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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적 그리스도에 대한 시-우리 위, 아래, 옆, 안에 계신 그리스도 :: 2008/05/21 12:39
우리 위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아래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옆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는 당신을 볼 수 없네, 우리 위에 계신 그리스도
이 땅의 눈으로 우리는 우리 위를 바라보네,
구름 혹은 햇빛, 구름 낌 혹은 말게 갬.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당신의 다스림을 아네.
태양 광선 안에 본능적으로,
폭풍우에서 말하는 것,
모든 창조를 따뜻하게 하고 움직이는 것,
우리 위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는 당신을 볼 수 없네, 우리 아래 계신 그리스도
이 땅의 눈으로 우리는 우리 아래를 바라보네
돌과 먼지와 찌꺼기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높이 올리워진 당신을 아네.
당신 안에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고 함께 연결되어 있다네.
지극히 작은 원자는 빛의 에너지이고
잔디는 진동하며,
바위들은 맥박친다.
모든 것이 변하 가운데 있다;
돌은 구르고 천사도 움직인다.
아래에는 영원한 팔이 있다.
우리는 당신을 알 수 없네, 우리 아래 계신 그리스도
우리는 당신을 파악할 수 없네, 우리 옆에 계신 그리스도
이 땅의 눈으로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보네,
생기 가득하거나 혹은 흐릿하거나, 크거나 작거나.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당신이 모두에게 임하심을 아네.
당신은 약물과 술에 중독된...이들 안에 갇혀 있네,
토굴 감옥의 어두움, 그러나 당신이 거기에 계시네.
당신은 해방되었고, 화려하게 빛나네,
사랑하는 어머니 안에서... 열정적인 신부와
그리고 모든 희생적인 영혼 안에서,
우리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네, 우리 옆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는 당신을 만질 수 없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이 땅의 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네,
먼지 가운데 먼지, 땅 가운데 땅...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영원한 것으로 둘러 있음을 아네,
우리의 마음은 신성을 파악하고
우리의 몸은 신음하며, 계시를 기다리고,
우리의 영혼은 구속되고 새롭게 된다.
우리는 당신을 만질 수 없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위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아래 계신 그리스도
우리 옆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손으로 지어진 성전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George MacLeod (1895-1991) The whole Earth Shall Cry Glory, p 16
스코틀랜드 출신, 켈트 영성가이자 장로교 목사
창조 영성과 우주 기독론 :: 2008/04/23 07:49

죽어가는 어머니 지구와 그의 자녀들이 21세기에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서는 신비에 대한 각성이 필요하며 이는 “모든 종교와 문화가 간직한 지혜의 전통으로부터 지혜와 신비를, 놀이꾼과 정의의 조성자를 이끌어 내는 그러한 각성”1)이 요구된다. 이 각성은 과학과 종교, 영혼과 우주, 정신과 영, 정의사회 건설과 종교예식 거행,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는 신비주의적이고 예언자적이며 우주론적인 세계관을 요청한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신비의 실천과 우주론적 깨달음에 대한 감각에서 단절됨으로써 “인간중심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반신비적이고 반모성주의적인 세계관이라는 낡은 술부대”2)로 남아있어서, 죽어가는 대지와 원주민 문화, 죽어가는 지혜와 창조성, 그리고 죽어가는 어머니 교회와 젊음에 대한 무력증을 보이고 있다. 이를 위한 대책이 바로 우주 그리스도에 대한 추구여야 한다고 매튜 폭스는 주장한다. 그의 우주 그리스도론은 과학(살아있는 우주론에 대한 지식), 신비주의(창조에 대한 황홀의 체험) 그리고 예술(경외의 표현)이 서로 어울려진 영적 훈련에 의한 살아있는 우주론이다. 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덜 성차별적이고 덜 이원론적이며 덜 인간중심주의적인 종교 패러다임”3)으로서 실천성을 강조한다. 이 우주 그리스도론은 패러다임 전환에 따른 “세계관 혁명”과 “새로운 영혼”을 초래하게 된다.
기독교의 전통으로 되돌아가 볼 때, 이미 우주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은 이스라엘의 선재하는 지혜(잠언, 지혜서)와 예언자의 말 그리고 묵시문학에서 나타나며, 신약성서의 찬가들4)속에서 예시되어진다. 또한 희랍교부들(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이레네오스, 니싸의 그레고리오)에게 있어서 우주론적 신학이 존재했으며, 중세의 창조중심의 신비가들에게 있어서 우주 그리스도는 중심주제로 등장하게 된다. 빙겐의 힐데가르트(1098-1179)의 우주론적 음악과 우주 그리스도에 대한 만다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의 태양의 노래, 만물의 형제 자매됨(누나 달, 언니 바람, 어미 땅, 가난부인 등), 자연의 치유력에 대한 신뢰, 우주적 과정으로서 죽음에 대한 복종 등이 그 예가 된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반영,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우주 전체에 대한 이해, 막데부르크의 메히텔드(1210경-1280경)의 우주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일기, 만유재신론,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신곡」에 나타난 우주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의 묘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1327)의 피조물이 하느님 말씀임, 존재(isness)이신 하느님, 개인안에서의 우주 그리스도를 탄생시킴, 노르위치의 쥴리아나(1342경-1415)의 모든 피조물안에 계신 하느님의 내재(inness), 쿠사의 니콜라우스(1400-1464)의 지혜중심적 영성 등이 우주 그리스도론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우주 그리스도의 도래가 필요한 이유는 정신적 각성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각성은 우리들의 정신과 마음을 우주를 향에 열어주며, 이 우주속에 어디에 우리가 위치해 있고, 우주 속에서 우리는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말하자면 우리는 방대한 200억년의 역사를 가진 우주의 시민이며, 그 우주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의 소명은 그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다.”5) 현대과학과 신비주의가 만나는 우주 그리스도론은 영혼을 확대시키고, 놀라운 모험과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끈다. 우주 그리스도는 만물 사이를 결합시키는 틀로서 정신과 우주를 다시 연결시키며, 혼돈에서 조화로 우리를 안내한다. 전체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음으로 결국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우주 그리스도는 보증한다. 모든 것이 경외와 지혜와 신 현존의 자료이다. 상호의존적인 세상에서 개별적인 구원이란 존재하지 못한다. 따라서 구원은 우주적 성격을 띤다. 체르노빌 핵발전소사고나 보팔 화학공장사고의 사례에서 보는 인간의 우주적 규모의 파괴력 앞에서 우주 그리스도는 우주적 치유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그리스도는 우주의 악신과 대결하고, 우주적 고통과 고난을 경험함으로써 우주적 치유능력을 보여주게 된다. 우주 그리스도는 고통이 있는 곳에 현존하며 우리와 함께 여행한다. 그도 모든 피조물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난 받는 존재가 된다. 이는 정의와 자비가 행해지는 곳에서 우주그리스도는 치유하고 구속하고 해방시키고 있음을 의미한다.6)
창조영성과 자비 :: 2008/04/23 07:46

매튜 폭스의 창조영성에 있어서 자비는 치유와 축제 그리고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고 이를 생활양식에서 구현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비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 페미니즘, 생태주의간의 교차점의 핵심이며, 살아있는 우주론 형성과 대안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이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이고 실천적인 에너지원이자 원리로 파악된다. 즉, 자비는 일반적인 이해처럼 심리적이고 사적이며 감상적이고 도덕적이며 이타적 성격을 넘어선다. 곧 자비는 정의를 실천하고, 공적이며, 우주적이고, 지성을 받아들이고, 신적인 에너지의 흐름이자 자기-사랑과 타자-사랑이 하나로 어울린 상호의존적이며 실천적인 영성의 핵심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인간다움의 구성요소(생활방식)이자 사회변혁의 정치원리(행동방식)이다. 자비의 결여의 예는 식량과 에너지 문제, 의학의 비인간화, 실직과 불필요한 사치품의 증가, 삭막한 관료주의, 저속한 경제학, 메마른 일과 교육활동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자비는 특히 ‘바닥’과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와 평등성을 추구한다.1)
자비가 양육, 돌봄 그리고 땅스러움(earthliness)을 축으로 하는 비억압적, 비 계급주의적 구조의 특징을 갖는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매튜 폭스는 두 개의 상징, 곧 ‘야곱의 사다리 오르기’(창세기 28장)와 ‘사라의 원형 춤’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2) ‘사다리 오르기’는 지금까지의 서양 영성의 역사의 주류흐름이다. 이는 영적 진보를 위를 바라보고, 정상에로의 상승으로 가르친다. 여기에서는 플라톤식 실재 경험에서 동기 되어지며, 반면에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을 위에계심 (upness)가 아니라 함께하심(amongness)로 이해한다. 야곱의 사다리가 상징하는 영성의 결과는 예배를 위로 향하는 우러름으로 이해하고, 영웅, 성자, 성공과 으뜸을 숭배하는 지주숭배(pedestal pieties) 교육을 주입함으로서 평등의 역학을 차단한다. 또한 사다리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 정의에 대한 규정을 함으로서 심판의 의미를 갖게 되어 정의와 자비가 분리되었다. 이밖에도 사다리 오르기는 위계적이고 경쟁적인 엘리트적인 질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분리되는 유신론의 특징을 가진다.
‘사라의 원형 춤’(창세기 18장, 21장)은 웃음과 기쁨의 영성이며 낳음, 창조, 다산을 상징한다. 이는 힘들게 의지에 의존하여 오르는 것이 아니라 춤추고 경축하며 위·아래가 아니라 안·밖의 역학, 즉 안의 신비주의와 밖의 예언을 경험한다. 여기에는 수고함보다는 만족하고 대지에 접촉하며, 환희를 공유한다. 여기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없다. 단지 타인도 함께 춤추는 무용수가 된다. 따라서 소수의 엘리트의 생존자와 승자가 아니라, 생존에 부적합한 이들도 환영하는 민중의 영성을 지향한다. 따라서 우러러보지 않기에 민주적이고 비폭력적이며 평등의식이 존재한다. 개인간에 독립적인 경향보다 상호의존과 상호협조를 통한 삶, 양육과 친밀감, 땀과 웃음의 교환, 손과 손의 만남이 존재한다. 여기서 삶은 굽고 둥근 에너지와 하나가 되며,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내재라는 만유내재신론적 관계가 형성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관통되어진다.
자비의 영성이 구현된 사라의 원형 춤에 대한 실례들은 식탁에 둘러앉아서 하는 대화속에서, 연령, 성별, 직업의 장벽을 넘는 포크댄스에서, 자신의 약점을 나누고 힘을 얻는 그룹토의(여성의 자각모임, 마약중독자 모임, 기도모임)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여기에는 비-경쟁, 탈-엘리트주의, 대지와 삶에 충실함, 개방과 따사로움, 협력이 존재한다. 교회에서 팀 목회를 통한 서로 의지하고 위계를 탈피하는 목회, 사제중심에서 하느님 백성중심으로의 목회도 사라의 원의 변형이다. 의·식·주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협동조합, 자연에너지의 분배 등이 사라이 원의 적용에 해당한다. 사다리 오르기가 마천루와 성공을 위한 폭력을 합법화함으로서 가학과 피학증을 심화시키는 지배하는 힘(power-over)에 근거한다면 사라의 원은 공유하는 힘(power-with)에 근거한다. 전자가 지배, 굴욕, 탈취를 지향하는 문화는 불안에 맞서는 안정을 권력, 소유, 명예의 추구를 통해 이룩하는 강박증을 낳게 된다. 그러나 자비는 함께 기쁨을 나누고 배려하며 그대로 둠, 삶의 변증법이 일어나게 한다. 이는 통제가 아니라 축제, 우울한 영성이 아니라 웃음의 영성이다. 축제속에서 에너지가 방출되고, 사랑과 정의의질서가 있는 세계를 재창조하게 된다.3)
창조영성에 이르는 수행의 길 :: 2008/04/23 07:34
창조영성에 이르는 수행의 길

고전적인 기독교신학인 타락-구속의 영성을 추구하는 길은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A) 그리고 일치(union)이다. 이는 희랍의 프로클루스, 플로티누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신앙관에서 물려받은 매튜 폭스의 창조영성은 서로 관련된 긍정, 부정, 창조성, 그리고 변혁의 길이다.
첫 번째 길로서 긍정의 길(Via Positiva)은 감사와 황홀의 길이다.1) 이는 생명인 우리 자신과 만유인 창조계의 아름다움과 우주적 깊이를 느끼고 맛보는 여행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모든 사물, 시간, 공간을 통해 흘러나오는 하느님의 창조력(다비르)이 존재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신적 창조력은 말을 넘어 행위를 내포한다. 성서에 따르면 계약의 하느님은 축복의 하느님이시다. 비옥한 땅, 건강한 자녀, 건전한 삶 등 좋은 것을 약속하며, 이는 삶의 기본적인 선물들을 누림에 관한 축복이다. 축복이 창조의 목적인 것이다. 원죄를 강조한 영성은 실상 기쁨을 장려하지 않는다. 원죄는 그동안 제국건설자, 노예 주인들, 가부장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왔다. 여기에는 공동체, 정의, 축제에 대한 깊은 욕구가 무시되어진다.
긍정의 길은 감성, 단순함 그리고 우리의 땅스러움(earthliness)로서의 겸손을 회복한다.2) 우리가 땅에 속해있다 함은 욕망과 도덕적 격분 등의 열정을 긍정한다는 것이며, 땅과 땅의 것에 가까이 머무는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육화신비-그리스도가 인성, 땅스러움, 감성과 성을 지님-가 보여주는 겸손이다. 어찌 보면 우주 자체가 성사적이다. 만유의 모두가 움직이며 춤추고 노래하고 놀람에 가득차다. 하느님은 조화와 균형의 우주적 춤꾼이요 우리는 춤이다. 그리고 세계의 거룩함을 판독함으로 우리 자신의 거룩함을 탐구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주 안에 있고 우주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세계를 성사적으로 본다함은 하느님이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우주가 하나의 공동체란 의미이다. 여기에는 조화, 아름다움, 정의가 요구되어진다. 우주는 다양성을 가르친다. 그리고 우주적 의식이라는 보편성속에서 지역주의, 이기주의를 지양한다. 개인화하고 원자화된 이원론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존중이 싹튼다. 원복과 우리의 땅스러움에 대한 긍정과 희열의 맛봄은 우주적 신뢰에 필연적으로 연관된다. 신뢰를 통해 우리는 자신과 우주의 끊임없는 성장의 가능성을 촉진한다. 신앙의 근본태도로서 신뢰는 변화와 과정을 존중하는 개방성을 낳게 된다. 여기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우리의 왕다운 인격존엄과 하느님 나라 건설에 대한 책임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 책임은 우주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긍정은 곧 우리 가운에 있는 하느님 나라, 곧 만유내재신론적 능력과 은총의 체험만이 아니라 “때의 충만”(실현된 종말론)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기도 하다.3) 영생은 후일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심연을 신뢰하며 지금이 그 때라는 체험이다. 지금에로 과거와 미래의 최선을 것을 모아들이며 지금이 신적 돌입의 순간임을 경험한다. 생에 대한 긍정의 길은 풍성한 은혜로서 생명잔치에로의 초대, 우주적 환대에 대한 경험을 낳는다. “매우 좋다”하신 이 잔치에 “감사합니다”라고 손님으로서 우리는 동참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더욱 깊이 존중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죄는 사소화, 개인화의 의미영역에 있지 않고 창조계를 손상하여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하는 데 있게 된다. 생명의 축복들을 경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죄인 것이다.
두 번째 길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다.4) 이는 비움과 어둠이 길이다. 우리는 기쁨과 황홀에서만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에서도 우리가 우주적 존재임을 배운다. “하느님은 영혼안에서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 과정에서 발견되신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비움, 침묵, 어둠속에서, 이미지의 떨쳐냄을 통해 신적 깊이에로 잠겨듦이 일어난다. 고통을 통해 비움(케노시스)가 일어난다. 고통을 끌어들여 함께 여행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자비를 인식하며 익히고 성숙해진다. 고통을 통해 강인해지고 아름다움을 담을 그릇이 된다. 이는 자신을 열어 놓아 다를 사람들과 맺어준다.
비워지고 잠겨들면 무와 대면하게 되며 어둠과 벗할 줄 알게 된다. 삶의 심연은 집착에서 자유롭게 하며, 실제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그런 제로 지점에 이르게 되면 통찰의 기회를 얻게 되며, 해방에 투신할 수 있게 된다. 이 단계는 본질적으로 수용력을 익히는 길이다. 타자가 다름을,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에서 힘을 얻게 된다. 부정의 길이 요구하는 힘은 놓아버림(letting go), 금욕적인 극기의 힘이나 상황통제의 힘에서가 아니라 상처받고 떨어지기를 지속하는 희생의 힘이다. 죄는 놓아버림을 거부하는 것으로, 신비와 어둠과 미지의 것에 대한 거부, 그리고 너무 많은 무장이 이에 속한다. 그 결과의 예가 핵무기 광기, 민족국가의 권력, 엘리트의 자기만족 등이다.
여기서 구원의 힘은 고통을 통해 온다. 십자가는 명상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 과정에로의 참여이다. 이는 비움, 무, 제로의 힘이다. 그리스도는 힘을 거부했으며 신성을 비움으로써 비워진 인격의 모범이시다. 비워진 인격을 통해 정의와 자비에 민감해지고, 그 비움으로 신적 은총의 통로가 되셨다. 그래서 신적인 창조력(다비르)가 강하게 솟구쳐 흐르는 예언자가 된다. 철저히 놓아버림이 충만해지는 것이 하느님 나라이며, 이렇게 놓아버림을 통해 변모를 일으킨다. 산모가 이완에 의해서만 출산을 도울 수 있는 것처럼 지나친 방어, 너무 두꺼운 벽은 은총의 기회인 상처받을 가능성을 막는다. 이러한 방어는 고통을 받아들임으로 치유되는 길을 막는다.
셋째는 창조의 길(Via Creativa)이다.5) 이는 하느님의 모상이자 공동창조자인 우리의 창조성을 신뢰하는 길이다. 별이 공간의 어둠에서, 해방운동이 종살이 고통의 어둠에서 태어나듯이 창조는 전에 없던 것을 낳는다. 창조성은 우주적 에너지이다. 우주는 탄생중이고, 창조활동의 장구한 과정을 밟고 있다. 모든 유기체들이 지속적인 출산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두려운 창조성의 상속자이자, 우주발생의 작용인이다. 우리 자신이 생명을 위한 창조에 동참하지 않는 한, 우리의 창조력은 두렵고 위험한 도착된 출산방식, 즉 악마적인 것, 파괴를 위한 출산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지난 3세기동안 타락-구속의 신학이 가져온 비극은 우리안의 예술가와의 이혼이었다. 그 결과 아름다움과 놀라움, 경이와 정의, 부드러움과 놀이에 대한 출산력이 상실되었다. 사람마다 신적 출산력을 물려받았으며 우리는 내면의 예술가를 나오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
창조하는 것은 신성과의 닮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 안에 신적인 영이 깃들어 있다. 예술없는 종교적 신앙은 메말라지며, 명상도 종교적 엘리트의 전유물이 되게 된다. 명상으로서의 예술, 안에서 솟아나 내적 형태를 갖추는 예술은 형태있는 명상이다. 구체적 형태가 내적 진리에 기여하는 명상이다. 우주발생의 창조에 집중하는 예술의 힘을 회복함으로써 영성이 살아나고 역동적이게 된다. 이는 가장 진정한 의미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부로부터 불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복된 예술의 힘은 사회변혁의 도구가 된다. 창조는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명상인 예술을 통해 서로에게 타고난 아름다움과 장대함을 발견하며 치유되고 자기 이미지를 신뢰하며 삶에 줄 중요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술은 두려움, 상처받을 수 있음에 더욱 개방적이게 하며 긴장을 풀고 놀이할 수 있게 되며 축복을 경험한다.
창조의 길은 내적인 심리학에서 우주적 심리학으로, 정적 우주에서 창조력이 발휘되는 역동적인 우주로 나아간다. 우리 안에 신적 모상(이미지)을 낳는 것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두려움과 죄악과 길들여짐 그리고 안락의 유혹을 받게 된다. 이미지에 대한 신뢰가 주는 고통은 새로운 출산, 새로운 창조의 고통이자 치유적인 고통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예술작품”으로서 하느님의 외향명상이다. 일과 놀이와 예술을 통해, 혼과 몸의 상호 결합을 통해 영과 생명을 낳게 된다. 사회정의, 예술 그리고 영성의 회복은 일하시고 창조하시고 놀이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인류의 존엄을 회복하게 한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우주적 상호관계를 의식시킨다. 이는 아름다움의 체험이 우주적 온전함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상실됨으로 아름다움이 상실되고 그래서 우리는 신경증에 걸리게 된다.
우리의 신적 출산의 권리와 책임인 창조성이 무시되는 가부장적 전통은 하느님의 모성의 측면과 우리 자신안의 모성을 발전시킬 책임을 경시했다. 모성의 억압은 예술가의 억압에 이어진다. 줄리안, 힐데가르드, 에크하르트, 메히틸드 등 중세 신비가들은 하느님의 모성을 경축한다. 감쌈, 출산, 양육, 흘러나옴, 포용, 반김의 용어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모성적으로 표현한다. 창조의 길에서 보는 죄는 하느님이 모상인 우리의 상상력의 오용, 죽임을 위해 오용하는 창조성에 있다. 상상력의 억압, 창조력의 낙태, 내면의 예술가 박해가 죄에 속한다. 또한 예술의 상실은 사회적 죄가 된다. 예술가의 추방으로 삶이 왜곡되고 폭력적이게 되며 추해지고 권태가 찾아온다. 따라서 우리안의 신적인 창조성의 자각은 우리의 신성에 대한 가능성을 일깨운다. 우리 안에 잠재한 새로운 출산행위를 통해 신성 속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 아름다움은 치유하고 일치시키며 구원한다.
넷째는 변혁의 길(Via Transformativa)이다. 이는 자비, 경축, 에로스적 정의의 길이다.6) 이 길은 죄스럽거나 불의한 관계가 쇄신된 창조계를 회복한다. 여기에는 지혜와 경축, 자비와 놀이에로 귀환한다. 자본주의, 군국주의,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정의와 자비없는 영성의 무력감과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창조영성은 정적인 관상보다 행동하는 자비와 정의를 강조한다. 이 길은 아나윔(사회적으로 잊혀지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한 예언자의 길이다. 창조영성은 무력한 자의 처지에서 힘과 지혜를 길러내고 교회와 사회의 변혁에 공헌한다. 여기에서 관상은 행동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진다. 그러나 변혁은 쉬운 길이 아니다. 연설이나 시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식별하고, 문명의 규율을 세우며, 후세대들이 삶의 의미에 대한 전망을 얻을 수 있는 생활양식을 성취할 수 있는 훈련이 요구된다. 이는 먼저 새 창조에 관여하시는 창조주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은총에 대한 우리의 의식 내에서의 영적혁명을 요청한다.
변혁의 길은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벧후3,13)을 구축하는 살아있는 예술이다. 평화와 아름다움, 정의와 자비, 차이가 존중되고 경축되는 삶을 추구하는 곳에 하느님의 영이 계신다. 성령은 또한 생태적 조화와 지구적 문명의 재창출에로 공동창조자인 우리를 부르신다. 이는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예언자에 대한 보편적 소명을 뜻한다. 예언자는 불필요하게 겪는 고통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며, 비관과 냉소와 절망에 개입을 하며, 억눌린 자들의 분노를 변혁과 새 창조의 길로 재 순환시킨다. 이는 세계를 종살이와 억압에서 자유와 정의로 변혁시키라는 소명이다. 이는 각자의 삶과 전문직 내에서 예언자이기를 시작하라는 초대이다.
창조영성은 지구의 약자들, 아나윔들을 위한 영성이다. 여성, 토착원주민, 동성애자, 장애우, 제 3세계 가난한 이들은 본성과 창조계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기존의 억압적인 영성에 의해 이들의 존엄과 정의와 축제를 차단하는 이념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지배계층에 의한 타락-구속의 모델의 이념화). 상상력은 새로 낳은 신적 힘을 지닌다. 창조영성은 약자들의 상상력을 촉진하여 신적 에너지를 풀어 놓아 자기 세계를 재 창조할 힘을 부여한다. 아나윔에 대한 관심의 이면에는 우주적 상호의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존재한다. 이 상호의존 의식속에서 자비가 깨어난다. 자비는 상호의존의 의식만이 아니라 상호의존의 삶을 수행한다. 이 자비의 실천은 축제와 정의실현 속에 구현된다. 축제는 에로스적인 가치(관계하기, 결합하기, 어울리기, 접촉하기, 동참하기)를 놀이로 표현하고, 이 표현을 통해 무력감과 분열이 치유된다. 에로스적인 경축이 일어나면 정의의 시대도 열린다.7) 남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된다. 이는 에로스적인 축제는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체험, 불의로 고통받는 희생에 대한 눈으로 보고 직접 접촉하는 열정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변혁의 길에서 죄는 돌볼 줄 모르고 무감동한 태만, 열정의 상실을 뜻한다. 우리 삶의 축제와 정의 실현을 위한 자비의 결여인 것이다. 변혁하기를 위해 상상력과 예술적 재능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변혁의 길을 거부하는 셈이 된다. 이원론에 근거한 폭력이 인간적, 성적, 인종적, 경제적 착취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개인화한 구원은 창조계의 불의에 대한 냉담을 가져온다. 자비와 정의의 실천은 새 창조, 즉 하느님의 백성의 새 탈출, 새 해방을 표출한다. 이 변혁의 길은 모든 사람을 새 창조의 도구로서 정의와 변혁의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도록 초대한다. 자비와의 접촉함 그리고 에로스적인 경축은 우리에게 힘을 부여해 준다.
창조영성, 그 의미와 내용 :: 2008/04/23 07:31

창조영성의 의미와 내용
학문과 신앙의 스승이었던 프랑스의 도미니크 사제이자 유럽의 해방신학의 할아버지이며 노동자 사제운동을 주도한 세누(M.D.Chenu)가 추구한 신비주의, 예언, 영성, 예술 및 사회적 정의를 결합하는 노력을 물려받은 매튜폭스는 창조영성이 신학이 근본주제이며, 여기에 근거하여 자연과학과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기에 그의 여러 저술들이 이 창조영성을 초점으로 하여,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고, 토착원주민, 페미니즘, 현대과학으로부터 얻은 통찰을 기초로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로서 신학적 틀을 구축하고, 생활에서의 실천가능성과 적용능력을 실험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매튜 폭스가 말하는 창조영성에 있어서 창조는 모든 공간과 시간을 말하며 그 핵심에 있어서는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본다. 존재는 관계에 관련되다. 그 관계라 함은 “관련됨, 교제함, 응답함, 내버려둠, 존재함이 나선형으로 움직이고, 춤추고, 쭈그러지고, 분출되고, 달려가고, 놀라는 행위”인 것이다.1) 며, “존재함(isness)이 하느님”(에크하르트)이기에 모든 창조는 신성(Godhead)의 자취가 된다. 따라서 모든 관계는 거룩하다. 창조는 신비가가 깨닫게 되는 내용이며, 경외로 충만하다. 그리고 영적인 것은 살아있는 것으로서 영성은 “생명이 충만한 길, 영이 충만한 삶의 길”이다. 따라서 영성은 경험과 실천의 길이다.
창조영성은 타락-구속의 영성이 4세기 어거스틴에 의해 시작된 것과는 달리, 히브리 성서의 야휘스트 전통에서 출발하여 지혜문학, 예수의 설교에서 발견되어진다. 이는 또한 중세 신비주의자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프란체스코, 힐데가르드, 메히틸드, 쿠자누스 등등-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따라서 창조영성은 우주와 함께 시작한 가장 오래된 전통이라고 매튜 폭스는 주장하고 있다. 기존의 영성이 희랍의 영과 물질의 이분론적 도식에 근거하여 물질을 부정적으로 보고 쾌락을 제한하며 영적인 것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면, 창조영성은 히브리의 야휘스트 기자의 “좋았다”는 선언에 따라, 생을 선물로 즐기고 나누며 감사하며 이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긍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타락-구속의 영성이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사유를 중심축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면 창조영성의 근간은 원복(original blessing)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창조영성이 회복하고 재건하는 역동적인 삶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2) 우선적으로, 새로운 우주창조 이야기로서 이는 인류와 자연을 하나의 가족으로 상호연결하는 경험이다. 여기 존재한다는 놀라움과 경외를 각성시킴으로 사소함, 산만함, 중독 등에 덜 종속시킨다. 모두의 기원(origin)은 거룩하며, 따라서 우리의 운명도 공통의 기원의 공유와 마찬가지로 함께 하며, 타자에 의존해 있고, 모두가 구원받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다음은 신비주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다. 새로운 창조이야기는 우리가 신비로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190억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몸의 조직, 한 계절당 6백만 나뭇잎을 생산하는 누릅나무에 대한 이해는 놀라움과 경외를 촉발시킨다. 셋째는 심층적인 종교적 일치운동(deep ecumenism)이다. 각 종교의 교의와 제도의 차이보다 공동의 지혜에 대한 욕구가 일어나며, 새로운 우주 이야기 속에 있는 심미적인 우주적 제의에로의 초대와 지구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공동의 노력을 이끌어 낸다.
또한, 창조이야기는 인간들을 새로운 역사적 비전의 공동창조자로 초대한다. 인간의 역사를 우주 역사 자체 내에 새롭게 정초시킴으로써 지금까지의 절대성을 누리던 인간의 이념, 제도, 국가, 종교에 대한 상대성을 보게 하며, 신비주의자, 예술인, 여성, 성적 소수인 등 목소리를 갖지 않은 자들을 역사의 주체로 초대한다. 특히 창조영성은 예술의 상업화와 세속화라는 소외로부터 우리 모두 안에 있는 예술가를 불러낸다. 자신의 창조성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힘이 방출되고 상상력의 도움으로 모든 사회의 지치고 병든 구조에 관건인 자아의 재생을 촉진시킨다.
이밖에도 창조영성은 인간사이의 정의만이 아니라 지구정의(geo-justice)를 주장하는 자비의 실천을 강화한다. 이는 정의를 위한 투쟁을 신비주의와 연계시킴으로 발현된다. 피조물이 신성의 살아있는 이미지로 나타남으로써 예배가 살아있게 되고, 예배는 과학, 신비주의, 예술이 함께 함으로써 깊은 치유와 힘을 북돋우게 된다. 창조영성이 영혼을 확대시키는 결과로 상상력이 증가하면서 삶에 대한 용기가 증가하고, 원죄가 아니라 원복(original blessing)의 관점에서 생을 선물로 받아들여 내면화된 억압과 자기 증오를 종식시켜 은총의 길을 연다. 이는 결과적으로 공허와 지루함으로부터 생겨난 마약과 알콜 중독을 극복시켜, 젊은이들로 하여금 다시 위대한 것에 고취되는 우주적 모험에 나서게 한다.
창조영성을 통해 역사를 넘어 이제 우주가 집으로 인식되고, 질서와 정의의 장소로 존중될 때, 이 새로운 집에서 사는 생활 규칙들이 있다.3) 첫째는 풍성히 거져줌(extravagance)이다. 자연은 다산적이고 태양의 에너지의 예처럼 자연은 거져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손을 펴고 우주처럼 큰 영혼으로 타자에게 줄 수 있는 윤리적 요청을 일으킨다. 둘째는 상호연결성이다. 초신성의 폭발이 우리 몸의 세포와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 모두가 서로의 부분이어서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응답하게 되어있다. 셋째는 확장으로서 우주가 확장하고 있듯이, 사랑과 용기를 통한 가슴의 확대가 필요하다. 인종주의, 계급주의, 성차별주의, 종파주의 등의 차별은 가슴의 크기를 확대하는 데 실패함으로 일어난다. 다섯째는 다양성과 창조성이다. 우주는 다양성과 상이함을 축하하며, 우주적 상황 안에서 자비, 정의, 조화를 향한 창조성이 요구되어진다. 여섯째는 공동체성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공동체에서 살고 성장하며 협력적인 관계를 가진다. 생존은 적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동체에 적합한지를 배움으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희생에 대한 재인식이다. 우주는 먹고 먹힘의 순환을 가지며, 이는 경외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축적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음식으로 살고, 먹음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희생이 요청된다.
창조영성은 고전적인 기독교신앙의 3대 항목인 창조, 구속, 성화에 대해 우주론, 해방, 지혜의 입장에서 재해석한다. 우주는 창조자 하느님을 계시한다. 창조자는 계속 진행하는 행위를 통해 미와 힘으로 우주를 채우고 계신다. 우주론은 과학, 신비주의, 예술에 의해 이해되어지며, 하느님은 예술가 배후의 예술가이시다. 예언자로서 예수는 모든 이들을 예언자로서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가르치신다. 예수의 우선적인 관심은 해방의 축복이다. 그리고 우리안의 신성은 하느님과의 공동창조자일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약자에 대해 자유를 선포하고 간섭하는 예언자적 삶을 수행한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다. 이는 우주적 영이자 녹색의 영, 새창조의 영, 그리고 생산, 포용, 춤의 페미니스트 영, 에로스와 파토스의 영이기도 하다. 이 영은 고통받는 모든 피조물을 통해 지혜에 대한 갈구를 한다. 하느님은 우주의 자기-조직적인 마음이며 분리되지 않는 일치를 유지한다. 그러나 지혜는 우주론과 해방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활동할 수 있다.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