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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평화 :: 2010/09/29 12:58
사도바울이 회심하게 된 배경은 그가 속한 유대경건주의의 흐름을 간직하고서 스데반의 죽음의 충격(돌로 맞아 죽어가면서 평화로운 그의 얼굴과 확신)과 다마스카스 길에서의 ‘바닥(bottom)'으로의 낙마의 경험에서 비닐이 눈에서 떨어지면서이다. 회심의 내용은 비닐같은 것이 눈에서 떨어졌다는 상징에서 표현되는 데 그것은 뚜렷하게 드러난 평화의 주라고 고백되어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사로잡힌 자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소명을 갖게되고 이는 거룩에 이르는 새로운 길에 대한 깊은 확신으로서 화해와 평화의 길을 제시한다. 이것이 그의 회심의 궁극적 터전인 것이다.
그의 회심이 얼마나 독특한가하는 점은 유대문학에서는 오직 한번(다니엘5:2)만 나오는 평화의 하나님이 -주로 '만군의 하나님'이 대세였다-이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을 통해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를 통용시킨다. 바울에게 있어서 평화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형태를 묘사하는 현실성(actuality)이자 힘(power)인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아야 하는 점은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소개는 단순히 그의 내적인 회심의 결과에 의한 주관적인 확신에서 출발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예수 공동체에서 보여준 그의 제자들과 추종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보여준 거룩한 친교식사와 그 친교의 정점인 “평화의 키스”의식의 목도와 그들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삶의 모습에 의한 충격과 공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즉 사도바울의 '평화의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란 고백은 개인의 확신에 의한 창작물이 아니라 부활후 초대교회의 실제 생활모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서신의 머리말과 결어 부분에서 “은혜/자비와 평화”의 문안과 기원에서 보여지는 증거들이 이를 확신시킨다 (예; 롬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빌 1:2, 살전 1:1 살후 1:2, 몬 1:3, 엡1:2, 골1:2, 딤전 1:2, 딤후 1:2, 벧전1:2, 벧후 1:2, 요2 1:3 유다서1:2 롬 15:33, 고후 13:11, 갈6:16, 살전 5:23, 살후 3:16, 엡6:23, 벧전5:14 등).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계시된 하나님이 은혜와 평화의 기원과 근원이 되며 평화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특별한 인식을 갖고 있다.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고 완성하며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의 직책이라는 의식을 가진 바울은 그의 편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증오가 극복되는 재창조(“새로운 피조물"; new creation)를 주장할 수 있었고, 그런 재창조는 신의 선제적 활동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해의 삶을 살아가도록 회복과 순종이 그 안에서 자라나는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제안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란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일치시켜 화해와 평화에로의 능력을 보여주는 자였고 그것이 그에게는 "새로움" 혹은 "좋은 소식/복음"의 진실성의 핵이 된다. 이로써 기독자의 삶은 화해/평화의 중심성, 평화의 주이신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로서 평화, 그리고 통치자와 권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탈지배적인 적극적 비폭력 수행이 그의 사상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예로서,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서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곧 의, 평화, 기쁨이며 이것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로마의 평화에 길들여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평화에 전렴하라는 권고가 예증이 된다. 이런 근본인식이 있었기에 바로 초대 공동체가 신, 세상, 인간 그리고 신앙 공동체에 대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거룩한 길로서 평화와 화해의 제자직 수행을 제시한 '새로운 길'(복된 소식)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 평화의 하나님과 화해와 평화로의 제자직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길은 하나님과 평화를 유지하며 사는 삶이며 평화가 우리를 하나님깨 나아가는 길을 연다(예; 롬 5:1-11). 따라서 제의의식이 아니라 화해가 하나님에게로의 길을 연다는 것은 예수와 더불어 사도바울의 공통된 그러면서도 당시와 현재에도 파격적인 선언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바로 화해의 사역이며(갈3:15-18) 십자가의 길은 바로 부정의 세력을 거세시키는 부정의 부정으로서 '화해의 사역'의 길이며 그를 통해 죄인과 원수된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었고, 자유함의 능력을 받는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러한 능력을 주신다(롬 8:6-“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 갈5:22). 즉 하나님과의 평화(롬5:1)는 하나님의 영을 통한 평화와 맥을 같이한다(롬8:6). 평화의 하나님, 화목케 하시는 주에 대한 근본 이해와 이에 대한 존재론적인 통찰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한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부르신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2:18) 이는 고전7:15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다른 예; 고전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은 “의와 평화와 기쁨”(롬14:17)의 삶을 가능하게 하고 평화는 또한 성령의 9가지 열매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따라서 평화는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능력(뒤나미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렇게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의 사역은 부활을 통해 더욱 확실히 드러났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리셨다” 예수의 부활이 바로 사도바울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징표이기 보다는 평화의 길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결의를 보여 준 사건으로 인식된다: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화의 하나님이...”(히13,20). 죽은 자로부터 처음난 자이신 예수를 통해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요소들은 재구성되고 또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즉 화해와 평화의 길은 궁극적이다.
부활은 어둠과 혼돈의 지배질서가 아닌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의 현실성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신적 신분에 대한 확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으로서 샬롬의 지배의 궁극성이 확증된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재정립된다. 원래의 창조의도-"보시기에 좋았더라"-가 갱신되고 존재적 질서의 회복과 더불어 평화 능력이 덧붙여져서 회복이 이루어진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 난 자라는 신앙의 인식은 평화의 능력에 대한 근본통찰과 연계되며 이는 생명을 주시는 능력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따라서 사도바울에 있어서 부활은 그 초점이 예수의 육체적 소생이 아니라 평화능력의 회복과 그 확증이며 이것이 그가 말한 육과 다른 썩지 않는 '몸'이란 표현의 중심의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오로지 부활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평화의 사역자, 평화의 사신이 될 수 있다. 그러한 평화의 능력은 사도 바울이 표현한 ‘육신’ ‘죄’ ‘죽음’이라는 혼돈(chaos)의 권세에 대한 궁극적 승리이자 탈지배, 탈분열, 탈폭력의 새로운 질서(cosmos)로서 새 피조물로 이끄신다.
이러한 확증의 배경은 바로 예수께서 평화의 본을 보여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평화의 사역자이시다(엡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이 확신은 그러한 평화에로의 길에 대한 제자들의 “뒤따름”이라는 헌신을 요구한다. 그것이 또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빌4,9) 이에 대한 또다른 예증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은 화평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몸으로서 교회의 존재 목적은 이렇게 평화에로 부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뒤따름의 권고는 근본적인 신학적 확신에서 이루어진다. 첫째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자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의 길을 여셨다는 것이다. (롬5:1-11;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고...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10-11절)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것이다(롬12:18) 이는 더욱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12:17);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21) 이러한 철저한 윤리적 비전은 오직 평화가 하나님, 주, 성령의 본질과 하시는 일의 공통된 핵심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 자연스러운 발로이기도 하다.
2.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평화에로의 궁극 비전
예수께서 평화에 대한 영적인 불길을 지피고, 사도바울이 이에 장작을 더 넣어 화해와 평화에 대한 현실성을 신학적인 통로를 통해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였다면 바울후기의 제자들인 골로새와 에베소 저작자들의 신념은 이에 대한 우주적 지평을 확대하였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에서는 예수와 바울이 준 영적 통찰이 얼마나 놀랍게 우주적 하모니로 승화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4-18)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1:19-20)
에베소서와 골로새는 평화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다. 평화는 단순히 제자들, 예수의 추종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의 권능은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는”(에베소) 데로 나아가며, 또한 그 ‘세상’은 만물이라는 우주공간에로까지 확대되어진다(골로새). 하나님의 화목 사역의 비전은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통하여 평화를 이루는 행동인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분리와 적대가 의미를 잃는 평화의 새로운 현실성과 그 충만성이 표현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뜻하시는 평화의 우주론적 보편성이요 창세기에서 보여준 만물을 가라사대 사건으로 불러서 안식일을 창조의 으뜸으로 정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하신 원창조의 갱생과 회복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서 하나님의 재창조의 행동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것이 창조주의 화목활동을 통하여 이룩된 평화의 중재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와 부활로 이루어지는 새창조는 원창조를 강화하면서 단순히 ‘존재하라’라는 자연생명이 아니라 평화와 화목에 기반한 만물간의 친교(코이노이아)에서 절정에 달한다. 더 이상 지배, 분리, 증오가 없는 평화가 바탕이 된 사회, 평화가 전달되고 평화를 보존하는 사회 그리고 평화로 충만한 우주만물의 친교에 대한 비전이 여기서 보여진다. 이들 에베소 교회와 골로새 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비전과 현실을 형상화하는 미션을 받고 있다. 평화의 충만성을 향한 우주적 인간 공동체로서 광의의 교회(에클레시아- 이는 원래 건물의 개념이 아니라 ‘모임(gathering)'을 뜻한다)안에서 만물이 그 구성원이 되고 여기서 대립과 증오가 없는 친교와 일치 그리고 지속적인 화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하시는 자의 충만”(엡1:22-23)이며 하나이신 그리스도의 몸의 성장에 대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새로운 통일체이자 그 충만성은 평화의 확장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3. 평화사역의 저항성: 통치자와 하늘의 권세와의 투쟁
이렇게 샬롬의 우주적인 인간공동체에 대한 방향설정은 평화의 역량과 능동적인 비폭력 투쟁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정확하게 평화의 도구로써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에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평화의 복음” 선포가 준비되는 것이다.(엡6:15) 그러므로 이들은 평화의 하나님과 평화이 주에 대한 비전에 있어서 신의 개입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만큼 순진하지 않다. 오히려 예수에 대해 그들이 행한 것에 대한 교훈은 죄, 육체, 죽음의 권세의 집요함과 그 규모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워 준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이 탈지배적인 사회체제의 해독제(십자가)로서 그리고 능력(부활)으로서 작동한다면 싸움의 목표는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꼭두각시로서의 “혈과 육”(엡 6;12)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어둠과 허공의 통치자들과 권세들(principalities and powers)와의 강력한 대응을 요청한다. 이는 모든 권세의 굴레로부터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해방을 향한 바울의 열망(롬8:18-25)과도 일치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러한 저항의 의지와 용기 그리고 지혜를 시작하게 하고 역동적인 힘을 선사한다.
예수와 바울에서 기인한 평화에로의 제자직은 이 세상 지배체제를 움직이는 주범인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thrones, powers, principalities, authorities)에 대한 식별과 변혁에 대해 매우 날카로운 후각을 지니고 있다. 먼저 골로새서 2:13-15절의 평행댓구법의 병행구조를 분석해보자. 여기서 ㄱ 과 ㄷ은 분사형으로 ㄴ을 꾸며주며 ㄴ은 핵심어로서 행동어(동사)이자 선언적 형태를 보여준다. .
ㄱ.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ㄴ.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셨다
ㄷ.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ㄱ.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ㄴ. 제하여 버리셨다
ㄷ.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ㄱ.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ㄴ.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셨다
ㄷ.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본문이 보여주듯이 이 세상권력과 허공의 권세는 패배하였고 공개적으로 드러나진다. 제국과 이 제국을 뒷받침하던 혼돈의 하늘 권세는 무력화되고 그리스도가 승리자로 그들을 이기신다. 따라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외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주시오 승리자이다.” (고전 15:24-38; 데후2:3-11)
에베소서 6:12이하는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제 “평화의 복음”은 단순히 말과 선언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갑옷”이라는 평화로의 전략(strategy)과 도구(tools)를 갖춘다. 현실의 엄격성과 악의 권세의 활동에 대해 단순히 비둘기의 온유함만이 아니라 뱀의 (능동적인) 지혜라는 예수의 요청에 대해 평화의 제자직은 이를 위한 훈련을 요청받는다. 화해직은 이 세상 권세의 증오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전신갑주, 이세상과 같은 종류의 힘과 그들과 같은 종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싸울 대상은 겉으로 보이는 꼭두각시나 앞잡이라는 2차 대상이 아니라 정확히 증오, 분열 그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허공의 지배세력과 권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 화해중재자의 목표는 악의 근원을 응시한다. 악의 현상을 꿰뚤고 그 뒤에서 조종하는 근본적인 세상의 가치관과 그것들의 영적 권세들에 맞대응하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진정한 만물의 주되신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모든 공간과 시간위에 세우게 된다. 단순히 기도와 예배하는 시간과 교회라는 공간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만물을 꿰뚫고 만물위에 서야 한다. 모든 적들이 하나님의 발아래 놓여져야 한다. 그러나 그 수단은 상대가 가진 같은 종류의 힘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성에 근거를 둔 비폭력적인 강력한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의 내면성만이 아니라 공적인 체제와 구조, 법과 정치형태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들 속에서 권세의 영적 형상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발아래 복속시키는 변혁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은 군사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인 것이다.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싸움이고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기이다. 이것은 중세의 십자군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구원, 의, 진리, 평화, 성령은 비무장적지만 강력한 비폭력적인 훈련의 무기이다. 이런 전신갑주가 제대로 내 몸에 맞을 때 악에 대항하여 서는 것이 가능해 진다.
하나님과의 평화와 이웃과의 평화가 유지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영적인 투쟁과 맞섬은 기독교생활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 저항은 결코 폭력, 군사적 힘, 혹은 지배를 사용하지 않는다. 진리는 오직 진리에 의해 그리고 평화는 오직 평화에 의해서만 건설된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여 서라고 요청을 받고 있다. ‘평화의 복음’은 이렇게 사탄을 발로 누르는 평화를 성령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부여받게 된다. 평화를 위해 사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화를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평화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자직에 대한 축복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란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된다.
(기독교와 평화운동 수업 자료/2010.9.28)
사도 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 2010/09/29 10:17
사도바울의 평화에 관한 구절들
□ 화목/화해의 제자직으로서 기독자의 삶
롬 5:1-11:
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우리가, 환난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는 품격을 낳고, 품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때를 맞추어서,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이미 죽으셨습니다.
7 의로운 사람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도 그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롬 12:17-18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 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러함으로 네가 숲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엡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ㅇ르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ㅇ르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7:15
...하나님은 화평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골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살전5:13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갈 6:14-15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골 1:19-23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엡 2:14-18
14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5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6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18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평화의 하나님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후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고후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고전 14: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세상 주권과 권세들에 대한 평화의 승리자로서 그리스도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골 1:17-20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엡 6:12-17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평화의 하나님, 평화의 주 그리고 평화의 삶으로서 기독자의 삶의 통전성
평화의 하나님 우리의 평화로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평화
롬15:33; 16:20 엡 2:14 빌 4:7
고전 14:33; 고후 13;11 그리스도의 평화: 골3:15 하나님으로부터 평화
살전 5:23, 빌 4:9 딤전 1:2; 2요 3장
히 13:20
윤리적 권고: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롭자 우리 서로 평화롭자 모두와 평화롭게 살라
롬 5:1살전 5:13; 롬 14:19 롬 12:18; 헤12:14
고후 13:11,
평화로 결속하라
엡 4:3
평화를 추구하라
딤후1:22; 벧전3:11
히12:14, 롬14:19
** 적의 사랑은 사랑과 평화를 통합시킨다.
폭력과 지배체제의 이해-월터 윙크 :: 2010/09/16 08:21
(아래 글은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발췌한 것으로
기독교와 평화운동 수업자료로 사용된 것이다)
폭력과 지배체제의 이해
지배체제의 신화
폭력은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ethos)이며 현대 세계의 영성이다. 폭력은 종교의 위치까지 차지하여, 그 추종자들에게는 죽기까지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추종자들은 그들이 폭력에 헌신하는 정도가 종교적 경건성의 일종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폭력은 결코 신화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기에, 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신화로서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은 단순히 사물의 속성인 것처럼 보인다. 폭력은 확실히 효과가 있다. 갈등을 해결하는 데 마지막 수단, 때로는 처음 수단으로서 폭력은 불가피한 것으로 등장한다. 좌파에 속한 사람이나 우파에 속한 사람, 혹은 종교적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 모두가 똑같이 신속하게도 폭력을 애용한다. 폭력의 위협만이 침략자들을 저지할 수 있다고 믿어왔고, 지난 45년 간 테러의 균형을 통하여 폭력의 위협이 우리를 방비해왔다. 우리는 폭탄이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배웠다.
[우리의] 진짜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이름의 종교다. 우리의 대중문화, 시민 종교, 국가주의, 그리고 대외 정책 등을 뒷받침하고 있는 구원하는 폭력(Redemptive Violence)이라는 신화가, 바빌론이 지배하기보다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인간 존재를 특징짓는 지배체제의 뿌리에 고대의 뱀처럼 되리를 틀고 있다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
리꾀르(Ricoeur)는 평하기를, 이런 종류의 신화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것은, 창조의 드라마를 통하여 신이 박멸했던, 그리고 계속 박멸해 나갈 권세를 원수 대적으로 지목하는 것에 근거한 전쟁신학이다. 거룩한 전쟁, 즉 성전(聖戰)에 대하여 조리 있게 설명하려는 모든 신학은 결국 이런 기본적인 신화의 형태로 되돌아간다. 왕과 적대자의 관계는 무엇보다 뚜렷이 정치적인 관계를 회상시킨다. 이런 신학에 따르면, 적대자는 악한 자요, 전쟁은 그에 대한 처벌이다. 악은 선한 창조의 세계 속으로 침입한 것이요, 전쟁은 타락한 결과로 등장한 것이라는 성경의 주장과는 달리, 이런 신화는 전쟁이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본다.
이런 고대 신화의 구조는 바빌론 창조 설화, 전투신화(combat myth), 열광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 등등 여러 가지로 불려졌다. 이런 신화의 특징은 폭력의 수단을 써서 혼돈을 이겨내는 질서의 승리다. 이런 신화는 가진 자의 최초의 종교요, "힘있는 자는 항상 옳다"(Might makes Right!)는 생각을 처음으로 명확히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곧 지배체제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다. 즉 신들은 정복자들을 편들어 준다. 거꾸로, 누구든 정복하는 자는 신들의 편애를 차지한다. 일반 대중들이란 왕, 귀족들, 제사장들에게 신이 내린 권세와 특권을 유지해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종교는 권세와 특권을 합법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존재한다. 삶이란 곧 투쟁이다. 이런 신화에 의하면, 어떤 질서도 혼란보다는 낫다. 우리들의 세계란 완전하지도 않고, 또 완전하게 될 수도 없으며 힘센 자가 상금을 차지하는 영원한 투쟁의 무대다. 이런 고대 역사적인 종교의 중심에는 전쟁을 통한 평화, 힘을 통한 안보가 확신으로 도사리고 있다.
현대 대중 문화에서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
전투 신화의 구조는 매주일 텔레비전 속에서 거듭 거듭 어김없이 반복된다. 즉 혼돈을 상징하는 강력한 힘이 공격해오고, 주인공은 방어적 전투에 나서고, 그러나 틀림없이 무참한 패배를 당하고, 악의 힘은 승리의 욕망달성에 만족하지만, 주인공은 무력화되어 도망을 치고, 그러나 힘을 되찾은 후 다시 나타나 마지막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혼돈을 물리치고 질서를 되찾는다. 이런 오락성에 대하여 월리스 엘리오트 (Willis Elliot)는 "우주탄생설(cosmogony)은 자아탄생설(egogony)이다. 당신은 모든 일들이 어떻게 탄생하였는가를 보고 이해함으로써 당신 자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탄생설을 통제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들의 자손들도 통제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구조는 변경될 수 없다... 수시로 돌출되어 솟아오르는 혼돈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이런 신화적 형태는 언제나 동일하게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며, 수많은 모양으로 변형되어 나타날지라도 그 근본구조는 결코 변할 수 없다.
슈퍼맨(Superman)도 사람들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재평가하도록 도전하지 않으며, 혹은 사람들을 변화의 고뇌 속으로 노출시키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주어진 환경을 교묘히 조작할 뿐이다. 악당들은 외부의 캄캄한 세계속으로 내몰리기는 해도, 악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구원되거나 혹은 참된 인간됨으로 회복되지도 않는다.
로버트 쥬에트(Robert Jewett)가 지적했듯이, 이런 자경단 정신(Vigilantism)이란 민주주의 기관에 대한 불신, 민주주의의 희망에 기본적인 시민 책임과 인간의 지성에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배신이다. 그것은 일반대중들이 수동적이고 현명하지 못하며, 악을 분간하지 못하고, 합리적인 대응을 할 수 없는 존재들로 본다. 공공적인 수단이란 마땅한 것이 못되기에, 결국, 메시아, 그것도 무장한 구원자, 민주기관의 법적 구속을 넘어서는 개성과 확신의 능력을 가진 자, 그래서 악당이란 인물로 쉽사리 표현된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메시아를 필요로 한다는 메시지가 된다.
-이들 자경단원들은 무법을 권장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는 법을 자신들의 손에 쥐고 우리를 구원한다. 즉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그리고는 마을을 떠남으로써 우리들의 죄의식을 없애준다.
-우리들의 폭력적인 구원자에 의하여 무죄한 사람이 죽임을 당할 가능성을 제거하려고 악당이 먼저 총을 뽑게 하거나 혹은 매복하여 사격을 가하게 한다.
-사회의 추악한 면모를 정화하기 위해서 그런 악질적인 자들은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 관중들은 타인의 죽음에 슬픔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한다. 그런 악당들은 민주적 절차로 다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초적으로 티아맛(Tiamat)의 초월적 능력을 지닌 자들이라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방식을 떠받들기보다는 대중문화의 강력한 초 영웅의 방식을 택하는 것은, 보다 단순한 해결책을 그리워하는 향수를 반영하는 것이다. 문명사회의 지루한 절차에 대해 참지 못하는 조금성과 폭력적인 해결방식을 선호하는 열성이 그 신념을 대표한다.
-스파이공포영화의 예처럼 자기의 나라를 우한 봉사의 이유로 스파이는 살인, 유혹, 거짓말, 도둑질, 불법잠입, 법원의 허가없는 전화도청, 다른 말로 기독교 문명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가된다.
-어린이들이 일단 지배자들 사회의 기대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지면 그들은 모든 악이 자신들 밖에 있다고 믿는 욕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남들을 희생양(scapegoat)으로 (빨갱이들, 미국놈들, 동성애자들, 비동성애자들, 깜둥이들, 힌둥이들 등등) 삼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감의 사회적 기준을 고수하고 자기네 그룹의 집단적 정체성에 계속하여 의존한다.
-기독교의 주일학교들이 점차로 축소되어 가는 시대에서는, 구원의 폭력이라는 신화가 종교의 역사에서 그 어는 것보다도 철저하고 효과적인 종교적 길들이기의 방법으로서 어린이들을 자발적으로 묵인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되었다.
구원하는 폭력과 국가안보체제
모든 시대에서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는 폭력을 통하여 힘있는 자들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을 떠받쳐주기 위하여 일종의 종교로서 거듭 나타난다. ...이렇게 하늘과 땅의 권세들이 상응하는 것을 평가하는 고대의 방식은 신들이 단지 각 국가들의 권력서열을 조정하는 모습으로 우주적 의인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신화란 지상의 억압적 기관을 위하여 걸구한 합법성을 제공하는, 실제의 권력관계를 신비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신들은 인간 국가의 권력을 가공적인 마스크로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신들은 그 권력의 실제적 영성이라고 지적했다. ... 그것이 천명하는 바는, 왕이 마르둑을 대신하여 혼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이룩하도록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국가는 우주의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고, 따라서 정항이나 반항은 하늘에 대한 범죄다.
우리가 앞에서 본 대로,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에서는 한 나라의 생존과 복지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최고의 선으로 격상된다. 즉 나라 앞에서는 다른 신들은 없다. 이 신화는 국가의 중심에서 애국적 종교를 성립시킬뿐만 아니라, 또한 국가의 제국주의적 명령에 대해 신성한 재가(sanction)를 내리는 것이다. 죠오지 코르드(George Khodr)가 지적한 대로, 모든 전쟁은 형이상학적이다. 즉 사람은 종교적으로 전쟁터에 나간다. 따라서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는 군사주의의 영성이다. 즉 극소수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신의 권한으로 명령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명을 희생하게 한다. 국가의 통치에 저항하는 악한 적대자들의 세계를 청소하기 위하여, 신의 법령으로 폭력을 사용한다. 그런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은 부와 번영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리고 선택된 나라와 그 통치계급의 지배권을 특별히 축복하고 편들어 주기 위하여 하느님의 이름을-기독교의 하느님을 포함하여, 어느 신의 이름이든-불러내는 것이다.
...모든 권세들은 외형상의 기구적 형태는 물론 내부적 영성을 갖고 있다. 국가안보체제의 영성이란 국가안보체제라는 이데올로기다. ..."국가의 생존은 절대적 목표다. 국가의 정책은 국가의 생존 계획을 위하여 전 국가를 통합시키며, 각 개인의 삶에서 그것이 무조건적 목표가 되도록 만든다."
"국가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국가에 바칠 최고의 충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어떤 이론, 어떤 교리, 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감정, 열정, 이상, 가치 등등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음을 말한다. 국가주의란 그 자체로 절대적인 단 하나(Absolute One)이외의 것이 될 수 없고, 국가가 존속하는 한, 그 목적은 또한 절대적 목표(Absolute End)일 수밖에 없다. 국가주의가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다른 목적의 단순한 도구가 되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으며,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이처럼, 구원의 폭력이라는 신화는 부유한 엘리트의 권력과 협소하게 정의된 국가의 목표를 높이기 위하여, 기독교의 상징들, 전통이나 습관들을 사용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경제적 조정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종교라는 껍질을 이용할 뿐이며, 그 껍질 속에는 국가안보체제라는 불경스러운 교리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예언적인 생동감이 텅 비어버린 탓으로, 이들의 외형적인 모습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특권층들을 보존하려고 권력체제를 조작한다.
하느님이 통치하는 미래
협력사회와 지배사회의 구별, 하느님의 통치와 지배체제의 구별, 예수의 이야기와 구원의 폭력이라는 신화 사이의 구별은,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날카로운 대조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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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형태 |
지배 체제 |
하느님의 탈지배적 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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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gender)의 차이 |
가부장적: 서로 다르다는 것은 우월/열등을 의미함 |
성의 평등: 서로 다르다는 것은 전 문화에 이르게는 하지만 지위의 차이에 이르게 하지는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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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세 |
군림하는 권세: 사람의 생명을 주무르는 권세, 통제, 파괴 |
서로 나누는 권세: 베풀고 생명을 베풀고, 지원하고, 양육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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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정복, 독재정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적 |
외교, 민주정치, 권능을 부여함, 탈중심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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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
착취, 탐욕, 특권, 불평등 |
나눔, 충분함, 책임성, 평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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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남성 신-시샘, 분노, 처벌, 율법을 줌 |
여성신-포용적인 신의 형상 어머니/아버지, 사랑/심판 동정적임/매정함 자비로운/강요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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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
지위를 세움 지배를 위한 위계설정 노예, 계급주의, 인종차별주의 우리들/그들 경직됨 |
연결을 꾀함 실현을 위한 위계설정 기회의 균등 우리들/우리들 유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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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의 형태 |
폭력, 강제, 전쟁 갈등을 억제 |
비폭력적 대결, 협상, 포용 비폭력적 갈등 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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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 자세 |
착취, 통제, 경멸 |
조화, 협력, 존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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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
이것이냐/저것이냐 둘 중 하나 분석적 |
이것도/저것도 둘 다 모두 종합적/분석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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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역할 |
자기 중심적인 |
제휴 지향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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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사상 주입식 |
능력 부여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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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인 책임 |
엮자들의 출산 능력과 성적인 표현을 남성의 통제 아래에 복종 |
공동체의 가치관에 따라 개인이 성적 행동을 통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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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
현상유지, 권세를 지니고 유지함 이 세상, 이 악한 세대 미래에서 영원성 현재에서 불의 |
문화적 변혁 하느님의 통치, 오고있는 세대 현재에서 영원성 미래에 정의 |
* 중요한 것은 하느님 이미지의 실제적인 혁명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이미지가 우리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90-91쪽-
폭력의 작동방식과 그 해체 :: 2010/09/14 00:22
폭력의 작동방식과 그 해체
지배체제(domination system)는 보이지 않게 작동할 때 가장 그 효과가 크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그러한 바이자,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때 그 효과는 극에 달한다. 문제는 지배체제가 겉으로 악마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식과 당연함이라는 관행적인 실천이 이를 유지하고 확대시키며 더욱 견고하게 한다.
본래 거짓말이요 실재가 아닌 신화(myth)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에 대해 길들여져 있고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보아온 것이어서 의심없이 동조하게 된다. 이런 사회화의 과정을 통해 지배체제는 견고하게 되고 악순환을 겪게 되면서 확산된다. 다음을 우리에게 상식이 된 몇가지 신화의 예들이다.
- 폭력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데, 즉 간악한 원수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다.
- 통치와 관리는 모든 사회적 기능들 가운데서 효율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다.
- 고통은 상대방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 적절한 고통은 상대가 이쪽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수단이 된다.
- 갈등을 해결함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문제는 중요하며, 내가 옳다면 상대방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뭔가 양보한다는 것은 굴욕과 수치를 스스로 당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북관계의 긴장이나, 학교나 직장에서 동료와의 갈등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위의 몇 가지 신화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구원하는 폭력(redemptive violence)이 효과가 있다는 선입관은 너무나 우리의 일상생활과 생각에 붙어있어서 그것을 의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다음의 사례를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 지 진실로 성찰해 보기로 하자.
사례 1: 무장갈등에 있어서 사례
폴랜드의 한 지하조직의 단원이 독일침공하에서 유태인들을 몰래 지하 조직망으로 안전한 해외로 빼돌리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게슈타포 서너명이 한 대령의 인솔하에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이 닥쳤다. 그 순간 거실 책상에서 작업하던 부부는 놀라서 꼼짝 못하고 서 있었다. 책상위에는 빼돌리는 유태인 명단과 연락망 조직도가 놓여 있었고, 책상 아래 칸의 서랍에는 권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총을 여럿이서 들이밀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다.
사례 2: 파크에서 있었던 일
뉴욕의 한 도서관에서 늦은 오후 마감시간에 책들을 대출한 한 젊은 여성이 공원을 가로질러 주변에 인기척이 없는 지름길을 택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누군가 흑인 한 청년이 모자를 쓰고 멀리서 뒤따라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직 공원을 벗어날 시간은 많이 주어졌고 아무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 주위에 없었다. 내 수중에는 아무런 나를 방어할 그 어떤 무기될만한 것이 없다. 물론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는 시기도 아니었다. 그 수상한 젊은이는 점점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면서 빠르게 그 여인의 뒤에 바짝 다가가고 있다.
사례 3: 집에서 생긴 일
어느 날 새벽 빌라에서 사는 한 여인이 침대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무거운 중압감을 느껴
눈을 떴다. 거기에는 믿기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바로 누군가 한 남성이 집에 침입하여 자기 위에서 누르며 있는 것이었다.
사례 4: 전철에서 생긴 일
사람들이 그리 붐비지 않을 정도의 숫자가 별다른 소음이 없이 조용한 분위기로 한 전철이 운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정거장에서 한 남성어른과 어린 아이 세 명이 타고나서는 분위기가 매우 달라졌다. 아이들은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재잘대면서 시끄럽게 큰 소리로 떠들고 있어서 그 소음이 같은 칸에 탄 저 멀리에 앉은 사람들에게까지 신경이 거스릴 정도였다. 그런데 앉아 있는 그 남성은 주변이 그 소음으로 시끄러움을 느끼는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상태였다. 전혀 통제를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어서 마치 주변의 눈초리에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이들의 심한 장난과 시끄러운 소리로 인해 참고 있던 한 중년 여인이 좀 거리가 떨어져 놀고 있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보호자로 보이는 남성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하였다. (..중략...) 그러자 모두의 분위기는 바뀌고 주변의 사람들은 그 남성와 아이들을 용납하기 시작했다
( 이 중략에서 무엇이 도대체 일어났길래 분위기가 180도 달라지게 되었을까?)
질문:
1. 위의 4가지 사례는 장소, 시기, 대상이 각각 달라도 뭔가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모두가 대결구조였고 상대는 더 힘이 많거나 더 많은 숫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들은 희생자가 될 뻔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 모든 사례는 실제 사례임).
2. 위 사례들을 공통적으로 꿰뚫는 것은 힘의 작동 방식에 관한 것이다. 어떤 힘의 작동방식이 각각의 사례에서 그들을 궁지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마태 제자직의 근본 수행으로서 평화 :: 2010/09/07 15:08
마태 제자직의 근본수행으로서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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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감신대 "기독교와 평화운동"에 대한 수업에서 진행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일부 소개이다)
마태복음에 있어 평화의 문제는 강의실에서 설명했듯이 그리 호락호락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적인"(revolutionary- Yoder의 말) 실천이 내포되어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여러 면에서 발견될 수 있지만 두가지만 그 예로 들어보자.
1. '하나님의 아들"의 사용이 어디에, 어떤 상황에 적용되는지를 눈여겨 보라.
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Blessed are the peacemakers)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44-45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으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5:9절은 다른 7가지 축복이 천국의 상황과 선물에 대한 것이지만 이것은 신분(identity)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약속에 대한 것이지만 5:44-45은 그 약속의 실천(praxis)에 있어서 동일한 신분의 행위(behaviors)와 연결된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이자, 이를 더욱 구체화하자면 "적 사랑, 박해자를 위한 기도"로 표출된다.
이것은 예수 당시 로마의 평화(Pax Romana)에 있어서 황제들에게 붙여준 칭호로서 "하나님 아들"에 대한 전복적인 (subvertive)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를 따르는 마태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고백하는 거룩에 이르는 길과 샬롬의 통치의 도래에 있어서 자신들이 누구가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정체성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단순히 신분귀속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가 어떠함나타내주는 열쇠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를 통해 그 아버지가 어떠한 분인가를 보여준다. 이는 곧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극명하게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곧 "펴화의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아들들은 그들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자기 삶으로 보여준다.
이는 개념과 지성화의 문제, 교리의 정통성-옳은 믿음-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린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였고 예수는 그들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했을 때 바로 '거룩의 울타리를 전체 백성에게 둘러 치는" 제의적 공동체의 지향성을 넘어서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 (소금/빛, 예물을 드리기전에 화해하라, 듣고 실천하는 자로서 반석위에 세운 집의 비유, 아버지의 뜻의 지상에서의 실현과 용서의 중요성 등)로서 비폭력적인 평화실천을 강조한 이유이다.
2. 임마누엘의 하나님에 대한 산상수훈의 공간배치는 평화의 수행이 마태 공동체의 근본이었음을 보여준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평화의 근본적인 통찰이자 변혁의 근본적인 힘이다.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제국적이고 군사적인 통치자로서 '다윗의 아들'의 적의 징벌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를 마태는 비폭력적이고 자비로운 '다윗의 아들"로서 변형시킨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왕들이 추구하는 "권력, 기적, 물질적 안정"에 대한 유혹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왕-이거든"에 대한 물리침이었고, 목자의 이미지를 통해 군사적인 영향력을 제거한 마태의 예수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더욱 결정적인 것은 첨부한 파일에서 보듯이 성막 곧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심의 표증에 대한 확인에 있어서 산상수훈의 배치구조에 대한 것이다. 마태의 산상수훈 5장-7장의 구조는 병렬댓구법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그 의미를 강화하고 이는 그 중심에 서 있는 주기도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성막뜰->성소->지성소->언약궤->지성소->성소->성막뜰의 과정속에서 산상수훈을 대입하여 보면 확연히 무엇이 "거룩한 분을 만나는 길"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성소부분인 5:21-48 및 병렬댓귀절인 6:19-7:11이 화해와 단순히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이 지상재물로서의 화해 실천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라"-이라는 사회적 실천이 성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성소에 해당하는 산상수훈인 6:1-6 그리고 병렬댓귀절 6:16-18이 "은밀한 실천"으로서 구제, 기도, 금식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은밀한 이 지상에서의 실천의 핵심속에 언약궤의 부분인 "주기도"가 존재한다. 하나님의 법궤로서 거룩하고 자비로운 그분의 현존을 알리는 이 법괘로서 주기도는 "우리 아버지"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 이라는 하나님의 신분과 그의 일에 대한 것과 그리고 "죄의 용서,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보호"라는 생활실천적인 면이 결합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서 모두의 평등함과 따라서 그분의 자녀됨이라는 비상하계급적인 신분됨과 이 지상에서의 평화의 실천(뜻의 구현, 용서, 시험과 악에서의 보호)에 대한 의지가 명확하게 나타나고 이어서 용서가 법궤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신다"
여기서 보여지는 마태 공동체의 제자직에 대한 이미지는 놀랍게도 단순히 거룩한 분을 예배하는 제의적 공동체가 아니다. 일상의 갈등과 폭력에서 강력한 비폭력 평화실천을 하는 실천적인 제자직이다. 이것이 샬롬의 통치의 도래에 대한 확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개인 생활과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방식이었다.
헤롯이 만든 돌로 만든 성전의 제의의식에 기초를 둔 '거룩함에로의 길'을 넘어서 샬롬의 통치로서 삶과 그 샬롬의 실천가로서 자기 신분-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은 서로 이어져 있고 이는 생활을 통해 거룩한 분을 드러내는 길로서 표현된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은 직접적인 제의-"신께 예물을 드림"-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길은 없다. 오직 주의 제자로서 자신의 선한 행실이 남에게 보여져서 그들이 직접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간접적인" 방법만이 존재한다. 이것이 마태 공동체가 인식한 거룩한 하나님께 이르는 새로운 통찰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당시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나 목회자들 심지어는 신학자들 조차도 놓치고 있는 혁명적인 인식인 것이다.
질문:
1. 어떻게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지금까지의 가르침에 들어오면서 얼마나 편안해 하고 있었는가?
과연 그 편안한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2. 2천년전 신화적 시대에 있어 화해와 생활실천이 거룩에 가는 길이라는 유대교내의 이 철저한 개혁주의 운동아-초기에는 분리된 기독교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정말 메노나이트 성서윤리학자인 요더의 말처럼 '혁명적인" 인식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에 당신은 얼마나 충격 혹은 통찰을 받고 있는가?
3. 무엇이 이러한 마태 공동체의 예수사건에 대한 증언에 우리 눈을 멀게 만들었는가? 어떤 장애들이 있어 이를 우리가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가?
2010. 9.7.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분석표.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