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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교실을 위한 교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들: 교실에서 비폭력 대화의 적용 :: 2012/01/28 08:46

평화로운 교실을 위한 교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들

- 진실과 자비, 안전과 신뢰의 교실 분위기 형성하기-


1. 당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당신은 학생들과 연결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일이 당신의 방식대로 되기를 원하는가? 가르치는 용기의 저자 파커 파머(Parker Palmer)는 그가 전 세계로부터 학생들에게 좋은 교사를 묘사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고 말한다:

 

연결하는 능력의 어떤 요소를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학생들과, 학생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모든 이들이 연구하고 있는 주제에 연결시키는 사람....좋은 교사들에 의해 행해지는 그런 연결들은 그들의 방법에 있지 않고 그들의 가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가슴은 지성과 감정 그리고 정신과 의지가 합류되는 곳이다.

 

마샬 로젠버그는 당신은 친절이란 놀이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누가 옳은가라는 놀이를 하고 있는가?”를 질문함에 의해서 의도를 검토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

 

2. 당신은 자신의 학생들을 어떻게 보는가?

당신의 학생들이 문을 통해 들어올 때, 그들은 자신의 생각, 느낌, 욕구, 재능, 흥미, 그리고 선물을 나누는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가? 만일 이것이 그렇다면 당신은 쉽사리 감탄, 경외 그리고 호기심의 감정을 경험하기 쉬워진다. 그 대신에 만일 당신이 불안하거나 두려워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자신의 마음에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아마도 학생들의 하나는 게으르고, 분열적이고, 거칠며, 고압적이고 반항적일 수 있다. 시작에 있어서 그리고 한 해 전반을 통해 학생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종종 당신의 말보다 더 크게 의사소통하게 된다.

 

비폭력 대화는 모든 딱지들을 관찰할 수 있는 행동으로 번역하는 길을 제공하고 그래서 그 행동의 안에 있는 욕구들을 이해하도록 하게 한다. 예를 들면 학생을 게으르다라고 부르기 보다는 우리는 단순히 그가 교실에서 그가 동의하는 것과 부여된 작업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단순히 관찰할 수 있다. 만일 물어본다면 우리에게 그는 피곤해서 밤에 더 잠을 잘 필요가 있다고 아마도 그는 우리에게 말할 수 있다. 더 많은 대화를 통해 우리는 그가 밤에 울어서 그를 깨우는 새 간난아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3. 당신은 각각의 아이들의 선물들을 알아보는가?

어느 다른 것보다 훨씬 더, 우리 각자는 삶에 공헌하기를 원한다-우리의 선물을 나눠주기를 원한다. 우리의 선물들은 광대하게 다양하다; 모두가 줄 수 있는 독특한 공헌들을 지니고 있다. 학생들의 선물을 인식하고 그것들르 받아들이는 당신의 영민함은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공헌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은 당신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일 수 있다. 스와힐리 격언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의 부유함을 그들과 나누는 것이 아니라네. 그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그들의 부를 드러내주는 것이라네.”

 

4. 무엇이 당신의 몸 언어인가?

눈과 눈을 보며 학생들에게 말하고 듣는 것은 실행하기에 쉬운 제안이다. 그란 오직 우리가 그것을 하는 것을 기억할 때만 그렇다. 학생의 키가 얼마나 짧은지에 관계없이 우리는 이런 존중어린 방식으로 움크리거나 앉아서 대화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 키가 큰 학생들을 초대해서 앉게 해서 우리도 그들과 눈과 눈을 보고 대화할 수 있다.

 

5. 얼마나 종종 듣는가? 얼마나 종종 당신은 말하는가?

학생들에게 주의깊게 드는 것은 우리가 그들이 말하는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들을 진지하게 생각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이해, 연결, 그리고 신뢰에 공헌한다. 만일 교사가 교실에서 유일한 한 변화를 가질 수 있다면, 좀더 경청에로 전환하는 것은 아마도 가장 중요할 것이다. 되풀이 하거니와, 학생들은 이것이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6. 당신이 듣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에 대해 당신은 경청하는가? 학생들이 지닌 감정들에 대해 경청하는가? 학생들로 하여금 많은 질문을 만들어 묻고, 그들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 내고 그들 자신의 이론을 구축하도록 함에 의해 내부로부터 스스로 성장하도록 격려하는가? 당신은 그들의 질문을 진지하게 여기고 그들이 스스로 대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신뢰하는가? 혹은 교실은 우선적으로 교과서의 대답과 당신의 지식과 의견을 위한 교단이 되는가?

 

7. 학생이 아니오라고 말할 때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그들의 시도에 있어서 당신의 학생들은 항상 뭔가에 대해 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당신이 그들로 하여금 행하도록 원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응답일 때 그들의 를 즐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당신이 그들로 하여금 하기를 원치 않는 그 무언가를 그들이 하고 있을 때 그들이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혹은 그들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것을 듣는 것은 더욱 어렵고 중요하다 이들 순간에 있어서 당신의 응답은 그들로 하여금 당신이 당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관심하는 만큼 그들의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데 당신이 관심하는지를 알도록 한다. 만일 당신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강요하기를 시도한다면-죄책감, 비난, 수치 혹은 체벌을 통해-당신은 대부분 혹은 오직 자신의 욕구들에만 관심하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들에 대해 당신의 거대한 권력을 기꺼이 사용한다는 것을 당신이 증명하는 것이다.

 

강제가 사람이나 물건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막 때리려한다면 교사는 아마도 상해 받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의 한 사람을 붙잡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강제는 처벌하기가 아니라 보호를 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진다.

(Sura Hart and Victoria Kindle Hodson, "The Compassionate Classroom-Relationship based Teaching and Learning"으로부터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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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8 08:46 2012/01/28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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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서 평화수업의 이해 :: 2011/12/14 12:03

교실에서 평화수업의 이해

                                                                                       박성용 박사/ 비폭력평화물결대표

유일한 가장 효과적인 행동조절 전략은 교실에서의 관계의 질이다.

긍정적인 교실환경은 연결을 구축하고,

학습자를 참여시키며 배움의 결과들을 증진시킨다.



우리 현실의 악몽에서 새로운 꿈꾸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교육현장의 현실은 무엇보다도 빠르게 변화하는 주변환경속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한 배움에 대한 이해에 대한 부정적인 유산에 대한 확고한 청산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에 대해서는 모호함이 있는 갈등속에 있다. 특별히 수업의 산만함, 그리고 청소년들이 개입된 폭력과 갈등의 학교내와 밖에서의 만연은 교육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다. CCTV의 설치, 학교 보안관 제도, 그리고 상담실의 운영 등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종종 악화된 갈등으로 교사와 학생 혹은 학생과 학생사이의 신체적 무력행사의 보고들이 곳곳에서 들리곤 한다. 심지어 청소년 인권조례 등으로 교사들이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마저 줄어들었다는 푸념도 적지가 않다. 문제는 갈등상황에 대한 예방적 조처는 물론이거니와 발생후 이를 다루는 시스템이 없어 사건이 나면 이를 다루는 신뢰할만한 시스템에 의존하기 보다는 감추거나 배제시킴으로서 문제를 풀어가기 보다는 다른 곳으로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교실환경은 미래의 한국사회를 보는 척도가 된다. 왜냐하면 교실은 세상의 축소판이고, 여기서 청소년들이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는가가 20년 후 한국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기 때문이다. 학생,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이 어떻게 관계, 희망과 절망, 삶의 목적, 폭력과 갈등을 다루고 상호 작용을 하는지가 그대로 세상에 접목이 된다. 우리가 지금 직면하는 악몽의 사례들에 대해 학습 공동체의 적극적인 배려와 책임 있는 접근이 미래에 어떤 세상을 우리가 볼 것인가에 영향을 가져올 것이다. 이를 위해 평화롭고 행복한 교실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이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의 전초가 된다. 우리의 악몽을 새로운 꿈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평화교육의 과제가 놓여있다.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 지배체제 모델에서 파트너십 모델로

우리 일상 삶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이나 혹은 교실에서 학생들이 변화되어야 할 동기나 배움의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유효하다. 그 하나는 상대방 혹은 학생이 당신은(교사, 학부모) 상대방이 진정으로 변화되기를 원하는 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모두 주저없이 "예"라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 질문은 나와 갈등하는 상대방이나 교실에서 학생들의 변화나 배움의 동기가 나는 진정으로 무엇이기를 원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상대방이 변하려고 하는 동기나 배우려고 하는 동기가 혹시 두려움, 수치감, 비난과 판단, 처벌과 배제, 보상, 죄책감, 혹은 도덕적 강제나 의무에 근거하여 상대방이 태도를 바꾸거나 배우게 되도록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나에 대한 존중에 근거해서, 자발적인 상호 협력에 근거해서, 내 마음을 알아주고 스스로 자기 책임성에 근거해서 변화나 배움이 있기를 바란다고 한다면 내 행동을 다시 한 번 그런 의도가 충분히 상대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일상의 삶속에서 갈등하는 당사자로서 상대방이나 혹은 배움의 공동체인 학교에서 학생들이 위에서 말한 두려움에서부터 도덕적 강제나 의무에 이르는 동기를 유발하는 행동양식을 불러오는 모델을 우리는 "지배체제(Power-over/under) 모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을 강제, 구금, 배제 등의 형태로 나타날 때 이는 "응보형 정의 모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방식은 옳고 그름의 시비논리에 근거하여 상대의 잘못에 대한 교정으로서 '고통을 어떤 형태로든 부과하여 교훈을 상대방이 얻고 변화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실제 결과로 보면 많은 희생과 비용-고비용 저효율-을 치루게 된다. 이것이 군인, 경찰, 사법관, 교정공무원들에 대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붓고 있는 데도 우리의 안전과 행복에 대한 감각은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화교육은 위에서 말한 모델과는 달리 가슴과 마음을 확장하는 교육, 공감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삶을 서로 풍요롭게 하면서 자신과 타인의 복지에 기여하는 방식을 취한다. 우리는 이를 "파트너십(power-with/to) 모델"이라고 부르고 혹은 치유와 책임 그리고 공동체로의 복귀를 위한 "회복적 생활교육(restorative discipline)모델"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에는 상호존중과 배려, 공감, 비폭력의 실천. 돌봄과 학습의 공동체로서 교실과 학교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 모델에서 배움의 동기는 위에서 말한 모델이 지닌 비난, 판단, 처벌, 보상, 죄책감, 수치심, 책임감, 의무감 등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파트너십 모델에서는 자발적인 자신과 타인의 행복에 기여, 가치에 근거한 행동, 상호관계성속에서의 자신의 정체성 확인, 타인의 차이와 다양성을 선물로 받기 등이 행동에 대한 근본 동기가 되어진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상호관계의 기술인 갈등을 다루는 능력, 존중, 이해, 관용, 공감을 지니고 함께 일하기 등이 적용되어진다.


교실에서 평화수업의 실제

수업에서 평화교육의 핵심은 학생들의 건강한 관계의 발전에 있다. 여기에는 자기 존중과 타인 배려의 가치와 태도를 함양하고, 갈등 에너지를 되받아 싸우기나 경시하기가 아니라 손상을 방지하고 갈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돕는 사회적 감정적 능력(social and emotional literacy)을 발전시키는 데 중심을 둔다. 관계의 질이 학문적 능력을 가져온다는 것은 이미 다중지성 이론이나 사회구성주의 이론 등이 이른 뒷받침하고 있다. 교실의 수업시간에 앉아있는 학생이 칠판앞에 서 있는 선생님의 교안에 금방 몰입하지 못하는 것은 학생의 심리적 실재가 집에서 일어난 일이나 운동장/교실/복도 등에서 일어난 동료와의 상호작용, 그리고 전날에 본 방송매체의 심리적 영향 등으로 심리적 실재가 안전하게 정착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내면에 담고 학교로 오는 학생들을 선생님들은 그들의 내면의 실재에 대해 직면하여 안전한 배움의 공간을 만드는 데 대한 이해와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업은 산만해지고 갈등은 증폭이 된다.

전통적 수업구조에서는 선생님이 아이들의 내면의 리얼리티를 도외시한 채로 수업을 진행하며 행동을 통제하고, 교사나 학교의 기대에 못 미치면 수업으로부터 비난, 구금, 수업의 배제 혹은 가장 잘못되는 경우는 처벌의 결과를 대면하도록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처벌적 혹은 권위주의적 환경은 수업에서 존경어린 관계를 구축하거나 책무를 격려하지 못한다. 다른 극단의 예는 허용적/방관적 환경인데 교사는 교실에서 일어나는 것에 아무런 지도력을 갖지 못하고 학생들의 분위기에 휘둘리게 된다. 학생들과의 관계를 구축할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더 많은 도전들을 얻게 된다. 교육자가 떨어지기 쉬운 올가미는 학생들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는 권위적인 방식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권위적 스타일로 건강한 관계를 갖지 않을 때 모반의 응답을 일으키고 관계를 손상하기 쉽게 한다. 이에 반하여 평화교육은 협력하는 능력, 비폭력적인 문제 해결, 자기 행동에 책임지기의 능력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준다.

평화수업은 배움의 중심주제로서 지기 존중, 타인 배려, 의사소통, 갈등해결과 관계형성, 그리고 영적이며 도덕적인 발달로 구성된다. 이들 중심 주제들 속에 다음의 15개의 개인적이고 사회적 기술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1. 자기 인식하기

2. 자신감을 구축하기

3. 말하는 데 자신감을 발달시키기

4. 경청 기술을 실습하기

5. 느낌을 드러내기

6. 타자를 이해하기

7. 좋은 관계를 증진시키기

8 타인과 공동협력하기

9. 민감한 문제를 토론하기

10. 참살이(well-being)에 대한 감각을 증진시키기

11. 소속감을 발전시키기

12. 타인을 가치있게 여기기

13. 갈등을 해결하기

14. 문제를 해결하기

15. 성찰과 명상

중요한 것은 존경어린 활동의 관계를 구축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일단 이것이 되어지면 교실은 쉽게 그 무엇이든 배울 준비가 된다. 대부분의 평화 수업은 처음에 존중, 이해, 관용, 타인과의 협력, 그리고 갈등에 대한 승/승의 해결에 초점을 두고, 점차 그룹간의 신뢰와 어려운 문제에 대한 그룹 해결 등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면서 자기 폭로와 책임지기와 같은 무거운 활동들이 수반하게 된다. 평화수업은 문제를 교정하기 보다는 활동을 통한 알아차림과 학생들의 경험을 텍스트로 하여 정서적 발전과 상호 돌봄을 강화시킨다. 여기서 교사는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두려움과 강제를 사용하지 않으며 적극적인 경청과 나 전달법을 통해 격려와 수용의 분위기를 형성하여 문제에 대한 당사자들의 책임이행을 촉진시킨다. 평화수업이 일정 기간 진행되면서 기대하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1.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개성을 표현한다.

2.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에 대한 통찰, 인식 그리고 민감성을 증진시킨다.

3. 타자와 우정의 가치를 존중한다.

4. 확신을 발전시키고 자존감을 형성한다.

5. 감정을 알고 건강한 방식으로 다룬다.

6. 동료의 압력에 저항하고 불화를 다룬다.

7. 협력, 나눔, 효과있는 소통과 같은 사회적 기술을 증진시킨다.

8. 위험에 처하는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환영한다.

9. 스스로의 방향정위를 촉진하고 잘못으로부터 배운다.

10. 대안적인 해결과 결정을 추구한다.

11. 변화와 어려움에 대처한다.

12. 갈등해결과 문제해결 전략을 발전시킨다.

13. 충만한 삶을 즐긴다.

14. 재미를 느끼고, 긍정을 받으며, 좋은 느낌의 요소를 주입한다.

위와 같은 학습 효과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평화수업은 단발성이 아닌 지속성을 지닌 수업기간이 필요하고(예, 학기제로 80분~90분의 블록제 수업), 교사만이 아닌 학교의 평화문화 조성과 시스템 형성 그리고 학부모의 참여와 훈련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학생발달에 맞춘 커리큘럼과 타 수업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해외의 경우 미국의 초네티컷주의 뉴 하븐(New Haven)의 "뉴 하븐 사회 발전 프로그램(the New Haven Social Development Program)"이나 뉴욕의 뉴욕시교육위원회와 "사회책임을 위한 교육자(ESR: Educators for Social Responsiblity)"가 연합으로 실시하고 있는 "갈등을 창조적으로 해결하기 프로그램 (RCCP: the Resolving Conflict Creatively Program), 그리고 영국의 타넫(Thanet)에서 실시하는 켄트안전학교(Kent Safe Schools)등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커리큘럼을 짜고, 지역 학교들이 서로 이를 위해 네트워크를 갖고 공동대응을 하고 있으며 각 학교내에서 학부모, 교사 그리고 학생 및 교육부가 연계하여 5년간의 노력을 들여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들이 지난 2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이런 평화수업을 진행해 오면서 평화학교로서 세계적인 귀감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제는 평화수업을 도입하고 한 교사의 노력만이 아니라 학교와 학부모 그리고 교육실무책임자들이 처벌과 강제가 아닌 상호존중과 협력에 기반하는 평화의 문화와 평화로운 학교를 구축하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20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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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4 12:03 2011/12/1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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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지배체제의 이해-월터 윙크 :: 2010/09/16 08:21

(아래 글은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발췌한 것으로
기독교와 평화운동 수업자료로 사용된 것이다)


                                 폭력과 지배체제의 이해



지배체제의 신화

폭력은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ethos)이며 현대 세계의 영성이다. 폭력은 종교의 위치까지 차지하여, 그 추종자들에게는 죽기까지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추종자들은 그들이 폭력에 헌신하는 정도가 종교적 경건성의 일종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폭력은 결코 신화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에, 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신화로서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은 단순히 사물의 속성인 것처럼 보인다. 폭력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 갈등을 해결하는 데 마지막 수단, 때로는 처음 수단으로서 폭력은 불가피한 것으로 등장한다. 좌파에 속한 사람이나 우파에 속한 사람, 혹은 종교적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 모두가 똑같이 신속하게도 폭력을 애용한다. 폭력의 위협만이 침략자들을 저지할 수 있다고 믿어왔고, 지난 45년 간 테러의 균형을 통하여 폭력의 위협이 우리를 방비해왔다. 우리는 폭탄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배웠다.

[우리의] 진짜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이름의 종교다. 우리의 대중문화, 시민 종교, 국가주의, 그리고 대외 정책 등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원하는 폭력(Redemptive Violence)이라는 신화가, 바빌론이 지배하기보다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지배체제의 뿌리에 고대의 뱀처럼 되리를 틀고 있다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

리꾀르(Ricoeur)는 평하기를, 이런 종류의 신화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것은, 창조의 드라마를 통하여 신이 박멸했던, 그리고 계속 박멸해 나갈 권세를 원수 대적으로 지목하는 것에 근거한 전쟁신학이다. 거룩한 전쟁, 즉 성전(聖戰)에 대하여 조리 있게 설명하려는 모든 신학은 결국 이런 기본적인 신화의 형태로 되돌아간다. 왕과 적대자의 관계는 무엇보다 뚜렷이 정치적인 관계를 회상시킨다. 이런 신학에 따르면, 적대자는 악한 자요, 전쟁은 그에 대한 처벌이다. 악은 선한 창조의 세계 속으로 침입한 것이요, 전쟁은 타락한 결과로 등장한 것이라는 성경의 주장과는 달리, 이런 신화는 전쟁이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

이런 고대 신화의 구조는 바빌론 창조 설화, 전투신화(combat myth), 열광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 등등 여러 가지로 불려졌다. 이런 신화의 특징은 폭력의 수단을 써서 혼돈을 이겨내는 질서의 승리다. 이런 신화는 가진 자의 최초의 종교요, "힘있는 자는 항상 옳다"(Might makes Right!)는 생각을 처음으로 명확히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곧 지배체제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다. 즉 신들은 정복자들을 편들어 준다. 거꾸로, 누구든 정복하는 자는 신들의 편애를 차지한다. 일반 대중들이란 왕, 귀족들, 제사장들에게 신이 내린 권세와 특권을 유지해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종교는 권세와 특권을 합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삶이란 곧 투쟁이다. 이런 신화에 의하면, 어떤 질서도 혼란보다는 낫다. 우리들의 세계란 완전하지도 않고, 또 완전하게 될 수도 없으며 힘센 자가 상금을 차지하는 영원한 투쟁의 무대다. 이런 고대 역사적인 종교의 중심에는 전쟁을 통한 평화, 힘을 통한 안보가 확신으로 도사리고 있다.


현대 대중 문화에서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

전투 신화의 구조는 매주일 텔레비전 속에서 거듭 거듭 어김없이 반복된다. 즉 혼돈을 상징하는 강력한 힘이 공격해오고, 주인공은 방어적 전투에 나서고, 그러나 틀림없이 무참한 패배를 당하고, 악의 힘은 승리의 욕망달성에 만족하지만, 주인공은 무력화되어 도망을 치고, 그러나 힘을 되찾은 후 다시 나타나 마지막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혼돈을 물리치고 질서를 되찾는다. 이런 오락성에 대하여 월리스 엘리오트 (Willis Elliot)는 "우주탄생설(cosmogony)은 자아탄생설(egogony)이다. 당신은 모든 일들이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를 보고 이해함으로써 당신 자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탄생설을 통제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들의 자손들도 통제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구조는 변경될 수 없다... 수시로 돌출되어 솟아오르는 혼돈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이런 신화적 형태는 언제나 동일하게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며, 수많은 모양으로 변형되어 나타날지라도 그 근본구조는 결코 변할 수 없다.

슈퍼맨(Superman)도 사람들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재평가하도록 도전하지 않으며, 혹은 사람들을 변화의 고뇌 속으로 노출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주어진 환경을 교묘히 조작할 뿐이다. 악당들은 외부의 캄캄한 세계속으로 내몰리기는 해도, 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구원되거나 혹은 참된 인간됨으로 회복되지도 않는다.

로버트 쥬에트(Robert Jewett)가 지적했듯이, 이런 자경단 정신(Vigilantism)이란 민주주의 기관에 대한 불신, 민주주의의 희망에 기본적인 시민 책임과 인간의 지성에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배신이다. 그것은 일반대중들이 수동적이고 현명하지 못하며, 악을 분간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대응을 할 수 없는 존재들로 본다. 공공적인 수단이란 마땅한 것이 못되기에, 결국, 메시아, 그것도 무장한 구원자, 민주기관의 법적 구속을 넘어서는 개성과 확신의 능력을 가진 자, 그래서 악당이란 인물로 쉽사리 표현된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메시아를 필요로 한다는 메시지가 된다.

-이들 자경단원들은 무법을 권장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법을 자신들의 손에 쥐고 우리를 구원한다. 즉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그리고는 마을을 떠남으로써 우리들의 죄의식을 없애준다.

-우리들의 폭력적인 구원자에 의하여 무죄한 사람이 죽임을 당할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악당이 먼저 총을 뽑게 하거나 혹은 매복하여 사격을 가하게 한다.

-사회의 추악한 면모를 정화하기 위해서 그런 악질적인 자들은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 관중들은 타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한다. 그런 악당들은 민주적 절차로 다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초적으로 티아맛(Tiamat)의 초월적 능력을 지닌 자들이라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방식을 떠받들기보다는 대중문화의 강력한 초 영웅의 방식을 택하는 것은, 보다 단순한 해결책을 그리워하는 향수를 반영하는 것이다. 문명사회의 지루한 절차에 대해 참지 못하는 조금성과 폭력적인 해결방식을 선호하는 열성이 그 신념을 대표한다.

-스파이공포영화의 예처럼 자기의 나라를 우한 봉사의 이유로 스파이는 살인, 유혹, 거짓말, 도둑질, 불법잠입, 법원의 허가없는 전화도청, 다른 말로 기독교 문명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가된다.

-어린이들이 일단 지배자들 사회의 기대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지면 그들은 모든 악이 자신들 밖에 있다고 믿는 욕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남들을 희생양(scapegoat)으로 (빨갱이들, 미국놈들, 동성애자들, 비동성애자들, 깜둥이들, 힌둥이들 등등) 삼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감의 사회적 기준을 고수하고 자기네 그룹의 집단적 정체성에 계속하여 의존한다.

-기독교의 주일학교들이 점차로 축소되어 가는 시대에서는, 구원의 폭력이라는 신화가 종교의 역사에서 그 어는 것보다도 철저하고 효과적인 종교적 길들이기의 방법으로서 어린이들을 자발적으로 묵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되었다.

 

구원하는 폭력과 국가안보체제

모든 시대에서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는 폭력을 통하여 힘있는 자들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을 떠받쳐주기 위하여 일종의 종교로서 거듭 나타난다. ...이렇게 하늘과 땅의 권세들이 상응하는 것을 평가하는 고대의 방식은 신들이 단지 각 국가들의 권력서열을 조정하는 모습으로 우주적 의인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신화란 지상의 억압적 기관을 위하여 걸구한 합법성을 제공하는, 실제의 권력관계를 신비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신들은 인간 국가의 권력을 가공적인 마스크로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은 그 권력의 실제적 영성이라고 지적했다. ... 그것이 천명하는 바는, 왕이 마르둑을 대신하여 혼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이룩하도록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국가는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정항이나 반항은 하늘에 대한 범죄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에서는 한 나라의 생존과 복지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최고의 선으로 격상된다. 즉 나라 앞에서는 다른 신들은 없다. 이 신화는 국가의 중심에서 애국적 종교를 성립시킬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제국주의적 명령에 대해 신성한 재가(sanction)를 내리는 것이다. 죠오지 코르드(George Khodr)가 지적한 대로, 모든 전쟁은 형이상학적이다. 즉 사람은 종교적으로 전쟁터에 나간다. 따라서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는 군사주의의 영성이다. 즉 극소수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신의 권한으로 명령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명을 희생하게 한다. 국가의 통치에 저항하는 악한 적대자들의 세계를 청소하기 위하여, 신의 법령으로 폭력을 사용한다. 그런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은 부와 번영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리고 선택된 나라와 그 통치계급의 지배권을 특별히 축복하고 편들어 주기 위하여 하느님의 이름을-기독교의 하느님을 포함하여, 어느 신의 이름이든-불러내는 것이다.

...모든 권세들은 외형상의 기구적 형태는 물론 내부적 영성을 갖고 있다. 국가안보체제의 영성이란 국가안보체제라는 이데올로기다. ..."국가의 생존은 절대적 목표다. 국가의 정책은 국가의 생존 계획을 위하여 전 국가를 통합시키며, 각 개인의 삶에서 그것이 무조건적 목표가 되도록 만든다."

"국가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가에 바칠 최고의 충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어떤 이론, 어떤 교리,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감정, 열정, 이상, 가치 등등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음을 말한다. 국가주의란 그 자체로 절대적인 단 하나(Absolute One)이외의 것이 될 수 없고, 국가가 존속하는 한, 그 목적은 또한 절대적 목표(Absolute End)일 수밖에 없다. 국가주의가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다른 목적의 단순한 도구가 되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이처럼, 구원의 폭력이라는 신화는 부유한 엘리트의 권력과 협소하게 정의된 국가의 목표를 높이기 위하여, 기독교의 상징들, 전통이나 습관들을 사용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경제적 조정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종교라는 껍질을 이용할 뿐이며, 그 껍질 속에는 국가안보체제라는 불경스러운 교리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예언적인 생동감이 텅 비어버린 탓으로, 이들의 외형적인 모습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특권층들을 보존하려고 권력체제를 조작한다.


하느님이 통치하는 미래

협력사회와 지배사회의 구별, 하느님의 통치와 지배체제의 구별, 예수의 이야기와 구원의 폭력이라는 신화 사이의 구별은,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날카로운 대조를 제공한다.

사회적

형태

지배 체제

하느님의 탈지배적 질서

성별(gender)의 차이

가부장적: 서로 다르다는 것은

우월/열등을 의미함

성의 평등: 서로 다르다는 것은 전 문화에 이르게는 하지만 지위의 차이에 이르게 하지는 않음

권 세

군림하는 권세: 사람의 생명을

주무르는 권세, 통제, 파괴

서로 나누는 권세: 베풀고 생명을 베풀고, 지원하고, 양육함

정치

정복, 독재정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적

외교, 민주정치, 권능을 부여함,

탈중심적

경제

착취, 탐욕, 특권, 불평등

나눔, 충분함, 책임성, 평등

종교

남성 신-시샘, 분노, 처벌, 율법을 줌

여성신-포용적인 신의 형상

어머니/아버지, 사랑/심판

동정적임/매정함 자비로운/강요하는

관계

지위를 세움

지배를 위한 위계설정

노예, 계급주의, 인종차별주의

우리들/그들 경직됨

연결을 꾀함

실현을 위한 위계설정

기회의 균등

우리들/우리들 유연함

변혁의

형태

폭력, 강제, 전쟁

갈등을 억제

비폭력적 대결, 협상, 포용

비폭력적 갈등 해소

생태학적 자세

착취, 통제, 경멸

조화, 협력, 존경

논리

이것이냐/저것이냐 둘 중 하나

분석적

이것도/저것도 둘 다 모두

종합적/분석적

자아의

역할

자기 중심적인

제휴 지향적인

교육

사상 주입식

능력 부여식

성적인

책임

엮자들의 출산 능력과 성적인 표현을 남성의 통제 아래에 복종

공동체의 가치관에 따라 개인이 성적 행동을 통제

종말론

현상유지, 권세를 지니고 유지함

이 세상, 이 악한 세대

미래에서 영원성

현재에서 불의

문화적 변혁

하느님의 통치,

오고있는 세대

현재에서 영원성

미래에 정의

* 중요한 것은 하느님 이미지의 실제적인 혁명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우리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90-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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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작동방식과 그 해체 :: 2010/09/14 00:22

                                           폭력의 작동방식과 그 해체



지배체제(domination system)는 보이지 않게 작동할 때 가장 그 효과가 크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그러한 바이자,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때 그 효과는 극에 달한다. 문제는 지배체제가 겉으로 악마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식과 당연함이라는 관행적인 실천이 이를 유지하고 확대시키며 더욱 견고하게 한다.

본래 거짓말이요 실재가 아닌 신화(myth)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에 대해 길들여져 있고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보아온 것이어서 의심없이 동조하게 된다. 이런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지배체제는 견고하게 되고 악순환을 겪게 되면서 확산된다. 다음을 우리에게 상식이 된 몇가지 신화의 예들이다.

- 폭력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데, 즉 간악한 원수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다.

- 통치와 관리는 모든 사회적 기능들 가운데서 효율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 고통은 상대방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 적절한 고통은 상대가 이쪽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수단이 된다.

- 갈등을 해결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문제는 중요하며, 내가 옳다면 상대방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뭔가 양보한다는 것은 굴욕과 수치를 스스로 당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북관계의 긴장이나, 학교나 직장에서 동료와의 갈등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위의 몇 가지 신화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구원하는 폭력(redemptive violence)이 효과가 있다는 선입관은 너무나 우리의 일상생활과 생각에 붙어있어서 그것을 의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음의 사례를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 지 진실로 성찰해 보기로 하자.

사례 1: 무장갈등에 있어서 사례

폴랜드의 한 지하조직의 단원이 독일침공하에서 유태인들을 몰래 지하 조직망으로 안전한 해외로 빼돌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게슈타포 서너명이 한 대령의 인솔하에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이 닥쳤다. 그 순간 거실 책상에서 작업하던 부부는 놀라서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책상위에는 빼돌리는 유태인 명단과 연락망 조직도가 놓여 있었고, 책상 아래 칸의 서랍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총을 여럿이서 들이밀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사례 2: 파크에서 있었던 일

뉴욕의 한 도서관에서 늦은 오후 마감시간에 책들을 대출한 한 젊은 여성이 공원을 가로질러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지름길을 택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누군가 흑인 한 청년이 모자를 쓰고 멀리서 뒤따라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직 공원을 벗어날 시간은 많이 주어졌고 아무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 내 수중에는 아무런 나를 방어할 그 어떤 무기될만한 것이 없다. 물론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는 시기도 아니었다. 그 수상한 젊은이는 점점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빠르게 그 여인의 뒤에 바짝 다가가고 있다.

사례 3: 집에서 생긴 일

어느 날 새벽 빌라에서 사는 한 여인이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무거운 중압감을 느껴

눈을 떴다. 거기에는 믿기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바로 누군가 한 남성이 집에 침입하여 자기 위에서 누르며 있는 것이었다.

사례 4: 전철에서 생긴 일

사람들이 그리 붐비지 않을 정도의 숫자가 별다른 소음이 없이 조용한 분위기로 한 전철이 운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정거장에서 한 남성어른과 어린 아이 세 명이 타고나서는 분위기가 매우 달라졌다. 아이들은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재잘대면서 시끄럽게 큰 소리로 떠들고 있어서 그 소음이 같은 칸에 탄 저 멀리에 앉은 사람들에게까지 신경이 거스릴 정도였다. 그런데 앉아 있는 그 남성은 주변이 그 소음으로 시끄러움을 느끼는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상태였다. 전혀 통제를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어서 마치 주변의 눈초리에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의 심한 장난과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 참고 있던 한 중년 여인이 좀 거리가 떨어져 놀고 있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남성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하였다. (..중략...) 그러자 모두의 분위기는 바뀌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 남성와 아이들을 용납하기 시작했다

( 이 중략에서 무엇이 도대체 일어났길래 분위기가 180도 달라지게 되었을까?)

질문:

1. 위의 4가지 사례는 장소, 시기, 대상이 각각 달라도 뭔가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모두가 대결구조였고 상대는 더 힘이 많거나 더 많은 숫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은 희생자가 될 뻔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 모든 사례는 실제 사례임).

2. 위 사례들을 공통적으로 꿰뚫는 것은 힘의 작동 방식에 관한 것이다. 어떤 힘의 작동방식이 각각의 사례에서 그들을 궁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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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행동: 비협력의 힘 :: 2009/09/11 06:19

비협력의 힘                                                                           쉘리 더글라스


악에 대한 비협력은 선에 대한 협력만큼이나 의무이다 -간디

간디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스와라지, 인도를 위한 고국의 통치 home-rule 는 오직 모든 인도인들이 자기 자신의 삶에서 스와라지, 자치 self-rule 를 실행할 때만 온다고 말하곤 했다. 영국에 대한 인도의 의존은 각 인도인이 영국 옷, 영국 사상, 영국 관습, 영국 정부에 대한 의존의 총합이라고 그는 말했다. 영국의 통치는 인도인들이 그것을 옮기는 데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의 행동에 의해서 그들이 사실상 그들 자신이 무력하게 하기 때문에 지속된다. 간디는 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통찰에서 - 영국의 지배가 부과되는 것은 협력에 의해서 가능해지며 비협력에 의해서 종식되어질 수 있다 - 진리를 볼 수 있는 한 비폭력 자유 투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인도인들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을 배워야하고, 불가촉민성의 한계와 자신들의 인종차별을 벗어버려야 하고, 부와 재산에 대한 자신들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을 배우며, 수세기간 카스트 분리제도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여 자유를 위해 서로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간디운동에 있어서 시위는 충분한 것이 아니다. 정의의 주요한 실패가 발생할 때 반대를 외침으로서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그들 자신의 문제들에 대한 인도인들의 책임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 어떤 변화가 올 수 없었다. 간디가 요구하고 때때로 이룩한 것은 각자의 영혼 내면에서 그가 공모하고 있는 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기-통제를 실시하며 변화를 시작하는 책임을 갖는 투쟁이었다. 바다로의 소금행진과 시위하는 인도인이 보여준 찬탄할 만한 통제는 비천한 뿌리들로부터 점차 성장했다: 사회적 타부 앞에서 변소를 청소하기, 부유한 자들의 금 보석을 나누기, 카스트 제도에 저항해서 함께 살고 먹기, 영국의 경제적 제국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기 위해 인도인의 카디드(집에서 만든 전통옷)을 입기. 이런 행동들과 많은 다를 것들이 간디운동에 의해 가져온 깊은 변화의 상징이었다. 그 변화는 사람들이 변화시키려고 추구하는 잘못된 것들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그래서 스스로를 변화시킴에서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폭력이 자유 투쟁기간과 후에 분할기간에 일어났을 때, 그러한 절대로 필요한 통찰이 얼마동안 상실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다시 악의 근원을 자신의 밖에 놓고서 그것을 강제로 제거하고자 시도하였다. 간디의 금식과 가르침은 그때 그가 아마도 일으킨 폭력에 대한 책임을 지는 데 집중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폭력을 멈추는 조처를 취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는 악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포기함으로 우리 또한 그것에 대한 변화를 몰고 올 책임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였다. 인도의 상황에 대한 유일한 책임으로서 영국을 보는 것을 간디가 거절한 것은 인도의 독립에 대한 열쇠이었다.

나는 악에 대한 우리의 협력을 인식하고 그것을 철회해야 한다는 간디의 주장이 사회변화와 우리가 오늘날 개입하고 있는 핵무기 해체를 위한 투쟁에 본질적이다고 믿는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변화를 창조하는 데 무력감을 느낀다 - 정치 정당의지도자들, 장군들, 다국적 실무자들, 그리고 그렇고 그런 집단과 개인들이 우리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고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공민권을 박탈당한 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다. 정부와 기업은 힘을 가지거나 이익을 얻기 위해 존재하고 그들은 거의 시위의 정치적 말들을 듣지 않는다. 만일 변화를 위한 우리의 희망이 어떤 정부나 경제 체제의 합리성 reasonableness에 의존되어 있다면 그때 우리의 희망은 진실로 빈약한 것이다.

우리가 간과한 중요한 사실은 체제가 사람들에 대해 잘 귀 기울이지 않는 반면, 그들은 그들이 듣지 않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주어진 제도/체제의 존립은 그 체제로부터 부나 지위를 얻는 소수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체제로부터 이득을 받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 그것에 의해 상처받는 모든 사람들의 협력에 의존하고 있다. 우리중에 체제/제도의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이 그 체제/제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한다면 그때 변화는 일어나게 된다.

우리의 책임을 인식하고 우리의 공모를 철회하는 몇 가지 논리적인 단계들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그런 단계를 정당화할 만큼 충분히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둘째로 어떻게 그것을 지지하는 데 관여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어떻게 우리의 지지를 가장 잘 철회할 수 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네 번째로 그런 체제/제도로부터 철회된 지지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핵무기제도에 대한 관여는 변화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워싱톤 주의 Kitsap 지방은 놀라울 정도로 본래는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협력에 대한 결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잃는 결정이다. 다른 이들에게 그것은  군사적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 제로의 군비철폐 안내전단을 뿌리는 데 도와주고, 해군에 있어서 쓰레기와 부정직에 대한 비판 혹은 단순히 ‘시위자들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지에 대한 지배적인 고정관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듣고 나누기를 시도하는 결정일 수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직접적으로 군사행동에 개입하지 않아서 핵무기정책에 대한 가장 명백한 관계는 종종 세금의 지불이다. 우리의 세금 모두 혹은 일부를 거부하는 것 혹은 그것들을 시위하에서 지불하는 것은 핵무기 만드는 것에 대한 우리의 협력을 철회하는 직접적인 방식이다. 몇몇에게 세금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확신과 삶의 방식을 재검토함을 의미한다. 어떤 행동이 법정에 의해서 취해질 것인가를 알기 위해 기다리면서 그들은 더 불확실성에 개방적이게 되고 안전에 대한 신앙에 더 신뢰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세금을 낼 수 있는 수입수준 아래로 살기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소비자 상품에 덜 의존하게 만들도록 돕게 된다. 핵무기에 재정후원을 하는 것을 피하도록 자신의 수입을 줄임에 있어서 그들은 또한 이들 무기를 필요로 하는 소비 사회로부터 벗어나기를 시작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돈이 정부로 하여금 무기에 재정 뒷받침을 하는 데 주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돈을 무료급식시설, 아동보호센터, 평화와 정의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표현하는 사회변화 프로젝트들로 변환시키며, 그들의 돈의 사용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취할 수 있다. 모두의 선을 위한 자신의 재산을 나눔은 그것이 개인적인 참여로 행해지게 될 때 더 강력하게 된다.

비협력은 행진, 감시 그리고 세금거부를 포함할 수 있지만 또한 내적 영역을 포함한다: 자신의 정신이 조작되고 마음이 통제되도록 허락하는 것을 거부하기, 적으로 판명된 이들을 증오하는 것을 거부하기 또한 비협력인 것이다.

비폭력 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여러 형태의 비협력으로 들어가 움직이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아마도 한 번에 한 단계씩 천천히 움직일 것이다. 각 단계는 다른 단계로 인도된다: 각 단계는 잘못된 것을 지원함으로부터 철회이고, 동시에 대안의 건설이다. 부정함은 결코 충분하지 않다. 옳은 것을 제안함없이 그른 것을 반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의 종교적 뿌리는 여기서 우리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종교적 뿌리는 우리들 내면에서 악을 대면하고 모든 사람들과의 일치에 대해 주장한다. 

비폭력에 대한 어려운 점은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종류의 힘이란 것이다.  심지어 사회에서 우리를 타자로부터 분리하는 구조에 저항하면서도 우리는 이들 구조를 우리 마음에 체현시킨다. 비폭력은 우리 자신의 사랑하지 않은 충동들에 대한 저항하는 과정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감히 형제자매들의 눈을 치유하고자 시도하기 전에 자신의 눈으로부터 들보를 제거하라는 예수의 명령과 선으로 악을 극복하라는 그의 지시는 우리가 가야하는 길을 지적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가 악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저항하는 것은 참되다. 그러나 시스템/체제를 만드는 개인들은 당신이나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선과 악, 강함과 약함이 결합되어있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저항하는 악의 부분을 체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대신에 우리 생의 체제/시스템에 대결하는 한편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

악한 체제에 사로잡힌 이들에 대한 사랑의 기초는 우리가 그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또한 같은 시스템 안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평화운동의 사람들이 군사 활동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중요한 통찰과 비판을 가지고 있듯이, 군사 활동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와 나눌 중대한 통찰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구도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 -각각은 간디가 말했듯이 그것의 부분을 지니며, 우리가 우리의 조각들을 함께 짜 맞출 수 있다면 우리는 더 큰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악한 체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공모를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비협력을 통해 그 체제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이 실패에 직면하고, 우리 자신을 용서하며 그 과정으로부터 자비를 배울 수 있음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불완전성과 확실성에 대한 결여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정직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서 같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러시아 사람들 혹은 중국인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되듯이 우리나라 안에서 우리의 믿음과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함께 일할 수 있다: 굶주린 자를 먹이고, 학교에서 도우며, 전례(liturgy)를 만들고,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지원하며, 자유와 창조성을 격려하는 것에 함께 일할 수 있다. 우리가 함께 일하면서 서로를 알게 될 수 있고 그것이 일어날 때 우리는 서로 받아들임으로 군축에 대한 우리의 느낌들에 대한 탐구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이들이 편협하고 비이성적이라고 느낄 지라도 우리는 같은 방법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스스로에게서 우리가 편협하고 비이성적인 곳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러한 느낌 뒤에 있는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고 미움과 증오의 순환속으로 침몰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희망을 유지하고, 국제적인 갈등에 대해 행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정신으로 우리 공동체들과 이웃안에 있는 갈등에 대해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비폭력의 새로운 힘은 책임을 지는 것으로부터 온다: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개인적 책임 그리고 우리가 사는 나라와 제도들에 대한 책임의 나눔. 비폭력의 힘은 사랑과 자비로 우리 자신을 대면하고 반면에 우리 자신의 악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나서 우리나라의 악을 정직하게 대면하며 이를 사랑과 자비로 대면하는 데 있다. 비폭력은 선을 양육하고, 악과 대결하며 그렇게 하는 데서 그 안에서 옛것의 가장 좋은 것을 열매 맺는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로의 초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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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1 06:19 2009/09/11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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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밀방문자 | 2012/01/13 00:00 | PERMALINK | EDIT/DEL |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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