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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본질은 화해사역이다 :: 2010/12/16 10:08
복음의 본질은 화해사역이다
2010.12.16.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참고본문: 마태 18: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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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공동체가 기존의 유대교와 로마가 지향한 사회적 질서와 이념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게 된 것은 바로 군사적 정복과 지배에 의한 부와 질서로 대표되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나, 거룩를 향하는 길로서 종교적 제의에 치중한 유대교와는 다른 제 3의 길로서 거룩에 대한 비전을 예수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 화해, 비폭력, 평화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의 발견인 것이다.
산상수훈은 화해의 제자직에 대한 핵심을 표현하고 있고 단순히 일반적인 진술로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점점 더 구체적으로 그에 대한 방법과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서기관과 율법학자들보다 나은 '의'로서 화해에 대한 제자직의 사명을 삶으로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대게 예수의 담화는 비유를 통해 모호하게 전달되지만 화해에 대한 권고는 매우 직접적이고 명료하다. 그 중의 하나의 예가 바로 5장 44절의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라는 말씀이다.
마태가 가르치는 예수의 제자직의 핵심이자 가장 힘든 훈련과정은 바로 화해사역에 달려있다. 소금과 빛, 제단앞에 오기전에 갈등의 해결, 상대방 판단이전에 자신의 들보를 보라는 등의 예화에서 보여지듯이 화해의 사역은 새로운 예수 운동의 정체성의 근본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18장에서 더욱 철저해지고 구체적이게 되며 분명해진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의 삶의 목표는 화해를 이루는 삶에 달려있고, 갈등과 분리된 자들의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사역에로 부름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는 명료한 인식의 공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교회는 예수가 화해에 대한 실천의 타당성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현장에서는 가장 실천 가능성이 낮는 과제로 설정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앙생활에서는 가장 등한히 다루어지는 게 바로 이 화해에 대한 것이다. 더욱이 이 본문은 그동안 '두 사람이라도 합심하여 구하고...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것의 목표가 마치 작은 규모라도 교회의 존재성에 대한 지지로 해석하는 잘못된 오류를 범해왔지만 실제로 이것은 다름과 차이를 지닌 갈등 당사자들의 화해에 대한 사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본문은 실제로 갈등과 분쟁에 대한 화해의 중요성과 그 실천 방법 그리고 단순히 문제해결에 대한 윤리적 권고를 넘어선 새로운 거룩의 길로서 화해가 하나님을 대하는 방식이라는 초대교회의 새로운 통찰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본문에 따라 아래와 같이 갈등해결과 화해사역에 대한 통찰을 이해할 수 있다.
1. 상대를 향해 직접 나아가기: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우리는 갈등을 직면할 때 상대에 대한 비난과 적 이미지를 갖게 됨으로써 상대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비난의 행위를 마주한다는 것이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경찰, 사법당국)가 대신 처리해주기를 원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한 이유나 내 고통에 대해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도 이를 통해 배워야 할 삶의 교훈이나 인간적인 고통의 나눔을 잃게 된다.
갈등의 상대/적과의 등 돌리기가 아니라 직접 상대를 향해 나아가는 기회로 가지라는 것은 따라서 매우 어려운 과정을 포함하며 이는 그리스도의 요청이다. 여기에는 상대를 적으로 이미지화하거나 비난하는 메커니즘을 단절하는 인식적 실천적 요구가 담겨있다. 상대를 향해 나아가기는 갈등과 충돌에 직면하여 우리가 본능적으로 자동 응답하는 맞싸우기, 회피하기 혹은 얼어붙기와는 다른 적극적인 비폭력적인 대응인 것이다.
상대방을 향해 직접적으로 나아가기는 증오와 폭력의 근본인 적 이미지의 고착화에 대한 치유를 전제로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쌍방향의 인식적 공감이 따라온다. 하나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내 자신의 감정과 선입견을 자각하고 이를 인식하기를 통해 자기 연결(self-connection)과 자기 공감(self-empathy)의 실천이 요구된다. 또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편견과 감정을 인식하고 낯선 자, 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적 이미지 과정(enemy image process)를 해체하여 상대와 연결하는 쪽으로 자신을 방향지우는 과정이 또한 요청된다. 이렇게 자신안에 있는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상대에 대한 증오와 비난의 이중적인 판단작용을 정화시켜서 자신에 대한 연결과 상대에 대한 연결을 갖는 것이 첫 번째 상대방에게로 다가가기에서 이루어지는 갈등 해결의 작업이다.
회피하기, 맞서기 혹은 얼어붙기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적이미지 없이 상대에게 나아가기는 어려운 거대한 도전이다. 자기 방어와 비난 그리고 정죄의 태도가 없이 상대방과 연결하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따라서 "기도로 충만한 연약성"(Prayerful Vunerability- 존 폴 레더락의 『화해를 향한 여정』에서 사용한 용어)없이는 불가능하고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영적 훈련인 것이다. 양심(conscience)이란 용어가 말해주듯이 나와 상대의 눈으로 보는 (con-science= see together) 영적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공간을 허용하는 새로운 의식(들음과 배움의 자세)을 창조하게 된다. '직접가라' 이것을 행하는 것은 지상의 삶에서 깊이를 드러내는 영적 과정이며 이 깊이는 상대방과의 만남을 통해 온다.
2. 증인들을 세우기: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증인을 갖는다는 것은 좀더 폭넓은 분별로 연결하기로 인도한다. 여기서 증인이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과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한 더 나은 분별을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하나의 몸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평가나 판단, 조언과 설명하기 등과 같은 일반적인 판단의 논쟁 집단 형성과는 다르다. 여기서 증인됨은 반성과 이해 그리고 경청이 일어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의 형성을 말하는 것이다.
갈등은 나와 상대방이 서로 솔직해지고 투명해 질 수 있는 기회가 되며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작동될 수 있도록 그리고 서로의 입장이 그대로 존중받고, 판단보다는 경청과 이해가 허락될 수 있는 상호연관의 안전한 공간이 작동될 수 있게 된다. 증인됨은 판단과 시비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과 존중에 무게의 초점이 있다. 이것이 수백 년간 퀘이커가 지속해 온 "명료화 모임(cleanness committee)"의 본질이다. 비난과 두려움 그리고 위협이 없이 서너 명이 모인 증인들은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통해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 해결을 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분별할 수 있도록 마치 '작은 새가 스스로 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감싸 안은 손'처럼 전적으로 순수한 지지(holding)를 해주는 둥지가 된다. 그럼으로써 각자 안에 있는 신성한 빛이 스스로를 일깨우고 문제의 본질을 명료히 보도록 안전한 공간을 형성한다.
잘못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경청과 수용의 공간을 증인들이 창조함으로써 각자의 내면의 신성한 빛과 서로 연관된 증인들의 정직하고 열린 질문을 통한 반영해주기가 그 신성한 빛을 더욱 작동되도록 돕는다. 그럼으로써 분별과 이해 그리고 배움이 일어나도록 돕는다. 여기서 증인들은 인도(leading)하는 이가 아니라 수용하고 따르는(following)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어떤 외적인 조언과 첨가 그리고 설명도 부과하지 않고 전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존재로 있기(be fully present)'에서 머물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그런 공간은 그 자체가 거룩의 공간이 된다. 여기에서는 증언자로 있기가 그대로 영적 훈련이 되고 그러한 존재로 있기가 영적인 수행이 된다. 갈등에 참여함은 놀랍게도 영적 수행의 깊이로 들어가는 수행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게 증인이 된다고 함은 누가 옳은 자리에 있는 지 판별하고 가르기 위해 초대받았다는 생각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의 임재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는 거룩함의 현존의 도구가 되기보다는 심판의 도구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여기 증인이 된다함은 전적인 '존재로 함께 있기'를 말하는 것이며 판단이 아닌 연결과 투명함의 공간을 형성하는 상호책임의 직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과보다는 과정(group processing)을 통해 능동적 경청에 따라 상호이해와 명료함 그리고 신뢰의 깊이로 안내받는 길이 된다.
3. 화해는 교회의 사명이자 존재의 목적이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로마제국하에서 일반인의 이슈를 토론하기 위한 회합모임으로서 원래의 에클레시아가 기독교인들에 의해 변용을 거쳐 차용되었을 때, 그것이 로마의 악명높은 십자가형틀이 종교적 상징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차용되었던 것과 똑같은 방향에서 그 의미가 달라졌다. 그것은 바로 적대자와의 논쟁을 통한 갈등의 해결이 아닌 화해와 일치를 통한 신뢰 공동체로서 교회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새로운 에클레시아는 서로 투명해지려는 실제적이고 영적인 친교와 신뢰의 안전한 공간을 창조하며 여기서 차이가 있는 각자가 서로를 만나는 장소로, 그리고 그러한 세속적 공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변형되어진다. 여기서 교회의 의미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고 합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 개인과 전체 공동체 구성원으로 하여금 갈등의 비방어적이고 비폭력적인 공감적 소통을 통해 상호 더 깊은 이해와 배움을 일으켜 성장을 돕는 더 커다란 믿음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목자의 심정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논쟁자와 갈등자를 배제와 소외 그리고 단절과 거리두기가 아니라 갈등의 공감적 해결방식을 통해 거룩한 친교를 이루어나가는 데 교회의 존재 의미가 있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십자가를 정복의 무기로 그리고 기독교를 제국종교로 바꾸기 이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특히 마태 공동체에 있어서는- 교회라는 곳은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의해 전적으로 일반 사회와 로마의 원로회의 등과는 전적으로 질이 다른 조직구조를 형성하였다. 그것은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교회의 은사적 구조가 달랐다는 것이다. 전체는 개인의 갈등과 고통에 대해 예민한 민감성을 갖고 있었으며 성령의 은사인 자비의 실재적인 역동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인은 친절과 정숙해야 하고 갈등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갈등이 일어나면 이것은 교회의 문제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그것의 전통적인 해결은 불행하게도 사제들의 권력과 지배구조를 통한 일방적인 해결방식과 평신도의 입 다물기 그리고 갈등자의 배제였다. 그러나 원래 본문이 제기하듯이 우리가 잊고 있던 것은 갈등에 대한 사역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이자 그것은 영적인 훈련의 방식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화해는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고, 화해와 갈등에 대한 사역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예수의 제자들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갈등을 제대로 다루고 이를 위해 함께 일하고 변형시키는 장소가 된다. 이것이 초대교회가 믿음을 곧 거룩의 길에 대한 이해를 종교적 제의에서 찾지 않고 일상적인 삶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격리, 구별됨, 배제, 차이를 잇는 화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예, “너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5:44) 영적 실천으로 삼은 이유이다.
배제와 차별 그리고 거리두기와 타자의 얼굴을 지우기라는 지배의 수행(practice of dominance)에 대해 화해를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그러한 소외와 고통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잃은 자, 작은 자, 마지막 된 자들을 친교와 신뢰의 안전한 공간으로 초대하여 회복, 이해 그리고 성장에로의 변혁을 일으켜낸다. 이것이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기독교인의 이 지상에서의 영적 수행(spiritual practice in our mundane life)인 것이다. 초기에 직면한 교회 지도력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지금까지 존재하는 평화교회전통은 갈등자들을 불러 화해의 과정속으로 인도하고 이들을 지지하고 화해에 대한 올바른 과정을 밟게 하는 기술과 영적 훈련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신의 인간에 대한 화해로서 성육신(incarnation), 그리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모든 이들의 지체와 몸으로서의 (화해의 상징인) 교회에 대한 인식에 깊이 배여있는 근본적인 태도이다.
4 집요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이방인과 세리같이 대하라는 말은 대부분의 이해에는 이제는 할 만큼 했으니 포기하고 죄인 취급하라는 말로 인식되어왔다. 직접 찾아가고, 증인을 세우고, 교회에서 말하도록 하였어도 말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는 우리 자신들을 스스로 분리해서 서로 간에 선을 긋고 그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말처럼 오해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본문 18:15-20의 앞뒤에 배치되어 있는 예수의 말을 보면 전혀 맞지 않는 말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본문 앞에는 바로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두려운 그리스도의 권고가 있다: “너희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18:10) 그리고 이 본문 뒤에는 가장 실행하기 어려운 예수의 직접적인 강력한 권고가 위치한다: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18:22)
그렇다면 화해할 수 없는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로서 취급하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전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고 자신의 몸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한 담을 헐어 버리시고 화해시켜 하나로 하신”(엡2:14)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에만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초대교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이해에 있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가 가장 중심이라는 점을 유념하고, 본문의 잃은 양 한 마리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끊임없는 용서속에 본문을 배치한 것을 깊이 고려하면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어진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정신에 따라 서로를 다시 보고 연결되는 방법을 계속해서 다시 찾으라는 부름인 것이다.
신뢰와 친교의 공동체 밖에 있는 이들의 대표적인 상징으로서 “이방인과 세리”들을 향하여 그러한 신뢰와 친교의 공동체 밖에 있은 이들을 찾는 길을 선택하고 이들과 관계를 맺고 연결하기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라는 새로운 시작을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권고하고 있고 이것이 마태 공동체가 추구했던 제자직의 중심 흐름이었다. 어떠한 형태로든 이들 ‘보잘것없는 사람들’(18:10)을 업신여기지 않고 다시 관계에로 잇는 연결하기를 추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그들을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즉, 예수께서 명확히 지목하신 것처럼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화해, 비폭력, 평화의 능력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엡2:14)- 따라서 논쟁자, 적대자, 원수라 할지라도 관계와 연결하기를 통해 교제를 이루어 내야 한다. 왜냐하면 단절과 소외는 오해와 무시, 폭력과 다툼을 가져오는 악의 지배의 현실화를 가능하게 하는 반면에 관계와 연결하기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하는 인간성(하나님의 형상)을 촉발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갈등을 피하지 않고 서로 동의하지 않아도 갈등을 향해 나아가는 이유는 에클레시아는 화해의 존재의미를 담고 있고 거기서 갈등은 배움과 성장을 주는 영적 에너지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적대자와 논쟁자가 갈등을 통해 화해하는 그 뜨거운 눈물과 감동의 현장이 하나님의 신실성과 자비의 실재를 경험하게 하는 영적인 곳임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화해의 목적은 관계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회복은 원래 상태로의 복원과는 다르다. 이는 고통의 근원과 잘못된 것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구조적인 것에 대한 이해와 관계에 대한 헌신을 통해 변형되어진 실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곧 하나님, 자신,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이해의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깊어진다. 그 이유는 관계의 치유의 경험을 통해 진리에 근거한 배움과 성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수의 제자직에 있어서 화해사역은 근본적인 정체성을 지닌다. 예수는 뚜렷한 어조로 말하였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지상에서 매고 푸는 것이 하늘과 연관되어 있고, 갈등에 대한 화해사역은 영적 훈련과 이어져 있으며, 그러한 인간적인 일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된다. 이는 예수의 말씀에서 다시 강조되어진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지상에서 합심하여 구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적인 그 어떤 소유나 기존의 교회의 기복적 기도의 내용에 대한 들어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화해사역에 있어서 논쟁자, 적대자, 원수를 향한 관계와 연결을 향한 간절하고도 끊임없는 간구이며 화해를 통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한 화해사역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비록 둘 셋이 모일 지라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은 적은 숫자가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지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새로운 거룩의 길을 따르지는 않고 그에 대한 이해조차 못하지만 예수의 정신에 따라 자신의 삶을 여기에 헌신하기로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치유, 회복 그리고 화해를 구하는 일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와 예수의 사역의 중심이 여기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매는 것과 푸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화해의 삶을 상기시키며, 이 화해사역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임마누엘의 영적 체험이 된다는 명백한 선언을 예수께서 직접 자신의 입을 통해 증거한다. 이는 말씀그대로 진실이다.
갈등이 거룩을 만나는 장소가 된다. 갈등은 거룩한 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것은 갈등이 나 자신과 이웃을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과 평화 :: 2010/09/29 12:58
사도바울이 회심하게 된 배경은 그가 속한 유대경건주의의 흐름을 간직하고서 스데반의 죽음의 충격(돌로 맞아 죽어가면서 평화로운 그의 얼굴과 확신)과 다마스카스 길에서의 ‘바닥(bottom)'으로의 낙마의 경험에서 비닐이 눈에서 떨어지면서이다. 회심의 내용은 비닐같은 것이 눈에서 떨어졌다는 상징에서 표현되는 데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난 평화의 주라고 고백되어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사로잡힌 자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소명을 갖게되고 이는 거룩에 이르는 새로운 길에 대한 깊은 확신으로서 화해와 평화의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그의 회심의 궁극적 터전인 것이다.
그의 회심이 얼마나 독특한가하는 점은 유대문학에서는 오직 한번(다니엘5:2)만 나오는 평화의 하나님이 -주로 '만군의 하나님'이 대세였다-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통해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를 통용시킨다. 바울에게 있어서 평화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형태를 묘사하는 현실성(actuality)이자 힘(power)인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소개는 단순히 그의 내적인 회심의 결과에 의한 주관적인 확신에서 출발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예수 공동체에서 보여준 그의 제자들과 추종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보여준 거룩한 친교식사와 그 친교의 정점인 “평화의 키스”의식의 목도와 그들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삶의 모습에 의한 충격과 공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즉 사도바울의 '평화의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란 고백은 개인의 확신에 의한 창작물이 아니라 부활후 초대교회의 실제 생활모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서신의 머리말과 결어 부분에서 “은혜/자비와 평화”의 문안과 기원에서 보여지는 증거들이 이를 확신시킨다 (예; 롬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살후 1:2, 몬 1:3, 엡1:2, 골1:2, 딤전 1:2, 딤후 1:2, 벧전1:2, 벧후 1:2, 요2 1:3 유다서1:2 롬 15:33, 고후 13:11, 갈6:16, 살전 5:23, 살후 3:16, 엡6:23, 벧전5:14 등).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계시된 하나님이 은혜와 평화의 기원과 근원이 되며 평화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특별한 인식을 갖고 있다.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고 완성하며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직책이라는 의식을 가진 바울은 그의 편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증오가 극복되는 재창조(“새로운 피조물"; new creation)를 주장할 수 있었고, 그런 재창조는 신의 선제적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해의 삶을 살아가도록 회복과 순종이 그 안에서 자라나는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제안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일치시켜 화해와 평화에로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였고 그것이 그에게는 "새로움" 혹은 "좋은 소식/복음"의 진실성의 핵이 된다. 이로써 기독자의 삶은 화해/평화의 중심성, 평화의 주이신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로서 평화, 그리고 통치자와 권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탈지배적인 적극적 비폭력 수행이 그의 사상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예로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서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곧 의, 평화, 기쁨이며 이것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로마의 평화에 길들여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평화에 전렴하라는 권고가 예증이 된다. 이런 근본인식이 있었기에 바로 초대 공동체가 신, 세상, 인간 그리고 신앙 공동체에 대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거룩한 길로서 평화와 화해의 제자직 수행을 제시한 '새로운 길'(복된 소식)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평화의 하나님과 화해와 평화로의 제자직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삶이며 평화가 우리를 하나님깨 나아가는 길을 연다(예; 롬 5:1-11). 따라서 제의의식이 아니라 화해가 하나님에게로의 길을 연다는 것은 예수와 더불어 사도바울의 공통된 그러면서도 당시와 현재에도 파격적인 선언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바로 화해의 사역이며(갈3:15-18) 십자가의 길은 바로 부정의 세력을 거세시키는 부정의 부정으로서 '화해의 사역'의 길이며 그를 통해 죄인과 원수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었고, 자유함의 능력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러한 능력을 주신다(롬 8:6-“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 갈5:22). 즉 하나님과의 평화(롬5:1)는 하나님의 영을 통한 평화와 맥을 같이한다(롬8:6). 평화의 하나님, 화목케 하시는 주에 대한 근본 이해와 이에 대한 존재론적인 통찰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신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2:18) 이는 고전7:15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다른 예; 고전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은 “의와 평화와 기쁨”(롬14:17)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평화는 또한 성령의 9가지 열매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평화는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능력(뒤나미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역은 부활을 통해 더욱 확실히 드러났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셨다” 예수의 부활이 바로 사도바울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징표이기 보다는 평화의 길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결의를 보여 준 사건으로 인식된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화의 하나님이...”(히13,20). 죽은 자로부터 처음난 자이신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요소들은 재구성되고 또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즉 화해와 평화의 길은 궁극적이다.
부활은 어둠과 혼돈의 지배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의 현실성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적 신분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으로서 샬롬의 지배의 궁극성이 확증된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재정립된다. 원래의 창조의도-"보시기에 좋았더라"-가 갱신되고 존재적 질서의 회복과 더불어 평화 능력이 덧붙여져서 회복이 이루어진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 난 자라는 신앙의 인식은 평화의 능력에 대한 근본통찰과 연계되며 이는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에 있어서 부활은 그 초점이 예수의 육체적 소생이 아니라 평화능력의 회복과 그 확증이며 이것이 그가 말한 육과 다른 썩지 않는 '몸'이란 표현의 중심의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오로지 부활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평화의 사역자, 평화의 사신이 될 수 있다. 그러한 평화의 능력은 사도 바울이 표현한 ‘육신’ ‘죄’ ‘죽음’이라는 혼돈(chaos)의 권세에 대한 궁극적 승리이자 탈지배, 탈분열, 탈폭력의 새로운 질서(cosmos)로서 새 피조물로 이끄신다.
이러한 확증의 배경은 바로 예수께서 평화의 본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평화의 사역자이시다(엡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이 확신은 그러한 평화에로의 길에 대한 제자들의 “뒤따름”이라는 헌신을 요구한다. 그것이 또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이에 대한 또다른 예증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화평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몸으로서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렇게 평화에로 부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뒤따름의 권고는 근본적인 신학적 확신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자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의 길을 여셨다는 것이다. (롬5:1-11;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10-11절)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것이다(롬12:18) 이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7);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이러한 철저한 윤리적 비전은 오직 평화가 하나님, 주, 성령의 본질과 하시는 일의 공통된 핵심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자연스러운 발로이기도 하다.
2.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평화에로의 궁극 비전
예수께서 평화에 대한 영적인 불길을 지피고, 사도바울이 이에 장작을 더 넣어 화해와 평화에 대한 현실성을 신학적인 통로를 통해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였다면 바울후기의 제자들인 골로새와 에베소 저작자들의 신념은 이에 대한 우주적 지평을 확대하였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에서는 예수와 바울이 준 영적 통찰이 얼마나 놀랍게 우주적 하모니로 승화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8)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9-20)
에베소서와 골로새는 평화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평화는 단순히 제자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권능은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는”(에베소) 데로 나아가며, 또한 그 ‘세상’은 만물이라는 우주공간에로까지 확대되어진다(골로새). 하나님의 화목 사역의 비전은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평화를 이루는 행동인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분리와 적대가 의미를 잃는 평화의 새로운 현실성과 그 충만성이 표현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뜻하시는 평화의 우주론적 보편성이요 창세기에서 보여준 만물을 가라사대 사건으로 불러서 안식일을 창조의 으뜸으로 정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하신 원창조의 갱생과 회복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행동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것이 창조주의 화목활동을 통하여 이룩된 평화의 중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부활로 이루어지는 새창조는 원창조를 강화하면서 단순히 ‘존재하라’라는 자연생명이 아니라 평화와 화목에 기반한 만물간의 친교(코이노이아)에서 절정에 달한다. 더 이상 지배, 분리, 증오가 없는 평화가 바탕이 된 사회, 평화가 전달되고 평화를 보존하는 사회 그리고 평화로 충만한 우주만물의 친교에 대한 비전이 여기서 보여진다. 이들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비전과 현실을 형상화하는 미션을 받고 있다. 평화의 충만성을 향한 우주적 인간 공동체로서 광의의 교회(에클레시아- 이는 원래 건물의 개념이 아니라 ‘모임(gathering)'을 뜻한다)안에서 만물이 그 구성원이 되고 여기서 대립과 증오가 없는 친교와 일치 그리고 지속적인 화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자의 충만”(엡1:22-23)이며 하나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새로운 통일체이자 그 충만성은 평화의 확장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3. 평화사역의 저항성: 통치자와 하늘의 권세와의 투쟁
이렇게 샬롬의 우주적인 인간공동체에 대한 방향설정은 평화의 역량과 능동적인 비폭력 투쟁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정확하게 평화의 도구로써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에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평화의 복음” 선포가 준비되는 것이다.(엡6:15) 그러므로 이들은 평화의 하나님과 평화이 주에 대한 비전에 있어서 신의 개입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만큼 순진하지 않다. 오히려 예수에 대해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한 교훈은 죄, 육체, 죽음의 권세의 집요함과 그 규모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워 준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 탈지배적인 사회체제의 해독제(십자가)로서 그리고 능력(부활)으로서 작동한다면 싸움의 목표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꼭두각시로서의 “혈과 육”(엡 6;12)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둠과 허공의 통치자들과 권세들(principalities and powers)와의 강력한 대응을 요청한다. 이는 모든 권세의 굴레로부터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해방을 향한 바울의 열망(롬8:18-25)과도 일치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저항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지혜를 시작하게 하고 역동적인 힘을 선사한다.
예수와 바울에서 기인한 평화에로의 제자직은 이 세상 지배체제를 움직이는 주범인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thrones, powers, principalities, authorities)에 대한 식별과 변혁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후각을 지니고 있다. 먼저 골로새서 2:13-15절의 평행댓구법의 병행구조를 분석해보자. 여기서 ㄱ 과 ㄷ은 분사형으로 ㄴ을 꾸며주며 ㄴ은 핵심어로서 행동어(동사)이자 선언적 형태를 보여준다. .
ㄱ.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ㄴ.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셨다
ㄷ.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ㄱ.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ㄴ. 제하여 버리셨다
ㄷ.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ㄱ.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ㄴ.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다
ㄷ.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본문이 보여주듯이 이 세상권력과 허공의 권세는 패배하였고 공개적으로 드러나진다. 제국과 이 제국을 뒷받침하던 혼돈의 하늘 권세는 무력화되고 그리스도가 승리자로 그들을 이기신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외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주시오 승리자이다.” (고전 15:24-38; 데후2:3-11)
에베소서 6:12이하는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제 “평화의 복음”은 단순히 말과 선언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갑옷”이라는 평화로의 전략(strategy)과 도구(tools)를 갖춘다. 현실의 엄격성과 악의 권세의 활동에 대해 단순히 비둘기의 온유함만이 아니라 뱀의 (능동적인) 지혜라는 예수의 요청에 대해 평화의 제자직은 이를 위한 훈련을 요청받는다. 화해직은 이 세상 권세의 증오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전신갑주, 이세상과 같은 종류의 힘과 그들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울 대상은 겉으로 보이는 꼭두각시나 앞잡이라는 2차 대상이 아니라 정확히 증오, 분열 그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허공의 지배세력과 권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화해중재자의 목표는 악의 근원을 응시한다. 악의 현상을 꿰뚤고 그 뒤에서 조종하는 근본적인 세상의 가치관과 그것들의 영적 권세들에 맞대응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진정한 만물의 주되신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모든 공간과 시간위에 세우게 된다. 단순히 기도와 예배하는 시간과 교회라는 공간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만물을 꿰뚫고 만물위에 서야 한다. 모든 적들이 하나님의 발아래 놓여져야 한다. 그러나 그 수단은 상대가 가진 같은 종류의 힘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성에 근거를 둔 비폭력적인 강력한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의 내면성만이 아니라 공적인 체제와 구조, 법과 정치형태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들 속에서 권세의 영적 형상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발아래 복속시키는 변혁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군사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인 것이다.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기이다. 이것은 중세의 십자군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 의, 진리, 평화, 성령은 비무장적지만 강력한 비폭력적인 훈련의 무기이다. 이런 전신갑주가 제대로 내 몸에 맞을 때 악에 대항하여 서는 것이 가능해 진다.
하나님과의 평화와 이웃과의 평화가 유지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영적인 투쟁과 맞섬은 기독교생활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저항은 결코 폭력, 군사적 힘, 혹은 지배를 사용하지 않는다. 진리는 오직 진리에 의해 그리고 평화는 오직 평화에 의해서만 건설된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여 서라고 요청을 받고 있다. ‘평화의 복음’은 이렇게 사탄을 발로 누르는 평화를 성령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부여받게 된다. 평화를 위해 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화를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평화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자직에 대한 축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된다.
(기독교와 평화운동 수업 자료/2010.9.28)
사도 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 2010/09/29 10:17
사도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 화목/화해의 제자직으로서 기독자의 삶
롬 5:1-11: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때를 맞추어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이미 죽으셨습니다.
7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롬 12:17-18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 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러함으로 네가 숲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엡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ㅇ르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ㅇ르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7:15
...하나님은 화평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살전5: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갈 6:14-15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골 1:19-23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엡 2:14-18
14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5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6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평화의 하나님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후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전 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세상 주권과 권세들에 대한 평화의 승리자로서 그리스도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1:17-20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엡 6:12-17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평화의 하나님, 평화의 주 그리고 평화의 삶으로서 기독자의 삶의 통전성
평화의 하나님 우리의 평화로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평화
롬15:33; 16:20 엡 2:14 빌 4:7
고전 14:33; 고후 13;11 그리스도의 평화: 골3:15 하나님으로부터 평화
살전 5:23, 빌 4:9 딤전 1:2; 2요 3장
히 13:20
윤리적 권고: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롭자 우리 서로 평화롭자 모두와 평화롭게 살라
롬 5:1살전 5:13; 롬 14:19 롬 12:18; 헤12:14
고후 13:11,
평화로 결속하라
엡 4:3
평화를 추구하라
딤후1:22; 벧전3:11
히12:14, 롬14:19
** 적의 사랑은 사랑과 평화를 통합시킨다.
마태 제자직의 근본 수행으로서 평화 :: 2010/09/07 15:08
마태 제자직의 근본수행으로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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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감신대 "기독교와 평화운동"에 대한 수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일부 소개이다)
마태복음에 있어 평화의 문제는 강의실에서 설명했듯이 그리 호락호락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적인"(revolutionary- Yoder의 말) 실천이 내포되어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여러 면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두가지만 그 예로 들어보자.
1. '하나님의 아들"의 사용이 어디에, 어떤 상황에 적용되는지를 눈여겨 보라.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Blessed are the peacemakers)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44-45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으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5:9절은 다른 7가지 축복이 천국의 상황과 선물에 대한 것이지만 이것은 신분(identity)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약속에 대한 것이지만 5:44-45은 그 약속의 실천(praxis)에 있어서 동일한 신분의 행위(behaviors)와 연결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이자, 이를 더욱 구체화하자면 "적 사랑, 박해자를 위한 기도"로 표출된다.
이것은 예수 당시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있어서 황제들에게 붙여준 칭호로서 "하나님 아들"에 대한 전복적인 (subvertive)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를 따르는 마태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고백하는 거룩에 이르는 길과 샬롬의 통치의 도래에 있어서 자신들이 누구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정체성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단순히 신분귀속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가 어떠함나타내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를 통해 그 아버지가 어떠한 분인가를 보여준다. 이는 곧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곧 "펴화의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아들들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자기 삶으로 보여준다.
이는 개념과 지성화의 문제, 교리의 정통성-옳은 믿음-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였고 예수는 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했을 때 바로 '거룩의 울타리를 전체 백성에게 둘러 치는" 제의적 공동체의 지향성을 넘어서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 (소금/빛, 예물을 드리기전에 화해하라, 듣고 실천하는 자로서 반석위에 세운 집의 비유, 아버지의 뜻의 지상에서의 실현과 용서의 중요성 등)로서 비폭력적인 평화실천을 강조한 이유이다.
2.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산상수훈의 공간배치는 평화의 수행이 마태 공동체의 근본이었음을 보여준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평화의 근본적인 통찰이자 변혁의 근본적인 힘이다.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제국적이고 군사적인 통치자로서 '다윗의 아들'의 적의 징벌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를 마태는 비폭력적이고 자비로운 '다윗의 아들"로서 변형시킨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왕들이 추구하는 "권력, 기적, 물질적 안정"에 대한 유혹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왕-이거든"에 대한 물리침이었고, 목자의 이미지를 통해 군사적인 영향력을 제거한 마태의 예수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첨부한 파일에서 보듯이 성막 곧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심의 표증에 대한 확인에 있어서 산상수훈의 배치구조에 대한 것이다. 마태의 산상수훈 5장-7장의 구조는 병렬댓구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 의미를 강화하고 이는 그 중심에 서 있는 주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성막뜰->성소->지성소->언약궤->지성소->성소->성막뜰의 과정속에서 산상수훈을 대입하여 보면 확연히 무엇이 "거룩한 분을 만나는 길"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성소부분인 5:21-48 및 병렬댓귀절인 6:19-7:11이 화해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 지상재물로서의 화해 실천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라"-이라는 사회적 실천이 성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소에 해당하는 산상수훈인 6:1-6 그리고 병렬댓귀절 6:16-18이 "은밀한 실천"으로서 구제, 기도, 금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은밀한 이 지상에서의 실천의 핵심속에 언약궤의 부분인 "주기도"가 존재한다. 하나님의 법궤로서 거룩하고 자비로운 그분의 현존을 알리는 이 법괘로서 주기도는 "우리 아버지"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 이라는 하나님의 신분과 그의 일에 대한 것과 그리고 "죄의 용서,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생활실천적인 면이 결합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서 모두의 평등함과 따라서 그분의 자녀됨이라는 비상하계급적인 신분됨과 이 지상에서의 평화의 실천(뜻의 구현, 용서, 시험과 악에서의 보호)에 대한 의지가 명확하게 나타나고 이어서 용서가 법궤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신다"
여기서 보여지는 마태 공동체의 제자직에 대한 이미지는 놀랍게도 단순히 거룩한 분을 예배하는 제의적 공동체가 아니다. 일상의 갈등과 폭력에서 강력한 비폭력 평화실천을 하는 실천적인 제자직이다. 이것이 샬롬의 통치의 도래에 대한 확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개인 생활과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헤롯이 만든 돌로 만든 성전의 제의의식에 기초를 둔 '거룩함에로의 길'을 넘어서 샬롬의 통치로서 삶과 그 샬롬의 실천가로서 자기 신분-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은 서로 이어져 있고 이는 생활을 통해 거룩한 분을 드러내는 길로서 표현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은 직접적인 제의-"신께 예물을 드림"-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길은 없다. 오직 주의 제자로서 자신의 선한 행실이 남에게 보여져서 그들이 직접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간접적인" 방법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마태 공동체가 인식한 거룩한 하나님께 이르는 새로운 통찰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당시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나 목회자들 심지어는 신학자들 조차도 놓치고 있는 혁명적인 인식인 것이다.
질문:
1. 어떻게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들어오면서 얼마나 편안해 하고 있었는가?
과연 그 편안한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2. 2천년전 신화적 시대에 있어 화해와 생활실천이 거룩에 가는 길이라는 유대교내의 이 철저한 개혁주의 운동아-초기에는 분리된 기독교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정말 메노나이트 성서윤리학자인 요더의 말처럼 '혁명적인" 인식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에 당신은 얼마나 충격 혹은 통찰을 받고 있는가?
3. 무엇이 이러한 마태 공동체의 예수사건에 대한 증언에 우리 눈을 멀게 만들었는가? 어떤 장애들이 있어 이를 우리가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가?
2010. 9.7.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 2010/07/11 09:30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
-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우리 현실에 있어 새로운 샬롬의 통치의 실재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그에 대한 삶으로서의 철저한 헌신은 새로운 능동적인 비폭력과 사랑의 공동체를 탄생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함께 형성해 나간 이 비전은 당시 유대교의 신을 만나는 길로서 성전/회당에 의한 거룩한 제의적 공동체나 대안의 주류였던 시온니즘의 무력적 투쟁이라는 열심당 혹은 타락한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정결과 '빛의 자녀'로서의 영적인 수행을 추구한 제 3의 무리인 엣세네파와도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변혁적인 현실을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모시는 것이되, 좀더 적극적으로 산상수훈의 공동체 이상을 따라 삶에서 폭력과 증오의 독을 뽑아낸 적극적인 저항과 변혁의 방식, 곧 자비의 현실화라는 방식으로 통해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심, 권세자를 내치심, 보잘 것 없는 이의 높이심, 배고픈 자의 대접과 부요한 사람을 빈손으로 만드심'(누가복음의 마리아 찬가)과 같이 삶에서 실제적인 변화의 증상을 몰고 오는 새로운 현실성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예수 공동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무기를 들고 대항을 하진 않았더라도 그가 몰고온 새로운 변혁적 현실로서 삶의 방식과 타자와의 관계방식은 이미 통치자에게 위협이 되었고 그는 현 체제의 전복자로서 이미 낙인이 찍혔고 결국은 다른 반란자들 사이에 정치적으로 형집행을 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행위가 지금의 우리 대부분이 추종하고 있는 개인 영혼의 구원이라는 영적 수행의 모범이 아니라 가장 비폭력적인 그의 비전과 실천은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위협과 도전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그러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이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의 핵심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에 대한 혁명적인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영혼의 내면에서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화해와 비폭력의 생활실천-"회당과 성전이 성소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성소(sanctuary)이다"-은 정치사회문화에 샬롬 통치의 증거(witness)자로서 거룩함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의 샬롬 통치의 새 현실성이 얼마나 혁명적인 특성-무리가 놀라 새로운 권위였다고 고백함-을 지녔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명백해 진다.
샬롬 통치의 현실성에 대한 가장 극명한 상징적 실마리는 그의 식탁교제(table fellowship)이었다. 정결법을 어기는 그의 추방된 자들과의 식탁교제는 신적 비전의 철저성과 아버지이신 신의 사랑의 팔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모두를 한 테이블에로 환영하고, 폭력의 한 형태로서 어떤 종류의 배제에도 비판하는 세계관을 창조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inclusive love of God) 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헌신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가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그 당시 사회가 배제한 이들과 함께 공동 식사를 함으로써 가름과 배제의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을 실천하였다. 예수의 비전에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모두를 포괄하시는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한 몸의 모든 지체들이다. 이러한 포괄적 비전은 서로를 신을 한 아버지로 둔 형제자매로 만들고 따라서 '적대자'를 형제자매로 감싸고, 약자에게 힘을 부여하는 비폭력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그의 샬롬통치에 대한 비폭력적 실천은 타자와 주변자(the marginalized)에 대한 보편적 치유에 대한 그의 비전에 의해 심화된다. 생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타자의 기본적인 복지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다. 예수는 항상 돌봄의 서클 바깥으로 내던진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치유의 문을 통하여 공동체 속으로 되돌아오도록 초대하신다. 그는 공동체의 복지와 안녕은 각각 구성원의 복지와 안녕과 상호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니 오히려 가장 약한 자의 안녕과 복지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예수는 개인의 불행과 병이 폭력적 지배와 배제의 이념으로 작용한 불행과 병에 대한 인식 개인적 죄의 잘못이나 그 결과가 아님을 가르쳤다. 눈먼 소경은 자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요 9:3)이고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함"(요11:40)이라는 주장을 통해 예수는 치유와 거룩한 힘을 세상의 거부 받고 접촉할 수 없는 이들에게 확대하였다. 그들은 징벌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비의 수여자라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주체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누구든 복지의 서클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단순히 육체적 몸의 회복만이 아니라 공동체로 불러들임으로서 상호 연결(interconnection)에 있다는 것고 이 상호연결이 거룩함의 알짬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셨다. 상호연결이 있는 곳에 신이 있고, 상호연결이 거룩의 길임을 각인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의 능동적 비폭력을 통한 샬롬의 통치의 또 다른 예는 그의 설교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그분에 대한 접근의 길에 대한 이해에 있다. 십계명에 아직도 흐르는 저 위 하늘의 유일한 만군의 신이자 '우리 신앙 공동체'내에서 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것을 더욱 철저화시켜 그는 신이 사랑이시고 무제한적인 타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안에서 본 철저한 사랑의 종류는 인간의 삶이 보복하시는 하나님에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그것은 성전의 공간을 넘어 또한 우리의 일상과 세상에서 전일(全一)적으로 하는 이 지상적 수행(mundane practice)로 초대하셨다. 그 핵심은 "양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는"(요 10:10) 길에 있다. 이것이 그 근본 뿌리에 있어서 폭력을 정화시키는 영성이다. 늑대와 여우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발톱을 날카롭게 하여 자기 방어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서 있으면서 모든 형태의 죽음과 죽임 그리고 폭력에 확고한 대항을 하며 생명을 위하고 이것이 충만하도록 삶을 투신하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예배의 날, 안식일은 따라서 인간 공동체를 섬기는 데 있어야 하며 사랑의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를 반영해야 한다. 치유가 필요한 자가 있을 때 치유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응답하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 예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그러한 특권적인 날, 성소와 같은 헌신하는 장소에서 어떤 종류의 활동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달려있다. 예수는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한 예배의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그는 또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이들의 공동체 삶의 질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진실로 한 테이블을 공유하며 모든 이의 복지를 추구하는가? 예수에게는 사람들이 예배를 적절하게 볼 수 있기 전에 공동체내에서의 화해에 대한 긴급성이 먼저이며 이 화해가 진정으로 예배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예배하기 전에 이웃과의 갈등이 있다면 뒤로 돌아 즉시 가서 먼저 화해를 이루라는 것이다(마 5:23-24).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포괄시키는 보편적 사랑-비와 햇빛을 누구에게나 허용-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유일한 응답의 길로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랑이 사랑을 가져오고 평화가 평화를 가져온다. 증오와 배제가 거룩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첫 번째이자 궁극적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인 것이다.
지금까지 진술을 요약하자면 예수는 식탁에 모두를 포함하는 것, 모두의 복지와 안녕을 회복하는 치유,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삶으로의 응답으로서 예배라는 새로운 제자직으로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열어주셨다. 이것은 자비, 겸손, 비-보복, 용서, 진실추구, 화해 그리고 자신의 적을 포함하여 타자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이것의 단초는 기부, 금식, 기도, 신뢰,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하나님의 지배에 두는 것으로부터 성장한다.
예수가 제시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그 길이 쉽거나 성공적인 실재가 금방 나타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는 우리가 극도로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 놓여져 있으며 당신 자신이 그것의 희생 제물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완전한 유토피아 사회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꿈을 꾸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신실하게 폭력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도록 초대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의 사역에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우리는 성공하는가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응답하며 그 과정에 있어서 필요하다면 자발적인 고난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중요 요소들 중에는 물리적인 폭력, 법적 소송 그리고 강요된 징집(마 5:39-42)을 대면함에 있어서 보복적인 활동을 종식하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는 전체를 희생하는 한 그룹이나 한 국가의 파괴적인 자기-이익의 폭력적 수행에 대해 능동적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능동적인 비폭력에로의 부름은 그 응답이 폭력적인 행동과 맞대응하기라는 순환의 방식이 아니다. 그의 샬롬통치의 제자직에로의 부름은 누가 관계를 깨뜨리는 데 책임이 있든 지간에 화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정당한 대의하에서 폭력에 대항한 보복과 징벌이 아닌 치유와 관계의 회복이라는 화해를 제시한다고 해서 타협적이고 순응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가 비폭력적인 반면에 그는 동시에 확고하게 대결적이었고 그의 대결적인 행위는 위협적인 결과를-전복과 변혁을- 가져왔다. 그는 일반인이 그를 묘사하듯이 그의 단순한 선행이 악마적인 사람들의 악행들로부터 반대를 일으키게 된 타협적인 희생자는 결코 아니었다. 복음은 예수의 비폭력 수행이 결코 수동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어떤 실천에 대항하는 도전을 개시하도록 하는 그런 확고한 끈기가 있는 변화의 실천이었다. 그는 대중을 선동하고 정치가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몇 가지 점에서 예수는 그의 "혁명적 비폭력"(revolutionary nonviolence-존 하워드 요더의 용어)과 그가 살고 있던 죄 된 세상의 잔혹한 폭력 간에 다가오는 충돌을 명확히 보고 있었다. 이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결정은 비폭력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의 반대자가 그를 거기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공개적으로 그들이 그의 삶을 위협하고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폭력의 아가미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신과 그에 대한 무제약적 책임성으로서-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행위였다.
죽임과 죽음을 촉진시키고 죽임과 죽음의 구조를 지지하는 체제에 대해 기꺼이 자발적인 고난을 통한 죽음의 수용을 통해 죽임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동맹을 단절시키는 신의 명령에 대해 신실한 응답의 표현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비폭력적인 수용에서 예수는 치유하고 해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정확하게는 그가 경험한 증오와 폭력의 살인적인 지배/통치를 역전시켰다. 예수는 저주받고, 주먹으로 맞고, 조롱받았다. 심지어 고뇌가운데서도 그는 그에 대해 사용된 똑같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배신당하고, 친구에 의해 거부당했으며, 징벌 받았고, 옷을 벗기웠으며, 벌거숭이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비폭력적인 응답과 자발적인 고난은 새로운 각성과 신의 뜻에 대한 분명한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명료함이라는 부활을 가져온다. 신의 고난과 예수에서 나타난 신의 보편적 사랑의 철저성은 새로운 영혼의 불꽃을 점화시켰다. 그리스도의 영은 제자들에게 옮겨져서 그들은 이 화해와 평화 만들기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나타난 폭력에 대한 신적인 반응에 대한 그의 제자들의 이해는 이제 자신을 얽매였던 죽음과 두려움을 넘어서 사랑과 진리의 영의 부여받음과 선물로서 자기 생에 대한 자각이라는 신념공동체의 탄생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으로서 평화를 만드는 인간 공동체에로의 부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2010.7.10.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분석표.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