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따름"에서 "우정"으로 -최완택목사님 회갑에 붙여 :: 2005/06/03 16:12
‘뒤따름’에서 ‘우정’으로 -최완택목사님 회갑에 붙여
2004년 봄
인생이란 길을 가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여러 만남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걸어가는 방향을 바꾸고 그 바꾸어진 방향이 이제는 선택이 되고 결국은 운명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만남이 자신이 계획한 인생 스케줄이 아닌 외부로부터 예기치 않게 부여된 사건의 경험이라 한다면 선택은 그 사건을 의미화 하는 자신의 결단인 셈이요, 운명은 그 사건을 맛들이고 살아가는 삶의 근본태도라 볼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북산과의 만남은 단 한번의 사건이기 보다는 매우 긴 느린 여정의 결과이고 이 느릿한 관계는 멀리도 지나치게 다가섬도 아닌 적절한 거리를 두고 성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직업군인을 그만두고 나서 우리 가족이 강원도 구철원에서 이사와 삼양동 돌산중턱 무허가 산동네 집에 둥지를 튼 것은 내 나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였다. 당시 가난으로 인한 어머니의 불평과 아버지의 심한 알코올중독증이 내게는 별다른 기쁨의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때 친구의 소개로 찾아간 신일교회에서의 학생부활동이 그나마 의미있는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교회생활후 얼마 안되어 담임자이셨던 최원택목사가 미국으로 떠나고 동생 최완택전도사가 부임하면서 내게는 북산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중·고등학교 당시의 북산은 내게 있어서 대하기가 꽤나 어려웠다고 기억된다. 그는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목회자 틀 속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칠은 들사람의 분위기가 있었고, 눈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때로는 매섭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말은 눌변쪽에 가까워서 따라잡기가 힘든 편이었며, 신에 대한 확신의 설교보다는 고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는 쪽에 더 가까웠다. 북산자신이 나중에 회고하면서 신일교회에서의 목회가 가장 열심히 한 시기에 속한다고 했는데, 북산에 대한 추억은 주로 원산도, 광릉 등에서의 여름학생 수련회, 설교에 대한 단편들 그리고 고등학교 때 따라다닌 그의 공동성서연구 참여를 통한 그에 대한 기억들이다.
지금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신에 대한 믿음의 강요나 확신을 우리에게 주려고 애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갈등과 고민의 시절에 확신이나 말씀에 대한 감격이 있어서 자신이 일찍 정리되었으면 더 나았지 않았는가 하는 당시의 갈급함도 없지 않았으나 그렇지 않았음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된다. 참 철없이 살았어도 훈계 없이 그대로 수용되었고, 수련회도 꽤나 노는 분위기였다. 몸으로 읽는 성서란 이름하의 공동성서연구는 찬송가이외의 민중가요가 불리워지고 그룹별 토론연구로 진행되어 모두 각자와 우리의 생각을 모으고 같이 결단하는 식이었다. 때로는 조잡한 생각들이었어도 제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고백을 엮어내는 이 작업은 그 때는 별 의미 없이 뒤따른 행동이었지만 나중에야 비로소 일반적인 교회관습체제에 길들여지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고 또한 독단적 교회지도자에 대한 체질적인 저항이 몸에 배게 되었다.
당시에 킥킥 웃고 떠들며 때로는 혼나며 진행된 ‘몸으로 읽는 성서’라는 공동성서 연구 스타일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의식의 깊이에서 체화된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몸으로 사는 신앙에 대한 고민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내 영혼이 개화되기 시작한 토대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난문제로 상업학교를 가서 은행생활이라는 무지랭이의 삶 속에서 진리문제로 고민하게 되면서 일상적인 안주의 삶의 과제로부터 힘든 이탈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결국은 신앙의 초점이 믿는다는 지적체계가 아닌 온 삶, 온 존재로 응답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몸이 상징하는 육체성-갈증, 땀, 피, 고뇌-없는 신앙의 길은 허상이라는 삶의 자세를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공, 편안에 대한 내 내면의 욕구가 어느 정도 재갈을 물리게 되면서부터 진리체험을 향한 정착하지 못한 주변인으로서 방황을 하게 되었다. 이미 이루어놓은 것, 익숙한 것에 대한 ‘낯설음’이란 밤의 동료가 찾아와 터전이었다고 생각한 것을 뒤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의 단편에 있어서 내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살아온 것은 ‘자유혼’의 정신이었고 그에 대한 목마름/갈증이었다. 신의 은총에 채워져서 노래를 부를 수 있지는 못했어도 목말라하는 인상은 확실히 보여주었다. 가장 남는 이야기는 그가 졸업설교 시간에 했던 문제의 설교, “자유혼”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그다음부터는 졸업설교시간이 폐지되고 말았다고 하지만 거룩의 이름으로 갖는 허위성에 대한 깊은 그의 저항과 절망은 그대로 나에게도 전염이 되어버렸다. 신에 대한 담론에 빠져서 텅빈 종교언어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던 샘키인의 ‘춤추는 신’이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로바’처럼 인간적인 것을 간직하고, 미완성과 제약성속에서 땅과 육체성을 통해 영원을 목말라하는 벌거벗은 인간형을 추구하였다. 이 벌거벗은 인간형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지경에 도달을 하지 못했지만, 목마름의 절대경험도 삶을 지탱시키는 근거이자 에너지가 될 수 있음을 그는 보여주었다. 이는 마치 모든 것을 상실한 탕자가 지침과 절망 속에서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일어서서 계속 걷게 하는 에너지가 바로 귀향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과 같았다.
자유혼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변형된 형태로 그의 설교 속에서 들려지곤 했었다. 그는 구유에 누운 아기예수의 탄생설화를 ‘먹이(음식)로 오신 예수’로 해석하면서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자유혼을 지닌 존재를 성육신(incarnation)의 과제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후에 나에게는 매우 놀라운 깨달음으로 다가왔었다. 마치 김지하가 천도교의 한 수령이 제시한 제사에 있어서 귀신을 모시는 향벽설위를 인간을 모시는 향아설위로 바꾸는 데서 새로운 문명사적 패러다임의 전조를 보았던 것처럼, 크리스마스의 중심주제와 관심의 대상이 ‘저 멀리 위의 신’에서 이 땅위에서의 자유혼과 인간화라는 인식의 변환의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북산의 자유혼에 대한 갈망은 북한산 어느 기슭에서 산길을 가다 만난 공초 오상순의 묘비의 글에 대한 언급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흐름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영혼.” 어둠과 허무의 시인 공초의 ‘흐름위에 보금자리’라는 자유혼의 이야기는 최근에는 순명(順命)에 대한 권고로 나타나고 있지만 적어도 20여 년 전에는 이는 비판적 저항의식의 발로였다. 비르질 게오르규의 풍란이야기-작은 존재로서 땅에 살수 없어 하늘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풍란- 그리고 노예 스파르타쿠스의 저항과 초저녁 어둔 하늘의 개밥바라기(샛별)이야기는 아직도 귀에 맴돌고 있다. 최완택목사는 내 학생부시절에는 사팔뜨기 혹은 옆으로 가는 게로 통했었다. 이는 기존의 종교적 권위에 대해 삐딱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심지어 산행을 할 때도 그는 무리들이 가는 길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험한 길이어도 호젓한 길을 일부러 찾았으며, 쉽게 갈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손잡이대도 의지하지 않을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유의식을 살고자 했다.
나는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생활을 할 때, 미국에서 돌아온 형 최원택목사가 그 교회로 오면서 북산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되어 수년간을 뵙지 못하고 지내게 되었던 적이 있다. 한 3년을 직장 생활하다가 폐결핵이 걸려 에덴기도원에서 요양을 하고 작심하여 이제는 없어진 사직터널 근처의 감리교신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치룰 때 성경시험감독을 하게 된 북산을 뜻밖에 만나 짧은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개월인가 지나서 내가 근무하는 곳에 나를 만나러 들리셨다. 학생부시절부터 다른 동료들보다 나는 왠지 북산을 매우 어려워하였던 터라 한편으로는 놀라기도 했지만 그에게 별로 가치있는 인물이 아닐 나를 일부러 찾아와 주었다는 데 대해 매우 감사한 경험으로 갖고 있었다. 그 인연인지는 몰라도 그 후 나는 계속적으로 용광교회, 민들레교회에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내가 북산의 인간에 대한 사팔뜨기 관점에 주목을 하는 것은 나를 찾아와준 경험에서 보듯이 소위 성공적인 사람이나 잘 나가는 목사에 대해서는 철저한 경계심과 비판을 가하면서도 내가 느끼기에는 실지로 별 영양가없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에 대한 스스럼없는 포용을 한다는 사실이다.
철부지 때부터 그는 교회담임자로 부임하면서 내 스승의 역을 했지만 나로서는 그게 쉽사리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내 수줍은 성격과 그의 독특한 옹고집 분위기는 그리 잘 어울리는 편은 못되었기에 새김질하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못난 이에 대한 친화력은 나를 그의 삶의 자장 속에 끌어넣는 인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1980년 12월 9일자로 박성용군에게 라고 써진 빛바랜 그의 첫 수상집 “아름다운 순간”을 읽어보면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즉, 그 수상집에 깊이 흐르는 일관된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반편 인생들에 대한 깊은 품음이었다. 뒤쳐진 자, 작은 자들의 삶을 통해 영원의 징조를 읽어내는 그 능력은 목마름을 통해 얻어진 개안(開眼)에 의해서라고 믿는다. 목마름이 승화되어 이야기가 터져 나오게 되었고 이 작은 이야기들로 인해 우리가 목축임을 받게 되었다. 결국은 그 이야기로 인해 더욱 목마른 자들을 많이 만들고 말았지만. 일상의 질박함속에 담긴 이슬 같은 작은 메시지에 감명을 받은 것은 목마름으로 텅 비워진 내면의 울림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10년간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2001년 겨울에 들어와서 뵙게 된 최목사님은 많이 변화된 모습이었다. 세월이 주는 인생연륜만이 아니라 눈에 힘이 들어갔던 사팔뜨기의 단호한 목소리는 부드러워지고 눈도 따사로워졌으며, 설교시간에 쉽게 보지 못했던 웃음을 이제는 간간히 보게 되었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 거의 언제나 같은 수의 교인들을 대하는 그의 변함없는 ‘내버려 두는(?)’ 목회와 더불어 수많은 자유혼의 홀씨를 사방에 날려 보내는 그의 거침없는 삶의 모습을 본다. 몸으로 산을 만나 흐름을 살고 그 흐름속에서 만남을 이야기하며, 거듭 삭혀서 전해지는 음력 24절기 메세지속에 보듯이 ‘생명과의 감응’의 세계로 저만치 훌쩍 건너신 것 같다. 두어 달 전쯤인가 민들레 주보에 에덴기도원에서 나뭇잎을 훑으며 지나는 바람 소리에 사무치는 심경으로 밤을 설쳤다는 글을 읽었다. 그 정도의 인생경륜이라면 어느 정도 정착도 했을 법한데, 아직도 이룩함과 쌓음의 힘보다 무화(無化)시키는 소리에 자신의 전존재가 떠는 ‘흐름의 生’인 것이다.
10대의 소년이었던 나는 어느 새 중년이 되었고 아직도 북산을 만나면 철부지 애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내게 대해주는 것도 많이 달라진 느낌이다. 이 글을 쓰면서 최목사의 우리 부부에 대한 주례사를 테이프로 다시 들어보았다. 결혼식때는 경황이 없어 놓친 메세지중에 그가 중학교 때 가르치고 지켜본 내가 이제는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그의 축사를 새삼 듣고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 만남이후 뒤따름과 길들임의 삶을 지나, 신학생 신분이 되고나서부터 지금까지의 긴 신학적 사색의 여로에서 최완택은 최완택이고 나는 나이어야 한다는 자기 삶의 추구에 대한 내면의 긴장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었다. 제 눈, 제 소리를 갖는 자유혼에 대한 추구가 여러 차례의 위기와 방향전환을 가져왔고 오래 지속된 내면의 긴장은 다행히도 귀국하기 직전 퀘이커의 생활관 펜들힐(Pendlehill)에서 6개월간 보내면서 무언가 꼭지가 떨어져 나간 듯한 경험을 체험하면서 그 긴장이 없어져 버렸다. 무거운 중압감이 없어진 후로 참으로 기쁘게 그를 바라 볼 수 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자신을 낮추어 같은 길을 가는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는 스승에 대해 나 또한 소중하게 이 운명적인 만남이 이제는 우정 속에서 승화될 것으로 믿는다.
지금 고백하건대 중학교 시절부터 북산을 알고 지내왔다는 것이 그동안 내게는 자랑보다는 고민과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은 철부지 어린 시절에 너무 일찍 다가와 지워준 자유혼이란 과제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스승과 제자사이였으니 이 오랜 불공평(?)한 관계로 인해 사실 가까이 있었어도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종이 아닌 벗으로 부르겠다고 하신 예수님처럼 그가 내게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존재로 나를 ‘놓아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어려서 그를 만났을 때 북산은 공동성서연구에 큰 열정을 쏟아 부었었다. 거기서 내가 성장한 셈이다. 그런데 귀국후 만났을 때, 돌연 그는 노년에 다시 공동성서연구에 불을 지피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20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공동성서연구를 자기 삶의 과제로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은 신실하신 주님의 약속이자 여기에 자신의 일생을 투신하며 살아온 인생이 함께 공유할 약속이라 나는 믿는다. 그가 다시 시작하여 얻게 될 갱생과 변화된 이야기로 인해 다시금 목마른 인생들을 일으켜내고 새로운 무리로 훨훨 춤을 추며 제 길을 가는 환상을 보게 된다.
녹색성서연구 :: 2005/06/02 17:43
녹색공동성서연구 인도: 박성용 박사
주제: "녹색에너지로 녹색교회를“일시: 2005. 5.23-25
장소: 민들레성서연구원
주최: 기독교환경연대, 기독교대한감리회환경선교위원회, 민들레성서연구원
공동연구 1 창조신앙의 재 발견과 피조물의 탄식
성서본문:
창세기 1: 1-8, 20-28
롬: 8:18-24
도움말:
1) 달라진 관점-종교의 진리검증을 위한 잣대로서 환경/생태
환경을 주로 문젯거리(‘환경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로 취급하는 기존의 환경담론들은방법론에 치중하고 있어서 오늘날 환경이란 주제가 갖고 있는 종교적 성격, 즉 현대 사회의 새로운 구원론적 성격을 간과한다. 이제 환경은 개별종교의 가르침의 적합성, 의미성을 판단하는 메타담론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곧 환경문제는 가치관이나 태도를 넘어서서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측면, 즉 인간의 종교적 관습이나 교리적 요인들이 배후에 있다(환경파괴와 착위에 대한 종교적 관습과 교리가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전례없는 전지구적 생태파괴의 심각성과 문제해결의 급박성에 대한 우리의 상황인식에 의해 촉발된다. 인간존재가 지구와 지구위의 모든 생명에 큰 위협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과 신학은 부적절한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지구의 지속적인 황폐화안에 얽혀 있는 인간적 태도들과 주장들을 변경시키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Lynn White, Robert Hunter, Sallie McFague)
2) 신학적 배경- 종교개혁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전통적인 구속신앙은 은총과 구원의 문제를 ‘역사’속에서 인간과 신과의 개별적이고, 내적인 관계로 이해함으로서 ‘창조자’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폭을 제한시켜왔고, 신의 활동영역으로서 ‘자연’과 생의 동료로서의 생태적 타자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을 약화시켜왔다. 이런 점에서 창조신앙에 대한 새로운 주목이 일어나고 있다. 창조신앙은 새로운 지구가 한번 들렸다가 떠날 숙박소가 아닌 돌보아야 할 집으로 자각시켜주며, 생태적 타자와의 관계에 의한 인간/나의 정체성을, 지구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재-정위 해준다.
3) 성서본문의 읽기 가이드-
(1) 창조이야기는 만물(인간만이 아닌)에 대한 하느님의 우주적 의도-우주적 샬롬공동체-가 있었다. 만물은 “생겨라/존재하라”는 하느님의 의지에 의해 생겨났으며 만물은 자신의 공간과 생의 목적을 신으로부터 받았고, 사물의 존재자체 대한 인정과 가치(‘보기에 좋았다’)의 근거는 창조자 하느님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목적대로가 아니라 그분의 목적대로 세계가 창조되었음을 아는 것이다.
(2) 창조는 무질서와 혼돈(chaos)로부터 질서, 조화(cosmos)로의 변화에 있으며, 단지 올바른 관계뿐만 아니라 생명의 풍성함(‘생육번성하라’)을 목적으로 한다. 생태적 삶에 있어서 혼돈과 무질서의 주제는 인간의 사회적 삶에 있어서는 불의, 착취, 폭력, 억압, 불의한 질서로 나타나며 이들은 모두 ‘빈곤한 존재상태’ 머물게 됨으로 창조신앙의 풍성한삶에 대한 창조자의 의지에 위배된다.
(3) 창조의 완성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이다. 여기에서 창조신앙과 구속신앙이 만나지게 된다. 안식을 통해 세계는 성화되고 축복된다. 안식을 통해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창조가 가진 불가침성을 인정하며 창조의 사귐 속에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기쁨을 통하여 이 날이 거룩하게 된다. 안식이 창조의 최종목표로 볼 때 자연과 몸은 도구적 실용성을 갖는 게 아니다. 안식일의 충만함과 기쁨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에 대해 참다운 관심과 배려를 하게 된다.
(4) ‘더 풍성하게 존재케 하라’는 창조자의 위탁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의도이신 ‘창조성’을 삶의 관계속에서 구현해야할 책임이 있다. 이는 자기 실현의 자율성과 자유를 통해 더 풍성케 존재(요10:10-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함)케 하라는 의미이다.
(5) 샬롬은 모든 피조물을 포용하는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성서의 비전의 본질이다. 억눌리고 박탈당한 자들이 힘과 존엄성을 얻게 되는 생명력 있는 공동체에 대한 비전은 인간만이 아니라 전체 피조물-짐승들, 풀, 별, 분자-에게까지 요청된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이 ‘멸망의 사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피조물의 고통에 주목하고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은 인간성회복의 근본토대가 되고 오늘날 기독교 생태신앙의 근거가 된다.
질문:
1. 창조이야기를 통해 피조물간의 관계, 생명질서의 원칙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2. 창조신앙이 우리의 전통적인 구속신앙에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3. 창조의 완성은 인간이 아니라 안식이다. 안식일의 사상은 성서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나타나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4. 오늘날 피조물의 탄식의 예는 무엇이며 이들 현상에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지 이야기 해보자?(우리의 일상의 삶, 공동체, 지구적 수준의 입장에서) 그리고 피조물 탄식(생태적 폭력)이 일어나는 원인들은 무엇인가?
5. 위의 질문들과 관련하여 오늘날 하느님의 목적대로 사는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이야기 해 보자 (우선적인 것 5가지)?
공동연구 2 생태적 친교와 생명평화
성서본문
이사야 11:6-9
마태 6: 25-34
도움말:
1) 달라진 관점- 생태적 약자에 대한 구호적 입장에서 동반자(eco-fellow)로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 대한 입장이 생태적 타자를 돌보는 선한 청지기로서의 인간의 우월성(무언가 나은 것이 있다)에 대한 인식으로 이해됨으로서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운동은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구호(relief)의 차원에 많이 머물고 있다. 이는 나-너의 관계에서 생태적타자를 ‘너’로 대상화함으로서 관계가 종속화되어 ‘나’인 인간은 ‘너’인 자연에게 베풀는 독백(monologue)의 관계를 형성하여, 너가 도구화됨으로서 생태적 타자인 ‘너’로부터 배우는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자연을 의미있는 동반자로 생의 신비를 공유하는 대화의 파트너로 인식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중대한 새로운 도전이 된다. 그 도전의 내용은 관계적 이미지로서의 자아관, 생물권의 다양성과 공생에 근거한 평등주의, 복합성과 탈 중심화에 대한 감각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신학적 배경- 기존의 기독교 신앙/영성은 주로 개인구원을 지향하고, 위/하늘을 향한 영성의 방향이 교권의 위계적 질서와 관료화에 이념적 수단이 되었으며, 역사와 인간들의 사회제도적 권력관계내에서 사유함으로서 우주적 신비를 등한시 하였다. 창조신앙은 근원적인 선(goodness)이 생명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들 간의 근본적 관계성에 있음을 고백하며 창조물들이 성스러움, 연관성, 경이로 충만하며, 하느님의 자기 계시가 문자(성서)와 역사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들을 통해서도 전달된다는 신념을 공유한다. 자연의 모든 존재가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로 인정되고 모든 창조물은 하느님의 현존을 비추어 주는 거울로 보는 태도를 갖는다. 그 예로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1182-1226)의 해 달 불 물 잡초 병 죽음까지 형제자매로 보는 생태적 공동체에 대한 신비체험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와 존 뮈어등의 자연의 성례전화의 입장에서, 심층생태학(Arne Naess)과 대지윤리학자(Aldo Leopold) 등의 생명평등주의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3) 성서본문의 읽기 가이드-
(1) 기독교의 적색은총(red grace)는 이제 녹색은총(green grace)와 더불어 이해되어져야 한다. 녹색은총은 자연이 생명의 풍요와 함께 영혼의 정화를 일으키는 근원적인 성지(natural sanctuary)임을 아는 것이며 자연이 개발이데올로기(성장과 발전)에 의한 물질적 부의 획득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과 숨결과 현존을 느끼게 하는 영적 안내자가 됨을 아는 것이다. 이는 구속사의 시간/영에 대한 감각과 더불어 공간/몸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요구한다.
(2) 이사야의 늑대, 표범, 사자가 새끼양, 송아지 어린아기와 어울리고 딩굴고 장난하며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다시는 없는’ 상태에 대한 비전은 생태정의가 실현되는 생명평화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3) 예수의 가르침,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 보아라...”은 생태적 타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삶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예가 된다 (욥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실존적 고통을 이해하는 열쇠는 자연의 신비에 대한 이해로부터였다). 다른 존재의 소리, 타자의 언어를 들음은 그 자체로서 구원의 문이 될 수 있다.
질문:
1. 본문이 우리/자기자신의 삶에 충격을 주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2. 우리의 삶에서 생태적 타자가 주는 삶의 지혜나 만남의 경험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3. 생명간의 친교를 방해하는 요소/원리(철학,가치관, 종교적 가르침)은 무엇이고 생명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원리는 무엇인가?
4. 생명평화에 가장 반대의 상황에 처한 ‘환경부도사태’(IMF금융위기로 인한 국가부도사태의 예처럼)의 심각성의 하나는 에너지문제이다. 생명간의 친교를 위해 녹색에너지에 대한 여러 의미를 숙고해 보고 생활에 적용할 여러 방식을 토론해보자.
공동연구 3 사회·생태적 화해와 교회의 책임
성서본문:
호세아 2:18-25
골 1:15-20
도움말:
1) 달라진 관점- 자연의 치유가 없다면 결국엔 인간의 구원도 없다.
사회생태학과 생태여성학에 따르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사회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자연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적용된 것이다. 위계질서의 사회적 성격이 더 근본적인 위상을 차지하며 그러한 위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자연의 지배라는 개념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전체를 경제(이득과 자본논리)에 복속시킴에서 사회적 폭력과 생태적 폭력이 가중되었다면 이제 화해의 과정은 경제체제(경제성장과 번영)가 사람과 자연에 봉사하는 체제로 나아감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인식의 무지와 편견은 사회적 폭력뿐만 아니라 생태적 폭력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사회관계에 대한 생태학적 혁명이 선행되지 않으면 어떤 환경운동도 환경관리주의, 환경관리윤리에 불과하다. 생태운동이 모든 측면에서의 지배의 문제를 포괄하지 않는다면 우리 시대의 생태운동의 근원적인 원인을 제거하는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생태운동이 단순히 오염통제나 환경보존을 위한 통제라는 개혁적 수준에 머문다면, 한마디로 보다 광범위한 혁명의 개념으로 다루지 않고, ‘환경주의’에 머문다면 자연적, 인간적 착취라는 기왕의 체제에 봉사하는 운동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전 지구적 환경재앙의 해결에 있어서는 공동의 수행과 세속적인 일을 통한 하느님 나라 실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요구되어진다. 또한 개인의 의지적 결단만이 아니라 사회제도의 폭력적 구조에 의한 간접적 폭력, 제도적 폭력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공동의 대응모색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방식에 있어서도 복합적인 노력들이 필요로 한다. 즉 공동체주의, 탈도시화, 산업의 탈중심화, 대안적 기술, 유기농업, 성장의 억제, 새로운 자연주의적 감수성 등의 포괄적인 다자적 노력이 수행되어야 한다.
2) 신학적 배경- 인간중심적인 그리스도론이 지닌 ‘역사’중심의 패러다임은 구원을 영혼의 축복이나 인간실존의 개별성으로 축소된 나머지, 자연은 부지불식간에 인간에 의한 엄청난 착취 아래 놓게 하였다. 자연계의 치명적인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의식이 증대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역사’라는 현대의 패러다임의 한계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고대의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그 물리적 구원론을 다시금 질문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차이점이 있다. 고대에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권세들과 많은 영들 그리고 여러 우상들과 대결시켰다. 오늘날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구원자 그리스도를 인간에 의해 혼돈속에 빠지고 독한 쓰레기로 오염되며 보편적인 죽음으로 저주받는 자연과 대결시켜서, 인간을 절망에서 구출하고, 자연을 파괴로부터 보존하려고 해야 한다. 창조과정 안에 있는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구원이 인간과 신과의 여기서 인간의 구원은 인간과 신사이의 일대일 관계에서만 완성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구체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현상적인 자연세계의 고통과 파괴를 치유해야 가능함을 제기한다. 왜나하면 우주의 창조물 자체는 하나님에게서 창조된 것이므로 그 자체로 신성한 기원을 동일하게 가지며, 그것들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성서본문의 읽기 가이드-
(1) 그린피스운동처럼 지구의 생태적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는 산업, 국가, 정치적 힘들의 넓은 범위들에 맞선 정치적인 운동은 신학적 신앙적 국면을 갖으며 그 근거는 호세아서의 “하늘의 청”과 “땅의 청”은 서로 관계되어 있고, 신으로부터의 선물, “정의,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 진실”에 대한 생명평화운동가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이들은 생태 운동을 사회운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절대적 신앙차원에서 수행하며 이 시대의 환경위기를 구원론적 과제로 상정하고 그 해결을 위해 헌신한다.
(2) 저항과 변혁에로의 생태운동의 근본은 골로새서의 선언처럼 “만물과 화해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경험을 기초로 한다. 이들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상호관련성을 확증하는 지구적 의식을 강조하며 하며, 전체지구는 우리 몸의 부분이고, 지구의 전율적인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신성이며 그러한 신성을 해치는 인간의 행위는 용납되지 못하는 범죄행위 곧 하느님의 통치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만물과 화해하신 그리스도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충성심을 종족적 국가적 종의 정체성을 넘어 확장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질문:
1. 1장 20절은 생태적 화해(“들짐승과 공주의 새와 밭의 해충이 해치지 않음”)과 사회적 화해(활, 칼 등 무기를 없앰)의 동시성을 예시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늘과 땅의 만물과의 화해’이다. 이것이 가능한 삶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성서는 말하는가?
2. 1의 삶의 조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의 삶의 모습/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우선적인 것부터 열거)?
3. 상호관계적 원리의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몸으로서의 교회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가?
4. 우주만물과의 화해하시는 그리스도라면, 이제 우리는 어디서/어떻게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가? 특히 녹색에너지의 사용이 녹색의 그리스도와의 화해사건을 어떻게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하는가?
5. “골로새서의 만물과 화해하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성만찬의 경험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선택)
Teaching Locally, Thinking Globally: A New Educational Paradigm ... :: 2005/06/02 17:30
Teaching Locally, Thinking Globally: A New Educational Paradigm for a Fractured World
Sung Yong Park
1 Challenge of DESD and a New Vision for the Future
Common global issues such as poverty and militarism, population pressure, environmental degradation, and social injustice cause us to lose our optimism about the future. The more we know our reality, the more we recognize our vulnerability. Any global citizen can see poverty and the degradation of the Earth on the daily news. A feeling of despair and disempowerment derives from the large scope and multi-dimensionality of these unprecedented problems. A sense that something has to be done in order to re-orient our destiny is emerging. This feeling of anxiety about human annihilation and degradation of the environment calls for urgent action at the local, regional and global levels.
This is why the new paradigm of sustainable development (SD) has emerged among the global intellectual community. The Brundtland Report says “Sustainable Development is development that meets the needs of the present without compromising the ability of future generations to meet their own needs.” Even though there exist some disputes about the contradictory nature of SD itself--some feminist groups prefer “sustainable subsistence,” --this new paradigm of SD is a revolutionary approach to the challenge of enhancing the quality and equity of life for the present and future generations. In Chapter 36, Agenda 21 of the Rio conference, it was stressed that to develop a sustainable lifestyle and to strengthen the capacities and responsibilities to resolve environmental and development related issues, education is required. And in 2002, to emphasize that education and learning are indispensable for approaching SD, the UN adopted UN DESD (2005-2014), and selected UNESCO as a lead agency for its implementation
The Education for Sustainable Development (ESD) concept integrates socio-cultural, economical, and environmental perspectives; and the scope of this education itself is comprehensive, covering various issues such as human rights, peace, gender equality, cultural diversity, health, governance of natural resources, poverty reduction, and enterprise responsibility. Therefore ESD requires a holistic/integrative approach to our lifestyle and a lifelong (formal and informal) education. In addition, ESD requires integral efforts through institutional solidarity among governments, NGOs, the private/corporate sector and international agencies. So one must not forget the importance of maintaining a balance and tension between holistic understanding and contextual strategies in ESD.
Some of the progressive countries such as Australia, Sweden, and Japan are actively responding to these global demands and challenges in an ESD context. However, the public sectors and civil societies in most countries of the Asia-Pacific region do not know about ESD, and at best there have been only futile efforts to introduce the values of SD into the legal systems and social practices of these countries.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make strategies of implementation and action plans to heighten public awareness of SD, and to institutionalize the values of SD into social systems and practices. Moreover, most of these problems cross national boundaries. The popular eco-activist’s slogan, “Think globally, act locally” deserves to be considered. We need to plan ESD strategies relevant to the Asia-Pacific context. This is why APCEIU held the “Asia-Pacific ESD Strategy Planning Workshop” in Seoul, November 22-24 last year.
APCEIU is mandated to work in the area of education for international understanding (EIU) and has also been active in the area of ESD. With regard to preparations for the UN DESD, APCEIU has been working in close cooperation with the UNESCO Regional Office in Bangkok especially in relation to preparation of regional strategies in the Asia-Pacific region. APCEIU participated in the UNESCO Bangkok Office workshop to prepare the "draft plan of a situational analysis for the promotion of ESD in the Asia-Pacific region" (Aug.19-20).
Here I’d like to highlight some comments from participants’ presentations in order to highlight ESD strategies that “utilize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gion” (Dr. Yasui, Vice Rector, UNU, Japan). Dr. Itaru Yasui, one of the keynote speakers,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capacity building, links/cooperation, cognitive and ethical changes of lifestyle and a shift toward alternative energy. Another speaker, Dr Suk-Jin Choi (Director, KICE, Korea) stressed public awareness according to the new concept of ESD, and institutional/international cooperation. Ms. Tatiana Shakirova (Manager, CAREC, Kazakhstan) also agreed on the necessity of “mechanisms for coordination and interaction for development of intersectoral and interagency cooperation.” This need for partnerships and networks was an idea shared by Dr. Derek Elias (ESD Coordinator, UNESCO Bangkok Office) and Ms. Madhavi Joshi (Coordinator, CEE, India). Ms. Joshi suggested guiding principles such as people-centeredness, adaptability, multiplier effect and not re-inventing the wheel. Ms. Zabariah Haji Matali (Manager, AZAM, Sarawak) demonstrated the case for educational needs for community participation and knowledge sharing at the local grassroots level, gender equity issues in the context of development, and the role of public media.
In addition, Mr. Lawrence Surrendra (APCEIU, Korea) introduced the priority of “the promotion of values and ethics” as a dual foundation of EIU and ESD, and “Peace and Equity, Democracy, Appropriate Development and Conservation” as four interrelated principles. In the case of the Cambodia presentation, Ms. Houth Ratanak (Director, Open Forum of Cambodia) show the reality of linguistic diversity in Cambodia, and the necessity for quality education for all in a post-conflict environment. She focused on re-centering education on gender and ethnic minorities. Ms. Le Thi Hoang Cuc (Secretary of the Vietnam Natcom of UNESCO) addressed poverty alleviation, preservation of cultural identity and HIV/AIDS/sex-related education, while Mr. Mohiuddhin Ahmad (Co-team Leader, ICZMP, Bangladesh) spoke about poverty reduction, reduction of vulnerabilities in human and natural resources, and basic needs for livelihood focused on WEHAB (water and sanitation, energy, health, agriculture, and biodiversity). In the light of development education, Mr. Haruhiko Tanaka (Chairperson, DEAR, Japan) focused on partnership at the regional and international levels (ex., networks with ESD group in Chiangmai) and advocacy (curriculum development and training of educator/facilitators).
As I stated above, in spite of variety of educational foci, some common priorities and themes in our Asia-Pacific context come to our attention. These include the significance of Millennium Development Goals-related issues (ex., reduction of poverty, disease and illiteracy), re-emphasizing cross-cutting issues (ex., human rights, cultural diversity, gender equity, peace), critical empowerment of the marginalized and partnerships for community building. This regional workshop provided an opportunity for the following components: to identify current issues and situations through gathering ESD-related data; to create partnerships between stakeholders; and to plan substantive strategies according to a timeframe.
2. Synergic Effects between EIU and ESD
EIU is very critical in terms of ensuring that ESD is value-based and culturally grounded. ESD is also one of the important themes of EIU and as both have education as a focus, EIU and ESD can benefit each other’s area of activity. EIU is critical to ESD because EIU is focused on peace, equity, human rights, and value formation, and on crucially interlinked areas to ensure social and ecological sustainability.
ESD and EIU also challenge our traditional ways of education. They aim at interdisciplinary and holistic learning rather than fragmented learning. They ask us to know both the whole and the parts of reality. In addition, ESD and EIU are characterized by people-centered and problem-solving practices. APCEIU’s objective in hosting the ESD Workshop was to contribute to thinking about the educational innovations needed to mutually connect the Culture of Peace with a Culture of Sustainable Living and to work together for the establishment of just, peaceful, and sustainable communities.
EIU and ESD especially require critical thinking and moral values to deal with human error, globalized crises, and the uncertainty of the future. EIU and ESD challenge us to have a planetary consciousness, to recognize the multi-dimensional, complicated interrelationships of all existence. EIU and ESD are both deeply concerned with the human needs of marginalized Others (ex., gendered Others and ethnic Others), and committed to ending the destruction of ecological Others. Educators cannot stand in a value-neutral position. However, there is no clear road map showing us how to proceed. Given the limited time to change, we have to move towards a sustainable future with a spirit of experimentation and creative imagination.
ESD strategies in the Asia-Pacific region, where most countries are still underdeveloped, must be different from Euro-centric strategies. That is, a culture of peace beyond mere preservation of nature goes with a culture of sustainability. As seen in cases of participants’ presentations, such issues as peace in relation to violent conflicts, fairness, transparency, removal of poverty and discriminative social practices, and cultural diversity have been greatly emphasized in both EIU and ESD in Asia-Pacific contexts. Without implementation of a culture of peace in this era of violence and conflict, there is no guarantee of a sustainable future.
3. Rethinking of the Challenge of ESD as a New Paradigm
Thomas S. Kuhn’s famous explanation of the emergence of new paradigms in academic disciplines can help us appreciate the significance of the ESD challenge. According to him, a new paradigm emerges when anomalies/variables do not fit the existing model and their resistance to the old model is persistent. Then, new support groups that follow the new paradigm to solve those anomalies/variables come into existence in the academic community. This new model/paradigm is proclaimed as true within the supporting academic community. In applicability of Kuhn’s theory into the ESD area, I’d like to emphasize the persistence of anomalies and importance of community-building.
The anomalies we are facing are unprecedented; global problems that are intermingled with political discrimination, social injustice, economical injustice, cultural bias and ecological degradation. These problems are interrelated and complicated and give us little time to solve them. Our existing educational systems that are linear, individual, compartmented, static, oriented toward unlimited production, and an optimism that belies the potential impact of these macro-anomalies. New educational models focusing on complicated (integrated), dynamic (practical) and communal (collective) characteristics are required for construction of a sustainable society. They must be integrated/holistic because they cross over social, political, economical, cultural and ecological dimensions. They must be dynamic because of the necessity for concrete praxis beyond the mere recognition of a variable reality. Moreover, they need to be communal because of the indispensability of local, national, regional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spite of differences of sex, race, class, religion and ideology.
Most of all, faced with the urgency of dealing with eco-crises, ESD asks us how to make fundamental changes in current non-sustainable social practices. Our education has to bring about the result of changing our personal and institutional practices. It is necessary for schools to provide the knowledge, attitudes and skills needed to bring about this change effectively. The source of this change consists of a shift of cognitive perspectives and of lifestyles. The cognitive shift means critical thinking about the chaotic realities of the social and ecological dimensions. New lifestyles can include non-violent and compassionate attitudes toward marginalized Others such as oppressed human groups and threatened species.
Concerning the community of academic practice, I mean the characteristics of school as a community with empowerment and solidarity. Extending to the surrounding local villages beyond the boundary of the campus, students’ learning depends on contextual and situational knowledge. Empowerment includes students’ participation as subjects of learning. It does not seek the so-called “bank-positing knowledge” (Paulo Freire’s term), but rather depends on students’ creative autonomy. Academic structures of problem-solving practice challenge students to venture toward the uncertainty and crisis of the future.
The teacher’s role need not be omniscient. It is enough for s/he to be a facilitator to find problems together with students and to encourage them to deal with issues. Naturally, since people are mutually dependent, the new paradigm of learning seeks solidarity with others and collective wisdom to solve common problems. The recognition of solidarity refers to the extension of learning locales off-campus to areas of dispute or toward the world in general as a text. Through the experience of solidarity in problem-solving practice, students come to recognize the significance of “power-with” or “power-to” relations among themselves, rather than the dominative and competitive one of “power-over.” Contrary to the existing school system of socializing youth into social and cultural norms, this community gives a resistant energy to see and evaluate anti-reality (chaos and crisis), and to suggest alternative options for our future. Although EIU pedagogy includes the above-mentioned factors, ESD challenges one to re-discover and then actualize some potential contributions of EIU from different perspectives.
4. Practicing of EIU’s and ESD’s Vision in a Local School
Here I’d like to show how EIU’s and ESD’s visions are embodied in a particular school in Korea. Despite its short 3-year history, E-Woo Middle/High School(EWS), as an accredited and downtown-targeted alternative school founded by the government, was spotted by Korean mass media because of its various innovative educational systems. With the motto, “education practicing ‘life to live together’ in the 21st century,” EWS is embodying the vision of an alternative society with justice, peace and sustainability. EWS can be said to be a kind of strategic community for social transformation.
To become a member of EWS community requires one to share “social responsibility for cultural revolution toward ecological and communal life in our society,” based on educational principles of conviviality, autonomy, independence, creativity and integrity. The EWS educational philosophy aims at instilling an ecological worldview, communal life and values, spirituality (integrity), and diversity. EWS’s curriculum consists of accomplishing 4 major tasks through a participatory process involving teachers and students: 1) education practicing “life to live together”; 2) open education with student-centeredness; 3) education experiencing the different and various lifestyles; 4) Soul-making education with an integral heart and good will.
In the practice of “living together,” EWS stresses eco-activities and social services in NGO centers and other relief centers, as a required credit course. The eco-activities are environmental monitoring, regular agricultural labor or eco-tourism with special assignments. All students must serve in an internship or perform voluntary work in any social service center every week. EWS provides various experiential and experimental learning programs focusing on social issues locally and globally. For example, for 2 weeks last summer, 11th grade students went to peace camps in selected Asian countries (Philippines, Japan, Thailand, India) to study about peace. 9th grade students took a retreat in different religious centers to practice inner peace. Students made rules to cope with conflicts and issues on campus according to the principle of self-governance. Students practice running a co-op store for life or for credit.
With a student-centered policy, class activities mainly focus on the student’s own research and presentation. The teacher functions as a facilitator or guide. Group study and group discussion is highly recommended, even in solving mathematics assignments. Many parents and local community members become voluntary instructors to respond to student’s particular needs in subjects such as health-care, craft and woodwork, ceramics, meditation, dance, traditional music, fabric dyeing, temple-tour, culture-tour, sports, mountain climbing, textile, proper TV-watching habits, novel writing, food preparation, green energy study, movie-making, and so on. Especially in Korean literature and philosophy , social and global issues are studied in light of alternative perspectives.
The experience of various lives and perspectives is practiced in on-the-spot inquiries at political, social, economical and cultural locales. NGO leaders, corporate CEOs, and famous thinkers are also invited to speak to students regularly. Students are sent to get an apprenticeship for a certain period. For good heart-nurturing education, philosophy classes are provided to all grades to enhance the capacity to consider such issues as globalization, human rights, religion and peace. Students also have a regular class for communal exercise of Chi practice and meditation. Labor in agricultural fields is performed according to season.
On campus, peace-oriented language and pro-environmental action are required in any relationship. No artificial food but only organic food is available with a “zero food waste” policy. Students and parents practice conservation through a sparing-sharing-exchanging-reusing (“A-na-ba-da”) policy. Even teachers have an open mentoring system among themselves (“I-learn-from-you”) in order to maximize educational effects and share information/pedagogy.
The unique characteristic of EWS is the parents’ active involvement. All parents belong to a sub-committee of activities such as local community building, curriculum support and voluntary work for school activities. EWS’s sibling center, “E-Woo Alternative Education Center (YWAEC)” helps to train teachers and parents concerning E-Woo philosophy and community building. YWAEC is responsible of implementing alternative educational policies and some training courses for local and national needs, publishing the best models and networking among alternative schools.
Despite its short history, many media reported on EWS’ curriculum and activities, because of EWS’s leading role in alternative educational practices. Students, teachers and parents share local and global responsibilities for the distant Others in oversea countries, for example to help the Iraqis and Tsunami victims, and the future Others through environmental monitoring and eco-activities. The EWS community is full of liveliness with a spirit of compassion, justice and peace through communal action. EWS shows that the dream for another way is possible. This is what I got from my interviews with many members of EWS.
Other alternative schools in Korea like Gandhi Youth, Ahimna Peace, Living Stone, Silsang Temple, Blue Dream, Sungmi Mountain, Mari, or Mountain Village orient toward sustainable values by means of philosophical perspectives focus on peace, ecology and community movement. These schools root in local community in small size and class activities aim at self-independent study of students themselves as an educational subject. In Campus and community life, these schools stress on alternative values such as freedom, love, autonomy, dialogue and solidarity. They are totally around 70 numbers from elementary school to high school in Korea. Every year some alternative schools come to exist because of strong supports from local educational union. In 2002, Alternative educators and activists founded “Network for Alternative Education (NAE).” NAE, as a focal point, share different ideas and practices for peaceful and sustainable education.
5. Conclusion
Some EIU or ESD experts complain that words like EIU and ESD are too abstract and strange for our current educational contexts. The case of EWS curriculum and educational practice proves that a curriculum based on ESD and EIU can be established in particular schools. I saw how this dream for a school with a curriculum of peace and sustainability comes true in the exemplary case of EWS. Many alternative schools in Korea orient toward a similar vision: no competition but conviviality; no individual success but the social well being of all.
To conclude, the success of the ESD strategy depends on how to practice it in local context. While EIU requires critical thinking and empowerment through participation and solidarity, ESD leads students to engage in more complex, ambiguous, problem-oriented and community-based tasks. ESD demands an ethics of time-limits and contextual knowledge by the interactive involvement of the school and the community. However, commonly EIU and ESD seek an education bringing about change, that is, resistance to and transformation of a culture of violence and non-sustainability. The core purpose of both is to enhance a sense of discernment about anti-reality and an ethics of commitment and responsibility, even global responsibility. To attain this goal, we need to do collective and planetary work beyond the boundaries of gender, race, class, culture and religion. We are invited by this universal calling to imagine a new way of life and to construct new lifestyles. This is what EIU and ESD are aiming for.
Sung Yong Park, Ph. D
Programme Specialist
APCEIU.
He received his Ph.D in Religion from Temple University (USA). His academic emphasis is on inter-religious dialogue, eco-feminism and global ethics. His current work focuses on the peace movement in Korea. sungyongpk@yahoo.com
Source: Journal "SangSaeng" Vol. 12, 2005
Asia-Pacific Centre of Education for International Understanding(APCEIU)
무주 구천동의 물과 바람 :: 2005/06/02 17:14
덕유산 구천동 산행(2005.4.28-30)
오랜만의 산행이었다. 유학후 미국에서 돌아와 처음 잡은 직장을 3년 넘게 다니다가 이제 한 달후 그만두게 되어 심리적 피로와 분위기 전환을 위해 혼자 배낭을 챙겨 무주로 향했다. 나제통문에서 덕유산 정상까지의 길을 2박 3일간 들길 산길을 마음내키는 대로 터벅터벅 걸었다. 이번에는 목표가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단지 굽이굽이 휘돌아 길게 뻗은 구천동 계곡의 33경을 따라 감흥이 이는 곳에 머물러 응시하고 온몸으로 느끼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정도였다.
지리산 칠선계곡의 그 긴 빽빽한 수목과 바위들이 계곡의 ‘깊이’의 맛이 일품이라면 무주 구천동계곡은 그 옆으로 트인 들길의 운치가 매력적인 곳이다. 막히지 않고 트인 빈 공간이 산과 어울려 없되 무형의 역동적인 충만을 선사한다. 흙내음과 여러 꽃향기가 코를 관통하고 겨드랑이와 이마로 스치는 바람이 폐부속까지 흔들어 놓는다. 정적과 움직임의 조화, 고즈넉한 충일의 세계.
내가 이번 들길, 산길을 걸으면서 가장 인상깊게 만난 벗은 물과 바람이었다.
무어라고 형용할 수 있을까. 바위가 ‘연약한’ 물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있는 나무가 보이지 않는 바람을 해치지 못한다. 보이고 굳고 힘센 것들이 연약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항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얀 파문을 그리며 흘러가는 계곡물살을 한정없이 빨려들어갈 듯 지켜보곤 한다. 잔 가지들이 휘돌아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춤을 춘다. 아아, 스쳐지나가고, 흘러서 사라지는 바람과 물이 주는 놀라운 생명의 향연들. 흐르고 스쳐 사라져가기에 순간의 맛봄과 만남이 영원의 파편을 품수한다. 순간의 ‘지금 여기’가 절대적 사건이 된다.
그토록 투박하고 거친 바윗돌들이 씻겨 투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바람에 씻겨 나뭇잎들이 아리도록 찬란하다. 바윗돌과 나무라는 사물의 ‘거기있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물이라는 중압감이 변형되어 物이 物로서 객체화되지 않고 존재의 풍요를 開化시킨다. 생태적 수도자로서 새로운 변형의 몸을 현시한다. 투명한 존재에로의 계시! 단순히 일상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신성의 전언자로서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부딪치고 갈등하는 관계속에서도 그리고 미천함과 사물됨(thing-ness)이라는 현세적 존재로서 바위돌들이 씻어진 존재로서 투명성을 품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굳게 서있는 강한 존재의 힘에서가 아니다. 흘러가 사라지는 연약한 존재-물과 바람-에 의해 수련을 받아 변모되는 것이다.
파스텔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한 정겨운 산의 전경. 멀리서 보면 온통 빽빽이 충만한 연초록 물결로 산이 풍성하다. 그러나 다가서 보면 아직도 커다란 나무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작고 여린 새순의 이파리를 이제 겨우 가지에 드러냈을 뿐이었다. 이 어린 잎들에 비해 비여있고 뚫려있는 공간은 주변은 그 얼마나 큰가? 나무하나의 이파리들을 따서 모으면 겨우 두 손을 모은 양만큼 밖에 안 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린 잎들로 산은 빈 공간없이 충만하다. 작고 연약한 이파리들이 산 전체를 덮어 벼려 빈 공간을 허락하지를 않는다. 작고 여린 존재들에게 이런 힘이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들판과 숲 바닥에서는 작고 가녀린 존재들이 먼저 꽃을 피워 주변을 생동거리게 만든다. 가녀린 싸리나무가지로 줄줄이 맺힌 하얀꽃무더기의 수줍은 듯한 하늘거림이 주는 눈부신 정감! 그 하얀 무리지은 미소에 창자속으로부터 나오는 탄성과 그 마력에 걸음이 힘을 잃어버렸다.
헤드 렌턴에 의지해 계곡옆의 도로 길을 걷다. 사물이 보이지 않으니 오직 걷는 것에만 의식을 모으게 된다. 어둠이 주는 선물 - 걷는다는 것을 의식하기. 몸을 통해 중압감의 무게를 느낀다. 그리고 낯설은 어둠 속의 주변과 더불어 오직 혼자 남겨져 있다는 자각. 대게는 남과의 관계의 시각에서 나를 보았는데 이제는 홀로 이 어둠을 걷고 있다는 의식을 통해 그동안 낯설어졌던 나를 대면하게 된다. 이 자는 신뢰할만한가? 구별된 사물들이 어둠속에 융합되어 나또한 이 어둠의 깊이에 융합되어 간다. 계곡 옆에 텐트없이 침낭을 풀어 누웠다. 쏟아지는 별무리들. 계곡 물소리의 어울림. 물소리를 새기며 새소리에 귀기울인다. 그리고 어둠이 품이 되어 감싸기를 기다린다. 자기를 포기하기. Let-it-go. Let-it-be. 꿈결처럼 아득해져 오는 의식을 타고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화답하며 전신을 감아낸다. 흐르라. 잡지 말고 놓으라. 그리고 흘러가라.
백련사 뒷 등산길에서 부딪친 새로운 전경. 2-3m 높이 위의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기생하는 나무 군락들. 대지에 뿌리를 내지지 않고 텅빈 흐름에 뿌리를 내려 하늘을 사는 모습들. 향함과 그리움만으로 자기 존재가 버틸 수 있는가? 성취함과 안전의 확보없이도 흐름위에 생의 보금자리를 틀 수 있는가? 굳고 커짐이 아니라 작고 여림으로도 힘내며 살 수 있는가? 바람에 동요하기보다 오히려 바람을 타고 전 존재가 춤으로 화할 수 있는가? 약해진 체력과 끊없는 계단식 등산로가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안개와 어둠이 몰려오면서 산정상바로 밑 대나무숲에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밤새도록 불어대는 거친 바람소리. 나뭇가지들의 묘한 울음소리가 전신을 꿰뚫고 지나간다.
다음날 산 계곡으로 내려와 알몸으로 물속에 들어가다. 서너 시간을 누워 계곡물을 응시하다 낮잠을 잤다. 햇살과 바람이 전신을 희롱하듯 애무하도록 내버려 둔 채. 계곡물, 개울물이 구불구불 흘러 가긴 하지만 그렇게 흐르는 동안 줄곧 고집스럽게 바다로 가는 가장 짧은 지름길을 찾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게 내가 가야할 길이다’라는 그 어떤 충격의 부름. 바람과 물의 길. 전적인 자신의 무장해제. 꿈꾸듯 내려오는 길을 걷는다. 꽃은 꽃으로 이어지고, 길은 길로 뻗어나 있다. 나무, 산, 물, 바람, 꽃 인생 모두가 길로 화한다.
평화교육 보고서(감리교) :: 2005/06/01 15:44
교회학교 교사 및 교육담당자를 위한
평화교육 프로그램(입문과정) 보고서
기 간: 4월 12일- 5월 10일 (총 5주간)
(매주 화요일 오후 6:30-9:00)
장 소: 청파감리교회 02)713-5254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3가 85번지 140-133
기독교 대한감리회 본부 교육국 산하 평화교육정책 위원회
박성용/유네스코 시민사회네트워크 담당자
I. 취지와 목적
감리교 교육국산하 평화교육정책위원회(이하 “평화정책위”)에서는 오늘날 지구촌과 한국사회에서 점증하고 있는 분열과 아픔 그리고 폭력의 현실에 직면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소명을 다시 확인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요한 웨슬레의 그리스도 영의 내적 증거와 사회적 성결에 대한 신앙전통을 물려받은 우리 감리교인들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라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이 시대의 지상적 과제인 평화와 생명문화 건설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 가장 중차대한 소명임을 깨달아 평화교육 프로그램을 입안하고 다음의 내용처럼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II. 프로그램 입안과정
교육국산하 “평화정책위”에서는 9.11사태이후 평화의 주제가 지구적 의제로 떠오르고 세계 여러곳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국제회의에서 핵심으로 부상함에 따라 2003년부터 “평화이야기 마당”이란 공개포럼을 통해 여러 학자와 기독교인들이 매달 1회 모여 평화에 관한 여러 주제들에 대한 이해를 나누었고, 참여자들과 자원인사들(resource persons)로부터 실질적인 평화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권고를 여러 회의를 통해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교회와 청파교회에서 실행가능을 위한 현장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평화교육 프로그램의 필요성을 확인하였습니다.
2005년 2월 “평화정책위”의 전체 위원들의 공식회의를 통해 평화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 박성용 목사와 정주진 선생을 주 강사로 선정하여 입문과정의 프로그램을 실시하도록 위임하였습니다. 교육국에서는 교육국 및 교단본부의 홈페이지와 주간신문인 기독교타임즈를 통해 프로그램 안내를 하고 신청자를 등록 접수하였습니다. 이 평화교육 프로그램은 기독교대한감리회 본부 교육국/평화교육정책위원회가 주관하고, 교육국 평화교육정책위원회(위원장:김기석목사)에서 주최하였으며, 청파감리교회가 장소제공 및 후원을 하였습니다.
III. 프로그램 내용
1. 등록자 현황: 교회학교 교사, 전도사, 목사 및 YMCA 지도자등 총 18명
4. 강 사 진: 박성용/종교학박사, 유네스코·아시아태평양국제이해교육원 시민사회실장, 기독교 생명평화운동 및 대안교육 활동가
정주진/ 평화갈등연구학 석사, 월드비전 아태지역본부 북한사업부 사무처장, 갈등해결 교육과 평화교육 진행자
5. 교육내용:
1 주(4월 12일)- 등록(6시) 개회예배, 오리엔테이션,
기독교인을 위한 평화교육입문
2 주(4월 19일)- 평화성서학, 평화교육방법론 I
3 주(4월 26일)- 평화교회론, 평화교육방법론 II
4 주(5월 3일)- 비폭력 의사소통과 대화, 평화적 갈등해결
5 주(5월 10일)-교회현장에서의 평화교육 실습, 평가와 폐회예배
IV. 프로그램 평가
5주간 프로그램 과정속의 인터뷰와 프로그램 마지막 주에 실시한 평가 설문지를 통해 나타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긍정적인 면:
- 프로그램 실시의 정당성과 필요성에 대해 모두 공감함
- 프로그램 내용이 이론과 실제적 적용을 고려하여 유익하였음
- 프로그램 진행자들의 평화적인 진행방식과 자유스런 분위기가 좋았음
2. 보완이 필요한 면:
- 좀 더 토론을 위한 시간 확보와 적극적인 활동을 위한 충분한 공간 확보
- 교회론 이론 부분과 구체적 활동 프로그램 짜기에 있어서 좀 더 명료한 개념화가 요구됨
3. 차후 프로그램 진행에 대한 제안:
- 프로그램을 익힐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적극적 활동을 위한 공간 확보가 필요
- 후속 프로그램(심화나 주제별 평화교육)에 대한 욕구에 따른 평화교육 과정의 신설 필요
- 평화교육 내용에 있어서 일상의 평화, 갈등해결과 대화법, 평화교육사례와 모델 학습, 평화 와 영성, 지구적 평화운동사례연구, 사회의 구체적 현안에 대한 프로그램 등에 대한 요구
- 기존 교회프로그램과의 연계 및 교회와 교인의 평화실천의 내용이 필요
- 평화교육자들에 대한 프로그램의 요구
4. 프로그램 진행자의 평가:
1차 입문과정에 대한 참석자들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고, 따스하고 평화로운 진행분위기에 호감을 느꼈으며, 평화교육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고, 앞으로의 지속적인 평화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필요성과 기대감이 컸습니다.
단지, 동기유발참석자들의 먼 교통거리와 1주에 2 주제에 대한 소화가 벅차서 앞으로는 1주제에 대한 시간배분을 늘여서 1주 1주제로 약 8주로 늘이는 방안이 더 효율적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또한 참여자 모집에 있어서 일반광고이외에 사전에 2-3 교회의 참여 동의를 받는 것이 모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입문과정 참가자들에 대한 이후의 후속프로그램을 지속하여 평화교육 지도자로 일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평화교육에 대한 관심도가 지속적이게 하는 것이 교육의 효과를 증대시키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