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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제자직의 근본 수행으로서 평화 :: 2010/09/07 15:08

                                              마태 제자직의 근본수행으로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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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감신대 "기독교와 평화운동"에 대한 수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일부 소개이다)




마태복음에 있어 평화의 문제는 강의실에서 설명했듯이 그리 호락호락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적인"(revolutionary- Yoder의 말) 실천이 내포되어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여러 면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두가지만 그 예로 들어보자.


1. '하나님의 아들"의 사용이 어디에, 어떤 상황에 적용되는지를 눈여겨 보라.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Blessed are the peacemakers)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44-45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으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5:9절은 다른 7가지 축복이 천국의 상황과 선물에 대한 것이지만 이것은 신분(identity)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약속에 대한 것이지만 5:44-45은 그 약속의 실천(praxis)에 있어서 동일한 신분의 행위(behaviors)와 연결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이자, 이를 더욱 구체화하자면 "적 사랑, 박해자를 위한 기도"로 표출된다.

이것은 예수 당시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있어서 황제들에게 붙여준 칭호로서 "하나님 아들"에 대한 전복적인 (subvertive)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를 따르는 마태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고백하는 거룩에 이르는 길과 샬롬의 통치의 도래에 있어서 자신들이 누구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정체성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단순히 신분귀속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가 어떠함나타내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를 통해 그 아버지가 어떠한 분인가를 보여준다. 이는 곧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곧 "펴화의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아들들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자기 삶으로 보여준다.


이는 개념과 지성화의 문제, 교리의 정통성-옳은 믿음-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였고 예수는 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했을 때 바로 '거룩의 울타리를 전체 백성에게 둘러 치는" 제의적 공동체의 지향성을 넘어서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 (소금/빛, 예물을 드리기전에 화해하라, 듣고 실천하는 자로서 반석위에 세운 집의 비유, 아버지의 뜻의 지상에서의 실현과 용서의 중요성 등)로서 비폭력적인 평화실천을 강조한 이유이다.


2.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산상수훈의 공간배치는 평화의 수행이 마태 공동체의 근본이었음을 보여준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평화의 근본적인 통찰이자 변혁의 근본적인 힘이다.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제국적이고 군사적인 통치자로서 '다윗의 아들'의 적의 징벌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를 마태는 비폭력적이고 자비로운 '다윗의 아들"로서 변형시킨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왕들이 추구하는 "권력, 기적, 물질적 안정"에 대한 유혹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왕-이거든"에 대한 물리침이었고, 목자의 이미지를 통해 군사적인 영향력을 제거한 마태의 예수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첨부한 파일에서 보듯이 성막 곧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심의 표증에 대한 확인에 있어서 산상수훈의 배치구조에 대한 것이다. 마태의 산상수훈 5장-7장의 구조는 병렬댓구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 의미를 강화하고 이는 그 중심에 서 있는 주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성막뜰->성소->지성소->언약궤->지성소->성소->성막뜰의 과정속에서 산상수훈을 대입하여 보면 확연히 무엇이 "거룩한 분을 만나는 길"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성소부분인 5:21-48 및 병렬댓귀절인 6:19-7:11이 화해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 지상재물로서의 화해 실천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라"-이라는 사회적 실천이 성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소에 해당하는 산상수훈인 6:1-6 그리고 병렬댓귀절 6:16-18이 "은밀한 실천"으로서 구제, 기도, 금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은밀한 이 지상에서의 실천의 핵심속에 언약궤의 부분인 "주기도"가 존재한다. 하나님의 법궤로서 거룩하고 자비로운 그분의 현존을 알리는 이 법괘로서 주기도는 "우리 아버지"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 이라는 하나님의 신분과 그의 일에 대한 것과 그리고 "죄의 용서,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생활실천적인 면이 결합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서 모두의 평등함과 따라서 그분의 자녀됨이라는 비상하계급적인 신분됨과 이 지상에서의 평화의 실천(뜻의 구현, 용서, 시험과 악에서의 보호)에 대한 의지가 명확하게 나타나고 이어서 용서가 법궤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신다"


여기서 보여지는 마태 공동체의 제자직에 대한 이미지는 놀랍게도 단순히 거룩한 분을 예배하는 제의적 공동체가 아니다. 일상의 갈등과 폭력에서 강력한 비폭력 평화실천을 하는 실천적인 제자직이다. 이것이 샬롬의 통치의 도래에 대한 확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개인 생활과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헤롯이 만든 돌로 만든 성전의 제의의식에 기초를 둔 '거룩함에로의 길'을 넘어서 샬롬의 통치로서 삶과 그 샬롬의 실천가로서 자기 신분-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은 서로 이어져 있고 이는 생활을 통해 거룩한 분을 드러내는 길로서 표현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은 직접적인 제의-"신께 예물을 드림"-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길은 없다. 오직 주의 제자로서 자신의 선한 행실이 남에게 보여져서 그들이 직접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간접적인" 방법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마태 공동체가 인식한 거룩한 하나님께 이르는 새로운 통찰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당시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나 목회자들 심지어는 신학자들 조차도 놓치고 있는 혁명적인 인식인 것이다.

질문:  

1. 어떻게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들어오면서 얼마나 편안해 하고 있었는가?

   과연 그 편안한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2. 2천년전 신화적 시대에 있어 화해와 생활실천이 거룩에 가는 길이라는  유대교내의 이 철저한 개혁주의 운동아-초기에는 분리된 기독교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정말 메노나이트 성서윤리학자인 요더의 말처럼 '혁명적인" 인식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에 당신은 얼마나 충격 혹은 통찰을 받고 있는가?


3. 무엇이 이러한 마태 공동체의 예수사건에 대한 증언에 우리 눈을 멀게 만들었는가? 어떤 장애들이 있어 이를 우리가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가?


2010.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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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 2010/07/11 09:30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
-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우리 현실에 있어 새로운 샬롬의 통치의 실재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그에 대한 삶으로서의 철저한 헌신은 새로운 능동적인 비폭력과 사랑의 공동체를 탄생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함께 형성해 나간 이 비전은 당시 유대교의 신을 만나는 길로서 성전/회당에 의한 거룩한 제의적 공동체나 대안의 주류였던 시온니즘의 무력적 투쟁이라는 열심당 혹은 타락한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정결과 '빛의 자녀'로서의 영적인 수행을 추구한 제 3의 무리인 엣세네파와도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변혁적인 현실을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모시는 것이되, 좀더 적극적으로 산상수훈의 공동체 이상을 따라 삶에서 폭력과 증오의 독을 뽑아낸 적극적인 저항과 변혁의 방식, 곧 자비의 현실화라는 방식으로 통해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심, 권세자를 내치심, 보잘 것 없는 이의 높이심, 배고픈 자의 대접과 부요한 사람을 빈손으로 만드심'(누가복음의 마리아 찬가)과 같이 삶에서 실제적인 변화의 증상을 몰고 오는 새로운 현실성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예수 공동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무기를 들고 대항을 하진 않았더라도 그가 몰고온 새로운 변혁적 현실로서 삶의 방식과 타자와의 관계방식은 이미 통치자에게 위협이 되었고 그는 현 체제의 전복자로서 이미 낙인이 찍혔고 결국은 다른 반란자들 사이에 정치적으로 형집행을 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행위가 지금의 우리 대부분이 추종하고 있는 개인 영혼의 구원이라는 영적 수행의 모범이 아니라 가장 비폭력적인 그의 비전과 실천은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위협과 도전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그러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이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의 핵심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에 대한 혁명적인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영혼의 내면에서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화해와 비폭력의 생활실천-"회당과 성전이 성소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성소(sanctuary)이다"-은 정치사회문화에 샬롬 통치의 증거(witness)자로서 거룩함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의 샬롬 통치의 새 현실성이 얼마나 혁명적인 특성-무리가 놀라 새로운 권위였다고 고백함-을 지녔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명백해 진다.

샬롬 통치의 현실성에 대한 가장 극명한 상징적 실마리는 그의 식탁교제(table fellowship)이었다. 정결법을 어기는 그의 추방된 자들과의 식탁교제는 신적 비전의 철저성과 아버지이신 신의 사랑의 팔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모두를 한 테이블에로 환영하고, 폭력의 한 형태로서 어떤 종류의 배제에도 비판하는 세계관을 창조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inclusive love of God) 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헌신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가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그 당시 사회가 배제한 이들과 함께 공동 식사를 함으로써 가름과 배제의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을 실천하였다. 예수의 비전에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모두를 포괄하시는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한 몸의 모든 지체들이다. 이러한 포괄적 비전은 서로를 신을 한 아버지로 둔 형제자매로 만들고 따라서 '적대자'를 형제자매로 감싸고, 약자에게 힘을 부여하는 비폭력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그의 샬롬통치에 대한 비폭력적 실천은 타자와 주변자(the marginalized)에 대한 보편적 치유에 대한 그의 비전에 의해 심화된다. 생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타자의 기본적인 복지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다. 예수는 항상 돌봄의 서클 바깥으로 내던진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치유의 문을 통하여 공동체 속으로 되돌아오도록 초대하신다. 그는 공동체의 복지와 안녕은 각각 구성원의 복지와 안녕과 상호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니 오히려 가장 약한 자의 안녕과 복지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예수는 개인의 불행과 병이 폭력적 지배와 배제의 이념으로 작용한 불행과 병에 대한 인식 개인적 죄의 잘못이나 그 결과가 아님을 가르쳤다. 눈먼 소경은 자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요 9:3)이고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함"(요11:40)이라는 주장을 통해 예수는 치유와 거룩한 힘을 세상의 거부 받고 접촉할 수 없는 이들에게 확대하였다. 그들은 징벌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비의 수여자라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주체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누구든 복지의 서클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단순히 육체적 몸의 회복만이 아니라 공동체로 불러들임으로서 상호 연결(interconnection)에 있다는 것고 이 상호연결이 거룩함의 알짬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셨다. 상호연결이 있는 곳에 신이 있고, 상호연결이 거룩의 길임을 각인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의 능동적 비폭력을 통한 샬롬의 통치의 또 다른 예는 그의 설교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그분에 대한 접근의 길에 대한 이해에 있다. 십계명에 아직도 흐르는 저 위 하늘의 유일한 만군의 신이자 '우리 신앙 공동체'내에서 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것을 더욱 철저화시켜 그는 신이 사랑이시고 무제한적인 타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안에서 본 철저한 사랑의 종류는 인간의 삶이 보복하시는 하나님에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그것은 성전의 공간을 넘어 또한 우리의 일상과 세상에서 전일(全一)적으로 하는 이 지상적 수행(mundane practice)로 초대하셨다. 그 핵심은 "양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는"(요 10:10) 길에 있다. 이것이 그 근본 뿌리에 있어서 폭력을 정화시키는 영성이다. 늑대와 여우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발톱을 날카롭게 하여 자기 방어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서 있으면서 모든 형태의 죽음과 죽임 그리고 폭력에 확고한 대항을 하며 생명을 위하고 이것이 충만하도록 삶을 투신하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예배의 날, 안식일은 따라서 인간 공동체를 섬기는 데 있어야 하며 사랑의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를 반영해야 한다. 치유가 필요한 자가 있을 때 치유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응답하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 예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그러한 특권적인 날, 성소와 같은 헌신하는 장소에서 어떤 종류의 활동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달려있다. 예수는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한 예배의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그는 또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이들의 공동체 삶의 질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진실로 한 테이블을 공유하며 모든 이의 복지를 추구하는가? 예수에게는 사람들이 예배를 적절하게 볼 수 있기 전에 공동체내에서의 화해에 대한 긴급성이 먼저이며 이 화해가 진정으로 예배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예배하기 전에 이웃과의 갈등이 있다면 뒤로 돌아 즉시 가서 먼저 화해를 이루라는 것이다(마 5:23-24).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포괄시키는 보편적 사랑-비와 햇빛을 누구에게나 허용-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유일한 응답의 길로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랑이 사랑을 가져오고 평화가 평화를 가져온다. 증오와 배제가 거룩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첫 번째이자 궁극적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인 것이다.

지금까지 진술을 요약하자면 예수는 식탁에 모두를 포함하는 것, 모두의 복지와 안녕을 회복하는 치유,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삶으로의 응답으로서 예배라는 새로운 제자직으로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열어주셨다. 이것은 자비, 겸손, 비-보복, 용서, 진실추구, 화해 그리고 자신의 적을 포함하여 타자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이것의 단초는 기부, 금식, 기도, 신뢰,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하나님의 지배에 두는 것으로부터 성장한다.

예수가 제시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그 길이 쉽거나 성공적인 실재가 금방 나타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는 우리가 극도로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 놓여져 있으며 당신 자신이 그것의 희생 제물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완전한 유토피아 사회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꿈을 꾸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신실하게 폭력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도록 초대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의 사역에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우리는 성공하는가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응답하며 그 과정에 있어서 필요하다면 자발적인 고난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중요 요소들 중에는 물리적인 폭력, 법적 소송 그리고 강요된 징집(마 5:39-42)을 대면함에 있어서 보복적인 활동을 종식하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는 전체를 희생하는 한 그룹이나 한 국가의 파괴적인 자기-이익의 폭력적 수행에 대해 능동적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능동적인 비폭력에로의 부름은 그 응답이 폭력적인 행동과 맞대응하기라는 순환의 방식이 아니다. 그의 샬롬통치의 제자직에로의 부름은 누가 관계를 깨뜨리는 데 책임이 있든 지간에 화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정당한 대의하에서 폭력에 대항한 보복과 징벌이 아닌 치유와 관계의 회복이라는 화해를 제시한다고 해서 타협적이고 순응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가 비폭력적인 반면에 그는 동시에 확고하게 대결적이었고 그의 대결적인 행위는 위협적인 결과를-전복과 변혁을- 가져왔다. 그는 일반인이 그를 묘사하듯이 그의 단순한 선행이 악마적인 사람들의 악행들로부터 반대를 일으키게 된 타협적인 희생자는 결코 아니었다. 복음은 예수의 비폭력 수행이 결코 수동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어떤 실천에 대항하는 도전을 개시하도록 하는 그런 확고한 끈기가 있는 변화의 실천이었다. 그는 대중을 선동하고 정치가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몇 가지 점에서 예수는 그의 "혁명적 비폭력"(revolutionary nonviolence-존 하워드 요더의 용어)과 그가 살고 있던 죄 된 세상의 잔혹한 폭력 간에 다가오는 충돌을 명확히 보고 있었다. 이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결정은 비폭력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의 반대자가 그를 거기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공개적으로 그들이 그의 삶을 위협하고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폭력의 아가미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신과 그에 대한 무제약적 책임성으로서-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행위였다.

죽임과 죽음을 촉진시키고 죽임과 죽음의 구조를 지지하는 체제에 대해 기꺼이 자발적인 고난을 통한 죽음의 수용을 통해 죽임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동맹을 단절시키는 신의 명령에 대해 신실한 응답의 표현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비폭력적인 수용에서 예수는 치유하고 해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정확하게는 그가 경험한 증오와 폭력의 살인적인 지배/통치를 역전시켰다. 예수는 저주받고, 주먹으로 맞고, 조롱받았다. 심지어 고뇌가운데서도 그는 그에 대해 사용된 똑같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배신당하고, 친구에 의해 거부당했으며, 징벌 받았고, 옷을 벗기웠으며, 벌거숭이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비폭력적인 응답과 자발적인 고난은 새로운 각성과 신의 뜻에 대한 분명한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명료함이라는 부활을 가져온다. 신의 고난과 예수에서 나타난 신의 보편적 사랑의 철저성은 새로운 영혼의 불꽃을 점화시켰다. 그리스도의 영은 제자들에게 옮겨져서 그들은 이 화해와 평화 만들기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나타난 폭력에 대한 신적인 반응에 대한 그의 제자들의 이해는 이제 자신을 얽매였던 죽음과 두려움을 넘어서 사랑과 진리의 영의 부여받음과 선물로서 자기 생에 대한 자각이라는 신념공동체의 탄생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으로서 평화를 만드는 인간 공동체에로의 부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20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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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을 위한 비폭력 영성과 실천 -맞서 싸운 상대가 천사로 바꿔지다 :: 2010/03/09 09:04

기독교인을 위한 비폭력 영성과 실천

                                           맞서 싸운 상대가 천사로 바꿔지다


참조: 창 32: 23-32

기독교내의 비폭력 평화운동에 있어서 역사상 이루어진 크고 작은 사건들의 중심에는 내가 갈등하는 상대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비폭력은 단순히 갈등과 대립을 하는 문제를 싸우지 않고 타협하여 좋게 끝나는 방식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갈등과 대립의 불일치에 대한 피상적인 해결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고 상대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자발적으로 줄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

우리가 지금까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피상적인 해결의 방식이었다 함은 그 어떤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좋아함과 싫어함의 판단에 따라 쌍방이 얼마나 정당한 지 혹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주지해 주고 상대의 승복을 받아내는 데 초점을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례를 들어보자. 여기 한 부부가 있다. 둘이는 그간 20년이 되는 결혼생활에서 두 자식을 대학에 보낼 때까지는 그동안의 갈등은 그런대로 잘 봉합이 되어 살아왔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떨어져 나가 살게 되고, 아내가 이제 자식의 양육에 대한 노력에서 자기 생에 대한 자기 성장에 신경을 쓰면서 사이가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가 자기 성장에 대한 홀로서기라는 구실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실망스러움이 폭발의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내는 그동안 경제권이 없고 자녀양육이라는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의 숙명에 의해 '마땅히 누려야 할 자기의 몫'을 오랜 세월 희생하고 살아왔다는 자각으로 인해 남편의 강요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쌓여 저항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애정이 급속히 식어지고 대화는 대게가 "...을 왜 안했어" "그건 당신 잘못이야" "당신은 ...한 것에 있어 정당하지 않아" "당신은 당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그래 한 번 따져보자, 일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 책임/잘못인지" 이렇게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형태로 진행되어가면서 쌍방은 말 안하고 말기, 고통을 주는 행동을 상대에게 해서 불만족한 상태를 알리기, 상대의 잘못을 논리적으로 논박하기로 상태가 악화되어간다. 결국은 애 때문에 혹은 미래에 대한 독립의 현실적인 대안이 보이지 않아 그냥 살고 있지만 진정한 소통은 끊어져 각자의 삶을 살되 한 공간에 있게 되는 경우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불만족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상대방이 얼마나 잘못 혹은 나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 부음으로써 나온 결과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라 피상적인 해결책인 등 돌려 서로 안보기, 비난하여 상대방의 입을 막기, 서로 건드리지 않고 자기-몫, 자기-생활 챙기기, 네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도 그대로 행한다는 상황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일이 이쯤 되면 상대방이 야속해지고 결국은 상대방은 배우자로부터 '낯선 자' 혹은 더 나아가 '적'의 이미지로 굳혀지면서 서로 맞지 않은 성격의 차이에 대한 신념이 강화되면서 속으로는 조용한 이별의 길을 걷게 된다.

여기서 본질은 '자기만 아는'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소통하는 방식과 상대를 보는 인식에 있다. 자연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차이와 다름은 생을 풍성하게 한다. 차이와 다름은 갈등의 원인이 아니다. 초점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주목하기가 아니라 '넌 ..해야만 해'라는 상대의 잘못의 발견과 교정하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자신들의 관계를 결투의 공간으로 전체를 소모하는 데서 일어나는 비자연스러운 관계의 자연스러운 결과를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쌍방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강력한 욕구인 상대에게 주기/기여하기를 상실하고 투쟁자가 되는 것이다.

비폭력 영성과 그 실천에 대한 생활적용에 있어서 야곱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통찰을 가져다 준다. 둘째로 태어난 그는 사회적 약자로서 '자기의 몫'을 찾아 쟁취하는 데 놀라운 수완과 성실성을 발휘하였지만 그에 대한 뒤따라오는 결과는 갈등과 반목, 시기심을 자기 가족내에서와 다른 그룹이나 부족들에게 일으켰다. 교훈은 '자기 몫'을 주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당해 보이는 그 주장이 자신이 기대한 결과와 다른 것을 가져온다는 것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자기 몫은 챙겼지만 관계는 나빠지고 그래서 자기의 안전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 본문의 예는 몇 가지 새로운 다른 가능성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첫째, 비폭력적인 삶은 문제를 덮어두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 긴장을 일으킨다. 그것은 일이 해결되기 위해 문제를 드러내고 그것에 대해 상대방과 전심을 다해 씨름한다. 얍뽁 나루에서 그는 밤새 싸우며 그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쌍방이 인식하게 하고 그것에 주목하며 서로 그에 대해 응답을 하도록 요청한다.

둘째, 갈등과 싸움의 대상이 '적대자'가 아니라 결국은 '천사'로 노출이 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싸움은 상대방을 쳐 없애거나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밤새도록 싸움을 통해 그의 '선/진리'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논리로 맞서서 상대의 정당성을 파괴시키는 데 초점을 두지 않고 상대가 진정으로 본래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긍정적인 선함을 결국은 드러내도록 돕는 것이다. 상대는 '천사'가 된다. 그럼으로 나의 정체성도 바뀐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자신에 대한 관점도 바뀐다. 

셋째, '겨루어 이김'의 궁극적 목적은 상대의 축복(blessing)을 얻어냄에 있다. 상대방이 적대자로 남지 않고 더 넓은 진리에 서 있음으로 인해 상대가 축복을 주는 신뢰와 우정이 형성된다. 이것이 화해의 근본이다. 반목과 적대적인 관계가 바뀌어 상대방이 내 삶을 인정하고 축복해 주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그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떠날 때 해가 떠올랐다"(32)

그가 겪은 얍복나루에서의 적대자가 천사로 바뀐 체험을 통해 그는 외모로는 더욱 못난 자가 되었다. 자기 몫 챙기기에 수완이 빨라서 누구보다 길을 앞서 나갔던 그는 가장 뒤쳐진 자가 되고 세상을 그토록 빠른 걸음으로 걷기 보다는 느리게 걷는 사람으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제야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 생에 있어서 '해가 떠올라' 그 빛을 쬐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삶에 내리쬐는 아침햇살의 기운을 받으면서 처음으로 '갖음'에서 '누림'의 감격을 얻게 된다. 환도뼈의 상처(심각한 갈등의 경험)는 이제 새로운 경지를 드러낸다. "당신의 결점은 영광이 나타나는 방식이다. 그곳은 빛이 당신에게로 들어가는 곳이다." 이제부터는 어느 곳도 자신이 밟는 공간마다 그리고 관계마다 그는 '브니엘(신을 대면하기)'을 경험한다. 그래서 그의 일생도 선물을 주는 자로 바뀌게 된다:

"...형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마치 하느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잘 돌보아 주셔서 제 살림은 이렇게 넉넉하답니다. 그러니 제가 드리는 선물을 받아 주셔야 하겠습니다"(33:10-11)

'자신의 몫'을 챙기는 자가 '선물을 주는 자'로 바뀌면서 그의 안전은 오히려 더욱 견고해지고 생은 더욱 풍성해지게 되었다.

이렇게 비폭력의 실천은 단순히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를 변화시키고-천사로 바꾸기- 자신과 상대도 '선물을 주는 자'로 바뀌게 만든다. 이렇게 변화된 것은 상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밤새도록 붙잡고 놓치 않고 '겨루어' 나와 상대안에 있는 선/진리이 교류하고 더큰 선/진리로 통합하여 끝까지 드러내게 된 결과이다. 에너지와 시간을 비난하기와 정당한 몫챙기기에서 상대의 선/진리를 드러내는데로 전심으로 투쟁함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거기에는 이제 선물을 주고 받는 축복주기(blessing)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20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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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9 09:04 2010/03/0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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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자유 (성서공동연구자료) :: 2007/03/19 10:46

제 20회 민들레성서공동연구

주제: 평화와 자유
일시: 2007.3.12-14.
장소: 갈산감리교회(서산)
 
첫 번째 마당: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과 체제의 분별

본문: 막5,1-20; 엡 6:12 (참조: 엡2,2)

<문제제기>

평 화의 시각에서 자유란 존재의 상태(예, 평온하고 흔들림 없음) 상태이면서 삶의 모습(예, 비폭력적인 생활)과 연관되어진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개인이 내면의 욕구에 따라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자유라고 주장할지라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폭력의 구조/제도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면 이는 진정한 자유라고 하기엔 어렵다. 오염된 공기를 들여 마시고, 영적이고 물적인 가난을 낳은 구조적 환경 하에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자유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유를 근본적으로 억압하는 권세>

성 서는 자유의 문제를 인격적인 것을 넘어서 보는 시야를 가진다. 즉, 진정한 자유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서 소외와 억압의 근본원인인 “권세, 세력의 악신, 암흑세계의 지배자, 하늘의 악령”과의 싸움에서 쟁취되는 역동적인 것이다. 땅과 하늘의 상관관계라는 통합적 세계관을 가진 성서의 세계에서 권세들, 세력의 악신들은 단순히 저위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들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적 제도와 기구들의 외형안에 있는 실제적으로 있는 영적인 것을 우주의 스크린에 투영하고는, 그것을 하늘에서 지배하는 우주적인 힘으로 인식하였다. 이런 우주적 투영은 진실로 땅에서 악마적으로 인간성을 황폐케 하고 혼돈을 심는 현실세계의 세력과 기구의 실제현상을 판별한 것의 우주적 반사인 것이다.  

이 권세는 저 세계에서가 아니라 이 땅의 현실세계의 구조와 기구를 몸으로 이용해 작동하고 영속되며 드디어는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 불가능하게 되어, 심지어는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리하여 이 “비인간적이고 억제할 수 없는 힘”은 사회구성원을 위한 봉사자가 되기보다는 지배체제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지배체제는 말하자면 권세들의 체제로서, 성경은 이를 ‘세계world,’‘시대 aeon,’ '육정flesh'이란 말로 표현한다.        

엡6,12 에서 말하는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권세, 세력의 악신, 암흑세계의 지배자, 하늘의 악령들-은 하늘로부터 인간을 공격하는 악마적인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이 땅의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구조와 기관들 혹은 체제들의 내면성이자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기관들의 타락한 내적인 표현이다. 이 세력으로 인해 개인이 인격적 성장을 원한다하더라도 체제(기구/제도)는 자기증식과 탐욕을 위해 자율적 힘과 기능을 갖게 된다.

개인이 탐욕을 가질 필요가 없이, 체제가 그 대신에 탐욕스럽게 행동하는 것이어서, 만일 개인이 체제의 가치를 거부한다면 이번에는 그 체제에 의하여 그가 축출된다. 권세의 현세적 표현으로서 체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하고, 그 체제 안에서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 무엇을 중요시해야 하는가를 지시한다. 따라서 싸움의 근본은 우리가 살과 피를 가진 인간들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어두운 현실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들과 싸우는 것이다.

<내면화된 권세>

권 세들은 숨겨진 곳에서 활동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할 때가 가장 강력하다. 성전과 사람들 속에(막1,21-28, 마12:43-45), 돼지 속에(막5,11-13) 혹은 정치제도들 속에(계12,13)들어와 구체적인 몸을 입는다. 이 권세들은 눈에 뜨이지 않게 주변 환경에 숨거나, 우주의 비밀처럼 신비적인 모양으로 꾸며 보이며, 혹은 우연적이고 비본질적인 구조와 제도를 마치 신이 허락한 것인 양 보이게 함으로써 지배체제를 유지, 강화한다. 내면화되고 구조화됨으로써 권세가 외형화된 체제는 순종을 얻어낸다.

군대 귀신들린 사람의 “무덤에 살며, 쇠사슬이 소용없이 소리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는” 행위는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드러나고, 여기서 권세는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한다. 권세가 질서의 이름으로 소외된 질서[군대귀신 들린 사람의 격리]를 창조하고  이런 기만적인 체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소리와 모양이 없는 권세는 기만적 체제의 희생자들이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 지경이 되었는지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다른 누구에게 그 무엇에게 불평할 수 없이 수용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영혼에 상처를 주고 폭력을 내면화시킨다(내면의 수감자가 된다).

그리고 이를 보는 주변인-돼지 치던 사람들-들은 기만된 질서에 대한 이해없이 자신이 희생자와 구별된 것에 대해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보상심리를 얻으며-어떻게 저런 참혹한 일이? 그렇지만 난 아니라서 다행이야!- 결국은 지배체제의 상황에 대해, 그런 체제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무감각’하게 된다. 타자의 희생은 통과제의처럼 반복되며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신의 위치와 삶은 영예롭게 생각이 든다. 이렇게 희생자와 주변인들은 체제의 잘못됨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체제의 그물에 걸려있게 되고, 희생자는 자신들을 비난하고 그 체제는 다치지 않은 채 남아 지속하게 된다.

결국은 체제를 보호, 유지하는 것이 윤리적 행동의 결정적 판단기준이 되고, 다수의 사회적 안정은 희생자의 피로 대속된다. 희생자는 필요한 것이고, 그런 되풀이 되는 희생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며 ‘다수의 희생보다 한 사람의 희생이 낫다’는 가야바의 법칙이 암묵적으로 통용이 된다. 그리고 그런 희생양 제도를 통해 내가 획득한 부-돼지들-는 더욱 가치 있고 빛난다. 이렇게 내면화된 권세와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지배체제가 된 희생양 제도는 희생과 폭력에 대한 기억상실증을 제도적으로 구조화하게 된다.

희생의 당사자이든 주변인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상실한 것의 내면화와 무감각을 통해 상실의 쓰라림을 알지 못한다. 분별의 마비는 충만한 인간의 삶이란 마땅히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기억 상실을 가져와서, 심지어는 기억의 회상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생산성의 윤리, 성공의 의무, 적자생존의 도덕질서는 희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뭔가를 이룩함은 희생의 기반위에 있어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주변인들은 공범자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권세들에게 순응하도록 자신을 재구성하며,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세계에 항거하지 않고 그냥 놔둔다. 이 세계질서와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역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더욱 노력하라, 더욱 스마트해져라. 실패한다면 그건 너의 다 네 탓이니 더욱 일에 충실하라....”

<자유의 시작으로서 악령/권세의 분별>

성서시대의 권세/지배체제에 대한 원형적인 구조는 오늘날에서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가멸차게 발휘하고 있다. 우리 대중문화의 폭력과 갈등현상, 소외와 상처들은 하늘의 악령/권세가 현실화된 지배체제가 끊임없이 강화시킨 가치관의 작동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지배체제의 사회속에 길들여져 모든 악은 자신들 밖에 있다고 믿게 되고, 커서 어른이 되어서도 이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남들을 희생양으로 삼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감의 사회적 기준을 고수하고 자기네 그룹의 집단적 정체성을 계속하여 의존한다(군대 귀신들린 자로서 희생자와 거리를 둔 돼지소유주로서의 정체성).

복음은 시대와 사회적 상황이 다름에도 지난 수천 년간 똑같은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데, 이는 권세와 이것의 현실구조인 지배체제와의 싸움이다. 복음은 억압과 폭력의 그 어떤 한 형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런 사회적 모습을 출현시키는 근본으로서 영적인 힘으로서의 권세와 그것의 구체적인 현실로서 지배체제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이들 권세와 체제는 보이지 않는 종교의 위치까지 차지하여 그 추종자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며, 그 헌신이 일종의 종교적 경건성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아직 대다수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종교적인 것으로 안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배체제는 기독교의 언어, 상징, 경전까지 남용한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기만과 현혹의 권세와 그 현실구조인 지배체제를 분별함으로 시작한다. 교회는 이들 체제들 뒤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권세들의 영성을 폭로하고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를 강화하는 목회를 요구받고 있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기독교인의 자유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하늘의 싸움에 참여하는 문제이다.

토론을 위한 질문:

1. 본문을 서로 다른 번역본으로 읽고 차이를 주목하며 그 의미를 음미하자. 자신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서로 나누자.

2. 자신이 생각하는 자유관이란 무엇이었으며 오늘 성서의 본문은 이에 대해 어떤 도전을 주는가?

3. 군대귀신들린 사람과 돼지를 소유한 사람들 간에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유와 억압이란 관점에서)

4. 오늘 우리 삶, 우리 교회가 대면하고 있는 권세와 악신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이며 이를 대처할 기독교인의 방안은 무엇인가?


두 번째 마당: 크리스천 자유의 의미와 그 목표

본문: 롬 6:5-19  엡6:13

<자유의 근원: 하느님의 영>

복음이란 이 세상으로부터 개인을 구원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가장 기초적인 구조에 이르기까지 변형된 세계에 대한 메시지다. 그리고 구원과 관련된 자유는 실제로 권세들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자기 자신의 죄와 권세들과 공범관계임을 용서받는 것, 그리고 권세들이 우상화되지 않도록 해방시키는 일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그 당시 지배체제를 비난하고 하느님의 통치가 도래함을 선포하였는데 하느님의 통치란 곧 현실의 모든 측면, 심지어는 개인이 속한 사회적 뼈대까지 변혁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 예가 권세의 피해자들-창녀들, 세리들, 죄인들, 땅이 없는 사람들-을 들어 올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지배적구조의 확립이다. 이렇게 예수운동은 권세들의 체제에 대항하는 근본적인 혁신운동을 가져왔다.

낡은 질서의 횡포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은 새로운 거룩한 영을 받게 된다. “그 영은 지배체제cosmos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 영이며”(고전2,12) 이 새로운 영은 믿는 사람들을 새로운 실재와 다시 교제하게 한다. 그런 영을 받아서 바울은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지배체제 kosmos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체제-는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그 체제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6,14)라고 승리를 기뻐할 수 있었다. 요한기자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낡은 체제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그 지배체제를 이겼다”(요16,33). 하느님의 새로운 실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단지 새로운 가슴과 새로운 영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과시간과 심지어는 자신의 몸에 대한 변화된 관계를 받는다.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 십자가수행>

출애굽사건으로부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계시에 의해 눈이 떠진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실재, 즉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소수의 사람들에 의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착취당하는 보편적 실상-보이게 되었고, 심판되었으며, 무엇이 결핍된 것인지 발견되었다. 이런 새로운 통찰력을 갖춘 사람들은 예전 같으면 “세상”의 소외된 모습을 형성하였을 현혹과 기만에 이제는 더 이상 자신들을 예속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권세를 전복시키는(upside down) 십자가,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힘’이 제자들에게 주는 통찰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당신을 낮추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빌2,6-8)함으로 모든 종속을 끝장낸다. 이렇게 이루어진 통치는 지배적 계급조직이 아니라 남에게 권능을 부여하는 질서, 혹은 잠재능력을 실현시키는 질서다. 그것은 신적인 독재자가 통솔하는 것이 아니라, 벌거벗은, 무방비 상태의 진리-십자가에 못박힌 자-가 통솔한다.

십자가는 인간이 그 권세들과 공범관계임을 폭로하고, 그리고 이익을 받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유를 처분하려는 우리들의 완악한 마음을 폭로하였다. 십자가는 또한 권세들이 예수로 하여금 그들이 원하는 사람이 되게 만들 수 없음을, 혹은 그의 사람됨을 중지시켜 버릴 수 없음을 폭로한다. 그들이 예수 속에 살아 있던 것을 죽일 수 없었으므로 십자가는 또한 죽임의 무력함을 폭로했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그 결과의 하나로 폭력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자진하여 전체 체제의 폭력을 그 자신이 짊어졌다. 바로 이처럼 자신을 비우는 행동을 통하여 예수는 우리를 권력 피라밋의 꼭대기에서가 아니라 그 밑바닥에서 만나준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또 다른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즉 권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행동을 통하여 그를 처형하는 권세에 복종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을 비우상화, 비절대화, 그리고 상대화하였다. 십자가는 권세들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인데 까닭은 이 사건에서 예수 안에 성육신되고 인간화된 그리스도의 원리가 그에게 끌린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됨의 원형이 되도록 해방되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낡은 우리 자신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롬 6:4,6).

<자유의 수행: 하느님의 탈지배적인 질서>

예수는 기존 질서에 대한 무장한 위협을 가하지 않음에도 기존의 체제 유지자들이 죽여야만 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지배체제를 지원하는 권력, 부, 명예와 같은 가치를 지원하는 기관과 체제를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높은 자는 섬기는 자(눅22:24-27), 팔복음과 치유 그리고 식탁교제에서의 가난한 이의 편드심, 탈 지배적 구조로서 (메시야, 스승, 노예보다는) 인자로서 ‘벗’되기(요15,15), 혈육중심의 가족이 아닌 하느님 말씀중심의 가족(막3,21,31-35)과 한 분이신 하늘 아버지, 거룩의 울타리를 치는 특권층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안식일과 정결법보다 추방된 자들에 대한 자비와 해방의 우선성 등에서 보듯이 지배, 구분, 특권의 자리를 거부함으로써 예수는 지배가 없는 새로운 질서를 조직화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하늘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조용히 눈치 채지 못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왕, 칼, 군마 등의 군대들이나 군사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밭, 밀가루반죽, 여인, 가정 등의 보통 사람들 가운데서 아래로부터 자라나는 것이다. 지성소의 커튼이 찢어지고 나서 우리의 공동의 몸이 성령의 성전(고전 6:19-20)이 됨으로 거룩/세속의 구분이 철폐되고 거룩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몸으로부터, 생활로부터 발원된다. 십자가위의 예수의 죽음과 암흑은 우주의 블랙홀이 새로운 별을 생성하는 것처럼 참된 사람을 생성하게 된다.

<자유의 출발: 권세들에 대해 죽기>

권 세와 지배체제의 죽음의 힘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은 사도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 가능해진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지배체제(세상)의 근본적인 원리들에 대해 죽었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그 체제에 속하여 사는 것처럼...규정에 묶여 있습니까?”골2,20) 우리가 지배체제에 의해 사회화되어 사는 동안 우리는 죽은 삶을 사는 것이다. “여러분도 전에는 죄와 잘못을 저질러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죄에 얽매여 있던 때에는 지배체제를 따라 살았습니다”(엡2,1-2).

자신의 소외와 타인들의 소외속에서 공범자로 연루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죽어갔다. 우리의 속박을 사랑하고, 그 속박을 합리화하며, 정당화하고, 급기야는 그 속박을 옹호함에 따라 우리는 죽어갔다. 이렇게 우리를 속박하고 죽이는 권세와 지배체제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사도바울을 일종의 동종요법 (homeopathy)을 사용하여, 혹은 두꺼비가 뱀에게 삼키어져 새끼를 까듯이, 우리를 죽인 것을 삼키는 죽음, 곧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이 되기 위해, 권세와 지배체제가-되풀이 되는 낡은 녹음테이프처럼 우리 두뇌와 삶속에 형상화한- 의식속에 만들어 놓은 내적인 자아에 대해 죽어야만 한다. 그리고 또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익숙한 지배체제의 사회적 환경에 대해서도 우리는 죽어야만 한다.

특권과 풍요속에 태어난 사람이나 기득권의 혜택을 누리는 자들은 자기중심주의에 대해 죽어야 하고 가난과 고통속에 자란 사람은 자신들의 숙명론과 침묵에 대해서도 죽어야 한다.

예수는 이렇게 권세들에게 죽어주는 과정을 그의 사역의 중심적 역설로 설명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사회적 관습이 내면화된 집단 무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지배체제에 의하여 타율적 외부 신념들에 의해서도 우리의 정신이 지배되고 있다. 자기의 자아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권세들에 대해 죽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 한 온전한 인격이 되지 않는다.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롬6,6).

<자유의 새로운 과제: 정의를 위해 살기>

사도바울에 따르면 기독자의 자유는 자아의 중심이 전적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새롭게 방향 정립하는 것이다. “나는(ego)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ego)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the self)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 2,19).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지배체제(kosmos)는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지배체제(kosmos)에 대해서 죽었습니다"(갈 6,14) 에고가 죽고 참자아가 다시 태어남으로서 삶에 대한 거짓 소유권 증서를 찢어버리고, 자신과 모든 것이 하느님께 속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렇게 내면이 갱생됨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리시는 행동에 의하여 부패된 사회속에서 새로운 실재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신성한 것에 대항하는 이 세상 권세들과 겨루시는 하느님이 투쟁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롬6,13하). 하느님의 사회의식이 그 자신을 불태우는 정열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온 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롬6,19) 우리가 권세에 대해 죽어야 하는 것은 우리 영혼속에 적과 싸우다 적을 닮아가는 전염을 방지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은총의 지배를 받아 정의의 도구가 되는 헌신을 강화시킨다.  이를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건다. 이를 위해 기독자의 자유는 단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엡6,13).

토론을 위한 질문:

1. 본문을 서로 다른 번역본으로 읽고 차이를 주목하며 그 의미를 음미하자. 자신에게 살아있는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서로 나누자.

2. 본문에는 여러 대치되거나 상반되는 의미, 위치, 방향, 경지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나온다. 이를 찾아 보고 그 뜻을 서로 생각해 보자.

3. 사도 바울의 ‘죽어서 다시 살아남’에 대한 이해를 자유의 문제와 연관시켜 무엇에 대해 죽고 무엇에 다시 살아남인지 서로 이야기 해 보자. 자신의 삶에서 이런 전환점을 주는 사건의 체험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삶에 대해 어떤 영향/방향을 가져왔는가?

4. 바울이 자유의 경지로 제시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13절)에 대해 교회는 어떻게 이에 구체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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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9 10:46 2007/03/1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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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목회 (성서공동연구 자료) :: 2006/12/07 23:59

 제 19회 민들레 성서공동연구

일시: 2006.12.4.-6.


주제: 평화와 목회


성서공동연구 I: 평화목회의 의미


본문: 출 1:8-20; 3:7-10


<목회의 정의>

목회(ministry, diakonia)는 모든 지도력의 은사를 묘사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초대교회에서는 직분(성직자, 평신도)보다는 은사를 소유하여 봉사의 기능을 가진 사람들-새언약의 일꾼(고후3,6), 그리스도의 일꾼(고후11:23)-과 관련된 용어이다. 모든 봉사의 은사들은 성령에 의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는”(고전12:11) 것으로 그리스도의 지상사역과 관계되어 이해되었다. 초대교회에는 여러 직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일꾼”(골 1:7;4:7)으로 평등하면서도 각각의 위치가 있었다. 그러나 2세기말 몬타니즘과 영지주의의 도전은 교회지도자의 합법성문제를 낳았고 이어 콘스탄틴의 기독교로의 회심으로 인한 제국교회/국가종교로의 변화는 성직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갖는 감독제이하 상하계급적 직분이 강화된다.


그러나 원래 목회(ministare=serve ‘섬기다’)의 의미는 하느님 백성의 시작으로서의 출애굽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안을 연계하는 크리스찬의 사역에 있으며, 그 중심은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활동’인 것이다. 이는 출애굽사건에 있어서 종살이 애굽의 삶에서 탈출공동체로 이끄시는 해방하시는 하나님 경험과 그리스도 사건안에서  죄와 옛자아의 죽음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새 자아와 새 언약공동체의 경험속에 일관되어 녹아있는 종말론적 비전(치유와 회복의 기대)을 지닌 해방에의 실천(지배와 종속을 변혁)을 담지하는 공동체 사역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클레시아(교회; 하느님자녀로 모인 무리들)는 다가올 바실레이아(샬롬의 통치)를 희망하면서 이를 향하여 뜻과 열정을 모아 공동의 몸을 이루어가는 실천운동이라 볼 수 있다.


<시대적 성찰과 희망의 징조>

성서본문이 보여주는 이스라엘백성은 바로왕의 폭정과 고역으로 신음하고 있다. 지배와 위로부터의 강제, 권력과 군사, 그리고 폭력이 이들을 누루고 있다. 바로의 부를 축적을 돕는 곡식저장도성을 짓기위해 할당된 고역을 감수함으로써 아무 이름없이, 목적없이, 누군과의 관계도 없이 사는 삶이다. 무분별한 생산성(더 많은 벽돌의 생산)에 대한 댓가로 고깃덩이를 지급받는다. 고착된 획일화와 고정화된 삶에 의해 신음을 하고 있다. 권력에 의한 지배와 부에 대한 집착, 칼과 군사에 의한 폭력으로 인해, 삶에 대한 비전과 상상력의 차원, 감격하고 놀랄 수 있는 능력,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변화될 기회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은 희망의 실마리가 찾아진다. 이는 산파들인, 시브라와 부아의 공조(共助)를 통해 새로운 출구가 생긴다. 빈곤화되고 무기력화된 상황속에 반전(反轉)의 틈이 열린다. 시브라와 부아는 ‘죽임’을 강요하는 지배문화에 적응하지 않고, 죽이라는 바로의 명령을 거부하기로 공모한다. 이스라엘의 처지가 너무나 열악하고 산파들의 힘은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그들은 담대하게 행동했고 이 행동이 결국 그들이 당시 예상하지 못한 희망적인 결과를 낳았다. 그 지배의 체제에 대한 변화의 가망이 없어 보이고, 변하지 않을 것만 같고 종종 비참과 비극을 몰고오는 것들이 만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파들의 행동에는 결국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라는 전복적인 암시가 들어있다. 권력의 억압체계가 행사되는 주변부(the margin)에서는 언제나 그 냉혹한 현실에 대항하는 숨은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산파로부터 배우는 목회>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이스라엘 민중들이 ‘새로운 생명’을 낳는 데 조력을 한 산파들의 이미지는 오늘날 목회의 방향을 새롭게 조명한다. 지배와 폭력의 사회체제가 지니고 있는 권력의 거대함앞에 산파의 권한은 매우 나약하고 제한적이었으나 바로왕의 죽임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서는 그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산파들은 자신의 힘을 저항하는 데 사용하기로 선택하였다. 그들이 지닌 생명을 보호한다는 의도가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위험도 뒤따랐지만 이스라엘 민중들의 생명을 섬기기 위한(serve=ministare) 결정을 내렸다.


산파의 <생명을 돌보기>에 대한 재치와 위기극복은 오늘날 목회현장에 깊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오늘날 ‘죽임과 폭력의 시대’에 살면서 자신의 힘과 특권, 기회를 우리는 어디에 사용하는가? 산파들은 지배체제하에 자기 생존-안녕, 생존, 명성, 성공에 관한 염려-이 아니라 저항과 돌봄으로서의 섬김(목회)에 대한 재 고려를 촉구한다. 이들 산파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성격적으로 강인하고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흐느낌과 고통에 공감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민중의 삶의 현장에 누구보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조(conspiration)란 ‘함께 숨을 쉬다(con +spire)’란 뜻이다. 함께 숨을 쉬는 공조란 해산할 때 산고를 이기기 위해 산파는 산모와 함께 숨을 쉬는 호흡연습에 비유할 수 있다. 이렇게 같이 생명을 낳는 민중과의 호흡 고르기라는 실천경험을 통해 이들 산파들은 바로의 계획을 망치기로 공모하였고 바로의 꾸짖음에 대해 함께 협력할 수 있었다(그들이 이르기전에 해산하였더이다 -1:19).


<생명돌봄과 협력으로서의 목회>

목회는 저항과 변혁의 사역이다. 이는 폭력의 지배와 위로부터의 강제, 권력과 군사주의라는 압제의 고역을 넘어서서 새로운 샬롬과 은총, 비폭력과 일치의 섬김공동체를 지향한다. 탈출공동체로서 우리는 죽음의 시대를 살면서도 제한적이지만 창조적인 방법으로 이 시대의 ‘정사와 권세’에 저항하는 방법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이는 부와 힘의 자리에서 밀려난 주변인(the margin)과 ‘함께 숨을 쉼’을 통해 그 지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함께 숨을 쉬는’ 목회는 먼저 신음하는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귀를 기울이고, 폭력과 죽음을 자행하는 자들을 두둔하는 구조적인 폭력을 폭로할 수 있는 저항하며, 생명을 출산하는 데 공조하는 지혜와 힘을 추구한다.


우리 삶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자신의 언어를 갖고 협력자를 부른다. 열정과 분노속에서 발해지는 이 목소리는 변할 것 같지 않은 것에서 변화를 모색한다. <생존의 언어>가 <변혁의 언어>로 바뀌고 인간의 목소리는 하늘의 소리를 불러낸다. 이 신음이 하늘에 전달되어 자비의 하느님이 행동하신다. “내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신음소리를 들었다...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어라”(3:7,10). 이러한 변화는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주변부의 고통의 경험을 통해 통찰(awakening)을 얻고, 폭력과 지배에 대한 억압적인 내용에 대해 저항의 수련(practice of resistance)을 하고, 변화를 몰고 오기 위해 함께 일하기(collegial works)를 통해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형성은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도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약속은 독특하게 광야(wilderness)를 통하여 이르는 것이며 때때로 광야에의 체재가 길어지기도 하였다. 광야 40년 기간을 통해 애굽에서의 지배와 고역의 종살이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경험에 대한 대안적인 목소리를 갖게 되자 새로운 책임(십계명을 통한 윤리적 삶)이 부여된다. 억압이 해체됨으로 선택과 책임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 비전은 광야를 행진함으로 주어지게 되며 탈출공동체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명료해지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말한다. “오직 에집트의 고기남비를 거부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제국의 우상을 섬기는 폭군으로부터 구함을 받을 수 있다.”





성서공동연구를 위한 질문


1. 본문을 다른 번역으로 읽고 다가오는 구절에 대해 잠시 묵상하자.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게 하자. 그리고 느낀 점을 서로 이야기 해 보자.


2.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에 대한 목회적 상황은 어떠한가?  오늘의 애굽의 상황은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자신의 구체적 경험이나 주변의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자.


3. 2와 관련하여 출애굽을 위한 기회를 줄 수 있는 자원이나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개인과 자신의 교회의 입장에서)

4. ‘함께 숨을 쉬는’ 산파로서의 기독교인의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의 예들을 들어보자.













성서공동연구II: 평화 목회의 지평


본문: 막 5: 21-43


<출애굽사건의 재해석자 마가>

출애굽사건이 광야에서 샬롬의 인간, 샬롬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있다는 주제는 복음서중 먼저 써진 마가에서 재출현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를 통해 ‘길을 여는(making a way)' 삶에로의 초대가 그것이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사역의 중심은 언제나 광야(기도처)와 ‘길 위에서(치유와 하나님나라 비유의 전수)’였으며 도시와 회당 그리고 성전은 오히려 적대의 장소로 등장한다. 샬롬의 인간으로서 기독자는 벽돌공장의 무사안일의 노예상태에서 고깃가마는 없지만 평화의 수행(길을 닦고 고르게 함)을 실천하는 자이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사역은 언제나 도시와 광야가 주는 두 이미지(중심<the center>과 주변부<the margin>)에 있어서 놓여있다. 중심에 있는 우리와 주변에 있는 그들간의 관계속에서 예수는 주변부의 재 중심화(re-centering of the margin)라는 하나님 나라운동을 실천한다. 그러므로 제자직도 그것이 기득권이 되고 중심이 될 때에는 사정없이 뒤엎고 바꾸신다(trans-position, 轉位) 그 예로 중심으로서의 회당의 악령의 존재(1:21-28) 베드로에 대한 꾸짖음(8:2738)과 그의 배반이 있고 주변부인 호숫가에서의 오병이어사건, 하느님나라 설교, 향유 깨뜨린 여인의 사제직 수행(14:3-9)그리고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지기(15:21)와 백인대장의 십자가예수에 대한 하나님 아들의 고백(15:39)이 예로 들 수 있다(성전회당의 비신성화대 일상의 신성화 대비).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한 주변부-사람, 장소-는 이렇게 샬롬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서 기득권의 위치에 있던 거룩한 장소와 제자직에 逆轉이 일어나게 된다.  


<‘저편’으로서의 비인간화된 상황>

마가에 있어서 호숫가는 중심의 주변부의 역할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길의 확장에 있어서는 중심의 위치를 차지한다. 즉 이 호숫가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밀이 전수되며(4장) 하나님 나라 확장의 수행이 심화된다. 그 수행은 ‘저편으로 건너가자(4:35)’고 재촉하시고 직접 저편으로 건너감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예수의 호수위 걷기를 통해 구체화된다. 저편에 있는 레기온 귀신과의 대면을 통해 우리는 출애굽사건과 레기온귀신(식민지 착취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귀신들림으로 구체화)의 치유간에 유사성 곧 노예화하는 세력이 압도되고, 무덤가에서 새로운 인간의 회복되는 출애굽사건-억압에서 자유로의 삶-이 재현되는 것이다. 비인간화의 세력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멀쩡한 정신’(5:15)을 가진 삶이 회복된 것이다. 분열되고 제정신을 빼앗기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아무것도 아닌 자가 자신의 정체성과 삶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문은 예수께서 저편으로 다시 건너감으로(“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사”; 5:21) 예수의 샬롬사역의 의미를 중층화한다. 유사한 사건이나 행동이 재차 반복되는 것은 마가가 그 행위나 사건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예, 두 번의 오병이어의 사건과 호숫가를 제자들과 두 번 건넘 등). 저편에서는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다. 여기서는 죽음의 위협이 문제였던 것이다. 본문이 의미심장한 것은 예수께서 처음에는 야이로의 청으로 자신의 길을 가시다가 유대 정결법에 가장 더러운 자의 상징인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 갑자기 나타나 그의 길을 막는다는 것이다(기다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초조해할지 상상해보라). 예수는 본래 목적으로 가던 ‘길에서’ 지체하여 이 ‘부정한’ 여인을 치유하고 그동안에 소녀는 죽게 된다. 


<저편으로 가는 길에서 생긴 사건>

본문 이야기 구조는 마가의 강조방식으로서 이중 사건을 특이하게 배치해 놓았다는 것이다. 즉 두 개의 치유사건을 다른 이야기처럼 병렬로 놓지 않고 겹쳐 놓아서 야이로 딸 이야기속에 혈루병에 걸린 여인이야기를 집어넣어 -같은 것은 12살, 12해, 두 여인- 이야기를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시작해서 혈루병에 걸린 여인 이야기가 들어와 그 여인이 병으로부터 건강해진 후에야 다시 야이로 딸 이야기로 진행되어진다. 주변<이름없는 여인>에서 치료가 중심<야이로 회당장의 딸>에서는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인이 치유된 후에 예수는 야이로의 딸을 되살린다. 마가 기자는 주변이 치유되어야 중심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미와 사역의 범위에 대한 지평확대를 열어주고 있다.


본문은 ‘이편/중심/聖’의 회당장의 12살 소녀의 죽어감과 ‘저편/주변/俗’의 12년 동안 하혈을 해 온 여인의 절망을 비교하면서 ‘건너감’과 ‘길을 열음’에 대한 의미를 드러내주고 있다.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의 자식-오늘날의 교회-이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치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더 오랜 고생을 하고 있는 저편의 사람들이 출혈을 하고 있다. 야이로의 딸은 공동체 안에서 배려받고 있으며 하혈증 여인은 공동체 밖에서 돌보는 자 없이 잊혀져-이름없이-있다. 전자의 치료는 물리적/신체적 치료에 국한하나, 후자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라는 치유가 하나 더 요청된다. 그것은 하혈증의 여인은 질병의 문제만이 아니라 불결, 고립, 거부라는 인격적이고 사회적인 낙인이 더 추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사회가 거리를 두었던 자가 예수와 접촉함으로 기존의 권위와 특권에 대한 사회적 경계선이 무너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는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 중 하나를 불러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eirenen=shalom=평화) 가라”고 말한 후에야 신앙의 딸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신앙인이란 신분상의 특권이 여기서는 배제가 된다. 교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주변부에서 유린당하고 있는 이들이 우선적으로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인이 <불결, 고립, 거부>라는 사회적 격리에 의한 고통으로부터 평화를 얻고야 중심인이 치유된다. 먼저 저편/주변이 평화의 상태를 회복하고 나서야 이편/중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평화의 경험이 치유의 경험에 선행한다.


<인식과 실천의 확장으로서 건너편/맞은편>

“우리의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와 관계된 자의 죽어감/상처는 큰 고통을 동반한다. 그리스도는 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길을 떠난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는 가던 길을 딴 일로 지체한다. 그리고 죽은 딸에 대해 ‘울며 불며 떠드는’(5,38) 중심과 관련된 이들에 대해 꾸짖고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고 하시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변부의 딸을 치유-삶을 샬롬화/평화화-하고 나서 그리스도는 신앙의 딸-교회-에게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의 행동과 그 메시지는 참으로 교회가 거룩한 공공성(sacra publicus)의 보증인과 수호자됨 대한 믿음을 지닌 우리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동안 우리의 목회는 출애굽기의 바로의 ‘곡식을 저장해 둘 도성 비돔과 라므세스’(1:11)와는 형태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방어를 굳게하기 위해 세워진 도성/요새를 건설해 온 것은 아닌가? 세상의 풍조와 흐름에 위기를 느끼고 신앙의 강화를 위한 더 굳센 제도와 조직 그리고 영성훈련 이름하의 도성/요새를 건립하고,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적·교리적 가르침(기독론설명)에 치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길을 가는’ 그리스도-실천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려 소통의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예상외로 ‘죽어가고 있는’ 상황은 아닌가 염려가 된다.


광야로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출애굽사건), 길을 가는 그리스도(그리스도사건)이 보여주는, 세상에서의 고통에 대한 관심과 세상에서 상처받고 피흘리는 자에 대한 기독자의 사역을 위해 성문을 열고(“그러므로 우리도 영문 밖에 계신 그분께 나아가서...히13:12) ‘저편’의 더러움, 무기력, 고통을 감싸는 문제에 고민을 제기한다. 야이로의 딸(교회)이 죽어가는 긴박한 상황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길 위에서 세상의 이름없는 여인의 상처문제로 지체하신 그리스도, 죽은 딸을 보고 울며 아우성치는 사람들(신자들)에 대해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고 도전하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서공동연구 질문


1. 본문을 다른 번역으로 읽고 다가오는 구절에 대해 잠시 묵상하자.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게 하자. 그리고 느낀 점을 서로 이야기 해 보자.



2. ‘죽어가고 있는 (야이로 회당장의) 딸’과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차이는 무엇이며,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3.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그리스도의 옷에 손을 대는(그리스도와의 접촉) 기회를 우리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접촉한다는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4. 죽은 야이로 회당장의 딸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 굼(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신다. 나와 교회는 어떤 죽음(혹은 잠)-심리적, 사회적, 영적으로-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며, ‘달리다 굼’이 나와 교회에 어떤 의미(혹은 충격)를 주는가?




성서공동연구III: 평화목회의 전망과 도구


성서본문: 요 13: 1-11, 31-35, 14:27-31



<건너감으로서의 유월절 식사>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한 시간이 유월절(“pass-over")이며 아버지께서로 가실 때(13:1)로 보도한다. 제자들과의 공동식사는 이 두 개의 ‘건너감’-유월절과 아버지께로 돌아감-이 중첩되어 의미를 상호강화한다. 보통의 유목민식사와는 다른 유월절 식사는 회중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식사로서 서로를 하나된 공동체로 묶어주는 기능을 하며, 임박한 출발을 준비하도록 하는 상징이 된다. 이 공동식사를 통해 옛 땅(이집트)으로부터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건너감’을 준비시킨다. 이 공동식사는 이집트제국의 불의·불평등의 경제와 억압과 착취의 구조로부터 제공된 빵이 아니라 새로운 평등공동체로서 종말론적 기대를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전환점을 확인해 준다.


유월절 식사는 하나님의 초월과 약속을 실제 역사의 상황속에서 경험하는 교제의 행위였으며, 이를 통해 불평등, 억압, 거짓 가치의 사회구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에 대한 자각과 약속의 땅을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유월절 식사의 강조점은 ‘이집트로부터의 탈출(exodus from)’보다는  ‘약속의 땅을 향한 탈출(exodus for)'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제자들과 함께 하신 공동식사는 이러한 약속의 땅을 향한 탈출공동체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의 출발을 확증하신다. 그 예로 식탁에서 주님은 이제 종이 아니라 벗으로 부르겠다고 말씀하신다(15:14). 예수께서 식탁교제를 통해 보여주시는 바실레이아(basileia; 하나님의 통치)는 새로운 형태의 권력(사랑의 힘)과 통치(섬김)의 문제를 제기하며, 바실레이아는 어느 장소가 아닌 하나의 과정이자 삶의 방식임을 제시한다.


<바실레이아의 실현으로서 평화목회>

주님의 당혹스러운 부재 앞에서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초래되는 방향감각의 상실과 혼란이 예상되는 상황앞에서 예수의 고별로서 공동식사는 지금까지의  예수의 삶과 말씀을 집약하고 심화시킨다. 일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사랑의 새 계명을 주셨으며, 협조자 성령과 평화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의 하나님 지배(바실레이아)는 전적으로 그 영역이 그의 인격에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바실레이아는 굶주리고 격리된 ‘몸’의 차원에서 시작했으며 치유와 식사를 통해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즉 영적 자원과 물질적 자원을 모든 사람이 차별과 구분 또는 계층 구조없이 이용할 수 있는 섬김공동체로 나타났다. 따라서 바실레이아는 생활방식으로 실현되고 몸소 실천함으로서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겉옷을 벗고 무릎을 꿇음’으로서 노예가 하는 시중을 통해 수직적인 차별(무릎을 꿇음/바닥에로의 접근)과 수평적인 분열(겉옷을 벗음/씻고 닦아줌)을 넘어서서 새로운 인간관과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한다. 양식의 나눔과 상호 교제의 생활 방식을 통해 예수께서는 ‘선포된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보여주신다. 바실레이아의 특성인 양식의 나눔과 상호 교제는 식탁에 초대된 자들로 하여금 강력한 윤리적 응답을 요청한다(‘너희도 그대로 하라고 본을 보여준 것이다.’-13:15). 이를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 때의 공동체 모습과 지금 이 세상에서 만들어져야 할 공동체의 모습이 동시에 계시된다.


식사는 인간관계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은 곧 몸의 정치(the body politic)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회의 성격을 규정한다. 누가 포함되고 어떻게 대접받는가는 대접받는 자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식사는 감정과 관계들을 상징화하고 사회적 신분과 권력을 매개하고 집단 정체성의 경계성을 나타내 보여주는 행위이다. 식탁위의 교제는 경제적인 차별, 사회적 계급체계, 그리고 정치적 차별을 가름케 해주는 지도가 된다. 예수의 식탁교제는 경제와 소유에 기초한 개인주의나 친척과 성에 기초한 집단주의를 넘어서는 공동체적 가족의 형성이라는 확대된 가족의 의미를 제공한다(누가 포함되는가). 그리고 축소된 형태의 새로운 이스라엘로서의 예수의 공동체는 상호호혜와 섬김이라는 대안적인 평등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어떻게 대접받는가).


기나긴 유대-로마 전쟁과 수많은 농민봉기의 와중속에서 스스로 메시야/왕이라고 자처하는 공개적인 반항운동들과는 달리, 예수의 은밀한 그리고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저항으로서 공동식사(table-fellowship)는 강자앞에 약자들의 근본적인 변혁운동을 지시한다. 식탁을 통해 말씀하신 사랑(13:31-35) 평화((14:27-31) 그리고 일치(17장)는 바실레이아를 사는 제자들의 근본적인 생활방식이다. 이것이 기존의 혈연공동체와 정치공동체를 넘어서는 대안공동체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른 실재를 위하여, 다른 질서를 향하여 먹고 마신다. 식탁에서의 먹고 마심은 하늘을 모시고(侍天) 하늘을 기르는(養天) 문제뿐만 아니라 삶으로 표현하고(體天), 사회구조를 바꾸는(活天) 생활수련으로서 저항과 변혁으로서의 하나님나라운동(바실레이아)의 실천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기존 질서와 구조가 함께 먹음과 교제를 불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통치체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목회의 수단>

함께 먹고 마시기-샬롬의 이해는 주님의 식탁을 통해 심화된다. 식탁의 주인(호스트)이신 예수께서 우리 모두를 손님으로 초대한다. 손님으로서 우리는 나눔과 교제를 통해 생명과 기쁨을 경험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러므로 식탁교제는 샬롬작업과 연관된다. 성만찬은 노예, 좌절, 억압 그리고 분열에 대항한다. 그것은 지배와 억압의 바로의 권력과 통치하에서 얻어먹는 고기와 떡과는 차원이 다르다. 성만찬은 떡과 포도주의 변화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이자 공동체의 변화에 그 의미가 있다. 지배에서 섬김으로,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벗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함께 먹고 마심은 새로운 관계맺음으로서의 삶의 변화를 요청한다.


수건과 대야-가난한 자의 일상적인 삶의 도구로서 수건과 대야는 주님의 샬롬목회의 수단이다. 우선적으로 이것은 상식적인 의미에서 어떤 권력과 통치의 상징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수건과 대야는 권력과 통치로서의 힘이 아니라 감싸줌과 씻어줌이라는 돌봄과 연결으로서의 힘(power as care/connection)을 상징한다. 이는 또한 서민의 땀과 노동이 있는 이 세계와 연결을 상징한다. 수건과 대야는 세계의 고통과 상처를 향한 도구이다. 그것은 간디의 물레처럼 일반 서민들과 함께 하는 삶과 일상에서의 변혁과 연관되어 있다. 유능성, 효율성으로 대표되는 엘리트 지배문화와는 달리 수건과 대야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나약성과 소박함을 감싸는 섬김의 문화를 대표한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심(13:4)으로써 예수께서는 신성의 매개자이자 스승으로서 존경의 외적 상징(옷)을 벗어던지고 섬김의 사람(수건을 허리에 두르심)으로 낮추신다. 무릎꿇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다르게 나타내신다. 신성(神性)의 의미를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밀의적(esoteric)이고 마술적인 저위의 세계의 현현이 아니라 윤리적인 입장에서 계시한다(“하나님 나라는 성령을 통해 누리는 정의, 평화, 그리고 기쁨이다”-롬14:17). 즉 무릎꿇음에서 하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초월은 타자에로의 섬김을 통해 드러낸다.


에클레시아는 바실레이아의 실현에서 그 존재의미가 있다. 선교란 단지 신앙과 희망을 확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활을 역사적으로 변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관계의 재창조는 하나님 나라운동을 지시한다(“땅에서 매면...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요....”마16:19).  ‘창조적 제자직’은 이미 주어진 것의 종교적인 뒷받침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질서와 그 가능성과 미래성의 역사적 구조를 인식하고 헌신을 요구한다. “나는...아버지께서 분부하신 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 자 일어나 가자.” 요14:31)


성서공동연구 질문


1. 본문을 다른 번역으로 읽고 다가오는 구절에 대해 잠시 묵상하자. 말씀을 읽는 것을 넘어 말씀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게 하자. 그리고 느낀 점을 서로 이야기 해 보자.



2. 초대교회의 목회는 예배와 성만찬(공동식사)가 중심이었으나 오늘날 공동식사에 대한 신학적 실천적 부분은 많이 사라져 버렸다. 오늘날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초대교회의 성만찬적인 공동체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영적/사회적/정치적 의미)



3. ‘겉옷을 벗음’과 ‘수건과 대야’가 평화목회의 방식과 도구(수단)에 대한 이해에 실마리를 제공한다면 이를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4. 발을 씻지 않으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13:8)고 하신 주님께서 내가 한 일을 그대로 실천하라고 하신다.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내년도에 이를 실천하기 위한 구상이 있다면 발표해 보자(개인과 교회차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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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7 23:59 2006/12/07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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