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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본문 녹색의 눈으로 읽기: 아가 2장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 2008/05/29 11:15

 성서묵상-초록 텍스트 읽기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본문: 아가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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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처음의 창조사건에서 울려 퍼진 “보기에 좋았다”는 신이 스스로 피조물로부터 받은 충격과 신과 피조물사이에 일어난 공명의 관계를 보여준다. 공명과 사랑에 의한 실존에서는 마틴 부버가 말한 ‘나-그것’이 아닌 ‘나-당신(Thou)’의 내밀한 사귐이 일어난다. 사물이 나와 분리되어 거기에 그렇게 아무렇게 있지 않고 나를 향한 ‘임’의 자취와 향기를 담은 실제로 변화된다. 여기에는 ‘백합, 사과나무, 열매, 그늘, 노루, 비둘기...’가 임과 연관된 감미로운 대변자요, 춤추는 자의 파트너, 생명과 즐거움을 계속 제공하는 원천이 된다. 타자가 나의 자유의 확장에 도움을 주는 자로 변형되는 것이다.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2:5)


종교의 세계가 일상의 세계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일상이 사랑의 현존을 통해 깊이, 넓이를 지니게 되면서 노루, 비둘기, 백합, 사과나무, 포도원 등의 일상성은 자신의 물성(物性)을 넘어서 초월의 지시자가 된다. 즉 ‘임’의 현존을 강화하고 그 현존으로 인한 환희를 확대시키는 매개물이 된다. 그래서 생태적 타자들은 단순히 대상으로만 ‘거기’있지 않고 임의 현존의 공간과 파트너가 됨으로써 생의 충만함, 절정의 경험, 순간의 영원화를 드러내는 주체가 된다.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 갔으니...”(2:4) 여기서 종교는 투명한 일상성속에서 녹아들어가 더 이상 분리없는 ‘속(俗)’의 신성화를 통해 생생한 실재로 변형되어 일상의 깊이속에서 투명한 실재로 노출되어진다.



여기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논리와 믿음의 의지가 작동되지 않는다. 단지 주목하기와 공감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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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슴과 영혼의 약진을 통해 농축된 실재의 감미로움과 ‘잔치’의 축하로 인해 일상의 무거운 중력이 그 힘을 잃는다.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2:3하) 상호동화와 일치의 세계가 펼쳐지면서 샘 키인의 ‘춤추는 신’이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로바’가 제기한 춤추는 자와 하나된 포용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2:6). 생명의 중심에 그분이 현존하고 모든 존재는 그 분을 품어 ‘임’의 모습과 체취를 풍겨낸다. 그리고 그 임으로 인해 나의 존엄과 그리고 임을 모습과 체취를 풍겨내는 사물들과 생의 거룩함이 아울러 각성되어진다.  


사랑과 우정의 실존으로 변형되어진 나는 더 이상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연인으로서 주변 사물들이 지닌 임의 체취로 인해 매혹되어지고 내적 감응을 체현시킴으로서 축하하고 축하받는 실존이 된다. 여기에서는 정체성의 전이(轉移, trans-position)가 일어난다.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2:1) 나는 더 이상 타자의 위협에 힘을 축척하는 노력이 필요없다. 나의 약함과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이 그대로 용납되어지고, 수선화, 백합, 비둘기, 어린 사슴의 이미지에서 체현된 나의 약함은 오히려 임의 품과 그분의 사랑을 더욱 강화된다.


공동실존으로서 나와 너는 상호관계성을 지니고 너의 실존은 나의 부분이 된다. 연인으로 변화된 나의 사랑의 눈에는 이제 타자로 인한 갈등과 어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는 나의 힘과 에너지의 근원이 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여 일어나서 함께 가자.”(2:10) 여기에는 나의 어두움과 심연은 나를 무거움의 추락으로 빠뜨리지 않고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을 예고하는 메신저를 불러낸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다.” (2:14) 또한 더 나아가 사랑의 실존에 의한 생에 대한 충만한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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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결국 악과 불의에 대한 자발적 저항과 그 힘을 거세시킨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2:15) 여우에 대한 대처는 두려움과 증오에 의해 의한 것이 아니다. 꽃피어 향기를 토하는 생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의 에너지에 의해 동기되어지고 사랑의 관계의 지속이 중심이유가 된다.


주변의 일상이, 물적 세계가 변형되어 존재력을 발휘하는 것은 나의 삶이 임의 현존과 사랑의 실존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 구나”(2:13)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물리적 세계 그대로 거기 있는 사물로서 있지 않고 ‘열매가 익고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 향연으로서 바뀐 삶의 전체성(wholeness of life)의 구성 존재이다. 그들은 그들 자체의 존재이면서 성스러운 ‘어여쁜 자’를 깊이 담는다. 이들은 어여쁜 자, 사랑하는 자를 소통시키고 고지한다.  그럼으로써 사랑하는 자에 대한 대상화보다 사랑의 관계를 풍성하게 한다. 대상들이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하는 관계의 질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상호성, 일치됨. 질적 도약이 일어난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2:13)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이든 궁극적 실재이든 지성화나 개념화되지 않고 임으로 체현되어 나에게 상응하는 성스러운 ‘어여쁜 이’로서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지성의 도그마화가 아니라 가슴의 상호 소통과 그분의 실재하심 자체가 나의 생의 즐거움과 존재이유의 충분한 근거가 된다. 단지 임이 현존하시고 지금 사랑의 관계속에 빠져 있음으로 생은 잔치가 되고 축하하며 희열은 충만하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다”(2:16) 상호의존과 임에게 속함이라는 의식을 통해 그의 존재가 나를 각성시키고 나의 존재의식을 강화하며 내 정체성이 그분에 의존한다. 그러나 임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인해 내 정체성은 위기를 맞으며, 존재감은 추락한다. “내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음이라.”(2:5) 사랑으로 병이 났고 또한 사랑으로 치유된다. 사랑의 인내는 병이남, 겨울 그리고 비를 견디어 내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2:12)를 맞이하고 다시 일상은 작열하며 환희로 약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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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성화의 경지가 된다.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2:15). 세상은 포도원, 삶은 꽃으로 개화하고, 우리는 연인이 되며, 사방에서 ‘어여쁜 이’의 소리를 듣는다. 자연존재물은 빛을 띠고 임에 대한 암시와 비유가 되어 의미를 창출한다. 성전이 우울, 진지함, 희생의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약동이 성전이 된다. 세상이 그분의 향기, 길, 처소가 된다. 그리고 그분의 부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포도원, 백합화, 포도나무가 그분의 향기를 아직 담고 있고 비둘기, 노루, 어린 사슴이 그분의 예고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는 그분의 향기, 기억에 취한다. 그래서 참을 수 있고 열정을 낼 수 있고, 살아갈 힘과 의미가 존재한다. 그분은 곧 나타나실 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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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9 11:15 2008/05/2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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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평화 텍스트 묵상-들의 백합, 공중의 새를 보라 :: 2008/05/15 10:51

  생태평화 텍스트 묵상

       

들의 백합, 공중의 새를 보라


본문: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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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삶을 위한 싸움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에게나 풍성하게 허락되지 않은 희소성에 대한 이해로 보면 ‘노력한 자에게 정당한 몫을’ 소유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어진다. 삶이 적자생존의 법칙에 기초하고 있다는 가치인식으로 인해 안전에 대한 확보를 위한 두려움으로 인해 경쟁, 대결, 축적, 힘의 추구 그리고 자기 보호의 여러 행위들이 당연히 일어나게 된다. 이런 생의 논리에 따르면 자기 목숨을 위한 염려는 필연적이며,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모습이기도 하다.


소유의 축적은 노력에 의한 것이고 그래서 그가 가진 소유의 크기는 마땅히 영향력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지위 확보에 합법적인 연관을 갖게 되며, 또한 영향력, 명예, 존경, 사회적 지위 등으로 표현되는 힘을 얻게 된다. 지배적 힘(power-over)과 관련된 사회적 엘리트들이 만들어 놓은 삶의 게임이 경고해지고 그 시스템이 유일한 삶의 질서로 작동하면서 일반 민중들은 소유의 축적이라는 엘리트의 게임에서 어쩔 수 없이 지는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최소한 잘 되지는 못하더라도 자기 목숨을 유지하는 정도의 것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초조함과 염려의 무거움은 당연한  결과이다. 허리 휘어지는 무거운 압박에 놓여있는 민중은 먹고 마시며 입는 욕구충족에 허덕이며 사는 것이 그 날의 정해진 일과이다.


당연한 삶의 질서로 보였던 먹고 마시며 입기에 대한 생존하기 논리에 대해 예수께서 도전하는 것은 ‘들의 백합, 공중의 새’의 다른 생존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인간 군상들이 추구하고 있는 생존을 이유로 만연되어 있는 ‘염려’의 무거움, 안전에 대한 두려움의 지배와는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한 징표로서 ‘들의 백합, 공중의 새’라는 자연 존재들의 삶의 가르침에 주목하도록 예수는 우리를 초대한다. “이들을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축적하지도 않지만 살아가고 있다. 수고도 길쌈도 안하지만 살아가고 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자기 방어 없이 연약함을 노출하여 사는 존재를 보라. 민중의 삶의 지혜는 바로 자기 방어의 벽을 쌓고 이에 대해 염려함이 아니라 자기 연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을 그대로 노출하며 사는 길속에 미래가 존재한다.


엘리트들의 지배논리는 자기 목숨에 대한 염려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의 소모와 기쁨의 희생이 당연하며 그들을 뒤쫓기 위한 게임과 자기 무장으로서의 영향력, 권위, 돈, 명예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데서 시스템이 작동된다. 우리가 이에 대한 협력을 거부할 때, 자기 무장을 위한 그 어떤 힘의 축적을 위한 노력을 내려놓을 때, 다른 차원의 삶이 열리게 된다. 자기 방어 없이 연약함으로 존재하라. 무장의 도구를 치워버리고 들의 꽃, 공중의 새처럼 존재하기를 배우라. 힘의 행사는 쳐다보는 사람,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해 진다. 그것을 거부하고 약함을 크게 하여 존재할 때, 쳐다보는 사람이 없을 때 무력해 진다.


사다리 타고 저 위를 추구하며 노력과 수고를 행하여 그에 맞는 몫으로서 영향력과 힘을 행사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들의 꽃 공중의 새처럼 땅을 중심으로 비바람에 흔들리고 사는 삶은 자신 안에 살아있는 것과 생생한 역동성으로 살게 된다. 이로 인해 두려움과 염려는 중심의 자리를 잃는다. 방어 없이 자발적으로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로 자신을 허락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형성하게 된다. 소통하기와 관계 맺기가 그것이다.


약자로서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과 더불어 그만큼 살아있는 생생함으로 존재하는 생태존재들의 지혜는 실재가 적자생존의 법칙과 희소성에 근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부조와 공동관계성에 기초되어 있다는 다른 인식에 근거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의 의”의 실제적인 작동방식이다. 실재의 중심은 신의 자비와 그의 의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삶의 자리는 “하나님과 그의 의”라는 자비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두려움과 염려가 아니라 충만한 생명력과 기쁨의 유희를 우리는 즐길 수 있다.


들의 꽃, 공중의 새로서 작은 자의 삶은 오롯이 그대로 진실한 전체에 참여한다. 그리고 주어진 순간에 매혹되고, 은총의 지배에 머물며, 평화와 사랑속에 머물게 되는 자기 겸비를 선물로 받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의 작음을 즐기게 되고, 선물로 주어진 순간과 공간을 향유하게 되어, 크기와 강함에 대한 추구를 놓아버리게 된다. 여기에 고통은 있으나 두려움은 없다. 하루의 양식에 대한 노력은 있으나 염려의 무거움은 알지 못한다. 먹고 마시고 입기의 생의 일부가 아니라 -그것들 자체는 필요한 것이지만-생의 전체로 살게 되면서 무엇보다 미소와 기쁨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 전체속에는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애무를 즐기기. 그리고 햇살이 펼치는 아침, 낮, 저녁의 찬연한 변화를 음미하기. 지나가는 생태동료들의 이야기를 듣기. 나날이 일어나는 것들에 대한 바라봄이 주는 아름다움의 충격을 받아들이기...등이 있다. 


꽃이 ‘들’에 대해, 새가 ‘공중’에 대해 뿌리를 내리고 날개를 펼침으로 인해, 즉 근원적인 힘에 의해 뿌리박고 날개펴기를 할 때 그 약함은 변형이 된다. 들과 공중이 분신이 되어지는 것이다. 전체-들, 공중-에 의해 공급받는 근원적인 힘이 개체-꽃, 새-의 생명과 자유속에서 발현된다. 그래서 그 한 꽃의 흔들리는 춤으로 들이 생동거리고, 새의 날음으로 공중은 역동적인 자유의 펼침 공간이 된다. 따라서 들은 꽃을 역으로 꽃은 들을-공중은 새를 역으로 새는 공중을- 통해 자신의 본질과 깊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상호포섭의 사사무애의 실재의 세계에서는 각각의 다른 존재이지만 꽃속에 들이 존재하고 새속에 공중이 들어와 꽃과 새는 더 이상 그 크기로 셈할 수 없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불러내게 되어 전체의 화(和)의 경지를 이룬다. 그들을 통해 들이 현시되고 공중이 춤을 추며 가없는 넓이를 노출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실존적 질문은 역설적이지만 실존적 대답 그 자체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생태적 동료들의 실재속의 몰입을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이 생태동료가 단지 우리 인간의 배려 대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는 교사되는 이유이다. 염려가 춤으로 바뀌는 것은 뜻밖에도 생태 동료들이 어떻게 사는 지를 주목할 때 일어난다. 이럴 때 기독교의 선한 청지기론은 아직도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가? 생태주의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의 고민이 있는가? 그러면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제대로 보면 눈이 떠지게 된다. 작아도 빼앗기지 않는 저 작은 존재들의 미소와 자유의 춤을...... 생존으로 흔들리는 만큼 춤추며 있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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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5 10:51 2008/05/1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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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그린 텍스트 읽기 -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 2008/04/13 23:20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본문: 레위기 25장 1-13



창세기의 창조사건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 인간을 만드신 6일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 7일에 마치셨다고 하셨다. 이는 공간과 그 공간에서의 존재물들의 창조만이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라 사실상 제 7일의 ‘안식하심’자체도 그분의 관심인 것이요, 실상 안식이 창조를 완성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동을 위해 안식이 휴식의 중간 정지의 임시 역이 아니라 실상은 종착역이고 기쁨을 회복하는 안식이 그분이 행하신 일의 목표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있으라”하신 가라사대 사건을 통해 존재물들의 ‘있음’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보기에 좋았다’는 선함(Goodness)은 서로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각 존재는 단순히 있음으로서가 아니라 그 본래의 가치(inherent value)를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제 7일을 단순히 축복만이 아니라 안식일인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2:2)라는 성서의 주장은 안식이 거룩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는 존재화->축복됨(blessing)/선함(goodness)->성사화(sacramentalization)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존재물들의 신의 거룩성안에서의 포용이라는 (존재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거룩속에 존재가 포함되는) 안식의 궁극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은 다음을 위한 휴식의 일시 상태가 아니라 존재의 최고의 질(선함을 넘어 거룩함을 부여받기)을 경험하는 궁극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창조사건이 안식의 존재론적 의미를 드러내주는 터전/기초를 제시한다면 안식년/희년의 주제는 창조사건에서 드러난 안식의 존재론적 의미를 사회윤리화하는 데로 이어지고 있다. 안식의 동일한 주제가 이제는 삶에로 적용되는 것이다. 안식을 통해 시간이 거룩함을 덧입고, 축복과 조화, 고요함, 일없는 존재함의 순수성과 희열을 통해 영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과 피조물을 신의 현존의 궁극 경험(peak experience)을 하게 된다. 신도 자신이 최고의 충만함을 안식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the land itself must observe a sabbath to the Lord)”는 말은 단순히 만물의 최고 영장과 우월적 특권의식을 갖는 인간이 열등한 다른 동식물을 돌보는 윤리적 자비행위나 의무감의 실행에 대한 명령이 아니다. 이미 창조사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안식이 존재를 완성하게 하고 창조의 궁극목적이기 때문에 신의 샬롬의 질서화에 대한 그분의 의지의 수행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선언이자, 인간의 자기 행위에 대한 절제와 제한성을 요구하는 신의 명령인 것이다.


창조사건과 출애굽 사건은 자유의 질서화와 안식의 공유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거룩함은 어느 공간의 개별 사물이나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 아니라 안식 그 자체에 부여된 것이다(“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안식의 맛봄이라는 시간(일곱째 날)이 거룩함을 구축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맛보는 거룩함과 신의 거룩함은 서로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 땅이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는 것은 그러므로 안식을 주지 못하는 인간의 모든 노동행위에 대한 신의 분명한 반대와 경종을 뜻한다. 생존(existence), 축복(blesing), 선함(goodness), 안식(sabbath) 그리고 거룩함(sacredness)라는 창조사건의 일련의 흐름은 모든 피조물에게 허락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모든 생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에 따라 6일/6년간은 열심을 다해야 하지만 일곱째 날/일곱째 해는 안식을 통해 존재의 최고의 질적 경험-고요, 평화, 축복, 조화-을 통해 궁극 완성의 가쁨을 맛보아야 한다. 이것이 보시기에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보시기에 좋은’ 것의 윤리적 실천이기도 하다.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25:6)는 말씀은 권력을 지닌 인간의 자기 관심과 자기이익의 남용을 억제시킨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인간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안식하도록 부른다. 사회전체, 자연전체가 안식하게 하라는 말씀이다. 단순히 주일성수, 안식일 준수를 고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안식을 땅에 세우고 낙원을 맛보는 것이 필요하다. 안식일은 이러한 지복적인 낙원을 암시하는 은유이며,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확증한다. 땅에서 이윤을 짜내려는 우리의 노력은 땅에게 안식을 주어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균형을 가져야 한다. 이는 화해의 사역인 것이며 힘의 지배가 아닌 돌봄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안식년의 소출이 단순히 사회적 약자인 종, 품군 그리고 식객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안식년의 혜택은 생태적 약자들인 “땅에 있는 들짐승”(25:7)에게까지 미친다. 이는 창조사건의 제 7일의 안식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결과이다. 묵히고 먹이게 하라는 안식년의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에 대한 돌봄의 포괄적인 관심은 단순히 윤리성을 넘어서서 신의 초월성을 지칭하는 성스러움에 대한 감각속에 뿌리박혀 있다. 소유대신 존재가, 움켜쥠 아닌 내어줌이, 독점과 지배가 아닌 분배와 돌봄이, 정복이 아닌 조화의 초월적 감각을 통해 이러한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향한 주목하기가 나타나게 된다.


땅이 여호와앞에 안식하게 하라는 것은 인간의 의무가 아닌 인간의 자기 승화의 문제요 자기 정체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고, 삶을 삶 되게 하며 모두를 본래의 창조사건이 경험하였던 ‘보기에 좋았다’와 ‘칠일을 거룩하게’하신 궁극의 삶의 목표를 실현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이 여호와의 신성하심의 속성에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서는 단지 존재의 자기 공간확보로서 생태보존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회적·생태적 약자의 충만함, 고요, 평화, 조화라는 안식의 궁극상태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것이 거룩함을 구성한다.


      “땅은 내 것이요 너희는 나에게 몸 붙여 사는 식객에 불과하다”(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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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3 23:20 2008/04/1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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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텍스트 (생태평화 텍스트)- 무지개 언약 "이는 땅의 모든 생물들과 맺은 언약이라" :: 2008/04/02 09:05

 

 

                                                   무지개 언약
 
     - 이는 땅의 모든 생물들과 맺은 언약이라-



텍스트 : 창 9: 1-17



최근의 언론에 인공위성으로 찍힌 한 사진이 공개되었다. 남극의 한 거대한 빙산이 잘려져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었다. 방콕에서 유엔의 기후협약관련 국제회의가 열리고 있는 것과 때를 맞추어 국제사회에 경각심을 줄 수 있는 사진이었다. 해수면의 높이의 증가에 대한 이야기와 기후온난화에 대한 경고들, 그리고 동남아와 아프리카의 최근의 곡물가격 폭등에 따른 민중의 아우성과 시위들의 소식들이 함께 겹쳐져 외신으로 전해들어오고 있다. 지난해 8월 케냐의 국제회의로 인해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를 거쳐 소설의 제목에까지 나오던 만년설로 유명한 킬라만자로 산을 비행기로 지나게 되었었다. 그 때의 장면은 매우 충격이었는데, 왜냐하면 눈이 맨 꼭대기에 드문드문 소수의 지역에서 보일 뿐, 마치 광산에 흙더미 쌓여있듯이 전체가 흉측한 맨 몸으로 아무런 풀 한포기 없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만년설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로인한 주변의 식수부족과 사막의 확장은 주변의 거주민들을 극도의 피폐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있음이 ‘보기에 좋았다’는 창세기 첫 장의 아름다운 서곡은 9장에 오면서 있음이 신에게는 후회로 바뀌고 만다. 주변환경에 가장 예민하고 복잡한 의존관계의 먹이사슬 최고의 위층에 있는 인간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대홍수의 심판이 내려졌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신의 창조질서에 속한 수백만 종중에 오직 한 종의 잘못된 삶의 결과가 온 통 다른 종들의 생존과 멸망에 미치고 있다는 이 의미심장한 연계성은 인간의 우월성에 대한 진술보다는 인간의 행위에 의한 타 생물에 미치는 영향의 지대함에 대한 위험한 위치를 진술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어느 기독교 종말론적 집단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는 주관적 진술이 아니라 현대 과학자들의 일관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이를 증명하는 수많은 데이터의 홍수속에 살면서도 어째서 우리는 그토록 무감각하고, 지금의 생활방식에 아주 자연스러워하며 소름이 느껴질 정도로 우리가 태연하게 별다른 변화없이 사는 것은 어째서일까? 엘 고어의 ‘불편한 진술’의 예처럼 개구리가 뜨거운 물이 아니라 미지근한 물에서 서서히 달구어지는 온도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위험을 모르고 지내는 그런 비유의 상황이 우리에게 전개되는 데 대해 어떤 각성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인가? 우리의 이성이 날카롭지 못한 결과인가. 아니면 우리의 윤리적 표준의 문제점이 그 큰 이유인가.


본문은 마른 하늘에 구원의 방주를 건설하고자 하는 결단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성을 통한 정보의 분석이나 윤리적 의무감의 높은 수준에 의해서만 동기되어지지 않다는 사실을 전해 준다. 그것은 다가올 무질서(혼돈)과 어둠 앞에서 그보다 선행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의 계시에 대한 자각이 주는 결단을 통해서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신의 ‘보기에 좋았다’는 존재론적 긍정과 이에 대한 깊은 공감능력이 영혼의 결단을 불러 일으킨다. 축복하심과 긍정이 거대한 미래의 불안과 혼돈에 대한 조치를 하도록 이성과 윤리감각을 초대하는 것이다. 복(original blessing)이 선행되어 내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 은총이 먼저 행동하신다는 마음의 눈의 뜨임이 주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과의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존재함의 절대적 긍정으로서 신의 축복(original blessing)이 내게 내려졌다는 근본인식이 바로 ‘그린 피스(Greenpeace)’나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의 예처럼 인간동료만이 아니라 생태동료의 위험과 죽음을 방어하는 창조의 공동체로 전환시키게 된다. 노아가 방주를 마련한 것은 바로 축복-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의 근본인식과 그것의 보편성에 기초한다. 새로운 출발로서 ‘한 처음에’의 사건은 이렇게 복으로 시작된다. 창조사건, 노아의 무지개사건 그리고 아브라함의 ‘열국의 아비’가 되는 떠남의 사건은 복과의 연결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2-3) 노아의 방주는 복의 보편성과 이를 존속하고자 하는 자기 결단의 행위였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이 불안정하나 생존을 위해 창조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단결하고 상호의존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를 결코 완전히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과 존재에 대한 복됨에 대한 그분의 의지와 뜻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드러내어 준다. 



노아가 신의 ‘보시기에 좋았다’를 다시 얻게 되고 희망을 찾게 되는 것은 다른 동료의 격려나 설득에 있지 않음은 매우 충격적이다. 그는 구원의 징조를 비둘기로부터 얻었고, 구원의 확증을 무지개로부터 받게 되었다. 생태 동료들의 도움을 통해 불안, 두려움, 혼돈, 어둠을 몰아내고 생에 대한 재 긍정과 확신을 받게 되었다. 인간에 의해 별다른 충격이나 인식지평의 확대에 대한 도전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가 때때로 생태적 타자들(eco-Others)에 의해 신의 의지와 삶의 근본적 긍정에 대한 ‘예’에 대한 감동을 우리가 얻는다는 사실은 얼마나 뜻밖의 경험이자 생의 재 회복과 신뢰의 감각 강화에 있어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놀라게 된다.

 

여기 무지개 언약은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하는 약속으로 나타난다.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16) 여기서 무지개 언약은 결코 인간중심적이지 않다. 모든 생명과 맺는 언약으로 생태적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 자연도 하나님 의지의 전달이 되고 하나님의 신실성과 의지를 얻는 계약자가 된다. 인간 일반을 나타내는 아담(adam)은 흙(adama)과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창세기 기자의 시각은 이제 인간은 다른 생명체들과 신에 대한 언약의 공동의 담지자이자 실행자가 된다.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욥 5: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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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신경 :: 2008/03/26 13:08

 

                자연 신경


우리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섭리자인 하나님을 믿으며,

자연이 하나님의 몸과 말씀임을 믿나이다.


우리는 만물을 자유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자연은 사랑을 통해 치유되고 회복됨을 믿나이다.


우리는 생명과 평화, 자유오 해방의 영이신 성령을 믿으며

자연은 창조질서에 의하여 보전되고 유지됨을 믿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자연 안에 충만함을 믿으며,

자연이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적인 안내자임을 믿나이다.


우리는 녹색교회가 생명 살림의 터전임을 믿으며,

평화로운 세상을 여는 자연의 청지기임을 믿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자연의 힘과 사람의 신실한 노동을 통해서

자연이 새롭게 창조되어 감을 믿나이다.


우리는 풍요와 편리를 따르는 것이 자연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연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음을 믿나이다.


우리는 자연의 붕괴가 인류의 삶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지구의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경고를 엄숙히 받아들이나이다.


우리는 자연을 착취하고 사지로 내 몰았던 행태를 참회하고

자연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녹색은총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열고

생명을 살리는 환경선교에 매진하겠습니다. 



--이 자연신경은 “기독교환경연대”에서 기독교환경운동 현장에서 오랫동안 준비하고 수정하여 기독교환경운동가/단체들이 환경예배시 신앙고백할 때 쓰는 신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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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6 13:08 2008/03/26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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