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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구축을 위한 작은 시도의 사례-기독교 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6)- :: 2011/05/05 09:31

   -기독교 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

                                                                                                                                  박성용

------ 목차 ------

머리말

1. 위기와 전환의 시대에 있어 신학의 자리매김

2. 복음의 핵심으로서 샬롬의 통치

3. 지배체제의 분별과 샬롬 통치의 변혁성

4. 평화의 제자직과 혁명적 복종

5. 오늘의 제자직의 새 영역으로서 평화구축

6. 평화구축을 위한 작은 시도의 사례: 평화훈련을 통한 관계와 시스템 구축

결론



평화구축을 위한 작은 시도의 사례: 평화훈련을 통한 관계와 시스템 구축

국제적으로 1999년 시애틀에서 국제NGO들과 활동가들에 의한 WTO각료회의 무산과 2001년 9.11사건 및 2003년 2월의 이라크 전쟁반대 국제시민운동의 점화와 더불어 국내의 2000년 6.15남북공동성명 2002년 미군장갑차여중생압사사건을 포함한 미군기지 평택이전반대 등의 상황은 2000년 이전의 민족 및 민중문제 그리고 통일과 환경문제에 집중하던 시민사회운동에 평화운동이라는 새 분화구를 열게 하였다. 대부분의 평화단체들은 사실상 이러한 국제적 흐름과 국내상황에 조우하여 새로 생겨난 신생단체들이었다.

필자도 2005년에 풀뿌리 평화단체에 소속하여 활동하면서 처음에는 7.27한강하구평화의배띄우기 사업과 한국평화활동가대회의 기획과 진행을 통해 평화진영의 이슈와 활동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갖기 시작하였다. 수년간 평화활동가대회를 준비하고 기획하는 모임을 통해 그간의 시위위주의 평화운동은 지속적인 평화담론과 평화 인프라 구축에 대한 욕구, 그리고 전쟁반대의 소극적 평화에서 구조적 평화로의 모색과 군사정치적 투쟁에서 생활문화속으로 들어가는 평화의 일상화와 내면화, 새로운 평화패러다임과 새 투쟁영역(양심적 병역거부, 해외평화운동의 진출, 생명평화탁발수행, 평화교육훈련운동의 태동)과 이슈별 연대활동의 강화라는 새로운 흐름을 익히게 되었다.

원래 운동가이기보다는 연구자였던 과거 경력에 의해 그리고 단체가 추구하는 비폭력 운동의 확산에 필요한 모델의 개발과 훈련과제에 대해 관심을 갖은 필자는 수년간 평화활동가연차대회에서 권고된 평화활동가들의 재충전과 훈련의 과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는 당시 대회에 참가한 기독교 배경의 평화단체 활동가들과 연대한 "기독교평화아카데미(기평아)"의 출범으로 나타났다. 기평아는 퀘이커 배경의 <비폭력평화물결>, 에큐메니칼운동 배경의 <청년평화센터 푸름>, 해외갈등지역에서의 평화캠프를 기독청년들이 주도하던 <개척자들>, 그리고 역사적 평화교회인 메노나이트계열의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가 공동주관하여 기독교 평화일꾼을 양성할 목적으로 학기제 운영을 2006년부터 기획하여 4년간 운영해 왔다. 여기에는 갈등해결, 성서와 평화, 평화신학, 비폭력영성과 실천, 해외평화캠프사례 등의 각 단체들의 훈련 모델을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여러 명의 젊은이들이 이와 연관하여 해외의 메노나이트계 훈련 사업이나 퀘이커계 훈련센터에 다녀오면서 각 평화단체의 실무자로 활동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실제로 기평아의 경험은 동북아에서 평화훈련 센터의 필요성으로 발전하여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의 펀드 10만불을 받아 2008년부터 <Northeast Asia Regional Peacebuilding Insititute(NARPI)>설립 구상에 들어가 한국, 일본, 몽고, 대만, 중국, 러시아 6개국 평화단체들이 실행위원으로 참가하고 필리핀의 <Mindanao Peacebuilding Insititute(MPI)>를 모델로 2011년부터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평화활동가 양성을 위한 6개 강좌가 8월에 열리게 되어있다. 이는 국내 평화훈련을 지원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가들의 훈련과 네트워크 및 시스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업이 흘러갈 예정이다. 이러한 지역적 운동의 다른 연대운동은 필자가 관여하는 일본의 헌법 9조(평화조항)의 수호를 위한 <평화헌법시민연대>와 <한일평화100년네트워크>의 한일간의 지역평화운동의 강화와 한일간 평화교류의 활성화이다.

필자는 그간 국제적으로 효과가 입증되고 문화적 편견이 적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평화훈련모델을 국내에 꾸준히 소개해왔었다. 여러 평화단체들과 공동연대하여 요한 갈퉁의 TRANSCEND, 조지 레이키의 비폭력직접행동모델을 국내에 처음으로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지금은 "한국AVP활동가 모임"이라는 활동가들의 훈련 커뮤니티로 발전한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를 2007년 독일 퀘이커 훈련가들의 지원을 통해 이 모델을 한국에 정착시켰다. 이 모델이 감옥과 시민사회단체에 주로 뿌리 내리고 있다면, 2009년부터 준비해온 역사적 평화교회로부터 나온 모델인 "청소년평화지킴이(HIPP-Help Increase Peace Program)"도 2010년부터는 학교와 지역아동센터를 중심으로 그 효과를 검증하고 금년부터는 진행자를 배출하는 훈련과정을 만들어 AVP모델처럼 훈련 커뮤니티라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평화훈련 및 평화교육 모델로서 AVP나 HIPP들은 자기긍정, 타인존중, 협력, 소통, 갈등전환, 그룹 프로세싱(문제의 분별과 협력적 해결), 신뢰의 공동체 형성, 정의실천과 기획 등의 훈련주제들을 민중교육론의 차원에서 교육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의 개인의 경험과 상호응답의 관계 속에서 다룬다. 여기에는 스토리텔링, 고안된 참여형 활동 나눔, 성찰 그리고 에너지를 주는 놀이를 섞어 참여자들 스스로가 과정을 통해 자기 성장과 배움을 얻는 자기발견식(self-heuristic) 배움을 갖도록 한다. 그리고 이는 또다시 현장에서 워크숍 진행자로서 설 뿐만 아니라 배움 과정에서 얻은 통찰을 일상에 적용하는 인식의 전환과 갈등상황에서의 적용능력과 도구를 갖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들 모델은 개인으로 활동가로 남지 않고 신뢰와 훈련의 커뮤니티를 구축하여 정규적으로 서로의 성장과 현장을 돌보는 힘과 기술을 서로를 통해 얻고 지원하는 활동을 확대해 나간다.

2009년 말부터 새로 조직한 연대활동은 "회복적 정의 네트워크"이다. 이는 강제, 처벌, 구금, 배제의 응보적 정의에서 깨어진 관계의 개선과 공동체의 회복 그리고 갈등 당사자와 관련 공동체의 협력적인 문제해결과 책임이행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사법계만이 아니라 교육과 일상에서 실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운동을 모색하기 위한 관련단체 실무자들과 활동가들의 모임이다. 여기에는 <평화여성회내 갈등해결센터>과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의 갈등조정모델, <비폭력평화물결>의 AVP, <한국비폭력대화센터>의 비폭력대화라는 회복적 실천의 훈련 단체들과 재소자 현장을 지닌 <기독교 세진회><한국교정복지협회>등의 단체들이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 2010년 12월 초에 "회복적정의 전문훈련가 양성 국제 워크숍"을 마중물로 하여 금년부터 학교와 지역현장에서 회복적 정의에 입각한 갈등조정(또래조정 포함)과 회복적 교육을 중심으로 그 활동이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

평화교육과 평화훈련 그리고 회복적 정의와 관련된 여러 네트워크는 현재 광명의 지역단체인 <광명교육연대>와의 협력 사업으로 광명지역의 학교에 평화단체들이 컨소시엄으로 하는 평화수업을 금년부터 실험모델로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광명지역에서 평화훈련의 모델 도시로 구축하고 앞으로 2년 안에 훈련센터를 새로 세우기 위해 평화훈련 커리큐럼들과 워크숍을 배치하고 현장 활동가들의 배움의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이는 경기도 다른 지역에 모델로 확산하기 위해 특정 학교나 지역을 평화구역(zone of peace)사례로 만들어 이를 평화훈련가 및 교육자들의 연차 컨퍼런스를 통해 다른 곳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앞으로 필자가 소속해 있는 남북평화재단의 지부인 인천, 부천, 익산, 고양 등에 평화훈련모델 자원으로 제공하고 지역의 평화훈련센터들에 대한 역량부여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면 이는 또한 훈련에 있어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의 평화훈련 활동에 있어서 깨달은 것은 평화활동에 있어서 지역현장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핵심역량을 세우고 그들을 훈련하기 위한 지역현장의 욕구에 맞는 훈련모델의 형성과 지속적인 훈련 커뮤니티의 구축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앞서 보여준 도표처럼 전체 평화구축의 영역에 있어서 작은 일부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슈에 대한 분석만큼이나 관계와 하부 시스템 구축(중간 및 풀뿌리 지도력 세우기) 그리고 훈련과 교육 및 이들 훈련가에 의한 사회변화 기획은 앞으로 시급히 고려해야 할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산은 그러므로 자신의 샬롬에 대한 길떠남에 대한 꿈을 철저히 해서 그 비전을 온몸으로 체화하고 순수하게 발하고 증언하고 이 꿈에 함께 할 창조적인 핵심역량을 훈련하는 데 있다. 하느님 나라는 엄연한 현재의 사실이다. 이 현실을 보는 이들에게 응답을 요구하는 능동적인 현실로 제시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그 "너희"는 단순한 군중이 아니다. 샬롬 통치에 대한 꿈이 자신의 정체성으로 된 자이고, 개인이 아닌 핵심역량으로서 훈련 커뮤니티에서 투쟁하며 사랑을 배우고 동료를 피스빌더로 세우는 자이다. 각성하라, 선동하라, 조직하라 그리고 훈련하라--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평화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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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5 09:31 2011/05/0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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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제자직의 새 영역으로서 평화구축-기독교 평화구축신학을 향하여(5)- :: 2011/05/05 09:13

                                   -기독교 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

                                                                                                                                  박성용

------ 목차 ------

머리말

1. 위기와 전환의 시대에 있어 신학의 자리매김

2. 복음의 핵심으로서 샬롬의 통치

3. 지배체제의 분별과 샬롬 통치의 변혁성

4. 평화의 제자직과 혁명적 복종

5. 오늘의 제자직의 새 영역으로서 평화구축

6. 평화구축을 위한 작은 시도의 사례: 평화훈련을 통한 관계와 시스템 구축

결론


오늘의 제자직의 새 영역으로서 평화구축

오늘의 지구화된 죽임-폭력-혼돈의 규모와 전체 개인과 지역에 대한 중차대한 영향으로 인해 제자직의 사명은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이는 신앙의 선조들이 경험하지 못한 빈곤과 질병의 지구화와 핵산업의 인류와 환경에 대한 전례없는 위협으로 인해 제자직에 있어서 평화실천은 더욱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위에서 기술한 복음의 핵심으로서 샬롬의 통치와 이를 위한 제자직에 있어서 지배체제에 대한 분별과 하느님의 탈지배 질서에로의 선포와 증언의 중심성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전신갑주로서 또 다른 도구들이 샬롬 통치의 실현을 위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복음안에 있는 평화에 대한 열정과 전망만이 아니라 샬롬의 지배를 강화하는 사회과학으로서 평화학과의 조우가 그것이다. 특히 간디의 진리의 길이자 과학으로서 비폭력에 대한 그의 진리실험과 실천방법이 현대의 기독교평화운동에 불을 재점화시켰다. 이를 통해 과거에는 고백차원에 있던 평화증언과 개입은 더욱 그 전략적인 힘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평화신학은 평화구축을 위한 전략적 수행에 대한 기능을 담당하는 "일하는 신학"(working theology; 샐리 맥훼이그의 용어)이 되어야 하고, 오늘의 제자직은 평화구축자(피스빌더)의 역할을 포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는다.

존 폴 레더락에 따르면 "평화구축(peacebuilding)"은 중장기적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위한 요소들인 과정, 접근법, 단계 등을 포함하는 역동적인 작업을 말한다:

평화구축은 좀더 지속가능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향해 갈등을 변혁시키기 위해 필요한 과정, 접근방법, 단계의 모든 층들을 포함하고 생산하며 유지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은유로 말하자면 평화는 단지 시간과 혹은 조건에서 한 단계가 아니라 역동적인 사회구조이다. 그런 개념은 투자와 재원들을 관여시키고, 건축의 디자인 그리고 노동의 협력, 터닦기 그리고 상세한 마무리 작업과 계속적인 유지관리 등의 구축하는 과정을 요청한다.

평화구축은 정의로운 평화를 위한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일련의 가치와 원리속에서 정치적인 전략적 기획을 구상한다. 이는 단지 전쟁이후의 갈등의 변혁과 대화와 조정 및 협상만이 아니라 폭력이 없는 사회를 위한 예방적 접근도 포함하는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창조하는 데 일한다. 따라서 갈등의 현장의 증상에 대처하는 "앰블란스 운전하기"의 위기 대처의 방식을 넘어선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전략적 접근방법을 제시한다. 다양한 접근방법들을 연계하는 공동협력으로서 평화구축을 도표로 보자면 다음 페이지의 그림과 같다. 접근방법에 따른 다양한 방법들의 각각의 기여와 보완을 통해 공동의 비전을 모으는 것이 평화구축이며 여기에는 공통적으로 가치, 관계적 기술들, 분석적 틀거리 그리고 과정들이 각각의 접근 방법에 반영되어 있다.

평화구축 접근법들의 연계성

 

접근방법으로서 평화구축에 공통으로 교차하는 가치, 기술, 분석 그리고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가치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욕구)과 인권의 보호, 상호의존성, 파트너십, 폭력제한으로서 정의로운 평화와 인간안보를 말한다. 관계적 기술로는 자기 성찰, 능동적 경청, 외교적이며 단호한 대화기술, 창조적인 문제해결, 협상 및 중재조정이라는 기술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것들이 사용되는 영역은 예를 들면 갈등전환,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정신외상치유의 영역이다. 분석의 틀거리로는 지역현장의 이해, 제도와 기구 그리고 정책에 있어서 구조적 폭력과 문화적 폭력 등에 대한 분석도 포함된다. 여기서 보듯이 가치와 관계 등에 있어서 평화구축은 중요한 영적 차원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과제이기도 하다.

과정과 관련하여서는 다음 도표에서 보듯이 이는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수행하기, 직접폭력을 줄이기, 관계를 전환하기 그리고 능력을 구축하기의 순환 과정을 말한다.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수행함에 있어서 의식화와 대안적 힘의 창조 그리고 비폭력 전술의 개발이 포함된다. 직접폭력을 줄이는 데 있어서는 희생자를 만드는 것을 방지하고 가해자를 제어하며 평화구축의 과정을 위한 안전의 공간을 만들고 법적 사법적 시스템과 인도주의 지원 그리고 평화지대의 형성과 긴급대응 프로그램 등이 요청된다.


평화구축에 있어 관계의 전환은 중심 원리이다. 이는 개인, 가족, 공동체, 실업계, 구조 그리고 정부의 관계들을 전환시켜 손상과 파괴의 작동 과정을 건설적인 성장과 발전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모색한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용서와 화해의 기회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용서와 화해의 평화구축에는 영적 차원이 존재하게 된다. 샬롬의 종교적 개념은 이런 올바른 관계의 감각을 구체화시킨다. 이를 표로 보면 다음과 같다.


능력 배양의 문제는 단순히 목도하는 폭력적인 갈등의 종식을 넘어 장기적인 자비롭고 평화로운 문화의 형성에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문화와 사회를 지지하는 구조, 기구, 정책, 조직에 있어 어떻게 책임을 지고 능력을 수행할 것인가가 요구된다. 여기에는 사회 발전, 군사력의 인간안보로의 전환, 평화훈련과 교육 그리고 연구와 평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평화구축의 비전이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평화구축을 위한 전략적 기획이 요구되어진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결정하고, 누가 그 씨앗을 심고, 그 꿈을 양성하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 씨앗이 발아할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역 풀뿌리의 능력과 욕구에 따라 변화의 수준(개인, 관계, 문화, 구조적 변혁)을 조율하고 활동을 위한 비판적 대중과 핵심역량을 구축하며 전략적 실천을 위한 핵심 원리와 가치들을 확인한다. 다음은 갈등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평화구축에 대한 활동의 내용을 정리한 도표이다:



필자가 이 도표를 통해 한국의 상황에서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영역은 바로 응답의 수준에 있어서 관계와 하부 시스템 구축이며 시간틀 구조에서는 준비와 훈련 그리고 사회변화 기획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평화활동이 주로 소수의 카리스마적인 비저너리에 의해 집중되고 명망성있는 상층의 리더십에 의해 주도되면서 두 가지 약점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고통스러운 저항의 과거를 공유한 인맥과 학연에 의한 배타적 인맥형성으로 인해 평화활동에 있어 최상의 아이디어와 가치있는 모델들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과 배움의 커뮤니티(community of activism and learning)"가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의 단적인 예는 그간에 가장 선도적인 기독교 평화운동을 해왔다고 평가되는 NCC의 정의평화위원회나 화해통일위원회의 활동 임무와 과제에도 남북물자교류나 평화로운 통일운동이 평화운동의 핵심처럼 이해되어 평화학적 관점에서 평화구축 활동전략이 부재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둘째로 카리스마적인 비저너리와 명망가의 상층 지도력(top-level leadership)으로 대변되는 문제점은 과거 문민정부 10년간의 상층 지도력의 정치참여로 인해 풀뿌리 평화활동 현장의 황폐화와 지도력 승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나마 남아있는 평화 활동가들이 지역자치, 평화운동, 환경운동, 에큐메니칼 운동 등의 모든 활동에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활동하면서 핵심역량의 강화와 지역적 뿌리기반의 조성에 있어서 전문성과 시간 그리고 공동대응의 노력이 딸리는 형편이라는 점이다.

존 폴 레더락이 지적했듯이 평화구축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핵심역량과 지도력의 문제에 있어 중간층 지도력과 풀뿌리 지도력의 강화와 시스템의 구축에 대한 강조에 대해 필자는 동의하며 이 문제는 한국의 평화 활동에 있어 매우 긴급한 전략적 과제가 되고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매년 27만명의 젊은이들이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2년간 몸에 배이고 군사문화에 젖어서 군대에서 세상으로 나오고 있다. 이에 반하여 한국 전체를 통털어 스스로 평화활동에 대한 자의식을 갖고 평화를 위한 삶의 기술에 관심을 갖고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이미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면에서 객관적인 연약함이 존재하는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부분은 풀뿌리 현장과 부문을 책임지고 활동하는 핵심역량의 훈련과 조직이고 이들을 위해 훈련 모델과 비전과 힘을 줄 수 있는 사회변혁의 기획과 활동을 위한 관계구조와 하부시스템의 형성이 요청된다. 전선운동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전선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지의 구축이다. 폭력과 갈등의 최전선에 나가는 사람에게 적절한 사람 살리는 기술과 힘을 부여하는 도구를 제공해 주는 전략적 공급원이 없다면 그 저항의 지속성과 결과는 명확히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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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5 09:13 2011/05/0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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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제자직과 혁명적 복종 -기독교 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4)- :: 2011/05/05 09:01

                                   -기독교 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

                                                                                                                                  박성용

------ 목차 ------

머리말

1. 위기와 전환의 시대에 있어 신학의 자리매김

2. 복음의 핵심으로서 샬롬의 통치

3. 지배체제의 분별과 샬롬 통치의 변혁성

4. 평화의 제자직과 혁명적 복종

5. 오늘의 제자직의 새 영역으로서 평화구축

6. 평화구축을 위한 작은 시도의 사례: 평화훈련을 통한 관계와 시스템 구축

결론



평화의 제자직과 혁명적 복종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이야기는 “평화를 위한 복음”(행10:36)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사역은 평화의 선언과 성취이며 따라서 “그는 우리의 평화”(엡2:14)라고 고백할 수 있다. 그래서 원시그리스도공동체는 복음의 핵심인 "평화의 하나님“(롬 15:33, 16:20, 고전 14:33, 고후 13:11, 빌 4:9, 살전 5:23, 살후 3:16, 히 13:20)에 대한 신앙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샬롬의 통치로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는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이 따른다. 이 제자도에 대한 응답은 모방과 뒤따름 그리고 사명을 초래한다. 제자는 예수와 함께 있도록, 예수와 같은 권위를 갖도록, 예수가 하듯이 설교하고 치유하고 악의 세력과 대결하도록 촉구받는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둡니다(약3,18).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14,17).

하느님의 샬롬의 통치는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권능이 지금 작동하고 있기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대안적인 생활방식과 사회형태에 대한 전망과 이에 대한 투신을 요청한다. 바울에 따르면 십자가는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칭의의 능력이자 의인의 고통이 악인들의 사악함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악의 세력의 실체를 밝혀내는 힘이 되고, 압제와 예속에서 건저냄을 받는 새로운 전환(유월절 사건)이 되며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간에 증오와 적대감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화해를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자, 정의의 종이 되어 거룩한 사람이 되는 성화의 길을 열게 된다. 십자가에 대한 이러한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이며 사회정치적 영역에서의 변혁과 투신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제자직에로의 초대와 연계되어 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6-27)

존 하워드 요더가 지적한 대로 이 구절의 핵심은 "종교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견고한 가족적 유대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의 한가운데서 예수가 지금 자발적 헌신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 제의나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넘어 샬롬의 통치에 투신하기 위해 기존 사회의 미움까지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이슈 파이팅 공동체이다. 여기서 문제는 제자가 됨으로 선택해야 할 부르심의 삶에 대한 성격에 있다. 곧 제자직은 십자가와 불가불 연계되어 있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운명과의 일치이며 지배권력에 맞서서 탈지배와 비폭력을 수행하는 혁명전사의 운명에로의 부르심과 그런 삶의 방식에 대한 자발적 선택을 의미한다. 그 혁명적 성격은 권력과 힘에 대한 180도 전위(transposition)에 있다.

이 세상의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 중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 식탁에 앉은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 중에 어느 편이 더 높은 사람이냐? 높은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눅 22:25-27).

관계방식과 사회질서에 대해 예수가 세우려 했던 것은 기존의 리더십과는 사뭇 다른 대안의 리더십이다. 곧 이것은 "세상 왕의 통치 방식을 벗어나는 이 대안은 '영성'이 아니라 종노릇(servanthood)이다." 그 차이는 종교적 제의의 차이가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 참여하되 거기에 속하지 않는 질적인 삶의 차이이다. 낮은 자리에서 섬김은 모든 기존의 권력에 대한 불가피한 도전이 되고 새로운 사회적 전망의 실마리가 된다.

예수가 선포하신 것은 세상 가운데 살면서 그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새로운 삶의 태도였다. 곧 이 땅에서 성취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어휘나 심상은 성격상 '실존적'이거나 제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었다. ...예수의 수난이 불가피했던 것은 정당한 자기 방어책을 포기하는 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신화론적 세계관속에서 종교권력의 지배와 사회정치적 상황에 있어서 로마의 제국주의의 침탈이라는 이중적 억압 속에서 원시그리스도공동체는 필자의 이해로는 경이롭게도 윤리적 민감성에 있어 혁명적인 인식전환이 예수와 바울에게서 있어왔다. 그것은 바닥존재로 하여금 도덕적 주체로 세우고,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케노시스(자기낮춤)의 그리스도의 본에 따라 잃은 자/마지막 된 자/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사랑과 섬김에로의 자발적인 복종에 신앙실천의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의 사역을 영혼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당시 가장 어려운 사회적 분열과 갈등의 대상인 적대적 관계의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의 화해속에서 신적인 현존을 보았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읍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읍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읍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읍니다. (고후 5: 17-19)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란 각 개인의 존재의 변화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 화해라는 인식과 실질적인 사회정치적 관계의 변화를 말한다. 샬롬은 분열과 억압을 종식시키며 화해속에서 자유와 일치를 위한 강력한 실재(reality)가 된다. 이것은 지배체제의 중심 가치들에 대항하는 강력한 투쟁을 불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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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5 09:01 2011/05/0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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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체제의 분별과 샬롬 통치의 변혁성-기독교 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3) :: 2011/05/05 08:58

                                    -기독교 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

                                                                                                                                  박성용

------ 목차 ------

머리말

1. 위기와 전환의 시대에 있어 신학의 자리매김

2. 복음의 핵심으로서 샬롬의 통치

3. 지배체제의 분별과 샬롬 통치의 변혁성

4. 평화의 제자직과 혁명적 복종

5. 오늘의 제자직의 새 영역으로서 평화구축

6. 평화구축을 위한 작은 시도의 사례: 평화훈련을 통한 관계와 시스템 구축

결론


지배체제의 분별과 샬롬 통치의 변혁성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가 위탁한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요14:27)를 위임받아 이를 통해 살고, 세상의 평화와 주의 평화의 차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니며 세상의 평화에 대항하여 주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산다. 로마가 법과 무기의 위엄을 통해 보여준 제국의 평화가 아니라 탈-지배와 비폭력 그리고 평등과 약한 자에 대한 배려, 섬김과 친교를 통해 이룩되는 평화에 대해 헌신한다. 에스겔이 받았던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라...”(겔34,25-29)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 원시그리스도공동체에서는 그 샬롬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와 위탁명령에 대한 헌신의 공동체 일원으로 자신을 인식하며 살아간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도래하고 있고 현재에 침투하면서 실제 삶에서 작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에 의해 이 세계가 변화되고 다시 새롭게 될 수 있으며 그렇게 틀림없이 되고야 말리라는 강한 인식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현상의 질서에 대한 변화를 태동시킨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샬롬의 통치는 필연적으로 변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역으로 다루어져 온 죄와 죄악과 용서의 구속론적인 교회 전통의 제한성을 넘어서 샬롬의 통치는 존재(존재의 용기로서 은총), 윤리(비폭력적 관계), 구조(탈지배 체제)의 포괄적인 영역에 대해 통전적인 이해와 헌신에 대한 응답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러한 샬롬의 통치를 수행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를 막는 것에 대한 분별(discernment)이다. 그 장애는 바로 지배 체제(system of dominance)이다. 바울은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제공한다: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그래야 악한 무리가 공격해 올 때에 그들을 대항하여 원수를 완전히 무찌르고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엡 6:11-13)

하느님의 샬롬의 통치의 도래는 하느님의 탈지배적인 자유의 주권성이 우리의 삶과 제도에서 실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적은 혈과 육의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타락한 영과 전도된 가치의 어둠과 혼돈의 질서인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이며 이들을 삶에서 분별해 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들 영적인 힘들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구조와 기관들 혹은 체제들의 내면성"이자 "죽음의 왕국의 조수들"이다. 월터 윙크에 따르면 이런 권세들의 정체는 형이상학적인 진술로가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다루어서 생명과 평화를 주도록 세워진 거룩한 소명을 배신한 제도와 구조의 실제적 영성으로서 악신 그리고 이 세계를 지배체제 속에 가두어 두는 정신성을 사탄으로 이해하기를 제안한다. 그럴 때 권세, 세력의 악신, 암흑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의 악령들은 인격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제도의 내면성을 하늘의 스크린에 투사한 것으로 이해할 때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한다.

권세와 악신으로 표명된 물리적이고 역사적인 제도/기구의 내면성이라는 지배체제는 "폭력을 통해 힘있는 자들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을 떠받쳐주기 위하여 일종의 종교", 즉 "폭력 그 자체가 궁극적 관심, 만능약, 기분 좋은 자극, 중독성 도취, 관계의 대용물이 되는 종교"가 되어 억압을 거룩한 합법성으로 위장하고 권력을 신비화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대중은 이들 권력과 억압기구들이 주는 안전, 성공, 풍요와 부라는 구원의 약속에 의해 흡수당한다. 따라서 지배체제는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이 전체에 강요하기 보다는 전체의 동의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국가안보체제, 계급주의, 성차별 등등의 "소외시키고 소외된 정신(ethos)"를 뜻하는 체제(system)이 권력에 의해 구조화되면서 지배체제는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 또한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면서 사회화하는 작동을 하게 된다.

우리 삶의 현상학적으로 존재하는 악, 혼돈 그리고 우상이라는 지배체제에 대한 영적 분별과 더불어 바울은 변혁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무기로 온 몸을 단련하기를 동시에 제안한다. 예수와 바울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지닌 영적 분별의 역할만이 아니라 실천적 과제인 투쟁을 위한 공적인 노력과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지배가 아닌 섬김(꼴찌의 자리), 평등, 비폭력(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기), 악령축출, 아웃사이더 포함하기의 식탁 등의 사역을 통해 샬롬의 새로운 질서를 개시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서 정의의 종으로 살기, 화해, 사랑, 하나님의 전신갑주 등의 언설속에서 나타난다. 샬롬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저항과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것이 중요해지고 그것이 예수의 제자를 불러 모으기와 바울의 교회 세우기의 역할이었다. 도래하는 하느님의 샬롬의 통치가 기존의 비인간화하고 소외시키는 권세의 우상화와 치열한 싸움을 필연적 것으로 보며, 여기에는 악마화하는 것에 대한 영적 분별(discernment)과 변혁에로의 참여(engagement)가 이 하느님 나라운동의 중심 원리로 작동하게 된다. 월터 윙크의 다음 도표는 탈지배의 대안적 질서가 기존의 지배체제와 어떻게 다른 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회적 형태

지배 체제

하느님의 탈지배적 질서

성별(gender)의 차이

가부장적: 서로 다르다는 것은 우월/열등을 의미함

성의 평등: 서로 다르다는 것은 전 문화에 이르게는 하지만 지위의 차이에 이르게 하지는 않음

권 세

군림하는 권세: 사람의 생명을 주무르는 권세, 통제, 파괴

서로 나누는 권세: 베풀고 생명을 베풀고, 지원하고, 양육함

정치

정복, 독재정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적

외교, 민주정치, 권능을 부여함, 탈중심적

경제

착취, 탐욕, 특권, 불평등

나눔, 충분함, 책임성, 평등

종교

남성 신-시샘, 분노, 처벌, 율법을 줌

여성신-포용적인 신의 형상

어머니/아버지, 사랑/심판

동정적임/매정함 자비로운/강요하는

관계

지위를 세움

지배를 위한 위계설정

노예, 계급주의, 인종차별주의

우리들/그들 경직됨

연결을 꾀함

실현을 위한 위계설정

기회의 균등

우리들/우리들 유연함

변혁의

형태

폭력, 강제, 전쟁

비폭력적 대결, 협상, 포용

이 변혁에로의 참여에 있어서 그 과제는 단순히 적대자에 대한 물리침의 싸움이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적대감이 아니라 둘을 하나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하여 상대로부터 선을 이끌어 내어 모두가 하나의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이루는 데로 나갈 수 있게 하는 협력적 파트너쉽의 회복(엡 2:14-21)을 적대자로부터 끌어내는 데로 투신한다(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전적인 투신은 심지어 "여러분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롬12;1) 정도로 단순히 지적인 동의를 넘어서 하느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를 위한 적극적인 개입의 전인격적인 활동이 요구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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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5 08:58 2011/05/0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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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핵심으로서 샬롬의 통치-기독교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2) :: 2011/05/05 08:56


                                          -기독교 평화구축 신학을 향하여-

                                                                                                                                  박성용

------ 목차 ------

머리말

1. 위기와 전환의 시대에 있어 신학의 자리매김

2. 복음의 핵심으로서 샬롬의 통치

3. 지배체제의 분별과 샬롬 통치의 변혁성

4. 평화의 제자직과 혁명적 복종

5. 오늘의 제자직의 새 영역으로서 평화구축

6. 평화구축을 위한 작은 시도의 사례: 평화훈련을 통한 관계와 시스템 구축

결론





복음의 핵심으로서 샬롬의 통치

원시그리스도공동체가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갖고 당시 유대교에 대한 변혁운동에서 자신의 길을 가게 된 것은 두 가지 근본적인 인식과 가치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첫째는 유대교가 지닌 야훼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로서 종교적 제의(율법, 정결법 등등)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었다. 두 번째는 당시 로마 제국이 약속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힘과 권력 그리고 무기와 전쟁에 의한 지배와 소수 지배 엘리트 집중의 부의 축적에 의한 평화에 대한 대안의 모색이었다. 원시그리스도공동체의 이러한 종교적 제의를 통한 거룩의 길과 무기와 부의 통치로서의 로마의 평화에 대한 거부는 제 3의 길로서 이 지상에서 평화와 적극적 비폭력의 길로서 현실화된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의 수행과 이에 대한 참여운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종교적 제의를 통한 거룩의 길에 대한 유대교변혁운동으로서 그리고 무기와 권력에 의한 힘의 평화에 대한 대치로서 원시그리스도공동체는 그 상징적 표현으로서 종교적 제의의 중심인 시나고그(회당)대신에 민중의 마을집회인 에클레시아를 부름받은 자들의 모임장소인 교회로, 로마의 10가지 형중 가장 잔인한 십자가형을 자신의 종교적 심볼로, 정복과 전쟁의 승리의 희소식으로서 유앙겔리온(good news)을 탈지배와 비폭력의 평화의 소식으로서의 복음으로 180도 전환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러한 전환을 통해 자신의 삶의 과제와 정체성이 무엇인지, 즉 무엇에 대해 반대하며 투쟁하고 무엇을 건설해야 하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최소한 예수를 대표로 하는 이들 그룹들은 종교의 울타리가 아니라 임마누엘이라는 궁극경험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탈-지배와 비-폭력의 새로운 질서의 구축이라는 소명을 위해 일어서며 이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연해진 개개인의 내면과 공동체의 사건이 된다.

원시그리스도공동체가 선포한 에이레네(평화; 샬롬의 헬라어)의 선포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그리고 이제까지 전례가 없었던 세상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과 개입에 대한 이들 공동체의 핵심적인 확신을 진술하는 것이었고 이는 하나의 놀라움이자,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로 이해되어졌다. 그들의 에이레네는 당시 유대전통의 샬롬의 개념을 재구성하거나 재해석한 새로운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과거의 것을 잇되 여기에는 새로운 생활실천운동으로 갱신되어졌다.

새로운 현실이자 생활실천운동이 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거기에 둔 "평화"는 원시그리스도 공동체안에서 우선적으로 일상의 현실이 되었다. 그들은 서신과 서로의 인사와 작별을 할 때 이를 주로 사용하였고 파송에 있어서도 중심 메시지가 되었다. 이는 구약의 미가서 6:8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핵심 주제인 정의롭게 행하는 것, 따뜻하게 사랑하는 것, 겸손되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에 대한 재 통찰과 새로운 의미부여로서 생활화되고 있던 진리의 경험이었다. 즉 우리의 삶이 임마누엘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다는 은총 안에 사는 신앙적 방향전환(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걷기), 타자에로의 윤리적 결단으로서 방향전환(따스하게 사랑하기) 그리고 탈지배의 구조적인 방향전환(정의롭게 행하기)라는 존재의 터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사회정치적 구조의 3중주의 균형과 통합에 대한 포괄적 전망으로서 샬롬의 통치의 현실화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예수와 바울의 이해를 통해 좀더 명료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예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에 대한 선포와 이에 대한 실천과 연관되어 있다. 샬롬은 침투해 도래하고 있고("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라") 이는 세상이 주는 샬롬과 다르다(요14:27). 이는 지배와 위로부터의 강제, 칼과 권력 그리고 군사와 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총과 아래, 섬김과 비폭력 그리고 일치를 통해 구현되는 새로운 현실성이다. 비록 이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처럼 현재적 실현은 단지 징조와 작음으로 시작되지만 엄연한 현실이며 이에 응답하는 자들에게 능동적인 현실이 된다(마3,2; 4,23; 눅10,9;11,20, 17,21;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이 샬롬의 통치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가운데 역사하고 변혁시키며 세상 권력과 투쟁하는 '세력 force'로서 나타난다.

예수는 자신의 비유와 설교를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 (첫째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 잃은 양을 위해 내가 왔다;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하게 하러 왔다; 이 작은 이들에게 행한 것이 바로 나에게 행한 것이다)을 강조하고, 식탁교제를 통해 죄인들, 세리들과 같은 사회적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의지를 보여주셨고, 치유행위를 통해 몸의 안녕과 돌봄이라는 실천, 그리고 더 나아가 평화와 화해의 제자의 선택과 평화 공동체의 형성(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대야와 수건의 발씻기심)을 통해 샬롬의 3중 토대인, 존재론적이고, 관계적이며, 시스템적인 포괄적인 샬롬의 통치를 개시하고 확산한다.

그의 하나님 선포는 자신의 치유목회와 식탁교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며 이에 뒤이어 샬롬의 통치를 위한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과 악의 세력과의 대결을 촉구한다(막3:13). 예수의 샬롬의 지배와 통치의 도래에 대한 선포와 이를 위한 제자들의 선택과 훈련은 샬롬의 통치로서 하나님 나라는 현 질서의 변화의 가능성을 확언하고 이미 그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는 하느님의 샬롬의 힘이 선물로 주어지고 이미 세상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며, 생명을 풍성케 하고(요10:10), 잃은 자를 선택하는 대안적인 생활방식과 사회형태를 성취하기 위해 응답하고 투신하는 것을 요청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하게 감지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적 회개를 전제로 하며 이를 통해 재산, 사회적 지위, 권력, 종교에 대한 이해가 바뀌게 된다. 이는 산상수훈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신분들이 가질 가치들, 낮은 자리가 신성의 현존(구유에 누운 아기가 평화의 왕임을 아는 징표가 됨; 지극히 작은 이들에게 하는 것이 내게 한 것이라는 최후 심판의 언급)이요 따라서 이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바울의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평화의 선언과 그 성취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예수는 “우리의 평화”(엡2:14)이시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를 통해 소개되고, 자신의 유대전통을 갱신하게 된 근본 원동력으로서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롬 15:33, 16:20, 고전 14:33, 고후 13:11, 빌 4:9, 살전 5:23, 살후 3:16, 히 13:20)이시다.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빈번한 언급은 사도바울이 ”평화“라는 단어 안에서 그리스도교 복음의 전체적 내용과 핵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평화란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새로운 조건이자 새로운 현실성이었다(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안에서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다”). 그리고 이 평화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근거한 하나님의 의와 연결되어 있다( 롬5: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바울에게 평화는 신학적 진술이 아닌 능력의 체험이자 활동의 중심 동기가 된다. '성령을 통해 누리는 정의, 평화, 기쁨'이라는 현실성으로서 샬롬의 통치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을 파고들며 영향을 미친다(고전7:15하 -“하나님은 화평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롬 12: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공동체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그들의 의지와 사역에로 전념함으로서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바울에게 특히 강조되는 근본적인 신앙행위는 평화는 화해의 현실과 화해로의 직무에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고후 5:17-19와 엡2:14-21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이 화해에로의 소명은 그의 사역의 정체성의 근본이자, 기독론과 제자직의 본질에 대한 이해로 일관성이 있게 연결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을 통해 우리와 화평을 이루셨고, 죄인이며 원수된 우리가 이 참혹한 현실로부터 자유함을 받고 하나님과 평화가 다스리는 그 상황속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위한 소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읍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읍니다. 그리고 그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읍니다. (고후 5: 17-19)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하셨습니다....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이 건물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건물의 가장 요긴한 모퉁이돌이 되시며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그 건물의 기초가 됩니다. 온 건물은 이 모퉁이돌을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고 점점 커져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됩니다. (엡 2:14-21)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고 화해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이 화해의 이치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가 말한 "새로운 인간" "새로운 피조물"은 존재적 측명이 아닌 윤리적 측면에서 화해와 연결되어 이해되어지며, 화해는 이 새로운 피조물의 활동의 내용이다. 이 화해사역을 통해 모두는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불리움을 받으며 이 화해의 목표는 누구도 제외됨 없이 서로 연결되어 '주님의 거룩한 성전'을 이루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친교를 이루는 경지까지 이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읍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읍니다."(골1:19-20)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과 새로움은 소생의 경험이 아니라 화해의 경험 곧 평화의 경지로의 새로운 몸의 부여받음과 연계되어진다. 이 화해의 직무는 악과의 타협이 아니다. 오히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에서 보듯이 원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그가 선을 행하도록 개입하며 궁극적으로 그가 자신 안에 있는 선의 가능성을 작동시켜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도록 변혁시키도록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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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5 08:56 2011/05/0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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