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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심연위로 활화산이 되어 작열한 영혼, 키에르케고르 :: 2009/11/22 09:35

어두운 심연위로 활화산이 되어 작열한 영혼, 키에르케고르


세상의 몰이해와 자신의 어둔 과거로 인해 일생을 세상안에서 고독과 자기 격리의 수도원적인 생활로 살면서도 미치지 않고 오히려 작열하는 불꽃으로 사는 게 가능한가?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삶은 외형적으로 역사적 사건이 그리 많지 않은 단순한 일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현대의 묵시적 예언자로서 불안과 공포에 대한 전율하는 현대 영혼의 심층 깊이를 탐구하고, 그 치유로서 지식과 이해가 아니라 생을 실존으로 만나는 작업을 제시함으로서 예언자의 반열에 올랐다. 허세와 통속화로부터 벗어나와 진실과 영원에 대한 열정으로 자기 생을 불사르는 진리의 증언에 대한 투신에 온 생을 걸었다. 그가 일생을 건 것은 진실한 종교적 생활에 대한 알짬의 탐구이다. 그러므로 넓이만 있고 깊이를 상실한 우리는 그의 예언자적인 소리에 가슴을 열고 다시 경청을 해야 한다. 진리는 존재전달이요 터득이라는 그의 외침은 시대를 넘어선 영원한 메아리이다.
박성용 박사/비폭력평화물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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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과거로부터 영혼의 심지를 켜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쇠안 키에르케고르는 한 부유하고 경건한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덴마크어로 키에르케고르는 ‘교회 공동묘지’를 뜻하며 이는 그의 우울성과 고독뿐만 아니라 그가 말년에 공격한 덴마크 교회의 신앙사건 없는 형식성에 대한 그의 예언적 과제에 대한 숙명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운명은 한때 종이었으나 갑자기 부자가 된 ‘양말상’인 아버지의 독특한 사건으로부터 주어진다. 미카엘 키에르케고르는 어린 소년이었을 당시 황야에서 쓰라린 배고픔과 자신의 불행에 대해 비참한 느낌이 들어 신을 저주한 적이 있었는 데 그 후 갑자기 부자가 되면서 신을 저주한 사건으로 인해 이 부를 즐길 수가 없었다. 또한 자신의 아내와 일곱 자녀가 연속적으로 죽자 그는 이 저주의 결과가 자신에게 내렸다고 믿고 있었다. 

자신도 요절할 것이라고 믿고 있던 쇠안은 아버지로부터 우울증을 물려받고 한 번도 웃어본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내고서 대학시절엔 방탕한 쾌락주의자가 되어 이야기 재간꾼으로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22세 때 자신이 하녀인 어머니와의 죄의 씨앗이란 비밀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고 방종에 빠졌다. 그 후 3년 뒤 그는 죄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신앙에로의 복귀하라는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의 대지진을 경험하고 새로운 생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

27세에 쇠안은 17세의 레기나 올센과 약혼을 하였지만 자신의 우울증과 어두움으로 인해 그녀가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13개월 만에 파혼을 하고 만다. 이 결단은 그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에 있어서 심미적인 것을 넘어 정신적인 것, 종교적인 것에로 지향에 대한 결정적인 전한점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우울증과 레기나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은 정신적인 심지에 불꽃을 당겨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출판한 1843년 이래 수많은 저술들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코펜하겐의 만화잡지 <코르세르; ‘해적’이란 뜻>의 비정한 공격을 통해 세인들의 조소와 몰이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기독교 복음의 진실을 위해 기성교회의 허위를 공격하였다. 그는 자기비용으로 <순간>지를 발간하며 마지막 돈까지 다 쓰면서까지 그의 교회의 갱신을 위한 그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1855년 42세로 폐렴과 척추마비로 거리에 쓰러져 병원에서 평온하며 광채어린 눈빛으로 임종하였고 그때까지 30여권의 저작을 남기었다. 저서와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정신적인 인간이었고 완전히 절대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나는 신으로부터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우울의 깊이와 강력한 죄의 문제를 경험하면서 그는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는 신비로운 힘들에 대한 시야를 갖게 되었다. 그러한 힘들이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기 때문에 인간 생활은 자체로써는 해명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현시대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인간형성을 위한 새로운 기율이 필요함을 느꼈다.

이 어둠과 불안의 심연의 체험을 통해 그는 형이상학적 교육 곧 하나님이 뜻에 의한 냉혹한 훈련을 명백히 느끼게 되었다. 그로 인해 자기 저서 전체를 통해 자신은 종교적인 인간(기독교도)이 되도록 훈련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정신의 참된 형성자로서 그에게는 평탄한 성공의 대로가 아니라 영원한 것과 관련된 ‘외톨이’의 삶을 지향하게 되었다. 현대 기독교의 기율없음에 반하여 그는 엄격의 가치를 강조한다, “필요한 것, 그것은 엄격이다”

이 엄격에로의 요청으로 인해 자기 마음의지배자인 레기네와 파혼을 결정한다. 한편으로는 젋은 처녀의 직접성을 형언할 수 없는 행복으로서 활기를 받았음에도 그녀의 포기에는 형이상학적 훈련이라는 큰 정신적 고통이 스며있었다. 파혼을 통해 그는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신의 제단에 올려놓고 동시에 ‘신과 맺는 약혼’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쓰디쓴 고통에서 실제로 그의 신에 대한 결합이 탄생한다.

이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그는 신기하게도 시인으로 성숙하였다. 절대적인 것에 도취되는 근원적인 열망이 품어져 나오게 된 것이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불행한 사람으로 그의 독특한 입술 구성으로 그가 쉬는 한숨과 절규들은 아름다운 음악으로 변한다. 반면 그의 영혼은 남모르게 고뇌에 몸부림친다.” 자신의 ‘찢어진 마음’을 통해 영원에 대한 진지성을 품어내고 상상력을 통해 이상과 관계하는 영원을 지시하는 시인으로 변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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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심연이 다가오고 있다

자기 자신의 어둠의 경험을 통해 쇠안은 우리 현대인의 영혼 저변을 뒤흔들어 놓는 인간 실존의 심연에 대한 예지를 얻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코펜하겐에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심연에 대한 전조의 예언이었지만 1차 대전 후 인간 생활의 악마적 어둠에 대해 인류에게는 일종의 계시가 되는 효과를 나았다. 전에는 더 이상 유의하지 않았던 숙명적인 절박성을 가지고 심연에 대한 그의 예언이 모든 인간 존재의 핵심을 건드리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절망-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예고이다: “안전과 안정은 절망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바로 이 안전, 이 안정은 절망일 수 있다”

절망과 불안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고 이 비극은 눈에 보이지 않고 조용히 진행된다.  세련된 생의 향락(“심미적 삶”)을 생활 원리로 하는 세속화된 생활감정의 결과는 바로 필연적으로 절망에 이르게 된다. 마취적 생활의 불꽃을 탐욕적으로 잡으려는 이 현상의 불가피한 종말로서 절망적인 불안의 상황에 대해 남는 가능성이란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닻을 잡을 것인가에 달려있다. “모든 심미적 인생관은 절망이며,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알든 모르든 절망하고 있다” 이 절망과 불안은 심미적(만족) 생활방식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에 대한 극복은 절망을 통해서 영원에 대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자에게 이르는 참된 길은 회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절망을 통해서 간다.’


깊이가 없는 통속성에 항거하라

쇠안 키에르케고르는 시인으로서 타락하고 있는 시기에 다시금 어떤 높은 이상-신적 사명의 봉사-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책임을 의식했던 인물이다. “나는 근본적으로 시인이며--다음 속죄자다” 이를 위해 그는 모든 차이를 평준화 시키는 시대적 풍조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을 꿈꾼다. 그리하여 당시 대중이 가진 무감각성과 통속성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생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내면성을 찾아보기란 아주 드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종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생에 의해 기만당하게 되는 즐거움, 경향 및 자극이다”

그가 진단한 시대의 병은 정열이 없는 무감각의 상태로 인간의 영혼이 잠을 자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의 신비성을 위한 감각이 없이 혼합된 뉴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부르주아적적 안일성은 정보의 양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수다스러움과 익명성은 제공하지만 깊이를 넓이로 대체하고 지성적이긴 하지만 어떤 길을 가고자 하는 정열은 상실한다. 근원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우울이라는 시대의 병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터전에 근거를 주는 정신적 결속이 사라짐으로서 행동할 힘,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시대 인식은 자유주의의 번성기로서 시민시대의 물질적 호경기에 마음껏 떠들고 아름답고 호화스러운 분위기에 대한 예민한 진단이 놓여 있던 것이다. 농담을 하면서 마음껏 떠들고 즐거워하는 배 앞 수평선에 무서운 밤의 출현을 그는 보았다. 이 무서운 밤의 출현 앞에 그는 내면에의 전향을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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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이해가 아니라 존재전달이다

우리의 흔들리는 터전과 더불어 다가오는 불안과 절망의 밤으로 인해 그는 사변적 합리주의에 반대하고 종교적 실존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종교의 객관적 사유양식(합리주의, 논리, 체계)를 비판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존재전달’이고 신앙의 실존양식은 터득이라고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터득이다.” 사태를 관찰하고 진술하는 추상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주관성이기에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의 성찰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터득을 통해 그는 자기가 이해한 대로 실존하며 그것을 자기 삶속에 투영시키게 된다. “진리는 아는 데 있지 않고 진리가 되는 데 있다.”

실재를 인식하는 것으로는 만족되지 않는다. 그것을 통해 내 생의 무엇이 변화될 것인가? 내면성을 키우는 터득이 문제가 된다. 단순한 지성을 넘어 신의 부름을 들어야 한다. 덴마크의 소크라테스로서 그는 외친다. “기독교의 사변적 탈선을 버려라. 체계를 벗어나라. 그리고는 신과의 해후가 오직 가능한 곳인 현실로 들어가라!” 쇠안은 기독교 신앙(모든 종교는)은 존재와 관련 있고, 존재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신앙의 일차적 관심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종교)는 ‘존재전달’이기 때문이다.

존재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최종적 실재와 접하게 된다. 지성적 추상적 교리와 개념에 갇혀  있었던 종교를 해방시켜 그것 고유의 존재 범주로 되돌리는 데 있어서 그는 어떠한 흥정도 용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실은 “문장들의 총화나, 어떤 개념 규정 및 그와 같은 것이 아니며 하나의 생”이기 때문이고 존재는 인간이 지닌 전 정열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생의 진실은 체계나 강의가 아니라 구체적인 생을 통해 논거되어야 한다. 스스로 존재자가 되는 대신에 존재적인 것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인간을 더 이상 고양시키지 못한다.

신앙은 터득이고 존재전달이라는 그의 주장은 ‘동시성’이란 질적 도약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신적 존재와의 직접성을 강조하게 된다. 역사적 간격을 메움으로써 추상적 체계를 넘어 신적 존재와 인간 간에 놓인 세기들을 제거함으로써 실제로 신적 존재 앞에 서는 직접적인 관계와 터득을 해결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과의 관계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시간, 현재만이 있다. 절대적인 것과 동시적이 아닌 자에게는 이 절대적인 것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성 그것은 시와 현실간의 차이이다.” 여기에서 간격을 두는 모든 객관성과 추상성은 직접적인 현실성 앞에서 사라지게 된다. 신적 존재는 이제 과거가 아닌 이 순간 현재의 한복판으로 옮겨진다. 된다. 그리고 그 앞에서 비약하고자 하는 결단의 순간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코펜하겐의 기독교의 사회는 전적으로 돈, 명성, 잡담이라는 일상성에 매몰되어 어떠한 결단의 긴장력도 갖지 못함을 그는 비판한다. 기독교를 무거운 생을 위한 부드러운 위안으로 선전하는 행위에 그는 분노한다. 타락과 태만에 대한 놀라움에서 그는 한밤중을 뒤흔드는 뇌우가 되어 나타났다. 생과 죽음을 건 폭풍우의 도래를 알린 것이다. 평범성과 수다, 유희와 단편적인 내용없는 말들로 채워진 나태한 경건성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뇌우가 되어 “이것이냐 저것이냐” 택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증언한다: 인간은 자기 생을 통하여 신이 현존함을 밝힐 수 있다!

“어느 때 한 마리의 야생 거위가 길든 거위들을 꾀어 자기들 무리에 가담시켜 함께 먼 남녁으로 날아가도록 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길든 거위들이 야생 거위의 권유에 즉각 동의하지 않아 야생 거위가 너무나 장기간 동안 길든 거위들과 그것에 대해 토의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야생의 거위가 길든 거위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길든 거위가 너를 지배하기 시작함을 네가 알아채는 즉시 떠나가라! 이들 무리를 저버려라. 네가 자기의 비참한 운명을 행복스럽게 만족하고 있는 길든 거위가 되는 결과로 끝나지 않도록.”


2009,11-12월호 법무사 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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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2 09:35 2009/11/2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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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의 프란체스코-온유와 겸손으로 우애의 대안적인 세상을 꿈꾸던 신의 어릿광대 :: 2009/07/09 11:11

온유와 겸손으로 우애의 대안적인 세상을 꿈꾸던 신의 어릿광대

,                                 아씨시의 프란체스꼬


21세기 초엽에 서 있는 우리의 세계는 폭력과 탐욕이라는 광풍이 지구적인 현상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적 문제로는 과대한 소비주의와 정감없는 합리주의로 인한 환경위기, 사회적인 빈부격차의 심각한 균열과 삶의 부정적 요소들에 의한 내적 갈등과 혼란 등이 존재한다.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성인인 아씨시의 프란체스코(1182-1226)는 단순히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그는 가난한 자와 작은 자와의 연대, 온유와 겸손에 근거하며 선을 통한 타인의 해방, 사회적 약자와 자연만물의 우주적인 우정 공동체를 지향함으로서 대안적인 미래 사회를 위한 중요한 통찰과 비전들을 제공한다.  박성용 박사/비폭력 평화물결 대표



고통이 감미로움으로

“하느님은 나, 프란치스꼬 수사에게 속죄로 아래와 같은 것을 하게 하셨다. 내가 아직 죄 중에 있을 때에 문둥병자를 보는 것이 아주 고역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주님이 스스로 나를 그들에게 보내어 나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들과 헤어질 때에는 내게 고역이던 것이 정신과 육신의 감미로움으로 바뀌었다. 그후 나는 얼마동안 머뭇거리다가 세속을 떠났다.”

위의 인용은 프란체스코의 자서전적인 유언으로서 그의 삶을 간결하게 꿰뚫는 본질을 표현한다. 그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현대인에게 이상하고도 낯선 것이 된 ‘속죄’의 실천이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한 보속으로 인식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와 지금에 있어서도 낯설은 경험이자 우리가 그를 이해하기 어려운 장벽이기도 하다.

당시는 봉건귀족이 몰락하기 시작하고 상인들이 하나의 새로운 사회계급으로 출현하여 부르조아 계급의 막 탄생하던 시기로서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회심을 통해 그 반대의 길인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로 삶의 의미를 바꾸게 된다. 또한 기독교는 당시의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통치하에서 비로소 황제보다 더 우위에 속한 세계통치권자로 등극하게 되고, 세계지배를 위한 십자군전쟁을 일으키는 최고의 제국적 교회이자 봉건제후의 교회로 서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란체스코는 콘스탄티누스가 물려준 제국의 영광과 약속의 상속자인 성직자 교회가 아니라, 중심이 아닌 주변(the margin)에서, 보잘것없는 자들(minores)을 위한 바보스런 생활, 즉 철저하게 가난하면서 단순하게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로 회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드러우면서도 조용하게 기존의 중세교회를 뒤흔드는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정도의 다른 흐름의 씨앗을 심어주었고 그 열매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영감과 활력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프란체스코의 보속에 대한 헌신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삶을 제대로 알기 위해 넘어야 할 관문이다. 그는 아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서 명성에 대한 꿈과 기사도에 대한 열망, 상인아들로서의 방탕생활의 지난 25년의 청년시절을 망쳐버린 세월로 이해하였고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그가 근교에서 산책을 하다 우연히 만난 문둥병자와의 대면사건에서였다. 그 이전부터 그는 문둥병자를 보면 구역질과 혐오감이 들어 피해가곤 했었다. 그런데 이 만남에서 돌아서 비켜가려고 하다가 동정심이 일어나 병자에게 지갑을 주고자 싫은 생각을 억지로 누르고 다가가다 갑자기 문둥병환자를 껴안고 열렬히 입맞추게 되었다.

이 초인간적인 자기극복의 경험을 통해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문둥병자 병원에 찾아가 곪은 상처를 씻어주고 그들의 손과 입에 입을 맞추었다. 그 후부터 그는 문둥병자를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형제들>이라고 부르게 되고 그들 안에 감추어진 신을 보는 인식론적 전환을 얻게 된다. 자기 부정을 통해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변모를 겪은 것이다. 그는 말한다. “헤어질 때는 나에게 역겹던 것이 정신과 육체의 감미로움으로 바뀌었다.” 이 말처럼 일생동안 가난과 비천함, 주변의 몰이해와 경시라는 역겨움이 감미로움이라는 명랑성과 환희로 바뀌는 신비스런 영혼의 변모가 이루어지게 된다.


벌거벗은 자로서의 자유체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이 거지는 비범한 현시에 대단히 감동되었으며, “프란치스코야, 가서 내 교회를 지어라. 너는 내 교회가 아주 허물어진 것이 보이지.”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씨시 주변에서 가장 허름한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들려진 그리스도의 음성을 통해 그는 신적 사랑에 눈뜨게 된다. 그때부터 그리스도가 그의 생활에 들어오면서 그의 삶은 변모해 갔다. 기독교에서 교리화와 지성화로 인해 거의 망각된 그리스도의 현존이 그에게 살아나면서 포목장사에 등한히 하고 성당을 보수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아버지의 분노를 사게 된다.  
결국은 아씨시의 주교관에서 부자지간에 격렬한 싸움이 일어나고 아버지의 배은망덕하다는 비난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있는 데서 옷 하나 걸치지 않는 벌거숭이라는 기상천외의 장면을 연출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벌거벗음은 소유와 도시문화와의 절연 그리고 신에 대한 진지한 인간으로서의 철저한 지향에 대한 상징적 행위가 되었다. 이제 그의 신에게로의 길은 청빈의 삶이된 것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문둥병자를 주의 표징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대변인’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가난 추구는 여성의 모습으로 인격화되어 <가난부인>과 혼인을 하여, 열렬한 사랑으로 가난을 포용하고 가난의 충실한 남편이 되고자 하였다. 그는 이 혼인을 통해 새로운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즉 온갖 소유의 부담에서 해방된 자유와 희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가난이 신음의 쓰라림이 아닌 풍요와 기쁨이 되어 그의 일생을 채운다.


가난한 자와 함께하는 새로운 백성의 탄생

“주교님, 우리에게 재산이 있다면 그것을 보호하기위하여 무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재산 때문에 소송과 분규가 생기며, 그것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여러모로 훼손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재산을 소유할 생각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소유와의 단절 그리고 가난한 자와 작은 자를 향한 철저한 지향은 당연히 세상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고 그는 <어릿광대>로서 정신 나간 사람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한 삶의 방식은 사람들을 감염시켜서 여러 사람들이 그와 관계를 맺고 추종자가 불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수도원들은 영주와 결탁하거나 많은 땅을 소유하고 농토세를 받는 봉건제도의 중심에 있었던 반면, 그의 공동체로의 입회는 재산을 처분하여 그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희사하는 조건을 붙이고 노동과 탁발에 의존해서 사는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다른 성직자나 수도자의 인간적인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오직 신의 지시에 귀를 기울였으며 1209년 성당에서 사제가 읽은 예수의 열두제자 파견이야기에서 무소유 원칙(마10:7이하,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직 다니지 말고...)에 대한 말씀으로부터 감동을 받아 문자 그대로의 실천을 하게 된다. 예수의 본받음이 이것이라는 그의 확신에 따라 타협없이 생활하는 거룩한 실천을 감행한다.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마25:40)의 복음서의 속삭임으로부터 그는 ‘‘작은 형제회’(freres mineurs)’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 수도회는 겸손에 대한 철저한 수행을 통해 권력의식에 대한 일체의 거부, 종교적 공산주의를 능가하는 철저한 무소유로서 ‘순례중인 존재’로서의 자아에 대한 각성, 소유와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한 기존 경제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서 탁발과 노동의 실천 등으로 이태리 전반을 열정으로 몰아넣었다.

이 공동체는 수도회라기보다는 형제의 모임으로 스스로를 생각했으며 따라서 기존의 폐쇄된 명상중심의 수도회와는 달리 ‘세상 안에서의 수도생활’ 곧 세상으로부터 물러서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작은 자에 대한 섬김>과 <세상의 성화>라는 새로운 이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적인 평화애>를 강하게 주장하여서 언제나 ‘주의 평화가 당신에게’라는 말로 말을 걸었으며 모든 사람에게 화해를 권유하였다.

프란체스코의 형제들이 온유와 친절에 의한 선에로의 봉사라는 평화와 화해문제를 자신의 활동의 중심에 두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분위기에 있어서는 매우 갑진 것이었다. 제국종교로서 교황이 세상의 왕까지 지배하게 되고 십자군 원정까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겸손한 빈자(貧者)로서 삶을 실천한다는 것은 거의 무언의 혁명적인 잠재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제국종교의 수호자로서 당시 바티칸은 이 도전을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프란체스코 회원내에 온건한 요소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환대를 베품으로서 그와 교회사이에 비극이 연출되었고 이로 인해 프란치스코는 교회에 순명하면서도 말년에 매우 괴로워 하였다.
 

태양, 바람, 물, 불 그리고 죽음조차 형제가 되다

어느 날 프란치스꼬는 만물 안에서 하느님을 즐길 수 있게 되어 매우 행복해졌다. 그는 노래를 부르며 거리로 뛰어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노래하자고 청하였다. 편도나무앞에 가서 그는 말하였다. “아우 편도야, 하느님 이야기를 해 다오.” 편도나무는 마치 미풍에 흔들리듯 몸을 가볍게 떨고는 봄이 덮쳐오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꽃을 피워냈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가난은 근본적으로 물질 소유의 포기를 넘어 개인이 다른 사물을 그 나름대로 있게 하는 존재 양식과 관련된다. 사물을 지배나 복종시키는 대상으로서 그들 위에 있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가난할수록 더 자유롭고 우애를 경험한다. 보편적 형제애는 그가 가난하게 사는 길의 결과이다. 이로인해 작은 자들과 더불어 모든 사물이 존중되고 경외하게 된다. 모든 사물은 초월적 실재로 인한 투명성을 발휘하게 되며 세계적인 화해와 더불어 우주적 형제애가 발생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꽃들에게 설교하고 주님을 찬미하자고 청하며, 물, 땅, 불, 공기 바람 등 모든 피조물을 형제자매로 부르고 지극한 온유한 감정으로 감싼다.

여기에 새로운 삶의 길이 존재한다. 사물위에 존재하지 않고 세상 및 자연과 더불어 형제자매처럼 사는 길이 열려진다. 겨울에 굶주린 꿀벌들에게 꿀과 포도주를 제공하고, 덕행이 지혜여왕님, 종달새가 종다리누이, 늑대형님, 대지누님, 태양 큰 형님 그리고 죽음조차 누이로 여겨진다. 그에게 세계는 온갖 경외로 가득차며, 한 하늘 아버지 밑에서 혈연의 관계를 맺는 존중의 대상이 된다.

우주의 위대한 한 주인밑에서 모두가 의존해 있으며 모두가 아버지의 한 집안에서 산다. 따라서 원수란 있을 수 없다. 아무도 위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눈 수술을 할 때도 뜨거운 인두에게 <불형님>에게 고통이 없도록 간청을 한다. 그리고 불형님이 자비를 베풀어 그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시 <태양의 노래>의 예처럼 그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는 귀뚜라미와 종달새와 더불어 찬미가를 부른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이다. 이는 단순한 낭만주의가 아니다. 깊은 자기정화와 철저한 가난과 겸손의 수행을 통해 나온 노력의 결과이다. 

그의 자기정화의 철저함의 노력은 결국 1224년 9월 알베르나산 위에서 체험을 통해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의 흔적이 그의 몸에 나타나게 된다. 이 오상다음으로 눈이 멀게 된다. 내적인 빛이 완전히 외적인 빛을 꺼버리게 되고, 자기 마음에 지상낙원을 건설하였다. 순수한 열정과 환희 그리고 명랑성, 모든 사물과 수난 동반자로서의 연대, 자연에 대한 축복과 우주적 민주주의, 지극한 겸손으로 가장 미소한 것들과 하나됨 등이 그것이다. 피조물 전체가 환호작약한다. 보나벤투라의 진술이 이를 증언한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석탄과 같이 그는 신적인 사랑의 불길에 타버린 것 같았다.”.

그가 임종시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대지위에 벌거숭이로 눕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철저한 자신의 무화(無化)를 통해 대지와 일치, 아니 자연만물형제와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1226년 10월 3일, 모두가 무서워하는 죽음의 사자를 ‘죽음형제’로 초대하고 죽음을 찬미하며 죽음형제를 받아들인다. 


사랑으로 상대의 잘못을 치유하다

“만일 네가 사랑하면 사랑함을 받을 것이며, 네가 무서워하면 다른 이가 너를 또한 무서워할 것이다. 또 네가 남에게 봉사하면 남이 네게 봉사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이를 초월한다. 타인을 사랑하되 사랑받기를 원치 말며, 남에게 봉사하되 남이 자기에게 봉사하기를 원치 말고, 남에게 호의를 베풀되 남이 자기에게 호의 베풀기를 원치 않는 사람만이 참으로 행복된 자이다.” 

프란치스코의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해방전략은 그가 사회적 역사적 갈등을 대할 때 대한  태도와 독창성에 있다. 이는 두 가지 사례를 통해 이해된다. 첫째는 부르고 산 세풀크로의 도적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둘째는 구비오의 늑대 이야기이다. 첫째 예화로 보면 도적들은 숲에서 나와 길가는 나그네들을 겁탈하곤 한다. 하루는 이들이 하도 배가 고파 형제들의 은수처에 와서 빵을 달라고 청한다. 이들의 곤경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형제들은 그들을 도와준다. 그가 형제들과 함께 상항을 처리한 단계는 다음과 같다.

* 가장 좋은 빵과 포도주를 숲으로 가지고 가서 외쳐라 “도적 형제들이여, 이리 오시오. 우리는 당신의 형제요. 그래서 좋은 술을 가지고 왔소.” 도적들이 와서 형제들이 대접하는 빵과 포도주를 먹는다.

* 그런후 그들은 도적들에게 하느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별 성과도 없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이 진실로 할 수 있는 것을 청한다. 즉 도덕질을 할 때 사람을 치거나 해치지 말라고 부탁한다.

* 그 다음날, 형제들은 같은 절차를 반복하되 다만 빵, 달걀, 치즈 등과 같은 더 좋은 음식을 대접한다.

* 도적들이 먹고 난 후에 새로운 제안을 한다. 즉 그 고통스럽고 배고픈 생활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육신과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심을 알려 준다.

* 마침내 형제들의 정중한 태도와 친절 때문에 도적들은 회개를 할 것이며 그들 중 몇은 형제회에 가입하기를 청할 것이다.

여기에는고발, 질책, 비난등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다. 프란치스코의 전략은 선과 예의, 인내와 각 개인 속에 잠재한 치유의 능력에 대한 신뢰, 보살핌과 이해로 말미암아 이 치유이 힘이 발동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곧 우리가 도적을 온유하게 이해하며 보살핀다면 개개의 도적 안에 잠재해 있는 거룩하고 착한 형제가 구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친절을 통하여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그의 전략이다.

구비오의 늑대 이야기는 산에 사는 “크고 무섭고 사나운” 늑대와 무장을 하고 무서워하고 있는 도시에 사는 다른 (인간)늑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들은 서로 적대시하며 오직 폭력과 상호 파괴의 적의 이미지를 갖고 그런 증오의 관계만을 맺고 있다. 프란체스코는 이들이 행하는 공포로 인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식의 휴전을 따르지 않는다. 그의 노선은 복음주의적인 것으로 각자가 방향을 바꾸어 타인을 향하여 방향을 잡을 때에만 발견되는 새로운 길이다. 여기서의 해방적 도전은 두 종류의 늑대들로부터 그들안에 있는 선함의 의지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 해결방식은 다음가 같다:

* 그는 자진하여 늑대가 다니는 길로 나아간다. 아무런 자기 무장없이 복음에 매료된 한 가난한 이로 나아간다. ‘늑대형제여, 이리 오너라’ 그는 형제다운 언어로 늑대의 턱을 다물게 한다. 그는 늑대로 하여금 ‘도둑이요 살인자로서 처형당할 만한“ 상황임을 인정하게 한다. 그러나 또한 ’이 모든 것이 배고픔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이해한다. 필요한 음식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듣고 늑대는 아무도 해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프란치스코는 그 늑대를 늑대 형제, 곧 새로운 존재로 회심시킨 것이다.

* 그는 옳고 그름의 이유를 따지지 않고 새로운 존재로서 회심에 초대한다. 그래서 숲의 늑대가 인간의 처소에 자주 드나들고 사람들은 늑대에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이 평화는 한편이 다른 한편을 이겨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편이나 당파를 극복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대를 돌보게 되는 자비의 실천이 실지로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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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가난과 영혼의 가난으로 평화의 빛을 밝힌 마더 데레사 :: 2009/03/07 10:37


          아무리 가난해도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사랑은 언제나 풍성하다
                      -어둠과 누추함을 신의 사랑의 불꽃으로 밝힌 마더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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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가난과 영혼의 가난이란 기름잔으로 신의 빛을 밝힌 마더 데레사(1910-1997)는 순수한 사랑과 희생의 기적을 세상에 보여주신 ‘어둠의 성인’이다. 이는 가장 가난한 자들을 섬김속에서 그들 안에서 신을 보고, 가난과 고통 그리고 어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동일시함으로써 가난한 자들을 신으로 섬긴 결과이다. 전 세계 136개국에 4천개가 넘는 자선단체를 세우고 노벨평화상(1979년)을 포함한 수많은 명예로운 상들을 수상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헌신과 기쁨, 청빈과 봉사의 실천을 살았다. 소유한 것없이 가장 넘치는 사랑의 삶을 살았던 그녀의 삶의 비결은 ‘작은 자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란 복음의 말씀에 따라 ‘익명의 그리스도’를 모두에게서 보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겼기 때문이다.

        

“애야, 예수님의 손을 꼭 잡아라. 죽을 때까지 그분과 함께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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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스(“거룩한”) 곤히아(“장미꽃봉우리”) 브약스히야(세례명)는 마케도니아 아드리아 해변의 스코플레라는 작은 도시에서 1910년 8월 26일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느콜라는 지역유지로서 교회의 후원자이자 건재상을 하였으나 아네스가 어렸을 때(1919년)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비록 어머니 드라나필은 생계유지를 위해 온갖 일을 하였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 가족과 함께-위로 두 언니 오빠를 포함해서- 묵주기도를 하였다.

아네스는 그녀의 어머니를 거룩한 분이셨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노나록(노나-어머니;록-영혼)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를 떠오를 때마다 ‘거룩’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말씀과 행위가 거룩했기 때문이지요.” 어머니는 힘든 생활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을 곤경에 처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때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고, 말이 아니라 실제로 알콜 중독 여성, 버림받은 노파를 돌봐줌으로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가난한 사람들이 문가에서 음식을 청할 때 먹을 것이 모자라도 반을 떼서 주었다. “애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 아네스의 삶은 이렇게 어머니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행위에 의해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어렸을 때 성가대를 하던 아네스는 12살 때 교회의 성모님 발아래서서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너의 온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거룩한 수녀가 되도록 노력하라.” 이 내면의 목소리를 6년간 곰곰이 생각하고 기도하다 18세에 ‘하느님께 온전히 속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이 말에 어머니도 하룻 동안 홀로 기도한 후 딸에게 말하였다. “애야, 예수님의 손을 꼭 잡아라. 죽을 때까지 그분과 함께 해라.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려무나. 성모님은 네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거다.” 그리하여 1928년 9월에 집을 떠나 1929년 5월에 다르질링 로레토 수녀원에서 정식 수련 수녀가 되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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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에서 그녀는 마더 데레사 수녀로 동료로부터 불러지게 되었다. 이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일을 커다란 사랑으로 행한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를 수호성인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1931년 청빈, 정결, 순명에 대한 유기서원을 하고 수련기이후에 콜카타로 가서 성마리아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주말에는 학생들과 봉사활동을 조직하여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가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데레사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게 되는 때는 바로 36세인 1946년 9월 10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의 ‘사랑의 선교회’의 출발점이자, ‘부름속의 부름’이라고 데레사가 지칭한 사건이다. 피정을 위해 콜카타의 로레토 수녀원을 떠나 삼등 열차에 몸을 싣고 다르질링을 향해 가는 도중에 복음서 마태 25장 31절을 읽다가 이 말씀들이 폐부를 꿰뚫는 감전되는 듯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어거스틴이나 마틴 루터가 성서의 말씀에 의해 극적인 체험을 가진 것처럼, “저 역시 성마태오의 거룩한 말씀의 광채에 멈추어 서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데레사는 고백하였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주었다....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그녀는 성서를 덮고 묵상기도 속에 잠겨 들어갔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위로조차 포기하고 비참하고 불행한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살고 계신 사랑하는 임(그리스도)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 일하고 그를 돌봐드려야 한다는 내적인 목소리를 듣고, 대주교의 길고 어려운 허락의 과정을 통해 마침내 1948년 4월에 교황청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8월 18일에 수녀원을 등지고 의지할 자 없이 홀로 집도 없이 가난한 자를 찾아 나서게 된다. 잠시 성가정병원에서 단기간 의료교육을 받고서 수도복을 벗고 콜카타 청소부로 일하는 여성들이 입는 하얀 사리를 입고 물질적 가난과 영혼의 가난과 싸우는 새로운 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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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시작한 곳은 콜카타의 한 지역인 모티즈힐에서 였다. 이곳은 빈민가로서 구정물, 가난, 무지, 질병, 버림받음, 타락이 난무한 곳이다. 데레사는 벌거벗은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작은 공터의 구아바 나무아래서 분필대신 막대기를, 칠판 대신 젖은 땅바닥을 사용하여 초등학교 수업을 시작하였다. 수업이 끝나면 가가호호 방문하여 환자들을 병문안하였다. 뜻밖에도 전에 가르쳤던 학생들이 찾아와 일을 거들어 주었다. 처음 사랑의 선교회 창립멤버 12명중 10명은 바로 그녀가 과거에 가르쳤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데레사는 1948년 12월에 수중에 단돈 오 루피만 가지고 콜카타의 빈민가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모셔다 드리는 일을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가난의 뼈저린 현실을 경험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불안과 고뇌를 난생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가난이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맞아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깊은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참된 거룩함은 하느님의 뜻을 기쁘게 행하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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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데레사는 버림받은 사람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 안에서 예수님을 찾고, 이들 안에서 사랑과 헌신의 물 한 방울이 없어 ‘목마르다’고 외치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현실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오직 기도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에 의해 필요한 것들을 얻게 된다. 다음은 몇 가지 예들이다.

어느 날 질병에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약품목록을 갖고 큰 약국에 도착하여 데레사는 매니저에게 간청한다. ““선생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 약품들을 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그들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게는 돈이 없습니다.” 매니저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뭔가 잘못알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는 약을 파는 데지 공짜로 주는 데가 아니오. 내 말 알아듣겠소? 바빠 죽겠으니 성가시게굴지 마시오.” 데레사는 성모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약국 바깥에 앉아 조용히 묵주기도를 드렸다. 얼마 후 매니저가 나왔다. “여기 부탁한 약이 있습니다. 우리 약국에서 주는 선물이라고 여기고 받아주십시오.”

어느 날 저녁 수녀들이 겨우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쌀이 있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쌀 한톨도 구경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기꺼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내준 다음 정작 자신들은 저녁을 먹지 않은 채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이 수녀들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굶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마더 테레사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한 그들을 저녁도 먹이지 않고 침실로 보내는 게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성당으로 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지자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누군가 문들 두드렸다. 나가보니 낯선 이가 손에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데레사는 줄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물어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그네는 미소로 답하며 말했다. “수녀님, 가방안에 쌀이 조금 있는 데 받아 주시겠습니까?” 마더 데레사는 그것을 고맙게 받았다. 그리고 양철 컵으로 재보았더니 수녀들이 한 끼 먹을 수 있을 만큼이었다. 이렇게 그녀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이불, 음식, 숙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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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너그럽다고 주장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찾아와 근처 힌두교 가정이 있는데 아이가 여덟이고 밥을 먹은 지 하도 오래돼서 거의 굶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즉시 있는 쌀을 긁어모아 얼마 되지 않지만 한 가정의 저녁식사는 충분히 될 양을 갖고 힌두교 가정으로 갔다. 그 집 안주인은 아주 기뻐하며 쌀을 받아들이고는 데레사에게 그리고 알라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러고는 쌀을 반으로 나눠더니 곧 돌아오겠다고 말하며 서둘러 가지고 나갔다. 안주인이 돌아왔을 때 마더 데레사가 물었다. “그렇게 급하게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 무엇을 하셨나요?” 그녀가 말했다. “이웃집에 갔었습니다. 수녀님, 그들은 회교도입니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식구가 많은데 모두 굶어 죽어가고 있었지요. 그래서 수녀님이 주신 살의 반을 갖다 주었습니다.”

중병으로 25년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한 환자는 오른손만 가까스로 움직일 수 있었는 데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가끔씩 담배를 피우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수녀님, 일주일동안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을 보내드립니다.” 거기엔 15달러가 들어있었다. 그것은 그다지 큰 돈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포기와 희생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렇듯 주는 일에는 커다란 기쁨이 있고 엄청난 희생에서 오는 고통과 함께 또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난다는 것이 마더 데레사의 변함없는 신조였다.

멜컴 머거리지라는 앵커가 BBC 다큐멘터리 “하느님을 위한 아름다운 것(Something Beautiful for God)”라는 이름으로 데레사와 그녀의 사랑의 수도회 활동을 소개하면서 물었다. “망설임이나 거리낌 없이 이런 봉사를 할 수 있는 부르심이나 영감을 어디에서 얻는가?” 그녀는 간단히 대답했다. “물론 하늘에서, 우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받아먹는 성체에서,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에게서 그리고 기도에서 얻지요.”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허락한 BBC의 데레사 활동에 대한 방송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950년 10월 교황청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인가하게 되면서 인도 전역과 세계 곳곳에서 지원자들이 콜카타로 몰려들었다. 이에 대해 단지 데레사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나이다. 주님 자비에 모든 희망을 두나이다.”


“고통이 크고 어둠이 짙을수록 하느님을 향한 제 미소는 더욱 상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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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피하는 힘들고 어려운 일, 가장 더러운 일은 늘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마더 데레사는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다. 가난한 버림받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집인 ‘니르말 흘리다이’(임종자의 집)을 여느 것을 시작으로 ‘병자와 고통받는 사람들의 협력자회’ ‘사랑의 선교회’ 본부인 ‘마더 하우스,’ ‘마더 데레사 협력자회,’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한 ‘어린이들의 집’, 나병환자 공동체와 ‘평화의 마을,’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집, 원주민을 위한 집, 판레스타인 난민구호의 집 등을 연달아 열고 동구권과 남미 등 수많은 나라에서 구호센터를 열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에는 예수님을 구유에서만 아니라 코를 막지 않고는 다갈 수 없는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해야 한다는 그녀의 가난한 이들과 그리스도의 동일시에 대한 신앙적 체험이 그 중심에 있었다. “나병환자든 죽어가는 사람이든 불구자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든, 소외된 사람이든 그 누구든지 간에 그 사람은 우리에게 가장 가난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님이다.” 또한 그녀는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반면에 우리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함으로써 하느님께 바치는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꾸어 보여 드린다.”

사랑의 수녀회에 지원자가 들어오면 데레사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고 손가락을 다 펴게 한 다음, 하나하나 꼽으면서 다음 ‘손가락 복음’의 다섯 단어를 말한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You did it to me)"(마25:40) 지원자와 데레사는 그 다섯 단어를 함께 반복하고 함께 웃는다. 이 말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더러운 사람들을 만지고 씻어주고 섬길 때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반감을 없애주는 만병통치약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것은 묵주, 십자가, 접시, 사리 세벌뿐이지만 이 다섯 손가락 복음은 그들에게 사랑과 즐거움의 무한한 원천이 되어 고통받는 가난한 자들을 섬기게 된다. 

이 다섯 손가락의 복음은 데레사 자신의 영적 어둠의 경험인 ‘버려짐’과 ‘메마름’에 대한 인도자가 되고 그 내적 어둠은 결국은 정화되고 깊이를 얻게 되었다. 데레사는 단순히 인간 사회에서 짓밟히고 내버려진 이들을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들의 물질적 고통과 영적 고통을 나누었던 것이다. 특히 외적으로는 항상 미소와 명랑을 잃지 않았음에도 내적으로는 고통스러운 내적 경험인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리스도의 고난, 즉 ‘아무도 원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목마름에 대한 고통을 간직하고 있었다. 결국 종국에 가서 그녀는 채워지지 않은 신비스런 고통이 자기 영혼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고난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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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97년 9월 5일에 죽음을 맞이하기 전 20년간 심장병과의 싸움과 허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그 어둠과 고통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전 세계를 돌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섬김과 위로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이미 2001년에는 그녀를 따르기 위해 삼천오백 명의 수녀와 약사 백 명의 수사, 천명의 선교 활동가 백육십구 개의 교육기관, 천삼백육십구 개의 진료소, 칠백오십오 개의 수도원이 생겼고 이는 나환자 구제센터, 시슈바반(어린이 집) 등은 제외된 숫자이다. 그녀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흘린 하느님에 대하 타는 목마름은 기름이 되고, 이를 통해 어둠을 통해 밝힌 등불은 더욱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몽당연필에 불과합니다. 그분이 쓰시고, 그분이 생각하시고, 구분이 결정하십니다. 나는 그분의 손안에 있는 작은 몽당연필입니다.”

“미소를 활짝 지으며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가져가시는 것은 무엇이든 드리세요.”

“저는 당신의 것이며 당신께서 저를 조각조각 내신다 해도 그 조각 하나하나가 모두 당신만의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단순한 한 가닥의 미소가 할 수 있는 그토록 큰일에 대하여.”


(변호사 저널 2009년 3-4월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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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의 스승 간디 - 세계의 무장 해제와 가슴의 무장 해제는 같이 간다 :: 2008/11/24 01:20

 

   세계의 무장 해제와 가슴의 무장 해제는 같이 간다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신의 얼굴을 대면하였던 비폭력의 스승, 모한다스 간디-


                                                                                               박 성 용
(법무사 저널 2008년 11월-12월 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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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간디의 생일인 10월 2일을 ‘세계비폭력의 날’로 정하고 21세기 첫 10년을 ‘평화와 비폭력 문화교육 10년’으로 정했다. 그만큼 폭력의 문제는 이제 지구공동체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세계는 간디(1869.10.2~1948.1.30)의 비폭력 행동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하는 데 많은 통찰을 의존하고 있다. 간디는 대중에게 성인으로 혹은 계몽가로 존중을 받고 있었지만 이는 간디가 자신과 자신의 삶을 이해한 것과는 매우 거리가 있다. 그가 행한 정의와 자유를 향한 대중운동, 불가촉민과의 연대, 스스로 선택한 명상과 금욕, 가난, 시민불복종 그리고 공동체(아쉬람) 생활은 진리에 대한 그의 이해와 이에 대한 실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것이 도로시 데이, 넬슨 만델라, 달라이 라마, 대주교 투투, 토마스 머튼을 비롯한 전 세계의 주요 영성가와 평화활동가들에게 파장을 준 근본 알짬이기도 하다. -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 공동대표



평화와 정의, 해방의 길은 우리의 가슴과 일상생활의 정화에서 시작된다.


상인 계급에서 태어난 간디의 어린 시절은 스스로의 고백에 따르면 구구단을 외우기 힘들 정도로 지능과 기억력이 낮았고 매우 수줍어해서 학교가 끝나면 누구와 이야기하는 것이 싫어서 달음질하여 집으로 올 정도였다. 이러한 수줍음은 어느 운동에도 끼어 놀지 못하고 오직 책만 보게 했으며, 겁이 많아 도둑, 유령, 뱀 그리고 어둠을 매우 무서워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 가지는 특이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거짓말에 대한 거부였다. 15살 때 형의 팔찌에서 금 한 조각 도둑질한 것에 대한 자백을 통해 아버지의 말없는 눈물을 통한 용서받음의 경험은 이후의 삶에서 거짓에 대한 민감성을 강화하였다.  


간디의 자서전 전반부를 보면 그가 채식에 일찍 눈을 떠서 이에 대한 책들을 섭렵하고 채식모임에서 활동했으며 생활의 간소화를 위한 여러 끈질긴 노력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수줍음은 청년기에 들어서도 지속되어 사교적 모임과 대학 수업에서는 벙어리가 되고 연설의 기회를 얻을 때는 몸이 떨려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고백한다. 18세에 법학공부를 위해 영국유학을 떠났을 때는 영국문화에 맞게 서양인이 되기 위해, 처음에는 춤추는 법, 바이올린 연주법까지 배우려 했을 정도였다.


변호사자격을 따고 1891년 인도로 되돌아왔지만 그 자격증을 가지고 어떻게 변호사 일을 하는 지도 전연 알지 못했으며, 아주 단순한 작은 소송사건을 하나 맡았었지만 그나마 재판정에서 수줍음으로 말이 안 나와 실패하고 수임료를 되돌려 주기까지 했다.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서 남아프리카에서 인도 사람들을 위해 변호사 일을 해보라는 친척들의 권유로 1893년 “절망 반 기대 반”으로 그는 남아프리카행 배에 몸을 실었다. 도착하자마자 여행중도의 열차에서 1등 칸에서 밖으로 내동쳐진 인종차별의 경험이 그의 삶을 전적으로 방향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자신의 개인적 고통의 경험을 공공의 차별에 대한 해결을 위한 봉사로 전환시키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 나를 남겨둔 채로 기차는 사라졌다. 내 생명 자체에 위협을 느껴 나는 캄캄한 대합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백인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가 두려웠다. 내 사명은 무엇인가, 내 자신에게 물었다. 인도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나의 조력자 되시는 하느님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에 직면해야 하는가? 나는 남아서 고통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나의 적극적인 비폭력은 그날 시작되었다. 하느님은 그날 여행에서 그 시험을 선사하신 것이다. 그것은 내 일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또 하나의 9.11, 비폭력운동이 점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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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의 인도인의 생활 참상을 눈으로 보고 겪으면서 간디는 수백 명의 의뢰인을 변호하고 불의한 법률에 반대하는 기사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던 중 남아공 트란스발 정부가 인도인 차별을 위한 새로운 법률제정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간디는 1906년 9월 11일 요하네스버그의 임페리얼 호텔 광장에서 3,000명이 이 법안을 반대하는 집회를 소집하였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있던 그에게 한 연설가가 죽을지라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 법안을 반대한다는 말에 해답을 얻은 그는 참석한 모두와 함께 설사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고 죽는다 할지라도 비폭력 저항을 하기로 하느님께 서약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연의 일치이지만 2001년 9.11사건(및 테러와의 전쟁)과는 전연 다른 사티아그라하(진리에 굳건히 섬; truth force) 운동이 같은 날에 일어나게 되었고 몇 달만에 1500명의 인도인이 체포되고 구금되었다.   

간디는 특히 러스킨이 쓴 “이 나중 온자에게도” 저서에 감명을 받고 또한 요하네스버그 외각에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방문 경험을 통하여 “친밀한 사귐, 기도, 청빈 그리고 노동의 삶”에 크게 감동을 받고 자신도 아쉬람을 설립하였고 이는 나중에 인도에서도 건립하여 거기서 살면서 사티아그라하를 실천하는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스와라지(자립자치; swaraj)를 실천할 통로가 된다. 여기서는 천민인 불가촉민도 받아들였고 진리, 비폭력, 금욕, 청빈, 두려움 없음, 육체노동, 모든 종교에 대한 관용, 자기 옷 만들어 입기 등 14가지 항목을 서약했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먹고 농사짓고 신문을 발행하여 대중을 훈련시켰고, 독립을 위한 비폭력 투쟁 중에 겪게 될 고통과 죽음마저도 함께 각오했다.


1914년 7월 결국 남아프리카 정부와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간디는 그 이듬해 초 영웅으로 환영받으며 인도로 돌아왔다. 한 해 동안 그는 열약한 3등간 열차를 타고 인도전지역을 돌아다니며 인도의 현실을 배웠다. 그리고 아메다바드에도 아쉬람을 세우고 거기서 2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티아그라하를 위한 공동체 생활방식을 살아갔다. 여기서 파괴적인 힘을 지닌 폭력에 영혼의 힘으로 저항할 수 있는 일편단심의 신념과 확고한 자기 위탁에 대한 영적 수련과 자기 절제 그리고 자치능력을 발전시키는 생활양식을 실험해 나갔다.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아는 유일하고 확실한 수단은 비폭력 곧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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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대중적인 사티아그라하의 본격적인 적용의 예로서는 1919년 1차 세계대전동안 독립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인도에 가해졌던 억압조치의 유예-일명 롤레트(Rowlatt) 법안-에 대항하여 하르탈(hartal; 상점문을 닫음)을 실시하고 기도와 단식으로 보내는 간디의 호소였다. 4월 6일 가계와 공장이 문을 닫고 수백만 사람들이 거리 시위에 참여함으로써 영국뿐만 아니라 간디 자신도 그 결과에 놀랄 정도였다. 이듬해부터 영국통치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불복종 운동을 호소함으로써 1922년 3월 간디가 선동죄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는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과 똑같은 의무가 있다”고 재판장에게 응답하여 6년의 최고형을 받았다.


4억이 되는 인도국민이 수만밖에 안 되는 영국군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의 이유를 영국의 지배에 대한 인도의 협조에서 찾은 그는 악에 대한 비협조운동과 건설적인 프로그램의 실천운동으로서 차크라(물레) 돌리기를 실천하도록 하였다. 이 물레돌리기는 대중들에게 의식의 전환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각성을 인도국민들에게 가져왔다. 또한 1930년 3월에 소금 사티아그라하를 선언하면서 해안까지 약 400km를 걸음으로써 시민불복종운동을 점화시켰다. 그 결과로 5월에는 2,000명의 자원봉사자를 통해 다르사나 염전 산지로 행진하게 하였다. 20여 명씩 조를 짜서 소금공장 입구로 들어가면 영국 군인이 쇠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저항자는 아무런 방어 없이 맞고 쓰러지면 다시 다른 조가 이어지는 이 광경이 전 세계에 기사화되면서 세계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이후로 지속되는 시위로 10만 명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대가 세상에서 보고자 하는 변화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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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촉민과 관련된 한 사건이 촉발되어 간디는 수천 년간 지속해온 불가촉민 제도를 폐지시키기 위해 1932년 9월에 감방에서 목숨을 건 단식을 시도하면서 인도전역은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자살과 다름없는 행위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말렸지만 결국 힌두교 지도자들은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불가촉민을 사원에 받아들이도록 결정하였다. 이 사건이후 간디는 인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이자 불가촉민들의 지역인 와르다 지역으로 이사하여 남은 인생을 거기서 보내면서 독립이후의 인도를 위해 인도 촌락의 생활개혁운동에 착수하였다. 이는 사티아그라하가 단순히 저항만이 아니라 건설적인 프로그램을 통한 대안 모색(“선에 대한 협력”)에 더 중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말년에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들 간의 분쟁과 폭동을 막기 위해 78세의 노년의 몸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화의 순례자로서 가장 오지이자 절대빈곤층이 있는 노아칼리 지역을 다니며 일치와 화해를 호소하였다. 처음엔 간디를 잘 모르던 지역민들이 적개심을 버리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핵무기 소유와 사용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했으며, 1947년 8월 15일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독립이 선언되면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이 대량이주하면서 두 달 동안 수십만이 희생되는 사건을 목도하면서 병약한 그의 단식이 시작되었다. 이슬람과 힌두교 지도자들은 그의 단식을 끝내기 위해 폭력의 행위를 멈추었다.


간디는 이슬람과 힌두교사이의 분쟁에 대한 해결을 위하여 훈련받은 시민 평화군인 상티 세나(Shanti Shena)을 1948년 2월 초 전국에 소집하였으나 1월 30일 힌두교광신자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간디는 진훍과 대나무로 지어진 작은 움막과 물레, 짚으로 만든 돗자리, 앉은뱅이 책상 그리고 책 몇 권이 꽃힌 선반 두 개만을 남겨 놓았다. 그의 사티아그라하 및 시민평화군의 개념은 1999년 헤이그평화회의 이후 국제비폭력평화세력(nonviolent peaceforce)이름으로 다시 부활되어 분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리와 비폭력 그리고 자기 고통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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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아그라하는 물리적인 힘이 아니며 적의 파멸을 목표로 하지 않는 순수한 영혼의 힘이며 진리는 영혼의 알짬이다. 이는 언제나 악을 선으로, 분노를 사랑으로, 비진리를 진리로 폭력을 비폭력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이러한 실천에는 그의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깔려있다. ‘사트(sat; 진리)’란 말은 또한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진리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해지면 진실해질수록 하느님에게 더 가까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한 정도만큼만 존재합니다.” 이러한 이해에서 진리를 따르는 만큼 자기 자신을 찾게 되며, 진리이외는 없기에 그것을 막을 장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디는 확신한다.


간디는 더욱 대범하게 ‘하나님이 진리이다’라는 기존의 종교전통의 교리적 이해를 뒤바꾸어 ‘진리가 하나님이다’라는 윤리적 실천으로 바꾸어 놓았다. 따라서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 진리가 있어야 하고, 진리가 우리의 생명의 호흡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의 추구는 타파스(tapas; 자기 고통)를 통해 상대의 선을 이룩하고, 자신의 정화를 통해 오류를 정정하게 된다. 진리는 여기서 진리를 실현하는 비폭력은 과정속의 목적이며, 단순히 죽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죽어 사랑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변화의 힘으로 이해된다. 비폭력은 인간의 가슴을 녹이는, ‘고통을 끌어안는 사랑법’이므로 언제나 효력을 발휘한다고 간디는 말했다.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목적을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우리 모두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을 섬김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된다고 간디는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정치적 영역은 영적 수행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보편적이며 어디에나 존재하는 진리를 맞대고 보려면 가장 보잘것없는 미물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하고 삶의 어느 부분도 소홀히 여길 수 없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 정화를 통해 마음의 순수함을 지킴으로 선을 실현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군인이 훈련받는 것처럼 비폭력은 더 많은 훈련을 일생을 통해 요구되기에 이를 아쉬람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였다. 마틴 루터 킹은 간디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인류가 진보하려 한다면 간디를 피해 갈 수 없다. 우리가 그를 무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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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와 무의미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의 용기에로의 감행-폴 틸리히 :: 2008/09/16 06:53

 

허무와 무의미의 소용돌이 속에서 존재의 용기에로의 감행

-사색하고 회의하는 지성인의 사도인 폴 틸리히-


(법무사저널 9/10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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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 (1886-1965)는 ‘20세기 오리게네스’라는 당대의 칭송이 어울릴 만큼 현대 지성사의 거목이다. 그에게 수여된 10여개의 명예박사학위가 보여 주듯이 문명비평가, 실존철학자, 역사철학자, 심층심리학자, 이념비평가, 문화신학자라는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한 영역에 머무르지 않은 포괄적인 그의 ‘경계선상’에서의 사상적 탐구는 양차 세계대전이 준 인류문명의 위기와 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비극에 대답의 추구에 기초한다.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고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며 ‘궁극적 관심’으로서 신앙과 종교를 재해석함으로써 기존 종교의 편협성과 광신주의를 일신하고, 세속적 유사종교인 국가주의, 공산주의의 허무성을 진단한다. 그의 목표는 현대인간의 실존상황인 분열, 분쟁, 자기 파괴, 무의미 그리고 절망이라는 ‘흔들리는 터전’에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용기와 갱생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있다.
                          
                                                                                       



어린 낭만적 신비주의자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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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독일 베를린 근처 작은 마을 슈타르체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는 날 밤에 그는 여러 번 끊어져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경험한다. 이는 일생동안 그가 탐구한 죽음과 비존재의 두려움에 대한 상징적인 예고인 셈이다. 아버지가 루터교 목사였던 관계로 그는 목사관의 아름답고 넓은 정원과 마을주위의 자연을 통해 낭만적이고 존재론적인 신비주의를 갖게 되었고 존재의 거룩함, 그리고 발틱해의 깊이, 파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존재의 역동성, 마성적인 것 그리고 무한한 것 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틸리히는 고등학교과정에서부터 슈팽글러, 피히테, 칸트 등 고전철학을 탐구하고 1904년 베를린 대학시절 거리의 서점에서 쉘링 선집을 발견하여 그의 자연철학에 매혹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유의 관점을 얻게 된다. 그는 교실보다 자연과의 내적 대화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었으며 휠더린, 노발리스, 릴케를 통해 자연의 환희와 탄식에 대한 공감을 배웠다.  그 후 할레 대학에서 경건주의와 바울과 루터의 영향을 받게 됨으로서 죄인만이 아니라  회의주의자에게도 주는 은총을 배웠고 몇 년 후 목사 안수받기 위한 이론과 실습 수련도 받게 된다. 베를린 노동자 구역에서 실습수련을 통해 전통적 종교용어가 진리전달에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비종교언어로의 재해석에 대한 필요성을 알게 된다.


그는 “이성의 밤”이라는 저녁 토론모임을 주관하면서 예술가, 사업가, 여성 지도자, 학생, 철학자, 법률가, 종교인들을 불러 모아서 진리, 예술, 신비주의, 문화, 종교 등의 주제를 통해 현대 세속주의 속에 사는 ‘사색하고 회의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새로운 종교적 표현양식의 중요성을 익히게 된다. 그래서 다양한 학문의 경계선 상에서 사물의 전체상을 보는 안목을 갖고, 신앙을 실존 해명을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지성에 정직해지려는 자신의 독특한 입장을 구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옛 세계의 무너짐과 새 문명 건설에 대한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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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군복무에 자원입대할 당시 군국주의와 국가주의는 유럽 전역에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1차 대전이 발발함으로 신이 아무튼 선한 것으로 이끌어 주리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r는 참전하게 된다. 그러나 최전선의 지옥에서 다른 세계, 다른 인간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사상 전체와 그의 존재가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들리는 지각변동을 경험하였다. “우리는 가장 무서운 비상한 파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계에서의 종말의 경험입니다. 종국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종국은 가장 깊은 통증을 동반하고 있습니다”(가족에게 보낸 편지). 이 전쟁참화의 경험을 그는 첫 번째 정신적 죽음으로 표현하였다.


지금까지 안전하게 지탱해오던 세계관, 가치관 모두가 밑바닥에서 뒤흔들리는 종말과 문명의 무질서화와 쇠락을 의식하면서 그는 새로운 것이 도래하고 있고 이를 위한 행동을 할 때라는 각성을 통해 그는 낭만과 환상을 갖지 않는 냉철한 사색가로 바뀌게 되었다. 전쟁 중 에 너무나 추하고 무서운 허무의 공포와 비존재의 위협을 체험함으로써 기존의 전통적인 유신론의 관념, 곧 모든 것을 마지막에 가장 좋게 마무리지어주시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신 관념을 새로운 참 하나님 모습으로 대체되어야한다고 확신하면서 그 문제로 고투하게 된다. 유럽문명의 쇠퇴에 대한 예감과 국가주의의 맹목적인 열광에 대한 죄책감은 이제 그를 교수직을 통해 철학적 신학자로서 서구문명의 재건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두 실재의 경계선위에서 만개하는 결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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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1933년 히틀러가 제 3제국 출범시키고 교수직을 박탈하자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로 오게 되면서 그의 사색은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된다. 수많은 피난 이민자들로부터 인간 삶의 비참함의 도전을 통해 인간의 내면성 속에 내재하는 악마적 구조와 악한 세력의 실재성을 직시하면서 삶에 대한 용기와 재창조의 의욕을 잃게 하는 허무의 권세와 내면세계의 황폐화에 대항하는 내면의 재건을 모색하게 된다. 


인간실존의 분리로부터 오는 불안은 의학적 치료 이상의 존재론적 치유가 필요하며, 죽음, 운명, 무의미, 허무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용기가 무엇인지를 1952년 ‘존재의 용기’라는 책에서 다룸으로서 그는 대중들의 확고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인간 실존의 곤궁성에 응답하기 위해 굳어져 버린 전통적인 종교언어를 일상 언어로 재해석하여 현대인의 의미물음에 대답을 모색한다. 이때부터 과학과 종교, 정치와 윤리, 권위와 자유, 유럽의 사회주의와 미국의 자본주의,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선에서 양쪽을 포괄하며 전체를 깊이에서 통찰하는 변증법적인 철학적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틸리히는 말년 10여 년간 하버드대를 포함한 십여 개 대학으로부터 명예학위와 독일로부터 명예 훈장들을 받을 정도로 서구 지성사의 거장으로 활약하였다. 1963년 타임지 40주년 기념식 주 강연에서 인간 실존상황의 모호성을 근거로 절대 진리의 주장은 위선이자 교만임을 주장하고 서구 현대문명의 수평 지향적 확장문화에 대해 수직적인 깊이의 문화의 필요를 역설하였다. 노년의 질병으로 숨을 거둔 후 그는 인디아나주 뉴하모니 마을의 ‘틸리히 공원’에 안치되었다.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인간과 삶의 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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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도스또엡스키의 종교 재판관이 주는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짓밟는 권위주의와 그 조직들에 대해 일생을 경계하며 싸웠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인간은 단독으로 자기 실존을 직면해야 할 필요성과 영혼의 내면성을 강조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은 인간의 궁지라는 인간의 실존상황의 문제제기로부터 일어난다. 삶의 의미문제는 궁극적 관심에 대한 어떠한 해답을 갖고 있느냐에 의존한다. 그리고 신앙과 종교는 바로 이 궁극적인 것 또는 무제약적인 것을 향한 방향정위인 것이다.


궁극적 관심이란 “어떤 것에 관하여 궁극적 심각성 곧 무제약적 심각성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며 우리를 붙잡는 궁극적인 것은 매우 강력하여 우리의 전 인격적 결단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종교인이자 신앙인이다. 비록 그 궁극적 관심이 교리나 경전과 같은 종교적인 것뿐만 아니라 민족, 성공, 자본주의, 국가주의라 할지라도 심지어 냉소주의자라 할지라도 냉소주의 자체가 궁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세속적인 관심도 유사종교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그에게 궁극적인 것은 자신에게 신인 셈이며, 그에 의해 붙잡힌 상태에 있다는 것이 신앙을 지닌 것이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존재의 의미와 궁극성의 문제를 틸리히가 연결시키는 것은 인간의 실존을 왜곡하는 두 현실에 대한 통찰과 이에 대한 경고에 기인한다. 그 첫째는 악마화의 위협이다. 이는 기성종교가 특별한 상징들, 신조들, 관념들을 절대화한 나머지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는 우상화의 잘못이다. 여기에는 유신론이 지닌 위험성인 존재의 근거이자 존재의 힘으로서의 신을 대상화하고 어느 종교 용어로 절대화하는 것도 포함한다. 둘째는 정치적 이념(자본주의, 사회주의) 혹은 성공이나 소비주의에서 보듯이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사로잡는 유사종교들의 우상화의 위협이다. 이것들은 유신론적 종교들처럼 추종자의 충성과 숭배를 요구하고 있고, 결국은 철저한 세속화와 허무성을 내포하고 있다.


유한한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곡해하는 악마화와 우상숭배는 그 결과가 하나의 유한이 다른 유한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절대화를 통해 타자를 정복하는 충동과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결국은 파멸로 빠지게 한다. 교리를 절대화 하든 국가나 민족을 절대화하든 그 결과는 타율적이게 되거나 궁극성 혹은 무제약적 차원을 잃은 세속적 공허감속으로 전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의미의 근거인 무제약적 근원과의 관계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에 관하여 또는 무엇을 위하여 우리의 삶 또는 내적 생명을 바칠 것인가 하는 질문은 참된 궁극적 관심에 대한 의식적인 자각을 통해 대답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성숙은 도치된 유한한 관심들에 대한 계속적인 저항과 궁극적이고 무제약적인 근거에 대한 자각과 그 실현에서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궁극적 관심을 갖지 않고 ‘재미 보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틸리히는 궁극적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살 보람과 의미를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소유는 얼마 못가고 모른 채 눈감아도 궁극적 관심은 다시 찾아와 전 존재를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터전위에서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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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존의 유한성과 존재의 근거로부터의 소외와 분리로부터 우리는 불안을 경험한다. 틸리히는 현대인이 경험하고 있는 세 가지 실존적 불안으로서 운명과 죽음의 불안, 공허함과 의미의 상실에 대한 불안, 그리고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을 이야기 한다. 이 세 가지 실존적 불안은 우리의 안전한 기반을 흔드는 존재론적 특성을 지닌 실존적인 불안으로서 정신의학으로도 치유할 수 없으며 반드시 존재의 용기 속으로 끌어들여야 치유된다. 이는 기성종교가 신조의 안전이나 신집단주의속에 참여로도 해소될 수 없는 근본적인 불안이다. 


죽음, 무의미 그리고 정죄의 불안에 대한 존재의 용기는 자기 자신의 힘이나 자기 세계의 힘보다 더 강한 ‘존재의 힘’ 속에 뿌리박아야 가능하다. 의미에 대한 절망 속에서도 존재의 힘을 받아들임으로 절망 속에서도 자기 긍정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비존재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에도 불구하고’ 무제약적 궁극성의 경험을 노출시킨다. 틸리히는 말한다. “인간이 자신의 불안을 떠맡는 용기를 유지하고 있는 한 그러한 원천은 그의 내부에서 작용한다. 존재의 힘은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우리 속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용기의 모든 행위-그 행위의 내용이 의심스럽다 하여도- 는 존재의 기반이 드러나는 표현이다.”(존재에로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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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비존재의 위협을 자신 속에 받아들이는 모험을 통해 자기 자신이나 세계 자체가 아닌 존재 자체의 힘 속에 참여한다면 그 자아는 자신을 돌려받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존재의 힘은 개별적인 자아들의 힘을 통하여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이고 무제약적인 근거가 바로 대상화된 유신론적 관념을 넘어서는 진정한 신이며, 거기에 존재의 용기를 위한 궁극적 원천이 있게 된다. 이 존재에로의 용기에 대한 한 예는 사랑의 실존이다. 이는 분리된 것을 결합하며 자신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용납되어짐과 무제약적 차원이라는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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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16 06:53 2008/09/16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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