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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평화 할동가로서 새해 마음 다지기 :: 2012/01/11 09:00
(격동의 2012년을 맞이하면서 좀더 내 자신의 의식과 활동을 집중하고 명료화하기 위해 작년에 중요하게 체험한 것들을 중심으로 내면의 살림을 다시 추스려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선택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약속하는 마음 다지기를 만들었다. 이는 비록 얼마나 그 길을 갈지는 지금은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지향점을 확인하고 이에 대해 발설함으로써 자기 책임의 강도를 느끼기 위함이다/ 2012.1.11.)
1. 진리와 은총/ 진정성과 자비로움이 실재라는 자각을 하며 살기
이는 비폭력 대화 워크숍을 통해 기독교 영성이 만나지는 해후의 경험을 통해 점점 더 명료해져 가고 더욱 심각하게 다가오는 확신이다. 지배체제의 환영(illusion)과 거짓의 신화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도 나는 이를 집요하게 추구한다. 진리와 은총이 개인의 실존이전에 존재의 근거가 되고 나의 의식의 장(field)이자 중심이 되고, 관계와 사회적 실천에 있어 유효한 작동 원리가 되며, 공동체, 조직 그리고 기구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러한 통전적인 일관성이-존재/의식/관계/구조- 나의 지고의 행복이자 존재력을 형성한다.
2. 보석 목걸이를 구성하는 타자성을 주목하고 경청하기
개별 존재자는 낯설음, 차이, 알지못함이라는 타자성이 있고 이러한 차이와 다양성은 삶을 풍성하게 하고 건강하며 힘을 주는 기반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성스러움과 내적인 궁극성을 갖는 보석과 같고-그 존재가 사물이든, 중대한 범죄를 행한 자로 불리우든, 이념적 타자이든- 그 보석들은 하나의 상호의존과 상호배려라는 줄에 꿰여서 관계의 장(field)을 만드는 것이 삶(Life)의 우주적 질서이다.
3. 선물로서 봉사, 섬김에로의 자발성 갖기
회복적 서클 워크숍을 통해 분명하게 다가온 한 가지 체험은 평화에로의 봉사는 나에게는 선물이자 상대에게도 선물로 증여한다는 가치체험이다. 돈과 권력 그리고 지위에 아무런 매료됨 없이 비폭력 실천과 평화에로의 봉사는 선물이며, 그렇게 나에게 주어졌고 따라서 나도 그렇게 남에게 주도록 한다. 이는 결국 성공과 자본주의 논리를 넘어서는 선물로서 존재와 삶을 인식하는 모험의 여행으로 초대한다.
4. 어둠, 갈등을 전환점, 출입문으로 여기기
삶과 존재는 역설이다. 태어남과 죽음, 출현과 사라짐, 고요함과 폭풍우, 낮과 어둠, 평화와 갈등은 상존한다. 지금까지 나는 영성이 낮, 평온함, 일치 등의 이른바 긍정적인 면에 대해 주목해 왔지만 삶의 일반적인 평가로서 부정적인 면들에 대한 탐구를 하는 데 두려워했고 회피했었다. 그러나 비폭력 평화운동의 실천영역에 있어서 박탈, 어둠, 갈등은 진리와 정의의 전체성(wholeness)을 만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출입문임을 고백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 모든 것은 출입문이다. 그 출입문을 들어가면 전체성, 온전성의 실재가 있다.
5. 갈등, 폭력의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기
나는 내 생에 있어서 몇 번의 언쟁은 기억하지만 제대로된 싸움의 경험은 기억에 없다. 이는 내성적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약함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먼저 지고 물러서고 속으로 삭히는 일이 빈번하였다. 나는 내면의 방에서 이제 움츠려 있지 않고, 문을 열어 갈등과 폭력의 실재에 대해 통과하는 걸음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 속으로 들어가 변용되어지고, 존재로 삶을 검증하고 싶다.
6. 공공영역에로 빛의 사역을 침투시키기
지금까지 훈련 과정을 기획하고 진행했던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 AVP,” “청소년평화지킴이HIPP,” “사회변혁을 위한 전략적 대중운동/직접행동”, “비폭력 대화 NVC,” “회복적 서클” 등은 이제 사적 관심영역을 넘어서-개인성장- 공동체, 지역사회, 시민사회에서 공공의 선을 위한 ‘건설적 프로그램’이라는 기획과 그 실천의 영역을 확보한다. 이를 위한 훈련과정 및 지역 시스템 구축이라는 모델 사례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다른 부문과 지역으로 전파하는 전략적 행동을 추진한다. 빛(진실과 자비)의 능력이 공공영역에로 서서히 들어가 교도소, 학교폭력, 시민방어, 폭력구조의 해체 등에 적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7. 비폭력 평화활동의 동행자들과 관계맺기
지금까지의 활동은 주로 나 개인의 가치와 내적 욕구에 근거한 자발적인 활동이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주목하고 그에 따라 활동해왔다. 이제는 “~를 하기로 선택”하는 데 강한 강조를 두고, 이 나의 선택에서 같은 뜻의 동행자를 찾고 관계맺는 것에 나를 허락하고자 한다. 좀처럼 그렇게 하지 못해 외톨이처럼 있었는 데 이제는 최소한 그런 동행자에 대해 관계를 맺는 데 좀더 충실한 기여를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서클 프로세스(circle process) 및 경청과 공감을 통한 깊은 감응의 자세를 갖는다. 존재전달은 파동과 공명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며 산다.
어둠속으로의 비상 :: 2009/02/11 13:36
어둠속으로의 비상
얼마 전의 일이다. 저녁 한 밤중에 책을 보고 있던 나는 화장실에 가고자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 문 옆 벾에서 어떤 물체가 날갯짓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교회라고 해야 양옥집 단독 주택을 고쳐서 홀을 예배처로 그리고 내 방하나와 부엌으로 쓰고 있었다.) 서서 살펴보니 나방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파닥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는가 보고 싶어 마침 문 옆에 놓여 있는 벤취에 누워 가만히 지켜보니, 둥글게 엮어진 거미줄집으로부터는 벗어난 모양인 데 거미줄이 아직 몇 가락이 발에 엉켜 땅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내려뜨려져서 그것마저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발이 묶여 있기에 날개로 ‘파다닥’ 거리며 바동거리다간 힘이 빠지는지 멈추면 다시 시계추마냥 흔들거리고, 그러다간 다시 날갯짓하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이었다.
동정심이 일어 손으로 거미줄을 치워줄까하고 몇 번이나 결심하다가도 생존이라는 엄숙한 자연법칙에 누구 편드는 것이 올바른 일 같지 않기에 나방을 향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속으로 격려하다간 멈출 때에는 “에잇, 바보같은 놈, 더 힘을 내지 않고..”하며 실망과 격려가 교차되길 약 20여 분.
이젠 승산도 없고 더군다나 그동안 참고 있던 오줌보가 터지기 일보직전에 있었기에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면서도 섭섭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큰 몸체로 그까짓 거미줄 몇 가락 당해내지 못하다니-- 죽어도 싸다.” 그러나 심중으로는 거미에 잡혀 먹힐 나방의 모습을 생각하자니 여간 화나는 일이 아니었다.
하찮은 미물의 일로 화가 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그런 일을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어 괘념치 않기로 마음먹고 교회로 다시 들어오는 순간, 뜻밖의 장면에 얼어붙고 말았다. 있어야 할 나방은 없고 텅 빈 벽만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한 충격과 함께 표현하기 어려운 희열로 온 몸이 전율하는 것을 느끼며 난 한참이나 멍하니 나방이 날아가 버린 어둔 밤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렇다! 날 진 못해도 날려는 몸부림이라도 치자. 그러면 때로는 날 수도 있는 법이니...
거미줄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슴의 날개를 움직이지 않는 무기력함이 더 무서운 것임을 알자꾸나. 성서를 읽어보니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하비루집단)이 무서워 한 것과 하느님이 무서워하신 것은 다른 것 같았다. 이스라엘이 무서워 한 것은 거미줄(애굽의 추적, 식량난, 길을 막아서는 타민족, 사막의 더위와 질병)이었지만 하느님은 오히려 날개를 사용하지 않음(애굽이 주는 식량, 고기 생활안정 때문에 달게 채찍을 받는 타성)에 두려움을 느끼신 것 아닌가.
때로는 거미줄이 나방을 잡아먹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방의 날개 힘을 시험해 보기 위해 있음을 알자꾸나. 거미줄이란 자신의 날개를 더욱 세게 흔들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알고 기뻐하자. 그 일 이후로 조용한 밤이면 빈 벽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1987. 8.15. (20년전 친구들에게 보냈던 ‘고사리 편지’를 사이버상으로 옮김)
평화활동을 위한 묵상 - 평화의 능력: 뿌리박기와 날갯짓하기 :: 2008/02/14 12:44
평화활동을 위한 묵상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 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
(마6:25-31)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직면하는 수많은 문제들에 대해 예민하게 느낀다.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심하게 살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은 그것이 직접적으로는 자신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치 자기에게 일어나고 자신의 문제인 것처럼 그렇게 아파하고 분노를 느끼며 가위눌리는 무거움을 느낀다.
약자들이 흘리는 수많은 눈물들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양 그렇게 태연히 살아가기엔 그들의 심장은 너무나 따스하고 맥박은 더욱 거칠게 뛴다. 굿바이하지 않고, 한 번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어느 새 사라져 버린 생태적 약자들의 부재, 그들의 침묵은 가슴을 찢는다. 아스팔트 도로 가운데 설치한 방벽에 의해 횡단하지 못하고 깔려 횡사한 수많은 주목받지 못하는 동물들의 시체를 지나치면서 가슴이 떨리고 보이지 않은 거대한 감옥과 눈멀음에 헉헉거리는 심장 소리를 듣는다.
분별없고, 조종하며, 공격적인 문화적 분위기속에서 그 어떤 신뢰할만한 자기 방어의 무기나 도구 혹은 굳건한 방패막이나 둘러싼 성채도 없이 현재의 삶으로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이 그를 무척이나 두렵게 한다. 남처럼 삶의 이상이 성공, 영향력, 물질적 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비현실적인 꿈처럼 보인다. 그만한 능력도 기회도 얻을 수 없다. 단지 평화를 오로지 가슴속 유일한 열망인 사람에게는 당장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문제는 내가 당장 무엇으로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추위를 가리기 위해 몸에는 무엇을 걸칠 수 있을까 하는 소박한 이다.
내가 하는 행위로 얻은 이득이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누군가의 눈물과 고통이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비추어지는 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편리를 위해 내가 쥐고 소비하고 있는 이 일회용 생활도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숲의 나무가 베어지고 그로 인해 다른 약자들의 삶의 자리와 그들의 먹거리가 사라지고 있는 지를 생각하기에 그런 것을 단지 생각하는 것만도 벅차기만 하다. 펀드나 투자로 이익을 보는 일도 누군가는 잃고 있고 있음을 알기에 마음이 가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아니 남들에게 쉽게 보이는 생존하기조차 그토록 버겁게 느껴지게 된다.
최소한도 내게 필요한 먹거리, 나를 따스하게 보호할 수 있는 살림도구조차 힘들어지는 실존에 다가갈 때 비로소 우리는 그 가슴 시리도록 눈멀음과 당연한 생활방식이란 추위에 노출되어 있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염려하는 실존’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생활의 밑바닥에 추락하여 있는 덕분으로 인해, 진정으로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생생하게 염려하는 실존이 된 덕택으로 약함의 선물을 깨닫게 된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에 대해 눈뜨기.
토끼들이 하루는 회의를 열었다. 하늘에서는 독수리와 매가 달려들고, 땅 사방에서는 크고 작은 맹수들이 달려드는 것에 지치고 힘들어서 결론을 내렸다. "우린 저 하늘의 독수리처럼 자신을 방어할 강한 발톱도 없고, 숲의 맹수들처럼 남과 대적할 이빨도 강한 힘도 없으니 우리 모두 죽으러 갑시다" 모든 토끼들이 그 말에 수긍하여 동의하였다. “그럽시다!” 숲속의 연못에 빠져 죽을 심산이었다. 한편 연못에서 놀던 개구리들이 토끼 한 무리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질겁하여 물속으로 첨벙 들어가며 소리쳤다. “토끼들이 쳐 들어온다~!” 자신들을 보고 놀라는 개구리들을 보고 한없는 위로를 받은 토끼들을 뭔가를 깨닫고 발길을 돌렸다.
약자가 그 약함을 버리지 않고 자기 방어의 무장 없이도 어떻게 ‘온전히’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수가 말한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이란 게 어떻게 가능할까? 성공, 부, 명망, 영향력을 향한 경쟁의 줄서기에 있지 않고, 그래서 다가오는 일상에서의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의 절실함이 그대로 생생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염려함이 주는 무거운 ‘중력’이 ‘은총’이 되어 온전한 기쁨으로 살 수 있을까?
‘바닥의 작은 자’-들의 백합-와 ‘바닥에서 뿌리뽑혀 유리하는 자’-공중의 새-가 어떻게 그 자기 존재됨을 온전히 실현하면서 생을 즐기는가를 바라보라. 핵심은 ‘작은 자(백합, 새)’가 그 작음을 버리고 강한 자나 큰 자로 변형됨으로 일상의 염려를 벗어나는 게 아니다. 그 작음을 지켜 그대로 온전히 충만한 생을 맛보며 사는 것이 깨달음이 핵심이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아무런 방어막 없이 존재함으로 오는 뼈 속까지 시린 자본주의라는 추위 속에서 일상이 힘들어진 먹고 마심 걸쳐 입음에 대한 작은 자들의 진정한 ‘염려함’의 문제가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찰을 얻어 더욱 온전한 작음- 공중의 새, 들의 백합!-을 100% 즐기는 것이다. 토끼들의 염려함이 개구리를 보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대로 약함은 있되 더욱 생생한 토끼의 삶으로 변화된다.
그 열쇠는 아마도 본인이 믿기에는 ‘뿌리’와‘날개’에 있다. 자기의 온전한 본성-그대로 진실하며 충족적인 자기 내적 욕구-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자기 본성의 온전함이 방어없이, 억제 없이 표현됨으로 (let your own life/nature speak itself) 안에서 나오는 기쁨과 희열이 세상의 무게, 위협을 관통하게 된다. 이는 한쪽을 버리고 다른 한쪽을 취하는 개종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한 예를 들어보자.
한 때 오랫동안 시골에 쳐박혀 있었던 때의 일이다. 아침 산책하던 중 도시화로 인해 폐가가된 초가집 돌담옆을 지나던 길이었다. 마침 그 때 그 돌담안 그 집 옆으로 세워진 굴뚝에 커다란 거미줄을 갑작스럽게 대면하여 한 장면과 마주쳐 몸이 움직이지 못하는 얼어붙음 상태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거미줄 속에 칭칭 감겨져 죽어있는 잠자리의 참혹함과 거미의 츙측함이 섬뜩한 그 무엇을 내 가슴속에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는 다른 실존 곧거미줄마다 간밤의 이슬들이 초롱초롱 투명하게 영롱한 구슬로 아침 햇살을 반사하면서 현기증나는 황홀감으로 가슴을 동시에 후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혹한 비극과 찬연하게 방사하는 영롱한 방울미소들의 겹침- 두 상반대는 실존의 공존과 상호 포섭과 융합!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는 염려함의 실존과 뿌리박기/날개달기의 실재를 상호포섭하면서 생생하고도 온전한 생의 기쁨을 전달한다. 여기에서 거룩한 투명성 (Divine Transparency)가 드러난다. 한쪽을 거부하고 다른 한쪽 영역으로 넘어섬이 아니다. 이세상성이란 현실속에서 그 현실을 포함하되 그를 넘어서는 더 큰 전체(wholeness)를 열어준다. 그 작은 크기-백합, 새-가 그 자신을 넘어 들, 하늘의 생생한 넓음과 그 넓은 충만함을 포섭하여 드러내 준다. 들과 하늘의 그 넓음과 충만함은 바로 이 백합과 새로 인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고, 그 영역이 살아 현존하게 된다.
백합의 작음과 새의 작음은 변화되지 않는다. 염려, 자기 방어할 수 없음은 그대로 상존한다. 그러나 백합이 들에 ‘뿌리박음’으로 인해 그리고 새가 하늘에 ‘날개짓 하기’로 인해 다른 차원이 현존하게 된다 - 생생함과 온전함의 실재. 뿌리를 내리고 날개짓을 할 때 이제 백합과 새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의 것은 더 이상 아니다.
그대가 다른 사람처럼 성공, 물질적 부, 강함, 영향력에 별 아쉬워하지 않고 살아서 일상에서 대면하는 먹기, 마시기, 걸쳐입기의 작은 자의 염려함의 실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으로는 약하다. 그대는 자신의 원칙, 가치, 신념을 지키고 살 수는 있다. 그대가 남들과 달리 평화라는 주제에 진지하게, 남의 희생에 대해 심각해하며 사는 것을 흔들리지 않고 지켜가는 것에 대해 주목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작음의 삶이 -백합, 새로서의 삶- 더 넓은 경지 - 들, 하늘 -를 품어서 드러내고 있는가? 들과 하늘을 품어서 생생하고 홀로 자기됨에 충일한 기쁨을 발산하고 있는가. 의무와 책임을 넘어, 신념과 주장을 넘어 그로 인한 생이 기쁨이라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평화가 온전한 자기 본성이 되어 거기에 뿌리박고 그것에 의해 날개짓 하는 자유와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도 무언가 선물로 주어진 자기 존재의 깊이를 잃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평화는 주의주장이나 토론에 있지 않다. 자기 본성으로, 벌거벗고 방어없이 자기 삶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let your life speak!) 그럴 때 백합에게 바람은 춤을 선사한다. 새에게 그것은 비상이 된다. 뿌리와 날개라는 평화의 능력 없이는 그대는 평화를 염원하고 있고 평화에 대해(about) 말하는 것일 뿐 평화를 사는 것은 아니다. 뿌리와 날개 없이는 삶은 ‘걸어가는 죽음’이다.
공중의 새, 들의 백합을 보라! 그 생생함의 넘침이 어떻게 그 작음속에 흐르고 있는지를 눈치 채라. 그럴 때 평화는 강력한 에너지가 됨을, 자신의 진정한 본성임을 알게 된다. 작음이 춤이 되고 비상이 된다. 약함으로 더욱 생생하게 된다. 아~, 자기 방어없이도 기뻐넘치는 오롯한 생이여!
2008. 1. 31.
기독교 평화주의(비폭력 영성과 실천)의 두 기둥 :: 2007/06/04 19:08
기독교 평화주의(비폭력 영성과 실천)의 두 기둥
박성용/비폭력평화물결공동대표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막 12:29-30
예수의 폭력에 대한 대응은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의 옛 율법의 논리에 따라 힘으로 응전하는 역 폭력(counter-violence)은 아니다. 이는 악과 불의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폭력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을 지라도 똑같은 폭력의 사용은 폭력의 악순환과 그 사회적 비용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흔히 오해하듯이 기독교의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무저항이나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즉 폭력에 대한 회피나 순응주의도 아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폭력의 원인에 대한 해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비폭력은 폭력에 대면함에 있어서 철저하고 진지하면서도 회피, 순응, 역폭력이 아닌 제 4의 대안적이고 창조적인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적극적이다. 그래서 비폭력 활동가들은 ‘적극적 비폭력 (active nonviolent actio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평화신학자 월터 윙크(Walter Wink)가 그의 책『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예수의 비폭력 행동의 구체적 사례에서 명쾌하게 논증하듯이 “다른 뺨을 돌려대라. 속옷까지도 벗어주어라. 일부러 더 많이 짐을 지고 가 주어라”(마5:38-42)는 비실제적이고, 피학적이며 자멸적인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수모의 길을 사는 무저항의 길이 아니다. 손등으로 한쪽 뺨을 맞는 모욕을 당함에 있어서 다른 쪽 뺨도 돌려대는 것은 억압자의 비인간적인 힘을 빼앗은 것이다. 겉옷까지 이제는 저당 잡혀야 하는 극도의 가난한 상황에서 자신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제도와 채권자에게 이길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속옷까지도 벗어주라는 것은 그 제도와 인정 없는 채권자에 대해 벌거벗음을 통해 벗긴 사람에게 수치를 주는 항거이다. 그래서 채권자가 합법적으로 돈을 빌려준 자가 아니라 땅 없고 가난한 자를 굴욕적이게 만드는 무리로 노출되는 것이다. 점령군에게 5리의 강제노역의 의무적인 차출에 대항하여 반란이나 증오가 아니라 5리를 더 가줌으로서 피억압자는 선택의 능력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고 강제노역자의 우월성에 당혹감을 주는 전례가 없는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약자는 악에 저항하고 비협조함으로 악을 닮지 않으면서도 도덕적 주도권을 쥐게 됨으로서 억압자의 변화를 유도한다(채권자-‘제발 속옷은 입으시오.’ 로마병사 -‘이젠 내 짐을 돌려 주시오.’)
이렇게 철저하면서도 창조적인 반응을 무엇이 일으키는 것인가? 어차피 제도가 강자의 편이고 약자에겐 아무런 대항의 길이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억압자의 모욕, 채권자의 강제집행, 무기를 지닌 병사에 대해 약자가 인간으로서의 자기 존엄성을 회복하고 서로 더 깊은 폭력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폭력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이것은 그의 자기 정체성과 타자(the Others)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서 나온다고 나는 믿는다. 이를 예수는 영혼과 몸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신이 네 진실한 영혼이다.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인간의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탐욕과 파괴의 문제는 자기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에 대한 이미지가 과거의 폭력의 여러 경험들에 의해 쌓여 있는 것으로 응축이 되어 있을 때, 거기에는 쉽게 상처받고 이를 또한 자동적으로 방어하려는 마음의 기제가 작동하게 된다. 두려움, 분노, 탐욕과 파괴는 역기능적 현상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표출되는 데는 그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곧 상처받는 자신에 대한 보존본능과 과거 반복된 부정의 경험들로 인한 축적으로 만들어진 상처경험의 자기(the ego)에 대한 자동적인 응답인 것이다. 악의 체제와 불평등한 차별의 관행과 시스템 구조에서 익숙해진 자아는 자기 보존을 위해 폐쇄적이게 되고 외부의 자극(the fact)에 대해 과거의 경험이 그에게 준 일정한 패턴에 대한 자기 해석을 통해(through glasses of habited interpretation) 평가를 내림으로서 부정적 감정들이 분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협적이기에 나는 두려움을 느낀다.’ 이 말속에는 외부의 자극 (그것-'what is happened')은 과거 경험의 패턴에 의해 위협적이라는 해석작용을 거쳐 나의 느낌은 두려움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숨어있는 것은 나에 대한 자기 이해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위협과 두려움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고, 숨겨진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해석과 느낌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것이지 ‘그것’이란 외부의 자극(input)이 자동적으로 그것은 위협하는 성질을 당연히 갖고 있고 나는 이에 대해 자연스럽게 두려움을 갖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공이 바닥을 치면 튀어 오른다는 일반적인 생각은 바닥이 딱딱한 조건을 갖출 때에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 물이거나 늪일 경우엔 해당이 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의 요점은 외부의 사건, 자극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에 대응하는 나의 반응이 두려움, 분노, 의기소침, 절망 등으로 표출되는 것은 그 사건이나 자극의 본래적인 성격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안에 있는 자기 이해-‘나는 누구인가’-의 근본적 태도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다. 하나는 일반적인 견해로 ‘나서 죽는’ 자연적 인간으로서의 자기 이해이다. ‘태어나서 죽는’ 자연적인 육신의 인간으로서 자기 이해는 최고의 경지로 올라설 경우엔 도덕적 자기 규율로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할 수 있는 이상형을 자기정체성으로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안되는 경우에는 일상 생활에서 소유, 힘, 명성, 영향력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게 된다 -‘내가 소유한 것이 나이다.’
예수는 다른 독특한 자기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른바 그의 ‘아바(아버지)체험’에 근거하여 요한복음기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었고 내 증언이 참된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증언하기 때문이란 자기의식을 갖고 있었다. 자신이 하늘 아버지로부터 기원하고 다시 그에게 돌아간다는 이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나오는 증언들과 행동으로 인해 그를 대하는 자들은 그 어떤 신적 현존의 생생한 감각을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고, 강력한 생활변화의 동기를 부여받게 되며, 과거를 단(斷)하고 갱생의 대안적 상상력을 지닌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자기 자신이 신적 근원(Divine Source)에 근거되어지고 있다는 이 확신이야말로 세 번에 걸친 십자가 수난에 대한 그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영혼속에서 분출시키게 되고, 수많은 갈등과 대결, 제자들의 배신, 다가오는 것에 대한 공포, 유혹과 불안에 대한 인간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내면의 에너지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내면의 빛이 밝혀짐으로(the lighting of the soul) 어둠의 행위에 대한 알아차림과 자유로의 손쉬운 사역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사도바울을 이를 일으켜 ‘이제는 내가 사는 것(the ego)이 아니라 내안에 주가 사는 것(the Self)이다'라고 고백한다. 자아가 근원적인 신적 심연 (the Divine Depth)속에 있음으로 해서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자유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첫 계명,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은 대상적 존재로서 저기 위의 신에 대한 인간의 종교적 헌신이란 차원을 넘어서서 더 깊이 자아의 본래적 자리의 회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신적인 힘과 근원이신 하느님은 깊이로서 만나진다. 즉 ‘신은 너의 영혼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중세기독교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돌파의 경험을 통한 아들됨의 탄생으로 이야기한다. 유일한 실재로서 하느님은 따라서 자기 초월성을 사물의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서 초월성을 드러낸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알고 그의 능력인 자기 초월성을 품수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목숨, 생각,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본래 존재를 일깨우는 길이다. 노예가 아닌 아들로서 자아는 자기 ‘안’(영혼)에 부어진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살아간다. 이것이 인간의 경험적 자아가 갖는 두려움, 분노, 슬픔과 힘겨움을 극복하게 한다. 왜냐하면 신적 에너지가 영혼속에서 분출됨으로서 자신의 신성함과 삶의 신성함에 대한 새로운 실재를 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절대성이 아들을 일으키고, 창조자이신 아버지의 현존이 대안적 살림을 위한 창조력을 제공하게 된다.
이웃이 네 몸이다.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네 이웃, 곧 타자(the Others)가 너와는 거리를 가진 다른 존재로 인식함으로서 ‘우리 대 그들’이라는 대립적 구도가 생성되어진다. 나와 거리가 있는 타자는 쉽게 내 관심으로부터 멀어져서 무시되기 쉽게 된다. 따라서 나의 일 혹은 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게 된다. 그의 고통에 대해 ‘내 일’로서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쉽사리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민감성을 상실하게 된다. 심지어 우리는 당연한 결과를 받게 되었다고 그에게 일어난 불행이나 고통, 폭력과 상처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 일단 ‘나’와 ‘우리’에 관계없는 ‘그’나 '그들‘로서의 타자가 정위되어졌을 때 그들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민감성을 약화시키고 결국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길이 열린다는 본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시스템에 의해 구축되어진다.
‘나/우리’ 대 ‘너/그들’의 분리는 가치에 있어서 상하계급적인 사고를 형성한다. ‘위’와 ‘아래’의 가치구분이 일어나면서 백인/황흑인, 문화/자연, 마음/몸, 도시/농촌, 남성/여성, 이성/감정의 구분에서 전자는 가치에 있어서 ‘상위’가치를, 후자들은 ‘하위’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진다. 따라서 전자들은 지위, 특권에 있어서 후자들과 구별된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되어 질 때 ‘힘(power)’은 자연스럽게 열등한 능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 후자를 통제하는 ‘지배로서의 힘(power-over)’으로 개념화된다. 아버지의 힘은 자녀를 지배한다. 판사의 힘은 피고를 지배하게 된다. 인간의 힘은 자연을 지배한다.... 지배의 힘을 가진 쪽은 지위의 유지와 삶의 능력에 있어서 보다 많은 것과 혜택을 누리는 ‘특권’의 누림을 정당화하게 된다(수입, 집, 교육 등). 결과적으로 우월한 자가 지배와 종속을 정당화하는 지배의 논리(a logic of domination)를 승인하는 사회체제가 구축되어지고 이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사회적 실천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되어진다.
만일 자신과 타자가 우월과 열등의 상하관계(up/down relation)이 아니라 좀 더 극단적인 관계로서 타자가 적(敵)으로 이미지화된다면 어떠할까? 현재 미국 기독교의 보수적 근본주의나 이슬람원리주의의 경우처럼 타자를 적으로 이미지화할 때는 무력충돌이 발생하며 이는 적인 상대로부터 완전한 전멸이나 복종 혹은 회복불가능한 정도의 상처를 입히는 것이 정당화된다. 적으로서의 타자의 문화, 가족, 땅은 파괴의 대상이 된다. 그러한 파괴와 폭력은 보복의 악순환을 낳고, 치유 불가능한 연쇄적 관계로 어제의 일이 오늘로, 오늘의 것이 미래세대로 넘어가면서 상처는 견고해 지고, 이에 따른 인간의 심성도 잔인해지고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사회병리적 현상을 낳게 되는 불행을 맛보게 된다. 즉 이런 폭력체제가 강화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폭력적인 인간이란 믿음을 갖게 되며, 우리가 속한 세상을 근본적으로 승리를 위한 전쟁지대(war zone)로 간주하게 되고, 갈등해결의 수단은 오직 폭력을 통해서라는 신념을 소유함으로서 지배와 폭력을 위한 새로운 행동들을 낳게 되는 것이다.
이념적 타자(ideological Others)나 종교적 타자(religious Others)에 가해지는 이런 군사적 적대주의의 예에서 보듯이 명확한 물리적 폭력(physical violence-여기에서는 가해자를 확인할 수 있다.)의 실상과 앞에서 말한 위/아래의 관계에서 타자의 차이(difference)를 차별화(discrimination)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structural violence-가해자는 보이지 않고 구조와 제도가 폭력의 기능을 수행한다)과는 달리 더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문화적 폭력(cultural violence)이다. 이는 요한갈퉁(Johan Galtung)의 개념으로 물리적,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고 지원하는 가치나 신념체계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든지, 정의가 폭력에 우세해 지기 위해서 ‘더 나은/좋은 세력’이 선택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나, 삶 자체의 존재 방식이 원래 폭력적(적자생존의 법칙)이라거나 혹은 질서와 안정을 위해서는 폭력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비용이라는 신념체제들을 말한다.
이렇게 ‘나/우리’ 대 ‘너/그들’의 차이가 차별과 폭력으로 낳는 폭력체제와 다른 길로서 예수의 두 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은 타자를 자아의 존재를 구성하는 유기적 상호관련성으로 보는 대안적 방식을 제공한다. 나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공동인격이자 생명의 그물망(web of life)의 한 그물코인 상관적 존재이다. 물, 공기, 내가 서있는 공간 모두가 서로에게 열려져 있어서 하나로 흐르며 꿰뚫고 있다. 나의 숨은 너의 숨이며, 너가 마신 물은 나의 피가 된다. 이 공간과 대지는 너의 활동에 열려져 있고 또한 나의 터전이요, 경계없이 펼쳐져 있다. 우린 이미 45억년전 우주의 한 시원적 빅뱅사건을 통해 형성된 하나의 별 먼지(a stardust)에 의해 분화된 존재들이다. 한 기원을 갖고 수십억의 우주적 여행을 함께 경험하며, 그 여행속에서 각자의 독특성을 발전시켰고, 그 다양한 독특성의 교제가 서로의 안녕과 통전성을 지원하여 더욱 풍부한 생명세계를 꾸며왔다. 우주의 역사를 하루로 계산할 때 겨우 자정 2초전에 해당하는 시간에 한 공동존재가 인간의 모습을 이제 갖춘 우주의 신생아로서 태어났고 이 신생아는 우주의 타 존재들이 형성한 요람없이는 그 생존이 불가능하였다. 그들의 생기와 지원 그리고 우주적 축하 없이 어떤 새로운 존재도 그 생명을 부여받지 못한다.
‘이웃/타자가 네 몸이다’는 예수의 두 번째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방어를 위해 무력과 무기를 들 필요가 없음을 선언한다. 타자의 차이는 나의 생을 윤택하게 하고 생생하게 한다. 내가 가진 부분적 진리와 오류 가능성 그리고 너의 부분적 진리와 오류 가능성이 유기적 관계를 통해 더 큰 진리의 경험 사건을 가능하게 하고, 자신을 수정할 수 있는 명료함을 ‘차이’의 도전을 통해 얻게 된다. 그럴 때 타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내게 선물이 된다. 만남과 나눔을 통해 차이는 영혼의 각성을 불러일으키면서 우리는 모두 ‘상즉존재(相卽存在)’-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다-이자 공동존재로서 적이 아닌 벗으로 신으로부터 사랑받고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Beloved Community-마틴 루터 킹)의 한 구성원임을 깨닫게 된다.
이웃/타자가 내 몸임을 알 때 우리는 나의 안녕과 생존은 타자에 철저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힘의 숭배 없이, 지배의 논리 없이 오히려 나의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vulnerability)’가 새로운 힘(power-with)의 원천이 됨을 경험한다. 나의 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이 너에게 개방되어지고 너의 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은 나에게 개방되어지면서 상호 의존과 신뢰가 싹트며 새로운 연대와 공동의 과제에 대한 의식이 싹트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기가 아닌 맨 몸으로 각자를 접촉함으로써 우린 서로 손잡게 되고 ‘같이 일함’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힘과 무기가 우리를 변혁시키지 못한다. 이웃/타자를 공동존재(몸)으로 인식하는 것은 적자생존의 정글의 무대로서 사회가 아니라 상호부조의 공생의 사회로의 대안적 상상력을 갖게 한다.
이웃/타자가 내 몸이라는 인식과 그 생활실천은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회복시킨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몸의 가장 약한 부분을 우리가 더욱 감싸고, 한 지체의 아픔이 전체에게 전달된다는 몸의 고통에 대한 지각력과 약한 부위에 대한 전체 몸의 즉각적인 공감능력이 몸의 건강상태를 만들고, 건강측정의 표준이 된다. 이것을 세상에 적용하여 세상을 사회적 몸(공동체로서의 몸)으로 보고 약자에 대한 배려와 그들의 고통에 대한 제도적 민감성을 키우는 것이 비폭력 영성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철저하게 이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된 약자들 -세리, 창녀, 죄인, 이방인, 과부, 어린이- 과의 우선적인 식탁교제와 치유를 통해 그리고 잃은 자와 섬기는 작은 자에 대한 비유속에서 비폭력적인 사회적 몸(공동체)을 만들기 위한 실천운동이었다. 몸의 각 지체의 차이를 존중하되 유기적 관계와 소통을 통해 배려와 상호성의 관계를 만들어, 약한 부위의 아픔을 전체 몸의 관심사로 만들어 내는 능동적인 비폭력의 대안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사회가 건강한 것은 약자의 고통에 얼마나 민감한가에 달려있다는 이 통찰은 비폭력 영성의 두 번째 축을 형성한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예수의 삶을 통해 음미하면 두 가지 기둥 곧 자기란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와 타자와의 관계성의 문제로 요약된다. 예수의 대답은 우리의 정체성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거룩성을 내재한 존재로서 자기 인식과 공동존재로서 타자가 자신의 몸의 일부라는 사실에 대한 각성과 그 실천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전자는 모든 억압과 폭력 그리고 지배에 맞서는 자기 초월성의 원리가 되고 후자는 우리의 상처받을 수 있음과 약함이 상호관계에 의해 의존하고 있으며, 건강도 그런 약함과 상처받을 수 있음의 경험을 서로 소통하고 지원함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마치 두뇌신경학에서 세포 자체의 강함이 건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세포자체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소통과 교류가 건강을 유지한다는 생태적 통찰과 일치한다. 신은 너의 영혼(진정한 자아)이고 이웃/타자는 네 몸이라는 이 예수님의 계명은 비폭력 영성과 실천의 담론을 제공한다. 곧 비폭력 영성으로서 자기 존재의 근거와 토대로서 거룩함의 인식과 자아의 확대로서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이다. 이를 토대로 실천덕목으로서 타자와 더불어 공동의 몸만들기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예수의 말처럼 기독교 평화주의에서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2007. 6. 3.
비폭력 삶의 길 :: 2007/05/05 22:22
비폭력 삶의 길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약자가 우리를 인도한다
교통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광교산 깊숙이 세를 얻어 살고 있는 나는 요즈음 산의 변화가 주는 연둣빛 기운에 위로와 힘을 얻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아직도 나무들은 텅 비어 있는 데 작은 순들이 일어나 주변을 가득 찬 봄기운으로 단장하니 그야말로 ‘텅 빈 충만’의 자태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신선한 충격이다. 멀리서 보면 그 존재의 흔적조차 느끼지 못하건만 다가서면 키 큰 나무들 틈새로 여기저기서 허리쯤 서 있는 진달래가 응달 속에서 그 가냘픈 몸매와 더불어 눈물 나는 웃음을 짓고 있다. 그 약한 가지로 인해 부딪치면 뚝뚝 부러질 그런 약한 몸으로 커다란 몸짓들 속에서 다른 거목들의 이파리로 가리우기 전에 꽃부터 피우는 진달래의 순박한 모습이 눈길을 붙잡는다. 곱고 숭고한 자태도 아니고 어쩌면 시골아낙 모습처럼 그다지 풍채가 돋보이지는 않아도 가녀린 몸짓과 응달 속에서 바람을 가르고 있는 그 자태는 가슴속에 뭉클한 파문을 남긴다. 약하고 작은 것들이 눈을 뜨게 하고 힘을 북돋아주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에 여러 차례 위기와 혼란이 올 때마다 삶의 가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결국은 오늘날 신앙수련으로서 평화운동에 몸담게 만든 일종의 계시적인 사건이 둘이 있다. 그 하나는 대학시절 홀로 지리산 등산하던 도중에 거대한 고목이 쓰러져 있었고 그 무게로 인해 주변의 작은 초목들이 휘어져 성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면과의 마주침이었다. 그 고목은 살아 있을 때도 그 크기로 인한 응달로 주변에 아무런 나무들이 자라지 못하더니 죽어 쓰러져 벌써 수년이 지났는데도, 그 아래서 올라오는 초목들의 성장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덩치가 큰 이유로 말미암아 죽어서도 삶의 무리들의 공간을 침해하고 있음을 보면서 어떤 경종의 울림이 가슴깊이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미국에서 유학시절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주택가를 걷던 길에 뜻밖에 토끼와 마주침으로 길을 멈춘 나에게 찾아온 경련의 경험이었다. 이웃집 뜰 가에서 조심스레 풀을 뜯고 있던 토끼의 그 천진한 눈망울과의 마주침, 그리고 아무런 힘을 갖지 않은 약자로부터 더 이상 다가서서는 안 된다는 절대적 부름의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던 것이다. 한 발자국 다가서면 위협을 느끼고 사라질 그의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vulnerability)이 나를 오히려 긴장시키고, 자기 방어수단 없이 온 발과 귀 끝까지 감싼 극도의 예민한 경계심을 갖고 있는 그에게 해치지 않을 테니까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 지 어쩔지 몰라 답답해하던 몇 분 동안의 당혹감. 그러나 결국은 해치거나 방해할 의도가 없었어도 나와 같은 거대한 몸체의 출현만으로도 작은 자, 약자는 겁을 먹게 되고, 결국은 자기 공간을 내어주고 덤불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작지만 내 영혼을 흔들어 놓은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커지기와 힘 가지기는 그 자체가 폭력을 잉태함을 깨닫게 되었다. 힘과 크기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이 계시적 사건의 경험은 진리의 일상수행으로서 평화형성(peace-building)에 대한 다른 이해와 관점을 나에게 갖다 주었다. 폭력은 전쟁과 같은 군사적 충돌이나 시위 현장 등의 거대한 현상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구석구석 그리고 의식 속에 습관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힘(영향력, 명성, 크기, 소유)을 숭배하는 생활양식에는 영락없이 폭력이 현존한다. 거목과 토끼의 예에서 보듯이 스스로 깨닫지 못해도, 의도하지 않더라도 힘을 지닌 존재는 약자에겐 위협이 된다. 폭력은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신체적 폭력처럼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있는 보이지 않고 가해지는 구조적이며 제도적인 폭력이나 문화적 폭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현상적인 폭력들의 뿌리에는 근본적인 인식과 가치의 문제로서 힘과 크기에 대한 숭배가 존재한다. 힘과 크기를 인식과 가치에 있어서 선호하면 작고 힘없는 대다수는 주변화 되면서 관계가 깨어져 나/우리와 너/그들의 관계로 나뉘게 된다. 여기에는 힘겨루기나 자기주장의 관철이 생활문화로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힘과 크기의 숭배에 따른 겨루기와 일방적인 자기주장은 종교권력의 사학법 악개정을 위한 삭발투쟁, 두 정치집단간의 사안별 불소통과 의견대립, 전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동산투기와 악 개발 국가권력에 의한 한미 FTA 체결, 국내 국제자본과 대기업의 국가정책 주도 등의 현상 속에서 잘 나타난다. 그 결과로서는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의 인간안보와 생태안보 기반의 붕괴, 50배 차이로 벌어진 상하계층간 소득격차, 농업기반 약화, 이주노동자들의 3D산업진출로 이어진다. 최근의 공무원 퇴출의 예에서 보듯이 국제경쟁력 강화, 효율성의 제고, 글로벌 경영 등의 이름으로 상처받을 수 있는 약자들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주변화되며, 각종 유명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의 성공신화, 평창, 인천, 여수등지의 지속가능하지 않은 대규모 국제행사의 유치혈안과 같은 왜곡된 사회적 엘리티즘의 현상이 두드러지게 된다.
상처받을 수 있음과 약함이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어떤 삶의 형태에 무게중심을 두는가를 요즘 사회현상을 통해 일별해 보면 결국 그 흐름을 만들어내는 가치와 관점이 상처받고 약한 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누군가 자신을 건드릴 수 없도록 하는 강자되기라는 강박적인 논리속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문대 입시를 위한 특목고들의 경쟁, 그리고 교회의 대형화를 위한 신축 붐들도 안전의 의미가 바로 ‘크기’와 ‘힘’에 의존한다는 세태를 반영한다. 그러는 와중에 자살률이 OCEC국가 중 1위, 30대 가출률이 10대를 앞지르고, 이혼율의 상승폭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어서 이 사회가 강자의 논리에 따른 자기 주장강화와 타자에 대한 소통의 단절, 다양한 갈등과 폭력의 만연이 위험 수준에 올라와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건물이 올라갈수록 음지가 커지는 것이다.
누가 나를 건들지 못하도록 강해져야 한다는 이 강박관념의 편재는 결국 상처받을 수 있고 작은 자로 있다는 것이 약한 것의 표현이고, 그 약함이 남에게 보여진다는 것은 곧 쉽게 내가 상처받을 수 있게 된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능한 물샐틈없는 자기 방어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화에 있어서 친밀하지 않으면 자기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강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자기 약점을 보이거나 상대의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지는 게임으로 간주하게 된다. “빈틈없이 있으라. 강해져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침몰하게 된다.” 이런 논리로 인해 우리는 조금씩 삶의 생생한 표현과 교제의 능력을 상실해 나가게 된다.
힘을 위협을 줄 수 있거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될 때, 타자의 대상화가 일어나고 나/너의 관계라는 거리를 떨어뜨려 분리와 소외의 상태가 ‘정상’으로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힘의 이해가 내면화되고 사회적 제도에서 구조화됨으로서 우리는 갈등과 폭력의 악순환을 맛보게 된다. 이익과 손실, 승자와 패자의 이분법이 적과 아군으로 사람들을 나누게 하고, 이 힘의 관계에서는 굴복하는가, 회피하는가 아니면 타협하는 가의 세 가지 삶의 양식으로 굳히게 한다. 문제는 굴복, 억압, 그리고 타협이 문제의 진정한 질적 변화와 관계의 형성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비폭력은 연두빛 숲과 음지 속에 핀 진달래가 전해주는 연약한 작은 자의 생생한 감동과 자기의 자발적 발현, 그리고 토끼의 쉽게 상처받을 수 있음이 강한 자의 도덕적 책임과 돌봄의 윤리를 통한 관계 맺기를 초점으로 하고 있다. 이는 약자가 처해있는 음지와 고통에 대한 점차적인 각성의 과정인 동시에, 이들 약자로부터의 분리됨을 변혁시키고, 단순한 도움주기를 넘어 “함께 있음,” “옆에서 걸어감” 그리고 “그와 하나 됨”으로 움직여가는 공감적인 삶의 과정이다. 또한 강한 자가 휘두르는 위협에 대한 용기 있는 관여인 동시에 정죄함 없이 강한 자의 참된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내면의 여행이다.
이 내면의 여행은 그동안의 타자화된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윤리적 민감성의 결여 그리고 나의 우월성에 대한 무의식적 태도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점차로 나의 위치가 그 어떤 형태로든지 정당하지 못한 특권의식과 우월성에 근거한 열등자로서의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하는 숨겨진 자기 교만도 읽어내게 되면서 근본적인 변화가 중도에서 일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차별이 없는 차이를 이해하게 되고, 또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공감과 의사소통 그리고 협력기술들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러나 비폭력 실천가는 궁극적으로 협력자 되기를 넘어선다. 협력자가 아직도 도와줌과 특권의 거리두기를 통한 남에 대한 배려의 문제에 있다면 비폭력 실천은 삶의 실재가 삶의 신성함과 상호관계성에 있음을 깨닫고 이를 수행하게 된다. 여기에는 자기의 이해와 삶의 가치의 근본방향 정위, 약자에 대한 공감과 일치 그리고 강자의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변화가능성을 믿는 수행이 존재한다.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곳에서 변혁의 힘이 나온다
비폭력의 삶을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힘을 요구하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는 데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악이라고 이해하는 바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악을 이기라는 명령은 신앙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역 폭력(counter-violence)에 의존하지 않고, 그 문제에 회피하지도 않고 또한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악에 대항할 수는 없는 것인가? 폭력자, 가해자로 하여금 약자로부터 오는 상처받을 수 있음을 통한 자기 책임과 존중감을 배우게 만들 대안의 길은 존재하는가? 상대가 적이기 전에 인간의 얼굴을 한 동료로 행동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해 비폭력 진영에서 쓰는 한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뉴욕 센트럴 공원에서 저녁에 도서관에서 집으로 걸어가는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상상해 보라. 어느 한 남자가 그녀를 뒤따라와서 명백하게도 치근덕거리려고 한다. 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 그녀는 갑자기 돌아서서 그의 눈을 뚜렷이 바라보며 말한다. “아 참 행운이군요, 당신이 내가 가는 길에 걷고 계시다니. 이 책들이 너무 무거웠거든요.” 그는 완전히 얼얼한 기분으로 그 책을 건너받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평화롭게 집문 앞까지 바래다주게 되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진정 무언가 매우 흥미로운 것이 일어났다. 그 남자는 폭력적인 범행을 하는 데로부터 보호되었다. 약자인 그 여인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또한 거대한 위협이나 그자신이 폭력에 직면하지도 않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간단한 요청에 의해 보호되었다. 치명적인 상황이 놀랍게도 평화로운 결론으로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희생자가 될 뻔했던 자가 그와같은 기대 밖의 행동을 행할 수 있는 마음과 용기의 상태를 발견했을까? 그리고 어째서 그녀의 놀라운 행동이 사건의 진행을 가까스로 바꿀 수 있게 되었는가?
평범한 우리가 특별히 강한 그 어떤 것으로 무장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는 약자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강자의 위치에 대한 존중과 그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강자가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약자의 힘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약자의 무기로서 비폭력의 행동은 때때로 실상 가장 강력한, 효과 있는 수단이 됨을 보여준다. 거꾸로 강자는(그 남자는) 자신의 힘을 오용하는 데로부터 구함을 받게 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약자의 기대하지 못한 돌발행동 -“참 행운이군요.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데 좀 들어주시겠어요?”-에 의해 자신의 의도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기 자신이 무력의 기회를 쓰지 않았다는 자기 존중감을 배우게 된다. 그 약자의 상처받을 수 있는 상황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잊혀진 숭고함이 분출된 것이다.
이 여인의 비폭력적인 요청은 강한 자로 하여금 폭력의 기회로부터 그의 힘을 남용하는 것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희생자가 되는 길로부터도 벗어나게 하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여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비폭력은 이미 이상적인 완전함의 상태에 있는 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로 실험’하는 일련의 과정이자 점차로 그런 방향으로 가면서 배우는 실천의 힘이다. 폭력, 회피 혹은 타협의 길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 상대의 인간성을 살려내는 비폭력은 악의 실재에 대해 소박한 생각을 하지 않고 악의 구체적인 실재를 알아차리면서도 다른 가능성, 곧 폭력보다 더 궁극적이고 더 큰 변혁적 힘으로서의 삶의 신성함(sacredness)과 상호관련성을 굳게 지킨다.
비폭력은 타인에게 이기기 위해 혹은 대항하기 위해 자신을 무장하는 길이 아니다. 이는 희생자를 만들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폭력은 진정한 문제를 명료화하고, 쌍방이 책임 앞에 서게 하는 창조성을 발휘한다. 수많은 폭력들 - 내면적 폭력, 관계에서의 폭력, 사회 구조의 폭력, 문화적 폭력 - 앞에서 비폭력 실천가는 이들 폭력 실천의 근본 전제와 태도들 - 위협으로서의 힘의 소유와 이를 위한 강자되기 -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한 영적 여행, 즉 파편화되고 상처받은 자아가 온전함을 추구하는 여행을 시작하게 한다. 우리는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의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신뢰의 관계를 통한 생의 선물과 신성함에 눈뜸에서 비폭력 실천의 삶이 자라게 되는 것이다.
비폭력 평화의 내면화와 사회화는 서로 같이 간다
오늘날 점점 심각해지고 복잡한 양상으로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직간접적인 여러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외적인 시위로서만 끝나버리는 운동은 우리 안에 있는 내면화된(프로그램화된) 폭력의 각본과 악에 공모하는 생활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 없이는 어떤 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어렵고 외양만 바꾸게 된다. 그 악이 타자의 잘못과 타자로부터 기인하는 원인에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나의 책임의 소재는 없어지고 타자에 대한 ‘적’과 ‘악’의 이미지화는 더욱 커지게 된다.
비폭력 실천은 타자에 대한 상호관련성의 입장에서 악에 대한 나의 책임성을 인정하며 동시에 타자/적대자 안에 있는 진정한 자아에 대한 신뢰와 삶의 신성함을 보는 것을 통해 어둠과 속박으로부터 ‘함께’ 자유로운 상태로 부르는 것이다. 간디의 소금행진과 물레의 돌림은 영국의 제국주의라는 사회적 시스템/ 구조적 폭력에 대해 나의 책임성과 보편적 인간에 대한 신뢰와 상호관계성의 입장을 견지하고, 나의 비폭력 평화의 내면화가 물레를 돌리고 소금행진의 걷기를 통해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를 동시에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준다. 간디가 요구하고 때때로 성취한 것은 그가 공모한 악에 대해 책임을 지기 위해 각 사람의 영혼안에서 투쟁이었다. 영혼의 힘(사티그라하)을 통해 악과 폭력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써 자기규율을 수련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영국의 경제제국주의와 맞서서 인도전통옷(카디)을 입고, 사회적 관례를 깨고 불가촉민과 함께 먹고 살며, 땅을 나누는 등의 행동들은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자기의 책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세상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그대자신이 먼저 변화가 되라’는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를 변화시킴으로서 자신들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악을 자신의 밖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악에 대한 공모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는 윤리적 민감성을 살려냄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독립이 인도의 독립을 몰고 온 것이다.
수많은 관계적이고 구조적인 폭력들과 절망적인 지금의 사회현상들을 주목하면서 나는 간디가 악과의 공모를 인식하고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간디의 주장이 개인과 사회변화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자와 강자의 거대한 사회 시스템 앞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는 우리가 남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약자가 되는 것을 자기 선택으로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약자에 대한 윤리적 무관심과 거리두기 그리고 수많은 사회적 생태적 희생들에 대한 무서운 태연함 앞에서, 우리는 이제 자신과 남의 약함과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을 감추지 말고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그 소리에 들어야 한다. 출애굽사건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낸 곳은 바로 약자인 하비루의 신음소리를 들었다고 하신 그분이 이들 약자의 쉽사리 상처받을 수 있음에 대해 주목하셨다는 것이다.
만일 변화의 동기가 외부의 시스템 혹은 이들 강자의 자비의 손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변화는 매우 빈약하고 그 희망은 모호해진다. 우리가 이들 강자에 대한 공모 -그들의 가치, 세계관, 문화의 추종 -를 거부하기를 배운다면 그때는 변화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약함과 상처받음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우리들의 것만이 아니라 상대자/적의 진리의 조각조차 인정하고 이를 함께 모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와 자비를 배우게 되는 것이며, 또한 함께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에는 실패의 경험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우린 그것으로부터 더욱 변화되어지게 된다. 연두 빛 자연을 통해 내가 배우는 것은 존재의 무게는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오롯한 생동함과 상처받을 수 있는 약함에 대한 상호 감싸주기로 드러나는 생명의 공감에 있다는 것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