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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진정한 적은 폭력과 증오 그 자체이다 :: 2010/07/06 10:07

            우리의 진정한 적은 폭력과 증오 그 자체이다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도 어느 듯 60년이란 세월을 맞았다. 천안함 사건도 이제 100일이 지나고 있다. 민족을 고통의 심연 속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들은 그러나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수많은 과거의 진실들은 묻혀 사라져가고 있으나 상처는 현실로서 남아있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고성능 초계비행기와 여러 구축함들이 개입된 한미연합 군사작전기간에 터진 천안함 사건은, 당초 정부의 자신 있어 하던 북한소행의 주장들에 대해 수많은 의혹들이 제기되고, 유엔 안보리에 회부되었으나 기대만큼 국제적 해결의 방법이 나오지 않고 있다.

군사평론가도 아닌 평화운동가로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무력분쟁의 사건들이 갖고 있는 일정한 패턴이다. 그것은 원인과 상황적 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모든 지적인 노력과 에너지를 '누가 저질렀는가?'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보복 히스테리 증상'에 관한 것이다. 한국전쟁, 9.11 그리고 천안함 사건 등이 보여주는 것은 누가 이일을 저질렀는지 이론을 세우고-여기에는 온갖 전문가들이 동원된다― 지목된 상대방은 적/악마로 선전되며, 적/악마로 이름 붙여진 이들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대응방법은 군사적 보복이며 그들의 대량 희생은 정당화되고 희생된 아군은 반대로 영웅화된다. 고통과 희생이 상대방을 가르칠 것이라는 가치관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증폭시킴으로서 이에 대한 준비와 경각심 그리고 폭력적인 힘에 의존하는 안보/안전에 대한 신뢰가 전체 사회를 휩쓸게 된다.

사실상 그 결과는 더욱 심각한 안보환경의 위기와 비효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맹신에 가까운 이런 보복 히스테리와 폭력 각본에 대한 집착은 이미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사회화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보았던 뽀빠이와 부루트스 연재만화가 주는 교훈은 우리의 삶은 전쟁지대이고 상대방과의 유일한 게임은 결투이며 약자인 올리브는 부루트스와 협상하거나 설득의 방법을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하고, 과거의 폭력경험으로부터 아무런 대안적 방법을 찾아내지도 못한다. 오직 부루트스의 폭력에 맞서는 유일한 해결은 상대방이 지닌 똑같은 폭력적 힘을 더 많이 가진 정의의 사도 뽀빠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뽀빠이(이는 정치에서는 국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올리브의 자율성과 상관없이 보호해 주었다는 이유로 사랑을 강요해도 그것은 정당한 대가로 이해될 뿐이다.

보복으로 맞서는 것이 용기이고 약자란 불행한 것이며 강자를 다루는 방법은 힘을 축적하거나 그 힘을 빌리는 것이라는 '폭력의 각본'을 우리는 내면화하면서 자라났다. 그것이 정치군사적이든 개인의 수준이든 혹은 그룹간이든 이 폭력의 각본에 의한 우리 영혼과 사회구조의 프로그래밍은 보편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폭력의 맞대응에 대해서는 그 효능에 대해 한번도 의문시하지 않으면서도 비폭력에 대해서는 그 효험성을 입증하라고 사람들은 질문하며 의심하게 된다. 간디는 10만밖에 안되는 소수의 영국군이 어떻게 3억의 인도인을 지배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수의 특권층 몇을 제외하고는 4천만 이상이 평화를 염원하는 데 어째서 남북문제는 안 풀리는가? 우리가 폭력의 각본에 길들여짐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따라서 대안은 아주 쉬운 것이다. 저항하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협조만 안하면 되는 것이다.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의식적으로 폭력의 각본에 협조만 안하고 살면 그 폭력 시스템과 폭력 문화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우리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입장에 대해 과잉교육을 받은 상태이다. 전쟁지원을 하는 정치인, 법어긴 이를 처벌과 박탈이라는 감방으로 보내는 판사, 전쟁대본의 영화사, 전쟁게임 제조업자, 군사학을 가르치는 수많은 대학, 아이들의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용인하는 부모, 전쟁영웅을 가르치지만 비폭력평화운동의 역사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교사들로 사회는 가득 차 있다. 아니 1년에 26만 명씩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하고 사회로 배출되는 군제대자들이 홍수처럼 사회 속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 이에 반해 평화활동가들은 얼마나 되는가?

사랑, 자비, 희망, 가능성, 자기 초월 등이 우리의 본질적인 자아이고 사회적 안전의 근거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라는 비폭력적인 평화교육이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지지 않는 한 우리에겐 언제나 전쟁과 폭력의 다른 사건들은 이미 예고되어 있다. 평화는 과정이기에 갈등해결방법도 평화이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들의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려면 다음과 같은 간디의 말을 새기고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사랑에 이르고, 평화를 통해 평화에 이를 것입니다."


2010.7.6.

(관악구 봉천동 두리하나공부방 소식지 "함께하는 세상"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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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6 10:07 2010/07/0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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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미움과 증오만 한없이 되새기는 것은 평화를 위한 교회의 기도가 아닙니다 :: 2010/06/22 00:09

“미움과 증오만 한없이 되새기는 것은 평화를 위한 교회의 기도가 아닙니다”

(6.25 60주년 평화기도회에 바란다)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6월 22일 한국 사회에 잘 알려진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평화기도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평화기도회 자체는 평화를 소망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안타까워하는 모든 국민과 기독교인에게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특히 비극적 한국전쟁을 경험한지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해 있는 상황과 최근 예기치 않은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이 고조된 민감한 시기에, 한국교회가 평화기도회를 개최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그러나 막상 이번 기도회 내용을 들여다보면 주최 측이 말한 “평화”라는 말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1. 부시를 불러 평화의 메시지를 듣겠다는 주최 측의 세계관과 역사의식이 우려스럽다.

지난 역사라고 잊기엔 너무도 생생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에 대해 전 세계는 이미 그 과정과 결과를 지켜보고 분명한 평가를 내렸다. 이미 베트남전의 기록을 넘어 미군의 최장기 전쟁기록을 수립한 아프가니스탄 전쟁(104개월)은 미군 사망자만 1천명을 넘었고, 다국적군 희생자를 합하면 1,800여명이 넘으며, 민간인 희생자는 정확한 통계조차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많다. 이라크에서의 미군 희생자만도 4,400명을 넘었고, 역시 민간인 희생자는 추산조차 못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하나님께 평화를 호소해야할 기도회에 바로 이 두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불러 간증을 시킨다면 그게 말이나 될 일인가? 더욱이 그는 재임시절 내내 북한에게 출구없는 적대정책을 고수함으로써 한반도 냉전에 기름을 부었던 인물인데, 그에게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해달라는 것은 주최 측 역사인식의 한계를 한국 사회와 세계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최 측은 부시 전 대통령을 불러 무엇을 듣고 싶은가? 그를 통해 들으려는 메시지가 우월한 무기와 무력으로 원수를 제압해 성취하는 힘에 의한 평화라면, 이는 교회의 이름으로 개최되는 평화기도회의 성격에 본질적으로 위배될 뿐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화해와 사랑의 가르침에 결정적으로 역행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취지로 기도회가 열린다면 이 기도회는 기독교의 이름만 빌렸을 뿐 기독교의 가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하다.

6월은 여러 모로 비극적인 달이다. 60년 전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있었던 달이며, 두 번에 걸친 서해교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던 달이기도 하다. 그리고 2010년 6월, 지금도 여전히 천안함 사태 이후 “전쟁불사”를 외치는 남쪽 당국과 “불바다 발언”을 서슴지 않는 북녘 당국이 쏟아내는 전쟁기운으로 남북의 백성들은 죽을 지경이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나라의 평화를 외쳐야할 교회까지 나서서 증오와 불신, 미움을 쏟아낼 메시지를 들어야하는가? 이제 한국교회는 6.25의 증오를 넘어 평화와 상생을 향한 6.15의 정신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

 

2. 이번 ‘평화기도회’에는 주님의 평화와 자기비움의 메시지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기독교 교회가 주최하는 평화기도회에 어떻게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이 빠져있거나 최소화 될 수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성서를 통해 확인하듯, 예수님 자신도 당시 유대인이 고대하던 정치적 왕이나 혁명적 해방자로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리신 순전한 양으로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세상을 바꾸셨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예수님의 비폭력과 무저항은 그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원대한 계획에 충실히 순종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화는 바로 이와 같이 예수님의 평화의 복음과 사역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번 평화기도회에서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런 적극적인 원수 끌어안음과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이 강조되지 않고 있다.

또 이번 평화기도회는 예상 참석인원이 10만 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중집회 성격을 띠고 있다. 이제는 정치행사에서도 보기 힘들어진 대규모 군중집회 방식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회 자리에서 재현하려는 저의는 무엇인가? 주최 측에서 이번 평화기도회의 성공여부를 몇 명이 모였는가로 가늠하려한다면 이는 이미 그 본래의 의의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이는 공동체로써, 깨어진 세상에 화해와 평화의 도구로, 천국의 대사로서 자신의 맡은 직분을 충실히 감당할 때 비로써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진정 한국교회 지도자들이라면 이제는 조직이나 재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적 감동으로 세상을 화평케 하는 참된 권위를 보여주기를 간절히 호소한다.

 

3. 6.25 60주년 평화기도회 측에 충심으로 제안한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 젊은세대와 기성세대의 골을 넘어 이번 기도회가 주최 측의 개최의도처럼 한반도에서 하나님의 샬롬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여 한국 교회와 사회에 역사적 전환점을 가져오는 기도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또한 기도회를 통해 남북관계의 긴장을 완화하고,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로운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의 역할을 새롭게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이에 이러한 우리의 충정을 담아 3가지 사항을 기도와 실천과제로 담아 채택해 줄 것을 주최 측에 정중히 제안한다.

 

제안 하나: 전쟁 반대 및 비폭력 선언

남북한은 60년 전 무려 3년 동안이나 비극적인 전쟁을 겪었고, 휴전 후에도 준 전시상태로 서로를 끊임없이 증오하며 적대하는 험난한 세월을 살아왔다. 이제 남북한 정부는 다시 “전쟁불사”와 “불바다 발언”을 외쳐대며, 또 다시 백성들을 전쟁의 자리로 서슴없이 내몰고 있다. 우리는 인류의 양심으로, 아니 우리가 믿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를 반대해야 한다.

우리는 이번 평화기도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는 전쟁반대 및 비폭력 선언을 천명할 것을 제안한다. 무엇보다 상대방을 위협하는 양측의 핵 및 대량살상무기의 포기와 사용금지를 촉구해야 한다. 또한 천안함 사건이후 한국정부의 보복 방안의 하나로 고려되고 있는 확성기를 통한 대북 심리전과 같은 시도가 우리민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불상사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우려한다. 한국교회는 이 전쟁 반대 및 비폭력 원칙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과 본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순교를 각오하는 재 결단으로 고백되기를 진심으로 요청한다. 교회는 양측 정부에게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대화로써 문제를 해결해 나가길 원하는 성들의 깊은 우려를 대변하고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화해와 용서의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제안 둘: 군축 요청과 평화공존 실행

이번 평화기도회를 통해 남북 양측 정부에게 더 이상 군사대결을 고조시키지 말고, 군축을 위한 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한국교회의 이름으로 강력히 촉구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교회가 자신을 정치세력화 하여 여느 이익집단들처럼 세상에 압력을 행사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는 남북 양측 정부가 상대를 서로의 위협과 적으로 규정하여 대치하고 있는 현재 한반도 구조에서 적어도 교회만큼은 자신을 버려 평화를 이루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범을 따라, 서로를 향하고 있는 어리석은 총부리를 내려놓으라고 강력하게 권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된 교회의 사명이다. 이번 평화기도회를 통해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 아래서, 우리는 더 이상 무력이라는 우상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세상 앞에 신앙고백으로 증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제안 셋: 화해자 역할 담당

6.25 전쟁이 끝난지도 벌써 57년이 지났고 세계적 냉전구조는 종식되었음에도, 아직 한반도는 동족 간에 만들어 낸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이 땅의 상황을 화해하기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참회하는 마음을 아뢰고, 이제는 교회가 이 대결과 분단의 아픔을 극복해 낼 수 있는 용기 있고 적극적인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요청한다. 세상이 보복과 원수 갚음을 외칠 때일수록, 더더욱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겨 폭력의 악순환을 기도와 비폭력으로 끊는 성숙한 제자도를 세상에 보일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

 

소망을 담은 즐거운 상상력으로

앞으로 또 평화기도회가 계획된다면 비좁은 상암 월드컵 경기장 대신 분단의 현장 휴전선에서, 양측 군인들에게 총 대신 꽃과 떡을 들려주는 10만 명의 기독교인을 상상해본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이제 한국 교회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진정한 평화의 길이 되길 바란다.

 

2010년 6월 22일

 

조지 부시 초청 6.25 60주년 평화기도회를 우려하는 기독인연합

개척자들, 한국아나벱티스트센터, 공의정치실천연대,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일하는예수회/영등포산업선교회/기장생명선교연대/한국기독청년협의회/고난받는이들과함께하는모임/기독교환경운동연대/한국기독학생연합회/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기독여민회/새시대목회자모임/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생명평화전북기독인연대/인천생명평화기독연대/한국교회인권센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청년아카데미, 비폭력평화물결, 새벽이슬, 성경적토지정의를위한모임, 성서한국, 얼굴있는거래, YMCA 생명평화센터, 예수살기, 인권실천시민행동, 통일시대평화누리, 하나누리, 한빛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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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00:09 2010/06/22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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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정화 | 2010/06/23 12:4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도 지지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상처받는 마음에 다시 꽃을 피우는 길, 평화 그 자체의 방식이 바로 평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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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60년 보수교회의 부시초청 대중기도회 성찰(4)-가장 오래 되고도 잊혀진 복음의 핵심-평화와 화해 :: 2010/06/21 23:53

가장 오래되고도 잊혀진 복음의 핵심: 평화와 화해



(이글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세 대형교회들이 시청광장을 빌려 대중평화기도회를 개최하면서 간증자로 조지 부시 전미국대통령을 내세운 것에 대한 대안적 성찰을 위한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주최측은 조지 부시가 술과 담배를 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렬한 증거자임을 그 이유로 간증자의 자격이 있음을 내세우고 있고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요지의 간증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만이 모이는 대중집회를 통해 성금을 모아 북한을 돕겠다는 목적이 이 집회의 정당성을 입증한다고 주최측은 믿고 있다.

보수성향의 대표적인 교회들과 대표적인 교계지도자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대형집회가 언론을 통해 다른 일반 기독교인들과 세계 기독교에 미칠 영향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기에 전쟁과 폭력에 대한 복음적 관점이 과연 진실로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련의 글들을 내놓음을 통해 보수주의가 의미하는 복음의 이해에 따른 진정한 신앙관과 태도를 갖고자 함에 있다. 필자의 글들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제목하에 의해 각기 따로 전개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더 절대적 위치에 있다; 2)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평화; 3)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제자직의 이해; 4) 가장 오래되고도 잊혀진 복음의 핵심: 평화와 화해; 5) 기도와 복음적 삶의 실천)


그리스도를 영으로 만나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영적투쟁은 인간 내면의 영혼의 문제에 있는 것이거나 적이라 지칭되는 어느 특정 인간이나 그룹과의 싸움도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라고 지칭되는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권세와 그 세계관이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엡6:12)

구체적인 대상으로서 혈과 육의 인간이 아닌 권세, 세력의 악신, 암흑세계의 지배자들, 하늘의 악령들에 대한 초점은 더욱 철저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지향하고 있으며 또한 복음은 그런 점에서 명확히 저 세상의 문제가 아닌 이 지상에서의 샬롬의 통치에 대한 방향정위를 갖고 있다. 삶을 제한하고 분열시키고, 파괴하며 소외시키며 분쟁을 일으키는 힘들에 대항하여 생명의 창조자에 대한 경배는 필연적으로 파멸과 죽음의 모든 세력에 맞서는 싸움이라는 영적 투쟁을 동반한다.

이것은 바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당시 유대교라는 거룩의 울타리를 한 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게 치는 유일신교 사상의 그 제의적 철저성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여 분리되어 나오는 실마리가 된다. 거룩의 개념을 제의적 관점이 아니라 평화의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지배통치의 가장 악명높은 십자가형틀을 신앙의 상징으로 그리고 개선문에서 승리의 소식을 전한 '유앙겔리온(복음)'을 평화의 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으로 바꾼 근거가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초대 교회가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깊이 숙고함으로 더욱 명확히 알 수 있다. 초대교회에 있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해는 평화와 관련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는 부활의 현상 즉 '어떻게' 에 대한 아무런 묘사가 없다. 단지 엠마오의 두 제자의 경우처럼 뭔가를 확연히 볼 수 있게 해 준 놀라움의 경험으로 묘사한다. 부활은 새로운 시대(eon)의 시작을 나타내며, 예수가 예표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이 영원한 효력이 있음을 확증해주는 최종적 궁극성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 부활에 참여함으로서 제자들은 참된 평화로서 화해에 이르는 삶을 사는 과정을 밟게 된다. 부활은 이렇게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넘어 그 제자들에게 새로운 시작의 경험과 샬롬의 통치에 따른 삶의 양식의 효력의 궁극성에 대한 확신에 따라 이에 헌신하는 방향전환과 그 평화 능력의 부여받음인 것이다.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요20:19-23)

-성서의 증언에서 보듯이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평화의 선물과 평화에 대한 그들의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경험하였다. 문을 잠그고 있는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이 바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란 말씀이었다. 이 평화의 말씀은 단순히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는 말씀이 아니라 산상수훈과 식탁교제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일련의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샬롬통치의 극명한 표현이자, 궁극적인 예수의 목회의 요체이다. 그 평화를 선물로 받고 이제 평화의 선교를 제자들에게 또한 위탁한다. 이는 다시 평화를 기원하며 그 평화를 세계와 나누도록 평화의 선교로 부르신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평화를 선물로 받고 이를 다시 세상에 부여하기 위한 책임감이 제자들에게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을 이리떼에게 보내는 것과 같은 폭력적인 세상에서 이를 그들이 단순히 예수에 대한 기억과 삶의 모방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결정적인 능력의 부여가 일어난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개인의 능력의 한계와 사회의 악마적 구조로 인한 고난과 억압의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생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어 성취하게 하시는 창조적인 평화능력으로서 성령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이제는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부여받음으로 인한 자유 행위가 된다.

조력자이자 중재자로서 성령이 주시는 평화의 은사를 통해 제자들은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적극적인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것이 바로 화해의 사명을 띤 세상으로의 파견이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생명을 약화시키고, 분열시키고 파괴시켰던 죄가 용서되면서 그 죄가 역사속에 만든 악마적인 구조도 해체되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활동이요 은사이다.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제자들과 그 초대 신앙공동체에 일어난 진정한 실존적인 부활절 사건이 된다. 평화와 화해의 영이 죄의 용서와 악마적인 구조를 해체하는 데 있어 은사를 부여하고 조력자가 된다. 그 성령이 조력자로서 주는 것이 바로 평화 능력임은 그의 고별인사에서 잘 나타난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요14:27)

부활사건으로서 평화능력의 회복은 후기바울사도의 신앙공동체의 증언과도 맥을 같이 한다.

다음 성서의 증언을 유념해 보자.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여기서 명확히 보듯이 십자가의 길은 바로 화평케 하는 것이요 그 목적은 땅과 하늘의 것들이 그와 더불어 화목케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의 초기 제자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평화와 화목이며 이는 주가 "우리의 평화"(엡2:14)라는 신앙고백과 오차없는 일관성을 보여주는 특성이기도 하다. 성령에 의한 평화능력의 회복은 이제 새로운 시작과 자발적인 헌신 그리고 고난을 극복하는 자기 초월성을 부여받으면서 미래를 향한 개방성을 보여주게 된다.

부활에서 나타난 이러한 평화능력의 회복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 수행과 연관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은 단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기 위한 전통적인 신학의 본체론적 해석방법과 달리 초대 제자들 특히 사도 바울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샬롬 통치와 관련된 평화와 화해의 궁극 승리의 증거로 보게 된다. 그러한 궁극수행은 이를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 수행을 통해 곧 혈과 육이 아닌 폭력의 구조와 체제를 상징하는 허공의 권세와 세력들의 무장해제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과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골 2: 15)

여기서 십자가는 제국종교로서 기독교 신학이 지닌 속죄론적 해석방법론이 아닌 악마화하는 폭력의 권세들에 대한 해체로서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 곧 비폭력 수행을 통한 악마적 구조의 무장해제의 비폭력적인 무기가 된다. 십자가의 권능은 이렇게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지배체제의 폭력성을 드러내고 이 폭력성에 근거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과 더불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로 되자, 기독교의 성공과 목표는 제국의 성공과 제국의 목표와 직결되었고, 제국을 보호, 유지하는 것이 신앙의 결정적 판단의 기준이 되었었다. 국가종교로 변질한 기독교 교회는 제국 그 자체 안에 도사린 악마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오히려 제국의 원수들 속에 악마가 있다고 보면서 십자가를 무기로 십자군 전쟁이나, 종교전쟁을 일으키는 구실을 삼게 되었다. 또한 속죄와 구원은 믿는 자와 하나님 사이에 처리되는 개인적인 화해와 영혼내부의 일로 전락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이 세상/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이란 원래 초기 제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에베소 6:12절과 골로새2:14절이 증언하듯이 초대교회의 명확한 관점은 그리스도가 정복한 것은 바로 권세들 자체라고 말한다. 골로새서 2장 13-14절에 따르면 용서는 우리들 자신의 억압과 다른 사람들의 억압에 우리가 공범자였던 것을 용서함이다. 우리가 소외되었던 것은 단지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들만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의 헛된 철학의 속임수와 세속의 원리라는 사회적 규정과 요구들에 따른 사회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폭력을 진리로 가장한 허공의 권세와 헛된 철학의 속임수 그리고 세속의 원리에 대해 십자가와 부활은 그것들을 무력화하는 권능을 지닌다.

지금까지 주류 기독교는 대체로 세상의 권력이 지닌 폭력의 가면을 벗겨버리는 일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때로는 기독교가 정당한 전쟁이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정치권력에 개입하였고, 피의 속죄론을 가지고 속죄의 사회적 이론을 포기하고, 일방적으로 내면화하였으며 하나님 나라를 사후세계나 먼 미래에 투사하였다. 그래서 복음이 지닌 가장 본질적인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상실하였다. 따라서 복음이 지닌 원래의 일반 세인들이 생각지도 못한 혁명적인 요소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지금의 기득권측의 보수기독교는 아예 복음속에 있는 이 혁명적인 요소들을 빼버린 이른 바 '나비는 날아간 빈고치'만을 지키며 숭배하는 현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하면 두려워하며 그 목소리를 내는 자를 십자가에 매달려고 한다. 마치 예수당시 산헤들린의 대제사장이 예수를 고발하면서 '국가나 전체 백성보다 한 개인이 희생하는 것이 더 났다'는 인식속에서 안정을 해치는 평화주장자들의 목소리를 못들은체 하거나 아예 입을 못 열게 '좌익'으로 몰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초대 교회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천사의 소식을 통해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평화의 사역은 시작하였음을 증언하였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후 초대교회는 그리스도는 평화이자 화해임을 사도바울을 통해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 (엡2:14-16)

초대교회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가 바로 여기서 밝혀진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는 평화이시고 화해케 하시는 분이시다는 고백이다. 그분의 능력은 화해의 능력 곧 원수된 담을 헐어버리고, 분리된 자를 한 몸으로 만드셔서 원수된 요소를 도말해 버리는 분이며 이것이 그들이 이해한 거룩함의 새로운 이해였다. 이런 증언을 오늘날 다시 되살려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중요한 질문은 이제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원수들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이기라는 말씀이 예수님의 진정한 말씀이라고 믿는다면-신앙이 좋다고 스스로 자평하는 보수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놀랍게도 믿지 않는다- 원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201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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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1 23:53 2010/06/21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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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관련 보수교회 평화를 위한 대중 기도회에 대한 성찰(3)-독실한 기독교인의 이해/제자직의 의미 :: 2010/06/18 21:42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란 -참된 제자직의 이해

한국전쟁60주념기념 대형교회들의 조지부시 초청
대중기도회에 대한 대안적 성찰(3)


(이글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세 대형교회들이 시청광장을 빌려 대중평화기도회를 개최하면서 간증자로 조지 부시 전미국대통령을 내세운 것에 대한 대안적 성찰을 위한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주최측은 조지 부시가 술과 담배를 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렬한 증거자임을 그 이유로 간증자의 자격이 있음을 내세우고 있고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요지의 간증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만이 모이는 대중집회를 통해 성금을 모아 북한을 돕겠다는 목적이 이 집회의 정당성을 입증한다고 주최측은 믿고 있다.
보수성향의 대표적인 교회들과 대표적인 교계지도자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대형집회가 언론을 통해 다른 일반 기독교인들과 세계 기독교에 미칠 영향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기에 전쟁과 폭력에 대한 복음적 관점이 과연 진실로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련의 글들을 내놓음을 통해 보수주의가 의미하는 복음의 이해에 따른 진정한 신앙관과 태도를 갖고자 함에 있다. 필자의 글들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제목하에 의해 각기 따로 전개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다; 2)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평화; 3)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제자직의 이해; 4) 복음의 근본 토대로서 평화; 5) 기도와 복음적 삶의 실천)


 

한국전쟁 60년에 보수계의 대형교회들이 조지 부시를 간증자로 대중평화기도회에 모시는 이유가 주최측에 따르면 그는 전에는 술과 방탕한 생활을 했는 데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종교집회에 나오고 또한 대통령직이후 "복음 전도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해 전국목회자정의평화위원회의 성명서는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독실한 신앙인'이자 '복음 전도사'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배타적 이해를 마치 하나님의 보편적인 뜻인 양 주장하는 신앙이야말로 기독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표적 불신앙의 양상이다. 그렇다면 평화 기도회를 주도하는 일부 개신교 인사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부시의 불신앙은 한국 기독교인과 나누어야 할 신앙의 모범이 결코 될 수 없다. 이에 우리는 평화 기도회를 주최하는 대회장 및 준비위원장을 위시한 주최 측에 신앙적인 회개와 이성적 판단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유엔과 국제사회의 권고와 요청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으로 이라크전쟁을 일으키며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정교분리의 나라에서 정치의 핵심인 백악관에서 조찬기도회를 통해 이런 무력사용에 대한 이념을 강화한 조지부시 전대통령을 신앙의 모범이 되기 때문에 초청하는 그 뿌리에는 두가지 원인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 하나는 한국전쟁이 가져온 부패권력과의 일치와 사회심리학적인 병적인 역사인식 그리고 또 하나는 제자직에 대한 일방적인 영혼구원에 대한 몰입이 그것이다.

한국전쟁은 민족사에 있어서 이조 사대부의 봉건주의, 일제의 식민주의를 45년 해방을 통해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완전히 막고 이승만정권에 의한 친일의 복권과 미군정과 연관된 친미세력의 강화라는 질곡의 역사를 시작하게 만든 분단논리의 지배라는 사회적 심리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만들게 하였다. 그 결과가 '적'과 '동지'의 날카로운 이분법에 의해 승공통일의 적대적 논리와 정치적 기득권의 확보가 좌우합작 등의 평화통일논의 자체도 좌익인사로 숙청하는 흐름을 만들어 내었다. 그간의 화해와 진실 위원회가 그나마 활동을 하여 밝힌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역사의 진실은 북한과의 적대적 상황의 미명하에 저질러진 남한 내부의 수많은 뭍혀진 고통들, 곧 한국전 당시의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예, 노근리), 보도연맹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간첩조작에 의한 공안통치, 선거이슈에 있어서 북풍등의 비이성적이고 반평화적인 상황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이러한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진실의 탐구가 아직도 막혀서 노령화된 생존자들이 죽어가면서 거의 영원히 잊혀져 가는 사건들로 뭍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친일 및 친미 세력의 상호결합의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한국전쟁을 통해 한국교회는 서방에서 오는 구호품 배급의 중요 통로로서 구실을 하였고, 정치적 엘리트들과 연계된 목사들의 기득권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에 대한 방향이 설정이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이 낳은 사회심리적 불안을 이용한 강력한 안전의 메시지로 커진 대형교회들의 비판적 성찰없는 추종과 '적'으로서 공산당에 대한 징벌이라는 집단의식의 형성에 신앙이 이념적 수단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전쟁의 아픔은 '적'에 대한 공포와 증오의 감정을 생산하였고, 따라서 정권의 유지차원에서 저질러진 수많은 사건들은 '좌익'과 연관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그에 대한 진실의 탐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심정적 장벽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국교회의 대부가 되었던 일제식민통치하에서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가르침의 영향도 무척 컸었다. 이들은 일본의 한국통치 문제시하지 않고 영혼의 구원에만 집중하기로 사전약속을 하고 들어온 상황이어서 이들에 의한 복음의 이해에 대한 왜곡이 처음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문제에 언급하지 말고 술/담배, 방탕한 것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이 중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초문제가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인 삶의 변화에 대해 중요한 표준이 된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앙에 있어서 반공이데올로기의 수용만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전도사역할을 하였다. 과거 승공통일에 대한 수많은 대중집회와 현재에도 이루어지는 일상집회에서 이루어지는 북체제의 몰락에 대한 기도와 설교들의 홍수가 이를 말해준다. 필자가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북한을 두둔하자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적군과 아군을 동시에 비인간화하고 둘 다 동시에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지 '적'만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결과는 봉건주의와 일제식민주의의 잔재에 대한 역사청산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오히려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치와 일상에서 '적'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을 이용한 체제 안정을 돕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있어 '저놈은 빨갱이다' 그리고 '빨갱이 같은 놈/짓'은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원인분석을 못하게 하고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주변에서 어린 아이가 울 때 얼르기 위해 "빨갱이가 와서 잡아간다"는 말, 그리고 "말 많으면 공산당이야"라는 일상 언어에 푹 젖을 정도로 많이 듣고 자라왔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렸을 때 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보급시킨 참전부대의 군가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음악시간에서 그리고 영화를 볼 때 곧잘 신나게 따라 불렀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또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와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을 목청껏 불렀던 그 시절에 내 주변에서는 그 아무도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 없었고 나 또한 남자로서 그런 길이 마땅하다는 전의(戰意)를 어린 시절에 다지고 조회시간에 가진 '국기에 대한 맹세'시간에 이를 되새기곤 하였다.

이러한 한국전쟁이 남긴 전쟁 상흔의 비극적인 결과로서 군사문화의 일상화이외에도 더욱 큰 역할을 한 것은 선교사들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한 한국 교회가 지니고 있는 '독실한 기독교인'에 대한 왜곡된 신앙관이다. 필자가 여기서 주지시키고자 하는 것은 이미 기독교는 태생이 로마제국의 정치적 극형인 "지배와 통치"를 위한 십자가형을 기독교는 "평화와 화해"의 십자가로, 그리고 전쟁에서 적군을 함락시키고 말을 타고 달려와 개선문에서 알리는 승리의 소식에 대한 '전쟁 승리의 전언'으로서 '복음(유앙겔리온)'을 평화(샬롬)의 통치에 대한 전언으로서 바꾼 데서 유대교와 분리하여 초대기독교가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당시에 정치적으로 적과 반란자를 처형한 형틀로서 십자가와 승리의 소식인 복음을 사랑의 통치의 복음으로 바꿈으로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기존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전쟁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과 대안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적으로 공개하며 사는 것이 제자직의 근본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말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의 표준으로서 주초문제의 해결과 방탕한 삶의 끊음이라는 개인적인 사적 영역에서의 의지의 변화는 십자가를 공격의 무기로 삼아 다른 사람/집단/국가를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 아무런 윤리적 민감성을 갖지 못하는 엄청난 착시현상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산상수훈을 통해 제자직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며-예, 애통, 의에 주리고 목마름, 화평케 함, 의를 위해 박해받음- 또한 <열매로 그 사람을 안다>(마 7:16)고 말함으로써 '독실함'의 의미가 하나의 심정적 변화만 아니라 관계적이고 구조적인 사랑과 헌신의 공적 증언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제자직이 공적 증언과 관련되어 있다는 분명한 증거는 산상수훈의 사회에 대한 '빛과 소금'역할로서 제자직과 예수님의 최후의 계명으로서 적극적 사랑의 계명을 들 수 있다. 다음의 예수님의 말씀을 숙고해 보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4-35)

위의 말씀의 핵심으로서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과 제자가 해야 할 분명한 일은 하나의 문제로 통합되어 있다. 그것은 전자의 경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은 스스로의 기도나 예배에 의한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빛이 남에게 비추어 타자가 나의 착한 행실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나는 영광을 하나님께 영광을 진정으로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직접적인 길이 아니라 간접적인 길인 타인이 내 행실을 진실로 미쁘다고 동의할 때나 가능해 지는 타자-동의의 길이외는 없다.

두 번째의 경우 제자의 길은 신앙과 헌신의 길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 상호 사랑의 주고 받음에 근거하며, 그것을 통해 남들이 우리에게 신뢰를 주고 인정을 해 줌으로써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제자직이 자신의 신심이 강함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타인이 나의 타자에 대한 사랑, 서로간에 이루어진 사랑의 관계를 보고 비로소 그들이 날 인정해 줄 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따라서 자신이 아무리 많은 기도시간을 보내고 물질적 봉헌을 바치고 하늘을 놀래키는 확고한 신앙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참된 '독실한' 제자직의 근본에는 미치지 못한다.

예수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 두 말씀을 숙고할 때, 제자직은 빛과 사랑을 남에게 베풀어서 남들이 참으로 인정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다. 예배와 헌신의 자기-의의 세움은 아무런 제자직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과 타자에 대한 나의 사랑의 관계가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 되며 이것이 당시에 신앙에 엄격한 준수를 지켰던 유대교의 율법학자들과 확연히 구별되어지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창조'의 근본이며 새로운 복음적 인간성으로 예수와 초대교회가 증언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유는 희생이 뒤따른다"라며 신념이나 신앙이 다른 자를 증오하거나 징벌하고자 하는 행동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어도 그것은 '겉 그리스도인'의 이방인다운 행위이다. 참된 독실한 기독교인은 빛과 사랑에로의 독실함을 놓치 않는다. 그래서 맘몬과 강제적 힘의 사용에 대한 숭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교권주의의 제왕적 통치로서 목회가 아니라 섬김의 삶으로 자유로워진다. 그 어떤 희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이름으로 위하는 자유이름의 배타적이고 자기 독선적인 행위는 성서가 말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의 본질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정도로 멀다. 자신의 자폐적인 교리 신조를 지키기 위한 자유를 위해 자신과 다른 종교적 타자를 징벌하고,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의 이름으로 테러를 일삼는 것은 독실한 것이 아니라 독선적인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자유를 말하자면 오직 바울이 말한 바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곧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안에 사는 것이다"라는 비-에고적이고 화해와 평화의 주의 샬롬의 통치 안에 내주하는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 폭력의 노예가 지닌 강제의 자유가 아니라 화해와 사랑의 영에 의해 지배되어 서로가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요 10:10)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실로 독실한 기독교인의 자유이자 신앙의 실천 내용이다.

어째서 보수주의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교회라는 안전의 공간에서만 위력을 발휘하시는가? 폭력과 지배가 있는 세상적 삶에 있어서 어째서 하나님은 무력하시고 활동을 못하시는가? 연대, 평등, 개인의 주체성, 사회정의, 자율성 등에 하나님은 어째서 힘을 못 불어놓고 있는가?  어째서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은 적을 발견하는 데 재빠르고 그들을 저주하고 징벌하는 데는 재빠르면서도 상대에게서 있는 하나님 형상이 작동하도록 하는 데 왜 그토록 아이디어가 없는 것인가?  왜 그들의 신앙의 '독실함'은 남을 정죄하는 데는 민감하되 남과의 화해와 일치에는 그토록 살벌한 것인가? 혹시 스스로 독실하다는 자기 의의 주장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워야 할 것을 망각하고 그리스도를 이제는 가르치려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니면 아직도 복음의 본질은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견해를 종교적 신조로 만들어 뒤따르는 엉뚱한 방향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닌가를 이번 한국전쟁 60년을 맞아 깊이 성찰해 보고 참회해야 할 때이다.


20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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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8 21:42 2010/06/1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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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아 변선환의 말기 종교해방신학의 새로운 전환 고찰 :: 2010/06/11 23:27

일아 변선환의 말기 종교해방신학의 새로운 전환 고찰

-제 3토착화세대의 도전에 대한 긍정적 응답-


2010.6.14. 동서신학포럼
                                                                                     박 성 용


들어가며

1. 종교재판과 변선환 박사의 사상의 전환

2. 변선환의 텍스트이외의 수업 이야기로부터의 통찰

3. 제3세대 토착화신학자들의 도전과 수용

4. 변선환 종교해방신학의 변천과 지향성

5. 타자의 주체화로서 종교해방신학

6. 해방과 변혁을 위한 종교해방신학

7. 토착화 제 3세대의 질문에 대한 응답

나오며

 

 

들어가며

변선환 박사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15주년이 되는 금년에 제 3세대에 의해 토착화신학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다시 일어나게 됨으로 인해, 이러한 도전에 의해 필자 자신도 2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입장을 다시 정리하게 된 것을 퍽이나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81년부터 감신에 들어와 87년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일반 수업과 연구실과 자택에서 개인적으로 여신 학습모임을 중심으로 옆에서 본 나의 인상은 그때만 해도 수많은 학자들의 나열에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종종 하신 말씀인 "내가 변씨인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은 조지는(?) 신학이다," "나를 징검돌로 건너라"의 예에서 보듯이 그는 칼바르트주의자에서 시작하여 실존주의 신학, 토착화신학, 종교다원주의, 종교해방신학을 거치는 대화의 신학자이자 끊임없이 자신을 일신해 나가는 지적인 구도(求道)의 신학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해석도 여러 방향과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고 이것들이 또한 학문적 토양을 풍성하게 해 주는 데 공헌을 하고 있다.

최근의 일련의 토착화 신학 및 종교해방신학의 비평적 담론에 있어서 변박사께서 이루어 놓은 업적과 더불어 한계로 지적되는 것은 필자가 소화한 나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게 지적인 엘리트의 지적인 유희이지 주장하고 있는 종교해방신학이 얼마나 실천성을 답보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에 있다고 본다. 고등종교간의 사상적 영적인 '천상의' 대화가 자칫 가난과 억압이라는 이 지상적 삶과 유리되어 종교성의 이름하에 민중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과 현실에 대한 변혁담론이 빠진 내면의 영역에 치우쳐 있지 아니한가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필자는 이런 비판이 변박사의 종교해방신학에 대한 오해임을 밝히고, 동서신학포럼에서 제기된 제 3세대 신학자들의 비판적 담론을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이 논쟁에 대한 응답으로서 제시한 2세대 신학자인 이정배 교수의 '얼'중심 기독론과 최범철 선생의 부자유친의 신학이 한국적 토종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창조적인 작업이지만 자기 존재의 변혁의 우선성과 실천의 뒤따름이라는 도식이 자칫하면 변박사가 피하고자 했던 '존재신비주의'와 '자폐적 초월주의'라는 환원주의에로의 길에서 나오는 데 어려움을 지닐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이러한 나의 주장에는 변선환 박사가 실천성에 대해 매우 중시했다는 것과 우리가 참고로 하고 있는 80년대 중반의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및 아시아 신학의 형성에 관한 논문들과는 달리 정치부흥사들의 정죄를 받고 이단시비와 더불어 감리교로부터 축출을 당한 90년대에 있어서 그분의 관심과 방향이 새롭게 달라졌다는 나의 신념에 기인한다. 특히 서거 1년전의 "민중해방을 지향하는 민중불교와 민중신학"(1994)은 변박사가 지향하던 속마음과 학문적 지향성의 진심이 확연히 드러난 결정판임을 필자는 여기서 제안하면서 후 세대가 이를 '징검돌'로 하여 다른 징검돌을 놓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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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1 23:27 2010/06/11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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