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 AVP 입문워크숍(8/12-14) 안내 :: 2010/07/1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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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
(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AVP) 워크숍 안내
이 프로그램은 매우 실제적이고, 무엇보다 본 프로그램의 핵심인 "변혁시키는 힘 transforming power" (기독교 용어로는 성령이나 내면의 신성한 빛/에너지로도 번역할 수 있음)에 대한 감각을 체험하면서 자기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귀중한 통찰과 도구를 제공합니다. 이 워크숍의 진행자가 되면 또한 회복적 정의/실천과 관련된 다른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와 수용 및 변형이 더욱 자유로워지고 풍성해집니다. 자신의 본질적인 삶에 대한 영적인 갈망과 폭력적인 상황에서 비폭력적인 해결에 관심있는 분들 그리고 신뢰의 서클이나 공동체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길에 고민하시는 분, 또는 앞으로 어떤 그룹이나 아이들을 지도할 현장의 활동가나 교사로 의욕을 가지신 분들께 적극 권합니다. 참여형 워크숍이어서 15명 내외의 참가자를 받고 있어서 선착순으로 등록을 받고 있습니다. 더 자세한 것에 대한 궁금증은 사무실로 문의 바랍니다.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 AVP (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입문워크숍
● 일시 : 2010년 8월 12일(목) 오후 2시45분- 14일(토)오후 5시 ● 장소 : 인천 금잔디 수녀원(자세한 안내는 추후 다시 공지합니다) ● 대상 : 평화에 관심있는 성인 누구나 ● 주제 : 체험을 통한 배움으로 삶을 변혁시키는 평화훈련(AVP) 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 Basic workshop(Level one; 입문워크숍)
● 주최 : AVP한국활동가모임 ● 참가인원 : 15명내외 ● 참가비 : 20만원 (대안학교 교사는 일부 장학금 제공) ● 내용 : AVP 입문 워크숍은 3일간의 체험을 통한 배움으로 단계별로 개인 간의 갈등 해결을 제공한다. 소그룹과 일대일 상호활동을 통한 이들 경험은 실습을 통해 다음에 기초한 공동체와 신뢰의 감각을 구축한다. 1. 일상 속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일들을 순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중에는 겉으로 혹은 숨겨진 크고 작은 폭력들과도 만나게 된다. 각 사람의 지각력, 의사소통의 여지, 갈등 해소의 능력과 감정의 높낮이에 따라 순간적으로 반응 하게 되고 많은 경우 상처와 후회가 따른다. 프로젝트 목적중의 하나는 모든 참석자들이 폭력과 갈등을 해소하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는 연습을 통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변화시키는 힘 Transforming Power>에 의해 평화로운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내용과 과제는 매우 진지하지만 그 과정은 즐거움과 자발성을 도입한다. 2. 워크숍은 책상 없이 원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서 진행되며 모든 참석자의 능동적 참여로 과제가 주어지고 혼자, 파트너별, 소그룹별 표현, 만들기, 역할극, 침묵, 놀이와 웃음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되며 주제는 진지하지만 과정은 즐거운 방법들이 도입되고 자발적이고 평화로운 수단으로 결단하는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3. 지금까지 한국에 소개된 기존의 갈등해결 방법론이 주로 피교육자가 갈등의 정의, 각 소주제영역에서의 그 지식과 기술을 알아가는 내용중심형과는 달리 AVP 프로그램은 사전에 내용에 대한 숙지보다 이미 자신이 가진 고민과 욕구를 근거로 주체가 되어 서로의 자원으로부터 그 힘을 끌어내어 연결시키는 경험적인 과정중심형 방법론을 제안한다. 이는 재소자, 폭력희생자, 갈등당사자들의 경험의 눈높이로부터 자발적인 에너지를 끌어내는 독특한 방식으로 강력한 변혁의 힘과 지원공동체를 만들어내게 된다. ● 일정안내(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서 다운로드: http://cafe.daum.net/avpkorea |
폭력과 전쟁에 대한 작은 실천- 작은 희망의 징조들 :: 2010/07/15 09:50
작은 희망의 징조들
4월에 우리는 프랑스에서는 해바라기를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해바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역의 농부들은 이미 수천 개의 씨앗들을 심어왔고, 그들이 아무것도 없는 맨 언덕을 볼 때도 이미 해바라기들을 볼 수 있었다. 해바라기들은 거기 있다. 그들은 단지 태양, 열, 비 그리고 7월의 조건만을 결여할 뿐이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틱낫한, 살아있는 붓다, 살아있는 그리스도-
희망의 징조는 해바라기의 연약하고, 놀라게 하는 작은 씨앗과 같다. 내가 평화의 문화에 대한 씨앗을 볼 때 이미 전쟁 지대의 사막에서조차 일어서 올라오는 녹색의 발아들을 본다.
국제 관계에 있어 시민사회의 점증하는 영향력은 희망의 주요 징조이지만 내 삶의 대부분은 유엔의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라 매일의 일상사의 작은 영역에서 보낸다. 희망의 징조들 모두는 평화의 문화에 대한 작은 표현들에서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시민사회의 공공의 목소리는 수천 개의 활동에 기초한다. 각각은 틱낫한의 해바라기처럼 작고 결과가 없는 것처럼 외형적으로는 보인다. 각 행동은 우리가 우리 사회로 하여금 갈등의 도전에 대응하기 원하는 방식을 형상화하는 존중, 돌봄 그리고 협력의 습관들을 형성한다.
소수의 해바라기들
빅토리아라는 내 고향마을에는 작은 한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아침에 가두에 서서 아이들이 도착할 때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환영하고 있었다. 전체 스텝들은 어떻게 학교를 환영의 공간으로 만들 것인지에 있어서 훈련을 받았다. 여러 다른 학교에서 아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한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위해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었고 우간다에 있는 학교와 미술품을 교환하교 있었다.
비록 교회 출석은 캐나다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었지만 교회의 사회 행동과 봉사에 대한 투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교회들은 일요일에는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중 밤에는 사람으로 차고 그 때는 집없는 이들이 추위로부터 와서 식사를 대접받고 쉼터로 있게 된다. 교회들은 베트남 징병 모집자들이 70년대에 했던 것처럼 캐나다에 오는 미국 군대 저항자들 주변에 모이고 있다. 성소 운동 (the sancturary movement)은 미국이 징병을 회복시키는 경우를 위해 대비하고 있었다.
토론토는 "아기를 위한 소년들(Boys for Babies)"라고 불리우는 6학년 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 각 교실은 1달에 한 번 교실에 오는 2살 이하의 영아가 소개되어진다. 학생들은 여러 달 동안 아기의 성장과 발달을 다룬다. 그들은 아이들의 어휘, 음식, 그리고 이정표들의 입장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 배운다. 교실에 대한 요구는 너무 커서 교사들은 아기가 있는 자원 부모를 충분히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한 뉴욕 택시 운전수인 호삼 압달라의 이야기는 2005년 8월에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30살인 이 분은 택시 트렁크에 놓고 내린 한 유대 상인에게 200,000달러 가치가 있는 다이아몬드로 채워진 자루를 돌려주었다. 압달라는 기자들에게 최고로 좋은 부분은 그의 아버지가 좋은 무슬림으로서 기대된 정직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해 그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고 말하였다.
용서 프로젝트 Forgiveness Project는 가슴에 증오를 심지 않기로 선택 하지만 끔찍한 잘못을 용서할 능력을 발견하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한 웹사이트이다. 영국의 한 국회의원인 안토니 베리 경은 1984년 아일랜드공화군(IRA)가 영국 브링톤에서 보수 당 당원대회를 주최하는 호텔을 폭파했을 때 살해되었다. 조는 보이지 않는 적을 비난하는 것을 멈추기로 선택하고 2000년에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죽인 남자인 패트릭 맥기를 만나는 치유의 여행을 시작했다. 그들은 세 시간 대화했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기 위해 있는 노력을 다했다. 둘 다 지금은 아일랜드가 "고뇌기"라고 부르는 시기로부터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통해 작업하도록 돕는 프로젝트에 관여하였다. 그들의 이야기가 용서 프로젝트 웹사이트에 있다.
관대함, 정직, 자비 그리고 유머라는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은 정글이라고 믿게 하는 폭력, 분노 그리고 두려움의 이미지에 반대한다. 친절함이란 행동 모두가 보고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세상은 정글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양육하고 쉼터를 주는 열대림으로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존중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당신의 신앙을 가난한 자와 불이득을 당하는 이들을 돕기 위한 줄서기에 놓기, 고정관념을 깨기, 정직하기 그리고 웃을 때를 알기는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심는 씨앗들이며 그것들이 희망의 추수를 가져오게 된다.
적을 비난하고 비인간화하는 데서 우리의 마음은 닫혀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서의 일부를 잃으며 우리는 문제의 부분이 된다. -Jo Berry-
용서 프로젝트 Forgiveness Project: www.theforgivenessproject.com
("흘린 피로 충분하다"에서)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 2010/07/11 09:30
폭력에 대한 예수의 비폭력 저항
-샬롬 통치의 현실성의 수행-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우리 현실에 있어 새로운 샬롬의 통치의 실재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그에 대한 삶으로서의 철저한 헌신은 새로운 능동적인 비폭력과 사랑의 공동체를 탄생하였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함께 형성해 나간 이 비전은 당시 유대교의 신을 만나는 길로서 성전/회당에 의한 거룩한 제의적 공동체나 대안의 주류였던 시온니즘의 무력적 투쟁이라는 열심당 혹은 타락한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정결과 '빛의 자녀'로서의 영적인 수행을 추구한 제 3의 무리인 엣세네파와도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변혁적인 현실을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모시는 것이되, 좀더 적극적으로 산상수훈의 공동체 이상을 따라 삶에서 폭력과 증오의 독을 뽑아낸 적극적인 저항과 변혁의 방식, 곧 자비의 현실화라는 방식으로 통해 "마음이 교만한 자를 흩으심, 권세자를 내치심, 보잘 것 없는 이의 높이심, 배고픈 자의 대접과 부요한 사람을 빈손으로 만드심'(누가복음의 마리아 찬가)과 같이 삶에서 실제적인 변화의 증상을 몰고 오는 새로운 현실성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예수 공동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무기를 들고 대항을 하진 않았더라도 그가 몰고온 새로운 변혁적 현실로서 삶의 방식과 타자와의 관계방식은 이미 통치자에게 위협이 되었고 그는 현 체제의 전복자로서 이미 낙인이 찍혔고 결국은 다른 반란자들 사이에 정치적으로 형집행을 당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행위가 지금의 우리 대부분이 추종하고 있는 개인 영혼의 구원이라는 영적 수행의 모범이 아니라 가장 비폭력적인 그의 비전과 실천은 역설적으로 가장 정치적인 위협과 도전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그러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이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의 핵심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에 대한 혁명적인 통찰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영혼의 내면에서 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화해와 비폭력의 생활실천-"회당과 성전이 성소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성소(sanctuary)이다"-은 정치사회문화에 샬롬 통치의 증거(witness)자로서 거룩함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의 샬롬 통치의 새 현실성이 얼마나 혁명적인 특성-무리가 놀라 새로운 권위였다고 고백함-을 지녔는지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명백해 진다.
샬롬 통치의 현실성에 대한 가장 극명한 상징적 실마리는 그의 식탁교제(table fellowship)이었다. 정결법을 어기는 그의 추방된 자들과의 식탁교제는 신적 비전의 철저성과 아버지이신 신의 사랑의 팔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모두를 한 테이블에로 환영하고, 폭력의 한 형태로서 어떤 종류의 배제에도 비판하는 세계관을 창조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사랑(inclusive love of God) 에 대한 예수의 비전과 헌신의 핵심을 보여준다. 그가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그 당시 사회가 배제한 이들과 함께 공동 식사를 함으로써 가름과 배제의 폭력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을 실천하였다. 예수의 비전에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모두를 포괄하시는 사랑에 의해 유지되는 한 몸의 모든 지체들이다. 이러한 포괄적 비전은 서로를 신을 한 아버지로 둔 형제자매로 만들고 따라서 '적대자'를 형제자매로 감싸고, 약자에게 힘을 부여하는 비폭력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그의 샬롬통치에 대한 비폭력적 실천은 타자와 주변자(the marginalized)에 대한 보편적 치유에 대한 그의 비전에 의해 심화된다. 생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타자의 기본적인 복지에 대한 희망을 포함한다. 예수는 항상 돌봄의 서클 바깥으로 내던진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치유의 문을 통하여 공동체 속으로 되돌아오도록 초대하신다. 그는 공동체의 복지와 안녕은 각각 구성원의 복지와 안녕과 상호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니 오히려 가장 약한 자의 안녕과 복지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예수는 개인의 불행과 병이 폭력적 지배와 배제의 이념으로 작용한 불행과 병에 대한 인식 개인적 죄의 잘못이나 그 결과가 아님을 가르쳤다. 눈먼 소경은 자기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요 9:3)이고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함"(요11:40)이라는 주장을 통해 예수는 치유와 거룩한 힘을 세상의 거부 받고 접촉할 수 없는 이들에게 확대하였다. 그들은 징벌받은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비의 수여자라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주체인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누구든 복지의 서클밖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치유와 회복은 단순히 육체적 몸의 회복만이 아니라 공동체로 불러들임으로서 상호 연결(interconnection)에 있다는 것고 이 상호연결이 거룩함의 알짬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셨다. 상호연결이 있는 곳에 신이 있고, 상호연결이 거룩의 길임을 각인시켜 주신 것이다.
예수의 능동적 비폭력을 통한 샬롬의 통치의 또 다른 예는 그의 설교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와 그분에 대한 접근의 길에 대한 이해에 있다. 십계명에 아직도 흐르는 저 위 하늘의 유일한 만군의 신이자 '우리 신앙 공동체'내에서 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것을 더욱 철저화시켜 그는 신이 사랑이시고 무제한적인 타자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안에서 본 철저한 사랑의 종류는 인간의 삶이 보복하시는 하나님에 아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그것은 성전의 공간을 넘어 또한 우리의 일상과 세상에서 전일(全一)적으로 하는 이 지상적 수행(mundane practice)로 초대하셨다. 그 핵심은 "양이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는"(요 10:10) 길에 있다. 이것이 그 근본 뿌리에 있어서 폭력을 정화시키는 영성이다. 늑대와 여우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발톱을 날카롭게 하여 자기 방어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서 있으면서 모든 형태의 죽음과 죽임 그리고 폭력에 확고한 대항을 하며 생명을 위하고 이것이 충만하도록 삶을 투신하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예배의 날, 안식일은 따라서 인간 공동체를 섬기는 데 있어야 하며 사랑의 하나님과의 이러한 관계를 반영해야 한다. 치유가 필요한 자가 있을 때 치유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 응답하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 예수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시한다. 그러한 특권적인 날, 성소와 같은 헌신하는 장소에서 어떤 종류의 활동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 가에 달려있다. 예수는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한 예배의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그는 또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이들의 공동체 삶의 질에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진실로 한 테이블을 공유하며 모든 이의 복지를 추구하는가? 예수에게는 사람들이 예배를 적절하게 볼 수 있기 전에 공동체내에서의 화해에 대한 긴급성이 먼저이며 이 화해가 진정으로 예배라는 사실을 주장한다. 예배하기 전에 이웃과의 갈등이 있다면 뒤로 돌아 즉시 가서 먼저 화해를 이루라는 것이다(마 5:23-24).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포괄시키는 보편적 사랑-비와 햇빛을 누구에게나 허용-에 근거하여 그에 대한 유일한 응답의 길로서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랑이 사랑을 가져오고 평화가 평화를 가져온다. 증오와 배제가 거룩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첫 번째이자 궁극적인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인 것이다.
지금까지 진술을 요약하자면 예수는 식탁에 모두를 포함하는 것, 모두의 복지와 안녕을 회복하는 치유, 그리고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에 대한 삶으로의 응답으로서 예배라는 새로운 제자직으로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열어주셨다. 이것은 자비, 겸손, 비-보복, 용서, 진실추구, 화해 그리고 자신의 적을 포함하여 타자에 대한 사랑에 헌신하는 생활양식을 의미한다. 이것의 단초는 기부, 금식, 기도, 신뢰,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하나님의 지배에 두는 것으로부터 성장한다.
예수가 제시한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그 길이 쉽거나 성공적인 실재가 금방 나타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예수는 우리가 극도로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 놓여져 있으며 당신 자신이 그것의 희생 제물이 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의도는 완전한 유토피아 사회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꿈을 꾸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여부와 상관없이 신실하게 폭력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도록 초대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의 사역에 사랑으로 응답하면서 우리는 성공하는가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응답하며 그 과정에 있어서 필요하다면 자발적인 고난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비폭력적인 세상을 건설하는 중요 요소들 중에는 물리적인 폭력, 법적 소송 그리고 강요된 징집(마 5:39-42)을 대면함에 있어서 보복적인 활동을 종식하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는 전체를 희생하는 한 그룹이나 한 국가의 파괴적인 자기-이익의 폭력적 수행에 대해 능동적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능동적인 비폭력에로의 부름은 그 응답이 폭력적인 행동과 맞대응하기라는 순환의 방식이 아니다. 그의 샬롬통치의 제자직에로의 부름은 누가 관계를 깨뜨리는 데 책임이 있든 지간에 화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라는 정당한 대의하에서 폭력에 대항한 보복과 징벌이 아닌 치유와 관계의 회복이라는 화해를 제시한다고 해서 타협적이고 순응적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가 비폭력적인 반면에 그는 동시에 확고하게 대결적이었고 그의 대결적인 행위는 위협적인 결과를-전복과 변혁을- 가져왔다. 그는 일반인이 그를 묘사하듯이 그의 단순한 선행이 악마적인 사람들의 악행들로부터 반대를 일으키게 된 타협적인 희생자는 결코 아니었다. 복음은 예수의 비폭력 수행이 결코 수동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아님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어떤 실천에 대항하는 도전을 개시하도록 하는 그런 확고한 끈기가 있는 변화의 실천이었다. 그는 대중을 선동하고 정치가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몇 가지 점에서 예수는 그의 "혁명적 비폭력"(revolutionary nonviolence-존 하워드 요더의 용어)과 그가 살고 있던 죄 된 세상의 잔혹한 폭력 간에 다가오는 충돌을 명확히 보고 있었다. 이미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의 결정은 비폭력에 대한 그의 헌신의 깊이를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의 반대자가 그를 거기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공개적으로 그들이 그의 삶을 위협하고 있음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폭력의 아가미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모한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신과 그에 대한 무제약적 책임성으로서-성공여부와 관계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행위였다.
죽임과 죽음을 촉진시키고 죽임과 죽음의 구조를 지지하는 체제에 대해 기꺼이 자발적인 고난을 통한 죽음의 수용을 통해 죽임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동맹을 단절시키는 신의 명령에 대해 신실한 응답의 표현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비폭력적인 수용에서 예수는 치유하고 해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정확하게는 그가 경험한 증오와 폭력의 살인적인 지배/통치를 역전시켰다. 예수는 저주받고, 주먹으로 맞고, 조롱받았다. 심지어 고뇌가운데서도 그는 그에 대해 사용된 똑같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는 배신당하고, 친구에 의해 거부당했으며, 징벌 받았고, 옷을 벗기웠으며, 벌거숭이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비폭력적인 응답과 자발적인 고난은 새로운 각성과 신의 뜻에 대한 분명한 '눈에 비늘이 벗겨지는' 명료함이라는 부활을 가져온다. 신의 고난과 예수에서 나타난 신의 보편적 사랑의 철저성은 새로운 영혼의 불꽃을 점화시켰다. 그리스도의 영은 제자들에게 옮겨져서 그들은 이 화해와 평화 만들기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나타난 폭력에 대한 신적인 반응에 대한 그의 제자들의 이해는 이제 자신을 얽매였던 죽음과 두려움을 넘어서 사랑과 진리의 영의 부여받음과 선물로서 자기 생에 대한 자각이라는 신념공동체의 탄생과 더불어 새로운 사명으로서 평화를 만드는 인간 공동체에로의 부름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 일어나게 되었다.
2010.7.10.
비폭력 시민세력이 대안을 제시하다 Nonviolent Civilian Forces Offer an Alternative :: 2010/07/06 19:02
Notes: In order to see clear writings, please cleck the each picture.
Then you will see the whole sentence clearly.




우리의 진정한 적은 폭력과 증오 그 자체이다 :: 2010/07/06 10:07
우리의 진정한 적은 폭력과 증오 그 자체이다
박성용 비폭력평화물결대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도 어느 듯 60년이란 세월을 맞았다. 천안함 사건도 이제 100일이 지나고 있다. 민족을 고통의 심연 속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들은 그러나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수많은 과거의 진실들은 묻혀 사라져가고 있으나 상처는 현실로서 남아있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고성능 초계비행기와 여러 구축함들이 개입된 한미연합 군사작전기간에 터진 천안함 사건은, 당초 정부의 자신 있어 하던 북한소행의 주장들에 대해 수많은 의혹들이 제기되고, 유엔 안보리에 회부되었으나 기대만큼 국제적 해결의 방법이 나오지 않고 있다.
군사평론가도 아닌 평화운동가로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무력분쟁의 사건들이 갖고 있는 일정한 패턴이다. 그것은 원인과 상황적 구조에 대한 분석 없이 모든 지적인 노력과 에너지를 '누가 저질렀는가?'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한 '보복 히스테리 증상'에 관한 것이다. 한국전쟁, 9.11 그리고 천안함 사건 등이 보여주는 것은 누가 이일을 저질렀는지 이론을 세우고-여기에는 온갖 전문가들이 동원된다― 지목된 상대방은 적/악마로 선전되며, 적/악마로 이름 붙여진 이들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대응방법은 군사적 보복이며 그들의 대량 희생은 정당화되고 희생된 아군은 반대로 영웅화된다. 고통과 희생이 상대방을 가르칠 것이라는 가치관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증폭시킴으로서 이에 대한 준비와 경각심 그리고 폭력적인 힘에 의존하는 안보/안전에 대한 신뢰가 전체 사회를 휩쓸게 된다.
사실상 그 결과는 더욱 심각한 안보환경의 위기와 비효과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맹신에 가까운 이런 보복 히스테리와 폭력 각본에 대한 집착은 이미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사회화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보았던 뽀빠이와 부루트스 연재만화가 주는 교훈은 우리의 삶은 전쟁지대이고 상대방과의 유일한 게임은 결투이며 약자인 올리브는 부루트스와 협상하거나 설득의 방법을 한 번도 시도하지 못하고, 과거의 폭력경험으로부터 아무런 대안적 방법을 찾아내지도 못한다. 오직 부루트스의 폭력에 맞서는 유일한 해결은 상대방이 지닌 똑같은 폭력적 힘을 더 많이 가진 정의의 사도 뽀빠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뽀빠이(이는 정치에서는 국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올리브의 자율성과 상관없이 보호해 주었다는 이유로 사랑을 강요해도 그것은 정당한 대가로 이해될 뿐이다.
보복으로 맞서는 것이 용기이고 약자란 불행한 것이며 강자를 다루는 방법은 힘을 축적하거나 그 힘을 빌리는 것이라는 '폭력의 각본'을 우리는 내면화하면서 자라났다. 그것이 정치군사적이든 개인의 수준이든 혹은 그룹간이든 이 폭력의 각본에 의한 우리 영혼과 사회구조의 프로그래밍은 보편화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폭력의 맞대응에 대해서는 그 효능에 대해 한번도 의문시하지 않으면서도 비폭력에 대해서는 그 효험성을 입증하라고 사람들은 질문하며 의심하게 된다. 간디는 10만밖에 안되는 소수의 영국군이 어떻게 3억의 인도인을 지배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수의 특권층 몇을 제외하고는 4천만 이상이 평화를 염원하는 데 어째서 남북문제는 안 풀리는가? 우리가 폭력의 각본에 길들여짐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다. 따라서 대안은 아주 쉬운 것이다. 저항하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협조만 안하면 되는 것이다.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의식적으로 폭력의 각본에 협조만 안하고 살면 그 폭력 시스템과 폭력 문화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우리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입장에 대해 과잉교육을 받은 상태이다. 전쟁지원을 하는 정치인, 법어긴 이를 처벌과 박탈이라는 감방으로 보내는 판사, 전쟁대본의 영화사, 전쟁게임 제조업자, 군사학을 가르치는 수많은 대학, 아이들의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용인하는 부모, 전쟁영웅을 가르치지만 비폭력평화운동의 역사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 교사들로 사회는 가득 차 있다. 아니 1년에 26만 명씩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하고 사회로 배출되는 군제대자들이 홍수처럼 사회 속으로 밀려들어오고 있다. 이에 반해 평화활동가들은 얼마나 되는가?
사랑, 자비, 희망, 가능성, 자기 초월 등이 우리의 본질적인 자아이고 사회적 안전의 근거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에너지라는 비폭력적인 평화교육이 어린이들에게 가르쳐지지 않는 한 우리에겐 언제나 전쟁과 폭력의 다른 사건들은 이미 예고되어 있다. 평화는 과정이기에 갈등해결방법도 평화이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들의 물줄기의 방향을 바꾸려면 다음과 같은 간디의 말을 새기고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사랑에 이르고, 평화를 통해 평화에 이를 것입니다."
2010.7.6.
(관악구 봉천동 두리하나공부방 소식지 "함께하는 세상" 원고)



