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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수련으로서 비폭력 대화 ③-'감정적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 2011/10/25 09:18
'감정적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 - 영성수련으로서 비폭력 대화 ③ -
알아차림, 연결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선택이 자유를 가져온다
자극되는 상황은 새로운 배움의 스승이 된다
문제의 원인을 어디서 볼 것인가
석가의 견성성불, 이심전심의 법통을 이어받은 6조 혜능의 이야기에 짧은 대화가 있다. 그가 달마에 이어 아직 6조로서 인정받기 전, 어느 날 마당에서 싸우고 있는 수도승들을 만났다. 바람이 부는 날 깃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 깃대가 흔들리는 이유가 바람 때문인지, 깃대 그 자체 때문인지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을 보고 혜능은 말한다: "그 둘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얼토당토않은 이 해답속에는 싸움의 본성이 과학적 진실의 규명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는 지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 숨겨져 있다. 비폭력 대화는 밖 혹은 남이 원인이 아니라 자극일 뿐 원인은 가슴(욕구)에 있다고 가르치는 점에서 혜능의 견해와 일치한다.
위의 통찰을 일상의 문제로 가져가 보면 이렇다. "나는 네가 너무 늦게 와서 실망했어." "엄마는 네가 방을 치우지 않아서 화가 났어." 이런 수많은 말들의 뒤에 있는 인식적 논리는 나의 기분상함, 나의 불행 혹은 불만족한 상태는 '너의 그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너의 그 ~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내가 지금 ~한 상태이야'라는 도식으로 구성된다.
나의 상태가 너의 행동의 원인에 의해 규정될 때, 우리는 로젠버그가 말한 '감정적 노예'상태속에 머무르게 되게 된다. 이렇게 원인-결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통한 논리적 판단으로 살게 될 때, 내가 문제를 해결할 힘과 선택은 상실하고,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너가 변화되어야 하며, 너가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 상황으로 몰고가서 결국은 상대방의 '잘못'을 바꾸기 위해 에너지와 시간을 온통 소비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방법은 강제, 가르치기, 고통주기, 진단해주기, 설득하기 등의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게 되고, 상대방은 이에 대해 자연히 맞서기, 회피하기, 얼어붙기, 묵종하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위협과 두려움의 '결투게임'이 형성되는 것이다.
100% 자기 책임하에 살기
다시 이야기를 살펴보자. "나는 네가 너무 늦게 와서 실망했어." "엄마는 네가 방을 치우지 않아서 화가 났어." 내가 실망한 느낌을 갖는 것은 너의 늦게옴이 내가 소중히 여기는 책임, 약속의 준수, 나에 대한 존중, 충분한 교제시간을 갖기 등의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않아 일어난 것이다. 엄마가 화가 난 것은 네가 방을 치우지 않음으로 엄마의 휴식, 청결함, 가족구성원들의 도움과 협력을 원하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이다. 상대방은 내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자극일 뿐, 내 욕구가 원인이라는 통찰은 비폭력 대화 실천가에게 있어서는 가장 근본적인 통찰이자 삶을 보는 귀중한 인식 패턴이다.
외부의 자극되는 상황이나 상대방은 다이나마이트가 아니라 오직 도화선일 뿐이다. 내 분노의 폭발의 이유는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내 욕구에서 기인한다. 네가/상황이 ~이래서 나는 지금 처지가 ~해라는 '감정적 노예'의 논리는 가장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로 인해 이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검은 색, 흰색, 그리고 회색 -나뻐요, 좋아요, 몰라요-의 색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다른 수십 개의 크레파스 색상을 사용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불행의 근본 패턴이다. 나의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외부의 자극이 내 운명을 결정하게 허락한다. 혜능은 말한다. "움직이는 것은 너의 마음이다."
알아차림, 연결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선택이 자유를 가져온다
감정적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맨 먼저 자극에 대한 알아차림을 강화하는 것이다. 삶의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경험이 일어날 때, 우리는 무엇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평가없는 관찰, 곧 알아차림(self-awareness)이라는 주목하기에 있는다. 이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평가없는 일어나는 것 그래서 나에게 자극이 되는 것을 그냥 주목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상대의 '잘못'에 대한 고치기, 가르쳐주기가 아니라 나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감을 통한 연결의 단계이다. 비폭력 대화는 갈등의 문제해결에 초점을 두지 않고 첫째도, 둘째도 마지막도 연결하기에 둔다. 에너지와 주목하기를 연결(connection)에 두지 교정하기(correction)에 놓지 않는다. 서로의 욕구에 대한 연결이 일어나면 이를 통해 욕구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작동하여 해결책은 '저절로 출현하도록' 하게 한다.
알아차림과 욕구에 대한 연결은 결국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의 인간성을 지키면서, 상대방과 나의 복지(well-being)에 기여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선택을 하게 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피드백은 나 혹은 상대방에 대해 문책이나 비난하지 않으면서 자비롭고 신나는 삶에 대한 통찰과 배움을 강화시켜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한다.
"나는 약속을 소중히 생각하고 내 시간에 대한 배려를 원하기 때문에 나는 실망스러워. 앞으로는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미리 연락을 줄 수 있겠니?" "나는 집에 들어오면 휴식이 필요하고, 집안 일에 있어서 내 시간에 대한 배려를 원하기 때문에, 매우 화가 나고 기분이 상한 느낌이야. 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위협과 두려움, 수치감이나 도덕적 의무감이 없이 자발적인 협조, 기꺼이 해 주고 싶은 상태에서 상대방의 협력을 구하거나, 나의 진정함으로 일관성있게 대화하기가 가능해지고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한 선택들이 일어나게 된다.
자극되는 상황은 새로운 배움의 스승이 된다
비폭력 대화가 영적 수련과 연결되는 지점은 바로 "문제(a problem)"으로 인식한 자극되는 상황(triggered situation)이 해결되는 곳에 머물러 있지 않다. 상대방이 기꺼이 자발적으로 협조자가 됨으로써 나의 강함이 아닌 나의 상처받을 수 있음(vulnarability)이 오히려 효과가 있음으로 오는 감사와 진정성에 대한 확신이 강화되는 곳에서 삶의 근본 토대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게 된다. 아무런 힘을 소유하지 않은 채로 오직 진정성의 대화와 자비로운 연결을 통해 '우리'의식을 얻게 되고 진정성과 자비로운 연결이 참된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극되는 상황에 직면해서 우리의 신체와 의식속에 깊이 프로그램되어 있는 '생물적․사회적 자기방어 본능'으로부터 오는 무의식적 반응을 멈추고 알아차리기-연결-새 가능성의 선택이라는 인식과 행동의 순환을 통해 나-너-우리는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된다. 내 안에 자기 보호의 동물적 반응이 아니라 진정함과 자비가 실재(reality)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자기존중에 대한 충격, 타자는 삶의 충만성을 일깨우는 선물이 되고, 결국은 우리와 세상에는 표면적인 갈등 그 속에 신뢰와 협력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근원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감동을 얻게 된다.
우리의 삶이 '결투게임'의 법칙 혹은 추락의 '중력의 법칙'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놀이게임' 혹은 '별들의 법칙'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바로 편안한 상황들에서가 아니라 자극이 되는 상황이 주는 것이다. 자극이 되는 상황이 오히려 변화의 전환점을 가져다 준다. '낮'만이 아니라 '밤'도 거룩함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 밤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삶의 진실에 대한 명료함으로 인도한다.
모든 존재는 빛을 품수하고 있고, 이 자비의 빛 아래서 자기 존재를 영위하고 있다. 자극이 되는 상황은 우리의 눈을 정화시켜주어서 빛을 경험하게 한다. 우리 모두는 빛을 품수하고 있다. 모호한 빛에서 더욱 명료한 빛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희소성이 아닌 충만함의 충만으로 우리의 삶은 그렇게 열려져 있다.
"우리, 옳고 그름의 저 너머 빈 들판에서 서로 만나세" 수피시인 루미의 이 깨달음은 그렇게 우리를 초대한다. 빈 들판이 확장되고 우리는 결투가 아니라 춤을 배우게 된다. 신은 음악이고 타자는 댄서가 된다. 나와 너의 욕구는 새로운 스텝과 리듬을 가르쳐 준다. 그렇게 하여, 삶의 공간은 춤의 공간이 된다. 공감과 공감이 반향을 일으켜 율동이 된다. 여기서는 오직 두 가지 메시지만 들리게 된다. "부탁이 있는 데요- 저와 춤을 추겠어요?" "감사했어요,-저와 춤을 추어서." 모든 요구의 언어는 로젠버그의 말대로 'please! 부탁이 있는데요'로 번역되어 다른 형태의 춤의 제안으로 받아들여지고, 모든 그 외의 진술은 'thank you! 감사해요"라는 같이 춤춘 것에 대한 진술로 받아들여 질 수 있게 된다.
"부탁이 있는 데요- 저와 춤을 추겠어요?"
"감사했어요,-저와 춤을 추어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흔들리는 것은 마음이니, 그 마음이 진정한 실재로 있다면 보이고 만나는 모든 실재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부처는 말한다. "나는 이렇게(thus, such as...) 들었으니..." Thus-ness, 삶의 그러함, such-ness. 판단없는 빈 들판의 광희(光喜). 여시아문. 그가 그렇게 들은 것이 아니다. 그러함이 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함이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한 예수는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Truth-ful-ness. 진정으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정함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다. 진정함이 실재이고 이것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왜냐하면 그 진정함만이 실재이기 때문이다.
(2011.10.25)
영성수련으로서 비폭력 대화(2): 상호이해와 선택을 위한 비폭력대화의 공헌 :: 2011/10/10 18:10
상호이해와 선택을 위한 비폭력 대화의 공헌
-영성수련으로서 비폭력대화 (2)-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우리의 궁지-"너는 00한 인간이야. (그러니) 넌 ~을 해야 돼 (혹은 내가 가르쳐 줄게)"
아이슬러(『성배와 칼』),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그리고 제레미 리프킨 (『공감의 시대』) 등의 학자들이 주장하던 인류의 일만년의 역사가 사회화라는 프로그래밍으로 정착한 지배체제의 구조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 지배(power-over)와 종속(power-under)라는 논리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살고, 상대에게 그렇게 반응하도록 우리를 길들여 왔다.
월터 윙크가 훌륭하게 인용한 만화영화 "뽀빠이"에 나오는 주인공 뽀빠이, 올리브, 부루투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의 공간이 "결투의 지대"이고 너와 나의 관계는 무찌르거나(맞서기) 당하는(굴복하기) 아니면 도망가는(회피하기) 관계로 여겨진다. 부르투스는 자기의 사랑의 표현을 상대방인 올리브가 알아듣지 못하게 아니 폭력적이라고 해석하도록 소통하고, 이에 대해 올리브는 언제나 한번도 상대방의 중심의도를 물어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부르투스에 대한 악한 이미지에 의해 멀리하고자 하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취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궁지와 문제 해결은 또한 상대방 부르투스가 가진 힘(강제의 힘)에 맞설 수 있는 똑같은 종류의 강제적 힘을 지닌 뽀빠이에게 의존하게 되고, 뽀빠이는 나에게 구원자이고 나를 위해 희생당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를 위한 희생과 노력을 해 주었기 때문에 그의 부드러운 지배를 허용하는 논리를 갖고 살게 된다.
이 만화영화는 관찰자로서 시청자에게는 그 상황이 금방 이해가 가고 나의 설명에 대해 별다른 이의없이 손쉽게 찬성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실제 상황으로 들어서서 나의 타인과의 관계를 분별하고자 하면 뽀빠이 이야기에서 멀지 않은 나의 삶의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것은 갈등의 관계에 있어서 나의 에너지와 관심 그리고 눈은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쏠리게 되고, '상대방이 얼마나 잘못을 했는지'에 대한 입증을 위해 내 논리가 진행되고, 결국은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지 딱지를 붙여 확인하며 이기고 지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된다.
"난 그정도까지는 아니야. 난 부드럽고 교양이 있어서 그렇게까지 심하게 상대를 다루지는 않아"라고 별로 위의 진술에 동의를 안 했던 내가 비폭력 대화를 6~7년 전 접하고서 실천을 하면서 더 예민해지고 심각해 진 것은 쉽게 간파하지 못하는 '부드러운 지배'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른 바 지시와 강제를 넘어서 조언하기, 동정하기, 위로하기, 교육하기, 설명하기, 평가하기, 고쳐주기, 심문하기, 하나 더하기, 무시하기, 이야기해주기 등의 사례들이 사실은 부드러운 지배(power-over)로서 상대방의 자율, 자유, 책임, 존중을 주지 않는 패턴들이라는 데서 심각해지고 고민스러워 진 것이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다 빼고 나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지? 한숨이 절로 나온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나의 렌즈는 언제나 삶의 실재(reality)에 단순화시키는 색깔로 칠하여 검고 희거나 회색인 색깔로 바꾸면서 상대방을 그 농도의 정도에 따라 판단하고 그에 따라 대응하도록 나를 프로그램화 하였던 것이다.
치유와 교정하기 혹은 변화시키기보다 연결이다
로젠버그가 자극이 되는 상황이나 그 자극에 동기를 주는 상대방(혹은 내자신의 내면적 판단이 동기일 수도 있다)이 지금의 그 행위를 바꾸도록 원할 때, 두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라는 것이 나의 행동의 숨어있는 동기를 점검하는 데 결정적이게 되었다.
첫째, 당신은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원하는가?
(이것은 백번 천번 yes이다. 아무렴요, 빨리 그가 바꾸어졌으면 해요. 난 지겹고 힘들어 미치겠어요.)
둘째, 상대방이 변화되는 데 있어서 당신은 무엇이 그 사람의 행동에 있어 동기가 되길 원하는가?
상대방이 나로 하여금 불편하도록 하게 만든 자극되는 상황을 연출할 때, 지금 내가 화를 내고, 때로는 성질을 부리거나, 신체적인 강제를 상대방(배우자, 자녀, 동료)에게 내는 것이 상대방이 바꿔지기를, 변화되기를, 치유되기를 기대하며 하는 행동인 것은 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대응할 때 어떤 동기로 상대방이 바꿔지기를 나는 기대하는 것인가? 두려움, 수치심, 도덕적 의무 아니면 자기 희생? 아니면 나에 대한 존중, 자율성에 의해, 이해를 바탕으로 내 진심이 알려져서, 혹은 나에 대한 배려 때문에?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두려움, 수치, 도덕적인 해야만 하는 의무감이 아니라 존중, 자율성, 이해, 배려 등이 동기가 되고 그런 가치를 통해 우러나와 바꿔지는 것이 나의 가치요 내가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면 나의 자동반응은 바뀔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나의 지금 행동은 그런 나의 소중한 가치를 들어주기 보다는 더욱 멀게 하는 방식으로 나는 상대방과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결은 실재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를 통해 자연스러운 변화를 출현시킨다
비폭력대화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의 하나는 문제가 되는 상황과 상대방에 대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에 -상대방 변화시키기- 관심을 갖기 보다는 먼저 그리고 마지막 시도도 '연결하기'라는 데 있다. 문제로 인식되는 '자극된 상황 triggered situation'과 그것을 행한 상대방에 대해 '잘못'의 시정을 요구하거나 그것을 깨우쳐서 빨리 바꾸도록 요구하는 것이 실제로는 상대방의 맞서기, 회피하기, 굴복하기의 태도를 유발하고,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실행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두려움과 수치심 혹은 해야만 하는 억지춘향의 도덕적 의무감에서 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그리고 이것을 빨리 알아차릴수록 비폭력 대화의 공헌에 대해 눈이 떠지게 된다.
관심의 초점은 이것이다. '문제(a problem)'로 인식되는 자극된 상황에 대한 전통적인 대처방식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전혀 배움이나 성장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상황에서 같은 패턴의 조건들이 형성되면 똑같은 반응을 반복하거나 쌍방이 만족하지 않은 방식을 주고 받는다. 그래서 내 기억은 그 자극되는 상황이 이제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문제'로 각인되고, 그런 상황을 일으키는 상대방은 동료, 가족에서 '낯선자' '문제아' 혹은 '웬수'로 이미지가 각인되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점점 더 상대방과 멀어지는 방식으로 나아가게 되고, 결국은 그런 분리됨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일이 내면에서 일어나면서 그 자극된 상황을 이 정당화에 사용하게 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막는다.
생각해 보라. 그런 자극되는 상황에서 오는 불편함의 한 순간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 보면 그와 나는 때로는 힘든 일을 용케 함께 나누었던 경험, 행복했던 경험들, 그리 나쁘지도 않았던 순간들도 있었다. 아니면 그 자극상황이 아니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미래에 또한 서로 만족하는 관계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들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자극된 상황은 과거의 긍정적인 경험을 모두 삭제시키고, 미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정당화하는 구실로 작용하고 있게 된다: '저런 인간과는 상종도 말아야 돼." "더러운 것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야."
자극되는 상황을 '문제(a problem)'가 아니라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대한 왜곡된 표현'으로 보라고 한 로젠버그의 말을 비폭력대화 실천가들은 매우 진지하게 유념한다. 그 통찰은 아!하는 탄성의 통찰을 우리에게 주며, 상대방이 진실로 원하는 것에 우리가 주목하도록 돕게 된다. 더 나아가, 자극되는 상황을 문제가 아닌 진실로 원하는 것을 보는 기회가 될 때 이해의 지평이 열리면서 사건의 진상 혹은 상황의 전체적 실재(reality)를 보는 안목이 열리게 된다. 상황을 '문제'로 해석하면서 '잘못된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면서 온 '적-이미지'에 따라 우리의 판단을 좁게 가두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여기서 집착에 대한 놓임과 해방을 경험하면서 상황과 상대방을 전체에서 보는 통전적인(integral, holistic) 실재가 펼쳐지게 된다. 문제된 상황과 문제아/ troublemaker로서의 실재에 대한 렌즈가 벗겨지고서 상황의 진실성, 무엇을 소중히 원하고 있는 지에 대한 그 이면의 실재가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된 상황과 문제아/troublemaker에서 상황의 진실성, 상대방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이해로의 인식의 전환은 비폭력대화 실천가들이 추구하는 나와 상대방의 '보편적 욕구'에-예, 자율, 존중, 책임, 휴식, 배려, 진실함 등- 대한 알아차림과 이에 대한 공감을 통해서 일어난다. 우리는 이것을 연결하기 곧 자기 연결하기, 상대방 연결하기라고 부른다. 다시 강조하지만, 바꾸기, 교정하기, 가르치기는 비폭력 대화의 목적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이상스럽게 처음에는 들릴 수 있다- 최소한 경험과 실습을 통해 이해하지 않고는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
연결하기, 연결하기 그리고 다시 또 연결하기! 상대방이 겉으로 표현한 주장이나 입장이면에 진실로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 알아차리고 그것을 거울비쳐주기로 상대방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연결하기'의 근본이다. 물론 이것은 문제로 인식된 자극되는 상황에서 상대방에게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불편함이 일어날 때 적용되는 기술이다. 연결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심리적 실재의 전체에 대한 조망을 얻게 되고, 두려움과 방어의 감각을 내려놓고 제대로 보고 듣게 되어 실재의 전체적인 시각을 얻게 되고 연약함과 신뢰가 주는 서로를 감싸는 선물의 경험을 맛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해결책은 저절로 '출현하게 된다.' 왜곡된 행동의 이면에 있는 진심과 진정성의 실재가 서로에게 보여지게 되면 기꺼이 상대방에게 기여하는 행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젠버그가 말하는 한 가지 원칙, 곧 비폭력 대화의 근본 신념의 하나는 '우리의 본성에는 누구나 상대방에게 기꺼이 기여하고 싶어하는 강력하고도 자연스러운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에 대한 설명이다.
비폭력 대화의 목적은 단순히 갈등해결을 넘어 선택을 증진시킨다
비폭력 대화는 갈등해결의 기법으로서 사회적 기술 혹은 관계적인 심리 치료의 일종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삶을 보는 인식, 가치, 언어행위, 그리고 존재의 터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오는 일종의 영적 수련의 영역을 포함한다.
선택에 있어 이야기 하자면 자신이 어느 한 행동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표현된 행동(전략) 이면에 놓여있는 욕구들의 정체를 밝히고 드러난 충족된 혹은 충족되지 않는 욕구들을 주목하면서 그것을 실현시킬 다른 구체적인 수단(전략)을 생각하게 되면 수많은 다른 전략들이 보여지게 된다. '이것만이야'라는 선택에서 욕구에 대한 다양한 전략들의 지평이 열리게 되고 이는 다양한 선택들을 가능하게 하면서 삶을 풍성하게 경험하도록 돕게 된다. 시도한 행동의 이면에 있는 욕구에 대한 확인은 이렇게 다양한 선택의 문을 열어놓게 되면서 여유와 기쁨 그리고 의미실현의 풍성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가장 미묘하게 숨어 작동하면서도 가장 다루기 어려운 '감정적 노예'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한다. 이는 문제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고 상대방이 변화되어야 내 고통과 불안 그리고 분노가 해결된다는 태도를 취할 때, 결국은 나의 할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내 행복과 안녕(welbeing)이 상대방의 변화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될 때 여기에는 '감정적 노예' 즉 나의 선택이 없는 무력감이나 상대에 대한 분노가 존재하게 된다. 비폭력 대화는 상대는 자극이고 원인은 내안에 충족되지 않은 욕구에 기인한다는 통찰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상대가 아닌 내 충족되지 않는 욕구를 스스로 돌보고 충족하는 방향으로 선택과 의지가 발동됨으로써 자율성이 증가하게 된다. 나의 정서와 행동이 상대방에 매있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고 돌보는 감각이 형성되면서 삶의 존재론적인 축이 내면 깊숙이 형성되면서 풍랑과 격정속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중심감각을 음미하게 된다.
미묘하면서도 언뜻 이해가 안가는 자극의 제공자인 상대방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의 충족하지 않은 욕구를 스스로 돌보고 상대의 욕구에 대한 이해속에서 서로의 욕구를 돌보면서 이를 충족하기 위한 선택을 강화한다. 낯설지만 비폭력대화의 핵심의 하나인 전적으로 100% 자기 책임하에 두기는 자극을 주는 상대를 비난하지 않고 중심을 지키면서 상대를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초대의 공간을 열고, 이러한 행동은 상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시야와 쌍방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게 된다. 신뢰는 이해를 가져오고 이는 정서적 해방과 자율적 선택을 강화시킨다.
자비롭고 풍성한 사회로의 열쇠: "나는 ~느껴요, 나는 00을 소중히 여겨요."
폭력이 정치․사회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의 일상과 나의 내면에서 타자를 어떻게 보고, 자극되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그 근본적인 성격이 놓여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이다. 개인의 내면과 일대일 상대방과의 관계성은 그대로 가족, 직장, 지역공동체, 국가 및 지구촌의 관계에 똑같은 패턴을 양상하게 된다. 규모와 상황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은 타자의 행위에 대한 인식의 방법과 대응논리가 무엇인지가 공통적으로 같은 패턴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배체제가 지닌 "당신은 ~한 인간이야. 당신은 00해야 돼(혹은, 그러니 내가 가르쳐줄께)"로 작동하게 될 때, 맞서기, 굴복하기, 회피하기의 대응방식으로 있게 되고, 이는 서로를 분리/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문제는 단순히 분리/소외만이 아니다. 미래에 있어서 아무런 배움/성장/수정의 교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되게 되는 것이다.
만일 만화영화 "뽀빠이"에 있어서 올리브가 약자이기 때문에 등을 돌려 도망다니지 않고 부르투스에게 정면으로 서서 "나는 ~을 느껴요. 나는 00이 소중해요"라는 말을 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강자앞에서 힘없는 사람이 아무런 자기 방어없이 오직 100% 자기의 느낌과 욕구에 책임을 지면서 이것을 명료하게 상대방에게 말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설사 그 상황에서 브루투스가 자기에게 험악한 행위를 하기 위해 가까이 더욱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뚜렷하게 그의 눈을 보면서 "나는 지금 두렵고, 힘들며, 무척 당황스러워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고, 내가 존중되고 배려받는 것 그리고 소통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어요"라고 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대게의 비폭력대화 참가자들은 처음에 비폭력 대화를 하는 것은 약간 낯간지러움을 느끼고, 상대방에게 그렇게 하면 내가 지거나 무시를 당할 것이라는 코멘트를 한다. 마치 비폭력 대화는 마지막 남아있는 자기 방어의 벽마져 스스로 무너뜨려서 곧장 상대방에게 완전히 패배당하는 꼴을 보기 쉽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계속해서 자기 진심이 전달된다면 상황은 다른 것이 실제 상황이라는 점이다. 대게의 경우 많은 것들이 나의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판단이 실제로는 관성의 법칙처럼 상대방을 그렇게 행동하도록 끌어들이며, 실제로 자기방어없이, 100% 자기 책임의 표현으로서 비폭력적인 대화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하나는 "삶을 변혁하는 평화훈련(AVP; 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이다:
뉴욕의 한 도서관에서 저녁쯤에 책을 대출하여 나온 한 여인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해 공원을 걷고 있었다. 그날따라 주변은 아무도 없었고 마침 자기 뒤에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한 흑인청년이 모자를 쓰고 자기 쪽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음을 발견하였다(이는 미국문화에서는 무엇이 벌어질 것인지 대략적인 예측이 가는 상황이다). 계속해서 따라오는 이 인기척에 이 여인은 더욱 빠른 걸음으로 가고 있었지만 결국은 거의 뒤에서 따라 잡히는 지점까지 이르게 되었다. 상대방의 숨소리를 듣게 된 지점에서 갑자기 이 여인은 뒤로 돌아서 그 청년에게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안겨주면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고 참 감사합니다. 제가 힘이 들어 어려워하고 있는 참에... 고맙습니다. 저의 집이 바로 저쪽 근처인데 거기까지 도움이 필요합니다. 동행해 주시겠지요?" 상대방은 흠찟하며 "어~어!"하며 당황스러워 하다가 여인의 요청에 아파트 앞까지 같이 갈 수 있게 되었다.
로젠버그가 "그렇지만(but)"이란 말을 위협이나 화를 자신에게 내고 있는 사람에게 절대로 말하지 말하고 한 비폭력 대화 워크숍에서 한 여성 참가자가 말한 이야기가 있었다. 읽었던 대목에 대한 기억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새벽 침대에서 자던 자신이 눌림을 받는 것 같아 눈을 뜬 순간, 웬 낯선 사내가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움직이지마. 꼼짝말고 입다물고 있어" 낯선 사내에 밑에 깔린 그녀는 상황파악이 되고 자신이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과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자 갑자기 로젠버그의 "그렇지만 (but~)"에 대한 교훈이 머리를 스치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처지가 매우 힘든 상태이군요".......상대방은 약간의 동요를 보였고 이 여인은 자신이 지금의 경우가 앞으로 자신의 삶에 어떤 고통을 줄 것인지 자기의 느낌과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게 되는 슬픔과 염려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이야기는 상대방이 자신을 누른 상태에서 거의 30분이 넘도록 진행되었고 결국 그 사람은 침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필자가 경험한 이야기이다.
나는 기독교계 한 환경단체가 여는 기후변화와 기독교의 대응에 관한 세미나의 사회를 맡고 있었다. 발제자들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을 갖는 도중에 한 노년의 참여자가 일어나 자신은 지방에서 올라온 모 교회 장로라고 하면서 질문이 아니라 한국교회가 얼마나 썩었는지 비난의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모임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고, 혼자서 그렇게 분노의 에너지와 교훈조로 말이 몇 분간 이어져 가면서 주변에 앉아있던 목사들 그리고 일반 참여자들의 몸이 경직되고, 마치 '저 사람 뭐야? 뭐 저따위 사람이 다 있어'라는 표정의 듣기 힘들어 하는 몸짓이 역력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매우 당황스러웠고 어떻게 개입하여 이것을 마치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주변의 표정에 또한 말하는 사람도 느끼고 있었는지 초점을 잃고 말았고 그래서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 지 제대로 전달이 안되는 상태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도 내가 개입하기 전에 정리되지 않은 말을 회중에게 던지고 앉은 장로님께 사회자로서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니까, 장로님의 말씀의 요지는 한국교회가 이런 중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게 마음이 아프고 걱정스럽다는 것이군요? 그래서 본인이라도 자신의 교회에서 뭔가 환경에 대한 프로그램을 하고 싶으신데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어서 걱정스러워서 저희들에게 도움이 필요하시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었는 데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요?" 나의 이말에 그분은 아주 안도한다는 몸짓으로 나의 말에 끄덕거렸다. 사회자의 응답의 말과 그 사람의 안도의 자세를 보던 모든 참여자들이 뭔가에 감전이 된 듯한 분위기로 돌아가면서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지고 밝아지면서 전체의 무거운 분위기가 돌연 바뀌면서 모두가 편안해지고 남은 시간의 참석자들이 이번 세미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소감을 나누게 되었고 끝나고서 서로 인사하는 표정에서는 서로를 격려하며 헤어지게 되었다.
만일 위의 세 사례 이야기에서 나에게 불편/위험/분노를 주는 상대방에게 힘을 지니고 맞서기를 하는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추측을 해 보면 답이 안나온다. 나는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힘을 쓴다고 해도 상황은 더욱 악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큰 상태였다. 오히려 아무런 힘을 쓰지 않고 "나는 ~을 느껴요. (왜냐하면) 나는 00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어요" (혹은, 3번째처럼 질문형태로, "당신은 ~을 느끼는군요. (왜냐하면) ~이 중요하기 때문인가요?")라는 의사소통이 상대방과 나를 연결해 주면서 상황은 반전이 되었다.
강제, 위협, 처벌, 힘겨루기라는 지배체제의 생활관습이 나의 안보와 안전을 지켜준다는 것은 신화이지 삶의 진실이 아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나의 안보와 안전 그리고 공동체성은 깨어지고 만다. 연결을 통한 신뢰와 이해가 서로의 안전을 지킨다. 위 세가지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단지 비폭력 대화가 위급한 상황, 궁지의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는지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오히려 더 귀중한 교훈이 있다. 그것은 비폭력 대화를 실천한 약자에 의해 힘을 소지한 자, 뭔가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계획한 자가 그 궁지의 상황에서 자신이 계획한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 약자의 도움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자가 자신의 궁지로부터 놓임을 받는 것은 그만한 강한 힘의 소지자에 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힘을 뺀 약자의 적극적인 비폭력 실천에 의해 그는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게 된다. 약자가 강자를 구해주고 강자의 인간성을 지켜주는 인도자가 되는 것이다.
연결을 통해 자비롭고 풍성한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충격이자 강력한 사회적 도구이다. 탈지배적인 파트너쉽의 사회를 형성하는 데는 권리와 의무의 도식으로서는 한계가 있다. 오히려 느낌과 욕구의 자기 표현과 상대방의 느낌과 욕구의 공감이해를 통해서 더욱 현실화될 수 있다는 이 확신은 비폭력실천가들이 공유한 근본적인 성찰이다.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잘못된 행위에 대한 주목과 에너지를 부여하기 보다는 "충족되지 못한 욕구의 왜곡된 표현"이라는 이 이해를 통해 세상은 이제 느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것을 어떻게 충족하고, 또한 충족되지 못한 것에 어떻게 애도하며 배움을 통해 수정해 나갈 것인지를 명료하게 알게된다. 여기에 평화를 구축하는 실제적인 전략과 도구가 있게 된다. (2011.10.9)
영성훈련으로서 비폭력 대화(NVC) :: 2011/09/29 12:47
영성훈련으로서 비폭력 대화(NVC)
박성용
----------목 차--------
-삶의 작동원리로서 성육신 사건
-안(內)과 밖(外)은 서로를 품는다
-절망과 실패의 신비: 자기판단/자기비난은 선물이다
-적대자(enemy)가 신성을 계시한다
삶의 작동원리로서 성육신 사건
필자가 비폭력평화물결에 소속하여 비폭력과 관련된 여러 훈련과 교육에서 활동하면서 최근에 기독교평화활동가로 나 자신의 정체성을 갖을 수 있게 해 준 하나의 체험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인 진리인 성육신에 대한 새로운 체득의 경험의 경험이다. 신앙의 대상인 초월적 존재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진술로서 그동안 알고 있던 이 성육신에 이해는 삶의 실제적 현실(리얼리티)로서 내게 가슴으로 다가온 것이다.
'진리와 은혜가 눈에 보이는 현실'로, 곧 진정성(truthfulness)과 자비(mercy)가 보이는 실재로 우리 현실에서 작동하며 몸(embodiment)을 입을 수 있고, 인간의 보편적 가능성으로서 주어졌다는 깨우침이 다가온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 형상(imago dei)'가 하나의 아이디어나 관념으로 생각되어졌었는데 복음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진실과 자비가 보이는 실재로서 그것도 '충만함'으로 '세상'(월터 윙크의 말에 의하면 더 좋은 번역은 "지배체제")속에서 작동하는 원리이자 실재로서 눈에 보여진다는 것의 충격이었다. 나는 비폭력 대화(NVC)를 5년간 실습하고 교육하면서 비로소 NVC가 기독교의 진실과 자비가 실재이자 빛으로서 힘을 갖고 작동한다는 이 사실(what)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동될 수 있는 지에 대한 그 방법(how)을 알게 되면서 투명하면서도 내면에 걸림이 없는 평온함을 맛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안(內)과 밖(外)은 서로를 품는다
대게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융합하기 어려운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소수의 진보진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구원과 자유의 체득이라는 개인적인 성취가 먼저 있은 후에야 비로소 사회적인 문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흔히 사람이 먼저 되지 않고 사회적 문제의 개입은 어렵다는 인식이 그 것이다. 반대로 이웃의 고난과 아픔의 현실을 외면한 자기 수도의 방식은 무책임한 태도이자 비윤리적이기에 그리고 폭력의 사회적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힘들게 하기 때문에 그러한 지배체제로서의 사회적 문제의 변화없이는 개인의 구원문제가 해결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지닌 진보진영의 활동가들도 존재한다.
위의 '이것이냐-저것이냐'의 우선순위에 대한 이분법적 태도와는 달리 사회적 양심에 대한 문제에 고민하는 기독교인들은 아침 일찍 혹은 특별한 기간에 내적인 영성생활의 시간도 갖고 또한 일부 사회적 참여에 대한 활동에도 적극 개입하고자 한다. 내 주변의 민중교회운동을 하던 몇 분들은 기나긴 민중해방운동의 참여와 해결되지 않은 이슈들의 반복됨으로 오는 피로감에 의해 영성에 관심을 갖고 자기 충전을 위한 노력을 하기 위해 여러 영성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는 분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러한 "이것도-저것도"의 방식을 취하는 이러한 태도는 일반적으로는 사회활동에서 오는 에너지의 소진과 갈등의 문제들의 있는 사회참여 영역과 에너지를 공급받는 영적인 내면의 영역을 조합하는 방식으로서 자신의 '영혼'의 정화와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참여를 결합하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서는 "같이 함께"는 있지만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아직은 서로간의 영역이 구별되어 양쪽에 대한 균형을 잡기 위한 노력과 긴장을 갖게 된다. 여기서의 문제는 사회활동이 영적수련의 장(場)이 아니라 개인의 영적수도를 통한 에너지를 소진하는 곳이 되고 에너지의 공급은 개인의 내면적인 영적 수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나는 "이것이냐-저것이냐"의 우선선위의 택일방식이나 혹은 "이것도-저것도"의 절충주의 방식이 기독교 평화운동에서는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끊임없이 전쟁, 폭력 그리고 갈등의 이슈들이 터져나오는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할 연구시간과 기획 모임 그리고 각종 워크숍 기획과 진행 스케쥴에도 바빠서 사실상 나는 앉아서 기도할 시간이 별로 없다. 그리고 실상 살아계신 하나님, 무소부재의 하나님에 대한 창조신앙에 대한 나의 신뢰는 빛, 일치, 내적인 평화에서만이 아니라 어둠, 분열, 일상적 삶에서도 똑같이 신적 현존에 대해서 있다고 믿는다. 그러한 생각속에서 나는 어떻게 앉아서 하는 방석-명상이 아니라 나의 활동이 '움직이는 명상'으로 나의 활동이 신적 실재의 현존을 맛보는 계기로 전환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져왔었다.
내가 몇 년 전에 나의 질문에 대한 통찰을 받은 것은 퀘이커 교육사상가인 파커 파머와 현대 평화학의 아버지인 요한 갈퉁이 제시하는 '뫼비우스 고리' 법칙에 대한 이해였다. 일반적으로 매듭이 평면상에 펼쳐져 있을 때 그것의 안과 밖은 만나지 않고 서로는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뫼비우스 고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 안은 밖을 만나며 밖으로 '멀리' 갈수록 안으로 '깊이'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 내가 얻은 통찰은 이것이다. 안은 밖을 품고 밖은 안을 강화한다. 타자에게로의 다가감은 새로운 깊이에로의 '초월'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초월의 경험은 실천에 있어서 배움을 주고 실천에 대한 계획에 에너지를 주게 된다. 행동이 영성수련이 되고 그 행동에서 동기부여와 힘을 새롭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이 내게 준 영향은 적지가 않았다. 행동후에 있어야 한다는 쉼의 필요에 대한 요구가 적어지면서 행동과 쉼, 일과 재미가 별로 구별되지 않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없게 되었다. 이건 정말 희안한 경험인데 사실 나는 따로 쉼에 대한 내적인 긴장이 요즘 들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코멘트는 남들에게서 나에게 하는 자주 듣는 소리는 대할 때 편하고 안정적인 느낌이란 말들이다. 최소한 남의 말은 차지하고 나의 내면은 요즘 중심에 안착되어(grounded) 있는 그런 느낌이 자주 든다. 이는 NVC의 욕구의식(needs-consciousness)의 덕분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나 이 행동의 뒤에 어떤 욕구가 충족/불충족 되어 있는 가에 대한 자각과 욕구에 현존하기가 나를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안전한 공간감각을 회복시켜주고 있다.
절망과 실패의 신비: 자기판단/자기비난은 선물이다
불과 며칠 전 NVC 조정중재 1년과정 워크숍 첫 번째 코스를 밟으면서 생긴 일이였다. 조정중재의 5단계 실습중 마지막 단계인 갈등 당사자 쌍방에 대한 욕구찾기이후 쌍방의 욕구에 근거한 요청하기 단계를 실습하였던 적이 있었다. 3인 1조 의자 세팅에서 조정자로서
쌍방에 대해 문제해결을 요청하도록 돕는 실습이었다. 그 실습에서 내가 행한 모델 보여주기에 대해 나는 만족스럽지 못했고 내내 마음이 걸려서 저녁 성찰모임에서까지 내가 실패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고백 할 정도였다.
다음날인 마지막 날, 수확하기 시간에 개인연결작업을 하면서 이 문제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이 자극되는 상황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는 제도로 배울 수 없는 인간인가봐,""왜 나는 배우는 게 이토록 느린거야"였다. 이러한 자기 비판/자기 판단에서 충족하고 싶은 욕구는 물론 손쉽게 찾아졌다. 그것은 능률, 성취, 수완, 능력, 소통이었다. 그런 것들이 충족되지 않아서 아쉬웠던 것이다. 이에 대해 나는 애도를 하면서 다시 다른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자극되는 상황에서 충족된 욕구는 무엇인가? 잠깐만, 아니 실패했는 데 무슨 충족된 욕구가 있단 말인가? 이상스러운 질문이고 뜻밖의 질문이자 모순되는 질문이었다. 이 자기 판단/자기 비난의 자극상황이 나에게 '충족된 욕구'가 뭐냐는 질문은 서로 전혀 맞지 않은 것을 꿰려는 불합리하고, 논리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의식을 모아서 이것에 집중을 하였다. 그리고 발견된 것은 놀랍고도 뜻밖의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답답해하고 낙심하던 이유가 바로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요즘 매우 편안해서 내게 갈등이 있는 것을 찾는다면 매우 시간이 걸릴 정도로 갈등이 없다) 바로 남에게 기여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고 하는 자각-알기, 배움-이 생기면서 뭔가 깊은 감동이 나를 스치고 지나게 되었다. 내 안에 남에 대한 기여에 대한 자기 알기의 '충족된 욕구'를 이해하게 되면서 내 안에 있는 선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자기 판단/자기 비난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이 이제는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선물이 되면서 전환이 일어났고 이로 인한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다.
일상과 활동에서 일어나는 절망과 실패는 NVC의 욕구의식에서 보면 그것 자체가 초월을 일으키는 암호가 된다. 우리가 밖에서 만나는 수많은 'No', 절망 그리고 실패는 따로 한적한 곳에서의 명상수련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얻어서 이것들을 상쇄하게 되는 방법에서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낮과 밤의 하나님, 선인과 악인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우리가 한다면, 밤과 악의 여러 변형된 경험들 그 자체는 양파의 껍질 벗기 기법처럼 그 자체가 거룩한 현존을 알려주는 선물로 변형(trans-formation)되어진다.
적대자(enemy)가 신성을 계시한다
마태기자는 '하나님의 아들(자녀)'가 되는 길로서 "평화를 위해 일하기"(5:9)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기"(5:44)를 연결한다. 그래서 예배보다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와 화해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놓는다(5:23-24). 이것을 비종교적으로 그리고 NVC적으로 말하자면 본래적인 인간성은 적-이미지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적-이미지(enemy-image)는 -그것이 내적이든, 관계적이든- 자기의 한계이고, 자신이 충족하지 못한 욕구의 왜곡된 반영이다. 그러므로 그 적 이미지는 또 하나의 자기 모습이다.
성서는 이에 대한 도움을 주는 예화를 보여준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갈릴리 호수에서 어둠과 폭풍우의 격랑속에서 "자,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let's go over the other side)!"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이 예수의 그러한 '저편으로의 건너감'을 "유령이다(it's a ghost)!"라고 소리 지를 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냈다: "나다(it's me)!" 어둠과 풍랑이 신성한 현존을 계시하는 것이다. 타자(the other side)로의 건너감(go-over)은 신적 현존을 불러일으킨다. 그 신적 현존은 우리의 궁극적인 의미성이 노출되는 곳이자, 통합과 화해가 이루어지는 연결의 깊이를 말한다.
그래서 어둠과 풍랑의 '위협'과 '두려움'의 권세가 그 힘을 잃게 되고 가야 할 방향이 더욱 오롯이 명료화된다. 아니, 오히려 그 어둠과 풍랑의 덕택에 그 똑같은 에너지가 변형이 되어 갈 길을 채촉하게 하고, 다리에 힘이 붓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갱생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를 제자들의 삶에 일어난 실존적인 부활(예수가 다시 몸으로 살으셨다는 '신화적 부활'에 대비하여-본 훼퍼)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NVC-ers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비난과 비판의 부정적 에너지 뒤에서-어둠과 풍랑- 다가오는 신적 현존의 경험을 체험한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속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는 생각은 더 멀리는 마더 데레사, 샤를 드 푸코 그리고 본 훼퍼 등에게까지 올라간다.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은 마태 25장의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었다. 그 본문은 양과 염소의 가름의 기준을 말하면서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내가 병들었을 때..너희가 여기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제시한다. 여기에는 놀랍게도 예수의 신성의 위치전환(transposition)이 일어난다. '저위'에서 '바닥'으로의, 저세상에서 현세의 일(the mundane)에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전환되어진다.
나는 21세기에 들어와서 '9.11사태'로 인한 '폭력과의 전쟁'이 가져다 준 전 지구적인 지역분쟁과 폭력이라는 어둠과 풍랑의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는 위에서 제시한 원시기독교공동체와 20세기 영적수도자 및 신학자들의 이해에 기초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도전은 "적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기"라고 확신한다. 자신이 분노하고 비난하는 대상-적/원수/문제아-을 통해서 신적 현존을 경험하는 새로운 작업이 21세기 영성에 꼭 필요하고, NVC는 이런 점에서 치유와 화해에 대한 방법적 도구를 제공한다.
진실과 자비가 현실이 되고 충만할 정도로 우리가 실제로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빛과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실재로서 그리고 작동 원리(working principles)로서, 세상(지배체제)에 있으나 거기에는 속하지 않는 새로운 실재로 존재한다는 확신은 기독교 비폭력 실천가들, 특히 NVC-er들에게는 이해가 되는 확신이다.
평화훈련의 관점에서 비폭력 대화의 적용 :: 2011/07/14 10:03
평화훈련의 관점에서 비폭력 대화의 적용 메모
- 비폭력 대화(NVC)는 사람간의 갈등을 없애기에 대한 사회적 기술을 배우는 것을 넘어선 다. 그것은 관찰, (판단쇼), 느낌, 욕구, 요청의 구성요소들의 틀이라는 표면적인 형식요소 그 깊이에 있어서 내가 반응할 때 무엇에 대해 반응하는지 (나의 "옳음"을 논증하려고, 상대의 말에 대한 반박을 위함인가 아니면 나의 진실한 내적 욕구에 의한 것인가), 말을 할 때 무슨 의도로 말하는지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습관적이고 자동응답적인 패턴을 늦추거나 멈추고 더 큰 실재(the greater reality as what is)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
- 나와 너 사이에, 나와 내면적 나 사이에 일어나는 혼란과 갈등에 있어 비폭력 대화는 '시비논리(옳고 그름/좋고 싫음)의 뿌리생각(root-thoughts)과 고통을 통해 상대를 변화시킨다는 소통의 틀거리를 넘어 나와 상대의 '진정한 의도'(욕구)를 제대로 듣고 이것에 연결하는 데 초점을 둔다. 평화의 기초적인 토대는 이렇게 변화시키기가 아니라 경청하기와 연결하기를 통해 일어나는 신뢰와 존중을 통해 형성된다. 우리는 이것이 평화의 우주적 원리이며 단순히 윤리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존재론적 측면에서 그리고 인식론적 측면에서 일관성을 지니며, 이 일관성이 힘의 근원임을 이해하게 된다.
- 비폭력 대화의 가장 큰 평화에 대한 공헌은 로젠버그가 말한 이른바 "감정적 노예"라는 근본적인 장애에 대한 해결에 있다. 이념적이고 사상적인 억압이나 지배보다 더 근원적이고 파악하기 더욱 어려운 교묘한 종속은 바로 "너의 000 때문에 내가 000하다"는 원인-결과의 패턴적 인식과 이에 기초한 반응이다. 이런 패턴은 "너의 잘못된 행위가 나의 행복을 망치게 했어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너의 그런 행위를 바꿔야 해"라는 논리에 의해 "~해야만 해(혹은 ~해서는 안되었어)"의 숨은 생각을 가지고 남에게 에너지를 집중하기에 나의 선택과 책임을 상실하게 하고 무력감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나의 행복이 상대방의 변화된 행위에 의존하는 형태를 취하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다. 남/밖이 원인이 아니라 자극이고 원인은 내가 충족하려는 욕구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심리적인 안전의 공간이 확보되고 나는 주체로 서서 선택과 자율을 강화시키게 된다. 결과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응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에 따라 사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 비폭력대화의 독특한 공헌은 삶의 ‘문제’에 대한 이해와 앎(the known)의 세계에 관심하지 않고 현재 살아있는 에너지에 대한 주목하기에 있다. 인식론적으로 그것은 ‘문제(a problem)'에 대한 것이기 보다 지금 현전하고 있는 것(what is up now)에 대한 것에 관심한다. 따라서 갈등은 문제에 대한 봉착으로 보기 보다는 지금 현전하는 것(감정과 활성화된 욕구)를 보는 채널 혹은 마중물로 보게 된다. 다른 상담기법에서 필요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설명과 이에 대한 들음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변화는 뜻밖에도 문제의 해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전하고 있는 것에 대한 연결에서 온다. 연결하기와 경청하기를 통해 자발적인 기여와 회복이 일어난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안 것보다는 신뢰이다. 모호함속에서도 삶의 에너지에 따라 생생하게, 방어적인 힘없이, 놓고서도(let it go and let it be) 더욱 풍성하고 자비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 삶의 ‘승패의 게임’에 말려들지 않음으로 인해 진실하고 자비로운 실재에 대한 감각과 충일감이 형성된다. 나를 방어하거나 상대를 공격해야 할 동기를 갖지 않음으로 인해 그리고 자기 감정과 욕구에 온전히 100% 서는 일로 인해 삶을 자기 책임하에 두는 비폭력 대화는 진실함과 자비의 힘과 그 실재의 차원을 열게 된다. 안전이 방어와 공격이 아닌 진실과 자비에 터닦고 있다는 경험은 신념, 가치, 인식, 윤리적 행위, 삶의 목표를 일관되고 통합하게 함으로써 신성한 에너지의 흐름을 맛보게 하고, 전체성에 대한 감각을 주게 된다. 외부의 적은 없다. 적은 오히려 나의 판단, 평가, 강제, 두려움을 낳는 옳고그름의 생각에 있다. 이 장애물을 제거하면 언제나 내면의 신성한 스승이자 빛이 우리를 안내한다. 욕구라는 “사랑의 신성한 에너지”(로젠버그의 용어)를 신뢰하고 삶에 대한 자신의 감각이 살아나면서 새로운 가능성과 선택이 풍성하게 된다.
- 무거운 것이 공기 위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무거운 것이 공기보다 더 가벼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단순히 물리학적 질문이 아니라 존재론적이자 구원론적인 질문이다. 혼란과 갈등 그리고 더러움이라는 “추락의 법칙/중력의 법칙”(시몬느베이유)에 의해 삶의 무거움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대해 비폭력대화는 상승의 법칙, 곧 알아차림과 욕구의 시원적 에너지에로 나가기를 그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한다. 상대의 ‘No’를 그가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의 다른 ‘Yes’로 듣고, 내 안에 있는 적이미지까지 해체하는 비폭력대화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내면에서 무거움을 내려놓고 공기보다 가벼운 시원적 에너지의 흐름을 맞이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루미가 제시한 “옳고 그름의 저 넘어 텅 빈 들판에서 우리 서로 만나세”라는 ‘텅 빈 공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게 된다.
(2011년 상반기 15주차 공감 워크숍을 마치고, 진행자로서의 메모. 2011.7.14)
비폭력 대화-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과 패턴 분석 :: 2011/03/28 06:32
나를 힘들게 하는 상황과 패턴 분석
-자아성장과 관계증진을 위한 공감 워크숍-
장소: 광명 평생학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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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상황 |
생각 |
응답 |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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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친정아버지께서 내가 정리해둔 화분 위치를 바꾸셨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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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일이 떨어지는 것이 내게 많다" 임의로 아버지는 행동하신다-속말) |
-아버지가 화분 위치 바꾸셨어요? *내가 사과 상자 놓으려고 바꿨어 -다 생각해서 위치 정해놓은 건데 화분 관리도 안하시면서 마음대로 바꾸지 마세요(잠재된 불만드러냄) * 이 집에서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것이 하나도 없어"(화내시고 자릴 피하심) |
(이것도 못마땅함 이해를 드리고싶은 속마음, 평생그렇게 해왔는데 바꿀 수 없다는 절망 상황이 벌어질 때 해결이 안되는 것에 대한 속상함, 불만 ("별것은 아니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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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나온 아들에게 "밥먹어" (응답없음) "야, 밥먹어" |
분노 폭팔 밥을 차려놓았는데(고기) 식었는데도 안나오고 음악만 듣는다 침묵만 지킨다(남편의 반응:깜짝놀라서 "야, 새끼야, 하기 싫으면 하지마" |
(남편이 밉다-속말) 아차, 실수 계안했어요. 좀 참을걸... 서먹서먹한 관계 (쫓겨서 사는 내 모습이 싫다) 문자보내고 싶다(소리지른 걸 미안하다고..) -남편의 반응을 내가 반영하고 있음 (자식의 일로 남편과 나의 갈등이 노출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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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병수발(50일간)로 어머니가 이번주 토요일에 갔더니 힘들어 하심. 남동생과 만났는데,내가 남동생에게 당번을 하라고 했고 엄마와 순번교체가 어렵다고 남동생이 말함 "엄마 나 힘들어갈께!" |
넌 항상 맏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럴 땐 아들의 역할을 못하냐?" |
자신은 손해를 전혀 안보고 어릴 때부터 늘 받는게 익숙하고, 누나들은 항상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함 -억울함 "자기는 편하게 지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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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의 엄마병원이 환경이 나빠 옮기자고 했더니 큰오빠 왈, "출가외인이니 상관마"라고 한다 |
이제 동생으로서는 끝이다. 역시 너 때문에 내가 고통받아(큰오빠 원망) |
알았어 |
단절 "나의 내적 불행은 오빠로부터야"(분노가 치밀음) 죽일놈! -이런 생각 자체가 불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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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보고대회후 평가회의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공식석상에서 이야기할만하지 않다. 너무 개인적이고 사생활 침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
(공식적 행사에서 통역으로 참여한 사람이기 때문에 또 공인의 친척이라는 점 때문에 당사자 역시 함께 나누어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이 정도 이야기는 충분히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
피드백이 분위기상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누군가 불편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나의 발언에도 수정할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상대와 나에 대해 마음이 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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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를 통해 보이는 패턴들>
- 후회와 비난이 공유. 자극이 배움의 통찰을 주지 못함 - 자기 생각에 의해 상게방에게 이야기 한다 (대화가 아닌 독백의 교환) - 존중받고 싶은 데 막대하는 것에 대한 폭발(나에 대한 비난, 판단으로 생각들음) - 가족이기 때문에 심하게(아는 사람에게는 더욱 제어장치가 풀림) - 너 메시지 작동 - 나의 감정상태에 따라 작동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결정을 예측) - 옳고 그름이 드러나면 그른 사람이 승복할 것이라는 생각(실재는 효과가 없음) - 갈등 발생시 해결하는 방식은 콘테스트 방식 (이기고 지는 방식: 지는 것은 손해) - 남을 바꾸려면 내가 강하게 이야기 해야 한다고 생각 (내가 화내는 이유) 상대는 두려움, 수치심, 다른 판단을 지님 - 잘못한 것에 에너지와 노력을 집중 (부정적인 것에 대해 소비, 비난 집중, 해결없음) - 상대방을 바꾸려면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로 인식함 - 하나의 자극이 과거의 수많은 좋은 점을 다 무너뜨린다(생각나지 않게 함) 한번의 사건이 굿바이로 나아가게 됨 - 좋은 관계에 대한 기대는 있지만 방법을 모른다. - 빨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함 (생각없이 즉각적인 반응이 일을 크게 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