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60주년기념 조지부시 초청 대중기도회 성찰-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평화 :: 2010/06/16 09:21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평화'
한국전쟁60주념기념 대형교회들의 조지부시 초청
대중기도회에 대한 대안적 성찰(2)
박성용
(이글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세 대형교회들이 시청광장을 빌려 대중평화기도회를 개최하면서 간증자로 조지 부시 전미국대통령을 내세운 것에 대한 대안적 성찰을 위한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주최측은 조지 부시가 술과 담배를 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렬한 증거자임을 그 이유로 간증자의 자격이 있음을 내세우고 있고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요지의 간증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만이 모이는 대중집회를 통해 성금을 모아 북한을 돕겠다는 목적이 이 집회의 정당성을 입증한다고 주최측은 믿고 있다.
보수성향의 대표적인 교회들과 대표적인 교계지도자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대형집회가 언론을 통해 다른 일반 기독교인들과 세계 기독교에 미칠 영향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기에 전쟁과 폭력에 대한 복음적 관점이 과연 진실로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련의 글들을 내놓음을 통해 보수주의가 의미하는 복음의 이해에 따른 진정한 신앙관과 태도를 갖고자 함에 있다. 필자의 글들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제목하에 의해 각기 따로 전개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다; 2)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평화; 3)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제자직의 이해; 4) 복음의 근본 토대로서 평화; 5) 기도와 복음적 삶의 실천)
한국기독교 대중적인 대형교회 대부분 신자들이 알고 있는 군사적 무기의 힘과 지배통치에 의한 정치적 적에 대한 무력 과시에 의한 평화는 성서가 제시하는 평화관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우리는 이를 비유하여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로 각각 명명할 수 있다. 예수 당시에는 정치적 평화로서 로마의 평화가 이미 존재하였고 이에 대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날카로운 의식을 가지고 이에 대한 대안적인 평화를 제시하였다. 복음서의 중심에 서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는 바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확인한 평화에 대한 명확하고도 구별된 인식과 그 실천이 중심에 놓여있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문제는 그 시대의 가장 긴급한 문제이기도 하였다. 물론 이를 어떻게 성취하는가에 대한 그 방법과 출발점이 당시 기존 신앙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명료한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로마의 평화는 엄청난 군비경쟁과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는 정복과 강제의 평화였다. 예수를 처형시킨 십자가형은 로마의 형벌의 가장 마지막의 것인 체제 반란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따라서 예수를 처형시킨 것도 바로 로마의 평화 곧 당시 권력자들이 군사력을 동원해 세우고 지켰던 평화였다. 이는 기득권의 엘리트 왕조를 위한 지배체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강제적 평화였다. 국가안전을 위한 명목하에 혼란과 폭동에 대한 잔인한 진압과 무력통치에 의한 질서를 지켰다.
모든 것은 로마로 통한다는 '황금의 시대'로서 로마의 평화에는 정복에 따른 식민지의 확장으로 인한 경제적 부의 축척과 새로운 도시들의 건설과 무역, 도로항만의 발전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풍요로운 생필품과 사치품이 넘쳐났다. 그리고 당시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전 인류의 구원자'로 칭함을 받았다. 그의 명성은 바로 군단, 식민지, 함대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피에 뭍은 승자의 평화에 뒤따른 것이었다. 로마의 평화는 바로 전쟁을 통한 승리자의 평화였고 전쟁신인 Mars가 동전에 새겨져 통용된 정복자의 평화였으나 피식민자들에게는 굴욕, 엄청난 피와 눈물을 동반하게 되었다.
로마의 평화에서는 전쟁 영웅들이 칭송을 받았으며, 전투에 나서서 죽은 희생자들은 영웅으로 등극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의거하여 결과적으로 지배하는 자는 위대한 자로-신적 권위로까지 올라가 그의 이름으로 제단도 설치되는 등- 추앙을 받고 항복한 자는 보호받되 반역자는 쳐부숨을 당하여서 강한 자에 대한 충성, 로마를 위한 명예로운 희생이 찬미 받았다. 안전은 권력으로부터 나오며, 지속적인 평화는 따라서 이 권력에 따른 체제 안정에 의지하게 된다. 권력자는 밖의 위협에 대한 안전을 제공하고 안에서의 강도들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함으로써 지배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안전하다는 신념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안전의 댓가는 복종과 납세, 그리고 전쟁동원에 대한 강제징집이였다. 통치가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시장과 다리, 토목공사를 통한 경제 개발과 천연 자원의 조달을 식민지에서 세금, 관세, 조세, 공물, 징병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일반 사가들의 몇 몇이 극찬한 '황금의 시대'로 표현된 이러한 군사, 법, 경제적 부에 의한 통치로 특징적인 '로마황제에 의한 평화'에 대해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추구하던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통해 대립각을 세운다. 군사력에 의한 중앙의 억압적인 폭력에 근거한 평화는 예수가 생각하는 평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배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고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으며, 산상수훈이 제기한 것처럼 행복한 자는 마음이 가난하고, 의를 위해 핍박받으며, 자비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고 하나님 나라는 가난과 곤궁의 극복이며 억압과 지배의 고통의 상황 역전에 있다는 예수의 말에 전적으로 신뢰하였다. 계급적인 지배관계가 아니라 상호 봉사와 원칙적인 평등을 추구하며 '세인과 죄인'과의 공동식사에 나타난 식탁교제는 이에 대한 극명한 예표이었다.
적에 대한 징벌과 지배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할 정도로-이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신적 실재의 가장 중요한 현실로 경험한다- 타자를 동반자, 이웃으로 감싸안는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 응답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주는 평화'(엡2:14)이시며 '하나님은 사랑'(요일 4:16)이라는 공동체적인 신앙고백의 터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악을 선으로 이기라'와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을 그대로 문자적인 의미에서 뒤따르는 것은 주어진 폭력과 갈등의 상황을 무저항적으로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비폭력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상황을 창출해 냄으로써 폭력적인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데 초점이 있다.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는 사실을-한 하늘 아버지의 형제자매- 인식시켜 줄 수 있는 상황을 창출해 낼 수 있는 대안적인 상상력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진정한 제자는 폭력의 순환 고리를 분쇄하고 다른 사람을 연대 의식으로 부를 수 있는 행동 양식을 발전시키라는 신적인 요구를 받고 이를 수행한다.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마 5:44-45)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에서 보듯이 군비확장과 강제력에 의한 통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길이 아니다. 여기서 초점은 원수의 종말이 아니라 상호간의 증오의 종말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중요한 점은 하느님의 행위는 우리 인간의 상식적인 규범적인 행위에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에는 이로' 그리고 원수에게는 앙갚음을 하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규범을 역전시킨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쉽게 막연히 사용할 수 있는 '이웃'이란 개념을 원수라는 개념으로 대치시키고, 원수란 말을 개인적인 적뿐 아니라 국가적, 종교적 원수에까지 확대시켰다.
'원수에 앙갚음을 하지 말라'는 금지의 수준을 지나 '원수에 대해 인내하라'는 수용의 단계도 아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의 요소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원수 사랑'에 대한 주문은 원수를 현 상태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원수 사랑은 원수를 영원히 원수로 남아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변화시킨다. 깊이 생각해보면 증오는 적개심의 종말을 원치 않는다. 증오는 원수의 이미지를 필요로 하며, 항상 이 이미지를 요청한다. 증오는 원수를 원수로서 좋아한다. 그러나 원수에게 종말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좋아한다.
예수의 원수 사랑에 대한 권고를 통해 그의 제자들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해와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자비가 현실이 되는 공간을 열어 한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서 수용하게 된다. 예수의 '원수 사랑'의 주문은 가장 극단적인 신앙 실천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것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박해하는 이를 위한 기도는 매우 심각한 불의와 폭력의 경험을 경험하면서도 증오를 넘어 폭력을 변화시키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폭력현실의 엄중함과 극열함에 비추어 그 가능성이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지 않았지만 자비로우신 하나님-하나님의 완전성은 여기서 '자비'에 의해 드러난다-에 의지하여 이러한 비폭력적인 시도의 모험을 위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고난까지 감수하도록 요청한다.
'원수 사랑'과 '박해하는 자를 향한 기도하기'라는 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상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는 자비의 하나님의 샬롬의 통치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실재가 되었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aeon)의 표상이자 당시 유대인의 신앙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요체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현실성의 도래에 대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선포는 로마의 평화란 이름하에 자행되었던 폭력의 희생자들과 순교자들이 오히려 화해와 평화를 실현시키는 힘이 되었다. 새로운 무기와 지배의 법의 폭력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로써 원수와 박해자를 대하는 이 새로운 샬롬의 통치는 결국 로마의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고 기존의 평화를 위협하는 역적이자 반도로 몰리어 단지 '그리스도인'이란 것 때문에 처형이나 맹수의 밥이 되는 상황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만큼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평화에 대한 시각은 달랐고, 위협을 느낄 정도로 예수의 추종자들의 실제의 삶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다른 일반인에게 효력을 미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평화에 대한 초기 신앙공동체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는 정말 낯설고, 잊혀진 전설과 같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반공과 승공의 이념이 신앙이 되어버렸고, 적을 응징하고 보복하는 데 기도의 힘을 사용하며, 군사력의 증강을 통한 안보의식의 철저성은 신의 자비와 은총이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보안법에 의한 체제비판자나 수상한 자에 대한 이념적 정죄와 배제라는 공공 행위에 대한 숭배는 한국교회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이름하에 실질적으로는 로마의 평화를 따르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제자들의 신앙실천은 로마의 군사적 폭력에 무기로 맞서야 한다는 젤롯파나 로마의 통치에 순응하는 헤롯당과 사두개파와 다른 길을 걸어갔다. 모든 것이 로마의 통치자 가이사에게로 통하고 집중되는 로마의 평화 시대에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을 주장했던 예수는 하나님에게 돌려야 할 것이 있다는 체제 비순응적인 태도를 밝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서 모든 이들이 추종하는 현실 세계와는 낯설고도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주위의 기준 및 관습과 구별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로 인해 정치적 불순분자로 인식되고 고발되고 법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시오"(데살 5:15)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시오. 축복해야지 저주해서는 안됩니다."(롬 12:14)
"그대는 악에 정복당하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정복하시오." (롬12:21)
그리스도를 영으로 만난 사도 바울이 '모든 이'에게 '축복'과 '선으로' 악을 정복하라는 말을 하라는 것은 보복의 단념을 넘어서 부정적인 폭력의 경험을 긍정적인 대안의 행위로 응답하라는 권고인 것이다. 이러 주장이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그가 주님을 '우리의 평화'로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본질은 화해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2장 14절-18절을 통해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적대 관계를 지양시키고 분리되었던 집단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리스도의 역할은 화해시키는 평화임을 주장한다. 골로새서 1장 18절-20절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피는 만물과 화해시키는 평화를 이룩하여 인간과 우주와의 화해라는 포괄적인 평화를 이룩한다. 여기에 바로 바울의 '새로운 창조' '새로운 존재'에 대한 사상의 근본이 담겨져 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유대인과 유대인과 이방인의 대립뿐 아니라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 야만인과 희랍인의 대립을 무너뜨리고 (갈3:28; 고전12,13; 골3,11) 모든 인간이 동등한 형제자매로 특권이 없고 낮은 자가 존중되는 새로운 현실성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로마의 강제력에 의해 창출된 질서와 로마의 지배를 받는 세계는 하나님의 근본적인 샬롬의 질서를 엉클어뜨린 실제적으로는 무질서, 즉 혼돈(chaos)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짐승과 우상, 창녀와 흉물스러운 것의 상징으로 표현된 로마의 실체이다. 요한묵시록 기자는 로마와 황제의 삶의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대립각을 세우고 화해와 평화의 방식인 '어린 양이 승리할 것이다'는 확신속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삶의 방식을 철저히 인식하고 이를 따를 것을 주문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앙망속에 로마 국가와 황제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고 마라나타-'주 예수여 어서 오소서'-의 어린 양의 힘에 대한 희망속에서 새 것이 옛 것을 대치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구원의 확실성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의 보수 혹은 정통 기독교인들은 초대 신앙공동체가 추구했던 날카로운 '로마의 평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제대로 인식하여서 현대판 로마황제의 정치적 이념의 추종에서 벗어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철저한 의식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현실과 기존의 정치 엘리트들이 선전하는 국가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추종에 비판적인 동시에 변혁적이다. 현재의 형식적인 '자유 민주주의'가 아무리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할지라도-로마의 평화도 긍정적인 면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안정, 개발, 경제적 부가 보장되었다- 지배와 강제, 적에 대한 증오, 지배 엘리트의 권력화, 가난한 이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 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평화'는 도전하고 변혁시킨다. 현실속에 모순과 불의가 존재한다면 그리스도의 힘은 로마의 힘과 대립하고 저항하게 된다.
한국전쟁이후 60년을 돌아볼 때 한국교회는 이승만 정권시절부터 국가이데올로기에 대한 야합이 이루어져왔다. 현재의 소망교회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보수기독교 참모진들의 천안함 사태에 대한 안보무시의 적극적인 군사적 대결로서의 대응과 보수대형교회의 '6.25'상처 회상을 통한 '적'에 대한 확인의 제의의식들은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닌 '로마의 평화'를 추종하는 변형들인 것이다. 진실로 보수가 참된 보수적 신앙본질을 지키고자 한다면 예수의 가르침과 초대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원수사랑'과 '박해자에 대한 기도'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라는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고백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일회성 집회에서가 아니라 실 생활과 교회속에서 훈련 프로그램과 증언, 설교등에서 화해사역의 실천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2010.6.16.
조지부시초청 기독교대중집회 성찰(1)-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더 절대적 위치에 있다 :: 2010/06/15 11:59
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더 절대적 위치에 있다
한국전쟁60주념기념 대형교회들의 조지부시 초청
대중기도회에 대한 대안적 성찰(1)
박성용 목사/비폭력평화물결 대표
(이글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세 대형교회들이 시청광장을 빌려 대중평화기도회를 개최하면서 간증자로 조지 부시 전미국대통령을 내세운 것에 대한 대안적 성찰을 위한 것이다. 언론에 따르면 주최측은 조지 부시가 술과 담배를 끊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열렬한 증거자임을 그 이유로 간증자의 자격이 있음을 내세우고 있고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요지의 간증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10만이 모이는 대중집회를 통해 성금을 모아 북한을 돕겠다는 목적이 이 집회의 정당성을 입증한다고 주최측은 믿고 있다.
보수성향의 대표적인 교회들과 대표적인 교계지도자들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 대형집회가 언론을 통해 다른 일반 기독교인들과 세계 기독교에 미칠 영향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기에 전쟁과 폭력에 대한 복음적 관점이 과연 진실로 무엇인지 고찰하는 일련의 글들을 내놓음을 통해 보수주의가 의미하는 복음의 이해에 따른 진정한 신앙관과 태도를 갖고자 함에 있다. 필자의 글들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제목하에 의해 각기 따로 전개될 것이다: 1) 하나님 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보다 더 절대적 위치에 있다; 2) 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평화; 3) 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제자직의 이해; 4) 복음의 근본 토대로서 평화; 5) 기도와 복음적 삶의 실천)
전쟁은 우리의 의식과 삶에서 아직도 진행중이다
한국전쟁 60주년의 과거에 대한 성찰과 최근의 천안함 침몰의 사태을 회고할 때 우리는 똑같은 일련의 패턴에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범인이 누구인가'와 '어떻게 적에 대해 응징/보복해야 할 것인가'가 그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서적과 천안함 침몰에 대한 보고와 언론의 주요 흐름은 누가 가해자인지, 어떻게 공격받았는지 그리고 그 대책으로서 적에 대한 강력한 대응은 무엇인지가 주로 논의되어진다. 여기서 생산되는 담론은 '적'의 사악함에 대한 심도깊은 확인 그리고 힘의 논리에 따른 강력한 응징의 방법(그 댓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차지하고)과 증오를 증폭시키기이다. 희생자는 국가에 의해 영웅이 되고 두려움을 통한 안보논리가 강화된다.
평화학의 관점에서 보면 무력분쟁과 갈등은 단순히 사건에 관여한 당사자 개인이나 집단의 확인만이 아니라 그 분쟁/갈등의 구조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그 사건을 보는 데 포괄적이고 제대로 보는 시야를 제공한다. 개인과 집단이 분쟁과 갈등에 관여하는 것은 그 개인과 집단이 본성적으로 악해서이기 전에 구조적으로 이미 그 개인과 그 집단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하는 시스템적인 역학작용이 그 개인과 그 집단을 그렇게 하도록 만들게 된다. 예를 들면 금강산 피격사건이후의 악화일로의 남북대치와 대결상황, 남북간 협의없는 NLL의 상시적인 갈등상황, 키리조브작전에 연이은 독수리연합침공작전을 통한 한미연합대잠수함작전에 의한 위험성의 구조적 증가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폭력의 문화가 그런 폭력적 대응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의심스런 자를 적으로 만들기, 힘에 의한 맞대응의 논리, 이념적/신념적 타자에 대한 제거, 방어를 위한 무기의 정당화, 위협을 통한 상대의 힘을 꺽어놓기에 대한 타당성, 최강의 무기가 안전을 보장한다는 선입관, 당한 것에 대한 증오와 보복은 정당하다는 논리 등등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지닌 폭력과 전쟁의 문화가 여기에 개입한다. 문제는 누가 가해자이든 상관없이 이러한 폭력의 구조와 문화가 작동되어 있을 때는 언제나 또 다른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는 것이지만, 세인들은 이런 작동 시스템에 대한 구조와 문화에 대한 인식은 없이 누가 가해자이고 어떤 응징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주로 눈길이 가있다는 현실이다.
상대방이 가해자로서 적으로 보이고 이에 대한 증오와 응징의 감정이 고조될 때 위에 말한 구조와 문화의 근본 원인은 간과되고 이 갈등을 힘으로 제어하기 위한 시도가 그 결과의 역효과에 대한 고찰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 적이라 판단된 상대를 응징하기 위한 강력한 맞대응으로서 조지부시의 초청은 이러한 심리적 결과에 따른 것이다. 평화를 위한 기도회라는 이름하에 유엔과 국제사회가 정당하다고 보지 않은 이라크전쟁의 전범자인 조지부시는 '적에 대한 강력한 응징'으로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자유의 투사로 비쳐진다. 적에 대한 강력한 대응의 심리적 발로로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대 팔레스타인 정책에서 그가 무슨 불의한 행동을 하였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고, 적인 상대방을 강하게 공격하고 '악의 축'으로 선포한 조지 부시는 심리적 보상과 따라야 할 모델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하기를 원하는 문제는 상대방이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의심스러운 상대가 어떻게 '적'이란 이미지로 강력하게 바뀌는 지 그리고 그렇게 적으로 확인되었을 때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도 신앙의 여부와 상관없이 결과로 오는 더 큰 희생에 대해 신중한 고려없이 강력한 응징에 찬동한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복음을 그대로 준수하고 지키는 소위 '보수'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은 더욱 증오와 적 섬멸하기에 앞장선다는 증상이다. 한국전쟁이래의 정치적 상황과 천안함 사태에 있어서 한국보수교회들은 이승만 정권시절이후 하나같이 보복과 처벌을 통한 체제수호라는 국가이데올로기의 신봉자였으며, 전쟁과 군사행동, 무기생산과 판매, 군인의 월남과 이라크 파병, 중앙정보부의 용공조작사건들에 대해 하나같이 침묵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집단시위를 표출하였다. 기독교인으로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성찰과 복음에 따른 세상인들과의 구별된 차이없이 전쟁이전에 마음속에 이미 전쟁논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정복과 증오가 아니라 화해와 사랑이다
미국은 원래 종교와 정치를 엄격히 분리한 나라이다. 그런데 조지 부시는 백악관에서 조찬기도회를 도입하여 보수 기독교계의 호의를 이끌어 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국의 이익을 침범하고 위협을 주는 자들에 대해 '테러와의 전쟁' '악의 축'이란 선언을 함으로써 상대에 대한 힘에 의한 응보와 결투의 논리를 정치외교영역에 적용하였다. 남미에 있는 미국의 다국적 농장과 산업의 국가이익 보호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원유에 대한 기득권의 보호를 위해 민간정부를 전복시키는 구테타(예, 과테말라)와 독재국가에 대한 지원의 수많은 과거사에 대한 눈멀음은 차지하고,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악의 축의 선포를 통해 자신들의 깨끗함과 상대의 부정함에 대한 이미지 조작을 통해 상대에 대한 군사적 폭력을 정당화하였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국가이데올로기화이다.
조지 부시가 실행하는 세계재패의 미국의 힘을 지지하는 데 국가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 신앙이 나타난 것은 바로 콘스탄티누스황제가 AD 4세기초 정치적 적을 무찌르는 데 십자가를 내세워 전투에 나가 이김으로써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만들어 자신의 통치에 사용하는 데서부터 연유되어진다. 그때이전까지만 해도 '평화의 주'를 위해 무기나 군대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박해받는 기독교는 이제 십자가가 상대를 정복하는 무기로 바뀌게 되고 로마제국을 강화하는 지배와 정복의 국가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일이 발생하며 결국 십자군 전쟁이라는 초대 기독교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십자가를 무기로 성지탈환이라는 명목하에 정복전쟁을 하는 선례들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기독교가 국가종교 혹은 제국종교로 바뀌면서 기독교가 로마를 개종시킨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이용하여 국가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기독교를 개종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원래 예수님과 그의 초대 교회에 있어서는 복음은 명확히 국가이데올로기와는 적대적 관계였다. 그 한 사례가 '여우같은 헤로데'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 나타난 사랑, 정의, 평화의 가치를 통해 보복이 아닌 대안을 제시한다.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마5:45) 하나님의 이 무제약적 사랑은 인종, 계급,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초월하는 사랑인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이다. 힘의 논리보다 적과 죄인을 이웃으로 삼는 게 십자가이고 나를 따라 오려면 그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신앙공동체는 적을 무기로 대항하는 과격한 민족주의 집단인 젤롯당(혹은 '단도'라는 의미의 시카리옷파라고도 함)이나 로마의 국가이데올로기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혼합한 사두개파(산헤드린으로 대표)와는 구별된 사랑에 의한 변화를 주장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단순한 신조나 선언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였다. '선인이나 악인에게도 골고루 비와 해를 주시는' 하나님의 무제약적인 사랑은 장벽과 경계선을 무너뜨리신다. 사람이 긋는 모든 경계선, 세계평화를 역행시키는 모든 국가이데올로기와 힘의 숭배는 우상이다. 분열이 아닌 일치이되 일치를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과 대화로 사는 삶이 유대인들보다 더 '완전하게' 사는 비결이었다.
십자가는 이미 이세상에서 비판적 존재로 살기를 요청한다. 이 세상적 가치가 아닌 자비로운 하나님의 은총의 통치라는 주권아래에 사는 삶을 의미한다. 이 십자가는 죄의식, 위협, 공포, 폭력과는 전연 상관없다.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라는 분과 관련하여 가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경험함으로 시작된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노니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의 것과 다르다고 하신 예수님을 통해 '평화의 주'이신 그분에 대한 전적인 복종과 .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심"(고후 5:18-19)에 대한 온전한 승인을 통해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그 어떤 위협에서도 무기를 들거나 적을 죽이기 위해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흐름이 강력하고도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십자가는 보복과 증오가 아닌 건설과 대안의 방식을 제안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웃의 정의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 25-30)처럼 내가 친밀한 사람이 아니라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도움을 주는 자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더 나아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속에서 이웃의 개념을 원수에로까지 넓히고 있다. 적과 동지의 전쟁논리와 적은 응징되어야 할 범죄자라는 국가 이데올로기는 예수의 원수사랑에 대한 대한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예수님의 다음의 말을 음미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너희는 들었다. 일반의 사회적 가르침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공격은 더 강한 반격을 필요로 한다.
폭력 대응이 정당화된다
폭력 투입/폭력의 누진적 확산
그러나 나는 말한다 예수의 새로운 사랑의 윤리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목표를 바꾸라.
왼뺨마저 돌려대어라 죽음대신 대안과 개선수단을 확산시켜라
대안투입/폭력의 변혁, 악을 선으로 이기기
조지 부시가 1주일 후에 선포할 간증인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그 논지에 혹시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헌신과 희생의 필요 그리고 공산주의의 잔인성이 논의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분명하게 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자유 민주주의'라는 국가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고 공산주의가 잔인한 것이 아니라 전쟁은 공산주의든 자유민주주의든 사람을 잔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베트남전쟁과 이라크 전쟁 등에 의해 적만이 아니라 아군도 전쟁자체가 군인 모두를 잔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국가 이데올로기가 신앙에 앞서는 것에 대해 특히 저주와 보복이 사랑과 화해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우선되는 것에 대해 '우상'임을 선포해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신앙을 대신하는 것은 그 어떤 상황도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교회에서의 삶과 세상의 삶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님이시기도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주님이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기의 숭배, 힘의 숭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비폭력적인 순교자가 되기를 제자들에게 요청한다. 공격성과 증오를 극복하는 평화운동, 상호간의 자멸적 파괴를 극복하는 평화운동은 하나님의 아버지됨과 모두의 형제자매됨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우리가 6.25와 천안함에서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유념하고 회개해야 할 내용은 가해자에 대한 증거찾기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깊은 자각과 통회함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우리의 과거 역사는 사람들이-사랑의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증오하고 전쟁터에서 시체가 되기 위해 살았을 뿐이다라는 깊은 참회가 이번 한국전쟁 60주념에서 특히 시청광장에서의 대중평화기도회에서 일어나야 한다. 보수는 국가이데올로기에 대한 보수(보호하고 지킴)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보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 어떤 군사적 폭력에도 -그것이 무기가 아니라 확성기나 전광판 혹은 풍선에 의한 전단이든 간에- 대항하는 '시민불복종'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이름으로 전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무력을 사용하는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에서 해방된 사람들로서 기독교인의 본질을 자각하고 더욱 더 진실과 정의와 사랑의 힘을 신뢰하고, 폭력보다 이것들이 더 현실적이고 힘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몸으로 생활로 진지하게 사는 것이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무력에 의한 힘의 숭배와 적에 대한 응보를 요청한다. 그것의 근본 가치는 '이에는 이에로'라는 보상의 원리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사랑과 화해의 십자가의 원리를 따른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 5:43-45)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어쩌면 어렵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더 극단적인 요청을 우리에게 한다. 원수를 위해,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를 하라.' 이것이 바로 당시의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을 가르는 표징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기도까지 하는 이 적극적인 실천의 말씀은 이제 한국교회가 새롭게 회개하고 실천해야 할 예수님의 요구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전쟁 60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이산가족이 일천만이 되는 이 비극적인 상황에 있어서 한국교회는 그동안 적에 대한 증오와 적의 변화는 기도해왔지만 서로 죽이고,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고, 고향에 두고 떠나온 것으로 인한 수많은 이들의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을 어느 교회든 나서서 해 본적이 없다. 분쟁과 갈등에 대해 보복와 증오가 아니라 비폭력적으로 공동의 선을 도출해 내는 갈등해결과 화해사역의 프로그램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는 교단이나 개 교회도 찾아 볼 수가 없는 불모의 무력한 교회로 우리는 지나왔다.
이제는 사랑하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단순히 개인의 내면의 영혼속에 일어나는 행동이 아니라 치유와 갈등해결 등의 화해사역이라는 구조를 만들어 내는 '구조적인 사랑'의 실천이 참회의 구체적인 행동 프로그램으로서 일어나야 한다. 우리의 기독교 교육도 사랑과 화해의 지속적인 훈련과정이 있어야 기도회의 결실이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열매를 통해 그 존재를 안다'고 말씀하셨다. 단순한 일회성의 과시형 대중기도회가 아니라 그 진심이 결과를 맺는 데 대형교회들이 이제는 앞장서는 모범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10. 6. 15.
일아 변선환의 말기 종교해방신학의 새로운 전환 고찰 :: 2010/06/11 23:27
일아 변선환의 말기 종교해방신학의 새로운 전환 고찰
-제 3토착화세대의 도전에 대한 긍정적 응답-
2010.6.14. 동서신학포럼
들어가며
1. 종교재판과 변선환 박사의 사상의 전환
2. 변선환의 텍스트이외의 수업 이야기로부터의 통찰
3. 제3세대 토착화신학자들의 도전과 수용
4. 변선환 종교해방신학의 변천과 지향성
5. 타자의 주체화로서 종교해방신학
6. 해방과 변혁을 위한 종교해방신학
7. 토착화 제 3세대의 질문에 대한 응답
나오며
들어가며
변선환 박사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15주년이 되는 금년에 제 3세대에 의해 토착화신학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다시 일어나게 됨으로 인해, 이러한 도전에 의해 필자 자신도 2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입장을 다시 정리하게 된 것을 퍽이나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81년부터 감신에 들어와 87년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일반 수업과 연구실과 자택에서 개인적으로 여신 학습모임을 중심으로 옆에서 본 나의 인상은 그때만 해도 수많은 학자들의 나열에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이었다.
선생님께서 종종 하신 말씀인 "내가 변씨인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은 조지는(?) 신학이다," "나를 징검돌로 건너라"의 예에서 보듯이 그는 칼바르트주의자에서 시작하여 실존주의 신학, 토착화신학, 종교다원주의, 종교해방신학을 거치는 대화의 신학자이자 끊임없이 자신을 일신해 나가는 지적인 구도(求道)의 신학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해석도 여러 방향과 관점에서 조명될 수 있고 이것들이 또한 학문적 토양을 풍성하게 해 주는 데 공헌을 하고 있다.
최근의 일련의 토착화 신학 및 종교해방신학의 비평적 담론에 있어서 변박사께서 이루어 놓은 업적과 더불어 한계로 지적되는 것은 필자가 소화한 나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게 지적인 엘리트의 지적인 유희이지 주장하고 있는 종교해방신학이 얼마나 실천성을 답보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에 있다고 본다. 고등종교간의 사상적 영적인 '천상의' 대화가 자칫 가난과 억압이라는 이 지상적 삶과 유리되어 종교성의 이름하에 민중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과 현실에 대한 변혁담론이 빠진 내면의 영역에 치우쳐 있지 아니한가에 대한 비판이 그것이다.
필자는 이런 비판이 변박사의 종교해방신학에 대한 오해임을 밝히고, 동서신학포럼에서 제기된 제 3세대 신학자들의 비판적 담론을 좀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이 논쟁에 대한 응답으로서 제시한 2세대 신학자인 이정배 교수의 '얼'중심 기독론과 최범철 선생의 부자유친의 신학이 한국적 토종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창조적인 작업이지만 자기 존재의 변혁의 우선성과 실천의 뒤따름이라는 도식이 자칫하면 변박사가 피하고자 했던 '존재신비주의'와 '자폐적 초월주의'라는 환원주의에로의 길에서 나오는 데 어려움을 지닐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이러한 나의 주장에는 변선환 박사가 실천성에 대해 매우 중시했다는 것과 우리가 참고로 하고 있는 80년대 중반의 기독교와 불교와의 대화 및 아시아 신학의 형성에 관한 논문들과는 달리 정치부흥사들의 정죄를 받고 이단시비와 더불어 감리교로부터 축출을 당한 90년대에 있어서 그분의 관심과 방향이 새롭게 달라졌다는 나의 신념에 기인한다. 특히 서거 1년전의 "민중해방을 지향하는 민중불교와 민중신학"(1994)은 변박사가 지향하던 속마음과 학문적 지향성의 진심이 확연히 드러난 결정판임을 필자는 여기서 제안하면서 후 세대가 이를 '징검돌'로 하여 다른 징검돌을 놓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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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평화실천과 영적 수련으로서 비폭력 대화 :: 2010/06/11 21:59
일상의 평화실천과 영적수련으로서 비폭력 대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요10:10)
목회는 신학교에서 예배, 교육, 친교, 봉사, 선교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그것들 각각이 잘되면 목회가 잘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마치 학교에서 국어, 수학, 영어...등의 교과목들을 잘 하면 사회에서 온전한 그리고 성취한 인간이 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경우로 말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깨닫는 것은 삶이나 영적인 것은 이런 파편화된 것과는 다른 그 어떤 통전적인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성장(도덕적이든 영적이든)은 그러나 성취와는 상관없이 타존재와 '연결되어 있음'(being connected)이 주는 안전, 친밀함, 신뢰, 두려움없이 거저 주기와 받기 등의 존재적 감각에서 일어난다. 어떻게 보면 배움이란 존재하는 감각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목회가 교회의 기능적인 일에 몰두하여 존재하는 감각을 상실하면서부터 반복은 있되 존재하는 감각을 상실하는 경우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삶의 불확실함과 불안전함에 대응하여 영적인 것을 성취나 힘의 소유로 연관되어 이해할 때 존재하는 감각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감각은 강하고 굳센 영역에서가 아니라 약하고 여린 상태에 대한 자기 개방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늑대'와 '도둑'이 있는 세상 현실에서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 '양'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게 마땅한 일일까? 더구나 힘으로 자기 방어하지 않은 양이 온전한 생명을 얻고 더 나아가 '충만한' 생명을 넘치게 얻음은 가능한 일인가? 사실 우리는 그가 농부든, 학자든, 정치가이든, 시민사회활동가이든 아니면 심지어 목회자이든 간에 직업과 학력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갈등과 싸움 그리고 분노를 다루는 데 있어서 동일한 태도들을 취하는 것을 보게 된다. 힘(그것이 지위, 권력, 정당성의 논리, 신체적 폭력이든간에)으로 맞서서 대응하기 아니면 회피하거나 굴복하기가 그것이다. 처벌, 보상, 수치, 죄책, 의무, 복종 그 어느 것도 아님으로 인한 삶의 풍성함을 양과 같은 비방어적인 삶이 누릴 수 있다는 게 환상처럼 느껴진다.
다르게 말해보자. 우린 생각하는 신이 아니라 활동하는 신에 대해 얼마큼 마음이 다가 서 있는가? 즉 신이 사랑이요 자비로운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머리로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가슴에서 체득되고 삶의 세계에서 자비와 사랑의 현실적인 작동이 그대로 얼마나 느껴지는가? 비난하지도, 비판하지도 벌하지도 않고 선물로서 나와 타자가 그대로 수용되는, 사랑과 자비가 현실(reality)가 되는 존재방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비폭력(혹은 공감적) 대화의 중심 목적은 타자에 대한 온전한 경청과 자비로운 줌이 발생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타인과의 연결-그리고 신적 자비의 에너지와 연결-에 초점을 둔다. 바로 그 경청과 줌은 머리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가슴으로부터 나온다, 그 가슴으로부터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게 자연스럽게 봉사를 한다. 이는 의무, 복종, 체벌의 두려움, 상에 대한 희망, 죄책감이나 수치심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본성, 서로 주는 것을 즐기는 강력한 본성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것을 힘과 지배에 대한 사회화로 인해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의 실재를 지성화, 추상적인 개념화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에게는 거룩의 경험을 옯고 그름의 패러다임속에 머물러 있음으로 갈등, 에너지의 소진을 경험한다.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 7:12)는 추상화, 개념화에서 신의 자비의 실재의 역동성을 일상에서 체험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그것은 마태복음 5장의 일상에서 비폭력 수행- “마음의 가난, 슬퍼함, 온유함, 옳은 일에 굶주림, 자비를 베품, 마음이 깨끗함, 평화를 위해 일함, 옳은 일로 박해를 당함-이 신의 자비를 실재와 현실로 경험하는 자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의 체험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비폭력 대화는 일상에서 하나님 통치의 삶에 대해 즉, 하나님 자비에 연결하기에 관심한다.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처럼 "가운데 있음(among-ness)"이라는 관계성(연결하기)이 비난, 위협이라는 강한 강요/요구의 방식이나 조언, 충고, 가르치기 등의 부드러운 강요/요구의 방식이 아니라 단지 연결하기를 통해 변화가 일어난다는 놀라운 확신에 기초한다. 하나님 나라는 성서학자가 주장하든 개념상의 공간이 아니라 역동성/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비폭력 대화는 연결하기를 통해 긍정의 에너지원(源)인 욕구(needs)속에 스며지고 느껴지는 신성함의 실재 곧 ”Isness, Being fully present"한 거룩한 분의 경험으로 진리와 은총으로 충만하게 된다. 여기서 잃은 자/약한 자가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해지는 길이 열린다. 여기서 갈등은 더 이상 문제(a problem)가 아니라 ‘밭에 뭍힌 보화’요 영적인 것의 잠재성을 깨닫는 통로가 된다.
신의 자비는 우리 실존의 터전이고 근본 토대이고 이것에 대한 감각은 내면의 욕구-일치, 평화, 조화, 자유로움, 활력...등을 통해 경험되고 그것을 보는 메신저는 느낌(욕구충족의 느낌 혹은 욕구충족을 하지 못한 느낌)에 의해서이다. 이 느낌과 욕구의 강력한 에너지를 볼 때 그것들의 근거가 되는 신적인 자비를 끌어 올리는 ‘속에서 나오는 샘’에 의한 다함이 없는 풍부함을 경험한다(두레박에 의한 희소성이 아니라). 이 신적인 자비라는 실재는 생명, 삶에의 연결을 보증하고 느낌과 욕구를 통해 현실화(actualization)된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연결됨에 의해 이 풍성한 신적 에너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이 신적인 자비 에너지를 볼 뿐만 아니라 맛보고 느끼며, 인간과 연결되었을 때 사랑받는 신적인 실재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면 신은 내게 매우 살아있다(being fully present). 지금 여기의 현실감각과 신적 자비의 실재의 감각은 동시에 노출된다.
과거의 전통적인 영성은 내면적 영성 (the spirituality-within-selfness) 곧, 자아내면으로부터 나오는 에너지가 사회변화를 창조할 것이라고 “앉아 있는 영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사시키는 영성(radiating spirituality)은 지금까지 역사에서 소수의 성취자를 제외하고는 일반 대중은 실패한 엘리트 영성이다. “사이에 있기(among-ness)"에서, 앉아서가 아니라 움직이며 연결하기를 통해 오는 ‘역동적 영성(dynamic spirituality)'은 사람들을 삶에 관여하게 하여 자신의 성장과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을 통해 감동(초월)이 일어나게 하고 삶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한다.
비폭력 대화는 신의 자비에 기초하기에 처벌, 보상, 수치, 죄책, 의무, 복종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연결하기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고 풍성함을 경험하며 선물로 생을 만끽한다. ‘보기에 좋았다’는 삶의 실재의 경험 속에서 자신과 타자를 선물로 경험한다. 어느 주어진 순간에 당신 안에 살아있는 것-욕구-을 노출하는 것과 다른 목적이 없이 단지 벌거벗어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노출할 때 그건 선물이 된다. 자신과 타자에 대해 비난하지도, 비판하지도 않고 방어함도 없이 그 순간에 온전히 있게 된다. 이러한 '온전히 있음(being fully present)'은 나에게 있어 신적 사랑을 드러내는 길이 된다.
비폭력 대화를 통해 깨닫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는 방식에 달려있고 이는 어떻게 다른 사람의 메시지를 받는가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공감적으로 받는 것, 그 사람 안에 살아있는 것과 연결됨, 판단하지 않음. 상대에게 살아있는 것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을 단지 듣기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비폭력 대화는 기독교가 사랑이 무엇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단지 드러낸 것이다.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판단받지 않도록 판단하지 말라.”
그리고 폭력은 우리가 어떻게 교육 받았는가 때문에 오는 것이지 우리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고 비폭력 대화자는 믿는다. 우리는 신학자 월터 윙크에 따르면 약 8천 년간을 우리의 자비로운 본성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 폭력을 즐길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교육받아왔다. 그 뽀빠이와 부르토의 ‘결투신화’처럼 오래전에 인간본성에 대해 발전시켜온 신화에 의해 우린 교육(사회화, 프로그램화)받아왔다. 그 신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악하고, 자기중심적이라는 신화, 선한 삶은 악한 힘을 부셔버리는 영웅적 힘에 대한 것이라는 신화, 생은 희소성(scarcity)에 근거한다는 신화이다. 윙크는 어떻게 지배 문화가 억압을 유지하기 위해 신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해 썼다. 그것이 왕과 사제들이 종종 가깝게 연결된 이유이다. 왕은 억압을 정당하기 위해, 처벌, 지배 등등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거룩한 책을 해석할 사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린 오랫동안 파괴적인 신화론의 지배하에 살아왔고 그 파괴적인 신화는 어떤 언어를 요구한다. 그 신화는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만드는 언어를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간에 도덕적 판단의 입장에서 사고하기를 배워왔다. 우리는 우리 의식 속에 옳은, 그른, 선한, 나쁜, 이기적인, 비이기적인, 테러리스트, 자유 투사와 같은 말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이들 나쁜 것들 하나를 하면 마땅히 처벌을 받는 ‘마땅한 자격 '에 기초한 정의 개념이 이것들과 연결되어있다. 만일 좋은 일을 하면 그땐 마땅히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불행히도 약 8천 년간 우리는 그런 의식에 종속되어왔다. 이것이 우리의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핵심의 핵심이다.
비폭력 대화는 신의 자비가 실재라는 확신, 곧 신에 대한 온전한 사랑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계명을 실제로 사는 방식이기만 할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폭력적인, 지배적인, 강제하는 방식보다. 비폭력 대화는 우리를 우리 자연스런 본성에 보다 가깝게 하는 사고, 언어, 의사소통의 통합이다. 연결함으로서 우린 우리 안에 진실로 살아 있는 것 에 연결되어 서로의 참살이(well-being)에 기여하는 즐거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고난함께" 회보용 평화목회실습 원고를 위한 기존자료의 재편집 및 수정보완)
비폭력의 힘 :: 2010/06/06 10:01
비폭력의 힘
-도덕적 우주의 호(arc)는 길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를 향해 구부러져 있다- <마틴 루터 킹>
평화주의자이자 정치 과학자인 진 샤프는 수천 개의 비폭력 개입을 문서화하고 성공에 공헌하는 요소들을 분석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넓게 배포되었는데 과거 반세기에 정부를 변혁시키려는 지하 민주주의 운동들에게도 배포되었다. 1991년 미카일 고르바초프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멈추기 위해 사람들이 모스코바 거리로 나갔을 때 그들은 손에서 손으로 진 샤프의 글들을 복사해서 돌려보고 있었다.
비폭력은 긴 그리고 영웅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진 샤프는 기원전 494년 고대 로마에서는 평민들이 도시 밖의 언덕으로 철수해서 그들의 슬픔을 항의하였다고 썼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봉사를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며칠 후 통치자는 그들을 위해 좀더 나은 조건들을 제공하기로 동의하였다. 그 언덕은 거룩한 산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상원이 개혁을 막으려는 시도를 했던 기원전 258년에 군인들은 거룩한 산으로 행진하면서 시위하였는데 거기서 군인들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려고 위협하였다. 상원은 결국 군인들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간디가 1900년대 초에 남아공에서 한 시민 불복종의 실험은 정부의 불의한 관행들을 멈추기 위한 비협력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가 인도에 돌아왔을 때 자신의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발전시켜서 영국의 통치에 도전하기 위한 비폭력적인 저항을 사용했다. 1930년 그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에 대한 영국의 독점에 저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소금은 모두가 필요했고 가난한 이들은 허락이 된다면 스스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상품이었다.
그는 먼저 총독 어윈경에게 소금세법을 수정하기를 요청하였다. 그가 아무런 응답을 받지 않았을 때 간디는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댄디이 해안마을까지 240마일을 앞서 걸어갔다. 해안에서 그는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으로 나는 영국 제국의 터전을 뒤흔들고 있다."
인도 전체를 통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소금을 만들거나 불법적으로 샀다. 한 달 후, 간디는 감옥에 갔고 이 때 그의 추종자는 60,000명에 달했다. 소금 행진은 한 전환점이 되었다. 영국은 자신의 도덕적 권위를 상실하고 1947년에 그들은 인도를 잃게 딘다.
비폭력 행동들은 수동적이지 않으며 조심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 행동들은 많은 훈련을 조심스럽게 기획하고 용기 그리고 몽둥이로 때리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훨씬 더 강하고 잘 무장된 상대방을 직면하는 비무장한 개인의 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심리의 가장 깊은 수준 속에 통합시킨 한 도덕적 원리의 장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당신보다 분명히 더 연약한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하고 참으로 겁쟁이의 짓이라는 것이다.
간디는 사람들이 억압과 불의에 대항한 비폭력을 사용하기를 선택한다면 적용해야 하는 원리들에 대해 깊이 숙고하였다. 그의 삶, 그의 수많은 캠페인들 그리고 그의 저작들은 미국 남부에서의 민권운동,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의 종식 그리고 일련의 긴 독제 정권들에 대한 민주적 변화를 가져온 벨벳 혁명들에 대한 터전을 제공하였다.
간디는 이런 행동이 개념을 사티아그라하라고 불렀고, 이는 힌두어 "진리"와 "확고히 붙잡음"이라는 단어가 결합한 말이다. 마틴 루터 킹은 그의 기독교 신앙을 비폭력 행동에로 가져가서 비폭력의 힘을 성 바울의 사랑의 개념에 비교하였다. 킹은 또한 이것이 단순한 한 전략보다 더 위대한 것임을 보았다. 그것은 더 커다란 힘을 접촉하는 길이었다. 설교자로서 그의 위대한 기술은 다른 시민 불복종 행동들을 기독교와 남부 미국에 잇는 교회들에 견고한 기초를 작조 일관된 운동 속으로 가져간 것이었다.
알바마주 몽고메리는 로자 팍스가 1955년에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그녀의 자리를 내주는 것을 거부하여 체포되었을 때 세상의 뉴스를 탔다. 흑인들이 운동에 동원되면서 마틴 루터 킹은 그들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되었다. 1960년에 78개 도시에서 연좌농성이 있었다. 약 70,000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하였고 3,000명이 감옥에 갔다. 백인 회사에 대한 보이콧, 점심 계산대에서 연좌농성, 그리고 시위가 남부를 휩쓸었다. 사람들은 비폭력 시민 불복종의 훈련에 참가하고 조직적인 사람모집이 수천 명의 사람들을 좀더 운동 속으로 인도하였다.
마침내 1964년 대통령 린돈 존슨에 의해 시민권 조항이 통과되었고 1965년에는 투표권 조항이 뒤따라 통과되었다. 미국 민권운동의 전설중의 하나는 "우리 승리 하리라"는 노래이다. 이는 전 세계에 걸친 모든 나라에서 평화와 정의를 위한 투쟁의 성가가 되었다.
참고
* Bombay Sarvodaya Mandal (간디 서적 센터): www.mkgandhi.org/
* Mahatma Gandhi Foundation: web.mahatma.org.in
* A Force More Powerful and Bringing Down a Dictator: www.aforcemorepowerful.org
출처: "흘린 피로 족하다"(Enough Blood Shed) 에서

일아 변선환의 말기 종교해방신학의 새로운 전환의 고찰.hw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