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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의 시 감상-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세요/틱낫한 :: 2008/12/13 09:46

 

생명평화 시 감상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세요 /틱낫한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세요.

                                       틱낫한


 

내가 내일 떠날 거라고 말하지 마세요.

나는 오늘도 여전히 도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세요. 매순간 내가 도착하고 있는 것을

나는 봄 나무의 새싹으로

새로운 둥지에서 노래를 배우는

부러질 듯한 날개를 갖는 작은 새로

꽃 속의 벌레로

돌 속에 자신을 숨긴 보석으로 도착하는 것을


나는 아직도 오고 있습니다.

웃고 울기 위하여, 두려워하고 희망을 갖기 위하여

나의 심장 고동 소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탄생이며 죽음입니다.


나는 강물 위에서

탈바꿈하는 하루살이입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그 하루살이를 먹는 새입니다.


나는 연못의 맑은 물에서

행복하게 헤엄치는 개구리입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다가가

그 개구리를 잡아먹는 물뱀입니다.

나는 피부와 뼈, 다리가 대나무처럼 기는 우간다의 아이입니다.

그리고 그 우간다에 죽음의 무기를 파는 무기상입니다.


나는 해적에게 강간당하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작은 배를 탄 12살짜리 소녀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보거나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그 해적입니다.


나는 권력을 한 손에 움켜 쥔

권력가입니다.

그리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국민들에게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그 사람입니다.


나의 기쁨은 봄과 같아서

모든 생명체에 꽃을 피울 만큼 따스합니다.

나의 고통은 눈물의 강과 같아서

4대양을 가득 채울 만큼 가득합니다.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세요.

그래야 나의 울음과 웃음을 모두 들을 수 있고

그래야 나의 기쁨과 고통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깨어날 수 있도록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세요.

그래야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둘 수 있습니다.

자비의 문을 말이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평화는 실재와의 접촉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평화는 삶의 가장 자연스러운 현실체이기 때문이다. 만일 삶은 고통과 다툼 그리고 분쟁으로 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그리고 그 수많은 다양한 존재들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도저히 일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지속적으로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평화는 존재의 근거이다.


대학 졸업한 직후 7년간 수안보에서 멀지않은 조령관문 고사리마을에서 살았을 때이다. 도시화로 인해 이농현상이 두드러지던 그 시절, 적지 않은 집들이 사람의 온기가 없이 방치되어 폐가가 되었었다. 아침 산책길에 우연히 그중 하나를 지나다가 돌담 쪽으로 굴뚝이 나와 있던 그곳에서 갑작스런 장면에 멈추게 되었다. 거기에는 사람의 인적이 없던 덕택에 하나의 커다란 거미줄이 쳐져 있었고, 두 개의 실재가 동시에 눈에 들어와 현란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 장면은 징그럽고 소름끼치게 느껴지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거미를 무척 무서워했었다- 제법 큰 거미와 죽어서 둘둘 말려있는 잠자리와 나방 몇 마리의 잔해들이 주는 삶의 치열한 약육강식의 실재였다. 잡혀먹고 잡아먹는 이 치열하고 고통어린 실재는 검은 거미의 흉측스러움과 죽어 빈껍데기 형체만 남은 곤충들의 잔해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토록 그날따라 크게 다가온 것은 바로 대학을 졸업하고 시골에 들어와 마을사람들과 몇 년 살면서 느껴지는 내 삶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비전에 대한 절망감, 혼자서 거기에서 뾰족한 돌파구 없이 견디며 산다는 무거움에 의해 심신이 나약해지고 추락의 경험을 내적으로 한창 겪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빈곤으로 황폐해진 농촌과 특히 산마을의 숙명어린 체념의 분위기속에서 자연의 이러한 죽이고 강탈하며 희생당하고 빼앗기는 현실은 서로 크로즈업이 되어 실감 있게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현실은 바로 마침 아침햇살에 투명하도록 아리게 반짝거리는 이슬들의 합창이었다. 그 전체 거미줄위에 촘촘히 박혀서 햇살을 받아 비추어내는 그 순수 투명의 질서지음, 물방울의 환한 웃음과 무리진 환희의 춤, 투명한 구슬보다 더 영롱하고 생생하게 질서지어 허공에서 춤으로 뻗어있는 그 현란함으로 눈이 부실정도였던 것이다. 그토록 밝고 맑으며 찬연한 이슬들이 비어있는 텅빈 허공 속에서 미풍에 가냘프게 흔들리며 춤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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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그 아름다움. 순수의 극치! 그 작디작은 영롱함들이 주는 품위와 미소들. 나는 이 죽임과 빼앗음의 실재와 순수한 투명의 밝음의 실재를 한 곳에서 동시에, 분리되지 않고 서로 이율배반적이면서도 하나의 일치로 보게 되었다. 서로 역설적인 이 두 실재가 서로의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리고 충분히 각각의 실재가 서로를 포섭하며 내 가슴을 파고 들어왔던 것이다. 잠시 멈춰있던 그 순간이 얼마나 영원처럼 느껴지던가. 시간과 의식의 흐름이 차단되고 망연자실 두 실재에 사로잡혀 있던 그 역동적인 만남. 그 어느 쪽도 상대방을 침범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눈물이 나던 것일까?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로, 가슴이 파열되어지는 듯한 진지함과 환희로 갑작스러운 떨림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깊은 위로와 고통에 대한 극복의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80년대 대학생들이 느꼈던 사회에 대한 절망감, 시골의 빈곤에 대한 깊은 애련, 나 자신의 삶의 모습에 대한 방황과 절망의 삼중주 어둠의 현실 속에서 마치 거미의 죽고 희생되는 그러한 처절한 생의 현실과의 동화됨으로 오는 아픔과 고통의 극대화가 내가 직면한 사실상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거미줄처럼 전신과 전 생을 묶어서 탈출할 수 없는 그런 갑갑함의 그물망 속에 갇힌 나의 모습은 그 거미줄의 참혹한 실재 속에 반영되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런 현실과 다른 가능성인 죽음과 희생과 공존하는 이슬의 투명하고도 찬연한 실재, 이 경이로운 밝음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이자 신비인가! 이 두 진실한 현실의 공존으로 인해 나는 오히려 고통과 희생이라는 무거운 현실성에 갇히지 않고 전체 속에서 투명하도록 맑고 밝은 또 다른 현실성을 동시적으로 보게 됨으로 초월의 가능성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내가 내일 떠날 거라고 말하지 마세요.

나는 오늘도 여전히 도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세요. 매순간 내가 도착하고 있는 것을

나는 봄 나무의 새싹으로

새로운 둥지에서 노래를 배우는

부러질 듯한 날개를 갖는 작은 새로

꽃 속의 벌레로

돌 속에 자신을 숨긴 보석으로 도착하는 것을


나는 아직도 오고 있습니다.

웃고 울기 위하여, 두려워하고 희망을 갖기 위하여

나의 심장 고동 소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탄생이며 죽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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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과 사라짐, 그 수많은 꽃피지 못하고 절단당하고 꺾이고 훼손당한 것들의 사라짐은 깊은 아픔을 우리에게 남긴다. 살아있는 동안 네가 그토록 힘들어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난 미쳐 몰랐었지. 한번쯤은 웃으며 미소지어줄 수도 있었는데... 정신차려 내 주변을 돌볼 수 있게 되었을 땐 이미 넌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어. 굿바이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 제대로 바라보아주기만 했었더라면... 사회적 타자이던 생태적 타자(eco-Others)이건 그렇게 수없이 손짓하던 것을 난 그땐 알지 못했어.


제대로 굿바이해보지 못하고 자신의 현존의 자취조차 지워진 빈 공간에서, 그 연약한 몸 떨음 속에 깊은 두려움과 아픔들이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늦게나마 알아차렸을 땐 이미 사라져 버렸어. 그런데 너의 떠남으로 인해, 사라짐으로 인해 이제야 너를 회상하고 너를 부르게 되었지. 떠나감으로 이제 내게 돌아오고 있는 거야. 사라져 빈 공간으로 남아있기에 영혼은 너를 만나게 되었지. 너가 이제 다시 나타난 거야. 작디작은 순수한 찬연함으로 그렇게 너는 다가오고 있는 것이지. 수많은 사라진 것들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렇게 너는 나가 되고 있지.


첫애 “산하”가 이름조차 불러보지 못하고 사산되어 영안실에서 나 홀로 보냈을 때, 서로 미소한번 주고받지 못하고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한 채로, 품에 서로 안아 따스한 온기를 서로 느껴보지 못한 채로, 아니 굿바이란 말조차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로 떠나고 사라져 버린 너가 찬연한 순수로 가슴에서 잉태되고 있었음을 발견한 것은 너에 대한 고통을 씻고 겨우 잊게된 십 수 년이 지나서였지. 가슴에 생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면서 내가 이젠 평화에 대해 고민하며 살게 되면서부터였지. 내 의식 속에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와서 그렇게 너는 다시 태어나고 있었던 것을... 


내가 떠내 보냈던 것들이 결코 사라져 없어지지 않았음을, 아니 사라져 없어진 존재가 되었기에 내가 이제 존재하고 있음을, 심장의 박동소리로 다시 태어나고 있음을, 귀향하여 이미 내 존재로 화(化)해있음을, 신념이 되고 삶이 되었음을 난 이제야 알게 되었지. 그대가 떠남은 무언가의 나로 향한 도착임을 알게 되었어.  



나는 강물 위에서

탈바꿈하는 하루살이입니다.

그리고 봄이 오면

그 하루살이를 먹는 새입니다.


나는 연못의 맑은 물에서

행복하게 헤엄치는 개구리입니다.

그리고 소리없이 다가가

그 개구리를 잡아먹는 물뱀입니다.

나는 피부와 뼈, 다리가 대나무처럼 기는 우간다의 아이입니다.

그리고 그 우간다에 죽음의 무기를 파는 무기상입니다.


나는 해적에게 강간당하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작은 배를 탄 12살 리 소녀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보거나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진 그 해적입니다.


나는 권력을 한 손에 움켜 쥔

권력가입니다.

그리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국민들에게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그 사람입니다.


나의 기쁨은 봄과 같아서

모든 생명체에 꽃을 피울 만큼 따스합니다.

나의 고통은 눈물의 강과 같아서

4대양을 가득 채울 만큼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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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와 새, 개구리와 물뱀, 우간다 아이와 무기상, 강간당한 소녀와 해적, 권력가와 재소자. 아아~삶은 어찌 이토록 불평등하고 참혹한 것인가. 희생자와 가해자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숙명의 현실은 나의 가슴을 찢어놓는다. 하루살이와 개구리 그리고 우간다 아이와 강간당한 소녀들이 너무나 힘이 없이 무력하기만 한 것일까? 아니면 새와 물뱀, 무기상과 권력가들이 너무나 잔인한 것일까? 


무너지는 현실과 침해하는 현실 속에서 아파하는 자의 아픔이 잊혀지는 현실 속에서, 가해자의 몰인정함과 사나움을 격노하면서 손가락질하면 속이 풀릴까요? 정당한 조치를 어디까지 해야 공정하게 될 것인가요. 그렇게 무리들을 분류하고 정의하며 비난을 얼마나 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만큼 무언가 정당한 행동을 한다는 것으로 인해 또한 가해자를 가해하는 또다른 폭력은 있지 않을까요. 정당한 행동이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폭력은 어떠한가? 


윤리적인 기준을 선정하기 이전에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나는 ‘느끼고 있다.’  나는 하루살이이자 새이며, 개구리이자 물뱀이고 때로는 우간다 아이이자 무기상이었으며, 강간당한 소녀이자 해적일 수 있고, 권력가이자 강제 수용소의 재소자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이 나를 떨게 한다. 내게 위치만 주어지고 힘만 주지면 언제나 난 쉽게 새, 물뱀, 해적, 무기상, 권력자인 것을...  


그런데 난 이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판단보다 더 내 내면의 깊숙이에서 본래 존재론적으로 그들은 하나이고 나도 그들과 하나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나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A는 언제나 “A아님”으로 이루어져 있다. 틱낫한이 종이하나에 구름, 새, 바위가 있다고 한 말을 나는 믿는다. 종이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 나무는 바람, 구름, 바위, 흙에 의해 존재를 품수 받는다. 그러니 가만 보면 종이 속에는 삼라만상이 모두 들어 있고 그 속에는 나도 들어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불교의 어려운 가르침을 들이대지 않아도 ‘서로-존재(inter-being)'이다. 하루살이 속에 새가 있고 새 속에 하루살이가 있다. 우간다 아이와 무기상은 다르지만 자비와 공감을 통해서 우린 ’보편적 인간성‘이 지닌 공통된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정죄하지 않되 서로의 인간성을 볼 수 있다면 거기엔 변화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지금의 보복행위의 순환과는 다른 탈출구가 보이진 않을까?  


평화와 갈등은 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지요. 우리는 갈등과 분쟁, 부딪침과 격동의 소란함을 볼 때, 마치 파도라는 현실세계를 보는 것이다. 그것은 진실하고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가 보는 현실적 상황이다. 그런데 그 파도는 실제로는 더 큰 실재의 부분 그러니까 물/바다라는 실재의 변형인 것도 사실이다. 파도의 높낮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물/바다는 실재의 전체를 차지하고 파도는 겨우 표면적인 현상인 것이지요. 평화는 실재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여기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평화는 서로-존재의 실제적이고 내적인 차원이다. 떨림과 고요의 울림 이 둘은 서로를 포섭한다.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세요.

그래야 나의 울음과 웃음을 모두 들을 수 있고

그래야 나의 기쁨과 고통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깨어날 수 있도록

진정한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세요.

그래야 내 마음의 문을 열어 둘 수 있습니다.

자비의 문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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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 아이와 무기상, 하루살이와 새가 나타내 주는 비극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비극적 현실 뒤에, 그러나 아직도 살만한 삶의 의미와 찬연한 역동성이 존재한다.  울음과 웃음, 기쁨과 고통이 서로 맞물려 있고, 우리가 ‘서로존재’임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정죄하고 비난하기가 아니라 공감과 자비를 통해서 말이죠. 교정하기 앞서 연결하기에 정성을 다해 노력한다면 나는 깨어나 진정한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나로서가 아니라 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새로운 자비의 실재를 확연히 드러내 줄 수 있다.  


파도는 바다의 깊이와 넓이를 드러내 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물과 고통은 평화의 실재의 깊이와 넓이를 드러내어 준다. 한 개의 소금이 바다를 만나 그 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해체됨으로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처럼 이 자비의 실재 속으로 들어감으로서 우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삶의 전체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파도는 더 깊고 더 실재인 물/바다를 불러내고, 물/바다의 고요한 울림은 파도의 떨림과 아픔을 춤으로 화하게 한다. 파도의 부서짐과 생의 혹독한 아픔과 추락이 바다/물의 침묵과 무제약적인 실제의 정온함(serenity)을 포섭하고 틈을 열어놓는다. 바다와 무제약적 실재의 깊이를 통해 일상성의 아픔과 떨림을 전체성안에서 자리잡게 하는 것이기 보다는, 파도와 삶의 떨림('산하'의 상실, 하루살이의 죽음, 아이와 소녀의 고통...)으로 인해 전체성에 대한 감각을 얻게 된다.

흉칙한 거미와  영롱한 아침이슬!  가슴을 파열시키는 잔인성과 일상의 폭력의 실재가 주는 무거운 중압감 그리고 생존의 무서울만큼 잔인한 먹고 먹히우는 현실성. 그와 대조적인 아침햇살에 눈이 시도록 찬연한 이슬방울들의 미소들. 아~아, 난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를 배우고 있다. 참혹한 만큼이나 경이로움으로 전신이 떨림을 맛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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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13 09:46 2008/12/13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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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평화관련 시에 대한 묵상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파동을 일으킨다 :: 2008/06/23 20:20

 

생태평화관련 시에 대한 묵상

                                           
          

나무가 자라는 집

                                                    - 최하림-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몰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 안은 잡목숲을 따라오는

파동 때문에 금세라도 지붕이 무너져내릴 듯

했습니다 그 집의 역사가 유지되는 것은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동박새라는가

딱따구리 생쥐의 역할인 듯했습니다

한낮이 되어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타나 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파동은

조금치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건만

아무도 뒤란을 돌아 문을 따주러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더욱 깊은 파동 속으로 들어가 움쭉도

않았습니다. 해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잠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몰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에 생각해 보면 ‘진리가 무엇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까?’라는 의문과 ‘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함께 이어집니다. ‘진리’가 종교적으로 ‘궁극자’ 혹은 ‘일자’(the One)라는 무한성과 관련된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는 나를 넘어선 위대함과 숭고함이라는 매력은 있겠지만 나의 지금 여기 있음이 풀어지지 않고, 나 자체가 내 삶이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눈멀음이 있게 됩니다.


‘안다’는 의식행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사물 하나가 거기 있는 것이 파악되는 것으로 안다함을 말할 수 있는 건가요? 얼추 그렇게 생각이 들지만 왜 나는 그 수많은 다른 사물들중 그 어느 하나가 주목되고 수용되고 의식속에 존재하고 나머지는 주목하지 않는 걸까요? 특정한 한 사물이 다른 것중에 선택되어 시야에 잡히고 눈에 의식되는 것 말고도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하는 문제는 또 남아있습니다.


이 질문들을 묻게 되는 것은 바로 한 시인의 시가 주는 충격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진리’ 그리고 ‘안다’는 것에 대해 극적인 전환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앎의 대상은 나무, 집, 새, 집 안, 잠목숲, 지붕, 동박새, 딱따구리 생쥐, 늙수그레한 남자, 유리창 마루 거실, 남자...이고 그들이 앎의 대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주목하는 것은 ‘나무가 자라는 집’이라는 하나의 대상이 아닌 열린 공간의 포용성입니다. 하나 하나의 사물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들이 엮어내는 관계의 전체성, 통전성 그리고 상호 엮어짐이 주는 굽이치는 자장(magnetic field)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대상이 출현하지만 집착되지 않고 그 대상들 하나하나는 다른 ‘보이지 않는’ 의미 공간을 열어 보입니다. 나무, 집, 새, 집 안, 잡목숲...등은 각각 자신의 사물성을 지니고 거기 있지만 진실로 거기 있는 것은 그 각 사물성들이 서로 엮여서 보여주는 그 ‘무엇’에 대한 역동성입니다.


존재하는 것에 의해 엮여진 ‘보이지 않은’ 그 무엇의 역동성, 그것은 바로 시인이 붙잡고 있는 ‘진리’의 현시이겠지요.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멈추지 않았습니다.’ 궁극자나 일자, 저 위에 존재하는 초월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인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 시인에게 말을 던지는 것은 바로 ‘작고 애매한 파동’이었습니다. 개념으로 설명을 다하기엔 부족한 한 은유로서 이 ‘작고 애매한 파동’은 시인의 가슴을 사로잡는 것이었고 ‘거기 저 곳의 그 무엇’과 지금 여기 나라는 인식자간에 일어나는 교감의 일치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실존입니다.


미세한 파동, 그것은 인식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식자 외부의 저기 각 사물들이 만들어내는  결합된 그 무언가의 정감적 에테르의 흐름의 상호 굽이침입니다. 각 사물과 인식자는 따로 존재하지만 자신의 독특성은 갖고 있으면서도 개체성은 희미한 구별로 남고 전체를 만드는 그 살아 움직이는 그 무엇- 파동-이 바로 직접적으로 여기, 지금 가슴을 후비며, 눈을 뜨이게 하며 살아 현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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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이 되어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타나 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파동은/

조금치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자유, 사랑, 의지, 평화, 희망, 이상... 이 얼마나 아름답고 눈물겨우며 소중한 말들입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모두가 인간적인 것들, 다시 말하면 인식자로서 인간 주체라는 자기주장이 확고히 들어있습니다. 언제나 유아독존적인 인간 세계만이 세계의 전부인 것처럼 다른 존재를 망각하고 없는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아아~~ 그런데 보십시오. 시인의 눈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인 ‘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그러한 인간의 우월적 지위나, 인간의 시·공간의 확보는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자인 시인도 여기서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늙수그레한 남자는 존재하지만 그 공간을 독점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되지 않습니다. 인식자는 인식하고 있지만 인식자(the seeing one)는 사라지고 인식(the seeing)만이 존재합니다.


새들의 무리, 잡목숲,  지붕, 숭숭 구멍을 둟어대는 동박새, 딱따구리 생쥐, 눍수그레한 남자, 유리창 마루 거실 등과 같은 공간의 존재들과 ‘자라는’ ‘아침 내내’ ‘무너져내릴 듯’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한낮이 되어’ 등의 시간적 존재들은 자신의 거기 있음이라는 독특성은 있지만 개별성이라는 각자의 구별은 해체되면서 그 무언가 살아있는 현존 -파동-을 일으킵니다. 이 파동은 보이는 개체적 존재물이 아니라 존재들(Beings)이 엮어내는 존재의 힘(the Power of Being)입니다. 존재의 힘으로서 파동은 각 존재들의 자기 역할과 동시에 그들의 관계성에서만 존재합니다.


인식하는 사람(시인)도 각 사물도 여기에서는 중심이 아닙니다. 중심없는 중심으로 파동이라는 이 시원적 일치와 다이내믹한 현존력은 각 사물이 현존하면서도 자신을 비움으로 엮어지는 새로운 현존의 보이지 않는 몸-이른바 공동의 정신적·영적인 기운-입니다. 이들은 현시되어 존재하지만 그들은 또한 자신을 비워 사라집니다. 각 현상의 드러남은 그렇게 자신을 비워, 주인이 아니라 빈 공간을 내어줌으로서 새로운 깊이의 공간을 지시합니다.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서로가 자신의 몸을 섞고 융합되어 새로운 실재 ‘근원 같은 곳’을 형성하여 자신을 넘어선 상호관계의 새로운 일치와 깊이의 실재를 노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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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건만/

아무도 뒤란을 돌아 문을 따주러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더욱 깊은 파동 속으로 들어가 움쭉도/

않았습니다. 해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잠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이 ‘근원 같은 곳’은 놀랍게도 다른 곳에 엉뚱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 사물간의 ‘사이’속에서 중심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새들이 무리로 물어내어도’와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동박새와 딱따구리 생쥐’, ‘늙수그레한 남자’의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림’과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 또한 ‘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해질 무렵 예의 남자,’ 및 잠목숲 등들의 존재와 그들의 행위 ‘사이에’ 근원적 중심이 생기고 이 근원적 중심은 파동으로 그러나 ‘작고 애매한’ 파동으로 시인에게 다가 옵니다.


파동은 거기에 구별된 존재로 있지 않습니다. 전체적 그 무언가의 하나, ‘근원 같은 것’은 각 사물을 포용하고 그들을 더욱 그들 되게 합니다. 그 근원은 각 작은 존재들의 공간과 시간 그들의 거기 있음과 그들의 행위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파동은 ‘근원같은 것’을 노출시키면서도 일상의 범속은 그대로 안고 갑니다.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한낮이 되어..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지만’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이라는 범속한 시간, 아무런 의미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성과 단편성은 파동과 엮어져 있습니다. 그 순간성이 ‘근원같은 것’을 붙잡고 살짝 교감을 갖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단지 한 관찰자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이 일상이 지닌 순간, 개별적 존재들의 공간과 어울려 참여함으로서 시인도 보는 자가 아니라 ‘봄(the seeing)'의 현존인 파동이라는 실재속에 존재합니다. ’깊은 적막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존재물의 각 활동이 이 침묵속으로 용해되면서 거기에는 새로운 에테르의 흐름만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 파동은 하나의 단일한 실재로서 강력한 궁극성을 띠고 현존한다는 게 아닙니다. 각 일상 사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쉽게 해체될 수 있고 여리고 쉽게 눈에 띄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파동 실재의 ’작고 애매한‘을 희미하게 느끼지만 시인의 겸비의 감각으로 인해 실재함에 대해 포착하는 것은 놓치지 않습니다. 근원이 확실히 존재하는 객관성의 것이 아니라 각 존재들이 자신을 열어 서로의 관계속으로 들어감으로 형성하는 현존력이기에 ’근원 같은 것‘으로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교만하지 않는 투명한 눈으로만이 잠시 현시하는 이 ’작고 애매한‘ 파동과 ’근원같은 것‘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깊이깊이 남아 일상을 가릅니다.


마침표 없이 흘러가듯 사물을 불러내고 흐르며 다른 존재를 엮어내면서 드러내면서도 사라짐으로 그렇게 파동은 작고 애매하지만 ‘멈추지 않고’ ‘조금치도 변동없이’ 그렇게 현동(現動)하고 있습니다. 소음은 침묵을 불러내고 존재물은 존재의 힘을 불러냅니다. 그리고 나는 모두의 ‘우리’속에서 새로운 존재의 집(oikos)을 부여받습니다. 그토록 이 시인의 눈은 철저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땅에 내려 앉아 자신을 낮춥니다. 그래서 그토록 일상적이고 범속한 것들이 애정어린 존재로 다시금 태어납니다.


아아~ 이토록 맑은 눈이라면 그 얼마나 눈부시고 아리도록 고독한 눈이겠습니까?

그 작고 애매한 파동이 저에게도 일어나기를...


2008.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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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3 20:20 2008/06/2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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