꾸던 왕국은 영적이거나 도덕적이기 보다는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실현되는 샬롬의 통치이다. 즉, 누가에게 있어서 예수의 어휘는 지금까지 성서학자들이 오해한 실존적이거나 제의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며 속죄교리의 만족을 위한 제물이 아닌 은총과 정의가 하나가 되는 대안적 사회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표방한다. 이는 눅 22:25-27에 잘 나타난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오히려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여기서 보듯이 예수는 기존의 지배의 통치 리더십과는 다른 종노릇하는 섬김의 지도력을 주문하며, 이런 변화의 주체는 종속적 위치에 있던 주변부(the marginal) 사람들이었기에 이러한 특성은 기존의 세상 왕의 통치방식과는 질적으로 구별되기에 불가피하게 기존 권력에 위협이 되는 삶의 방식이 된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보여지는 현실로서의 사회적 질서가 된다.

2) 사도 바울의 평화와 화해의 사역 그리고 요한계시록기자의 "어린 양 전쟁"

-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평화안에서" 사는 것이었다(고전 7:15; 14:33; 고후 13:11; 롬 12:18; 골 3:15; 1데 5:13; 예, ...하나님은 화평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5) 이는 하나님이 "평화의 하나님"(고전14:33)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엡2:14)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평화를 향한 의지는 인간이 하나님의 적이었을 때조차 평화를 가져왔고(롬5:1, 10), 이전에 적대적인 사람들인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도 평화를 가져온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다. 골로새에서는 평화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 우주에까지 확장되고 모든 피조물을 십자가의 피로 화해를 이루어 평화를 이룩한다(1:20).

바울이 그리스도는 평화이시고 그가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다는 진술은 당시 칼에 의한 억압과 소수 특권층의 부 축재를 대표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사회적 맥락과는 정반대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는 타인에 대한 지배를 거부하고, 다양한 사회적 배경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평화의 몸으로 일치시킴으로서 상하계급적인 사회적 구조를 유대인/이방인, 그리고 자유인/노예, 남자/여자의 차별없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낳는 전복적인 대안사회를 약속한다. 로마의 제국적 힘은 반대자를 무찌르기, 정복에 의한 국가경계를 확장하기, 타자를 식민화하고 노예로 만들며 십자가 처형을 하기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안에서 일치와 화해 그리고 상호 돌봄은 로마의 제국적 힘을 와해시킨다.

-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라는 말속에 함축되어진 바울의 지배적인 선교주제는 평화를 위해 일하기와 분리되어 적대자가 된 이들간의 화해이다. 엡 2:14-19(참조, 골1:18-22)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은 화해의 대리자가 되고 이는 하나님 자신의 선제권에 의해 개시되고 거기에 근거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화해"(katallassō)가 "새로운 피조물"의 내용이며, 이는 "하나님의 의"와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인간성이며, 새로운 삶은 롬14:17에서 보듯이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고 이는 "먹고 마심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의, 평화 그리고 기쁨"으로 구성된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평화를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선물로 이해된다. 즉 평화는 성령의 활동과 관계되어진다 (롬 12:3-18; 고전 12-14; 엡 4:7-16) 화해를 통한 우정과 사랑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방인을 하나로 결속시켜 "하나님의 가정"으로 만들고 이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이 된다.

-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전쟁"은 전통적으로 기독교활동가들(특히 역사평화교회 전통안에서)의 중요한 비폭력 평화실천의 주요한 이미지였다. 이는 용으로 불리는 로마제국의 칼의 지배체재에 대한 대안적인 윤리적인 싸움을 의미한다. 악과 로마의 전제 정치와 싸우는 전쟁은 십자가에서 살해당한 어린 양과 그의 제자들의 증언(순교자)라는 무기에 의해 승리하신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현재의 혼돈은 끝나고 강한 제국은 몰락할 것이다. 계시록은 세상의 주는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가 로마 제국의 것과는 다른 대안적인 통치와 공동체를 창조하신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주권성을 선포하고 어린양의 전쟁에 참여하는 방법이 바로 그들이 행하는 능동적 저항의 방법이다. 어린양은 믿는 이들에게는 패러다임 곧 상대방의 생명을 취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주는 모델이다. 이를 통해 더 이상 눈물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된다.

○ 신약성서의 증언의 핵심은 예수의 생과 그의 죽음과 부활은 평화와 화해를 위해 일하기라는 모티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탄생에 있어 "땅에는 평화"(눅2:14)에 대한 천사의 선포로부터 수난에 있어 당국자 앞에서의 예수의 행동 패턴 그리고 빌립보 2:21-23에 있는 바울의 "겸비(kenosis)"찬가 베드로의 "그의 발자취를 따르기"(벧전 2:21-23; 참조 히2:9; 5:5-10; 12:2)에 대한 권고와 계시록의 "어린 양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위해 일하기라는 패턴은 복음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이다. 심지어 요한복음 기자는 성찰을 통해 부활이 소생과 다른 것은 바로 평화에 대한 제자들의 자각과 그 실재에 대한 경험이자 예수가 누군가에 대한 자기-정체성의 노출도 평화와 관련 있음을 비추고 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20:19,21; 26) 그리고 바울은 십자가의 의미를 화해와 연결한다(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3. 세상 권세와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샬롬의 통치

- 복음은 권세와 지배체제를 전복한다: 하느님의 샬롬의 통치의 도래는 하느님의 탈지배적인 자유의 주권성이 우리의 삶과 제도에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적은 혈과 육의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타락한 영과 전도된 가치의 어둠과 혼돈의 질서인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이며 이들을 삶에서 분별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권세와 악신으로 표명된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제도/기구의 내면성이라는 지배체제는 "폭력을 통해 힘있는 자들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을 떠받쳐주기 위하여 일종의 종교", 즉 "폭력 그 자체가 궁극적 관심, 만능약, 기분 좋은 자극, 중독성 도취, 관계의 대용물이 되는 종교"가 되어 억압을 거룩한 합법성으로 위장하고 권력을 신비화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대중은 이들 권력과 억압기구들이 주는 안전, 성공, 풍요와 부라는 구원의 약속에 의해 흡수당한다. 따라서 지배체제는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이 전체에 강요하기 보다는 전체의 동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국가안보체제, 계급주의, 성차별 등등의 "소외시키고 소외된 정신(ethos)"를 뜻하는 체제(system)이 권력에 의해 구조화되면서 지배체제는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 또한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면서 사회화하는 작동을 하게 된다.

- 권력과 지배체제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실천의 도전: "너희는 두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샬롬의 통치 rule of shalom)는 개념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현실이자, 삶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다. 이는 칼의 폭력과 지배, 엘리트 소수의 통치와 부의 전유에 근거한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탈지배적인 사회를 지향한다. 예수에게 있어서 이는 지배가 아닌 섬김(꼴찌의 자리), 평등, 비폭력(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기), 악령축출, 아웃사이더 포함하기의 식탁 등의 사역을 통해 샬롬의 새로운 질서를 개시한다. 산상수훈의 메시야 왕국의 시민권의 자격과 비폭력(10리가기/왼뺨대기/속옷주기를 통한 지배자에게 도덕적 수치를 안겨주기)의 실천은 무저항이나 소극적 저항이 아닌 '악을 닮지 않고 악에 대응하는' 비폭력 직접행동을 실천하는 능동적 전략을 제시한다. 이는 개입이지 물러섬은 아니다. 예수의 비폭력은 단순히 신실함의 의무론적인 책무로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선제력을 지닌 고안된 목적론적인 행동이다. 예수의 비폭력적인 샬롬의 도구는 "수건과 대야"(요13:14)의 마지막 상징행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종의 도구요 섬김의 도구이지 유능한 지배자의 도구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의 공동체에 포함시켜야 할 사람들에 대한 정성스러운 어루만짐에서 형태 지워지는 도구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경험은 세상 권세에 대한 승리에 있다: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힌 바울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지닌 영적 분별의 역할만이 아니라 실천적 과제인 투쟁을 위한 공적인 노력과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안에서 정의의 종으로 살기, 화해, 사랑, 하나님의 전신갑주 등의 언설속에서 나타난다. 샬롬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저항과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것이 중요해지고 그것이 예수의 제자를 불러 모으기와 바울의 교회 세우기의 목적이었다. 도래하는 하느님의 샬롬의 통치가 기존의 비인간화하고 소외시키는 권세의 우상화와 치열한 싸움을 필연적 것으로 보며, 여기에는 악마화하는 것에 대한 영적 분별(discernment)과 변혁에로의 참여(engagement)가 바울의 하느님 나라운동의 중심 원리로 작동하게 된다.

바울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과제는 명료하다. 이는 혈과 육이 아닌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엡6;12)에 있다. 그에게 있어 권세들에 대한 인식은 매우 민감하다. 사탄의 권세가 사람들과 시스템에 들어가서 악의 원인적인 세력으로 작동하며, 구조와 제도속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사탄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지배되고 이로 인해 지배의 구조가 설정되어 악이 생산되어진다. 우리 인간 이외에 이 우주속에 다른 존재들 곧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thrones, powers, principalities, authorities)"이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성의 실현은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론의 중요한 요체가 된다. 즉, 사람들을 권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속에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주됨 아래에서 자신의 삶이 질서 지워지는 것을 뜻하기에 제국 혹은 국가의 권력에 의해 질서 지워진 삶과 차별되어진다.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바울에게 있어 명백하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2:15; 참 고전 15:24-28). 제국의 권력은 더 이상 승리자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권력에 대해 승리자이다.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는 적대적인 당사자들의 화해와 더불어 권세와 통치자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증언과 그 입증을 선교과제로 부여받는다. 이것이 그의 교회설립의 목적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1/07/08 14:14 2011/07/08 14:14
Trackback Address :: http://ecopeace.pe.kr/trackback/488
[로그인][오픈아이디란?]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디아코니아와 평화 -하나님의 주권성을 갈등, 폭력 그리고 지배체제 위에 세우기- :: 2011/07/08 14:09

                                                            디아코니아와 평화

-하나님의 주권성을 갈등, 폭력 그리고 지배체제 위에 세우기-

박성용 박사 비폭력평화물결대표

(본 원고는 연세대의 "2011년 미래교회 컨퍼런스"/2011.6.29에 발표된 글이다)
--- 목 차 ---

서론: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계의 불확실성의 위기와 그 대응의 긴급성

1. 디아코니아 사역의 중심인 샬롬 통치의 실천

2. 복음의 핵심으로서 평화와 화해

3. 세상 권세와 지배체제에 도전하는 복음

4. 예수를 뒤따르기: 평화와 화해의 탈지배적 삶에로의 평화 제자직

5. 새로운 현실과 오늘의 평화 제자직

6. 평화제자직의 수행으로서 갈등전환과 평화구축을 위한 전략짜기

7. 한국에서 기독교 평화 제자직의 현실과 그 흐름

8. 평화 제자직으로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

결론: 평화증언의 목회는 예언적-사도적 전승을 잇는 가장 복음적인 길이다

서론: 분열하고 갈등하는 세계의 불확실성의 위기와 그 대응의 긴급성

- 새로운 지구적 상황의 도래: 새천년에 들어와 터진 2001년 9.11비극사건과 이에 관련하여 이라크전이후의 '테러와의 전쟁'이 오히려 남긴 지구촌 여러 곳의 무력분쟁의 점화와 그 후유증이 지구촌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새로운 지구평화시민운동의 연대활동이 도래하였다. 이는 원유쟁탈과 헤게모니 유지를 위해 대량파괴무기의 생산이라는 거짓정보를 통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군사정치 엘리트들의 전쟁게임으로 인해 대부분이 어린이와 노약자들만 희생자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명분이 별로 없이 죄 없는 민간인 희생을 높이는 현대전쟁의 비윤리성 그리고 가해자/피해자의 구분이 없이 만연하는 병사들의 정신적 외상과 승리없는 전쟁 후유증의 장기화가 국제 시민사회에 경종을 울리면서 행동을 위한 연대의 길을 열고 있다. 또한 동북아에서도 최근의 쓰나미와 지진에 의한 후꾸시마 원전사태와 장기적인 핵 안전에 대한 위협과 핵폐기물의 오염에 따른 위협이라는 현실적인 공포로 인해 가장 안전하다고 선전한 핵발전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위기상황의 예측과 공공영역에서 사회적 책임과 위기관리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고 있다.

- 지구평화시민운동발흥과 국제연대운동의 확산: 1992년 리우환경회의에서 국제문제로서 환경과 평화의 연계, 시민사회의 파트너십 중요성의 대두와 지구헌장(the Earth Charter)의 발안과 의제 21의 통과 그리고 2002년 지속가능발전세계정상회담(WSSD)에서 지구헌장 통과 등은 하나뿐인 지구의 상처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지구시민사회에 확산되었다. 또한 1999년 시애틀에서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WTO 회의에 대한 지구시민사회가 보여준 저지로 인한 회의의 무산과 그 이후 각종 세계대회에 대한 시민사회의 저항적인 대항회의와 세계사회포럼이 태동되었다. 같은 해 수천 명의 세계 시민 활동가들이 모인 헤이그평화회의(Hague Appeal for Peace)에서 무력분쟁에서 시민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국제적 공감과 대안 전략이 모색되었다. 또한 2000년대 초 유엔의 전 사무총장 코피아난의 발의로 시민사회의 무장갈등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의 요청으로 각 대륙의 영역별로 진행되어진 , GPPAC(무장갈등방지 국제시민사회 파트너십)의 지구적 조직과 그 활동 및 세계대회의 가시화가 일어나 그 후속 모임이 국제적으로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이런 흐름속에서 유엔은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폭력극복 10년" 사업을 각 회원국가에 권고하였고 이에 응답하여 WCC의 방향도 폭력에 대한 정의로운 평화의 주제를 설정하였으며 이 주제에 대한 강도를 높여서 2013년 부산에서 열릴 10차 대회에까지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문제를 심화시켜왔다.

- 국내 상황의 갈등수위의 점증화와 소통의 경직성: 한국사회는 그간 이명박정부하에서 보수적 이념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갈등상황으로 인해 갈등하는 각 정파와 부문간에 소통의 경직성이 눈에 뜨게 증가했다. 이를 테면 4대강사업, 신공항건설, 세종시 건설과 같은 대형국가사업과 지역개발 등에서 나타난 사회적 갈등 그리고 분열의 피로감과 손실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자기주장들의 격심한 충돌과 그 파괴력이 사회적 결합과 신뢰를 약화시켜서 국가내부의 여러 부문주체들과 지역공동체들을 사분오열로 찢어놓고 있으나 이에 대한 대응 시스템은 아직 현실화 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천안함과 연평도사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위기 상황으로는 군사·정치 엘리트들의 남북갈등의 사건에 대한 적대적 적이미지 강화와 협상실리외교보다는 명분축적의 군사적 대응 강화를 통한 위기관리능력의 실패를 초래하고, 결국은 안보 상황의 악화 그리고 한국전쟁이후의 가장 극대화된 남북대결과 대화두절이 정치적인 제어장치없이 군사적 긴장을 부추기고 안보를 위한 첨단무기의 도입을 통해 한국군과 주둔미군의 군사비 증강을 강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 한국교회의 갈등과 폭력에 대한 대처 무능력: 언론보도를 통해 급증하는 대형교회를 비롯한 교단내 지도력들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수많은 대형및 기타 교회내 갈등의 현실속에서 이에 상응하는 전형적인 대처부족과 갈등전환 대응 시스템의 결여는 여전히 한국교회의 성숙을 가로막고 있다. 여전히 교회는 성장위주 전략에 머물러 있어서 이제는 사회적 빛과 소금의 역할보다 우선적으로는 교단 및 교회내부의 갈등을 처리하는 데도 많은 인력과 재정적 손실을 가져오고 있고, 이러한 갈등의 전환의 방법에 대한 교회내에서의 의식과 훈련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이다. 이미 한국전쟁의 비극이후 6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전쟁에 의한 실향민의 정신외상이나 분단으로 인한 상처에 대응하는 치유와 회복의 문제에 대한 한국교회의 각성이나 기독교계 싱크탱크의 건립은 아직 생각도 하고 있지 못하다.

○ 혼돈과 무질서의 사회적 엔트로피의 급증, 갈등과 폭력의 구조화는 교회밖과 교회안의 차이없이 증가하고 있다. 이로 인한 그 사회적 비용과 사회정치적 피로감의 확대 그리고 국가적 단위에서 갈등상황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우리의 몸인 '이웃'의 고통에 대한 책임과 개입을 요청하고 있다. 특히 지구화된 인간안보의 위기상황에서 이웃사랑의 문제는 자신의 생존문제와 분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분리와 소외, 지배와 불의에 대응하는 능동적인 평화와 화해를 위한 긴급한 결단이 요청되고 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의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구제(charity)적 차원에 있어서 개인간, 공동체와 지역, 국가간의 갈등문제의 해결방식을 넘어 교회의 사명으로서 재정립하고 시스템과 장기적 훈련 그리고 평화구축을 위한 전략이 새롭게 목회와 선교의 본질로 부상하고 있다.

1. 디아코니아 사역의 중심인 샬롬 통치의 실천

- 기독교의 정체성에 있어서 디아코니아의 중요성: 기독교의 태동에 있어서 헬라어 디아코니아의 차용은 자기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구약의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배려는 주로 자기 공동체속에 있는 가난한 타자들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헬라의 보편적 인간사랑(phianthrope)으로서 디아코니아의 도입은 유대교전통과 결합되어 새로운 신앙실천으로 전개되었다. 성서의 디아코니아에 대한 전통적 이해입장(H.W.Beyer,Wilhelm Brandt)은 미천한 봉사(humble service) 혹은 구제봉사(table service에 있으나 새로운 연구(John N. Collins, Anni Henfschel)에 따르면 오역이고 메신저의 역할(a go-between), 곧 더 큰 권력(하나님 혹은 교회)에 대한 봉사를 위해 권위가 부여된 자로 이해되었다. 디아코니아는 명예로운 봉사로서 단순히 사회-구제적 활동(social-caritative work)에로 축소되지 않는다. 이것이 교회의 세 직무의 하나로서 확정된 것은 1982년 에큐메니칼 문서 BEM(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에서이다.

- 디아코니아 사역을 풍성하게 하는 시대적 도전: 종교개혁기의 만인사제직의 사상의 확대와 더불어 루터는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해방과 사랑 그리고 의를 이웃으로 향하는 헌신과 섬김으로 바꾸었고, 존 웨슬리는 선행은총에 의한 자유의지의 회복을 통해 이웃섬김을 사회적 성화로 연결시켰다. 종교개혁이후 기독교내에서는 역사적평화교회(메노나이트, 퀘이커, 형제교회)들이 평화와 화해문제를 신앙의 근본문제로 인식하여 평화실천을 신앙운동으로 자리매김하여 자라기 시작하게 된다. 한편 제 3세계의 억압, 불평등, 식민 상황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1968년 제 2차 남미주교단 총회를 통한 "멜데린 문헌"은 정의와 평화를 새로운 시대적 사목으로 제창하고 이로부터 민중을 위한 투신과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라는 "예언자적 디아코니아" 사역이 물줄기를 트게 되었다. 선교와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새 방향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안에서 샬롬의 수립, 곧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한 봉사에로 바뀌어진다. UCC(United Church of Christ)교단은 81년 제 13차 총회에서 정의, 인권, 인류가족간의 평화에 초점을 둔 평화구축을 위한 평화주의교회로의 전환을 가결한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83년 뱅쿠버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과제를 구체적으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 Justice, Peace, Integration of Creation)'으로 인식하였으며 그 이후 한스 큉 등의 "지구윤리"등의 주창을 통해 정의, 평화, 화해에 대한 세계교회의 문제인식은 주류화가 되어가게 된다.

○ 디아코니아는 단순한 이웃에 대한 봉사가 아니다. 이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나에게 행한 것이라(마25장)는 예수의 말씀 그리고 이웃과 함께 성만찬에서 자신의 몸을 떼어 나누어주며 '이것을 행하라'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 나라 곧 샬롬의 통치를 실현하는 예언자적-사도적 전통의 살아있는 실천전승의 계승이다. 이는 샬롬의 주이신 하나님의 의지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범을 보이셨고 자기 제자들에게 위탁하신 제자직의 사명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적 사명의 실천을 넘어 평화의 왕의 샬롬통치를 수행하는 정의, 평화, 화해의 책임적 수행으로, 타자중심의 봉사직으로 수렴된다. 이것은 지배, 폭력 그리고 억압의 체재 변화와 이를 향한 기독자의 자기 갱신을 목적으로 하는 철저한 예언적인 사랑의 봉사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명예로운 제자도와 관련 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1/07/08 14:09 2011/07/08 14:09
Trackback Address :: http://ecopeace.pe.kr/trackback/487
[로그인][오픈아이디란?]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갈등에 대한 기존 기독교인들의 암묵적인 십계명 :: 2010/12/15 18:35

                                        갈등에 대한 기존 기독교인의 암묵적인 십계명


1. 너희는 친절해야 한다. 항상 친절하라.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따라 '친절함'은 기독교인의 본성이다.

2.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서로 논쟁하기 위해 서로 대면하지 말라. 대면은 다루기 복잡한 것이고 서로 불쾌한 경험이다.

3. 서로 논쟁의 대면이라는 과거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너희는 원수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너 자신에 대해 방어할 준비를 하라. 네 마음을 바꾸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으니 너도 변해서는 안된다.

4. 너희와 동의하지 않고 너희에게 '의로운' 분노를 일으켰던 다투기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말하지 말라. 너희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라. 더욱 힘써 동의하는 사람들과만 이야기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는 공동체의 진정한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5. 너희는 고귀하고 품격있는 사람임을 기억하라. 그렇기 위해서는 결코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감정을 드러냄은 수련이 덜 되었다는 증거이니 더욱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논거로 상대의 입을 막아라.

6. 참을 수 없는 경우에 울거나 화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거든 갈등 상황에 참여하지 말고, 아예 침묵하는 것이 낫다. 어쨌든 맞싸운다는 것은 자신도 더러워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7. 여자들은 강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잔소리'도 그만두고 침묵해야 한다. 너희들의 의견이 무시될 수 있는 경우를 용납하고, 남자들 앞에서 이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

8. 만약 교회에서 진행되는 일과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너희는 우선 목회자를 비난하라. 왜냐하면 교회의 모든 권력은 그가 쥐고 있고 너희가 할 일은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비난할 어떤 사람도 찾지 못하면 그 교회를 떠나라.

9. 만약 너희가 직면해 알 것이 있다면 너희의 힘과 좌절감과 분노를 임원회나 총회 등을 위해 비축하고 사전에 미리 암시를 주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회중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정기 모임을 주셨다. 거기서 당신의 '의로운' 분노를 분출하라.

10. 교회에서 갈등이 있다면 이것을 덮어두라. 교회는 거룩한 곳이니 어떤 갈등도 죄의 표시이며, 잘못을 행한 자나 당한 자나 모두 죄의 영역에 있는 것임을 알아서 갈등의 모양이라도 나타내지 말라. 갈등이 일어나거든 하나님께서 네 원수의 잘못과 죄를 드러내시고 그를 심판하도록 기도하라.


(출처: 이 글은 존 폴 레더락의 "화해를 향한 여정"(Korean Anabaptist Press; 121-123쪽)이란 책속에서 메노나이트들에게 있는 갈등에 대한 기존의 편견 10계명을 좀더 일반 교인들에게 맞게 수정보완한 것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2010/12/15 18:35 2010/12/15 18:35
Trackback Address :: http://ecopeace.pe.kr/trackback/452
[로그인][오픈아이디란?]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